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총선은 그들의 위기를 증폭하고 있다. 정동영 의장은 현재 지역구 판세가 110대 110의 박빙이며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며 선대위원장에서 사퇴했다. 한겨레는 사뭇 비분강개한 어조로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안일하게 대처하여 차떼기 부패와 대결정치에 골몰한 한나라당에게 면죄부를 주게 생겼다며, 망국적인 “묻지마 지역주의”가 결국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고 질타하고 있다. 만약에 한나라당이 스스로 설정한 개헌저지선(100석)을 훨씬 넘는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한겨레의 해석을 그대로 따라 망국적인 지역주의와 낡은 국민의식을 한탄해야 하는 것인가? 또는 열린우리당이 1당을 차지하게 되면, 정동영 의장이 말해온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으로 간주해야 되는가? 그리고 그들의 주장대로 거여(巨與) 또는 권력 단점이 순조로운 경제발전을 보장하리라 기대해야 하나?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또는 그들의 지지자들이 희망하는 것처럼 둘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먼 것은 아니다. 어느 한편만이 지역주의인 것도 아니고, 또 다른 편만이 “글로벌 스탠다드”를 개혁의 모범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지금, 여야 정당 모두가 이라크 파병문제는 미국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정부의 입장을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고, 검찰이 거액의 정치자금을 건넨 재벌총수를 감옥에 보내지 않기로 한 것에는 침묵으로 환영 의사를 대신하고 있다. 서로 “아끼는 친구” 같지 않은가? 이렇게 본다면, 그들이 “상생의 정치”를 못할 것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지금도 사생결단의 싸움을 하고 있다. 왜 그런가? 망국적인 지역주의? - 거짓 희망을 조작하기 위한 지역주의의 동일한 과정 한겨레는 “심판 없는 지역주의 우려된다”는 사설에서 한나라당의 영남권 싹쓸이는 지역주의 탓이라고 밖에 해석할 길이 없고, 호남권에서 민주당의 재부상도 역시 그러하다고 규정하였다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높은 충청권만이 지역주의를 극복한 유일한 사례인가). 그러나 지역주의는 왜 재생산되고 있는가? 사실 노무현이 대선에서 승리를 거둔 것도 “지역발전”이라는 희망을 조작하여 지역감정을 동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노무현은 호남 지역에선 DJ의 계승자로, TK에서는 YS 이후 이 지역을 대변할 지도자로 자임했고, 충청권에 대해서는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실리적 기대를 제시했다. 노무현의 등장은 지역주의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안배하거나 조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역주의를 승인하거나 조작하는 것은 어떤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다. 이는 현재의 경제개혁이 낳은 지역경제의 파탄과 불균형에 따른 것이다. IMF 이후 지역산업의 공동화가 심화되었고, 주식■부동산 시장 팽창에 따라 자금의 역외 유출도 커져서, 대부분이 수도권으로 몰렸다. 지자체는 산업특화를 통해 투자를 유치하거나 소비■레저산업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바닥을 향한 생존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국회의원 출마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을 공약으로 내걸고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러므로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 철회를 단지 “망국적 지역주의”, 또는 “지역주의=지역이기주의”라는 도식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노무현 정권이 실리적인 희망을 실현하거나 새롭게 조직하지 못한 결과를 반영한다. 이런 지반 위에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민주당)이 격돌하고, 그 결과가 드러나는 동일한 과정이다. "박근혜”? - 보수의 편에 선 개혁으로의 수렴? 물론, 박근혜는 박정희 시대의 향수나 지역주의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쉽게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그가 정치적으로 여러 얼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자유주의”적인 의제에 대해 유연성을 내세울 수 있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는 사실이다. 