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7/11 제34호
노동조합이 '희망'이 되려면
오늘날의 노동조합과 사회운동 노조주의
오늘날 우리에게 노동조합은 무엇인가? 어떤 이들에게 노동조합은 ‘절망’이다. 대다수 노동자에게 노동조합이 희망을 주기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가미되어 체제 안정화를 위한 프로파간다에 악용될 때 노동조합은 노동자운동 탄압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가령 문재인 정부의 극렬 지지자들에게 민주노총은 어느 순간 “적폐” 혹은 “홍준표 같은 놈들”이 됐다. 정권을 돕기는커녕 ‘극단적으로’ 반대만 외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들에게 노동조합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무노조 사업장 노동자, 무권리 상태의 노동자 대다수는 노조를 하나의 ‘권력’으로 받아들인다. 현대자동차에 납품하는 중소 부품사 노동자는 정규직이라 할지라도 현대차 사내하청 비정규직보다 임금 수준이 낮다.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의 평균 연봉이 약 4000~5000만 원인데 반해, 2차 벤더 정규직의 임금은 2400~2800만 원 선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고용정보원의 연구에 따르면 노조가 있는 직장에 비해 노조가 없는 직장을 첫 직장으로 선택한 젊은이들이 이직할 확률이 77퍼센트 높게 나타났다. 이런 것만 보더라도 확실히 노조가 없는 곳은 노조가 있는 사업장보다 임금과 노동 조건 등에 있어서 열악함을 알 수 있다. 이런 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기댈 곳은 사장의 선의와 아량 외엔 아무 것도 없다. 이처럼 원·하청 수직계열화 구조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노조가입률이 떨어지다 보니 ‘노조’를 권력이라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노조하면 만사형통?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하종강 교수는 《한겨레》 칼럼을 통해 노조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은 한 사업장의 상황을 소개했다. 이들이 가입한 상급단위 노조는 “노조를 설립하고 한 달이 지나도록 단 한 차례의 교육도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하종강의 짐작대로 이 상급노조 위원장은 “회사 관리자들을 뻔질나게 만나며 뒤에서 거래하듯 일을 처리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이처럼 관성에 빠진 모습은 희귀한 사례가 아니다. 이미 우리 민주노조 운동에는 ‘민주노총은 한국노총과 다르다’는 말로 가릴 수 없는 무수한 문제가 존재한다. 보수언론에서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노조 관료의 부패 스캔들이 아니더라도, 노조들은 활력을 잃었다. 조합원 교육은 규정상 억지로 하는 요식행사가 되었고, 사회운동과의 연대는 체면치레만 하면 그만인 것으로 여긴다. 그만큼 민주노조 운동은 방향을 상실하고 자기 이해관계에 갇혀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노조에 실망했다”는 냉소로 노조를 떠나기도 하고, “임금 좀 올리고, 내 고용만 지키면 되지”의 실리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싸웠는데도 패배했고, 그래서 노조를 떠나는 경우라면 어쩔 수 없지만, 이처럼 노동자들에게 ‘노조의 향기’를 전달하지 못해 마주하는 패배의 무게감은 너무도 크다.
민주노조 운동의 쇠락
한때 ‘세계 노동운동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한국의 노동조합이 왜 이런 모순을 뒤집어쓰게 된 걸까? 단순히 노조 상층 관료들의 타락 또는 자본과 정권의 탄압 때문인가? 노동조합 운동 자신이 스스로 혁신해야 할 일은 없나?
군부 독재 시대의 탄압으로 사라지다시피 했던 한국의 노동조합 운동은 70년대 여성노동자 투쟁을 통해 부활한다. 80년대 중반에 이르면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중소기업에서 대기업 사업장으로 전이되고, 학생운동과의 연대를 통해 전국적인 민주노조운동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1987년부터 1997년까지 민주노조가 보인 전투성은 일정 한계를 갖고 있었다.
