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에 노동부에서 발표한 '우리사주활성화방안'입니다. 근로복지라는 미명으로 치장되고 있지만, 노동부의 우리사주제도의 활성화가 무엇을 의미할까요? 최근, 급물살을 타고 추진되고 있는 기업연금제도의 도입맥락(금융화에 조응할 수 있도록 법정퇴직금제도의 폐지와 기업연금 도입의 필요성)과 함께 검토합시다.
발전노조 정책기획실장 유병철 동지를 만났습니다. Q : 아웃소싱 분사 등 구조조정 정책들이 진행되면서 전력 현장의 변화는 무엇이 있고 어디에서 그런 것들을 체감하게 되는지. A : 첫 번째로 현장의 경정비 자체 도입권에서 체감하게 된다. 설명하자면, 현재 일부 정비업무를 한전기공에서 담당하고 있는데 10%정도의 경정비 업무를 자체 도입하여 수행하겠다는 부분이다. 두 번째는 인원충원문제인데 각 발전 5개회사 별로 30명 정도씩이 부족하다. 일부회사는 신규발전소를 증설하면서 거기에 새로운 인력을 충원하지 않고 기존 인력을 재배치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인원충원은 더 없었다. 그 의미는 기존인력의 노동강도를 강화시키면서 새로운 사업장에 투입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발전소 같은 경우는 특수하게 계획 예방정비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무엇인가하면 매 주기를 설정하여 발전기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정비를 하는 것인데 이 정비주기를 늘린다든지, 이런 점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상태다. 이러니까 상대적으로 구조조정에 대한 부담감, 민영화에 대한 부담감이 민영화되기 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Q : 일상적으로 체감하게 되는 노동통제는 어떤 것이 있는지? A : 경정비 부분에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 각 발전소별로 차이가 있긴 한데, 감독 부서에서 매일 정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무업무에서부터 많은 업무를 보고 있다. 실제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다 보니까 경정비를 제대로 하는 것이 어렵고 형식적으로만 하게되는데 그런 부분들이 체감하게 되는 어려움이다. 분사되면서 인원충원이 일부는 한전에서 전직을 안한 파견자들이 있고 대체로 자리가 비어있다. 그리고 인력재배치라고 해서 한쪽 발전소에서 인원이 필요 없고 다른 발전소에서 필요할 때, 개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재배치 시켜버리는, 이런 것들이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것이다. Q : 전문적 인력에 대한 사측의 현장통제방법이 특별하게 있는지. A : 다른 작업장과 비교하기는 어렵다. 운전부 같은 경우는 1시간마다 기기정검이 있다면 그 시간을 단축시켜서 강화시킨다든지, 내지는 신흥조가 회사에 들어와서 그들에 대한 교육을 시킨다든지 이런 식이다. 생산라인과는 달라서 당장 비교하기는 어렵다. Q : 사측에서 정비와 관련해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정비기간을 늘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A : 설비의 안정성 문제인데 예를 들어서 3년의 한번씩 정비를 했는데 경비절감차원에서 4년에 한 번 한다든지, 5년에 한 번 한다든지. 이윤추구 때문에 정비의 횟수가 줄어든 것이다. 단기간에는 발전회사의 이익이 될지도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전기의 안정적인 수급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Q : 전력을 생산하는 노동자로써 굉장한 자부심과 직업의식에 대한 투철함이 있는 것 같은데 A : 발전뿐만이 아니라 대개 기술직 노동자들에게는 자부심이 있다. 그런데 불안감이 무엇인가하면 파업을 하면서도 설비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 특이한 경우인 것 같은데, 조합원들이 파업을 하면서도 현장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다. 이것은 기술자들의 양심인데 설비가 점검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고장발생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에 대한 걱정인 것이다. 그런데 분노스러운 것은 기술자여서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데 정부에서는 전혀 끄덕 없이 전력이 공급이 된다고 국민을 속이고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이 선전한다는 것이다. Q : 2000년도 전력투쟁에 대한 조합원들의 기억, 평가는 어떤지. A : 평가는 내부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사실은 그때 파업철회 이후 조합원들에게 한이 맺혔다. 2000년 당시 파업 철회할 때 발전노동자들은 파업대기현장에 있었다. 그때 한번의 굴복이 지금 싸울 때 힘들게 된 이유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부는 민영화가 국민적 합의를 얻었다고 선전했기 때문이다. 그때 실패했던 것으로 정부의 악선전에 대한 분노가 이어지고 있었다. 2001년은 정부에서 지정하는 준비기간이었는데 1년 동안 별다른 움직임이 없더니만 분사가 되면서 새로운 노조가 설립이 되고 상급단체가 변경되고 그 과정에서 회사에서는 노조의 실체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일이 연달아 생겼다. 이런 묵은 것들이 조합원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올해 들어와서 산자부에서 민영화 안이 발표가 되고 공청회가 열리면서 구조조정 시기에 대한 긴박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Q : 현재와 같은 투쟁이 가능했던 이유는 2000년의 경험이 밑바탕이 되었고 여기에 당장 현실화를 눈앞에 둔 민영화가 투쟁의 동력이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인지 A : 2000년도의 분노와 앞으로 닥쳐올 구조조정 부분은 심정적인 부분이고 사실 큰 것은 발전소 매각문제이다. 외국사, 미국이나 초국적 자본에 의한 매각이 이루어졌을 때, 일차적으로는 고용안정 부분이 있겠지만 고용안정부분보다 전력 대란부분이라던가, 전기요금 폭등, 국민경제 전체에 끼치는 영향이 문제다. 지금 정부발표로는 설비역량의 30%를 외국에 팔겠다. 30%면 발전회사 2개를 판다는 것이다. 단순히 조합원들의 한만이 아니라 이에 대한 인식이 다 무장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Q : 민주노총 가입과 관련하여 어떻게 가능했는지. A : 어려운 점이 있었다. 가입하고 난 이후 회사의 탄압은 예상했던 것이었다. 대의원대회 내에서 민주노총 가입을 결의했었고 민주노총가입결의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싸울 수 있는 민주노총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추상적으로 한국노총 하다가 민주노총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구조조정 반대, 매각반대를 하기 위해서는 상급단체 변경은 필요했다는 것을 조합원들이 느꼈던 것이다. Q : 조합원들 사이에서 민영화를 반대하는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지도부야 당연히 많은 근거를 댈 수 있겠지만 현재까지 강한 투쟁대오를 형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합원들 사이에 민영화 반대의 근거가 특별히 있을 것 같다. A : 지금 파업이 30일짼데 공공3사중 2개회사와 차이가 있다. 가스, 철도 같은 경우는 우리가 2000년도에 실패했던 바 있는 입법 저지투쟁을 하는 것이고, 우리 같은 경우는 현재 민영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이다. 현재 진행상황은 한전에서 5개회사로 분리되어 5개로 분리된 회사가 외국사나 다른 곳에 팔려야 하는 상태이다. 철도하고 가스하고는 다르게 현실화라는 핵심적이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처럼 발전회사가 외국에 팔렸을 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조합원들도 당장에 느끼는 현장에서 와 닿는 노동강도 강화라든지, 고용불안은 특별하게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사에 팔린다는 위기의식들이 작용하고 있다. 철도, 가스 쪽을 비교할 수는 없다. Q : 조합원들은 투쟁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A : 초기에 조합원이나 지도부나 파업이 장기화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을 뿐더러 파업대오가 흐트러지지 않고 30일정도 계속 되리라 생각도 못했다. 파업 중에 단련이 되었다. 정부가 추진하려고 하는 발전소 매각이 졸속으로 처리되고 있다는 것과 정부에서는 개혁의 실질적인 성과물로 이것을 성사시키려고 한다는 것 등이 파업 진행 중에 드러나면서 조합원들을 단련시켰다. Q : 파업 돌입하기 전에 노조에서 교육사업들을 진행할 때의 분위기나 민영화에 대한 반대 근거가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을 것 같은데 A : 파업 전에도 사실은 여러 가지 교육을 했다. 우선 파업을 준비하는 기간동안, 권역별로 교육을 실시했다. 파업을 하기 전에 교육을 진행하면서 조합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교육을 할 때도 3개회사 공동파업이기 때문에 위력적이라는 부분을 강조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파업얘기를 할 때도 2말3초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다. 어쨌든 교육을 하면서 조합원들의 반응은 '방법이 없다. 파업 아니면 대안이 없다.'였고 반면 '실제 파업을 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도 있었다. 이런 상황들이 집행부에게 약간의 압박감이었고, 지금 평가를 하자면 그런 교육부분들이 파업을 진행하는데 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Q : 3사 연대파업에 대한 의미를 현재적 수준에서 평가한다면? 