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지 영 | 정책편집부장 2004년 5월 1일 중동부 유럽 8개국과 지중해 지역 2개국이 유럽연합에 새로이 가입하고, 같은 해 6월 18일 유럽연합 정상들이 유럽헌법조약(Treaty of European Constitution)을 채택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꾸준히 추진된 유럽경제통합은 2002년 유로화 공용화로 이미 일단락을 되었고 (영국, 덴마크, 스웨덴은 유로화 도입을 유보했다),1) 이제 유럽헌법조약이 회원국들의 비준을 통과하면 유럽연합은 자신을 대표하는 대통령과 외교장관까지 두게 된다.2) 이런 외연만을 두고 보면 유럽 통합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는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유럽연합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국가나 정치세력 내부에서도 많은 쟁점이 부각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 많은 모순과 갈등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그것은 아직 미완의 프로젝트다. 유럽연합이 연방제 국가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통합주의’와 정부연합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정부간주의’(intergovernmentalism) 사이의 쟁점도 있으며, 유럽연합의 탄생과 확대 과정에서 계속 문제가 된 강대국과 중소국가의 이해관계도 해소되지 않는 쟁점이다. 그러나 이런 쟁점이 유럽 민중의 권리와 의지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유럽통합 과정은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유럽 자본을 위시한 지배계급의 프로젝트였다. 유럽연합의 확대와 헌법조약의 탄생은 자본주의의 위기 국면에서 유럽의 신자유주의 질서를 강화하는 흐름이다. 그러므로 유럽통합 과정은 유럽의 민중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시한다. “어떤 유럽인가?” 회원국들의 헌법조약 비준을 앞두고 이 질문을 둘러싼 문제제기와 투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여러 운동세력들이 벌이고 있는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은 “어떤 유럽인가”에 답하는 유럽 민중들의 목소리다. 그들은 유럽통합이라는 미완의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것은 헌법조약의 비준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유럽 민중과 사회운동의 투쟁을 통해 “또 다른 유럽”을 건설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또 다른 유럽”을 향한 유럽 민중과 사회운동의 투쟁은 신자유주의를 거부하고 “또 다른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유럽연합의 기원과 유럽통합의 과정 2차대전이 끝난 후 유럽통합 구상을 자극한 네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유럽 국가들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고자 했다. 둘째, 유럽 국가들은 전간기 유럽의 특징이었고 2차대전의 원인 중 하나였던 경제적 보호주의를 탈피하고 싶었다. 셋째, 유럽 지배세력들은 소련과 유럽공산당의 확장을 억제해야 했다. 넷째, 독일경제를 유럽으로 통합하여 독일 팽창주의의 부활을 막고자했다. 사실 이 네 가지 요인은 유럽 자본의 시각을 대변했다. 유럽 자본과 지배계급은 유럽을 자본주의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공통의 이해를 강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기에는 2차대전 이후 유럽을 확실한 반공주의 보루로 삼고자 했던 미국의 의도도 반영되었다. 하지만 유럽통합 과정에서 유럽 민중에게 민주적 의사결정과 권력형성의 권리는 부여되지 않았고, 형식적인 참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유럽의 일국적, 초국적 자본은 (로비, 연구작업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유럽통합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지금도 그렇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민중을 배제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유럽연합의 기원: 공산주의 확장 저지와 서유럽 통합 2차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7년 유럽경제의 복구를 위해 유럽경제위원회(Economic Commission for Europe)가 설립되었다. 위원회는 모든 유럽국가들의 협력을 전제로 삼고자 했지만, 동유럽국가들은 소련이 주도하는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로 통합되었다. 결국 유럽경제위원회는 목표를 서유럽 통합으로 변경했다. 여기에 몇 가지를 더 고려해야 한다. 1947년은 미국이 마셜 플랜을 제안한 해이며,3) 관세와무역에관한일반협정(GATT)이 창설된 해이기도 하다 (미국은 GATT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서유럽 경제재건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보호를 받으며 이루어질 수 있었다. 결국 전후재건이라는 목표로 형성된 협력의 기운은 냉전이라는 조건 속에서 미국의 군사적, 정치적 지배력이 커다란 영향을 발휘하는 가운데 서유럽 지배세력의 이해, 즉 자본주의적인 유럽을 재건하려는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 협력의 구체적인 형태: 유럽석탄철강공동체에서 유럽공동체로 1951년 창설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ECSC)는 석탄, 철강 및 이와 연계된 부문의 관세동맹이었다.4) ECSC 창설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ECSC는 석탄, 철강 부문의 공급을 안정화. 현대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따라서 심각한 공급부족이나 과잉공급을 관리할 수 있게 했다. 정치적인 이유는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와 관련된 것이었다. 프랑스는 2차대전의 경험 때문에 독일의 팽창주의에 대한 심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으며, ECSC를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위한 틀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ECSC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ECSC는 유럽통합의 모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중요한 모델을 제공했다. 일례로 ECSC의 조직구조는 유럽경제공동체의 모델이 되었다. 1958년 로마조약이 체결되면서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와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 EEC)가 창설되었다. EEC는 관세동맹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내의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까지 포함하는 공동시장 형태였다. 그러나 EEC는 아직까지 재정, 화폐정책이 통합되지 않은 형태였으므로 통일과 집중보다는 협조와 협력을 강화하는 수준이었다. 1965년 ECSC와 원자력공동체, 유럽경제공동체를 통합한 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y, EC)가 설립되었고, 그 외연도 확대되었다.5) 하지만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각 국가들은 국가 단위의 발전전략, 즉 케인즈주의 복지국가 모델을 채택했고, 이는 통합의 기운을 약화한다고 인식되었다. 하지만 유럽공동체는 법적 강제조치가 없었기 때문에 이를 거의 제어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1992년까지 역내 단일시장을 완성한다는 목표를 담은 단일유럽법안(Single European Act)이 1986년 조인되었는데, 이는 ‘법안’이란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각 국가에 대한 구속력을 강화한 것이다. 특히 유럽경제통합을 더욱 심화하기 위해서는 회원국의 환율을 제어해야 한다는 논리로 경제 및 화폐 통합을 위한 계획을 제시했다. -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유럽연합 창설 1992년 소련 붕괴와 냉전 해체는 유럽통합에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동유럽국가들이 유럽공동체에 가입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따라서 2005년까지 유럽공동체가 20여 개 국가로 확대된다는 전제로, 의사결정과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개혁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효율성은 공식적인 이유일 뿐이었고, 강대국들의 속내는 앞으로 가입할 작고 가난한 국가들에 대해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게다가 독일 통일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두려움을 자극했고, 프랑스는 유럽통합을 더욱 심화하는 방향에서 대응책을 세웠다. 1991년에 체결되어 1993년부터 효력을 발휘한 유럽연합조약(Treaty on European Union, 일명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급격히 변화된 환경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 때까지 유럽통합의 중심논리는 무역장벽의 제거, 탈규제와 자유화를 통한 경쟁 도입, 단일시장 건설이었다. 그러나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의해서 유럽공동체는 정치적 통합과 한층 심화된 경제통합을 지향하게 되었다. 따라서 공동외교안보정책(Common Foreign and Security Policy, CFSP)의 중요성이 강화되었다. 물론 유럽공동체의 권한도 확대되었다. 의사결정과정에 있어서 각료회의에 가중다수결 제도가 도입되었다.6) 그리고 조약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경제통화연합(Economic and Monetary Union)과 단일통화를 2002년까지 도입하기 위한 조건과 시간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본래 제기된 문제, 즉 동유럽 국가들의 가입, 독일을 유럽에 더욱 통합할 필요성, 단일통화로 나아가기 위한 조건 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두었다. 따라서 조약 개정에 대한 요구가 계속 나왔고, 1996-97년 정부간회의를 통해 법, 제도와 정책과정을 바꾸는 논의가 진행되어서 1997년 암스테르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유럽통합은 계속 심화하여 재정, 예산, 사회, 통화 정책을 모두 아우르는 수준까지 확대되었다. 2000년 니스조약, 2001년 라켄선언을 통해서 유럽헌법의 구체적인 일정과 계획이 제시되었다. 경제통합을 통한 유럽연합 설립의 반-민주성 위에서 지적했듯이, 유럽통합의 출발은 유럽자본주의를 재건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과정은 철저하게 유럽 자본의 이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는 유럽연합의 탄생은 유럽 내부에서 민중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의 확대, 심화뿐만 아니라 유럽 외부, 특히 주변부 민중과의 관계에서 제국주의적인 지배, 착취관계의 발전을 의미한다. 유럽통합의 중심논리였던 경제통합은 그저 자연스러운 발달과정이 아니었다. 이것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의 성장과 위기 국면에 대응하는 유럽 자본과 지배세력의 전망이었다. 1968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공동농업정책(Common Agricultural Policy)은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공동농업시장의 탄생은 농산품 단일시장의 필요성 (경제통합에 필수적이다), 당시 집권정당들(주로 기독교민주당과 보수당)에게 강력한 압력집단인 농민층에 대한 우호적 조치의 필요성 (냉전시기 집권정당의 안정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고 유럽의 식량자급의 필요성 (제국주의적 정책의 선결조건이다) 등이 맞물린 결과다. 단일시장, 역내 농산품 우선, 공동재정부담을 원칙으로 하는 공동농업정책은 유럽농산품에 대해선 가격개입정책을 통해 보조금을 지급하고 수입농산품에 대해서는 양과 품목을 규정하고 수입과징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세계시장에서 유럽농산품의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방식은 유럽공동체 외부의 국가, 특히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카리브해, 태평양 연안의 국가들의 농업부문이 유럽경제에 종속되는 효과를 낳았다. 또 하나, 단일통화라는 중요한 문제를 언급해야 한다. 단일통화가 제기되고 실현된 과정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확산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이것의 중심에는 단일통화를 향한 과정이 놓여있다. 유럽에서 통화정책이 통합되고 단일통화가 사용되어야 한다는 제안이 1970년대 초 달러의 금태환이 중지되고 오일쇼크로 인해 외환시장이 교란된 시기에 제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 변동환율제가 도입되면서 금융부문에서 탈규제와 자유화가 시작되었고, 미국 달러화를 정점으로 독일 마르크화와 일본의 엔화가 삼극을 이루는 위계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의 통화동맹을 위한 노력은 마르크화의 위상에 기인한 것이자 마르크를 국제화폐로 만들고자 했던 독일의 이해가 맞물린 것이다. 마르크화가 진정한 국제화폐가 되기 위해서는 전체 유럽연합에서 사용되는 통화가 되어야하며 미국에 필적하는 광범위한 시장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유로가 도입되면 유로로 표시된 국제거래의 양을 늘릴 것이며 그로써 유로에 대한 수요가 달러에 대한 수요에 맞먹거나 능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화가 국제화폐가 되기 위해서는 마르크가 유로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마스트리히트 조약에서 제시한 경제통화연합 수렴기준을 엄격히 적용할 때만 가능해진다 (수렴기준에는 각 나라의 인플레이션 억제, 이자율 삭감, 예산적자를 최대 GDP 3%로 줄일 것, 공적 부채를 GDP의 60%이내로 억제하고 통화의 환율을 안정시킬 것 등이 포함된다).7) 마르크화가 국제화폐가 되기 위해서는 인플레이션은 가장 큰 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통합의 효과는 겉보기에 중립적이지만, 민중에게 공격적이다. 