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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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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합의주의 비판 ①]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 전략과 사회적 교섭 기구 참여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10문10답

노동국 |

사회적 합의주의 비판

사회적 합의주의 비판

* 민주노총 집행부에서는 사회적 대화와 사회적 교섭기구 참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운동 안팎에서 이러한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해 우려가 높고 논란도 이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사회진보연대에서는 기획을 통해 이를 보다 자세히 분석하고 비판하고자 합니다.
10월 - 사회적 합의주의 10문 10답
11월 -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목소리
12월 - 좌담회
1,2월 - 종합 : 평가와 과제



1. 현재 민주노총은 ‘사회적 대화’ 등을 중요시하며 2004년 사업계획에서 ‘중층적· 총체적 교섭구조’를 마련하는 것을 주요하게 내걸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노총의 새로운 사회적 교섭 기구 참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요. 사회적 교섭, 사회적 대화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현재 민주노총에서 주장하는 사회적 교섭구조의 필요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 총연합단체로서 민주노총은 자신의 정책제도 개선과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서 대정부, 대사용자단체를 상대로 하는 사회적 교섭구조가 필요하다.
- 따라서 민주노총은 ‘중층적, 총체적 교섭 구조’를 쟁취하기 위해서 산별교섭, 대정부 교섭과 함께 기존 노사정위원회를 올바르게 개편하고 새로운 노사정 교섭구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입장에 따라 민주노총은 요구를 천명하고 관철시키는 경로로서의 사회적 교섭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교섭, 사회적 대화의 논의는 주로 유럽식 사회적 합의주의를 모델로 하고 있는데요. 사회적 합의주의는 일반적으로 정책협의 제도를 발전시키고, 공공정책에 대해서 정부와 기업을 대표하는 최상위 고용자 연맹과 노동자를 대표하는 최상위 노조 연맹 사이의 공개적 협상을 통해 공식적, 비공식적 협약으로 결정하는 노사정 공동결정의 형태를 일컫습니다. 국가는 정책을 작동시키기 위해 다른 경제 행위자들의 협력과 동의를 필요로 하게 되고 정부는 노조와 기업이 협력하도록 설득하려 하고 이러한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들에게 정책결정의 일정한 권한을 부여하는 전략을 취하게 됩니다. 유럽에서 이러한 내용의 ‘사회적 합의주의’가 가능했던 조건은 자본주의 호황기의 정책이었던 셈입니다. 강력한 노조(높은 가입률)의 존재와 함께 노조의 지지를 받는 사민주의 정당의 존재가 정책협의를 더욱 활성화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금융세계화를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변화의 국면, 그리고 만연한 경제위기와 불안한 요소(산업자본, 노동)가 혼재해있는 현 시점에서 사회적 합의주의를 도입한다는 것은 많은 문제를 가집니다. 애초에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적 합의주의의 추구는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하에 불안정노동이라는 현실에 직면해있는 대다수 노동자들(특히 비정규직)의 요구를 오히려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군다나 현재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사회적 대화는 이러한 정책결정의 일주체로서 노동자의 위치규정을 하는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다만 조직된 노동자들의 요구를 노사정간의 합의의 틀로 관철시키겠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2. 예전부터 정권은 노사협조주의, 신노사관계, 사회 통합적 구조조정 등을 추진해 왔습니다. 이것이 현재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기구 추진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90년대 초반부터 구조조정은 한국자본주의의 화두였습니다. 당시는 신발 섬유 등 쇠퇴 산업을 도태시키고 새로운 성장산업으로 자본과 인력을 배분하려고 했습니다. 90년대 중반에는 무리한 중화학 공업 투자 등으로 과잉축적이 더 심화하였고 이윤율은 더욱 하락하였습니다. IMF 위기가 발생한 이후 구조조정은 더욱 격렬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과잉자본과 과잉인력의 처리, 금융세계화로의 통합을 심화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구조조정이 노동자의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국가와 자본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을 무력화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해고의 경직성이 한국경제를 발목잡고 있다'는 이데올로기적 공격, 폭동을 야기하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 구축, 조직화된 노동자들 및 그 지도자들의 포섭 등이 그것들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국가와 자본이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신 노사관계 구축', '사회 통합적 구조조정' 등입니다.
그래서 신 노사관계, 사회 통합적 구조조정 등이 노리는 것은 노동의 신축화, 노조 무력화이지요. 이를 통해서만 구조조정이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와 자본의 이런 시도는 지속적으로 시도되어 왔고 부분적인 성공을 거둔 것도 사실입니다. 현재 확산되어 있는 불안정노동, 조직률 감소, 전투적인 노조운동의 실리주의 보신주의로의 경도 등이 그 증거입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후 국가와 자본은 이런 것들을 제도화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한국노총은 물론이거니와 민주노총의 일부 세력도 이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노무현 정부의 상대적 진보성에 기대면서 불안정노동 문제 등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및 세계화 과정 중에 파생된 다양한 문제들을 풀기 위해 사회적 교섭기구에의 참여가 불가피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대에 못 미치면 나오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노무현 정부의 정책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이들은 몇 차례의 사회적 합의주의 및 타협체제 구축(사회적 교섭기구 참여도 이것의 일종) 시도 과정에서 국가와 자본이 내놓는 안이 언제나 우리의 기대에 못 미쳤다는 것은 거론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들은 구조적 경제위기 또는 이를 극복하겠다고 나온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및 세계화로의 편입 자체가 문제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이를 넘어서려는 노력을 하기보다 묵인하는 경향을 띕니다.
국가와 자본은 신 노사관계 구축, 사회 통합적 구조조정을 이야기하면서, 그리고 사회적 교섭기구를 이야기하면서 불안정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거나 제고시키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국가와 자본이 불안정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시키겠다는 약속은 번번이 사기로 드러난 바 있습니다. 이제 신 노사관계 구축, 사회 통합적 구조조정, 사회적 교섭기구 등에 더 이상 솔깃해하지 맙시다.


