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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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4.3.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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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403특집-정지영.hwp

세계사회포럼의 전망과 운동의 과제

정지영 | 정책부장
세계사회포럼의 미래는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진 문제이다. 왜냐하면, 세계사회포럼을 둘러싼 많은 논의들은 세계사회포럼 그 자체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계사회포럼의 기반이 되고 있는 전 세계의 사회운동들, 대중운동들 자체와 이들 사이의 연대와 교통,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맞선 전 세계 인민들의 투쟁에 관한 전망들이 이 질문에 반영된다. 하지만 우리는 당연히 정해진 답을 내어놓을 수는 없다. 이 글은 세계사회포럼의 전망을 둘러싼 쟁점들을 살펴보고, 우리 운동이 이후 더욱 고민해야 하는 지점들을 던지기 위한 것이다. 이 글은 사회진보연대가 지난 해 세계사회포럼을 중심으로 세계사회운동들의 문제의식을 검토하려 했던 맥락과 연관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월간사회진보연대 통권 37호, 2003년 7·8월 합본호에 실린 특집 [신자유주의와 세계사회운동]을 참조하길 바란다.

세계사회포럼의 형성과 진행
1999년 WTO 각료회의를 중단시킨 시애틀 투쟁을 기점으로 세계적으로 확산된 투쟁의 방식은 주요한 국제회의에 대규모 대중을 동원하고,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WTO 반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라는 구호 아래 모인 운동주체들은 각각의 주제, 부문, 지역에서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맞서 투쟁해왔고, 다양한 참가 주제만큼이나 다양한 쟁점과 주장 또한 존재했다. 심지어 어떤 주장들은 자신의 이해에 갇혀 다른 것들과 상호 충돌하기도 했다(시애틀 투쟁에서 중국과 멕시코의 WTO 가입을 막기 위해 WTO 각료회의를 반대했던 미국의 AFL-CIO는 그 단적인 예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저항의 흐름은 그곳에서 멈추지 않고, 세계사회포럼을 낳았다.
세계사회포럼은 이 다양한 운동들이 서로 다른 경험들을 교류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히면서 공통의 인식을 확보하는데 기여했다. 이제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하는 다양한 운동들은 성별, 인종, 직업, 지역, 성적 지향, 장애 유무 등 여러 차이에 따른 각각의 운동들이 요구하는 권리가 상호 모순되거나 배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와 전쟁을 반대하는 공통의 지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세계사회포럼을 통해 운동들이 이런 지반을 만들어온 과정은 그 이전의 운동들(20세기 초반의 노동자운동과 정당운동 그리고 20세기 후반의 신사회운동이라 불리웠던 운동들)의 시도와는 매우 달랐다. 세계사회포럼은 공동의 강령이나 단일한 요구도, 어떤 총괄적인 상부구조도 만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세계사회포럼은 그 자체로 어떤 단일하고 특정한 입장을 대변하는 기구나 조직이 아니며, 또한 세계사회포럼을 대표할 수 있는 체계 또는 지도부도 두지 않는다. 세계사회포럼은 참가하는 단체와 운동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참가자들 또한 이를 존중해야 한다. 그리하여 세계사회포럼은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유일한 슬로건 하에서 '신자유주의와 자본의 지배 그리고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운동들에게 개방된 공간이다.