전 청와대 수석비서관이었고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출신인 박세일을 선대위공동위원장으로 내세우거나, 지금까지의 한나라당 당론과 달리 “호주제 폐지”를 정책으로 삼겠다고 한 것이나, TV 광고에 김정일 위원장과 만난 장면을 삽입하려 했던 계획 등등은 중요한 사례다. 또한 “대한민국의 세 가지 상징은 현충원, 4.19묘지, 광주 5.18묘역이며, 나름의 정통성이 있고, 서로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연설도 그 단면을 볼 수 있다 (물론 박정희 정권의 문제는 생략한 교묘한 발언이다). 이는 지금까지 신자유주의 세력이 선도하거나 독점하려 했던 의제들에 대해 선택적으로 유연하거나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노선이 과거 이회창의 그것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이회창의 철저하게 엘리트주의적인 이미지와 상반되는 이미지를 갖추고 있다는 것은 현재의 정치 행태에서 큰 강점이다. 물론 시도해보겠다는 의지와 반대로, 호주제 폐지 공약은 당 내 입장을 수렴하여 총선 이후에 하겠다고 말한 것이나, 북한방문 영상도 기존 반공단체의 의견을 수렴했으나 결국 조금의 역풍도 있으면 안되겠다는 판단으로 중도 포기한 것도, 역시 중요한 대목이다. 남한의 보수세력이 마스크를 바꾸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디어-파퓰리즘을 향한 큰 방향은 열린우리당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는 이처럼 여러 얼굴을 지녔으므로, 여러 모로 유리한 점도 많을 것이다. 미디어 파퓰리즘? - 미디어가 정치를 제시한다. 모든 언론은 이번 선거가 “정책선거”의 상식적인 틀을 벗어났다고 앞다투어 지적하고 있다. 조선일보마저 “선거전이 막판까지 천박하고 표피적인 전술과 정치쇼로 일관하고 있다”며 울분에 찬 듯 주장하고 있다. 언론이 나서서 이번 선거가 “감성정치”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언론들이 그러한 흐름에 편승해 특정 정당 편들기에 골몰하고 있다고 서로 극한 패싸움을 펼치고 있다. 물론 각 정당들이 이념과 정책에 호소하는 것보다는, 특히 TV라는 막강한 매체를 중심으로 이미지 조작에 치중해 지지자들을 일시적으로 끌어들이려는 행태를 미디어 파퓰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제 미디어가 정당의 역할을 대행한다는 사실이다. 곧 미디어가 위로부터 사회질서를 부과하기 위한 정책을 제시하고, 또한 전략이나 정책에 대한 “유권자”들의 선호도를 조사해서 대처할 방법을 제시하고, 지지자들에게 어떤 상황에 대처할 담론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현실 전체를 가리킨다. 어쩌면, 언론이 현재의 정당정치를 일관되게 비난하는 것은 그들의 역할을 돋보이게 하려는 일관된 노선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곧 정당정치를 완전히 대체하리라 말할 수 없다. 다만 정당이 원내정당화를 지향한다는 것, 곧 기존의 대중 동원체계를 스스로 제거하고, 이를 전문가주의와 미디어를 통해 해결해 나간다는 것은 분명한 방향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방향으로의 전개가 가능한 것은, 이미 어떤 정책들이 누군가에 의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와 세계 경제기구들이 제안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시대를 선도하는 경제, 사회정책은 세계 공통으로 이미 주어진 것이다. 이제 각 나라에서는 전문가들을 육성해 미디어와 정당이라는 기구를 통해 그것을 제안하고 실현하고 지지를 동원하는 체계를 작동하면 된다. 각론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세가 다른 것은 결코 아니다. 민주대연합? - 거여는 아무런 정책전환도 준비할 수 없다. 현재 열린우리당은 어떤 정책전환도 예고하지 않고 있다. 단지 천재일우와도 같은 “탄핵심판론”에 기대 기사회생을 바라며, 정동영 의장과 386출신 초선의원이 농성에 들어갔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여가 되면 무슨 일을 하겠다는, 어떠한 포부에 찬 말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열린우리당은 이미 집권 1년 만에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바닥으로 내려간 과거를 어떻게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무엇이 노무현을 위기로 몰아넣었는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이 낳은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즉 사회 재건을 동반하는 안정적인 프로그램이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책, 즉 그들이 위로부터 부과하려는 사회의 질서는 반드시 누군가를 희생하여 소수의 집단만이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모순된 성격을 지녔다. 