3. 민주노총은 ‘새로운 사회적 교섭기구’ 참가를 위한 논의를 어떻게 진행하고 있습니까?

현 민주노총 집행부는 ‘사회적 교섭의 추진’을 주요 사업 계획으로 설정하고 올해 초부터 논의를 진행해왔습니다. 원래의 계획은 2004년 3월 3일 1차 중앙위, 4월 1일 3차 중앙집행위에서 노사정 교섭기구 추진을 위한 내부 토론 지침을 확정하고, 5월말 토론 지침을 각 연맹과 지역본부로 보내 7월말까지 조직토론을 끝내고 8월경의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위원회 참여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계획 속에서 지난 5월 31일 청와대에서의 노사정 토론회와 6월 4일과 7월 5일 2차례의 노사정 대표자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그리고 3차 회의는 8월 6일 민주노총 주관으로 개최하기로 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7월 18일 정부가 엘지정유를 직권중재에 회부한데 이어, 20일 엘지정유에 경찰력을 투입하고, 서울·인천지하철과 도시철도를 직권중재에 회부하는 일련의 사태가 발생함에 따라 노사정 대화는 변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민주노총은 "탄압을 계속하면 한국의 노사정관계는 어떠한 발전적 논의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입장을 밝히고, 7월 27일 상임집행위 논의를 통해 노사정대표자회의 3차 회의를 무기한 연기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노총 집행부의 사회적 교섭에 대한 방향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 교섭안을 공식적으로 확정하기 위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민주노총은 지난 8월 25일 열린 9차 중앙집행위에서 "올바른 사회적 교섭기구를 만들어 민주노총의 주요한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교섭의 장으로 활용한다"는 내용의 '사회적 교섭 대책안'을 심의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노동탄압에 항의해 그 동안 유보해왔던 노사정대표자회의를 다시 가동해 합의를 추진한 뒤 9월 21일 임시대의원대회에 상정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 안건은 격론 끝에 8월 31일 2차 중앙위로 넘겨지고, 다수 중앙위원들의 반대로 내년 1월 정기대의원대회로 안건상정이 미뤄진 상태입니다. 총연맹은 이후 중앙집행위에서 사회적 교섭과 관련한 일정과 계획 등을 논의할 방침이며, 노사정대표자회의도 당분간 열리긴 어려울 듯합니다.