이전의 많은 운동들의 시도와 구별되는 세계사회포럼의 이러한 특징은 역사적이고 정세적인 이유에서 기인한다.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하는 운동들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다{{) 이 다양한 경향이나 스펙트럼을 몇몇의 큰 부류로 나누어 구분해보려는 시도들이 있다. 이런 시도들은 세계사회포럼 내부에서 실제 편을 가르거나 분파를 형성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세계사회포럼의 상황과 위치, 동학 등을 분석하는데 필요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4회 세계사회포럼에 대해 적극적이고 성공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켈리니코스(2003)의 경우,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하는 다수가 반-자본주의 운동가들은 아니지만 점차 그런 의식을 획득해가고 있다는 전제 하에 참가한 경향들을 '반동적(reactionary)', '부르주아적', '지방주의(localist)', '개량주의', '자율주의(autonomist)', '사회주의'로 구분한다(그 자신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적인 경향 중에서도 '혁명적인' 경향으로 정의한다). 세계사회포럼의 유명인사 중 한 명인 프랑스 출신의 아기통(2001)은 세계사회포럼을 통해 드러나는 지구적 정의운동(global justice movement)에는 세 가지 극이 있다고 말한다. '급진적 국제주의(자본주의와 민족-국가를 넘어서려는 듯 보이는)'와 '민족주의(주로 남반구 운동들의 대응방식)' 그리고 '신-개량주의(새로운 지구적 통치성을 추구하는)'. 포르투갈의 연구자인 보아벤투라(2003)는 기존의 정의방식이나 용어로는 세계사회포럼의 급진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분석틀을 가져야한다고 주장한다. '부재의 사회학'과 '출현의 사회학'이라 그가 칭하는 분석틀로 현재까지 명백하고 유지되어왔던 흐름을 상대화하고(부재의 사회학), 지금까지 무시되고 억압당했던 새로운 흐름을 드러내야 한다(출현의 사회학)는 주장이다. 피터 워터만의 [세계사회포럼과 지구적 저항과 연대 운동: 배경설명(The World Social Forum and the Global Justice and Solidarity Movement: A Backgrounder)]를 참조했다. 출처는 www.labournet.info/wsfbook2004/backgrounder.doc/view 이에 비해 윤소영은 "봉건적, 프티부르주아적·부르주아적, 프롤레타리아적(유토피아적, 혁명적) 반자본주의라는 [공산당 선언]의 분류법을 원용해 반세계화를 인민주의·공동체주의, 진보주의·코퍼러티즘, 아나키즘·마르크스주의로 분류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대안세계화 운동], 공감 참조.
}}. 이런 다양한 흐름과 이에 대한 분석은 세계사회포럼의 현재의 모습뿐만 아니라, 세계사회포럼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운동들이 가졌던 문제의식도 보여준다. 이것은 흔히 '구-좌파'라고 부르는 사회주의(혹은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역사에 대한 평가와 관계가 깊다{{) 이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평가가 필요하겠지만, 이 글에서는 주된 주제가 아니므로 간략한 언급으로 대체한다. 참조할 자료로 이매뉴얼 월러스타인의 [체계에 맞선 새로운 반란], 월간사회진보연대 통권 34호와 다니엘 벤사이드의 [새로운 국제주의: 제국적 전쟁과 세계의 사유화에 맞서], 월간사회진보연대 통권 41호가 있다.
}}. 이 운동들은 실제 커다란 영향력을 가졌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소련과 동유럽, 유럽의 사민주의 정당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민족해방운동, 남미의 인민주의 운동 중 많은 수가 정권을 잡았거나, 아니면 유의미한 대안 세력으로 인정받았다. 이 운동들 모두가 완전히 동일한 모습과 지향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민족-국가 단위를 기본으로 한 당을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이러한 당들의 연합과 연대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지양하고자 하는 방향성을 공유했다. 그러나 이 운동들은 실제로 사회와 세계를 변혁하지 못했고, 대중들은 이들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형태의 운동들이 분출했다. 아마도 (특히 서구에서) 주요한 계기는 1968년을 전후로 한 흐름일 것이다. 이 새로운 운동들은 20세기의 지배적인 운동, 즉 당과 노조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 애초의 약속과는 다르게 사회를 변혁하지 않았고(혹은 못했고), 오히려 다양한 억압과 이슈를 제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여성, 생태/환경, 인권, 문화 등의 주제를 제기하면서 새로운 운동을 모색했다. 하지만 이들의 시도가 성공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들은 당과 노조의 운동이 위계적이고, 국가를 장악한다고 해서 바로 사회가 변혁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었다고 비판했지만, 그렇다면 운동들 사이에 수평적이고 교통이 가능한 조건과 구조는 무엇인지, 현재의 모순을 지양하는 새로운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그들 또한 말할 수 없었다. 결국 이 운동들 중 몇몇은 신자유주의 위기를 관리하는 일원으로서 NGO가 되었고, 또 몇몇은 자신의 주제 내로 갇혀버렸다. 그리고 또 어떤 것들은 자신들이 비판했던 지배적인 운동의 형태를 받아들였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사회포럼은 출발했다. 역설적이지만 세계사회포럼의 형성에 있어서 1980년대 이래로 진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의 역할도 있었다.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위기를 지연시키고자 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기존의 운동들이 처한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20세기 초반, 노동자운동(및 이를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사민주의 정당)의 성장에 대한 자본의 대응으로써 노동자들에 대한 안정적인 고용과 그를 통한 가족임금 보장, 복지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첫 번째 공격 대상이었다. 