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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2.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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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과 천황』(가리에 데쓰 글· 슈가 가토 그림, 길찾기, 2007)

이병한 | 연세대 사학과 대학원
난리였다. 일본 열도 전체가 일시에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각 신문사는 뒤질세라 호외를 긴급 발행하고, 방송국도 온종일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무슨 일이었을까? 2005년 9월 6일, 일본을 열광시킨 그날은 바로 천황가에 아들이 태어난 날이었다. 자그만치 41년 만의 일이란다. 큰 문화적 이질감 없이 일본사회를 관찰하던 나에게 비로소 ‘이방인’임을 실감케 해준 사건이었다. 천황이 뭐길래? 물음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천황가 아들의 탄생은 하루의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다. 저출산 추세로 울상을 짓고 있던 유아, 어린이용품 업계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정말 놀랍도록 기민하고 일사분란하게 ‘황손 신드롬’이 일어났다. 경제적 파급 효과는 무려 1,500억엔이라 추정되었다. 출산 다음날, 일본에서 가장 리버럴하다는 아사히신문까지 극존칭을 써가며 축원의 사설을 실었을 때 물음표는 마침내 느낌표로 변했다. 이게 만만한 문제가 아니구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휩쓸려 기어이 천황제 개혁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당시 자민당의 헌법 조사회는 모계천황을 인정하는 황실전범 개정을 추진중이었기 때문이다. 전후 일본의 문제를 미국과 동아시아 사이에서 궁구하던 나의 둔감한 지성에 일격을 가하는 순간이었다.
그제야 천황제에 관한 책을 찾아 읽고, 지인들과 친구들에게 의견을 구해보았다. 그러나 허탕이었다. 젊은 일본 친구들의 무심함과 심드렁함은 나의 둔감함에 못지않았다. 천황의 존재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드물었고, 천황제의 그늘은 그들의 일상과 짐짓 무관한 듯 보였다. 한마디로 ‘무해한 천황제’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일종의 오락거리로 보이기까지 했다. 영국인들이 왕실가나 다이애나의 스캔들을 가십처럼 대하듯, 그 친구들 역시 천황가의 소식을 술자리의 안주거리로 가벼이 소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라야 데쓰의 『일본인과 천황』은 바로 그들을 독자로 상정하여 씌어진 책이다. 저자 서문에서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듯이, ‘젊은이들이 천황에 대해서 생각하는 계기가 되도록’ 의식적으로 글을 구성했음이 엿보인다. 천황이 무엇인지, 근대천황제는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설명하고, 천황제와 군대로부터 일본사회의 인간관계를 유추한 후, 상징천황제의 모순과 쇼와 천황의 전쟁책임도 추궁하고 있다. 나아가 헌법에서 천황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즉 천황제 폐지와 헌법 개정을 요청하는 급진적 주장으로 글을 맺는다. 그가 섭렵한 방대한 참고문헌이 알려주듯 준비는 꼼꼼하고 철저하며, 주장은 뚜렷하고 명쾌하다. 우선 저자의 열정과 수고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읽는 맛이 남다르진 않았다. 특히 만화라는 가장 대중적인 전달 방식을 택하고 있음에도 지루한 감마저 없지 않다. 왜일까? 『맛의 달인』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만화가의 작품이 그다지 재미가 없는 것은... 우선 ‘계몽의 서사’를 들고 싶다. 저자는 국민들을 세뇌하는 천황제와 교육칙어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그 비판의 내용을 전달하는 서술 양식만큼은 교육칙어와 엇비슷해 보인다. 만화의 주요 뼈대가 되고 있는 무지한 축구부 젊은이와 깨어있는 이사장과의 대화를 보자. 이사장의 설명에 젊은이들은 놀라고 당황한다. 그리고 깨우친다. 그렇군요! 그랬단 말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래선 안되겠어요! 어른은 가르치고, 젊은이들은 배운다. 동의하고 계몽된다. 이와 같은 계몽과 동의의 메커니즘이 줄곧 반복되고 있다. 계몽의 서사가 반복됨으로써 만화라는 장르적 장점은 어느새 파묻히고 만다. 생략과 간결을 이용한 표현양식과 시각언어의 재현이 독자의 적극적 호응을 유도하고 강력한 호소력을 갖는 만화 고유의 특성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혐한류』이다. 또 『전쟁론』과 『대만론』등의 작품을 통해 일본제국주의를 옹호하는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작품도 있다. 하나같이 대중의, 특히 일본의 젊은층에 큰 호응을 얻었던 만화들이다. 필자도 은근슬쩍 ‘내용’이 궁금해서 읽어본 적이 있다. 동의할 수 없고 심지어 불쾌한 내용도 있었지만, 시종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왜? 만화라는 장르의 특성을 최대한 살린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만화의 가장 중요한 장르적 성격이 대중과의 친밀성에 있다면, 이 세 작품은 그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그들의 신념과 가치관을 전파한다. 계몽과 동의의 구조를 발견할 수 없고, 그래서 젊은 독자들의 반발도 야기하지 않은 채, 자연스레 그리고 집요하게 그들의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불편함과 당혹스러움이 있다. 천황제에 기대어 있는 우익들이 대중과 만나고 소통하는 대중매체를 훨씬 능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전후 60년을 기념해 일본에서 제작된 작품들이 대체로 그러하였다.