아쉬운 점이나 향후 극복되어야 할 점은 무엇인가? A : 3사 공동파업을 시작하고 모두가 요구조건에 대한 성과를 쟁취하면서 함께 파업을 정리하는 것이 가장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3사 공동파업을 같이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고 철도, 발전은 현재 파업을 철회하긴 했지만 민영화 문제가 해결되었다기보다 여전히 남아있다. 이후에 계속적으로 함께 투쟁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아직까지도 연대는 유효하다. 향후 철도나 가스가 민영화되는 과정 속에서 발전과도 연대투쟁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 공투위 차원에서 민영화사유화 저지를 중심으로 3사가 함께 투쟁을 하게 되었는데 그와 관련해서 3사마다 민영화 사유화 관련해서 3사가 완벽한 합의를 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발전에서 민영화 사유화 관련해서 입장들 있다면 A : 약간의 입장차이는 있을 수도 있는데 왜냐면 철도와 가스가 민영화를 추진하기 위한 준비단계, 법제화 단계고 발전은 민영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인데 그런 차이 정도는 우리가 2000년도 겪었던 유사한 저지투쟁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시기적인 차이이지 민영화 사유화에 대한 공동투쟁 상은 같다고 생각한다. Q : 아직까지 총파업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오늘 민노 대의원대회가 중요할 것 같다, 학생이나 각종 대중운동단위들, 사회단체들과 사회적 연대전선을 구축해야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A : 발전소 매각이 민영화라는 포장에서 발전소 매각이라는 알맹이로 드러나면서 직접적으로 많이 와 닿다보니까 현재 국민적으로도 많은 공감대를 형성한 것 같다. 이번 파업을 통해 발전소가 매각된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많이 알렸고 국회 차원의 재검토론이 불고 있고 민노총을 비롯한 각종 사회단체에서 발전소 매각에 대한 우려들이 공론화되었다. 또한 기간산업, 민영화사유화가 얼마나 문제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 총체적으로 알려졌다. 오늘 대의원대회가 있는 민노총의 지지엄호도 힘이 되지만 여러 가지로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정책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퍼져있다는 부분과 여러 단체가 우리 싸움에 결합하고 연대하고 있다는 것, 우리 투쟁에 대한 화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힘이 되고 있다. Q : 투쟁동력이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조합원들 사이의 신뢰라던가, 내용이라던가, 혹은 파업의 근거라던가 어떤 이유가 있을 것 같다. A : 지금 현재 복귀율이 20%이내다. 발전소 노동자들이 파업 전에 굳건한 노동자 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인 교육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다른 노조와는 다르게, 특이한 점은 팀제로 운영이 된다는 것. 팀웍이 무척 중요하다. 우리는 그 팀제로 조가 구성되어 있어서 투쟁대오가 강고하다. Q : 지금까지는 흔히 볼 수 없었던 것이 팀제인 것 같은데 팀제와 관련해서 어려운 점은? A : 팀제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보다는 시간이 오래되고 장기화 되다보니까 피로도 쌓이고 금전적인 문제도 생기고 많이 지쳐있다. 그런데 가대위가 많이 도움이 되고 있다. 가족들이 각지에서 산개투쟁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많은 힘이 되고 있다. Q : 이번에 또 하나 발전노조 투쟁에 있어서 주목받았던 부분이 가대위인 것 같은데, 단지 아빠의 투쟁을 응원하는 것을 뛰어넘어 이제 투쟁하는 한 분 한 분이 되셨다는 생각이 들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A : 가대위분들이 많은 고생을 했다. 각지에서 가대위 활동을 했고 명동성당에 와서 지도부 방문도 했고 경찰의 탄압도 있었다. 남의 일처럼 생각했던 파업이 가족들에게 전달이 되고 노동자의 본질이 뭔지, 왜 남편들이, 아빠들이 싸우는지 와 닿았던 것 같다. 25일 같은 경우, 복귀시간시한 9시에 가대위가 발전소 정문에서 출근하는 조합원들의 출근 저지투쟁을 벌였고... 사실 가대위가 그 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파업 이후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던 것이고 우리 파업을 지지엄호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합원들도 놀라고, 지도부들도 놀라고 있다. 많은 힘이 되고 있다. Q : 명동성당과는 현재 어떻게 풀리고 있는지. A : 저희가 처음 명동성당에 들어왔을 때 퇴거요청을 받았다. 공문을 2번 정도 받았고 주일마다 사목회 쪽에서 퇴거요청을 받았었다. 저희가 점거를 하면서 성당 쪽에 피해를 주고 있기는 한데 성당 쪽도 강경하게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저희도 미안한 생각을 한다. 성당 쪽에서는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신도분들이나 수녀분들이 도와주시고 어느 수녀님은 봉투를 전달하면서 지지한다고 말씀해주시기도 했다. Q : 정의구현 사제단이나 수녀님들이 오셔서 기자회견하고 했던 것이 도움이 된 것 같다. A : 예. 기자회견에서 발전파업에 대한 정당성을 이야기해주셨다. 한 단체의 이익, 임금투쟁도 아니고 발전소의 매각에 대한 문제인데 이와 관련한 투쟁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초기에 왜 이 사람들이 여기 들어와 있는지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퇴거요청을 했던 것 같고 그 이후로는 우리 투쟁의 정당성이 알려지면서 성당 쪽에서 퇴거요청이 직접적으로 없다는 것이 여러 가지로 긍정적이다. Q : 침탈 이후에 조합원들의 사기나 상황은 어떤지 A : 침탈 때, 우리 조합원들이 350명-400명 정도 연행이 되었다가 지금은 다 풀려난 상태이고 현재 수도권을 중심으로 산개했는데 현재 파업대오는 흐트러짐이 없다. 현재 복귀율에 대해 회사측도 25일 시한 이전과 이후 79-80명 정도가 복귀한 것으로 얘기하고 있다. 경찰침탈을 겪고 나니까 더 강고해지는 느낌이 있고 지금은 복귀했던 사람들이 다시 파업대오에 합류하고 있다. 사실 사기자체는 연세대 침탈 이후 더 높아진 것 같다. Q : 거점이 따로 없는 상황에서 팀으로 산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사분란하게 체계가 운영되고 있는 것 같다. 지도부에 대한 신뢰가 감동적인데 이유가 있다면? A : 위원장의 방침이 확고하고 발전소 매각 철회 입장이 확고하기 때문에 위원장을 믿고 따른다고 생각한다. 지도부에서 흔들리면 조합원들이 흔들리는데 지도부에서 굳건히 믿음을 져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신뢰가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Q : 다소 섣부른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현재적인 수준에서 이번 투쟁의 성과는 A : 소극적인 성과일 수도 있는데 발전소 매각이 전 국민에게 알려지고 여론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TV토론이랄까, 입법을 한 국회에까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파업이 종료가 되더라도 조합원들이 투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이 투쟁은 계속 진행이 될 것이다. 파업 이후에도 민영화사유화 저지투쟁은 계속 된다. Q : 그럼, 조직적 성과는 무엇이 있겠는가? A : 산별체계다 보니까 약간은 조직적으로 느슨한 체계였는데 조직적으로 완전히 결합이 되어 있는 상태라는 점과 어떠한 탄압에도 흔들리지 않는 대오가 성가이다. 그 전과 다르게 완벽한 산별체계가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파업에 대한 조직적 성과는 파업 이후에 평가가 될 것 같다. Q : 아직 채 갈무리되지 않은 평가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성과가 있고 이런 성과들을 어떤 방향성 하에서 향후 수렴해나갈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가 될 것 같다. A : 평조합원들이 파업을 통해서 발굴이 되고, 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활동가들이 배출이 되었다. 문제는 배출된 활동가들을 향후 조직적으로 어떻게 묶어 내느냐이다. 사측의 징계나 고소고발로 파업 이후에 처리해야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고 현재 발굴된 현장활동가들과 지도부가 구속되리라고 생각하는데 파업 이후 이 공백을 수습하는 것들이 필요하다. 파업 전에 몰랐던 활동가들을 활용하고 조직을 파업 이후에도 다시 꾸려서 민영화 사유화 저지 투쟁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Q :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은데 이후 투쟁계획? A : 정부측에서는 계속 대화를 거부하고 우리에게 백기를 들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노동조합은 우리의 파업의 목적, 발전소 매각철회를 끝까지 고수할 것이고 조합원들도 끝까지 고수할 것이다. 다소 걸리는 것이 있다면 아까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기술자로써의 양심의 부분, 전력대란의 문제들이 있다. 30일이 지나면서 전력대란의 가능성들이 높아지고 있다. 가시적인 개혁성과물로 발전소 매각을 추진하는 정부측은 이를 유보하고 노동조합의 문제제기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함께 일단 대화를 해야할 것이다. 계속적으로 노동조합은 사측과 정부측에 대화를 통해서 현 사태의 마무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는 것은 정부이다. 