복지의 축소, 민영화 공세, 고용의 불안정은 노동자, 민중에게 심각한 고통이었지만, 기존의 운동은 이에 대한 전면적으로 반대하기보다는 코퍼러티즘적으로 대응하였다. 신자유주의 공세는 이미 자본주의의 성장기에 형성된 노동자, 자본간의 타협체계가 유지될 수 없는 조건임을 전제하는 것이었지만, 기존의 운동들은 좋았던 옛날로 복귀하고자, 혹은 현상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쟁점들과 운동들이 출현했다. 남미에서는 농민들과 원주민들, 실업자들의 운동이 성장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남미 민중들의 삶을 옥죄고 있는 외채와 이를 매개로 진행되는 신자유주의 정책, 즉 자유화, 민영화, 자본의 무제한적인 소유권 보장 등의 문제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한 대중적인 투쟁을 조직해왔다. 금융의 팽창을 중심으로 현재 자본주의가 처한 구조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전 세계 도처에서 민중들의 권리와 날카롭게 충돌했다. IMF나 세계은행의 처방은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을 제거할 수 없었고,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려는 여러 조치들은 민중들의 기본적인 권리와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내적인 배제는 더욱 증가했고, 민중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졌다. 점차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야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민중들의 인식과 투쟁이 확산되었다. 각각의 주제와 양태는 달랐지만, 99년 시애틀에서 이 운동들은 조우했다.
이런 20세기 운동들이 보여준 역사적인 과정과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이라는 정세적인 계기는 세계사회포럼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논의와 합의의 기반을 이루었다. 세계사회포럼의 헌장은 사회운동들이 획득한 공동의 인식과 전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현재 민중들의 삶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권리를 박탈하는 공통의 원인으로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각각의 운동들이 가진 고유하고, 즉각적인 과제에 대한 상호 인정과 소통을 통한 공동의 인식 확장. 따라서 세계사회포럼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구조와 원리, 양식의 문제를 평가하고, 전화를 모색하는 것에는 이러한 전제에 대한 고려가 확인되어야 한다.

4회 세계사회포럼에서 드러난 쟁점들
세계사회포럼이 진행되어 온 지난 4년 간의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많은 운동들이 참여했고, 세계적인 주목도 커졌다. 이 과정은 단순히 외적인 확대는 아니었다. 좀 더 많은 운동들이 참여하고, 세계사회포럼의 프로세스가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과정은 전 세계 운동들에게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야기하는 모순과 폭력, 배제와 착취가 매우 다면적임을 명확히 인식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점점 더 다양한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지금까지 세계사회포럼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 이상으로 진전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아직까지 대안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지 못하고 있는 점, 체계 자체를 반대하기 위한 전략과 투쟁을 둘러싼 문제가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 활성화되고 있는 공동의 투쟁이 무엇을 목표로 해야하는지 밝혀지지 않은 점, 이런 문제들이 해명되지 않음으로써 동맹을 형성하는 범위도 모호하다는 점 등. 이런 문제들은 이번 4회 세계사회포럼에서 갑자기 터져 나온 것은 아니다. 세계사회포럼의 출발에서부터 제기가 되었던 것들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과정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만족할만한 답을 던져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세계사회포럼이 대안과 전략 등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을지언정, 이전의 운동이 가졌던 관념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답을 찾기 위한 단초들을 제공해왔기 때문이다.
언급했듯이 대안과 전략의 부재, 명확한 방향성의 부재에 대한 문제제기는 계속 진행되었던 것이지만, 이번 세계사회포럼에서는 더욱 적극적인 방식으로 드러났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뭄바이 레지스턴스(Mumbai Resistance against Imperialist Globalization and War) 2004'이다. 10만이 넘는 사람이 참가했던 세계사회포럼에 비하면 비록 몇 천명의 왜소한 참가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기는 하지만, 세계사회포럼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방식의 문제제기가 그곳에서 이뤄졌다. 뭄바이 레지스턴스의 비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또 다른 세계"가 무엇인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현재 필요한 것은 세계화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며, 제국주의는 오직 그것을 사회주의로 대체할 때에만 패퇴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세계사회포럼이 대안의 상이나 지향에 대해 불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비판으로 볼 수 있다. 둘째는 세계사회포럼이 포드재단과 같은 초민족적 자본과 연관된 기금을 받는다는 점이다. 이런 재원조달 방식이 세계사회포럼 내에서 NGO들의 영향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고있으며, 이런 NGO들의 영향력 때문에 세계사회포럼이 우경화되고 있다는 점이 비판의 초점이다.