4. 사회적 교섭기구 혹은 노사정위 참가문제를 전략적, 혹은 전술적 판단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어떠한 차이가 존재하며, 이것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기본적으로 전략과 전술은 그 격에 있어 차이가 있습니다. 전략이란 운동의 기본적 방향과 목표, 혹은 그 실현의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전술은 이를테면 그 하위격으로 기존의 전략 하에 해당 시기 정세나 주체적 조건의 변화에 따른 구체적 투쟁의 방향이나 그 방법 등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교섭기구, 혹은 노사정위 참가문제에 대한 전략적, 전술적 판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노사정위 참가의 문제를 전략적 차원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한국 노동운동의 방향을 거시적인 차원에서 사회적 교섭전략 쪽으로 이끌고 가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우리 노동운동에서 사회적 교섭기구의 문제를 전략적으로 판단하고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사회적 교섭기구 참가를 전술적으로 판단하자는 말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투쟁으로 돌파해야 할 시기가 아니라 정부, 기업과 협상을 해야 할 시기”라며 사회적 교섭기구에 참가했던 일들이 대부분 이런 전술적 판단 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전술적 판단에 있어서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전술적 판단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현재 노무현 정권은 참여민주주의 등을 주장하며 노동조합을 대화 혹은 교섭의 파트너로 보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지만, 이는 궤도연대 파업이나 그 이전의 각종 투쟁의 경험을 통해 거짓이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둘째, 전술적 판단의 외피를 쓴 전략적 판단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의 민주노총이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현재 우리 노동운동 내에는 사회적 교섭기구 참여 문제를 전략적 차원에서 판단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기구 참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노동운동의 커다란 방향전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도에 대한 논쟁의 필요성은 분명하지만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추진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방향전환이 어떤 좋지 않은 후과를 낳을지에 대해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최악의 경우 한국 노동운동의 커다란 퇴보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5. 노사정위, 사회적 교섭기구 참가 문제에 대해 ‘실익이 있을 수 있다’ 등의 이유로 전술적으로 참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떤 실익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회적 교섭기구에 전술적으로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이득이 된다고 합니다. ‘투쟁을 잘하기 위해서라도, 교섭과 투쟁을 결합해나가는 게 유리하다’, ‘고립된 투쟁에 집착하지 말고 교섭을 통해 모색해야 한다’, ‘제도개선을 위한 협상의 유일한 장이다’ 등의 말을 합니다. 일단 사회적 교섭기구에 참가하고 교섭을 하다가 안되겠다고 판단되면 그때 틀을 깨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실익’, ‘참가’의 관점은 그야말로 (앞 질문들에서 말한)노사협조주의와 실리주의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섭기구의 참가문제는 단순한 ‘실익’의 크기 문제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그들의 주장대로 실익이 논의된다 하더라도, 복잡한 방정식으로나 계산될 것이며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서 교환되는 이익의 내용이 다르므로 이를 양적으로 비교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참여론자들은 교섭기구 참여가 노동법 개정, 사회개혁 등 정책 및 제도개선의 실현을 위한 정책참가의 일환이라고 말하지만, 경제위기 상황에서 사회적 합의주의는 생산적 복지와 간헐적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통해서 노동자운동을 관리하며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보완물 역할을 할 뿐입니다.
때로는 ‘조합원들이 더 원하고 있다’는 근거로 교섭기구 참가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이 노동자 내부를 분할해낸 결과로서, “저들은 나와 ‘다른’ 노동자”라는 생각을 들게 하고 나아가, 이 선을 따라 분할된 노동자집단 간의 ‘이기주의적’ 행위를 조장했던 영향입니다. 사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전반적인 노동조건의 악화라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나의 노동조건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다른’ 노동자집단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팽배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노동의 불안정화로 인한 노동자내부의 위계화, 분절화가 지속되는 상태에서 사회적 합의주의는 특정노동자들의 이익을 가져다줄 뿐입니다. 2001년도 노사정위의 ‘복수노조 5년 유예와 노조전임자 임금연장의 합의’는 결국 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를 보장하고 비정규노동자들의 노동권과 생존권을 제약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사회적 합의’는 노동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에 동의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합의주의 모델은 노조운동의 자주성과 민주성을 크게 훼손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총연맹 몇몇의 대표자가 참가하는 노사정체제는 조합원들을 구경꾼으로 만들고, 대표자들에게는 관료주의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적 교섭기구의 참가 문제는 ‘참가하는 만큼 이익’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해보고 안 되면 그만두어도 무방한’ 문제도 아니란 것이 분명합니다.

