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7/02 제25호
미국과 유럽에서 인민주의의 폭발
국제노동자운동에 닥친 도전
신자유주의 이후 정치위기
클린턴은 경합 지역에서 트럼프의 미사여구와 속임수를 극복하지 못했다. 클린턴 패배의 교훈은 무엇인가? 사회의 심층적 분할을 위장하고 정치적 갈등을 중화하려는 시도가 기실 터무니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트럼프는 오바마-클린턴의 무지개연합 노선을 공격했다. 여성, 흑인과 히스패닉, 청년층을 아우르는 연합을 만들면 무난히 승리할 수 있다는 오바마의 도식은 무너졌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분할을 강화하거나 새롭게 산출했다. 계급적 분할(경제적, 교육적 불평등의 증가를 포함한다), 종족적·인종적 분할(이는 종교적 차별과 종종 결합된다), 도덕적 분할(특히 가족 가치와 성적 규범 영역)이 그것이다. 트럼프는 ‘분노’라는 용어로 이를 영유할 수 있었다.
세계적으로 관찰되는 정치위기는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나? 가장 먼저 확인되는 사실은 ①신자유주의 정책·전략으로 수렴되었던 중도좌파, 중도우파 양당 정치의 위기다. ②그에 따라 다양한 신생정당과 정치세력이 약진하고 있다. 우파 인민주의(포퓰리즘을 대중영합주의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필자는 ‘인민에 직접 호소한다’는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인민주의라는 번역어를 사용했음) 정당의 강세가 가장 주목되고 있다. ③의회민주주의, 정당정치의 약화는 ‘정치의 사법화’로 귀결된다. 즉 기존정당의 무능으로 인해 메가 이슈들에 대한 정치적 결정이 헌법재판소라는 사법기관으로 이관된다. 또한 기존 정당 간 정책적 차별성이 약화되는 데 반비례하여 정치쟁점은 주로 부패, 비리와 같은 이슈로 전환되고, 따라서 사정이나 특별검사제도 같은 사법수단이 정치의 무기로 적극 도입된다. ④한편, 제도정치권은 위기에 대한 대증요법으로 ‘헌정공학’에 집착한다. 한마디로 개헌이다. (그러나 2016년 이탈리아 개헌투표는 부결되었다. 개헌 명분은 신속한 사회개혁을 가로막는 양원제 의회를 사실상 단원제에 가깝게 바꾼다는 것이었다.) 현재 한국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와 미국의 인민주의
미국에서 신자유주의는 뉴딜 자유주의의 완전한 포기가 아니라 빌 클린턴이 대표하는 ‘새 민주당’이 주도한 변용을 의미했다(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 이에 도전한 인민주의 경향의 선발 주자는 로스 페로와 패트릭 뷰캐넌이었다. 페로는 레이건을 지지한 공화당 출신으로서 1992년 대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18.9퍼센트를 득표(3위)했다. 그는 백악관과 의회가 외국기업·정부를 대변하는 로비스트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반대하며 기업이 일자리를 해외로 이전시키는 것을 막으려 했고, 미국 제조업의 부흥을 주장했다. 또한 이라크에 대한 군사개입을 반대하고 유럽과 아시아 동맹국의 부담 공유를 강조했다. 뷰캐넌은 1992년 대선을 앞둔 공화당 후보경선에서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에 도전했다. 그는 감세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출발하여 월스트리트와 NAFTA를 공격했다. 현재 트럼프가 취하는 입장은 당시 페로와 뷰캐넌이 취했던 입장과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
1990년대에는 인민주의가 쇠퇴하는 듯했다. 1990년대 말 호황으로 신자유주의는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빈부격차와 이민은 늘어나고, 무역적자도 증가하고 있었지만 페로와 뷰캐넌은 영향력을 다시 획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2008년 가시화된 금융위기는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오바마 집권 초기 좌파의 공격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정치적 공백을 분노한 우파가 채웠다. 극우적 관점에서 신자유주의를 공격하는 ‘티파티 운동(2009년 미국의 거리 시위에서 시작된 보수주의 정치 운동으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여 2011년에 회원이 16만에 달했다)’이 확산됐다. 그들에게 강령은 존재하지 않지만 미국이 ‘부를 창조하는 자’와 ‘부를 거저 가져가는 자(복지수혜자)’로 나뉘어 있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실수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한다며 분노를 표출했다. 결국 공화당은 2010년 의회선거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오바마 케어에 대한 그들의 반대요구를 실현하는 데 실패한 이후, 티파티운동의 분노는 공화당의 기성지도부에 집중됐다. 금융위기 이후 장기침체는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백인 중간계급에게는 그리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더 많은 세금이나 의료보험료로 하층계급이나 불법이민자를 보조하는 것에 대한 불만과 공포를 표출했다.