우선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당시 한국 경제는 20년 만의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중소기업들이 연쇄 도산을 겪었고, 대기업 공장가동률은 저하됐다. 자영업 몰락으로 사상 초유의 대량 실업 사태도 일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침대로 외자 유치에 올인했다. 기업 수준의 임금인상 투쟁에 익숙했던 노조는 크게 변화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곤란을 겪었다. 1987년 이후 10년 간 이어온 ‘임금 인상’같은 공세적 쟁점이 아니라, ‘고용 안정’이라는 방어적 쟁점이 전면 부각되었다. 특히 노사정위원회 협상 과정에서 민주노총은 참여와 불참, 총파업 선언과 철회 사이에서 갈지자 행보를 이어나갔다. 전략은 부재하고 임기응변식 대응에 급급했던 민주노총 조직 내 갈등과 혼란은 가중됐다. 외환위기 1년 전인 1996년 말~1997년 초에 노동악법 날치기에 맞선 총파업을 ‘성공적’으로 치렀던 성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새 정부의 정리해고제 및 파견제의 법제화에 맞서 분명한 전선을 긋지 못하고 패배했다. 1996~1997년 총파업의 드높은 함성은 민주노조운동의 ‘마지막 만찬’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다음으로 민주노조 운동은 ‘정규직-대공장-남성 중심 노동운동’의 굴레를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개별 사업장의 문제에 갇혀 일터 밖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경향도 심해졌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정주노동자와 이주노동자, 원청과 하청 등 노동의 분할은 노동자의 단결을 가로막았다. 물론 지난 10여 년 간 민주노조 운동은 비정규직·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이들의 투쟁을 통해 존재 의의를 지켜왔다. 하지만 비정규직·여성·중소·영세 기업 노동자의 조직률은 정규직·남성·대기업 노동자에 비해 여전히 낮다. 앞으로 더 많은 수의 노동자가 노조에 가입하면 노조의 폐쇄성도 일부 개선되겠지만, 한편으로는 노조가 스스로 혁신하지 않고서는 ‘대안 노조’가 되기도 힘들다. 때문에 “어떤 노동조합이 되어야 하는가?”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보다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무엇을 혁신할 것인가
비교노사관계학의 석학 리처드 하이만은 각국 노동조합의 역사와 변화를 ‘불변의 삼각구도’라는 틀로 분석한다. 그는 노조가 시장·사회·계급이라는 세 개의 꼭짓점으로 이뤄진 삼각구도에서 어느 한 변에 정착해야만 안정화된다고 말한다. 노동조합은 시장의 행위자·사회통합의 매개자·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세력 셋 중 하나를 이념적 지향으로 가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미국과 영국의 비즈니스 노조주의(여기서 ‘노조주의’란 넓게는 노조의 지향과 이념, 좁게는 노조의 모델을 의미한다)는 사회운동이나 계급 지향보단 실리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한데, 그러다보면 노조는 단순히 노동시장에서의 이익만 추구하는 조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고, 노조 밖의 대중들로부터 고립되기 쉽다. 실제로 이들 노조는 신자유주의 금융화 이후 구조조정과 노동시장 유연화가 심화되자 점점 쇠락해갔다. 반면, 이에 대한 비판으로 계급 행위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향의 노조도 존재한다.
하이먼의 분석틀은 노조가 마주한 난관을 직시하는데 좋은 힌트를 준다. 노동자운동이 어떤 조직 전망을 가져야 할지, 기존의 노조 전통은 어디까지가 자원이고 어디서부터가 제약인지, 그리고 노동자운동이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민주노조 운동이 젊은 세대와의 거리감, 미약한 조직률, 그로 인한 계급대표성의 상실(대다수 미조직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이 자신들을 대변하는 조직이라고 여기지 않는 게 현실이다)을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사실 한국의 노조 운동에는 몇 가지 경향이 혼재되어 있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비즈니스 노조주의도 있고, 사업장 내에 갇힌 전투적 조합주의도 존재한다. 반면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전통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중 가장 큰 부위를 차지하는 것은 아마도 노동자 내 분열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심화되는 실리주의일 것이다.
예컨대 자동차 판매연대노조가 직접 고용된 노동자들이 아니란 이유로 금속노조로 받아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현대차·기아차 판매위원회 조합원들,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에 반발하는 전교조 조합원들,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현장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여기는 건설노동자 등 분열상은 뼈아프지만 이미 우리 눈앞에 다가온 현실이다.
물론 이는 노동자운동이 자신의 정치적 비전과 실천태를 밝히지 못한데 따르는 위기의 결과일 따름이다. 결과의 양상에만 집착해 도덕주의적인 비난만 쏟다보면 보수언론의 프로파간다에 수렴되거나, 도덕적 비난에 그칠 공산이 크다. 그러면 당연히 구조적 원인에 대해선 놓치고 지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적 원인과 복합적 모순에 주목해야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혁신해야 할지 가늠할 수 있다.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노조법에 따르면 노동조합은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며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기타 노동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 또는 그 연합단체”(노동조합 및 노사관계조정법 2조 4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개인은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이윤 추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본가들에 비해 훨씬 열악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때 개인으로써 직면할 불합리한 대우와 열악한 노동 조건에 ‘집단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보장된 제도가 바로 노동조합이다. 이를 위해 임금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노동자계급이 처하는 궁핍과 불안정으로의 경향에 반작용하는 것이 ‘경제투쟁’인 셈이다.