그러나 계속 투쟁을 해나가면서도 대화의 의지는 계속 유지할 것이다. 파업이 철회된 이후에도 파업대오를 빠른 시일 내 추수려서 민영화 저지투쟁을 계속 하겠다. 앞으로 조직이 안정화되면 가스하고 철도와 안정적으로 연대할 계획이다. Q : 사회진보연대나 여러 사회단체에 하고 싶은 말 A : 많은 도움을 주셨다. 뜻하는 부분이 많이 맞는 것 같다. 이후에도 도움을 주고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서로 연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중국의 동북지방에 자리잡은 랴오양(遼陽)과 따칭(大慶)에서 노동자의 시위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수천에서 수만 명의 노동자 시위대가 시정부청사와 공안국 청사를 포위해 요구를 외치고 있고, 이 와중에 시위의 지도부가 체포·연금 되고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는 계속되었다. 이 시위대의 주축은 기업에서 면직(下崗)된 노동자들이고, 이들의 요구는 기업과 정부가 일자리를 보장하고 밀린 생활보조금을 지급하고 자신들의 사회보험금을 계속 납부해 달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면직이란 공식적으로 실업과는 다른 범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국유기업의 구조조정이 가속화하면서 외형상 실업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실업으로 내몰린 불안정고용 상태의 노동자를 말한다. 실업이 기업과 공식적인 고용관계가 해지되는 경우를 말하는 반면, 면직이란 고용계약관계는 유지되지만 직무를 배정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임금을 받지는 못하고, 다만 기업에서 일정액의 생활보조금을 지급 받고 기업에서 배정 받은 주택을 계속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계속 지니며 기업에 사회보험금을 대납하는 경우를 말한다. 중국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01년 6월말 기준으로 중국의 공식 도시 등록 실업자 수는 619만 명이고 도시 실업률은 3.3%였는데, 이들 이외에 국유기업의 면직 직공이 이보다 많은 수인 769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어, 이들을 합하면 사실상 도시의 실업률은 7%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실업자의 경우는 정부가 실업보험을 통해 구제금을 지급해야하는 책임을 지며, 실업률의 상승 자체가 정치·사회적 부담이 되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실업대신 면직제도를 이용해 국유기업의 구조조정에서 배출되는 노동자를 기업 내에 묶어두기를 원하고 있다. 면직자의 취업에 대해서는 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고 기업이 책임지거나 면직자 스스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2001년 면직직공 중 재취업한 사람은 11.1% 뿐인데, 새로 취업한 일자리가 대부분 사영기업인 경우가 많아 사영기업이 적고 국유기업이 밀집해 있는 지역인 동북지방의 면직자는 장기간 실업의 상태로 남게되는 경우가 많고, 이번 동북지방의 시위도 이처럼 누적된 면직자의 문제가 폭발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랴오양과 함께 시위가 벌어진 따칭이란 어디인가? 중국사회주의 역사에서 따칭은 1960년대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던 지역이었다. 일찍이 1960년대에 마오쩌뚱은 "공업은 따칭에서 농업은 따자이(大寨)에서 배우자"는 구호를 외친 적이 있었다. 따칭은 중국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유전으로 자력갱생과 노동자의 헌신, 정치우위 등이 집약된 상징적 모델이었으며, 중국 전체 석유 생산량의 2/3를 담당해 왔다. 중국 사회주의의 역사에서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공장이 몇 곳 있다. 따칭이 그렇고, 정치우위에 입각한 기업관리를 뜻하는 '안강헌법'의 본산지인 안산(鞍山)강철 공장이 있고, 중국 사회주의 기업의 대표적 모델인 서우뚜(首都)강철이 있고, 문화혁명기에 마오쩌뚱의 직접 지원을 받은 쭝난하이(中南海) 공작대가 조반파와 결합해 공장경영체제의 혁신을 실험한 베이징 방적공장, 그리고 같은 시기 노동자 중심의 생산경영체제를 실험하고 대학과 공장의 결합을 실험한 상하이 공작기계창 등이 있다. 이런 과거 역사를 대표하는 기업의 하나인 따칭에서 시위가 벌어졌다는 점에서 이번 일이 보여주는 상징성은 크다. 더구나 따칭에서 시위가 벌어진 이유가 중국의 대표적 대형기업집단인 중국석유가 뉴욕과 홍콩 증시에 상장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단행한 구조조정과 인원삭감의 결과였다는 점에서 현재 중국이 걷고 있는 길의 상징적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 동북부 석유산업을 통합한 거대기업인 중국석유는 1999년 이후 산하기업 중 비효율적인 기업들을 점차 축소하기로 하면서 종업원의 28%를 삭감하였다. 중국석유에 인수된 따칭에서는 8만6천명이 감원되어, 종업원수가 9만 명으로 줄었는데, 따칭은 대외개방의 심화과정에서 국제 유가기준 보다 생산가가 높다고 평가되어 점차 그 생산을 단축하기로 결정됨에 따라 집중적인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앞선 연재에서도 언급했듯이 1990년대 중반 들어 중국의 국유기업 적자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였고, 1998년 총리에 취임한 주룽지는 3년 내에 국유기업의 적자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국유기업 문제 해결을 위한 대대적 구조조정에는 반대가 많았고, 이의 해결을 위해 WTO가입으로 대외개방을 확대하고 외부의 힘을 통한 내부의 구조조정을 단행한다는 방침이 설정되었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 한 바 있다. 그런데 외형상 2001년 들어 중국의 국유기업은 적자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윤총액의 대대적인 증가가 그 표지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을 살펴보면 몇몇 업종의 초대형 기업과 나머지 대다수 중소기업 사이에서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2001년 1월에서 9월 사이 이윤액 10억 위안 이상인 20개 국유기업이 국유기업 이윤총액의 78%를 차지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이윤총액순 5위안에 드는 중국석유, 중국이동동신, 중국전신, 중국해양석유, 국가전력이 이윤총액의 55%를 차지하고 있으며, 업종별로 보아도 고이윤 5개 업종이 이윤총액의 74.6%를 차지한다. 그리고 지역적으로 보아도 31개성·직할시·자치구중 6개성이 국유기업 이윤총액의 64.2%를 차지하여 규모·업종·지역에 다른 집중도가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다. 그에 비해 중소규모의 국유기업의 상태는 계속 나빠지고 있는데, 이런 양극화의 추세는 1995년 중국공산당 14기 5중전회(중앙위원회 5차 전체회의)에서 제기된 "큰 것은 쥐고 작은 것은 놓는다"( 大放小)는 방침이 구체적으로 실행되어 가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국유기업 변화의 방향은 전체 발전노선의 틀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국유기업 구조의 변화는 국가와 기업의 관계와 기업운영 방식 상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발생시키며, 또한 노동관계상에서도 근본적인 전환을 낳는다는 점에서 중국 전사회구조 변화의 핵심적 축이 되고 있으며, 현재 중국이 나아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전환의 핵심적 쟁점의 장소가 되고 있다. 1. 개혁개방과 국유기업에 대한 구조조정 중국의 개혁개방을 향한 노선전환은 처음에 농촌에서 시작되었지만 핵심적 목표는 국유기업에 대한 구조조정과 그 비중의 축소에 맞추어져 있었다. 다만 국유기업이 지니는 상징성이나 국유기업이 수행해온 사회경제적 역할 때문에 처음부터 이 문제를 거론하기에는 이데올로기적 저항이 강했고, 그 때문에 1980년대에는 우회로를 거치면서 국유기업의 외곽을 포위한 뒤 19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국유기업에 대한 공격이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국유기업의 구조 전환은 국가와 기업관계의 변화와 기업 내에서 권력관계의 변화라는 두 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볼 수 있는데, 양자는 사실 분리되어 진행되어온 것은 아닌 동일한 과정이기도 하다. (1) 소유권과 경영권의 분리 개혁개방 전 중국의 도시지역의 기업에는 크게 국유기업과 집체기업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이 둘을 묶어 '공유제'라고 불렀다. 국유기업은 1994년 이전까지는 국영기업 또는 '전민소유제' 기업이라는 명칭으로 지칭되었다. 국유기업은 그 기업의 책임관리주체에 따라 중앙부서 직속 기업, 성급기업, 지구급기업, 현급기업 등 행정 등급에 따라 구분되었고, 그에 따라 시설 규모나 급여, 복지혜택 등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이에 비해 집체기업은 건국초기의 사기업들이 국가자본주의적 방식으로 통합되면서 집체기업으로 전환된 것과, 국유기업 산하에 설립된 기업, 도시의 구(區)보다 아래 등급인 가도(街道)에서 설립하여 운영하는 기업, 농촌지역의 인민공사가 설립한 기업(이는 인민공사 해체 이후에 鄕鎭企業으로 전환된다) 등을 일컫는다. 중국은 소련과 달리 계획경제 운영에서 중앙 집중성이 덜한 탈집중적인 특징을 지녔는데, 이는 대약진이나 문화대혁명이라는 중국 고유의 역사적 배경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다수의 국유기업은 중앙정부의 직접 관할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방정부의 해당 부서의 관할 하에서 상대적으로 분리되어 운영되었고 전국적 통합성은 비교적 적었다. 