2016년 대선에서 승리한 트럼프는 대외정책, 무역, 투자, 이민 이슈를 두고 민주당과 공화당의 전반적 관점에 도전했다. ①안보에 관해서 보면, 미국우선과 여타 국가의 비용분담을 요구했다. ②NAFTA뿐 아니라 환태평양파트너십(TPP)에 반대했다. ③미국기업의 해외진출을 반대했다. (포드의 최고경영자에게 해외에서 수입하는 자동차에 대한 35퍼센트 과세로 위협을 가했다.) ④미국 납세자에게 부담을 주는 불법 이민을 반대하고 나아가 국외추방을 옹호했다.
트럼프는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자신이 ‘특수이익’과 양당의 기성정치인에 대항하는 ‘침묵하는 다수’의 옹호자라고 제시했다. 무역 문제에 대한 요구사항이나 로비스트·거대 기부자에 대한 공격은 페로를 연상시키지만 그는 전문가적 페로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행동했다. 단적으로 경쟁자들에 대한 공격에서 고도로 개인적·인격적인 방식을 취했다. 또 그는 왈라스와 뷰캐넌의 우파 인민주의를 연상시키지만 그들과도 달랐다. 트럼프는 추상적인 원리에 호소하지 않았다. 새로운 스타일의 우파 인민주의를 창출한 셈이다.
유럽의 인민주의와 마린 르펜
2차 세계전쟁 이후 30년 동안 유럽에는 인민주의 정치가 거의 부재했다. 그러나 1970년대 침체 이후 케인즈주의와 사민주의의 침식, 1980~90년대 이민자와 이슬람의 대량유입, 유럽연합의 출범을 배경으로 인민주의가 새롭게 출현했다. 서유럽 인민주의 정치 조직의 다수는 1970년대 조세거부 집단과 나치와의 연계가 의심되는 민족주의 조직으로 소급된다. (예를 들어 프랑스 국민전선, 덴마크 인민당, 오스트리아 자유당) 최초의 유럽 인민주의 정당은 ‘응석받이’ 공산주의자, 복지수혜자, 이민자를 비난하는 우파 인민주의였다. 미국과 달리 유럽의 인민주의 정당은 다당제와 비례대표제 때문에 10년 이상 지속되었다.
한때 주춤했던 유럽의 인민주의는 2008년 금융위기와 난민의 증가, 이슬람 테러리즘을 배경으로 다시 폭발했다. 특히 금융위기의 충격이 상대적으로 적지만 난민이 집중되는 북유럽에서는 우파 인민주의가 지배적이다.
예컨대 2015년 오스트리아 대선 1차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 호퍼가 34퍼센트로 1위를 차지했다. 영국에서는 1993년 설립된 영국독립당(UKIP)이 200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16.5퍼센트를 획득했고, ‘낙후된 영국’의 반란을 주도했다. 그들은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이민 반대 여론을 유럽탈퇴로 번역했다.
유럽 국가 중에서 이민자 유입과 테러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은 프랑스에서는 국민전선이 득세하고 있다. 2016년 5월 여론조사에서 마린 르펜은 공화당, 사회당 후보를 눌렀다.
국민전선의 창립자 장-마리 르펜의 셋째 딸인 마린 르펜은 반공주의를 반이민주의 및 반이슬람으로 전환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프랑스민족주의를 공유하지만, 2008년 아버지와 공식 결별하고 그 이전 세대와 확연히 구분되는 정치스타일을 보인다.