유럽연합 내 국가들이 사용하는 경기역행수단(경기위축 시 사용하는 확장정책)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독일과 같이 생산성이 높은 나라는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이 더 높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높은 이윤을 추구할 수 있다. 게다가 마르크화는 국제화폐의 지위를 노리므로 경기가 위축되더라도 인플레이션 수단은 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같이 생산성이 낮은 나라는 인플레이션 정책을 통해 실질임금을 감소시키는 (즉 잉여가치율을 높이고 따라서 이윤율을 증가시키는) 수단을 사용하고자 한다. 이탈리아는 국제경쟁력을 보호하기 위해 가치절하에 의존해야만 한다. 하지만 경제통화연합 내에서 이런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제한된다. 따라서 이탈리아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의 확대를 통해 경쟁하는 것이고, 이는 생산과정에서 더 긴 노동일이나 더 높은 노동 강도를 통해서 가능하다 (최근에는 이를 ‘노동유연화’라고 부른다). 앞으로 유럽연합 내부에서 이런 비대칭적인 상황은 더 심화할 것인데, 유럽연합이 중동부, 지중해 주변 국가들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르크화를 유로화로 변형하는 것은 금융세계화에 적극적이고,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유럽 자본의 요구를 드러내준다. 금융세계화 흐름은 몇 가지 금융 관련 규범을 포함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플레이션의 억제다. 이런 목표는 노동자 임금과 국가의 복지비 지출을 압박하는 정책을 수반한다. 그리고 더 높고 빠른 수익성에 대한 요구는 노동유연성을 높이고자 한다. 또 지적되어야 할 것이 있다. 수렴기준과 같은 정책은 분명 유럽 초민족자본과 각 국 정부의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마치 이것이 멀리 떨어져있는 관료기구(유럽연합)가 부과하며 각 국 정부는 이런 조치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정책은 유럽사회 전반이 수용해야만 하는 어떤 중립적인 합리성에 근거한 것처럼 묘사된다. 그래서 단일통화와 그에 상응하는 경제정책의 대가는 유럽과 유럽 외부의 민중들이 지불하게 된다는 사실은 은폐된다. 유럽연합의 반-민주적 성격을 드러내주는 몇 가지 사실들이 더 있다. 단일 시장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은 이제 공공부문에 대한 공격에 집중하고 있다. 일부 국가들이 복지국가의 전통은 서비스부문 개방과 단일시장 형성에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최근 서비스부문 자유화를 일반화한 볼켄슈타인 훈령은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런 공격은 유럽통합을 촉진시켜 더 많은 이익을 줄 것이라는 논리로 정당화되고 있다. 유럽헌법조약을 둘러싼 논쟁: 신자유주의 유럽인가, 다른 유럽인가? 유럽헌법조약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유럽의 정체성을 둘러싼 것이다. 사실 유럽헌법조약에서 새로운 부분은 이미 수립된 권력의 분배 문제라는 점은 유럽 지배세력이 말하는 유럽통합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유럽은 단지 수립된 권력을 조절하는 방식일 뿐이다. 왜냐하면 지난한 유럽 통합의 과정에서 관철된 금융세계화에 조응하는 조치들은 이미 주어진 것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여성, 시민의 권리에 심각한 퇴행을 가져온 조치들은 그대로 인정되고 심지어 더욱 확대해야 할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헌법조약의 작성과정에서 민중의 참여와 역할이 배제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결국 유럽헌법조약이 말하는 유럽은 인민의 권리를 제거하는 유럽이고, 신자유주의적인 유럽이며, 따라서 위계적인 권력 관계를 조정하고 분배하여 재생산하는 유럽일 따름이다. 따라서 이로부터 유럽의 민중과 근본에서부터 갈라지는 쟁점이 형성된다. 이는 헌법조약 문구 하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조약이 담고 있는 논리와 함의가 문제다. 예를 들어, 유럽헌법조약은 그동안 노동자가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세웠던 권리들을 부정한다. 노동자들은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단지 노동력으로 간주될 뿐이다. 시장과 경쟁의 원칙이 가장 우선시되는 가운데, 노동자들의 파업과 단결, 연대의 권리는 기업의 권리와 동등하게 간주된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의 파업의 권리가 파업에 맞서 공장을 폐쇄할 권리와 동등하게 간주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합리적이고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취하는 노동자, 민중에 대한 파상적인 공세를 명문화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헌법조약은 유럽시민권을 회원국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로 규정하면서 900만 명의 이주노동자를 배제했다. 헌법조약은 유럽경제에서 이주노동자를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법 이주노동자에 대한 심각한 착취와 억압을 방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문제는 이런 규정이 유럽시민권을 가진 노동자들과 불법 이주노동자들 사이의 분할을 심화한다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데, 유럽시민권을 가진 노동자들에게 이주노동자들을 자신들의 임금을 낮추고, 일자리를 빼앗는 세력이라는 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유럽시민권 규정은 위험스럽게도 이주자들을 범죄와 관련시키는 조항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규정은 인종주의와 외국인혐오를 수용하고, 극우세력이 정치적 공간에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또한 유럽헌법조약은 전쟁을 사용 가능한 수단으로 인식하면서 군사화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2003년 12월 정상회의는 유럽안보전략을 채택했다. 이 전략은 “유럽과 기타 지역의 시민들이 불법이민과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테러리즘의 위협에 처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각 위협마다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고 국제협력도 요구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유럽이 현재 미국 주도의 군사세계화에 굳건한 동맹자가 되겠다는 선언이며, 따라서 유럽연합의 안보에 있어서 NATO의 역할을 계속 승인한다. 나아가 헌법조약은 유럽 자신의 군사화도 염두에 두고 있다.8) 유럽의 사회운동들은 2004년 10월에 열린 유럽사회포럼에서 채택한 사회운동 호소문을 통해 유럽헌법조약이 구현하는 유럽에 명백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헌법조약은 신자유주의를 유럽연합의 공식교리로 신성화하며, 경쟁을 유럽공동체 법, 모든 인간 활동의 토대로 만들고,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라는 목적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이 헌법조약은 평등한 권리, 민중의 자유로운 이동, 모든 사람이 국적에 관계없이 자신이 사는 나라의 시민권을 향유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으며, 그 대신 NATO에 유럽의 외교 및 국방정책을 담당하는 역할을 부여하고, 유럽연합의 군사화를 추진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영역을 주변화시킴으로써 시장을 우선시하며, 공공서비스의 파괴를 가속화한다.” 유럽의 사회운동을 비롯하여 유럽 민중들은 유럽헌법조약이 가지는 반-민주적, 반-민중적인 본질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다.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 사회운동들의 새로운 도전 유럽헌법조약이 완성하려는 유럽의 실체를 인식한 유럽 민중과 사회운동의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 헌법조약을 반대하는 흐름에는 다양한 세력들이 섞여있다. 인종주의적인 극우 세력이 존재하는가 하면, 유럽연합이 가져올 피해를 두려워하는 민족주의적 반대 세력도 존재한다. 하지만 헌법조약이 제기한 광범위한 쟁점은 “어떤 유럽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연관되어있으며, 따라서 광범위한 정치의 공간이 열고 있다. - 여성운동 유럽의 여성들은 헌법조약이 여성들에게 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하고 헌법조약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지난 2월에 헌법조약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던 스페인에서는 여성들이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탁 프랑스의 여성그룹 또한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위한 면밀한 투쟁을 조직하고 있다. 우선 여성들은 헌법조약이 그동안 여성들에게 더욱 해악을 끼쳐왔던 신자유주의를 전 유럽의 질서로 공식화하려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성별에 따른 차별은 없다”는 헌법조약의 문구는 단지 수사일 뿐이다. 빈곤의 여성화와 여성에 대한 사회적 배제라는 맥락은 고려되지 않은 채, 오히려 불안정 노동을 강화하고 사회적 비용 지출을 삭감하고자 하는 헌법조약의 논리는 명백히 여성에게 더 해악이 크다. 게다가 헌법조약은 여성운동이 유럽에서 쟁취해 온 이혼과 낙태에 대한 권리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헌법조약은 남성이 행하는 물리적 폭력을 가정 내 폭력으로 치부하면서 그 원인은 간과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여성을 희생자라는 수동적 지위에 묶어 둔다 (3조 116항에 관한 선언). 더 우려되는 것은 헌법조약이 전문에서 “유럽의 신성한 유산”을 승인하면서, “유럽연합이 교회와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공식적인 대화를 진행할 것“(1조 51항)이라고 밝힌 대목이다. 이는 유럽연합이 교회를 시민의 의견을 대표하는 하나의 주체로 인정한다는 선언인데, 이것은 교회의 논리와 요구가 유럽연합의 정책에 반영될 수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남녀 평등, 이혼, 낙태, 피임, 동성애 등의 권리는 심각한 위협에 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의 여성들은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의 주체로 나서고 있다. 이들의 도전은 다른 사회운동들과 결합하면서 여성의 권리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이 또 다른 유럽의 필수적인 요소임을 주장하고 있다. - 노동자운동 유럽통합과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심화되면서 유럽의 노동자운동은 새로운 조건에 직면했다.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노동조합이 국가, 기업과 사회적 파트너 관계를 맡아오면서 다양한 형태의 코포라티즘이 존재했다. 이런 전통을 따르는 노조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해 “양보 교섭”과 “사회적 파트너십”의 다양한 형태를 통해서 신자유주의와 공존을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유럽통합의 맥락에 때라 새로운 형태의 파트너십은 유럽적, 국가적, 기업적 차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유럽노총(European Trades Union Confederation, ETUC)은 국가 수준에서는 사회협약의 파트너 역할을 수행하고, 유럽연합 수준에서는 유럽노동이사회(European Works' Councils, EWCs)에서 사회적 파트너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사회적 파트너십 전략에 저항하는 노동자운동의 흐름도 활발히 나타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경제통화연합 수렴기준에 연결된 긴축프로그램에 반대하는 파업과 시위가 벌어지면서, 유럽연합 회원국 각 국에서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이런 흐름이 노동조합의 대안적 전략으로 발전하고 있다. 프랑스의 연대노조, 이탈리아의 코바스(COBAS) 등의 흐름은 노동자, 임시 노동자, 실업자를 잇는 연결망을 형성하면서 광범위한 사회적 이슈를 노동운동의 과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업, 고용불안, 사회적 배제에 반대하는 유럽행진”(European Marches Network, EMs)은 1997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유럽정상회의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이 시위는 국제기구들에 대항하여 노동과 여러 사회부문의 연합을 추구하는 흐름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유럽행진 네트워크는 최근 유럽연합의 여성, 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회적 권리 확장을 위한 투쟁과 조직화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노조운동의 혁신을 위한 이런 흐름은 유럽 통합이 강제하는 경쟁과 노동자 분할이라는 조건에 직면해 대안을 모색하는 새로운 도전이다. 아직은 출발 단계지만, 자본과 유럽연합의 정책의 논리를 거부하고, 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사이에서의 평등과 연대를 강조하는 이런 흐름은 유럽헌법조약이 담고 있는 신자유주의 유럽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다. - 유럽좌파당9) 신자유주의 유럽통합에 맞서 대안적인 유럽을 건설해야 한다는 의지를 천명하면서 창립한 유럽좌파당 역시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유럽좌파당은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대안세계화 운동과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정당의 역할은 이러한 사회운동들의 정치를 지지하고 활성화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만큼, 유럽좌파당은 사회운동들과 함께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위해 활발히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럽좌파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이탈리아 공산주의재건당(PRC) 당수 파우스토 베르티노티는 2004년 10월 유럽좌파당 로마회의 연설을 통해 현재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그는 헌법조약이 제시하는 유럽의 미래는 자본주의 위기와 패배에 편승하는 암울한 미래일 뿐이라고 강조하면서, 이것이 유럽 민중의 미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럽좌파당이 반드시 유럽에 관한 전망을 가져야 함을 지적하면서 두 가지 요소를 필수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첫째는 평화라는 목표, 전쟁과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목표다. ‘예방전쟁, 무한전쟁의 상황에 대항하는 유럽은 전쟁과 테러리즘에 반대한다는 전망을 자신의 헌법에 담아야 한다. 