또한 세계사회포럼 내부의 행사에서도 세계사회포럼 전망에 관한 논의를 통해 세계사회포럼을 둘러싼 여러 문제제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패널들이 조직되었다. 우선 "신자유주의와 전쟁, 그리고 세계사회포럼의 중요성"이라는 패널은 애초 기획의도 자체가 세계사회포럼과 그 미래에 대한 논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패널은 주로 이후 세계사회포럼에 대한 제안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주된 내용은 지금까지 세계사회포럼은 잘 해왔고 꾸준히 성장해왔다는 평가가 다수를 이루었다. 세계사회포럼은 신자유주의가 아닌 "또 다른 세계"가 필요하고, 또한 가능하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고, 이것이 현재 세계사회포럼이 가진 책임이라는 평가다. 그리고 이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지역별, 주제별 포럼을 활성화시켜야 하고, 공동의 행동을 모색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하고, 세계사회포럼 내부의 민주주의를 확보하고, 대안을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등의 제안이 있었다. 사실 세계사회포럼 행사에서 규모가 큰 패널들이 다 그러했듯이, 이 패널토론에서도 첨예한 의견대립이나 입장의 차이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약간의 쟁점은 볼 수 있었는데, '세계사회포럼이 공간으로 남는 것이 유의미한가?'라는 쟁점이었다. 세계사회포럼의 시작 초기부터 제기되었던 이 쟁점은 아직까지도 어떤 진전된 답을 찾지 못하고 매년 되풀이되고 있다.
좀 더 논쟁적인 주제를 다룬 것은 "정치정당과 사회운동"이라는 패널이었다. 세계사회포럼이 헌장을 통해서 정당과 군사조직의 참여를 배제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누차 논쟁이 되어온 지점이었다. 이 패널에는 브라질 노동자당, 인도공산당(CPI), 이탈리아 공산주의 재건당, 유럽 녹색당 연합 등 정당 활동가들이 대거 참석하여 정당이 세계사회포럼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늘날 좌파 정당들은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고, 사회운동이 직면한 적과 동일한 적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는 점이 대부분 연사들이 강조하는 지점이었다. 사회운동이 다양한 주제와 이슈를 제기하고 그를 중심으로 대중을 동원하는 것은 사회운동의 역할이고 높이 평가될 지점이지만, 사회운동의 주장과 요구가 구심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현재의 정치와 국제정세 속에 위협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정당과 같은 정치적 틀이 필요하다는 그리하여 정당과 사회운동이 우호적인 파트너쉽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정당운동과 사회운동의 연대를 곤란하게 하는 조건이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아르네케르는 대안적 사회를 위한 광범위한 블록(그의 용어를 따르면 당-좌파와 사회적-좌파로 나눌 수 있는 '좌파'들의 연합)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난점을 지적한다. 우선 현재 운동들이 직면하고 있는 정치 자체의 위기(정당으로 대표되는 근대 정치의 위기)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인 사회 프로젝트의 부재를 공통의 조건으로 사고한다. 이러한 전제 하에 당-좌파의 문제점으로 대중을 정치의 주체로 세워내는 활동이나 대중들의 투쟁에 대한 기여가 감소하고, 제도(특히 선거제도)에만 의존하는 경향, 새로운 사회적 주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회피하는 융통성 없는 개념틀을 고집하는 문제, 다양한 차이들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공동의 인식을 확보해가기 보다는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균질화하려는 시도, 당 간부들의 권위주의적 스타일 등을 꼽고 있다. 물론 사회적-좌파 역시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사회운동들이 종종 정치의 중요성을 잊는다는 것, 수많은 개인과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수많은 요구를 연계하고 조직된 열망을 표현할 수단이 없다는 사실을 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당-좌파와 사회적-좌파가 연대하기 위해서는 사회운동이 자신들의 자율성을 잃지 않고, 당들이 사회운동을 대리하지 않으려 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 공동으로 전국적인 프로젝트를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부당함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직접 참여하는 주체로 변화시키는 것이 '정치화'의 의미이며, 이를 가능케하기 위해 현존하는 당을 혁신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정치적 기구를 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정치적 의사표출의 새로운 방식을 창조해야한다고 주장한다.