따라서 정치적 위기관리의 실패는 항상 내재한 것이고, 어떤 우발적인 문제로도 쉽게 전면화될 수 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개혁프로그램과 미디어 파퓰리즘에 의존하는 여야정치는 특정한 이념과 정책에 바탕을 둔 안정된 지지연합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항상 지지율의 급등과 급락을 반복하지만, 그 결과가 뚜렷한 정책전환으로 나타나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만성적 위기다. 그것은 “현직”, 즉 집권세력인 열린우리당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여야정당의 어떤 시도도 단지 위기를 미래로 연장시키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여야의 악무한 대립은 연장된다. - 민중운동의 입지점은? 물론 IMF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행정부와 사법부로의 권력집중 현상은 특정 세력이 권력을 독식하겠다는 욕망의 표현만은 아니다. 그것은 경제, 사회개혁을 신속하고 파괴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집권세력이 강력한 행정부와 사법부를 장악한 후 의회에서조차 세력을 크게 신장한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안정적인 정국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노무현 정권 1년이 보여준 악순환이 더 큰 형태로 반복될 것인가? 지금까지 노무현 정권은 집권세력에게 모든 화살이 꽂히는 것을 분산하려고 모든 시도를 다했다.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그의 발언이 대중인기에 영합하려는 정책이 원래부터 실현 불가능했다는 현실을 국가기구의 일부에게 떠넘기려는 시도였다면, “정규직 노동자 이기주의” 발언은 민중 생활의 위기를 노동자 대중 일부에게 전가하려는 의도였다. 집권과 정치적 위기관리를 위해 내놓은 거짓 약속이 파탄나면, 그것은 남의 탓이었던 셈이다. 이런 방식의 정치 행태는 의회에서 세력을 신장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내기는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여야 간의 갈등을 더욱 고조시키고, 민중운동을 더욱 벼랑으로 몰아넣기 위한 전략을 동반할 것이다. 한편 이러한 현실은 대거 의회진출을 앞두고 있는 진보정당에게 큰 시련을 의미할 것이다. 어떤 국면들의 연속 속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꽃놀이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하기보다는, “차악”의 선택을 항상 강요당하는 고역에 직면할 수 있다. 이는 특정한 법률안에 대한 선택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최근까지의 “노동법 개악”의 흐름처럼, 특정한 정책묶음의 교환을 선택하라는 상황이 인위적으로 조장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단적으로 최근 대통령 탄핵사태에 같이, 여야정당의 악무한적 대립에서 누구의 편에 설 것이냐는 선택을 강요당할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어떤 편에도 설 수 없는, 그리하여 무대에서 조연자 역할에 머물라는 어정쩡한 위치를 강요당할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이번 탄핵사태에서 민주노동당의 위치였던 듯하다. “탄핵기각, 진보정치 실현”으로 요약되는 모호한 태도는 현재의 “진보야당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차악의 선택이나 “진보야당”의 모호한 입지점을 거부하고자 한다면, 이는 오직 사회운동들과의 밀접한 연대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현재의 지지율의 상승은 이러한 요구를 가리키고 있다). 진보정당이 “정책정당”을 표방하고자 한다면, 그 정책은 어떤 이론적 구축물에서 도출된 것이거나 위로부터 새로운 질서를 부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실현하고자 하는 투쟁을 강화한다는 목표를 의미해야 할 것이다.
노무현정부 1년 평가와 2003년 백서 < 순 서 > <총론> 1. 노사관계 2. 임금 3. 노동안전 4. 공공부문 5. 여성 6. 사회복지 7. 통일 8. 인권 9. 국제 10. 언론
1차 월례포럼 때 논의되었던 것을 정리했습니다. 간략하게 나온 이야기들을 논지에 따라 스케치 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
지난 4월 1일 진행된 여성위원회 1차 월례포럼 발제문입니다. 주제는 '여성의 의회진출, 어떻게 볼 것인가?'였고, 간략하게 발제문을 제 출했습니다. 이 글은 월간사회진보연대 4월호 정세초점에 실릴 것입니다.
서명도 많이 받고 서명받으면서 만약 발의안을 상정한다면 무엇을 요구하 고 싶은지에 대해서 이야기나눠봅시다. 개인의 삶의 요구가 정치적 요구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토요일날 만민공동회에서 같이 이야기해보자고 하면 좋을 것 같습 니다.