일반적으로 국유기업의 운영은 그 기업 상급의 해당 정부의 관할 부서가 책임을 나누어 졌는데, 재무, 원료공급, 노동력 공급, 생산물 유통 등이 각기 별개의 부서로 나뉘어 관할되는 체제였다. 1970년대 말 개혁개방의 시기에 국유기업의 구조전환이 시작되면서 나타난 변화는 국유기업과 상급주관 단위 사이의 이런 고리를 끊고 기업에 더 많은 경영권을 위임하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진행되었으며, 점차 그 변화의 폭과 깊이가 깊어지면서 국유기업의 성격 자체가 변하기에 이르렀다. 이 세 단계는 ① 권한의 위임과 이윤허용 시기(1978-84년) ② 소유권과 경영권 분리의 시기(1985-1993년) ③ 현대기업제도 건립 시기(1994년 이후)로 구분된다. 첫 번째 '권한의 위임과 이윤허용 시기'에는 기존에 기업의 이윤을 상급주관단위에 전액 납부한 뒤 이를 다시 배분하던 방식을 일부 벗어나, 기업이 상급주관 단위에 이윤액이나 이윤증가율 등을 청부하고, 청부한 목표를 초과하는 이윤을 기업 내에 유보하여 자체적인 축적기금이나 복지기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방침이 도입되었다. 1983년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윤상납을 세금으로 전환하는 제도(利改稅)가 도입되어, 대형국유기업의 경우 실현이윤 중 55%를 소득세로 납부한 뒤 나머지를 자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중소기업의 경우에는 8급의 차등 누진소득세 제도를 도입하였다. 1984년에는 기업 경영자에게 허용되는 권한을 10개 영역으로 확대하여, 생산경영계획, 상품판매, 상품가격설정, 자금 사용, 인사노동권, 임금사용권 등을 기업에 허용하였고, 이듬해는 허용영역에 4개가 더 추가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의도와 달리 이런 방식은 기업의 경영자의 권한을 확대하고 기업 자체적으로 생산 계획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그동안 억제된 임금인상에 대한 요구가 폭발하면서 기업의 유보이윤을 복지기금으로 배분하는 경향이 두드러져, 당과 정부는 경영자의 권한 확대를 위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두 번째 시기에는 소유와 경영권을 분리하고 경영권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경영책임제가 도입된 것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다. 상급주관단위는 기업경영의 여러 목표와 관련하여 기업의 경영권을 특정 경영자에게 청부하고, 이 청부를 맡은 경영자는 청부기간 내에 기업에서 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형기업에서는 일반적으로 청부제가 시행되었고, 중소기업에서는 기업 임대제도가 시행되었는데, 양자를 묶어서 살펴보면 1987년에 이 제도를 시행하는 기업이 예산 내 기업의 78%를 차지할 정도로 빠른 변화가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는 앞선 시기의 이윤상납을 세금으로 전환하는 제도를 개선한 세금과 이윤의 분리(稅利分流)제도가 시행되어 기업 소득세가 일률적으로 33%로 낮아졌으며, 주식회사 제도가 시험적으로 도입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논의는 국가가 기업에 대해 소유권만을 지니지 경영에 대해서는 간섭할 수 없다는 소유권과 경영권 분리주장이었는데, 이는 다음 시기 현대기업제도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세 번째 시기는 1994년 이후에 현대기업제도 건립이 추진된 시기이다. 1992년 14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발전노선으로 채택되고, 국가가 경제의 직접개입에서 거시경제 관리로 물러남에 따라 기업제도에서도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근본적인 전환이 나타나는데, 이는 주식회사제도를 골간으로 한 현대기업 제도의 건립이 추진된 것이었다. 기업의 핵심 조직은 주주총회와 이사회, 감사회가 되며, 이사회의 대표인 회장(董事長)이 그 아래 사장(總經理)을 두어 기업을 경영하고, 소유자로서 국가의 권한은 대주주로서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통해 발휘된다는 방침으로, 국가가 소유자로서 권리만 가지겠다는 것은 계획경제에 의한 관리방식을 포기하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이 체제로 기업은 경영책임과 손익에 대한 책임, 발전계획에 대한 책임을 지며, 국유기업의 파산도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현대기업제도에서는 국유기업이 현대주식회사 형태로 변화되어감에 따라 국유기업과 비국유기업 사이의 경계는 점차 모호해지게 되었다. 기존의 국유기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게 되었는데 일부는 독자적인 지주회사 형태의 총공사(總公司)로 독립한 기존의 상급주관단위가 그 산하의 개별기업들을 소유지분을 통해 통제하는 기업집단형 기업체제로 전환되었고, 일부기업은 실질적으로 주식회사제도로 전환되어 상하이와 선전의 주식시장에 상장되었으며, 범주상으로도 국유기업이 아닌 주식제 기업으로 분류된다. 이어 1995년의 중국공산당 14기 5중전회에서는 앞서도 언급한 '큰 것은 쥐고 작은 것은 놓는다'는 방침이 제기되어, 핵심적 국유기업만 국유형태를 유지하고 중소형의 기업들은 파산, 매각, 합병 등의 방식으로 처분한다는 새로운 방향이 설정되었다.
발전파업 10일째를 맞이하여 발전노동자들의 파업이 열흘을 훌쩍 넘기며 식지 않는 투쟁의 열기를 분출하고 있다. 5600명 조합원 중 5270명 참가라는 경이로운 기록으로 시작한 파업대오는 믿기 힘들 정도로 흔들림이 없다. 현재까지 파악된 파업이탈자는 파업 4일차 2명, 6일차 5명뿐이며,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파업 참가 인원은 늘고 있다. 조합원들이 능동적 주체가 되어 박차고 나간 작업현장에는 비주체적으로 혹은 강압적으로 발전기를 돌려야만 하는 4직급 직원들만이 남아 있다. 그들은 점점 자책감과 부끄러움에 빠져가고 있을 뿐이다. 이 투쟁은 노동조합 운동의 새로운 역사로 기억될 만 하다. 투쟁을 만들어 가는 과정, 투쟁이 전면적으로 시작된 순간, 그리고 가열찬 투쟁이 지속되고 있는 현재, 기록은 하루하루 아니 매시간 갱신되고 있다. 살아 숨쉬는 투쟁의 현장은 그것이 현재 진행형이기에 더욱 가슴 졸이게 만든다. 그 만큼 희망과 희열을 간직하게 하기도 한다. 평가는 아직 이르다. 그렇지만 어떠한 결과를 낳는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남겨진 고민, 우리가 챙겨야 할 과제는 지금 이 순간도 펄떡이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뜨거운 투쟁의 열기만큼이나 정권과 자본의 태도 역시 단호하며 강경하다. 지난주에는 국무총리가 발전파업을 국민배신행위라고 매도하더니, 산업자원부 장관은 "이미 법이 통과된 정책 철회를 요구하면서 파업하는 사람들은 국민이 아니다", "발전소 가동에만 문제가 없다면 2천명이든 3천명이든 해고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망언을 일삼고 있다. 대통령 역시 민영화 정책을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음을 재차 확인하고 있다. 발전산업의 사유화, 나아가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정책이 자본의 입장에서 역시 매우 중대한 과제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특히 전력 사유화와 관련해서만 보더라도, 'OECD 규제개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회원국 상호간의 전력 등 공익산업 규제내용 및 구조개편 상황 점검', 'IBRD 차관공여의 조건으로 전력·통신·가스 등 공익서비스 분야의 구조개편을 요구', 'APEC 에너지 실무그룹에서 회원국 상호간 투자여건 조성을 위해 각 국의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독려' 등 국제기구의 요구가 거세다는 사실은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은 발전산업 매각, 나아가 국가기간산업의 사유화 정책이 국내외 자본의 거센 압력, 자본의 이중대인 국제기구의 활약(?) 속에 지배세력과의 모종의 합의 과정을 거치며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정부와 자본은 발전산업 매각 정책이 예상하지 못했던 노동자들의 투쟁과 맞닥뜨리게 되면서 더욱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산개한 조합원을 찾아 여관방을 뒤지고, PC방을 검문하고 있다. 발전조합원을 마치 범죄자인 냥 취급하고, 온갖 악선동을 일삼고 있다. 명동성당을 침탈해 지도부를 해체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지금 이 시간에도 이어지고 있다. 전국 방방곳곳에서 올라오고 있는 가족들의 명동성당 출입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또한 경찰과 정보통신윤리위원회는 발전노조와 범국민대책위원회 홈페이지마저 폐쇄하겠다는 협박을 자행하고 있다. 그러나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은 교섭에 임했던, 힘없고 권한 없는 자회사 사장들의 태도였다. 극히 불성실하고 오만했으며, 사태해결을 위해 그들이 내놓은 대안이라고는 구태의연한 협박과 발뺌식 책임회피 뿐이었다. 다가온 전력대란을 막기 위한 진지한 대화의 노력은 고사하고, 그들이 들고 나온 협상안은 대량해고, 징계통보, 손해배상 청구와 같은 구태의연하고 파렴치한 협박용 탄압책과, '사유화는 노사협상의 대상이 아니다'는 발뺌이었던 것이다. 급기야 3월5일, 5개회사 사장단은 일방적인 노사협상 중단선언을 내던지고, 협상장을 떠났으며 이제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전력대란 사태는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지경에 놓여지고 만 것이다. 