}}. 따라서 문제는 정당의 참여를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정당과 사회운동의 관계를 모색하는 과정은 서로의 실용적인 필요에 기반하기보다는 지금까지 서로의 연대를 가로막았던 역사적이고 정세적인 이유들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사회포럼의 위상과 전망
뭄바이 레지스턴스 2004, 세계사회포럼의 미래를 고민하는 토론, 정당과 사회운동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토론은 각자 다른 쟁점을 제기하고 있지만, 그 근저에 놓여있는 공통된 질문은 "세계사회포럼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이다. 이 각각의 쟁점에 기반하여 세계사회포럼을 비판하는 논지의 근저에는 세계사회포럼의 현실에 대한 공통된 평가가 놓여있다. 즉, 세계사회포럼에 무정형의 사회운동들이 집합되어 있고, 중심이 없으며, 국가와 국제기구의 역할을 보조하는 NGO들의 주도권을 용인하고 있다는 비판적 평가가 그것이다. 덧붙여 세계사회포럼이 말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가 때때로 좀 더 인간적이고, 덜 잔인한 세계화라는 요구로 모아져 오히려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을 찬성하는 것으로 귀결되기도 하므로 자본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비판들이 담고있는 문제의식 자체는 유의미한 것이다. 중립적인 시민사회라는 허구적인 공간을 매개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현하는 국가와 국제기구의 역할을 거들고 있는 NGO에 대한 비판은 현재 신자유주의 비판에 있어서 중요한 축이며{{) 세계화된 자본이나 초민족적 기구들은 세계적 '시민사회'를 자신들의 계급적 전략의 본질적 요소로 간주한다. 그들은 세계적 시민사회를 '기업의 세계', 사회적 재생산 역할을 자임하는 거대 기구, 그리고 체계의 결핍요소를 보충하는 것으로 호명된 조직들 사이의 협력을 제도화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그것은 새로운 범-정부적 관료기구를 신성화하고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지원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의 특정조직을 포섭함으로써 배제된 집단과 취약 계급의 사회적 요구를 일정한 방향으로 호도한다. 여기서 '시민사회'는 제도적 합의 내에서 갈등을 탈정치화하는 수단이 된다. - 다니엘 벤사이드, [새로운 국제주의: 제국적 전쟁과 세계의 사유화에 맞서], 월간사회진보연대 통권 41호
}}, '다른 세계'는 어떻게 가능하고, 그것의 상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비판이 제기되고, 세계사회포럼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고려해볼 문제이다.
세계사회포럼은 매우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모여있는 공간이자 과정이고, 그것을 규제하는 원칙도 매우 느슨한 수준이다. 따라서 단일한 전략과 전망의 부재는 어쩌면 현재까지는 그리고 당분간은 필연적인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이 세계사회포럼이 아직 미숙하고, 어떤 기준에 미달한 전근대적인 운동이기 때문은 아니다. 세계사회포럼을 정형과 중심이 없는, 그리하여 세계를 변혁하는데 불충분하고 모자란 운동으로 바라보는 평가는 세계사회포럼의 전망에 오히려 위험스럽다. 세계사회포럼을 좌익화, 급진화해야 한다는 주장들은 세계사회포럼이 어떤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그래서 조직하고 개조해야 할 운동이라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주장들은 '어떤 기준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20세기의 지배적인 운동들이 국제적인 전망과 이념을 상실하고, 진정 혁명적인 운동에게 필요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히지 못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혁명적인가?'는 불분명해졌다. 따라서 세계사회포럼의 좌익화, 급진화의 실내용이 무엇인지 알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세계사회포럼이 공간을 넘어서 공동의 행동과 투쟁을 합의하고, 단일한 지향을 만들 수 있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나, 사회운동들의 다양함에 정치적인 구심을 만들어 가는 데 정당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그들이 주장하는 좌익화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조심스럽게 짐작하게 해준다: 좀 더 분명하게 자본주의 체계를 지양하고, 그 이후 사회의 전망(사회주의)을 밝히는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국가와 정당의 역할을 고려할 것. 이 말 자체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러한 주장이 사회운동에 대한 정치운동의 우위, 당의 이념과 전략에 대한 대중운동의 복속이라는 20세기의 실패를 상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에게 던져진 문제는 사회주의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 대안적인 사회(그것이 사회주의라 명명되던 그렇지 않던 간에)는 어떠한 윤리와 원리, 내용으로 형성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고, 정당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을 정치의 주체로 세워내면서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낼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유럽사회포럼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이탈리아 공산주의 재건당의 사회운동에 대한 입장은 전통적인 좌파 정당들의 관점과는 사뭇 다르다. 