정치적 권리 탄압 중단하고 연행자를 즉각 석방하라 ! 오늘 4월 2일 전교조 충북지부장, 경남지부장에 이어 원영만 위원장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백주대낮에 노상에서 불법 폭력 강제 연행되었다. 경찰은 체포영장도 제시하지 않았다. 더욱이 원영만 위원장의 출석 요구 시한도 지나지 않았다. ‘탄핵 무효, 부패정치 청산, 진보적 개혁정치 촉구 교사선언’ 행위와 인터넷에 민주노동당 지지방침을 밝힌 것이 국가공무원법,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에 규정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또한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지난 3월 23일 “업무상 정치적 중립은 철저히 준수할 것이나 공무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치사상과 신념의 자유까지 부정을 당하는 '정치적 중립'에는 동의할 수 없으며, 온 몸으로 저항할 것이다”라고 결의하며 민주노동당지지를 선언한 것에 대해서도 선거법 위반이라며 공무원 노조 지도부 수사 착수에 들어갔다. 부패를 일삼으며 자신들의 정치권력 창출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지배정치권을 심판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고자 하는 민중의 정치적 열망은 현재 한층 고조되어있다. 비정규직, 실업, 빈곤 등 노동의 위기와 가족의 해체, 교육의 붕괴로 고통 받는 민중의 생존 위협에 책임을 묻고자 정치적 입장을 표출하는데 직장, 신분의 차별이 있을 수 있는가. 헌법에도 명시되어있는 정치의 자유와 참정권을 공무원, 교사 직분의 ‘정치적 중립의무’라는 이름으로 침해하는 것은 정권의 하수인으로서의 역할을 강제하고 나아가 공무원, 교직원 노동조합의 활동 자체를 탄압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정치의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 선거에서 투표행위를 하는 것만으로 제한될 수 있는가. 총선을 앞두고 ‘부패정치를 청산하고 진보적 개혁정치’를 만들어갈 것을 교사의 이름으로 선언하는 것도 정치의 자유를 가진 국민이 취할 수 있는 정치적 행동이다. 직분을 이유로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시대착오적인 선거법 조항에 저항하는 정치적 권리 쟁취를 위한 노동자운동을 정부는 더 이상 탄압하지 말라. 정부가 계속 대대적인 탄압으로 일관한다면 민중의 정치를 염원하는 민중운동의 강력한 저항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더 이상 미룰수 없다! - 송두율 교수 실형 선고를 규탄하며- 한국정부는 37년만에 귀국한 송두율 교수를 결국 징역 7년형이라는 중형을 선고하였다. 재판부는 불충분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었다는 국정원과 공안검찰의 확신을 '예단'하여 인정하였다. 국정원이나 검찰이 송교수가 노동당의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주장해왔던 것이 사실은 황장엽의 '카더라' 식 진술과 1999년에 망명하였다는 독일 북한이익대표부의 김경필의 디스켓 문서밖에는 근거가 없다는 점이 심리과정에서 드러나 재판부가 이를 인정하기에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스스로 밝힌 실권이 없는 '명예직'에 불과한 정치국 후보위원이 했다는 지도적 임무라는 것이 결국은 책을 써서 남한 국가안보에 위협을 가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논리로 뒤집어 버렸다. 또한 재판부는 송교수가 '경계인'을 가장하여 북한 체제에 경도된 주장을 객관적인 것인 양 위장하였음에도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음으로 중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반성도 할 줄 모르는 위선자이기 때문에 중형에 처해 마땅하다는 이 대목은 국가보안법이란 것이 사법당국의 자의적인 잣대로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는 죄형법정주의가 적용되지 않는 반인권 법률임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사회에 존재하는 정치,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이다. 다시 한번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한다.