아니 그렇게 협상장을 빠져나간 사장단과 정부의 심사는 오히려 '진정한 전력대란'을 막기 위해 파업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그 모든 책임을 떠넘겨보려는 의도를 노골화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발전노조 파업의 힘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사측과 정부는 발전노동자 파업의 힘,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들불처럼 번질 수 있는 1300만 노동자들의 힘을 느끼기에 그 만큼 완강하고 강경한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사실 지난 3-4년 간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에 이처럼 강고한 기조로 맞선 투쟁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발전노조는 단지 하나의 개별 단위사업장 노동조합이지만, 현재 이 단위사업장 노조가 벌이고 있는 투쟁은 정부와 자본의 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파괴할 기세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미 발전노동자들의 투쟁은 하나의 단위사업장의 투쟁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에 대항한 전민중적 투쟁의 선두이다. 발전노조는 지난 2000년 12월 전력노조 파업이 어용 노조위원장의 직권조인으로 무산되고, 전력산업 분할매각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뒤로 분할된 5개 발전사의 노동자들이 전력사유화 반대를 기치로 단결하여 독자적으로 결성한 신생노조이다. 이런 신생노조가 전력산업 파업이라는 초유의 투쟁을 100%에 가까운 참가율을 그대로 유지 확대하면서, 일주일간의 산개투쟁과 10일간의 파업투쟁을 수행중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발전노조의 힘은 과연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가. 물론 당장의 투쟁이 시급하게 진행중인 상황에서 이번 발전파업투쟁을 평가하는 것은 시기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무리이다. 하지만 발전노조 파업으로 형성된 기간산업 사유화 투쟁/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투쟁 전선의 지지엄호와 확대 발전이 관건인 현 상황에서 우리는 발전노조 투쟁의 가장 주요한 특징, 즉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라는 분명하고 명확한 투쟁의 목표 슬로건이 투쟁의 실질적인 목표 슬로건으로 살아 있다는 어쩌면 당연한 듯 보이는 사실이 이번 투쟁이 보여주고 있는 힘의 원천임을 새삼스럽게 강조하고자 한다. 1999년 12월과 2000년 12월에 연이은 전력노조 투쟁패배와 어용지도부의 배신을 딛고 경험하며 사유화 저지투쟁을 지속시켜온 발전노조와 노조원들에게 있어, 민주노조 건설이라는 조직적 목표와 사유화저지라는 투쟁목표, 생존권 사수라는 이해와 요구는 모두 하나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투쟁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은 정책대안론 혹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우회하는 전략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노동진영 일부에서는 우리사주제를 받아들여 우리사주조합이 자기 회사의 주식을 매입하는 것으로 민영화에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이 단기적으로 공공사업장의 성격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민영회사로서 이윤 논리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또 노동조합이 아닌 우리사주조합은 그 특성상 자사주의 주식가치를 상승하는데 일조하여, 구조조정에 부분적으로라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사주제의 수용은 법정퇴직금을 폐지하고 기업연금제를 도입하는 관문이라는 점에서 퇴직금제도의 개악을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발전 노조의 투쟁은 진실로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발전노조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부분적으로라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면 거부하여(거부할 수밖에 없는 발전노조의 특수한 상황을 변명거리로 만들지는 말자), 민영화의 폐해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을 고취시켰으며, 파업투쟁과 연대투쟁만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철회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동안 거의 매년 진행되었던 공공부문의 민영화 반대투쟁은 연대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번번히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번 발전노조의 파업은 숱한 어려움을 뚫고 지도부와 조합원이 매각철회라는 확고한 입장으로 통일되어 오히려 연대파업의 조건을 형성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모범은 김대중 정권 말기인 바로 오늘 이 노동자들이 보여주고 있다. 발전노조에 빚을 져서는 안된다 발전노조의 투쟁은 이미 그 자체로 승리하였다. 이 투쟁을 통해 발전조합원들은 민주노조의 힘과 역량 그리고 필요성을 뼈 속까지 각인하고 있다. 또한, 지난 3월 6일 훈련원 공원에 모인 1000여명이 넘는 발전 조합원 가족들의 집회를 통해 확인되었듯이 이 투쟁은 조합원은 물론 가족과 발전소가 위치한 지역에까지 연계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의 국면은 이번 투쟁이 발전노조의 제한된 승리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노동자 민중의 전면적인 저항투쟁으로 상승 발전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 돌입하고 있다. 사측의 교섭중단 선언, 어떠한 형태로라도 민영화 철회는 있을 수 없다며 발전노조 지도부에 대한 탄압의 공세를 점점 더 강화하고 있다. 이처럼 상황은 이미 발전노조와 사측의 문제를 넘어서서, 정부의 신자유주의 사유화 정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노동자 전체와 정권과 대결로 상승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는 발전노동자 투쟁을 받쳐주는 것은 선언으로서의 총파업이 아니라 실질적인 총파업을 조직하는 것이다. 지난주 민주노총의 4시간 시한부 연대파업을 잇는 후속 대책과 사유화 문제에 관해 불분명한 노사합의로 파업을 종결한 채 치밀한 사후보복에 시달리고있는 가스, 철도 노조투쟁의 복구, 한전자회사의 연대파업, 그리고 민주노총의 연대파업의 성사야말로 진정한 승리로 향하는 길일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현재와 같은 국면을 연 것은 발전노조와 조합원들의 헌신적인 투쟁이다. 이렇게 열려진 국면에서 발전노조의 투쟁을 총파업으로 상승시켜 민영화 저지와 신자유주의 정책 철회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노동대중 전체의 몫으로 남아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노동대중은 발전노조와 조합원들에게 갚기 힘든 큰 빚을 지게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 투쟁의 모든 영광은 발전노조와 조합원들의 몫으로 남아야 하며, 승리하는 연대투쟁의 모범을 통해 투쟁의 성과가 전체의 노동대중에게 남아야 하는 것이다.
"민중의 생활 조건이 점차 악화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전세계 사회운동들인 우리 수 만 명은 포르투알레그레 제2차 세계사회포럼에 모였다. 우리는 우리의 연대를 깨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모였다. 신자유주의와 전쟁에 대한 우리의 투쟁을 지속하기 위해, 지난 사회포럼의 결의를 되새기기 위해, 그리고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기 위해 여기에 다시 모였다." - 제2차 세계사회포럼 결의문 '신자유주의와 군사주의에 대한 저항: 평화와 사회정의를 위하여' 중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5일까지 개최된 제2차 세계사회포럼에는 130여 개 국 5,000개 단체의 5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이 모여 800여 개 회의, 세미나와 워크샵을 통해 다양한 의제들을 토론했다. 세계사회포럼이 지난 수년 간 급성장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국제연대운동의 집약적 성과이고,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2001년도는 세계 지배계급과 전세계 운동진영 모두에게 희망과 절망 둘 다 가져온 해였다. 제노아 G8 반대시위에 30만 명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반신자유주의 시위대가 모였고, 한 명의 시위자가 살해당했다. 9월 11일에는 '막강' 미국이 공격당했고 이에 보복한답시고 미국과 동맹국들은 세계 곳곳에서 전쟁 위협을 서슴치 않고 있다. WTO 각료회의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 자유무역의 반민중성과 제3세계에 대한 착취를 다시 한 번 실감케 했으며, 그 와중에서 초국적 기업 엔론이 몰락해 금융세계화의 무정부성과 부패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연말에 결국 파산 선포를 한 아르헨티나는 IMF의 구조조정과 외채의 악순환이 어떻게 한 국가를 몰락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줬으며, 경제 위기가 정치 위기로 번지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우여곡절의 파노라마가 각 국 또는 국제적 수준에서 사회운동들에게 절망과 희망 모두를 가져다줬고, 이 사건들은 2001년도 사회운동들에게 중요한 국면이 되었으며 세계사회포럼에서 주요 논의 지점이 되었다. 이 글은 지난해를 거듭나면서 국제연대운동에 대해 진행되었던 이러한 평가와 논쟁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실, 세계사회포럼이 전세계 다양한 사회운동들의 회합이었던 만큼, 농민운동이든 빈민운동이든 각자의 운동에 대한 평가가 진행되고 전망이 논의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워낙 대규모 행사라 그 어느 누구도 '전부'를 얘기할 수 없을 것이며, 여기에서도 필자가 직접 참여한 몇 가지 세미나와 회의를 기반으로 쟁점들을 정리하고 평가를 하도록 하겠다. 