이번 인도 세계사회포럼에 참석한 이탈리아 공산주의 재건당의 베르티노티는 '정치정당과 사회운동' 패널에서 "좌파정당이 사회운동 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하거나, 그들에게 방향을 지시하려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와 전쟁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사회운동과 평등하게 교류하면서, 이들의 집단적 행동이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정치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정당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주장은 세계사회포럼 헌장의 정당 배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하에서 계속해서 탈정치화되는 대중들에게 유의미한 정치를 되돌려주기 위해 사회운동과 정당운동이 무엇을 할 것이냐가 진정한 문제임을 드러내준다.
}}. 즉, 좌익화를 말한다면 그것은 유실된 사상과 이념의 좌익화이고, 이 때 그 대상은 세계사회포럼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운동 전체이다.
누차 지적했듯이, 세계사회포럼은 그 형성 과정에서부터 20세기의 지배적인 운동들과는 이질적인 요소들과 방식들을 결합시켰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노동자운동의 코퍼러티즘화, 이념과 사상의 유실이 세계사회포럼이 출발할 당시의 상황이었다. 여기서 세계사회포럼을 형성한 다양한 운동들이 기존의 운동들의 역사에 대해 정확히 평가를 하고 그 대안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운동의 실패를 재현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합의가 존재했다. 세계사회포럼의 헌장은 이러한 문제의식의 반영이다. 즉, 다양한 사회운동들의 자율성과 대중운동의 우위를 인정하면서 이 운동들의 수평적인 연대와 공동의 인식 확보를 통해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투쟁을 활성화하고, 인민들의 보편적 권리를 확장해나가는 지속적인 과정 속에서 대안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애초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가 진정한 문제이다. 세계사회포럼과 사회운동들이 4년 간 노력해온 과정이 기존 운동의 무기력을 넘어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전쟁에 맞서는 새롭고도 자율적인 운동들의 성장과 그들의 연대에 기여했는가? 세계사회포럼과 사회운동들의 지난 4년의 과정이 기존의 운동이 해결하지 못했던 곤란한 문제들을 드러내고, 이에 대한 대안들의 가능성을 탐구해왔는가?

세계사회포럼의 전망을 위해 고려해야 할 문제들
위에서 던진 질문을 근거로 한다면, 세계사회포럼의 전망을 둘러싼 논의가 고려해야 할 지점은 지금의 논의와는 사뭇 다를 것이다. 우선은 세계사회포럼이 지속적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운동들의 분석을 확장시키고, 그 속에서 공동의 인식을 확보하는데 기여했느냐의 문제와 이 과정에서 지금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세계사회포럼의 프로세스를 지구적으로 확장시키려는 참가자들의 노력은 세계사회포럼이 포괄해야 하는 다양한 이슈를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대안적인 사회가 가능해지기 위해 사회운동들이 고려해야 할 쟁점을 밝혀왔다. 무엇보다 전쟁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갈등과 불안 요인을 제거하고, 자본투자의 안정성을 제고하는 새로운 통치성을 구축하는데 필수적인 따라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불가분의 관계라는 인식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의 인식은 자연스럽게 모든 운동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을 자신의 과제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다. 지난 해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3회 세계사회포럼은 이라크 전쟁 발발을 저지하기 위한 2.15 국제행동을 낳았고, 올해 세계사회포럼을 통해서 전 세계 사회운동들은 3.20 국제반전공동행동을 결의했다. 3.20 국제반전공동행동의 의미는 무엇보다 9.11 테러 이후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반하는 세력들을 잠재적인 테러범으로 간주하면서 전쟁의 기운을 높이고 반전, 반-세계화 운동의 활로를 막아섰음에도, 사회운동들은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을 결의하고 실천하는 것을 통해서 공포와 억압의 분위기를 뚫고 반전 운동의 싹을 키워왔다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것에 있다. 미국의 헤게모니와 초민족적 자본의 세계화된 네트워크를 보호하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진행되는 군사적 세계화에 대한 사회운동들의 인식과 저항이 그 의미이다.