전국공무원노조의 정치적 자유 선언에 지지와 연대를 보낸다. 최근 전국공무원노조(이후 전공노)가 공무원의 정치활동 보장을 선언하면서 공무원의 정치적 의사표현과 정치적 중립성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정부 당국은 예의 공무원의 정치 중립을 운운하며 전공노에 대한 탄압을 예고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정부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혹시라도 이를 빌미로 공무원의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탄압에 나서려는 것이 아닌지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번 기회에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헌법에 명시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 내용이 과연 국민으로서 당연히 갖는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 및 참정권을 제한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모든 국민은 기본권적 권리로서 참정권과 정치적 의사결정 및 표현의 자유를 당연히 가지며 공무원도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정치적 중립과 선거 중립을 구분해 사고할 필요가 있다.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이란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규정이 아니라 선거 사무에서의 공정성과 중립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며, 이를 단순히 문구의 해석으로 정치적 중립 그 자체로 해석한다면 명백한 오류이다. 만일 그렇게 해석한다면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정치적 권리와 공무원의 중립을 규정한 두 규정은 서로 상충하게 되며, 그럴 경우 자연법적 상위 개념인 국민의 참정권적 기본권으로서의 정치활동 자유의 규정에 의하여 하위적 구조인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표시한 헌법 규정은 당연히 위헌의 요소를 내포하게 되며, 문구를 바꾸던지 해석을 새롭게 해야 할 필요가 발생할 것이다. 지난 세월동안 정권의 하수인으로 이용하기 위해 공무원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던 구시대적 낡은 사고로 또다시 공무원노조의 정당한 요구를 탄압한다면, 또한 이를 빌미로 공무원노조운동에 대한 대대적 탄압으로 일관한다면, 현 정부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와 민중세력의 치열한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정권의 탄압을 뚫고 공무원 노조 건설과 노동3권 쟁취의 한길로 매진해 온 전공노의 일련의 활동과 정치활동 자유 선언은, 그동안 보수적이던 공무원 사회 내부의 변화를 이끌어 냄은 물론이고 사회의 진보를 위한 민중운동에 커다란 힘이 될 것이다. 그동안의 투쟁속에서 공무원 스스로 자신들의 노동자성을 인식하고 노동자운동의 일주체로서 당당히 성장해 온 전국공무원노조의 투쟁에, 사회진보연대는 동지적 연대를 표명하며 정권의 탄압에 함께 맞서 강력한 공동 투쟁을 결의한다. . 투쟁속에 성장하는 전국공무원노조! 공무원의 정당한 정치활동 보장하라! 공무원도 노동자다, 노동3권 쟁취하자! -2004. 4. 1-
17대 총선에서 여성운동진영은 여성들을 국회로 보내기 위한 운동을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여성들의 과소대표성을 극복하기 위해 여성들이 공적영역에 진출해야 한다는 논리는 예전부터 많은 여성운동들의 동인이 되어왔다. 이에 따라 많은 여성운동 진영은 여성 전문가 양성을 위한 교육, 여성 정치인 발굴, 여성할당제 시행 등을 자신의 주된 과제로 삼았다. 이들의 운동 방향은 정부의 정책으로 수렴되기도 했는데, 여성특별위원회 시기에는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라는 과제로 여성부 건설 이후는 "정책결정과정에 여성의 대표성 제고"라는 정책과제로 여성들의 공적영역 진출을 추진해왔다. 여성운동진영에서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의회진출'이다. 여성운동진영이 여성문제와 연관된 법, 제도의 개선, 여성의 지위향상 등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법, 제도를 입안할 수 있는 국회에 여성이 진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여성운동 진영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각 정당 역시 총선 전략에서 여성 정치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추미애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과 같이 기존 여성 정치인들이 당의 핵심 요직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비례대표 후보 공천에서 50% 이상을 여성으로 할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 여성이 의회에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커 보이는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여성운동 진영이 목적하는 여성의 대표성 확보와 그를 통한 남녀평등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총선 전략에서 각 당이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인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4.15 총선과 여성의 의회진출 작년 8월 19일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를 비롯한 321개 여성단체들은 '17대 총선을 위한 여성연대(이하 총선여성연대)'를 결성했다. 