필자가 참여한 세미나와 회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두 가지 축이 있다. 하나는 이틀 간 진행된 '사회운동들의 평가 및 전망'으로서, 남아메리카 사회과학연구소 연합(CLACSO), 대안을 위한 세계포럼(WFA), 세계여성행진, 제노아사회포럼, 사미르 아민, 월든 벨로 등 여러 단체, 네트워크와 개인들이 개최했다. 여러 명의 발제자들이 나와 자국 내에서의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을 소개하거나 국제연대운동에 대한 포괄적인 평가를 제시하는 등, 일국적 투쟁과 국제적 투쟁 모두에 대한 논의가 다양한 수위에서 진행되었다. 또 다른 축으로는 결의문(call to action)을 작성해나가는 과정으로 개최된 일련의 회의들이며, 제1차 세계사회포럼의 결의문이 만들어졌던 같은 과정이다. 이 과정은 비아 깜페시나, 남반구포커스와 아탁이 주관했는데, 2월 1일 '사회운동들의 첫 회의'에서 참가자들은 결의문에 넣고 싶은 다양한 의제들을 자유롭게 제기하였고, 그 자리에서 구성된 '결의문 작성위원회(drafting committee)'는 제기된 바를 기반으로 이틀 간 결의문을 직접 만들었다. 2일과 3일에는 공개 회의가 지속적으로 열리면서 결의문이 수정되었고, 2월 4일 '사회운동들의 마지막 회의'에서 최종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워낙 다양한 세력이 모여 하나의 결의문을 만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현 국제연대운동의 성과와 더불어 한계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확산과 대중화 가장 자주 언급된 2001년도 국제연대 운동의 핵심적 성과 중 하나는 제노아 투쟁이었다. 7월 제노아 G8 정상회담 반대 시위에 30만 명이라는 역사에 남을 엄청난 인원이 집결했다는 점은 전세계 모두에게 매우 가슴 벅찬 일이었다. 제노아 투쟁은 시애틀 투쟁 뒤로 꾸준히 확산되고 확대되어 간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위력을 보여준 것이다. 한 청년의 죽음은 시위대를 더욱 분노하게 했으며 이탈리아 경찰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샀다. 제노아 투쟁의 후과로 이탈리아에서는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전국적 대중운동으로 확산하고 있다고 이탈리아 활동가가 힘주면서 말했다. 지역별로 130개의 '사회포럼'이 조직되어 2-3개월마다 전국 회의를 진행한다고 한다. 이는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분명한 성과이기도 하고 다양한 운동간 연대를 꾀하고 안정화하는 장치로서 자리잡은 세계 및 지역 '사회포럼'의 성과이기도 하다. 한편, 시위 뒤로 '블랙 블록'을 위시로 한 '소수의 폭력'에 대한 논쟁이 분분했는데, 세계사회포럼에서는 '소수의 폭력'에 대한 명백한 규탄과 그들을 운동에서 분리시켜내려는 입장이 지배적이었다. '테러리즘' vs. '테러리스트 행위' 9.11 사태 뒤로 미국을 선두로 제국주의 국가가 벌인 '대테러 전쟁'도 사회운동에게 큰 논쟁 지점이었다. 우선, 9.11 뒤로 각종 '반테러' 조치로 사회운동을 범죄화 하려는 시도를 효과적으로 무력화시켰다는 점이 큰 성과로 지적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계적으로 폭발한 반전평화운동, 제3세계에서 붉어져 나온 반미반제운동 그리고 반신자유주의 운동 간 상호 연대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줬고, 이러한 연대 가 북반구 중산층 중심의 기존 평화운동을 급진화하였다는 평가도 나왔다. 이는 북반구와 남반구 사회운동의 연대로 이어질 가능성을 보여줬고,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전쟁 반대, 제국주의 반대'라는 구호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운동을 확장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참가자 대부분은 '대테러 전쟁'은 사실상 '테러'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오히려 경제적 이익을 위한 술책이라는 큰 틀에서는 동의를 했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지점에 있어서는 의견을 달리했다. 무역센터에 대한 공격을 테러리즘(terrorism)이라 규정할 것인가, 테러리스트 행위(terrorist act)라 규정할 것인가 아니면 범죄 행위(act of crime)라 규정할 것인가? 필자가 결합했던 결의문 작성위원회에서 이 논쟁이 가장 핵심을 이루었다. 결국 '테러 행위'라는 표현이 모두에게 그나마 만족스러운 표현인 것으로 결론지어졌고, 대신 미국이 아프간에 대해 '테러리스트적 방법terrorist method)'을 사용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결국 양쪽 모두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했다. 또한 아프간에 대한 공습을 미국의 일방적 군사행위라 할 것인가 아니면 전지구적 자본 축적을 쫓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이라 부를 것인가를 놓고 늦은 밤까지 토론이 진행되었다. 이에 대한 논쟁은 더욱 확대되어, 대륙별 또는 지역별로 벌어지고 있는 각종 분쟁들(인도/파키스탄 분쟁, 바스크 독립운동 등)을 어떠한 개념으로 포괄할 것인가의 문제도 제기되었다. 즉,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분쟁의 근원을 모두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사실상 합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뭉뚱그린 채 넘어갔다. 여성주의 없이 또 다른 세계는 불가능하다 신자유주의이든 군사주의이든, 가장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것은 여성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저임금) 노동의 여성화, 빈곤의 여성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또한 여성은 전세계적인 보수화, 우경화 추세의 희생자가 되고 있으며, 탈레반 못지 않게 반여성적이고 무자비한 북부동맹의 악몽을 겪어야 하는 것도 결국 여성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이러한 반여성적 속성 때문에 여성들이 스스로를 조직화하고 국제연대를 꾀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여성들의 국제적인 조직화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빠르게 발전했고 이러한 발전은 세계사회포럼에서 잘 드러났다. 여성들은 금융세계화에 대한 토론이든, 전쟁 반대 시위이든, 대안에 대한 논쟁이든, 이 모든 과정에서 적극적인 주체로 나섰으며 이는 반신자유주의 운동에 있어 분명히 주목할 만한 '일보진전'이다. 브라질여성연합, 경제 변혁을 위한 라틴아메키라 여성연합(REMTE), 세계여성행진(WMW) 등 페미니스트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과 이에 대한 여성주의적 대안에 관한 세미나와 워크샵을 개최하면서 가부장제와 더불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 2월 2일, 여성의 빈곤화와 폭력을 규탄하는 집회, 문화 퍼포먼스와 낙태권 캠페인 등 세계사회포럼 동안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여성주의 없이 또 다른 세계가 불가능하고, 세계가 변해야 여성의 삶도 변한다'라는 기치로 세계사회포럼 조직위원회에 가입해있는 세계여성행진은 반신자유주의 국제연대운동을 평가하거나 조망하는 모든 세미나에 발제자로 참석해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운동을 평가하고 새로운 전략을 내세우기도 했다. 실제로 세계여성행진의 촉구 및 '감시' 덕분에 각 세미나 주최측은 최소한 발제자의 남녀비율을 맞추는 데에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올해 '외채에 관한 국제민중법정'이 개최되었듯이, 내년에는 '여성폭력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개최가 계획되고 있어, 앞으로 더욱 큰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국제연대운동에서 '주류'와 '비주류' 마지막으로, 그다지 큰 논쟁 지점으로 발전하지 않았으나, 여전히 필자의 머리 속에 맴돌고 있는 문제는 '반신자유주의 사회운동'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엔 여러 가지 문제가 중첩되어 있는데, 기본적으로 상징적인 대규모 시위에 작지만 소중한 투쟁이 묻히고 있다는 걱정이 핵심이다. 특히 시애틀에서 최근 제노아 투쟁까지, 그 상징적 투쟁은 우연이든 필연이든 모두 북반구에서 열렸었다는 점은 이 문제가 단순히 '규모'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반신자유주의 국제연대 운동은 '사회운동'의 다양성을 장려하고 남반구의 전투적인 반신자유주의 운동에서 영감을 받지만, 여전히 북반구 중심의 운동이라는 혐의를 지우기 힘들었다. 세계사회포럼에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의 참여도가 여전히 미미하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사회운동에 대한 각종 회의에나, 필자가 결합했던 '결의문 작성위원회(drafting committee)'에 아시아 및 아프리카 활동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면서 다양성과 형평성을 유지하기 위해 회의 주최 단체 활동가들(주로 백인)이 매우 애를 썼고, 이러한 노력은 긍정적임에도 현실을 그대도 나타내기 때문에 씁쓸하기도 했다. 