따라서 전쟁을 거부하는 것,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에서 전쟁을 제거하는 것을 명백히 선언해야 한다. 유럽이 취해야 할 강령은 평화를 위한 것이다’. 둘째, 보편적 시민권이라는 개념에 입각해야 한다. ‘시민권 그리고 노동권과 같은 시민성은 더 많은 사람에게 확대되어야 하고, 풍부해져야 한다. 이는 특히 이주노동자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시민성이 태생의 권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개인 인간에 기초한 것이라고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평등은 기회의 균등함을 넘어서 권리의 새로운 경계를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유럽좌파당은 대안적 유럽을 위한 구체적인 강령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제4인터네셔널 계열에서는 이를 두고 유럽좌파당을 표방하면서도 유럽헌법에 대한 관점이나 유럽적인 전망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완성된 강령을 제시하고 그것으로 민중을 동원하는 것이 정당의 역할이 아니라는 유럽좌파당의 문제의식에 비추어보면, 이는 유럽좌파당을 비판할 근거라기보다는 유럽의 사회운동과 정당, 민중운동의 장기과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럽좌파당이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통해서 사회운동들과 함께 또 다른 유럽의 상을 만들어가는 것은 아직 진행과정 중이다. 유럽헌법조약,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 유럽에서는 헌법조약에 반대하는 캠페인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는 헌법조약 부결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어서, 유럽연합과 양국 정부가 긴장하고 있는 상태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헌법조약을 부결시키기 위한 캠페인에 아탁을 비롯한 사회운동, 여성운동, 프랑스공산당, 혁명적공산주의동맹(LCR), 노동총동맹(CGT) 등이 총력을 기울였다. 이 결과 초반에는 헌법조약 찬성여론이 높았고 헌법조약 반대 의견 중에서는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인종주의적으로 활용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현재는 반대 여론이 60%를 상회하고 있는 상황이며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유럽 민중이 원하는 유럽이 현재의 유럽연합과는 큰 차이가 있고,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이 중요한 쟁점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만약 헌법조약이 부결된다고 해서 상황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후에 더욱 커다란 문제가 남아있다. “진정 대안적인, 다른 유럽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 또한 사회운동과 민중의 과제다. 위로부터 강요된 신자유주의 유럽을 거부하고 민중 스스로가 완성하는 다른 유럽통합의 길이 열릴 것인가? 전 세계 대안세계화 운동의 관심사다. PSSP <참고자료> 쉬잔느 드 브뤼노프, 〈지금 우리에게 어떤 유럽이 필요한가? 우리는 어떤 유럽을 얻을 수 있는가? 〉, 《사회진보연대》, 2000년 11월호 이호영, 〈유럽연합과 국민국가의 위상 변화〉, 사회진보연대 홈페이지 자료실 Guglielmo Carchedi, For Another Europe: A Class Analysis of European Economic Integration, pp.7~35, Verso, 2001 Guglielmo Carchedi, The EMU, monetary crises, and the single European currency, Capital & Class 63, Academic Research Library, Autumn 1997 Bruno Carchedi and Guglielmo Carchedi, Contradictions of European Integration, Capital & Class 67, Academic Research Library, 1997 Graham Taylor and Andrew Mathers, Social Partner or Social Movement? European Integration and Trade Union Renewal in Europe, Labor Studies Journal, Vol. 27, No. 1, Spring 2002 Speech by Fausto Bertinotti, EU: Another Constitution is Possible, http://esteri.rifondazione.co.kr/internazionale/i0038.html IV Online Magazine, Women and the European Constitution, Ⅳ365, March 2005, http://internationalviewpoint.org/article.php3?id_article=576 1) 영국이 유로화 도입을 유보한 까닭은 영국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파운드화의 위상과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길 바랬기 때문이다. 영국은 파운드화가 유로보다는 달러와 가까워지는 것이 자국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다. 본문으로 2) 유럽정상들이 채택한 유럽헌법조약은 각 국의 비준절차를 거쳐 2007년부터 발효된다. 25개 회원국 중에서 덴마크, 영국,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체코, 프랑스, 폴란드, 포르투갈, 스페인은 국민투표를 통해서 조약 비준을 결정한다. 나머지 15개국은 의회 비준절차를 거친다. 이 중 스페인은 올해 2월 20일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헌법조약이 통과되었다. 리투아니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그리스도 이미 의회 비준을 통과했다. 프랑스가 오는 5월 29일 국민투표를 실시하며, 네덜란드는 6월 1일이다. 회원국 중에서 한 국가라도 헌법조약을 거부하면, 헌법조약은 발효되지 않는다. 본문으로 3)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중 보유한 방대한 생산능력과 과잉자본의 배출구로서, 또한 공산주의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하여 유럽에 대한 경제 원조를 계획하였다. 원조를 받아들인 나라는 서유럽 16개국으로서 1951년까지 액수는 114억 달러에 달하였다. 본문으로 4) 회원국은 벨기에, 독일 연방 공화국, 프랑스,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그리고 네덜란드였다. 본문으로 5) 1973년 덴마크, 아일랜드, 영국이 가입했고, 1981년 그리스, 1986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가입했다. 이 중에서 영국의 가입이 가장 쟁점이 되었다. 영국은 유럽공동체에 내재한 유럽연방국이라는 목표에 반대하면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오스트리아, 스위스와 유럽자유무역지대를 창설했다. 영국은 유럽대륙의 국가들보다는 미국과 영국연방(영국 및 구(舊) 영국 식민지 국가였던 캐내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 파키스탄 등으로 구성된 연방체)과의 관계를 더욱 중시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누리는 세계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했는데, 이는 국제통화로서 파운드가 가지는 영향력 및 그에 따르는 부수적 이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공동체의 공동시장이 성공하고, 유럽 기업들이 출현하여 미국기업에 맞먹는 규모를 갖게 되자 영국은 입장을 바꿔 유럽공동체에 가입을 신청했다. 본문으로 6) 회원국의 경제력과 인구에 비례하여 투표수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제도. 가중다수결 제도 도입은 유럽연합 확대 과정에서 강대국(프랑스와 독일)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반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이후에 전원합의가 요구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가중다수결을 도입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근거는 의사결정과정에 더 큰 유연성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이 또한 강대국들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생각과 단일통화, 나아가 유럽연방국으로 더 빨리 이행하고자 하는 독일과 프랑스의 열망을 반영하는 주장이었다. 본문으로 7) 경제및통화연합의 전 단계였던 유럽화폐체계(the European Monetary System, EMS)는 회원국 통화의 환율격차를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이것은 회원국의 환율 변동폭을 2.25%(이탈리아 리라에 대해서는 6%)로 제한하는 제도다. 본문으로 8) 통합된 유럽의 무장화라는 문제는 통합 과정에서 오래된 쟁점 중에 하나다. 1948년 브뤼셀 조약을 통해 서유럽연합(Western European Union)이 설립되었다. 애초부터 서유럽연합에게는 NATO의 유럽축이라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NATO와 미국 헤게모니를 승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럽연방국을 염두에 둔다면 유럽의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하는 문제가 지속적인 쟁점으로 남았음은 당연한 일이다. 서유럽연합은 유럽의 독자적인 군사력 확보의 기반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영국이 서유럽연합을 유럽연합에 통합하는 것을 반대하고, 미국의 명백한 군사적 우월성은 서유럽연합을 약화했다. 냉전 해체 이후 서유럽연합의 강화가 예상되었지만, 유고에 대한 유럽연합의 전략 실패로 인해 오히려 NATO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NATO와 유럽연합의 독자적인 군사화 문제는 여전히 미묘한 쟁점으로 남아있다. 본문으로 9) 유럽연합 의회 선거에 대응하기 위해 연합을 형성했던 유럽 내부의 좌파정당들이 건설한 정당으로, 정식명칭은 "the Party of European Left"다. 이탈리아 공산주의 재건당이 창당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프랑스 공산당, 독일 민주사회당, 스페인 통합좌파, 그리스 연합 등 11개국 15개 정당이 가입해있다. 본문으로
일시: 2005년 4월 22일 금요일 6시 장소: 사회진보연대 회의실 토론: 박하순 사회진보연대 집행위원장(사회)/ 이창근 민주노총 국제부장/ 김석 공무원노조 국제부장 정리: 최예륜 정책편집부장 <편집자주> 사회진보연대 회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고 토론을 촉진하는 기관지를 만들기 위해 이번 호부터 '회원쟁점토론' 코너가 신설되었습니다.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회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쟁점이 되는 사안이나 주제에 대한 의견, 입장을 교환하는 계기로서 되길 바랍니다. 첫 번째 자리는 노동자 국제연대를 통해 반세계화 운동을 벌이고 있는 김석, 이창근 회원을 모시고 '노동자운동의 국제연대, 전망과 과제'라는 주제로 진행했습니다. 국제연대 활동의 경험과 소회를 비롯해 신자유주의 세계화 국면에서의 국제연대의 방향성에 대한 쟁점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박하순(이하 박); 회원쟁점토론에 와주신 동지들께 감사 드립니다. 노동자 국제연대라는 포괄적인 쟁점을 잡았는데요. 오늘은 서로의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는 수준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두 분은 국제연대 운동에 대해 상당히 일찍부터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해오셨고 지금은 노조 국제부에 계시죠. 국제연대 운동에 뜻을 펼치기 위해 어떻게 준비를 하셨는지, 지금까지 어떤 활동을 펼쳐오셨는지 먼저 이야기를 들어봤으면 합니다. 이창근(이하 이);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 남한 진보운동이 어려움에 처한 시기에 사회운동의 전망을 고민하면서부터 국제연대운동에 관심을 갖게되었습니다. 두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첫째, 한국 사회운동은 스탈린주의 편향을 극복하지 못하였고,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마르크스주의 전반의 위기로 이어졌죠. 운동이 위기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서 해외 운동과 역사에서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는지 시사점을 받고 싶었습니다. 사회주의권 몰락 이전부터 유럽이나 남미에서 스탈린주의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잖아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러한 노력을 도식적으로 이해하거나 정통에서 벗어난 곁다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죠. 하지만 우리가 정통이라 믿어왔던 것이 현실적으로 몰락하면서 우리의 이론적, 실천적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이론과 지식의 수입과 소개에 문제점이 있지 않는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진정한 국제주의의 부활이 시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코민테른 이후 남반구·북반구의 연대와 상호지원이 스탈린주의 방식으로 왜곡되면서 사실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코민테른도 몰락했죠. 그래서 국제주의 이념이나 실천이 사실상 수십 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고 그러한 상황이 세계적이며 국내적인 차원에서의 운동의 위기로 드러나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대안세계화 운동이 급격히 활성화되면서 국제주의를 어떤 방식으로 구현해야 하는가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지만 그때에는 코민테른이 재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죠. 