6.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참여민주주의를 주창하며 국민통합, 상생과 화합의 정치를 강조해왔습니다. 노무현 정권이 노사정위를 추진하는 것도 이와 연결되어 있을 텐데 이것이 갖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노무현정권이 내세운 ‘참여민주주의’란 흔히 ‘제3의길’이라고 불리는 유럽식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변종이며, 그 양 축은 ‘참여-분권’과 ‘국민통합(사회적 합의주의)’입니다. 참여민주주의의 핵심키워드는 참여, 분권화, 국민통합, 빈곤개선과 여성의 통합입니다. 그러나 참여민주주의 모델은 그 진원지인 유럽에서조차 말만 번지르르할 뿐 일관성과 실내용이 없고 이렇다하게 실현된 것도 찾기 힘듭니다. 다만, 나름대로 일관되고 독특한 경쟁력을 가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살인적인 구조조정의 실행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능력입니다. 이른바 ‘온정주의적 구조조정’과 ‘인간의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사회통합적 구조조정’입니다.

노무현 정권의 노동정책은 국정 12대과제의 하나였던 '사회통합적 노사관계' 구상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른바 사회통합적 노사관계의 핵심으로 노사정위원회의 기능 강화를 통하여 사회적 합의체로 기능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노동유연화정책의 정당성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는 정권에 협조하는 세력을 포섭하고, 그와 반대로 정권에 저항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손배가압류 및 구속과 탄압을 일삼아 왔습니다. 여기서 본질이 드러납니다. 즉, 참여민주주의란 극히 제한된 영역에 대중의 참여를 보장하면서 그를 명분으로 정권이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을 노동자민중의 의지와는 반대로 추진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지난 2003년, 출범 100일 만에 드러난 노무현 정권의 사회통합적 노사관계의 허구성을 잘 보아왔습니다. 노동법 개악으로 노동유연화를 촉진하고, 포섭과 배제를 통해 노동자대중운동을 관리하고 있는 노무현정권의 노사정위에 참가한다면, 그것은 바로 관리된 사회적 합의주의가 양산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7. 노무현 정권을 신자유주의 포퓰리즘 정권이라 하는데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이것이 현재의 노무현 정권의 노동정책과 연결되는 지점은 무엇입니까?

포퓰리즘이란 흔히 ‘민중주의’로 번역되는 정치용어입니다. 주로 한 나라의 지배체제를 분류할 때 사용하는 개념으로 대중적 인기와 지지를 지배체제 유지 및 발전의 기반으로 삼는 국가 혹은 정부를 지칭하죠. 그런데 이렇게만 말하면 포퓰리즘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대중적 인기와 지지에 영합’하는 것입니다. 포퓰리즘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성은 지배체제가 추구하는 사회의 발전 방향과 대중적 인기와 지지의 방향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지배계급과 대중이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정부에서 추진하는 일자리 창출전략을 봅시다. 이 전략은 실업이 만연한 지금, 고용창출이라는 측면에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생겨나는 일자리라는 것이 대부분 비정규직으로서 불안정노동을 강화하기 때문에 전혀 대중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즉 포퓰리즘이라는 것은 거의 환상에 가까운 정책으로서, 대중의 지지를 끌어들이고자 하지만 실제로는 지배계급이 자신만을 위한 계획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권을 왜 포퓰리즘 정권이라 할까요?
노무현 정권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가만히 살펴봅시다. 노무현 정권의 핵심화두는 ‘참여’였습니다. 이제는 정부가 직접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참여를 기반으로 국가를 운영하겠다는 것이 ‘참여정부’의 핵심정책이었죠. 이런 노무현 정권은 과거의 군사독재 등의 억압적 국가체제와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군사독재는 경찰, 군대 등의 폭력적 국가기구를 통해 노동자민중의 국가에 대한 개입을 억눌렀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그런 무식한 방법을 쓰지는 않습니다. 노무현 정권은 노동자민중의 국가참여를 보장한다고 선전합니다. 실제로 386세대의 정치개입, 시민단체의 정책개입, 노사정 합의체제 구축 등으로 참여를 보장하는 듯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은 많은 대중이 국가 운영에 참여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국가를 이끌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노무현 정권을 포퓰리즘 정권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덧붙여 신자유주의 포퓰리즘이란 지배계급이 추진하고자 하는 핵심 정책이 신자유주의인 포퓰리즘을 뜻입니다. 노동법 개악을 놓고 정부가 비정규직 보호 혹은 일자리 창출 정책이라고 선전하는 것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의 노동법 개악은 정규직의 비정규직화와 노동유연성 강화라는 신자유주의 핵심 전략임에도 말입니다.