또한 경제적 민족주의에 근거한 새로운 강령은 ‘재산업화를 위한 전략계획’, ‘불공정경쟁에 대항하는 관세·쿼터제’를 제시한다. 이는 대량이민에 대한 반대와 결합된다. 2017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 그녀가 승리할 것인지가 현재 프랑스 사회의 최대 관심사다.
유럽에서 좌파의 진퇴양난
이제 대서양 양편의 미국과 유럽에서는 반이민(“이민자가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는다”), 탈세계화(“세계화가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를 쟁점으로 우파 인민주의가 거세게 재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좌파는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있는가?
특히 유럽의 경우, 좌파 신생정당 시리자와 포데모스, 영국노동당의 코빈은 유럽통합의 심화인가, 아니면 탈유럽인가라는 쟁점을 두고 진퇴양난에 빠져있다.
시리자는 재정위기를 거치며 중도좌파 정당, ‘그리스사회주의운동’(PASOK)을 대체하여 부상했으나, 집권 후 최종적으로 유로존 탈퇴를 포기하면서 그 이전보다 더 가혹한 긴축안을 수용했다. 결국 중도좌파의 정치적 담당자를 교체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창출하지 못한 셈이다. 또한 시리자와 동조 경향을 보이던 포데모스는 시리자의 실패 후 주춤하는 양상이다. 코빈은 브렉시트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였고, 그로 인해 당내에서 심각한 공격을 받고, 당 대표직 상실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다.
탈세계화와 반이민이라는 외국인혐오-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우파 인민주의의 공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유럽 차원에서 초민족적인 대안과 운동이 긴급하다. 즉 난민과 이민자 문제에 대한 공동의 대안, 남유럽 재정위기에 대한 공동의 대안이 관건이다.
노동자운동에 닥친 도전
미국의 탈세계화 흐름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지금 당장 현실의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트럼프는 대통령 취임 직후 NAFTA 재협상을 지시했으며, 그 다음 날인 1월 23일 전격적으로 TPP 탈퇴를 선언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언론은 관련국이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속도”이며, 그에 따라 한미자유무역협정 재협상도 이제 “발등의 불”이라고 보도했다. 한미FTA와 TPP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던 한국과 미국의 노동조합은 트럼프와 같은 방식의 탈세계화에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
미국노총(AFL-CIO) 위원장 리차드 트룸카는 1월 24일 《가디언》 기고를 통해 “우리는 TPP의 죽음을 축하한다. 이제 NAFTA가 반드시 개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미국인은 2016년 대선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를 두고 분할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분명한 과제가 부상했다. 그것은 무역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입장에 대한 강력하고 광범위한 지지”라면서 TPP로부터 철수는 “노동자와 우리의 동맹세력이 수년간 행동한 결과”라고 말했다. 즉 트럼프의 탈세계화를 ‘노동자운동의 승리’로 간주한 셈이다.
나아가 그는 NAFTA 재협상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①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S)를 제거해야 한다. ②노동·환경조항을 부속합의에서 핵심문서로 이동시키고 강제성을 높여야 한다. ③환율조작국 문제, 국내 자동차산업 보호, 바이아메리카법(사회간접자본 건설 시 미국산 철강제품 사용을 의무화한 것)의 강화, 무역촉진법(자유무역협정 체결국가가 부정하거나 차별적인 행위를 할 때 대통령의 재량에 따라 관세, 쿼터로 보복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의 강화를 다뤄야 한다.” 그가 세 번째 원칙으로 제시한 것들은 트럼프의 정책과 크게 공명할 수밖에 없다.
과연 트럼프의 탈세계화에 대항하는 국제연대가 가능할까? 탈세계화가 아닌 대안세계화라는 관점에서 노동자연대를 모색할 수 있을까? 과거 한국 사회운동이 전개한 ‘한미FTA 반대’ 운동에는 반세계화(탈세계화)와 대안세계화의 경향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제 한국에서 대안세계화를 지향하는 운동은 진정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