그래서 국제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세계적인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혹은 사회주의의 문제의식을 최소한의 초보적인 수준에서나마 전달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PICIS) 활동을 함께 했습니다. 김석(이하 김): 저도 이창근 동지와 비슷한 고민으로 출발했습니다. 사회주의권 몰락이나 '코민테른의 부활'처럼 거창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세상을 바꾸기 위한 운동을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연대가 필요한데 연대를 만들어내기 위한 매개는 무엇인가가 제 화두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소통과 조직의 문제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투쟁의 연결고리의 문제가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의제와 쟁점으로 서로 연대할 것인가라는 고리의 문제... 그러한 연결고리를 복원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계기로 국제주의 활동형태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죠. 그 와중에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고 활동을 함께 하게 됐습니다. 박; 민주노총과 공무원노조에 들어가셔서 어떤 일을 하는지, 꿈꾸었던 국제주의 실현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지요? 이: 저는 민주노총 국제사업을 시작하면서 민주노총은 크게 두 가지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아시아 연대입니다. 국제연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남반구-북반구 간의 위계와 분할, 대륙별 편차의 문제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제자유노련(ICFTU)1)가 국제 노동자운동 질서를 장악하고 있는 조건에서 민주노총의 국제연대 전략에 대한 사고도 필요합니다. 또한 민주노총의 현실적인 역량의 한계도 고려해야죠.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 우선 민주노총은 아시아 지역의 연대를 중요한 고리로서 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국제적 연계망의 확산과 다른 대륙과 국제연대도 동시에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연대 없이 국제연대를 말하는 것은 실체 없는 구호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또 아시아 연대를 주목하는 이유에는 블록화 문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계화가 지역화를 동반한다면 대륙적인 수준에서의 주체형성의 문제가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본의 운동 동학에 대한 명확한 분석에 근거한 것은 아니지만 경험으로 볼 때 지금만큼 대륙적 연대가 강화되어야 할 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신자유주의 지역화·블록화가 추진되는 상황에서 민주노총이 자기 역할을 다하지 않는다면 아시아지역 노동자 국제연대는 무망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민주노총은 아시아노동조합연대회의에 참여했고 동남아 4개국 노동운동동향 보고서 작성 사업을 펼쳤습니다. 올해에는 한국계 해외진출기업의 노동권 탄압 문제에 대한 공동투쟁이나 한일FTA 공동대응 투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노동조합이 반세계화 연대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PICIS 활동의 경험에서 노동조합운동이 국제연대에 소극적일 뿐만 아니라 가로막는다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지금은 ICFTU 등 국제노동운동이 늦었지만 뒤따라가는 분위기죠. 민주노총이 반세계화 투쟁의 주요투쟁목표로 삼고 세계사회포럼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동조합의 국제연대가 반드시 노동조합끼리의 국제연대로 제한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밖에 몇 가지 문제의식이 더 있었습니다. 하나는 국제연대 사업이 현장과 동떨어진 채 몇몇 전문가나 상층간부 중심의 교류사업으로 진행되는 사업작풍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래서 조합원들의 의식고양을 위한 교육사업에 주목했습니다. 국제연대 활동가수련회라든가 국제노동정치학교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는 국제연대가 일방의 지원이라는 형태가 아니라 진정한 수평적 연대를 가능케 하는 방안을 민주노총이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활동을 평가하자면 문제의식은 있으되, 눈에 보이는 성과는 많지 않았죠. 가장 큰 성과로 볼 수 있는 앞서 말한 수련회나 학교처럼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프로그램이 마련되었다는 것이죠. 아시아 연대에 있어서는 문제의식은 강하게 제출했지만 현실적인 여건이 부족한 상황이죠. 민주노총 내부 자원과 역량의 한계가 있고 다른 나라의 운동에서 주체가 형성되지 못하는 등 한계가 많지만 최소한 문제의식을 공유해나가고는 있습니다. 김; 제가 공무원노조와 관계를 맺은 것은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전공련) 때부터입니다. 장기적인 계획이 있지는 않았지만, PICIS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제 역할을 고민했습니다. PICIS는 활동가조직이었고, 정보와 의제 소통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대중조직들 속에서는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연대를 실천하기 위한 고민을 중심으로 대중조직에 직접 들어가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처음 활동으로 공무원 노동3권 투쟁에 대한 국제연대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공무원의 노동기본권 쟁취투쟁을 국제적으로 알려내고 국제노동자운동의 압력을 조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활동은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공공성 문제였습니다. 공무원 문제는 공공성의 최전선에 있죠. 아직까지도 연결고리들을 찾아내는 과정에 있고요. 공무원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억압해온 이유가 있는 것 아닙니까? 공무원이 지배계급, 자본가들의 이해를 위해 이용당해온 역사가 있기 때문에 공무원 투쟁이 그만큼 억압받아온 것이죠. 저는 공무원 노동자운동이 공공성 강화 투쟁과 연결고리를 대중운동 속에서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먼저 공무원 노동자의 의식을 제고하는 교육사업의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해외의 공무원 노동자 운동이 어떠했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공공부문 해체에 대한 대응이 대정부투쟁으로 그치거나 개별 초국적자본에 대한 투쟁 등으로 개별화되어있는 상황이죠. 따라서 공공부문의 국제연대가 공무원 노동자운동에게 중심 화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 김석 동지는 네덜란드에 있는 초민족연구소(TNI)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데 그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됩니까? 김; 그 때가 1999년 4월이었습니다. 제가 반세계화 활동가로서 준비되어있는 상황이 아니긴 했지만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TNI는 변혁, 개혁의 과제들을 국제적 차원에서 연구하는 지식인 모임이자 광범위한 국제 네트워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월든 벨로, 반다나 쉬바, 수잔 조지 같은 반세계화운동의 주요한 이데올로그들이 포진해있죠. 일년에 한번 회의를 하고 반세계화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지식인들이 다 모이죠. 이처럼 정책적·조직적 역량을 모으기 위한 소통의 네트워크가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하게 됐습니다. 박; 대개 우리가 국제주의나 국제연대를 뚜렷한 정의 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창근 동지 얘기 중에도 나왔지만 한국자본이 세계적으로 진출해서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으므로 예를 들어 현대가 진출한 국가의 노동자들간 연대도 운동의 항목이 될 수 있고, 이주노동자운동도 국제연대의 영역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국제주의를 소묘하고 무엇을 국제연대의 영역, 공간, 쟁점으로 꼽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ILO, ICFTU 회의 등 국제회의에 참가하는 것들도 그런 활동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을 텐데, 노조가 국제연대를 구현하기 위한 활동은 어떤 게 있을까요? 김석 동지랑 프랑스 금융거래과세연합(ATTAC)이 주최한 회의에 간 적이 있는데 제3세계와 개도국들이 IMF 구조조정으로 인해 처해있는 조건들이 대개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국제자본이든 금융기구든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열심히 싸운다면 국제주의를 의식하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의 투쟁 자체가 국제적인 운동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미 세계화된 자본에 맞서 국내 투쟁을 올곧게 수행하는 것이 국제주의를 구현하는 하나의 내용이나 방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 물론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일국 차원에서 열심히 투쟁하면 그것이 국제주의라고 말한다면, 단위사업장 차원에서 열심히 투쟁하면 전국적, 전계급적 투쟁을 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죠. 단위사업장 차원의 투쟁을 넘어 산업별, 전국적 투쟁을 조직하듯이, 국내에서 투쟁을 열심히 하면서 전선을 명확히 설정하는 세계적인 투쟁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 국제적인 투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정세 속에서 일국의 투쟁이 국제연대나 국제주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사고를 간과한 경향이 있지 않았나 돌아봐야 할 듯합니다. 패트릭 본드가 시애틀, 프라하에서 세계 활동가들이 모여서 국제기구에 대해 투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 국에서 벌어지는 IMF 반대투쟁이 중요한 국제주의 투쟁의 하나라고 얘기했던 적도 있지요. 이; 대체로 동의합니다만, 왜 지금 시대에 일국적 투쟁도 국제주의 운동이 되는가, 그 맥락을 이해할 때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식했든 못 했든 간에 96-97년 총파업 투쟁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노동유연화에 대한 상당히 중요한 반격의 계기로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시 투쟁이 국제적 차원의 노동유연화, 금융화라는 쟁점에서 세계적 의의가 있었던 것이죠, 국내의 투쟁과 국제주의를 구현하는 경로가 서로 분절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국제주의를 실현하는 경로가 국내 투쟁을 빼면 뭐가 있냐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신자유주의 국면에서 일국적 쟁점이라는 것은 거의 사라졌다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자본주의 체제는 세계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물론 반대 효과도 고려해야 합니다. 박하순 동지 의견에 충분히 동의하지만, 그런 입장이 국제주의의 진전을 지체시켜서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노동자운동의 관성이 있고 국제연대가 관념적이거나 '고공투쟁'으로 비춰지다 보면, 우리 투쟁을 잘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관성만 남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칫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분석과 타국의 노동자운동과 연대를 보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히려 그러한 논리를 깨뜨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국내투쟁을 강조하는 입장에는 그런 양면적인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 노동자운동 일부에서 그런 태도로 세계사회포럼 참가에 비판적인 것 같은데 그런 부류를 겨냥해서 하신 말씀 같군요. 김; 이창근 동지가 말씀하면서 양면성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공간이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죠. 그 공간이 국제회의장이 아니라 현장이라는 거죠. 그것을 분리할 때 역편향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언어나 비용의 한계와 접근성의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국제연대가 상층부 운동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편향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국내투쟁을 정말로 '잘' 한다에 해답이 있다고 봅니다. 국제주의 전망에 걸맞은 실천이 어떻게 담보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죠. 이; 노동조합에는 생존권 차원의 쟁점이 있습니다. 시장화, 개방화 문제로 인한 공공성의 해체 등의 문제가 있지만 생존권 투쟁이 노동조합의 중요한 목록을 구성하죠. 김석 동지가 얘기했듯 우리가 경계해야 할 편향이 있습니다. 일국적 수준에서의 생존권 투쟁이 소위 '노동자 이기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북반구 노총은 임금과 고용 수준 등 자국 노동자들의 이해를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그러한 쟁점을 해결하는 데 집중해 왔습니다. 