그렇다고 천황제의 실상을 폭로하고 있는 이 책의 미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일본 사회의 첨예한 논쟁거리였던 「히노마루 기미가요 법안」을 보자. 기미가요가 애당초 모든 사람에게 장수를 축원하며 불렀던 노래였고, 기미가요의 기미를 천황만으로 못 밖은 메이지 시대부터였다는 지적은 새롭다. ‘기미’라는 기호의 독점에서 절대권력이 탄생한 것이다. 또 이 법안의 제정이 앞으로의 전쟁과 전쟁 이전의 일본을 연결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날카로운 안목도 돋보인다. 교육법안 개정을 통해 ‘애국심’을 강조하자는 일본사회의 움직임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도 아쉬운 대목이 없지 않다. 특히 ‘천황이 없었다면 군지도자들의 오만도 없었을 것이며 일본군 병사의 고통도 아시아 인민의 고통도 없었다는 주장’은 지나치다. 일본의 모든 문제를 천황제로만 환원시킬 수 있을까? 근대 일본의 일탈이 온전히 천황제라는 전근대성의 온존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그래서 일본이 반성하고 성찰해서 일본만 개혁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80년대 유행했던 일본인론 혹은 일본문화론과 같은 또 하나의 ‘일본 예외론’이 아닐까?
천황제를 일본 특유의 전근대성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의 다기한 일면으로 파악하는 입체적 시야가 필요하다. 실제로 근대 일본이 ‘천황’을 내세웠던 것은 19세기의 국제질서의 일원으로 편입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즉 당시의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르기 위해서 군주제를 도입한 것이다. 프랑스혁명을 부정하며 등장한 나폴레옹 황제를 필두로 19세기는 세계적으로 군주제의 재구축이 진행되던 시기다. 영국에서도 러시아에서도 강력한 군주제 국가가 발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천황제는 바로 그러한 세계적 추세를 따라가며 ‘발명’된 것이다. 전통을 재배치하여 상징조작을 하는 현상도 ‘근대적’이며 ‘보편적’이다. 그로부터 백년 후,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군주제에 또 한번의 변화가 온다. 군주로부터 정치적 권력을 박탈한 이른바 ‘무해한 군주제’로의 전환이 그것인데, 이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상실하면서 자국의 정치체제를 개편한 것의 반영이다. 그 흐름 속에 일본에서도 ‘상징 천황제’가 도입된 것이다. 즉 천황제를 또 하나의 일본 예외론으로 특수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근대세계의 변동이라는 보편적인 틀 속에서 이해해야 비로소 해결의 단초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젊은이를 겨냥한 이 책을 읽으며 왜 우리가 뜨끔, 해지는지를 생각해 보아야한다. 이 만화책을 읽는 시종 일본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일상을 되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엄격한 상하관계와 위계질서, 배타적 집단주의와 패거리 문화. 이것이 과연 일본만의 모습인가? 그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모습이다. 마침 식민지 근대성을 둘러싼 논의도 시끄럽다.
필자가 접한 일본 친구들은 한국이야말로 집단주의와 민족주의의 산증거로 간주했다. 그렇게 똘똘 뭉치는 애국심이 놀랍고 경이롭다는 것이다. 이때의 경이에는 분명 냉소가 깔려 있다. 이 책이 한국에 번역되어 읽혀져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천황이라는 고유명사를 기어코 ‘일왕’이라 고쳐 써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들의 의식과 일상이 정작 천황제의 잔재를 더 짙게 반영하고 있음을 직시할 수 있다. 일본의 천황제를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천황제’를 근본에서부터 질문하고 성찰해야 함을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추천사를 쓴 김규항의 지적처럼, 한국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은 군사문화의 유산이 아니라, ‘천황제 군사문화의 유산’이었다는 통렬한 자각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은 지금도 여전히 탈식민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지 못했다.
한국의 탈식민 운동은 일본의 탈제국 운동과 긴밀하게 연계된다. 천황제의 온존 속에서 과거로 돌아가자는 일본 우익의 준동은 이제 평화헌법의 개정을 통해 전쟁하는 국가로 일본을 재편하기 위해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다. 일본의 진보진영이 ‘평화헌법 지키기’라는 방어적 자세로 일관하며 ‘보수파’로 몰리기까지 한다. 상징천황제를 규정하고 있는 헌법 1조부터 폐기하자는 저자 가리야 데쓰의 주장이 신선하고 통쾌한 것은 그래서이다. 폐지되어야 할 것은 1조의 천황제이며, 온존해야 할 것은 9조의 평화조항이다. 적극적 개헌론이라 할 수 있다.
상징천황제와 현행 헌법은 전후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등장한 미국과 패전국 일본의 구세력이 담합하여 만든 타협적 산물이었다. 우리 안의 ‘풀뿌리 천황제’를 소거하는 한국의 김매기 작업과, 상징천황제를 폐지하는 일본의 탈제국 과업이 양국 간의 연대 운동을 통해 견고하게 결합되어야 한다. 전쟁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천황제의 그늘로부터 벗어날 때, 양국의 민중은 동아시아의 평화라는 새로운 씨뿌리기 작업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천황제를 폐지하지 않고 사뿐히 ‘즈려밝은’ 채, 그 위에 걸터앉아 동아시아에 군림한 미국과의 관계 조정에도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즉 천황제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우리 사회의 문제이며, 동아시아인 모두의 문제이다. 이러한 자각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인과 천황』은 한국인들에게도 의미 있는 책이다. (*)
주제어
평화 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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