헌데 이러한 경제투쟁은 임금노동이라는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한 투쟁이다. 때문에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나아가 자본은 노동자를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등으로 분할 관리하고, 이를 통해 노동자계급을 ‘개별 노동자’로 명명한다. 과거 ‘노동자’가 계급적 단결의 존재 조건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분열하고 갈등해야 할 이유가 너무도 많은 사회를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노동자운동은 정세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다른 방향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노동자 간 경쟁을 지양하고 단결을 모색해야 모순의 원인에 맞선 투쟁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방향이 바로 정치투쟁, 즉 사회운동이다. 사회운동은 기업별·업종별·직종·국적·성별에 따라 상이한 이해관계로 어긋날 수 있는 경제투쟁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운동을 지향한다. 물론 이때의 정치투쟁은 정당 건설을 향해 질주하는 국한된 의미의 운동이 아니다. 여성·평화·생태·반빈곤 등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다양한 모순에 맞선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이 운동을 이끄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노조 운동이 경제투쟁에 몰입된 한국에서 소위 ‘정치운동’은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의 실천으로 제시됐던 진보정당 건설에 맡기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문제는 노조들의 정치적 실천이 점점 당원 배가 사업으로 대체되고, 동시에 진보정당은 끊임없이 우경화했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경제투쟁을 맡고, 진보정당은 정치투쟁을 맡는 식의 이분법이 각 운동을 협소하게 만들었다.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이런 난맥상에서 유의미한 길을 제시한다. 임금과 노동조건의 개선만이 아니라, 노동과정·투자·신기술·배치전환·하청·기술교육 등 임금노동 내부의 다양한 문제를 둘러싼 전략과 투쟁에 눈과 귀를 연다. 기후정의운동이나 여성운동과 대립하지 않고, 공동체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사회운동과 공동 행동을 추구함으로써 문제를 극복한다. 나아가 사회적으로 유용하고 생태를 해치지 않는 생산물·노동시간의 단축·자원의 분배와 가사노동의 공유 등 위계적이고 관료적인 노동 방식과 노사관계에 맞선 운동을 지향한다. 제도상 노조로 조직되지 않거나 조직화가 불가능한 민중들과 연대함으로써 계급적 단결을 추구하고, 궁극적으로 초민족적 연대를 통해 자본가들이 추구하는 노동의 신축화에 맞선다.
물론 사회운동 노조주의란 용어엔 모순과 긴장이 있다. 사회운동은 민중의 보편적 권리를 지향하면서도 기존의 정당 형태와는 구별된다는 함의를 갖는다. 따라서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노조 모델이 아니다. 제도적 기구로서의 노동조합(노조주의)과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대중운동 조직(사회운동)으로서 노동조합이란 이중성을 인식하고, 두 경향의 모순적 통일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노조가 희망이 되려면
여러 모순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에게 노동조합은 아직 ‘희망’이다. 2015년 한국노동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무노조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23.3퍼센트가 노조에 가입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회사에 노조가 있음에도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경우 40.6퍼센트가 “가입 자격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6.8퍼센트는 노조 활동에 대한 불만, 4.1퍼센트는 주위와 사측의 만류 때문이었다. 올해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 국민의식조사연구팀 조사의 경우, 임금·고용안정·부당대우로부터의 보호 등 ‘노조 효과’에 대한 기대가 예년에 비해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도 노조가 경제성장이나 정치적 민주화, 불평등의 완화 등 긍정적 영향을 가져올 것이라 답한 사람들이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라 답한 사람들보다 훨씬 많았다.
물론 노조 가입률은 10퍼센트로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고,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상당수 노동자들에게 일터의 민주주의는 요원하다.
최근 파리바게트 제빵 기사들은 정권 교체나 정부 정책만으로는 자신들의 삶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중간착취 근절을 위해 노조를 결성했다. 이런 사례들이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90퍼센트의 노동자들에게는 노조가 불필요하게 느껴지거나, 혹은 접근하기에 너무 어려운 대상이다. 오늘날 노동조합의 형태가 그만큼 높은 성벽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노조 가입의 문턱을 낮추고 중간 단계를 설정하는 것, 혁신된 전략조직화 사업과 대대적인 노조 가입 캠페인이 필요하다.
이는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문제설정이 있어야 일관적일 수 있다. 예컨대 남성의 노조 가입률이 14퍼센트인데 비해 여성의 가입률은 약 6퍼센트인데, 노조운동이 여성주의적으로 혁신하고 성차별에 맞선 운동과 연대하지 않고 여성 노동자들에게 ‘노조에 가입하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비정규직·이주노동자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조직 혁신과 더불어 정치·사회운동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
11월부터 민주노총은 본격적인 선거운동 국면에 들어선다. 아무쪼록 선거운동 기간이 구태의 반복이나 정파 간 갈등의 재생산으로 점철되지 않고, 민주노총이 혁신의 주체가 되기 위해 어떻게 변모해야 할지 조합원들 사이에서 진지한 토론과 논쟁이 이뤄지는 시간이 되길 기대한다. 직선제 1기 이후 등장할 새 지도부가 갱신된 의미의 사회운동 노조주의로 과감하게 혁신되어야 ‘노조 조직률 30퍼센트 시대’ 역시 가능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이 수세적 저항에서 공세적 변혁을 주도하는, 모든 노동자를 위한 연대노총·청년노총으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신자유주의 노동체제를 청산하고 민주적·진보적 노동체제를 건설해야, 노동자가 주인인 나라, 연대가 살아 숨 쉬는 사회 역시 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