한국사회도 그런 상황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국 노동자들의 이익을 옹호하면서도 국제적인 원칙을 잃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 것인? 공장의 해외이전, 산업공동화, 무역장벽 문제가 한국 노동자운동의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고, 동남아 지역을 중심으로 저임금을 노린 한국 자본의 해외투자의 증가하고 있는 조건에서 우리의 문제의식을 발전시켜야 할 계기가 끊임없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박; 쟁점이 세계화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 예컨대 노동시장의 문제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십여 년 전에 미국 토론프로그램에서 미국 조선업 노동자들이 폴란드 등으로 우리 일감이 다 가고 있다면서 산업공동화, 해외이전에 대해서 거칠게 이야기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보니까 인도 자동차가 한국에 수입된답니다. 국내로 이런 가격이 낮은 제품이 들어올 경우 완성차 문제도 터지지 않겠습니까? 또한 세계화 과정에 노동의 불안정화, 이주노동자 확대, 빈곤화 문제 등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조건이 전반적으로 하락한다면 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의 조건이 형성될 것 같지만, 그래도 노동조건이 세계적으로 동질화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밑바닥을 향한 경주'를 한다고 하지만, 노동조건의 측면에서 다양한 노동자층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국제연대의 객관적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해 봤으면 합니다. 한 공장 내에서도 정규직 비정규직간의 갈등이 있는데 세계적으로야 말 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요? 김; 자본주의가 발전할 만큼 발전해야 멸망한다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저임금 노동력이 존재하고 소비층이 존재하는 한 자본주의는 지속될 것이라는 입장이 지배적이죠. 박; 노동조건을 동등하게 만들자는 운동보다는 각 국에 맞는 요구수준에 따른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 노동조합 운동의 국제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종합적인 전략이 긴급합니다. 노동조합 운동은 국제연대를 실현하기 위한 여러 활동을 하고 있지만, 최근에 형성되고 있는 대안세계화 운동들과 화합적으로 결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조차 결합이 잘 안 되죠. 이것이 화학적 결합이 되려면 노동자운동 자체가 혁신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격적인 국제적 실천으로 나아가려면 그러한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겠죠. 박; 그렇다면 '왜 노동조합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운동을 확산하기 위해 세계사회포럼이든 지역포럼이든 일국적, 세계적 차원의 다른 공간들을 모색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김; 저는 노동조합 운동의 자기 전망을 바꾸는 문제와는 조금 다른 측면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서 초국적기업의 해외이전에 관해 미국 조선산업 노동자가 항의한 예를 들었는데, 저는 그런 논쟁 과정에서 노동자운동의 급진화가 이루어지고 국제주의의 토양을 만들어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노동조합 운동이 자본의 본질을 벗겨내는 투쟁을 통해 급진화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전망을 만들어 내는 건 요원한 일이죠. 박; 이탈리아 사회포럼에 이탈리아 노동총동맹(CGIL)이 적극 참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사회포럼 프로세스가 마을 단위까지 진행된다고 들었습니다. 산별노조나 총연맹 차원에서의 모범 사례를 소개해 주신다면? 김; 프랑스 르노 자동차가 벨기에 공장을 폐쇄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르노 자동차 노동자들이 수행했던 투쟁2)이 훌륭한 국제연대 사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국경을 넘어선 투쟁이 곧 국제연대 투쟁인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이; 미국에서 공장이나 산업을 해외로 이전하는 문제나 '덤핑' 문제에 쟁점으로 떠오를 때. 노동조합이 압력집단으로 움직였습니다. 이런 활동의 효과는 별로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노동조합이 이익집단의 성격을 띠기도 하지만 자기 이해만 중심에 두고 폴란드 노동자들과 연대나 배려를 사고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또 벨기에-프랑스 연대를 했던 르노 자동차 사례를 보면, 한국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있습니다. 현대자동차도 터키공장을 폐쇄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한국의 노동조합이 어떤 행보를 취해야할지가 쟁점입니다. 박; 미국노동자들이 한국철강 수입을 계속 허용하면서 다른 식의 행보를 했어야 했다는 식의 배려가 가능했을까요? 저는 노동자의 특수한 층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답이 없는 문제라 봅니다. 차라리 자본의 본질을 폭로하자는 식의 운동을 하는 방향이 올바른 게 아닐까요? 이; 이를테면 현대자동차가 국내 공장의 상당 부분을 해외로 이전할 경우에 우리의 입장과 기조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나가지 말라고 할 것인가, 나가되 해외 공장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최소한도라도 보장하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의 본질을 폭로할 것인가? 물론 본질을 폭로할 수 있다고 보지만, 이런 문제는 노동조합 차원에서 몹시 투쟁하기 힘든 쟁점이라고 봅니다. 박; '노동조합의 조건'이라는 것을 가정하는 한, '나가되 해외 공장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최소한도라도 보장하라'는 입장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세계 자본주의를 인정하면서 동등한 노동조건의 질과 안정성을 보장하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치 국제협정 안에 사회조항을 집어넣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는지.3) 이; 북반구 노총들의 사업들을 살펴보면 '제3세계 노동조건 감시'라는 항목이 들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계 초국적기업의 활동 감시'같은 게 나옵니다. 자국의 노동비용의 삭감 시도를 막아내기 위해 외국에 있는 자국계 초국적기업 노동자의 노동권과 진출한 국가들의 임금수준과 고용수준에 대한 문제제기가 주요한 투쟁과제가 되고 있는 게 객관적인 현실입니다. "나가더라도 노동조건을 지키고 최선을 다하라"는 요구인 셈입니다. 제가 진정 말하고 싶은 것은 국제적인 시야 속에서 우리가 어떤 입장과 정책을 세울 것인가라는 문제입니다. 무역과 노동조건의 연계라는 쟁점뿐만 아니라 북반구 노동조합 운동의 조건과 활동방식이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민주노총 내에서 북반구 노동조합과 비슷한 요구사항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북반구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입장과 정책을 모색할 것인가 답해야 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저는 오히려 르노의 공동파업에서 하나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그러나 저는 르노 투쟁이 국제연대 운동의 모델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자본의 본질을 폭로하는 투쟁만 하자는 것이 아니고, 해외이전 반대투쟁 또한 자본의 본질을 폭로하는 투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자본의 본질, 곧 초과이윤 형성을 위한 착취의 세계화라는 본질을 폭로하는 투쟁이 되어야 하고 연결고리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죠. 이; 현대자동차의 해외공장 건설은 인건비 절감이 주목적이 아니라 경영확장전략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전략은 다양한 수준에서 현대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는 노조와 협의나, 해외에서 기본적인 노동조건 수준을 유지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장이전 반대투쟁을 하든, 북반구노조와 유사한 요구를 내걸든, 그도 아니라면 이 둘을 동시에 전개할 수 있는 방안을 세우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 피터 워터만의 견해에 의하면 '사회조항은 WTO의 도움으로 노동권을 획득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전략입니다.4) 이와 비슷하게 '나가되 초과착취 하지 말라'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입장 아니겠습니까? 소위 '괜찮은 일자리'(decent jop)라는 요구도 사회조항과 유사하게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이 역시 들어줄 상대가 아닌 사람들에게 하소연하는 격이 아닌가 싶네요. 해외진출자본에 대한 감시활동의 의의가 있다 하더라도... 이; 사회조항의 문제는 실상 대단히 우려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실현가능성은 거의 없지요. 김; 자본의 운동을 바꾸지 않는 한 패배는 자명한 것이고 우리의 운동은 노동자 전체의 입장에서 투쟁의 씨앗을 남기는 게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자본운동과 노동자 전체의 입장에 대한 고민 없이 '이행기강령'에 대해 말할 수는 없는 거죠. 87년 투쟁 이후 우리가 보았듯이 수많은 노동자운동이 패배했거나 노동자들이 생존권을 잃기도 했지만 노동자운동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그런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투쟁과 급진화가 끊임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박; 냉철하게 생각하면 사태의 귀결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내가 활동가로서 노동조합 교육을 나설 때 김석 동지처럼 얘기하는 게 참 어렵습니다. 일년여 전에 폐업한 어느 노동조합에서 교육을 한 적이 있는데 묘수도 없고 싸울 방법도 없고... 그래도 그 기업은 약간이나마 공장인수 가능성이 있지만, 완전 폐쇄라면 노동자들이 공장을 다 떠나버리는 상황에서 공장을 부여잡고 폐쇄반대투쟁을 한다는 것은 지속되기도 힘들 것입니다. 자본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매진하자는 말은 조합원 대중에게 상당히 허무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회조항, '괜찮은 일자리', 기업감시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현실에서 어떤 요구나 정책을 제시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견을 들었습니다. 이; 일국에서든 세계적 차원에서든 전반적으로 노동권, 노동조건, 노동친화적인 국제체제 형성 등 대해 각국 노동조합이 공통의 정책을 입안하는 게 지금의 국면에 있어 필요하고 급진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무역과 노동기준 연계문제, 사회조항·노동조항 문제가 남는데, 대안세계화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이 이슈가 무력화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ICFTU를 중심으로 공식적 국제노동조합조직 안에서는 존재감이 남아 있죠.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이를 거부한다면 대안이 무엇인가가 문제입니다. 또 '괜찮은 일자리'에 대해 말해보면, 저는 그 요구가 사회조항과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는 지적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국제노동계의 화두의 변화과정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한참 실업문제와 일자리 창출이 국제노동계의 핵심 화두였지 않습니까. 것이 노동유연화 과정에서 일자리의 질 문제로 변화되었고, '괜찮은 노동'(decent work)이라는 요구가 등장했습니다. 당장 민주노총의 경우도 비정규직 철폐투쟁하면서 고용의 질, 임금·고용조건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량실업시대에서 노동유연화 시대 즉 불안정노동 시대로 접어든 지금, 국제 노동계에서 핵심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괜찮은 노동'이라는 요구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불안정 노동 시대에 적합한 화두로 활용가치가 있는지, 또는 뭔가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지 검토가 필요하죠, 박;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이 아니라 정규직이 되어야 하고 가능한 만큼 지적, 육체적 능력을 고루 사용하면서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요구할 것인가가 문제죠. ICFTU 등이 로비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 '괜찮은 노동'이 사회조항과 연결된 측면이 무엇인가 살펴보면... 사회조항은 무역과 노동기준을 연계하고, 예를 들면 노동규정 안 지키면 WTO가 무역제재 가하라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반발이 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괜찮은 노동'이 제기될 때도 이를 강제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대륙협정, 자유무역지대(FTA), WTO, 국가 정책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방법이 필요하며, 따라서 WTO도 무언가 해야한다는 간접적인 압박이 은근슬쩍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괜찮은 노동'이 간접적으로 사회조항을 살려내는 데 봉사한다는 점에서 워터만의 지적은 일리는 있습니다. 그런데 역으로 사고해보면 우리가 그것에 대비될 수 있는 화두는 있느냐는 고민이 생깁니다. 정치적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북반구 노동조합들이 제3세계 혹은 국제적인 수준에서의 노동기준을 어떻게 상승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는데, 이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국제적인 노동기준을 상승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주장해야 하는가? 