총선여성연대는 발족기자회견에서 "2004년 총선이 정치개혁 뿐만 아니라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에서도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강조하며, "여성들의 힘을 결집해 깨끗한 정치실현과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의 확보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서 드러나듯이, 이들은 정치개혁 실현하고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을 확보하는 것을 활동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이들은 「정치개혁과 여성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제도개선 제안서」를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와 정치개혁추진 범국민협의회에 제출하는 등, 정치개혁 전반을 추동하는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가 결성되었는데, 이들 역시 총선여성연대와 비슷한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 다만 활동방식에 있어서 '여성 100인 국회보내기'와 같이 적극적인 당선운동을 벌이는 것이 다른 점이다.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는 1월 초 '맑은 정치 여성후보 102인'을 발표(발표 후 1명 제외, 총 101인)하고, 각 당에 후보 명단을 제출하여 공천을 요구했다. 이들은 여성 후보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맑은정치여성기금'을 발족했는데, 기금의 목적은 여성유권자들을 후원인으로 조직하여 여성 후보들에게 재정을 지원하는 것이다. 총선여성연대와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 목표는 여성의 과소대표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좀 더 많은 여성들이 국회(를 비롯한 공적영역)로 진출해 여성을 대표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여성이 공적 영역으로 진출하는 것이 여성의 자기 이해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여성이 국회와 정치로 진출하면 정치를 더욱 깨끗하고, 참신하게 만들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이 운동은 그 자체만으로는 커다란 영향력을 얻지 못했다.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가 여성 후보 101인 명단을 각 당에 보냈을 때, 각 당의 반응은 매우 미온적이었다. 하지만 대통령 탄핵 사태 이후, 각 당의 총선 전략이 윤곽을 드러내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일본의 각 신문조차 '한국 정치권의 화두는 여성의 진출'이라고 보도할 정도로 여성들의 의회 진출은 한국 정치 현실에서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추미애 민주당 선대위원장은 탄핵 사태 이후 위기에 빠진 각 당의 '구세주'로 부상했다. 게다가 언론은 연일 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과 박영선 열린우리당 대변인을 양대 라이벌이라는 식으로 부각시키며 양당의 대립을 이미지화하고 있다. 여성들이 기존의 각 정당을 대표하는 지위가 된 것이다. 각 당들은 비례대표 후보 50% 이상을 여성에게 할당하여 확정했고, 이들 대부분이 각 분야에서 전문가로 인정받는 명망가이거나 여성, 장애인과 같이 소수자로 인식되던 부문의 상징성을 가진 인물들이다. 언론의 보도만을 보면 가히 '여성들의 정치 진출 돌풍'이라고 할 만하다. 기존의 어떤 선거에서도 이만큼 여성이,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여성 정치인이 화두가 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여성 정치인이 '뜨고'있는 현 상황은 여성들의 운동에서 나온 성과가 아니다. 여성운동 진영이 보여준 여성을 의회로 보내기 위한 여러 활동들은 애초부터 각 당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물론 대중의 지지가 컸던 것도 아니다. 여성들의 목소리와 여성들의 운동이 정당들의 태도를 바꾼 것은 더욱 아니다. 심지어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와 총선여성연대조차도 각 당이 여성후보들을 대거 공천하도록 압박하는 유의미한 활동을 벌이지는 못했다. 각 당이 여성을 대거 등용하게 된 유일한 계기는 탄핵 사태와 이로 인해 극명해진 의회정치의 위기, 각 정당의 위기였다. 이는 현재 '여성의 돌풍'이라는 현상의 본질을 보여준다. 결국 여성을 정치권으로 영입하려는 각 정당의 움직임은 '여성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생존 전략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다.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과 도덕성, 참신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계속해서 여성의 의회진출을 추진해왔던 여성운동 세력들은 현재의 이 상황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여성의 의제가 탄핵 사태의 소용돌이 속에서 묻혀버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쨌든 여성이 의회로 진출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정치개혁과 여성의 의회진출 운동 실제로 여성이 정치의 영역에서 과소 대표되고 있는 현실은 이미 존재한다. 특히 한국의 경우 국회에 진출한 여성은 극히 적은 수(16대 국회 여성 국회의원 비율 5.9%, 전 세계 여성 국회의원 비율 14.8%)여서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는 많은 여성운동 진영의 주요 과제였다. 그러나 여성운동 진영의 이런 운동이 대중적인 이슈로 부각된 적은 거의 없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공적영역 진출을 위한 흐름은 대다수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기반으로 한 대중적인 운동이 아니었으며,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에는 정부의 신자유주의적인 여성 정책과 궤를 같이하면서 이미 공적 영역으로 흡수되었다. 