8. 최근 유럽형 노사관계 모델, 스웨덴 모델 등의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오고 있는데요, 이것이 사회적 교섭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일단 정부와 자본 측의 논의들은 대개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합의주의 제도와 관행이 꼭 필요하며, 일정한 노력으로 그것이 가능하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노사정위원회의 긍정성과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직면한 현실적인 어려움과 제약 - 주로, 특히 노동운동의 전투적 성격 - 을 제기합니다. 이들이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해서는 어떤 도전도 허용하지 않는 대전제하에서 이론적 버팀목으로 삼는 것이 ‘유럽형 노사관계 모델’이며 이것이 한국사회에 적용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유럽형 노사관계 모델은 중앙 집중적인 산별노조체제, 이에 기반한 중앙단체교섭, 사민주의정당,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강력한 복지제도와 높은 수준의 노동 보호제도와 기본권, 이에 기반한 생산성 증가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특히 네덜란드 모델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조화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회적 합의주의 모델로 제기됩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대부분의 유럽 사민주의 국가 특히, 영국과 스웨덴에서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합의주의 체제를 공격하거나 약화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양자는 조화될 수 없고 모순적 관계일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겠죠. 네덜란드는 신자유주의 유연화를 합의의 방식으로 갈등 없이 추진하는 동시에 낮은 실업률, 최소한의 사회적 노동기준을 유지한 특이한 사례였습니다. 사회적 합의주의자들에게 네덜란드 사례는 한국의 노사정위원회가 하고자 했던 일, 즉 노동의 협력 하에 이루어지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가능함을 입증한 사례였던 것이죠. 네덜란드의 모델이 각광을 받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회적 합의를 정당화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한국은 역사적 구조적 조건이 매우 다릅니다. 네덜란드는 사민주의체제에서 사회적 합의주의의 오랜 경험과 역사를 갖고 있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취약하다고 하나 중앙 집중적인 산별노조체제, 사민주의정당이 있었습니다. 또 강력한 복지제도와 높은 수준의 노동 보호제도와 기본권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한국에는 이와 비교할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차이들은 정책입안/집행자의 의지나 각성과는 무관하게 두 사회에서 사회적 합의의 가능성, 또 합의기구나 개별 합의의 실질적 의미가 크게 달라지도록 만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점들은 대체로 무시되거나 간과됩니다. 사회통합적 방식의 구조조정 사례, 즉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합의의 틀 속에서 수행한 사례들을 찾아내서 이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도출하고는 한국사회에서 동일한 성공사례를 만들기 위해서는 동일한 방식의 합의기구와 합의의 내용이 필요하다는 식의 결론이 있을 뿐입니다. 동일한 제도가 다른 사회에 이식될 수 있으며 동일한 결과를 산출할 것으로 기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현실의 구조적, 상황적 한계는 너무나 명백합니다. 이는 지난 10여년의 경험 속에서 노사정위는 합의기구라기보다는 통제기구란 점이 계속 확인되어왔습니다. 불평등의 확대와 극단적인 고용불안, 기본권 제약, 폭력적 억압과 법적 통제의 강화, 자본과 국가의 노동에 대한 일관된 배제전략 등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합의기구’는 이른바 ‘사회통합적 구조조정’보다는 ‘파멸적 구조조정’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적용가능성을 차치하고서라도 유럽/네덜란드 모델 자체도 빌려다 쓰기에는 매우 낡고 위험하기까지 하다는 것 또한 명백합니다. 서구유럽의 합의주의 모델은 1980년대 전지구적 수준의 경쟁 격화, 경기후퇴와 만성적 실업, 사용자의 노동유연화 요구와 적대, 노동계급 내부의 이질화와 계층화, 단체교섭의 분권화 등으로 인해 1990년대에 전반적인 변형 과정을 거칩니다. 서구 사민주의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주의는 바뀌는 것입니다. 즉, 1990년대의 사회적 합의주의는 임금 억제, 노동시장의 유연화, 복지의 축소와 합리화 등 국가와 자본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행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정치권이나 노동운동 일각에서의 제기하는 스웨덴 모델론 또한 근거가 희박한 낙관이라 할 것입니다. 스웨덴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웨덴도 198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서 노동유연성의 증가, 임금교섭의 탈집중화, 탈규제와 공공자산 매각, 사회민주주의적 재정정책과 공공지출의 포기, 실업과 임금격차의 끊임없는 증가가 이어졌습니다. 이런 모든 조건들과,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자본의 대규모 해외유출은 국내 계급간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지던 스웨덴 모델을 지탱한 물질적 토대를 잠식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스웨덴 모델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으며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국가와 자본 그 누구도 한국의 노동운동이 스웨덴이나 네덜란드와 같은 산별 조직체제나 중앙 집중적 권위를 갖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사정위원회의 존재와 구조조정의 가속화로 말미암아 자신의 지위가 강화되고 있는 자본은 그럴 필요조차 없습니다.