그래서 'WTO가 아니라 ILO를 강화하라', 아니면 '국내 정부를 압박해야 한다'라는 말을 빼면 별로 할 이야기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죠. 김: 아무리 급진적인 요구라고 해도 누구에게 어떻게 요구할 것인가의 문제는 항상 남게 되고, 어차피 상층부 운동이 됩니다. 이것을 현장에서 조직하지 않는 한... 아까 이야기한 노동기준 문제에 대해 말해보면, 자본이 북반구 노동자들만 착취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 제3세계 착취를 동반하는데 이 과정에서 어떤 방법이 있겠냐가 쟁점입니다. 노동자운동의 급진화를 목표로 하고 감시운동 같은 것도 하나의 모델로서 시도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시도들이 존재할 텐데 이러한 시도들을 묶어줄 수 있는 혹은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계사회포럼이 소중하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동의합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직접적인 연대를 매우 강조했습니다. WTO는 당연히 활용할 수 없는 국제기구고, ILO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사업장, 같은 초국적기업의 사업장간 국경을 넘어선 연대가 소중합니다. 누군가를 경유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연대 속에서, 사업장을 넘어선 실천은 아니지만 사업장 내 국경을 넘어선 실천이 노동자 국제연대에 있어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 그런데 그러한 방식은 대자본을 상정하는 것이고 중소자본은 포함되어있지 않습니다. 박;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각각 주장하는 바가 모두 다른 것 같습니다.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핵심을 무엇이라 보십니까?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핵심 중 하나가 당 운동으로부터의 탈피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이미 현실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사회포럼이든 대안세계화운동이든 어떤 국제당이나 한 조직 혹은 국제정치조직 연합에 의한 전선 형태의 조직체에 의해서 주도되는 것이 이미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 사회운동들이 섞여있고 이미 세계적인 운동의 전개양상이 사회운동을 지향하는 대중운동들의 결합을 통해 진전되고 있습니다. 이; 사회운동 노조주의와 국제주의 실천이란 문제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아까도 말한 것처럼 현재에서는 노동조합운동과 국제적인 사회운동(대안세계화 운동) 사이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고, 형식적으로 공동의 의제를 공유하는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그것은 일국적 수준에서의 노동조합 운동이 시대의 과제에 맞게 혁신되는 과정을 통해서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계사회운동이 대중운동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사실 노동운동과의 결합이 필요하고, 노동운동의 입장에서는 노동조합운동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사회운동과 의제와 주체의 측면에서의 결합이 요구됩니다.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핵심 중에 박하순 동지가 이야기한 당 운동으로부터 탈피도 한 요소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급진적인 대중의 목소리를 노동조합도, 당도 대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표출구로서 세계사회포럼 프로세스가 진행된 게 어느 정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계사회포럼 프로세스가 당 운동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은 당 운동의 재구성 과정과 함께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당 운동으로부터의 탈피라기보다는 전통적인 또는 사민주의 당 운동으로부터의 탈피인 것이고, 오히려 당 운동의 재구성을 동반한다고 이해하는 게 올바를 것입니다. 저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핵심은 연대성의 확장과 강화, 이에 기반을 둔 급진성의 강화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노동자운동이 현재 사실상 정규직·남성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구조로 되어있고 자칫 이익집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상존합니다. 그러므로 연대성을 강화하는 것은 비정규직, 불안정노동과의 연대를 포함한 사회적 연대를 뜻합니다. 이를 통해 관료화되고 위기에 빠진 노동조합운동의 혁신과 급진성의 회복이 가능할 것입니다. 또한 연대성 강화를 통한 급진성의 강화는 일국적인 수준을 넘어 국제적인 수준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저는 국제주의에 사회운동의 요소가 내재되어있다고 봅니다. 아까 세계화가 노동자운동에게 던진 현안들에 대해 얘기했지만, 국제주의에는 남-북 노동자의 연대라는 쟁점이 담겨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핵심은 국제주의와 여성주의라고 봅니다. 김; 사회운동 노조주의가 제기되는 맥락도 급진성의 발현이 아닌가요. 현실 문제에서 노동조합을 통한 노사 교섭을 통해 해결되지 않는 것이 많기 때문에 사회운동 노조주의가 제기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제기가 동반되지 않고서는 문제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의 반증이죠. 이창근 동지가 말한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의 연대'는 노동자 국제주의의 중요한 측면이라고 말했는데 굳이 그렇게 볼 문제냐는 생각도 듭니다. 제 생각에는 사회운동이 급진화된 노동자운동과 별개가 아닙니다. 이; 노동자운동과 여러 사회운동이 현실적으로 괴리되어 있는 상황에서 연대성을 강화하는 것이 일차적 과제라는 의미입니다. 김; 제가 사회운동 노조주의가 수입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에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노동운동은 사회적·계급적 쟁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자기 조직을 중심으로 조합주의적 실천을 벌여왔던 북반구 노동운동을 비판하기 위해 제기된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역수입할 필요가 있냐는 것입니다. 박 ; 한국의 여러 활동가들이 사회변혁을 위해 노력해 왔다고 하더라도, 현재 조합원 대중의 주류가 그러한 목표로 운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런 맥락에서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제기하고 급진화의 계기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지요. 김; 그래서 저는 노동자운동의 국제주의가 매우 중요하고, 국제주의가 하나의 이념 또는 운동의 전망을 표현한다고 말했습니다. 박; 워낙 방대한 주제를 제한된 시간에 진행하느라 많은 쟁점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 듯합니다. 더욱 깊은 토론을 위한 자리를 다음에 또 마련해야 할 것 같습니다. 토론에 참여해주신 동지들께 감사 드립니다. PSSP 1)국제자유노련(ICFTU)은 1949년 11월 세계노동조합연맹(WFTU)에서 공산주의 계열 노동조합과 심한 의견충돌 끝에 탈퇴한 영국 노동조합회의(TUC)를 중심으로 미국의 산업별노동조합(CIO), 미국노동총연맹(AFL:후에 CIO와 합병) 등이 런던에서 결성한 국제노동조합 조직이다. ICFTU는 국제노동기구(ILO), 세계무역기구(WTO), IMF 등과 긴밀하게 협력한다. 2002년 현재 148개국 225개 노동조합이 가입해 있다. 한국 민주노총과 한국노총도 가입해 있다. 본문으로 2)다국적 기업인 프랑스 르노 자동차는 1987년 3월 2일 회사의 적자를 보전하기 위하여 3천여 명을 고용하고 있는 벨기에의 빌보르드 조립공장을 3월 7일부터 폐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반발한 프랑스 본사와 벨기에 공장의 노동자들은 즉각 파업에 돌입하였다. 벨기에 공장의 폐쇄는 곧 각 국의 르노 노동자들 공동의 문제라고 인식한 노동자들은 범유럽적 저항을 조직하였다. 마침내 7일에는 프랑스와 벨기에뿐만 아니라, 스페인, 포르투갈, 슬로베니아의 르노 공장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1시간 동안 일시 파업을 단행했다. 루이 슈웨치르 르노 회장은 벨기에 공장 노동자들의 요구로 열린 긴급회의에서 일부 노동자들은 전환배치를 통한 고용승계가 있을 수 있지만 공장폐쇄 결정은 되돌릴 수 없다고 했다. 본문으로 3) 미국노총산별회의(AFL-CIO)는 "WTO가 자유무역에 있어 노동기준의 문제를 항상 고려해야 하며, 이를 위해 대화를 시작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노동자 권리 및 환경보호 조항이 WTO 내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자유무역협정 혹은 투자협정 자체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일본 노총, 렝고[聯合]의 한일투자협정에 대한 입장도 비슷하다. 그러나, 설사 WTO 혹은 투자협정에 사회조항이 편입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겠는가에 대해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무역협정 중에서 최초로 노동과 환경이슈가 도입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악명높은 NAFTA가 최초다. NAFTA는 부속협정의 형태로 환경보호위원회와 노동위원회의 설치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협정들은 지금까지 어떠한 기능과 역할도 수행하지 못한 채 유명무실화되고 있다. 한편, 사회조항 노선이 갖고 있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점은, 금융세계화 체제를 강화하고 공고히 하고 있는 WTO 및 투자협정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해줌으로써, 현재의 제국주의적 지배·종속관계를 유지하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창근,〈금융세계화, 한미한일 투자협정 그리고 우리의 대응〉, 《진보평론 2000 여름호》를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4) 피터 워터만, 〈새로운 지구적 운동의 국제적 노조주의에 대한 도전에 다른 해방적 노동전략 탐색〉, 《사회진보연대》, 통권 52호, 67p. 본문으로
일시: 2005년 4월 22일 금요일 6시 장소: 사회진보연대 회의실 토론: 박하순 사회진보연대 집행위원장(사회)/ 이창근 민주노총 국제부장/ 김석 공무원노조 국제부장 정리: 최예륜 정책편집부장 <편집자주> 사회진보연대 회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고 토론을 촉진하는 기관지를 만들기 위해 이번 호부터 '회원쟁점토론' 코너가 신설되었습니다.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회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쟁점이 되는 사안이나 주제에 대한 의견, 입장을 교환하는 계기로서 되길 바랍니다. 첫 번째 자리는 노동자 국제연대를 통해 반세계화 운동을 벌이고 있는 김석, 이창근 회원을 모시고 '노동자운동의 국제연대, 전망과 과제'라는 주제로 진행했습니다. 국제연대 활동의 경험과 소회를 비롯해 신자유주의 세계화 국면에서의 국제연대의 방향성에 대한 쟁점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박하순(이하 박); 회원쟁점토론에 와주신 동지들께 감사 드립니다. 노동자 국제연대라는 포괄적인 쟁점을 잡았는데요. 오늘은 서로의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는 수준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두 분은 국제연대 운동에 대해 상당히 일찍부터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해오셨고 지금은 노조 국제부에 계시죠. 국제연대 운동에 뜻을 펼치기 위해 어떻게 준비를 하셨는지, 지금까지 어떤 활동을 펼쳐오셨는지 먼저 이야기를 들어봤으면 합니다. 이창근(이하 이);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 남한 진보운동이 어려움에 처한 시기에 사회운동의 전망을 고민하면서부터 국제연대운동에 관심을 갖게되었습니다. 두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첫째, 한국 사회운동은 스탈린주의 편향을 극복하지 못하였고,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마르크스주의 전반의 위기로 이어졌죠. 운동이 위기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서 해외 운동과 역사에서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는지 시사점을 받고 싶었습니다. 사회주의권 몰락 이전부터 유럽이나 남미에서 스탈린주의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잖아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러한 노력을 도식적으로 이해하거나 정통에서 벗어난 곁다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죠. 하지만 우리가 정통이라 믿어왔던 것이 현실적으로 몰락하면서 우리의 이론적, 실천적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이론과 지식의 수입과 소개에 문제점이 있지 않는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진정한 국제주의의 부활이 시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코민테른 이후 남반구·북반구의 연대와 상호지원이 스탈린주의 방식으로 왜곡되면서 사실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코민테른도 몰락했죠. 그래서 국제주의 이념이나 실천이 사실상 수십 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고 그러한 상황이 세계적이며 국내적인 차원에서의 운동의 위기로 드러나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대안세계화 운동이 급격히 활성화되면서 국제주의를 어떤 방식으로 구현해야 하는가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지만 그때에는 코민테른이 재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죠. 