국가별, 대륙별 사회포럼이 앞으로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특히 아시아 지역 연대의 필요성이 점점 대두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풀려나가겠지만, 기본적으로 '아래로부터 국제연대'라는 관점이 견지되지 않으면 국제연대운동은 결국 몇몇의 북반구 출신 국제적 '명망가' 또는 '상층부'만의 운동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또 다른 세계'를 위한 실험의 장 세계사회포럼 참가자들은 2월 4일 '사회운동의 마지막 회의'에서 기본적 민주주의 쟁취, 외채 탕감과 배상, 토빈세 등 투기 금융 통제, 여성권 증진 등을 주장하는 가운데,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4월 17일 세계 소농의 날, 5월 1일 세계 노동자의 날을 주요 국제 기념일에, 그리고 3월 15일 유럽연합 정상회담(스페인), 민주노총이 제안한 5월 31일 '평화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가칭)', 9월의 리우+10(남아프리카공화국) 등 특정 계기와 국제 회의가 있는 시기에 국제연대 투쟁을 진행할 것을 결의했다. 130여 개 국에서 5만 명을 집결시킨 세계사회포럼은 1999년 뒤로 폭발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국제연대 운동의 집약된 성과이자, 다음 단계를 위한 디딤돌이기도 하다. 참가자 대부분은 이번 회의도 성공이었다는 평가를 내리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 에스끼벨, 멘추 등 노벨평화상 수상자들, 소말리아 ILO 사무총장, 로빈슨 유엔 인권고등판무관 등 국제적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것은 세계사회포럼, 나아가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대중적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 동안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대안이나 어떠한 제도적 기반도 없는 맹목적 비판이었다는 '누명'을 씻게 되었고, 그 어느 누구도 이제 이 운동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또한 세계사회포럼의 '제도화'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여러 가지 걱정과 한계에도, 세계사회포럼은 분명히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에 균열을 내면서 '또 다른 세계'를 만드는 과정이다. 엄밀히 말하면 세계사회포럼은 이 두 세계 사이의 경계에 있는, 하나의 '장'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항하는 투쟁과 열린 토론의 여러 가지 공간 중 하나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큰 희망이 생겨나고 있다. 포르투 알레그레에 모였던 5만 명은 서로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다. 정치적 지향도 다르고, '다른 세계'에 대한 상도 다르다. 그럼에도 함께 '신자유주의 반대'와 '전쟁 반대'를 외쳤다. 세계경제포럼이 신자유주의의 첨병들이 이윤을 극대화하고 다수를 빈곤의 굴레 속에 빠뜨리기 위한 전략을 짜는 연례 행사라면, 세계사회포럼은 이에 맞서 민주주의와 평등이 실현될 수 있는, 자본이 아닌 민중 중심의 대안적 세계화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실천에 옮기기 위한 실험의 광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외채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풍부한 자원, 그러나 빈곤하다?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 시에 있는 한 체육관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각 국 언어로 된 플래카드와 각 국 전통문양의 천으로 장식되었다. 무대 앞은 다양한 채소와 과일로 만들어진 각 대륙 모형으로 장식되었고, 실업노동자, 소농 조직들의 깃발이 객석 곳곳에서 펄럭였다. 체육관 입구에는 씨앗과 농산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남반구의 풍부한 자산으로 가득 메워진 이 곳에서는 2월 1일, 2일 이틀동안 '외채와 금융시스템에 관한 국제 민중법정'이 열렸다. 잠깐 민중법정이 시작되기 전 이틀동안 진행된 준비회의 풍경을 소개한다. 앙골라, 말리, 짐바브웨, 아르헨티나, 브라질, 니카라과, 필리핀, 그리고 한국까지, 이렇게 다양한 나라의 활동가들이 모이니 의사소통이 문제가 되었다. 사회자는 곧바로 '같은 나라의 식민지배를 경험했던 나라끼리 모여 앉으면 통역하기가 쉬울 것 같다'고 제안했다. 각각 영국과 미국, 프랑스, 스페인의 식민지로 세 팀이 만들어졌고, 일본과 포르투갈이 지배했던 한국과 브라질이 남았다. 그렇게 다양한 문화적 유산을 지닌 나라들을 분류하는 방식치고는 너무도 간단했다. 참석자들의 씁쓸한 웃음은 이어질 민중법정에서 쏟아져 나올 이야기를 미리 보여주는 듯 했다. 국제민중법정의 배경과 구성 이 법정은 남반구 외채거부운동 네트워크인 '주빌리 사우스(Jubilee South)'와 이를 지지하는 다양한 사회운동 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준비되었다. 북반구의 정부와 은행, 초국적 기업, 그리고 IMF, 세계은행, 기타 국제금융기관들이 발생시킨 외채가 남반구 민중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매개가 되고 있음을 드러내고, 남반구 민중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부당하게 계약된 것이라서 갚을 필요가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 법정을 개최한 취지였다. 이에 앞서 2000년 1월 브라질에서는 주빌리2000을 중심으로 교회, 정당,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직접 '정부가 IMF와 맺고 있는 협약을 유지해야 하는가?' '공공예산을 계속 외채를 갚는데 지출해야 하는가?'를 놓고 전 국민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는데, 500만이 넘는 국민들이 참여하여 90% 이상이 반대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러한 경험이 하나의 기획이 되어 그 범위를 남반구 전체로 넓힌 국제민중법정이 열리게 된 것이다. 주빌리 사우스는 작년 7월 제노아 G8 정상회담 반대투쟁에 즈음하여 열린 '외채의 불법성'에 관한 회의에서 이에 대한 계획을 제출하였고, 법정을 준비하면서 대략 남반구 45개국의 외채에 관한 사회운동들을 조직하였다. 물론 각 국의 사회운동들이 외채문제에 관한 대중적인 투쟁을 확산하는 것도 민중법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요한 과제였다. 'Court'가 아닌 'Tribunal'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이 민중법정은 사법권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견표명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각 국의 법적, 윤리적 전통, 면밀한 조사와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제출하는 의견에 최대한 공신력을 얻으려고 했다. 민중법정 참석자들은 기소, 판결, 배심원, 증인, 변호로 각각 역할을 나누었다. 판결은 라틴아메리카 각 국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민중투쟁의 힘으로 군부독재 세력들을 재판에 회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5월 광장 어머니회(Madres de Plaza de Mayo), 과테말라 진상규명위원희 출신의 활동가를 포함하여 5명이 맡았다. 또한 1908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아르헨티나의 아돌프 뻬레스 에스끼벨을 비롯,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시인 데니스 부르투스, 쿠바 노동자중앙회(CTC)의 뻬드로 로스, 탄자니아의 의원 로즈마리, 하이티 출신의 세계여성행진 활동가 마리아 프란츠 요아킴 등 총 10명이 대륙과 계층을 대표하여 배심원의 역할을 맡았다. 증인은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의 각 국에서 노동자, 실업노동자, 원주민, 여성, 소농, 청소년 등 각 계층을 대표하는 20여명으로 구성되었다. 기소는 멕시코 자유무역반대행동네트워크(RMALC)의 알레한드로 빌랴마르 등 약간명이, IMF와 WB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전달해주는 정도의 변호는 벨기에 제3세계 외채탕감 위원회의 에릭투상이 맡았다. 기소: "남반구 외채문제의 책임은 IMF, 세계은행 그리고 북반구 정부에…." 개회가 선언되고 첫 순서인 기소를 통해 민중법정은 현재 남반구의 모든 국가들이 지고 있는 외채가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IMF, 세계은행과 북반구 정부는 외채로 인한 많은 문제들을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채의 불법성이 제기되는 맥락은 다음과 같다. 첫째,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남반구 민중에게는 외채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자신의 자본을 증식하고자 하는 북반구 채권자들이 모든 부담을 외채를 통해 남반구 민중에게 전가한 것이다. 미국은 2차 대전 직후 파괴된 유럽의 재건을 촉진시킨다는 명목으로 유럽의 16개 국가에 차관 형태로 125억 달러를 원조했고 그 대가로 유럽에 자신의 시장을 개척할 수 있었다. 한편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석유채굴권을 국유화하고, 이에 따라 유가가 급등하자, 집중된 석유 달러를 리사이클링 할 필요가 생겼다. 이를 남반구에 차관을 주는 형태로 해결한 것이다. 남반구 국가는 북반구의 산업국에 천연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대가, 수출 주도형 전략으로의 전환을 지원하는 대가, 혹은 남반구 국가가 필요로 하지 않는 댐 건설 등의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대가 등의 이유로 이러한 차관을 남반구에 도입해야 했다. 또한 이에 대한 계약은 남반구의 독재정권이 민중의 의사와 아무런 상관없이 체결한 것이다. 이들은 오직 해외 금융기관의 요구에 충실하고자 했고, 북반구의 채권자들은 차관을 통해 불법적인 독재정권을 지원한 것이다. 남반구의 민중이 낄 틈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후 1970년대 말, 미국은 일방적으로 이자율을 4-6%에서 많게는 20% 이상으로 높였고, 인플레이션이 계속되었다. 