여성부를 비롯하여 여성들이 진출한 영역에서 여성의제에 관한 정책을 입안했지만, 번번이 국회에 발목을 잡혔다(호주제 폐지 법안이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라). 그래서 여성운동 진영에게 여성의제와 관련된 법안을 제기하고 옹호할 수 있는 여성 국회의원이 필요성이 절박해졌다. 하지만 여성 정치인이 급부상하고 여성의 의회진출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 보이는 당장의 상황은 분명 여성운동 진영의 목적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현실을 살고 있는 여성들의 운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의회진출을 위한 운동 또한 큰 힘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야 정치권이 사활을 건 총선 국면과 정치개혁이 이 문제와 연관이 있다. 탄핵 사태를 경과하며 드러난 각 정당의 위기가 이 상황을 더욱 폭발적으로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대중이 겪는 삶의 위기는 신자유주의 개혁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완수하는 과정은 노동자 대중의 기본권과 날카롭게 대치될 뿐만 아니라 대중이 처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킨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대중의 불만과 투쟁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조정하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행정부의 역할과 지도자의 힘이 필요하며, 정당의 역할도 조정될 필요성이 제기된다. 각 정당은 다양한 사회세력의 갈등을 행정적인 방식으로 조정하는 국민정당, 전국정당, 무지개정당(catch-all party)으로 변환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기존의 부정부패한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새롭고 참신하며, 도덕성과 참신함을 갖춘 인사들로 물갈이를 시도한다. 법조인, 아나운서, 연예인, 행정 관료, 학자 등이 후보 물망에 올랐고, 여성들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전에 비해 높은 비율로 공천 후보에 거명되었다. 기존 정치에 편입되지 않았던 참신함과 부정부패에 연루되지 않은 도덕성을 갖춘 인물로서 여성은 정치개혁이 요구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탄핵사태는 각 정당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여성을 활용하고 있는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대통령 탄핵안 통과 이후, 각 정당은 대중의 강력한 '反의회' 이데올로기 속에서 사활을 걸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만 했다. 각 당은 비례대표 후보 1번을 모두 여성으로 배정했고(자민련을 제외하고), 여성들을 당 요직에 올렸다. 이런 전략의 결정판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박근혜'와 '추미애'다. '이들이 진정 여성을 대표하는가'라는 논쟁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들이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점이 활용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위기에 빠진 당을 자식에 비유하며 자신을 어머니에 비유하는 박근혜의 발언은 '강인하고 희생정신이 강한 어머니'라는 여성에 대한 전통적이고 뿌리 깊은 이미지에 기댄 것이다. 실제 이들은 현실 대다수 여성들의 고통과 위기는 물론이고, 신자유주의 개혁이 양산한 대중의 불만과 불안에 대해서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는다. 오직 온화한 미소와 희생을 감내하는 강인한 어머니 상, 당의 구원을 짊어진 연약한 어깨와 같은 이미지를 부각시키며, 당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행보를 하고 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가 파탄낸 대중의 삶과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사라지고, 여론과 이미지만 난무하는 선거판 선두에 여성이 활용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개혁과 여성의 위기 하지만 신자유주의 정치개혁의 과정에서 여성을 활용하는 것은 단순히 이미지를 조작하는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들은 신자유주의 개혁이 양산하는 위기를 가장 극적으로 경험하는 존재다. 직장과 가사를 병행해야만 하는 여성들은 이중부담에 시달리고, 여성 육체에 대한 상품화가 심화되면서 여성들은 더욱 심각해진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여성들의 결혼 기피 현상과 출산율 저하, 이혼율 증가 등의 문제가 보여주듯이, 여성들은 더 이상 결혼하여 가족을 구성하는 것이 자신의 생존과 양립하기 어렵다고 느낀다.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점차 확대되고 있지만, 여성에게 그것은 자신의 경제적 독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족한 가계 소득을 보충하는 경로이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된 이후 노동의 불안정화 경향에 따라 가계소득이 감소하고, 필수적인 사회서비스 관련 예산이 삭감되면서 가계유지 비용이 급증하였다. 따라서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부족한 가계 소득을 보충하기 위한 노동자 가족의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여성이 노동시장에 진출한다고 해서 여성이 가족 내에서 가지고 있는 부담이 줄지는 않는다. 오히려 공적 서비스 축소와 가족의 부수입을 담당한다는 여성의 위치 때문에 재생산 노동은 여전히 여성의 책임으로 귀결된다. 여성이 처한 이중부담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점차 민중의 기본적인 생존권마저 위협함에 따라 더욱 무거워지고 있다. 