그래서 국제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세계적인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혹은 사회주의의 문제의식을 최소한의 초보적인 수준에서나마 전달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PICIS) 활동을 함께 했습니다. 김석(이하 김): 저도 이창근 동지와 비슷한 고민으로 출발했습니다. 사회주의권 몰락이나 '코민테른의 부활'처럼 거창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세상을 바꾸기 위한 운동을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연대가 필요한데 연대를 만들어내기 위한 매개는 무엇인가가 제 화두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소통과 조직의 문제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투쟁의 연결고리의 문제가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의제와 쟁점으로 서로 연대할 것인가라는 고리의 문제... 그러한 연결고리를 복원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계기로 국제주의 활동형태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죠. 그 와중에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고 활동을 함께 하게 됐습니다. 박; 민주노총과 공무원노조에 들어가셔서 어떤 일을 하는지, 꿈꾸었던 국제주의 실현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지요? 이: 저는 민주노총 국제사업을 시작하면서 민주노총은 크게 두 가지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아시아 연대입니다. 국제연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남반구-북반구 간의 위계와 분할, 대륙별 편차의 문제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제자유노련(ICFTU)1)가 국제 노동자운동 질서를 장악하고 있는 조건에서 민주노총의 국제연대 전략에 대한 사고도 필요합니다. 또한 민주노총의 현실적인 역량의 한계도 고려해야죠.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 우선 민주노총은 아시아 지역의 연대를 중요한 고리로서 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국제적 연계망의 확산과 다른 대륙과 국제연대도 동시에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연대 없이 국제연대를 말하는 것은 실체 없는 구호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또 아시아 연대를 주목하는 이유에는 블록화 문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계화가 지역화를 동반한다면 대륙적인 수준에서의 주체형성의 문제가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본의 운동 동학에 대한 명확한 분석에 근거한 것은 아니지만 경험으로 볼 때 지금만큼 대륙적 연대가 강화되어야 할 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신자유주의 지역화·블록화가 추진되는 상황에서 민주노총이 자기 역할을 다하지 않는다면 아시아지역 노동자 국제연대는 무망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민주노총은 아시아노동조합연대회의에 참여했고 동남아 4개국 노동운동동향 보고서 작성 사업을 펼쳤습니다. 올해에는 한국계 해외진출기업의 노동권 탄압 문제에 대한 공동투쟁이나 한일FTA 공동대응 투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노동조합이 반세계화 연대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PICIS 활동의 경험에서 노동조합운동이 국제연대에 소극적일 뿐만 아니라 가로막는다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지금은 ICFTU 등 국제노동운동이 늦었지만 뒤따라가는 분위기죠. 민주노총이 반세계화 투쟁의 주요투쟁목표로 삼고 세계사회포럼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동조합의 국제연대가 반드시 노동조합끼리의 국제연대로 제한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밖에 몇 가지 문제의식이 더 있었습니다. 하나는 국제연대 사업이 현장과 동떨어진 채 몇몇 전문가나 상층간부 중심의 교류사업으로 진행되는 사업작풍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래서 조합원들의 의식고양을 위한 교육사업에 주목했습니다. 국제연대 활동가수련회라든가 국제노동정치학교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는 국제연대가 일방의 지원이라는 형태가 아니라 진정한 수평적 연대를 가능케 하는 방안을 민주노총이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활동을 평가하자면 문제의식은 있으되, 눈에 보이는 성과는 많지 않았죠. 가장 큰 성과로 볼 수 있는 앞서 말한 수련회나 학교처럼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프로그램이 마련되었다는 것이죠. 아시아 연대에 있어서는 문제의식은 강하게 제출했지만 현실적인 여건이 부족한 상황이죠. 민주노총 내부 자원과 역량의 한계가 있고 다른 나라의 운동에서 주체가 형성되지 못하는 등 한계가 많지만 최소한 문제의식을 공유해나가고는 있습니다. 김; 제가 공무원노조와 관계를 맺은 것은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전공련) 때부터입니다. 장기적인 계획이 있지는 않았지만, PICIS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제 역할을 고민했습니다. PICIS는 활동가조직이었고, 정보와 의제 소통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대중조직들 속에서는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연대를 실천하기 위한 고민을 중심으로 대중조직에 직접 들어가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처음 활동으로 공무원 노동3권 투쟁에 대한 국제연대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공무원의 노동기본권 쟁취투쟁을 국제적으로 알려내고 국제노동자운동의 압력을 조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활동은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공공성 문제였습니다. 공무원 문제는 공공성의 최전선에 있죠. 아직까지도 연결고리들을 찾아내는 과정에 있고요. 공무원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억압해온 이유가 있는 것 아닙니까? 공무원이 지배계급, 자본가들의 이해를 위해 이용당해온 역사가 있기 때문에 공무원 투쟁이 그만큼 억압받아온 것이죠. 저는 공무원 노동자운동이 공공성 강화 투쟁과 연결고리를 대중운동 속에서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먼저 공무원 노동자의 의식을 제고하는 교육사업의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해외의 공무원 노동자 운동이 어떠했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공공부문 해체에 대한 대응이 대정부투쟁으로 그치거나 개별 초국적자본에 대한 투쟁 등으로 개별화되어있는 상황이죠. 따라서 공공부문의 국제연대가 공무원 노동자운동에게 중심 화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 김석 동지는 네덜란드에 있는 초민족연구소(TNI)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데 그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됩니까? 김; 그 때가 1999년 4월이었습니다. 제가 반세계화 활동가로서 준비되어있는 상황이 아니긴 했지만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TNI는 변혁, 개혁의 과제들을 국제적 차원에서 연구하는 지식인 모임이자 광범위한 국제 네트워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월든 벨로, 반다나 쉬바, 수잔 조지 같은 반세계화운동의 주요한 이데올로그들이 포진해있죠. 일년에 한번 회의를 하고 반세계화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지식인들이 다 모이죠. 이처럼 정책적·조직적 역량을 모으기 위한 소통의 네트워크가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하게 됐습니다. 박; 대개 우리가 국제주의나 국제연대를 뚜렷한 정의 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창근 동지 얘기 중에도 나왔지만 한국자본이 세계적으로 진출해서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으므로 예를 들어 현대가 진출한 국가의 노동자들간 연대도 운동의 항목이 될 수 있고, 이주노동자운동도 국제연대의 영역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국제주의를 소묘하고 무엇을 국제연대의 영역, 공간, 쟁점으로 꼽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ILO, ICFTU 회의 등 국제회의에 참가하는 것들도 그런 활동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을 텐데, 노조가 국제연대를 구현하기 위한 활동은 어떤 게 있을까요? 김석 동지랑 프랑스 금융거래과세연합(ATTAC)이 주최한 회의에 간 적이 있는데 제3세계와 개도국들이 IMF 구조조정으로 인해 처해있는 조건들이 대개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국제자본이든 금융기구든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열심히 싸운다면 국제주의를 의식하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의 투쟁 자체가 국제적인 운동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미 세계화된 자본에 맞서 국내 투쟁을 올곧게 수행하는 것이 국제주의를 구현하는 하나의 내용이나 방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 물론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일국 차원에서 열심히 투쟁하면 그것이 국제주의라고 말한다면, 단위사업장 차원에서 열심히 투쟁하면 전국적, 전계급적 투쟁을 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죠. 단위사업장 차원의 투쟁을 넘어 산업별, 전국적 투쟁을 조직하듯이, 국내에서 투쟁을 열심히 하면서 전선을 명확히 설정하는 세계적인 투쟁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 국제적인 투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정세 속에서 일국의 투쟁이 국제연대나 국제주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사고를 간과한 경향이 있지 않았나 돌아봐야 할 듯합니다. 패트릭 본드가 시애틀, 프라하에서 세계 활동가들이 모여서 국제기구에 대해 투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 국에서 벌어지는 IMF 반대투쟁이 중요한 국제주의 투쟁의 하나라고 얘기했던 적도 있지요. 이; 대체로 동의합니다만, 왜 지금 시대에 일국적 투쟁도 국제주의 운동이 되는가, 그 맥락을 이해할 때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식했든 못 했든 간에 96-97년 총파업 투쟁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노동유연화에 대한 상당히 중요한 반격의 계기로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시 투쟁이 국제적 차원의 노동유연화, 금융화라는 쟁점에서 세계적 의의가 있었던 것이죠, 국내의 투쟁과 국제주의를 구현하는 경로가 서로 분절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국제주의를 실현하는 경로가 국내 투쟁을 빼면 뭐가 있냐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신자유주의 국면에서 일국적 쟁점이라는 것은 거의 사라졌다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자본주의 체제는 세계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물론 반대 효과도 고려해야 합니다. 박하순 동지 의견에 충분히 동의하지만, 그런 입장이 국제주의의 진전을 지체시켜서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노동자운동의 관성이 있고 국제연대가 관념적이거나 '고공투쟁'으로 비춰지다 보면, 우리 투쟁을 잘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관성만 남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칫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분석과 타국의 노동자운동과 연대를 보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히려 그러한 논리를 깨뜨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국내투쟁을 강조하는 입장에는 그런 양면적인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 노동자운동 일부에서 그런 태도로 세계사회포럼 참가에 비판적인 것 같은데 그런 부류를 겨냥해서 하신 말씀 같군요. 김; 이창근 동지가 말씀하면서 양면성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공간이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죠. 그 공간이 국제회의장이 아니라 현장이라는 거죠. 그것을 분리할 때 역편향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언어나 비용의 한계와 접근성의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국제연대가 상층부 운동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편향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국내투쟁을 정말로 '잘' 한다에 해답이 있다고 봅니다. 국제주의 전망에 걸맞은 실천이 어떻게 담보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죠. 이; 노동조합에는 생존권 차원의 쟁점이 있습니다. 시장화, 개방화 문제로 인한 공공성의 해체 등의 문제가 있지만 생존권 투쟁이 노동조합의 중요한 목록을 구성하죠. 김석 동지가 얘기했듯 우리가 경계해야 할 편향이 있습니다. 일국적 수준에서의 생존권 투쟁이 소위 '노동자 이기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북반구 노총은 임금과 고용 수준 등 자국 노동자들의 이해를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그러한 쟁점을 해결하는 데 집중해 왔습니다. 한국사회도 그런 상황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국 노동자들의 이익을 옹호하면서도 국제적인 원칙을 잃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 것인? 