남반구의 채무국들은 이제 이자를 갚기 위해 빚을 더 져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둘째, 대부분의 외채는 이미 몇 배로 상환되었다. 1982년 뒤로 지난 20년 간 자금의 흐름은 남반구에서 북반구로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98년, 41개의 중채무빈국(HIPIC)들은 그들이 빌려온 것보다 1조 6800억 달러나 많은 금액을 상환했고, 99년만 해도 3000억 달러의 외채 상환이 이루어졌다. 결국 1982년 뒤로 3세계 국가들은 그들이 빚진 금액보다 6배나 많은 3조 7000만 달러를 북반구로 이전시켰음에도 여전히 2000억이나 빚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식민지배 당시 수탈해 간 남반구의 천연자원을 계산에 넣지 않은 결과이다. 셋째, 외채는 남반구에 많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제 대다수의 남반구 정부들에겐 금융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외채를 상환하기 위해 국내 경제의 성장 가능성을 희생하였고, 대다수 민중이 교육, 보건, 주택보급, 의료, 고용 등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노약자와 어린이에 대한 복지, 원주민들의 생존조건, 토지개혁 역시 희생당해 왔다. 특히 사하라 남쪽 아프리카에서는 매년 보건의료와 사회보장을 위해 쓰이는 예산보다 4배나 되는 금액을 외채를 갚는데 사용하고 있다. 수출을 통한 수익은 자국민의 소득재분배에 기여하기보다는 외채를 갚는데 사용된다. 게다가 에이즈와 같은 전염병을 치료하기 위한 국가 예산 확보가 외채 상환과 이자 지불에 밀려,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에 방치되며, 이로 인하여 경제활동 인구가 감소되어 저개발의 악순환은 반복된다. 넷째, 외채는 IMF와 세계은행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강요하는 매개가 된다. 채무국은 외채를 해결하기 위해서 또다시 차관을 얻어야 하고, 이를 위해 치명적인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구조조정은 수출 지향적인 성장과 금융과 무역의 자유화, 긴축재정, 사유화와 탈규제화를 강제했다. 이러한 정책은 식료품 가격의 상승과 실업률의 증가, 정부 서비스의 감축, 빈곤을 심화하며 남반구 국가들의 경제를 산업화된 북반구의 이익을 위해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공급하는 장소로 탈바꿈시킨다. 또한 채무불이행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북반구의 채권자들은 부채를 주식, 혹은 환경개발권과 맞바꾸어 채권국을 투기자본의 놀이터로 만들고, 생태계에 대한 지배권을 가져가기도 했다. 증언: "외채와 IMF 구조조정은 남반구 민중을 죽음의 늪으로 내몰았다" 기소가 끝난 다음에는 곧바로 증언이 이어졌다. 증인들은 자신의 지역적, 계층적 특성을 드러내는 의상을 차려입고 증언대에 올랐다. 각 국의 사례를 통해 증인들은 외채가 불법적이고 민중의 삶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민중법정 참가자들은 이틀 동안 쏟아진 증언을 경청하며 외채 문제의 심각성을 공유하였다. 외채로 인해 보건예산이 삭감되어 의료 서비스가 취약한 짐바브웨에서 충분히 막을 수 있는 병에 걸렸지만 의약품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세상을 떠나야 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한 젊은이의 증언은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도입된 차관과 이자 지불 상환을 통계로 비교 분석하여 발표하는 등 객관성을 강조한 증언도 있었다. 서아프리카 말리 경우에는 전체 인구 80%를 차지하는 농촌의 민중이 식량사정이 열악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전체 예산의 13%를 외채 상환에 쓰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증인은 자국의 외채가 281억 달러나 되는데, 군부독재자들이 스위스 은행과 미국계 은행 비밀계좌로 빼돌린 500억 달러의 재산을 환수하면 외채를 충분히 갚고도 남는다고 이야기 해, 남반구의 독재정권과 해외의 은행은 오직 금융시스템을 활성화하는 것을 목표로 민중들의 삶과 사회적 가치들을 팽개치는 데 뜻을 같이 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필리핀의 증인 역시 4488조 페소에 이르는 외채를 갚기 위해 예산을 40%이상을 사용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민주노총 금속연맹의 김희준 전 부위원장 역시 증인으로 참석하여 98년 만도기계 부도 이후 이루어진 구조조정의 과정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사례를 통해 '97년 말 한국의 외환위기를 계기로 도입된 IMF 구조조정이 한국사회를 초국적 자본이 금융적 이익을 최대한 남길 수 있는 신흥 주식시장으로 탈바꿈시켰고, 이 과정에서 재벌에게는 개혁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특혜를 부여한 반면 노동자들에게는 정리해고와 극심한 탄압을 자행하였다'고 이야기했다. 총파업 투쟁이 전개되는 대목에서는 모든 참석자들이 환호하였다. 증언 사이에는 각 대륙을 대표하는 공연도 진행되었다. 아프리카의 '아만다!(민중에게 권력을!)'라는 힘찬 구호로 시작하는 전통리듬에 맞춘 춤, 필리핀 민중가수의 노래, 아르헨티나 12월 봉기를 재현한 퍼포먼스 등이 무대 위에서 펼쳐질 때마다 박수와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객석에 있던 많은 라틴아메리카 참석자들은 아르헨티나의 공연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판결 : "모든 외채는 불법이다." 증언이 모두 끝나자 배심원들은 판결문을 통해 "남반구의 외채는 사회적인 고려 없이 다수의 민중에게 전적으로 손해를 입히고 있다. 이는 남반구 엘리트의 요구에 의하여 국내외의 법적 틀을 초과하여 생성된 것이다. 이는 주권을 손상시켰고, 불법적이며, 불공정하여 윤리적, 법적, 정치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 는 결정을 발표하였다. 동시에 ① 외채 상환을 빌미로 남반구의 자연적 유산과 자원을 유출시키고 민중을 착취한 죄, ② 천연 원료를 싼값에 채취하고 사들여 산업 생산품을 높은 값에 되파는 불공평한 교환 체계를 유지하여 외채를 증가시킨 죄, ③ 남반구 채무국들이 제대로 상환을 했음에도 외채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급속도로 늘어나도록 높은 이자를 부과한 죄, ④ 남반구에서 국제 은행과 기업 간의 사기 조작으로 존재하지 않는 부채를 만들어 내고, 생산을 옹호하는 대신 착취의 메커니즘으로 소수만을 부유하게 한 죄, ⑤ 구조조정과 기타의 경제정책으로 민영화를 부추기고, 사회적 일자리 창출과 경제의 활성화에 투자해야 할 돈을 외채를 갚는 데 사용되도록 한 죄, ⑥ 민중과 UN, 인권단체에 의해 거부된 독재자들이 권력을 지탱하고 불법적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도록 차관을 주어 독재체제를 지원한 점, ⑦ 남반구 민중의 인권을 침해하면서 오직 초국적 기업과 북반구의 산업국의 이해만을 옹호하는 경제통합 정책을 부과한 죄, ⑧ 외채 재협상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내기 위해, 채무국들을 정치·경제적으로 침체된 상황에 놓이게 한 죄, ⑨ 민중을 기만하여 이미 몇 배로 상환된 채무를 계속 징수하고 있는 죄 등에 대해 북반구의 은행, 초국적기업, 정부, IMF, 세계은행, 기타 금융기구들, 그리고 남반구의 정치엘리트들이 공범이라며 이들에게 유죄를 선고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배심원들은 권고사항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민중법정 참석자들에게는 불법적인 외채를 탕감할 것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제안했고, 각 국의 의회에는 외채에 대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회계를 발의하여 실질적인 외채가 얼마나 되는지 규명해내고, 여전히 상환할 것이 남았다면 이를 사회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을 제안했다. 남반구의 채권국 정부에는 외채에 대하여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을 하여 이를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외채 이자의 지불을 중단하도록 하는 판결을 얻어낼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과, 이자 지불을 대신하여 모든 민중의 삶을 위해 지속가능한 발전 프로젝트를 위해 지출할 것을 제안했다. 더불어 주요 피고들에 이 법정의 결과를 전달하고 성실한 답변을 촉구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민중법정 참석자들은 4월 중순 IMF 봄 총회에 즈음하여 워싱턴DC에 다시 모인다. 이곳에서는 불법적인 외채 탕감 캠페인이 민중법정의 공식적인 결과로 시작될 것이다. 더불어 4월 17-18일에 주요 피고들에 대한 최종선고가 이루어진다. 이번 국제민중법정을 개최하기까지 주빌리 사우스의 활동은 아직까지는, 주요한 국제 행사를 계기로 대규모 캠페인 정도인 것이 사실이다. 이는 국제연대운동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난 99년, 북반구 NGO들이 중심이 되는 '주빌리 2000' 캠페인에서 분리한 뒤로 주빌리 사우스는 그 규모나 내용에서 주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 내었다. '주빌리 2000'과 함께 하던 아일랜드, 노르웨이, 네덜란드, 독일 등의 외채탕감 캠페인들이 '주빌리 2000'을 계승한 '주빌리 플러스' 보다 주빌리 사우스와 연계를 더욱 강화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이번 민중법정에서 객석을 가득 메운 것은 라틴아메리카의 좌익 정당들과 Via Campesina(국제 소농 조직), MTD(실업노동자운동)등의 기층 대중조직들이었다. 이것은 앞으로 주빌리 사우tm를 중심으로 하는 외채 거부 운동이 전세계 기층 민중의 대중투쟁을 강력하게 결합시키는 매개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