따라서 여성들은 자신의 삶을 위기로 몰아가지 않기 위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이런 방법들은 정말 개인적인 차원에서 최소한의 방어다. 여성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면서 자기 조직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모성과 같은 여성의 권리를 포기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가족의 해체는 재생산의 위기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자본과 지배세력은 이 상황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요즘 여성들이 이기적이기 때문'이라는 이데올로기 공세가 심해지는 한편, '가사와 직장의 양립', '여성인력활용방안'과 같은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여성들의 권리와 요구에서 출발하기보다는 자본이 처한 위기 지연 전략을 반영하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 이후, '가사와 직장을 양립'할 수 있기 위한 인프라 구축이 지속적인 정책 과제였고 이를 위한 몇몇 조치들이 취해졌지만, 여성들이 처한 위기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자본의 요구에 따른 여성정책은 여성의 불만을 조정하고자 하지만, 결국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배세력에게는 잠재해있는 여성의 불만과 갈등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여성들이 의회를 비롯한 공적 영역으로 진출함으로써 나타나는 또 다른 효과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다수의 여성들은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 채, 비정규직,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면서 동시에 가족 내의 보살핌 노동과 재생산 노동도 책임지는 현실을 살지만, 이런 현실은 은폐된다. 의회를 비롯한 공적영역에 진출한 여성들이 실제는 현실의 여성들과 전혀 무관함에도 여성의 지위와 현실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요즘 여성 정치인들의 바람이 거세지자 '여성들도 이제 살 만하겠다'는 반응이 바로 나온다. 실제 이들이 여성의 문제를 발언하는가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다. 생물학적인 여성이라는 사실만으로 이미 여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상황은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스스로 조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게다가 여성의 문제를 의회 안에서 형성되는 쟁점으로 가두면서, 진정한 쟁점을 은폐한다. 여성이 의회에 진출하는 것이 여성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여성들의 대중운동을 왜곡하고 여성의 권리를 협소한 틀로 축소시킨다. 신자유주의가 여성의 불만과 분노를 관리하는 방식이 의회와 같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여성들을 자신이 가진 여성의 얼굴로 부각시키는데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현실로부터 출발하는 여성운동 여성의 위기를 은폐하고 신자유주의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정치의 위기를 지연시키는데 활용되고 있는 여성들의 의회진출 흐름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여성운동 진영이 목적하는 여성의 대표성 확보는 지금과 같은 조건에서,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 오히려 여성의 위기를 은폐하고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을 가르는 분할선을 공고히 하면서 여성의 현실을 대표하지 못하는 의회진출이야 말로 여성의 자기대표성 확보에 역행하는 일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처해있는 현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개혁이 양산하는 삶의 위기 속에서 대중의 배제에 대한 공포는 더욱 커지고 있다. 당연히도 자신의 실리를 중심으로 한 요구들이 더욱 강력해지며, 이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방식 또한 이해당사자로서 사회적인 협약과 포섭의 방식이 선호된다. 이런 상황에서 기득권이 없고, 조직화되지 않은 여성들이 스스로 대중운동을 만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의회 공간에 여성을 진출시키려는 여성운동 진영의 활동과 이와 공존하는 지배정치의 여성 활용 전략은 대중운동의 무기력함을 더욱 강화한다. 신자유주의 개혁과 같이 가는 여성의 의회진출 흐름은 여성들의 불만과 불안을 관리하고 은폐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또 다시 여성의 어려운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해야 한다는 논리를 낳는다. 이런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는 출발점은 여성을 억압하고 있는 실체가 바로 신자유주의 개혁이라는 적확한 인식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은 여성을 해방시켜주거나, 혹은 여성의 조건을 조금이라도 개선시켜주는 것이 아니다. 빈곤과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 여성들의 권리를 제기하며 여성들이 스스로 조직화할 때, 그리고 이러한 조직화와 투쟁이 신자유주의가 침식하는 인민의 보편적인 권리를 옹호하는 투쟁이 될 때, 여성은 진정으로 스스로를 대표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 여성이 정치에 자신의 목소리와 권리를 각인시키는 것은 여성의 보편적인 권리에 입각한 투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