요약하자면 한국사회는 유럽의 국가들에 비하여 사회적 합의주의가 성립가능한 사회적 역사적 기반이 부족할 뿐만아니라 유럽의 경우도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그것이 실질저으로 붕괴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능력이나 의지가 국가와 자본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사회적 합의주의는 일부에서 생각하듯 ‘사회적 합의’를 통한 ‘노동보호’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통한 ‘노동배제’에 불과합니다. ‘합의’와 ‘보호’라는 국가-자본과 노동의 동상이몽 속에서, 노동운동의 조직적 자율성과 운동적 자주성이 크게 손상될 것이며 노동운동은 자본의 원활한 축적과 위기관리에 적합한 조건을 창출하는 일방적 약속을 하게 될 위험이 매우 크다고 하겠습니다.

9. 민주노총이 노사정위, ‘사회적 교섭기구’에 참여하는 것은 노동(조합)운동의 계급성과 투쟁성을 해치고 무력화와 위기로 귀결된다는 이유로 참가를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되고 있습니다. 사회적 교섭기구 불참으로 현재 노동운동이 처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습니까?

물론 사회적 교섭기구에 대한 불참하는 것만으로 노동운동이 처한 어려움을 타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현재 노동자운동은 자본의 신자유주의 전략에 의한 노동의 불안정화 공세와 이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로 비정규직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등 성별과 인종, 계층적 분할이 심각해진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계급 자체가 이리저리 해체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신자유주의 경제위기 아래에서 노동자 대중은 절박한 생존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실리적 접근을 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하기에 사회적 교섭기구가 지금과는 다른 실익을 줄 수 있겠지 하고 기대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투적이냐 비전투적이냐 혹은 급진적이냐 그렇지 않느냐로 나누어서 운동을 갈라치기 하거나, 과거의 정파적 정체성에 기대어 좌파냐 우파냐 하는 식으로 세력을 규합하는 방식은 문제의 본질에서 빗겨난 대응입니다. 이는 정작 필요한 ‘발본적인 혁신’을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적 교섭기구 참여를 막아내는 것은 최소한의 대응일 것입니다. 오히려 이 사안을 계기로 더욱 논의를 집중해야 하는 것은 ‘진정 노동운동이 근본적으로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식 속에서 ‘노동자가 계급으로서 형성되기 위해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노동운동의 새로운 주체와 흐름 만들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민주노조 운동의 이념과 사상은 어떠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들을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10. 그렇다면 향후 사회적 합의주의를 넘어 노동운동의 혁신을 위해서 어떤 방향으로 노력해야 합니까?

노동자간 분열이 심화되고 노동조건이 전반적으로 악화되는 공세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기 이익이나 집단의 이익을 방어하려는 의식이 많아지고 더 열악한 노동자들과의 연대의식은 얕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상황과 대결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계급타협의 기반도 없어 그 자체로도 실현 불가능하고 자본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세련된 탈을 쓴 공세인 사회적 합의를 넘어 노동자가 새로이 계급으로 형성되기 위한 방향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노동자간 분할을 막고 연대의식과 헌신성을 강화하는 계급 형성의 관점이 당장의 실리적인 영향력 행사보다 오히려 더 긴급한 시점이라고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안정노동 철폐투쟁은 노동운동의 연대성을 새롭게 정립하고 주체를 형성하는 중요한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비정규, 여성, 이주노동자와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이 투쟁을 자기과제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노동운동이 보다 보편적인 사회운동으로 되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결국 연대 지향적인 노동운동, 불안정노동 철폐투쟁을 스스로 조직하는 노동운동으로 주체를 발굴하고 계급 형성으로 나아가는 ‘운동’을 위해 노력을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면해서는 비정규직을 양산시키고자 하는 노동법 개악에 대해 전체 노동운동의 단결된 투쟁으로 저지하고 그 과정에서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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