하지만 이것이 세계사회포럼이 전쟁 반대라는 단일한 이슈를 중심으로 개조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사회운동들의 3.20 국제공동행동의 결의는 세계사회포럼을 통해 수렴되고 다시 확산되는 다양한 쟁점들을 이라크 전쟁 반대로 환원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공동의 인식이 확장되고, 공동의 행동이 결의되는 과정은 그 내부의 다양한 쟁점들을 포괄하고, 그로부터 건설적인 다양성이 확장되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들의 목소리, 세계적인 미국의 군사 전략 하에서 한반도 위기가 운동들이 처한 보편적인 문제임을 주장했던 한국 참가자들의 목소리, 끊이지 않는 분쟁으로 일상을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서아시아, 아프리카 참가자들의 목소리는 현재의 군사 세계화의 단면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이라크 전쟁과의 연계 속에서 공동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더욱 다양한 실천과 투쟁들이 모색될 수 있다. 또한 전쟁 반대라는 공통의 과제가 실제 각각의 운동을 어떻게 개조하고, 활성화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한데, 이는 한국 사회에서 반전의 이슈를 각각의 (부문)대중운동이 자기과제로 온전히 받아 안지 못하는 현실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지 반전 투쟁에 관한 것은 아니고, 세계사회포럼 자체가 움직이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지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4회 세계사회포럼에서 참가자들은 카스트제도나 종단주의, 종교근본주의와 같은 문제들이 전근대적이고 몇몇 지역에 특수한 문화의 문제로 치부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추진되는 과정은 이런 문제들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이번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한 인도, 네팔, 방글라데시, 스리랑카의 달릿(불가촉 천민)을 비롯하여 나이지리아나 케냐와 같은 아프리카 국가에 존재하는 오수(osu), 와타(watta)와 같은 집단들은 종교, 종족을 이유로 배제된 집단들인데 이들은 이번 세계사회포럼에 참가가 두드러졌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의 최초이자 최대의 피해자이다. 물, 전력, 교통, 의료, 교육과 같은 부문의 사유화와 민영화, 불안정한 노동, 초민족적 자본의 농업과 토지에서의 소유권 독점과 같은 문제는 이들의 삶을 절대 빈곤 이하로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게다가 민족-국가의 위기에 따른 민족적 동일성의 위기는 종종 인종주의와 결부되는 심각한 폭력으로 드러나기도 하는데, 이들은 그 폭력의 일차적 대상이다. 그렇다면 세계사회포럼이 전제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반대가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에 대응하는 근대정치 일반의 위기와 조응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쟁점을 내포할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인종주의와 같이 현재의 위기에 대한 퇴행적인 대응을 넘어서는 국제주의의 쟁점을 우리에게 강조한다. 또한 이런 문제들은 성적 차이와 같이 자본주의가 구조화해왔던 인간학적 차이에 대해서 사회운동들이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지평과도 결합된다.
세계사회포럼이 더욱 성장해가기를 바라는 논의들은 신중하게 세계사회포럼에서 국제주의의 맹아를 발견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남은 과제가 많다. 무엇보다 운동들 간에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이를 통해 공동의 인식을 확보해 가는 과정이 계속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각각의 과제와 요구들이 상호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확장하는 방식으로 인민들의 보편적인 권리를 탐구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운동들이 상호 개조되면서 보편성을 담지할 수 있는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이것은 새로운 조직원리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념을 발견하는 문제이다. 세계사회포럼은 운동들이 새로운 국제주의를 만들어 가는 이런 과정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세계사회포럼을 대상화하여, 요구하는 방식은 아니다. 세계사회포럼의 주체가 바로 우리이고, 세계사회포럼을 둘러싼 쟁점과 과제는 바로 우리 운동이 당면한 과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PSSP
주제어
국제 민중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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