공장의 해외이전, 산업공동화, 무역장벽 문제가 한국 노동자운동의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고, 동남아 지역을 중심으로 저임금을 노린 한국 자본의 해외투자의 증가하고 있는 조건에서 우리의 문제의식을 발전시켜야 할 계기가 끊임없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박; 쟁점이 세계화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 예컨대 노동시장의 문제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십여 년 전에 미국 토론프로그램에서 미국 조선업 노동자들이 폴란드 등으로 우리 일감이 다 가고 있다면서 산업공동화, 해외이전에 대해서 거칠게 이야기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보니까 인도 자동차가 한국에 수입된답니다. 국내로 이런 가격이 낮은 제품이 들어올 경우 완성차 문제도 터지지 않겠습니까? 또한 세계화 과정에 노동의 불안정화, 이주노동자 확대, 빈곤화 문제 등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조건이 전반적으로 하락한다면 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의 조건이 형성될 것 같지만, 그래도 노동조건이 세계적으로 동질화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밑바닥을 향한 경주'를 한다고 하지만, 노동조건의 측면에서 다양한 노동자층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국제연대의 객관적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해 봤으면 합니다. 한 공장 내에서도 정규직 비정규직간의 갈등이 있는데 세계적으로야 말 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요? 김; 자본주의가 발전할 만큼 발전해야 멸망한다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저임금 노동력이 존재하고 소비층이 존재하는 한 자본주의는 지속될 것이라는 입장이 지배적이죠. 박; 노동조건을 동등하게 만들자는 운동보다는 각 국에 맞는 요구수준에 따른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 노동조합 운동의 국제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종합적인 전략이 긴급합니다. 노동조합 운동은 국제연대를 실현하기 위한 여러 활동을 하고 있지만, 최근에 형성되고 있는 대안세계화 운동들과 화합적으로 결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조차 결합이 잘 안 되죠. 이것이 화학적 결합이 되려면 노동자운동 자체가 혁신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격적인 국제적 실천으로 나아가려면 그러한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겠죠. 박; 그렇다면 '왜 노동조합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운동을 확산하기 위해 세계사회포럼이든 지역포럼이든 일국적, 세계적 차원의 다른 공간들을 모색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김; 저는 노동조합 운동의 자기 전망을 바꾸는 문제와는 조금 다른 측면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서 초국적기업의 해외이전에 관해 미국 조선산업 노동자가 항의한 예를 들었는데, 저는 그런 논쟁 과정에서 노동자운동의 급진화가 이루어지고 국제주의의 토양을 만들어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노동조합 운동이 자본의 본질을 벗겨내는 투쟁을 통해 급진화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전망을 만들어 내는 건 요원한 일이죠. 박; 이탈리아 사회포럼에 이탈리아 노동총동맹(CGIL)이 적극 참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사회포럼 프로세스가 마을 단위까지 진행된다고 들었습니다. 산별노조나 총연맹 차원에서의 모범 사례를 소개해 주신다면? 김; 프랑스 르노 자동차가 벨기에 공장을 폐쇄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르노 자동차 노동자들이 수행했던 투쟁2)이 훌륭한 국제연대 사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국경을 넘어선 투쟁이 곧 국제연대 투쟁인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이; 미국에서 공장이나 산업을 해외로 이전하는 문제나 '덤핑' 문제에 쟁점으로 떠오를 때. 노동조합이 압력집단으로 움직였습니다. 이런 활동의 효과는 별로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노동조합이 이익집단의 성격을 띠기도 하지만 자기 이해만 중심에 두고 폴란드 노동자들과 연대나 배려를 사고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또 벨기에-프랑스 연대를 했던 르노 자동차 사례를 보면, 한국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있습니다. 현대자동차도 터키공장을 폐쇄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한국의 노동조합이 어떤 행보를 취해야할지가 쟁점입니다. 박; 미국노동자들이 한국철강 수입을 계속 허용하면서 다른 식의 행보를 했어야 했다는 식의 배려가 가능했을까요? 저는 노동자의 특수한 층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답이 없는 문제라 봅니다. 차라리 자본의 본질을 폭로하자는 식의 운동을 하는 방향이 올바른 게 아닐까요? 이; 이를테면 현대자동차가 국내 공장의 상당 부분을 해외로 이전할 경우에 우리의 입장과 기조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나가지 말라고 할 것인가, 나가되 해외 공장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최소한도라도 보장하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의 본질을 폭로할 것인가? 물론 본질을 폭로할 수 있다고 보지만, 이런 문제는 노동조합 차원에서 몹시 투쟁하기 힘든 쟁점이라고 봅니다. 박; '노동조합의 조건'이라는 것을 가정하는 한, '나가되 해외 공장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최소한도라도 보장하라'는 입장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세계 자본주의를 인정하면서 동등한 노동조건의 질과 안정성을 보장하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치 국제협정 안에 사회조항을 집어넣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는지.3) 이; 북반구 노총들의 사업들을 살펴보면 '제3세계 노동조건 감시'라는 항목이 들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계 초국적기업의 활동 감시'같은 게 나옵니다. 자국의 노동비용의 삭감 시도를 막아내기 위해 외국에 있는 자국계 초국적기업 노동자의 노동권과 진출한 국가들의 임금수준과 고용수준에 대한 문제제기가 주요한 투쟁과제가 되고 있는 게 객관적인 현실입니다. "나가더라도 노동조건을 지키고 최선을 다하라"는 요구인 셈입니다. 제가 진정 말하고 싶은 것은 국제적인 시야 속에서 우리가 어떤 입장과 정책을 세울 것인가라는 문제입니다. 무역과 노동조건의 연계라는 쟁점뿐만 아니라 북반구 노동조합 운동의 조건과 활동방식이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민주노총 내에서 북반구 노동조합과 비슷한 요구사항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북반구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입장과 정책을 모색할 것인가 답해야 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저는 오히려 르노의 공동파업에서 하나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그러나 저는 르노 투쟁이 국제연대 운동의 모델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자본의 본질을 폭로하는 투쟁만 하자는 것이 아니고, 해외이전 반대투쟁 또한 자본의 본질을 폭로하는 투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자본의 본질, 곧 초과이윤 형성을 위한 착취의 세계화라는 본질을 폭로하는 투쟁이 되어야 하고 연결고리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죠. 이; 현대자동차의 해외공장 건설은 인건비 절감이 주목적이 아니라 경영확장전략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전략은 다양한 수준에서 현대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는 노조와 협의나, 해외에서 기본적인 노동조건 수준을 유지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장이전 반대투쟁을 하든, 북반구노조와 유사한 요구를 내걸든, 그도 아니라면 이 둘을 동시에 전개할 수 있는 방안을 세우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 피터 워터만의 견해에 의하면 '사회조항은 WTO의 도움으로 노동권을 획득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전략입니다.4) 이와 비슷하게 '나가되 초과착취 하지 말라'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입장 아니겠습니까? 소위 '괜찮은 일자리'(decent jop)라는 요구도 사회조항과 유사하게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이 역시 들어줄 상대가 아닌 사람들에게 하소연하는 격이 아닌가 싶네요. 해외진출자본에 대한 감시활동의 의의가 있다 하더라도... 이; 사회조항의 문제는 실상 대단히 우려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실현가능성은 거의 없지요. 김; 자본의 운동을 바꾸지 않는 한 패배는 자명한 것이고 우리의 운동은 노동자 전체의 입장에서 투쟁의 씨앗을 남기는 게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자본운동과 노동자 전체의 입장에 대한 고민 없이 '이행기강령'에 대해 말할 수는 없는 거죠. 87년 투쟁 이후 우리가 보았듯이 수많은 노동자운동이 패배했거나 노동자들이 생존권을 잃기도 했지만 노동자운동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그런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투쟁과 급진화가 끊임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박; 냉철하게 생각하면 사태의 귀결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내가 활동가로서 노동조합 교육을 나설 때 김석 동지처럼 얘기하는 게 참 어렵습니다. 일년여 전에 폐업한 어느 노동조합에서 교육을 한 적이 있는데 묘수도 없고 싸울 방법도 없고... 그래도 그 기업은 약간이나마 공장인수 가능성이 있지만, 완전 폐쇄라면 노동자들이 공장을 다 떠나버리는 상황에서 공장을 부여잡고 폐쇄반대투쟁을 한다는 것은 지속되기도 힘들 것입니다. 자본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매진하자는 말은 조합원 대중에게 상당히 허무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회조항, '괜찮은 일자리', 기업감시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현실에서 어떤 요구나 정책을 제시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견을 들었습니다. 이; 일국에서든 세계적 차원에서든 전반적으로 노동권, 노동조건, 노동친화적인 국제체제 형성 등 대해 각국 노동조합이 공통의 정책을 입안하는 게 지금의 국면에 있어 필요하고 급진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무역과 노동기준 연계문제, 사회조항·노동조항 문제가 남는데, 대안세계화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이 이슈가 무력화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ICFTU를 중심으로 공식적 국제노동조합조직 안에서는 존재감이 남아 있죠.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이를 거부한다면 대안이 무엇인가가 문제입니다. 또 '괜찮은 일자리'에 대해 말해보면, 저는 그 요구가 사회조항과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는 지적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국제노동계의 화두의 변화과정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한참 실업문제와 일자리 창출이 국제노동계의 핵심 화두였지 않습니까. 것이 노동유연화 과정에서 일자리의 질 문제로 변화되었고, '괜찮은 노동'(decent work)이라는 요구가 등장했습니다. 당장 민주노총의 경우도 비정규직 철폐투쟁하면서 고용의 질, 임금·고용조건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량실업시대에서 노동유연화 시대 즉 불안정노동 시대로 접어든 지금, 국제 노동계에서 핵심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괜찮은 노동'이라는 요구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불안정 노동 시대에 적합한 화두로 활용가치가 있는지, 또는 뭔가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지 검토가 필요하죠, 박;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이 아니라 정규직이 되어야 하고 가능한 만큼 지적, 육체적 능력을 고루 사용하면서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요구할 것인가가 문제죠. ICFTU 등이 로비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 '괜찮은 노동'이 사회조항과 연결된 측면이 무엇인가 살펴보면... 사회조항은 무역과 노동기준을 연계하고, 예를 들면 노동규정 안 지키면 WTO가 무역제재 가하라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반발이 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괜찮은 노동'이 제기될 때도 이를 강제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대륙협정, 자유무역지대(FTA), WTO, 국가 정책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방법이 필요하며, 따라서 WTO도 무언가 해야한다는 간접적인 압박이 은근슬쩍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괜찮은 노동'이 간접적으로 사회조항을 살려내는 데 봉사한다는 점에서 워터만의 지적은 일리는 있습니다. 그런데 역으로 사고해보면 우리가 그것에 대비될 수 있는 화두는 있느냐는 고민이 생깁니다. 정치적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북반구 노동조합들이 제3세계 혹은 국제적인 수준에서의 노동기준을 어떻게 상승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는데, 이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국제적인 노동기준을 상승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주장해야 하는가? 그래서 'WTO가 아니라 ILO를 강화하라', 아니면 '국내 정부를 압박해야 한다'라는 말을 빼면 별로 할 이야기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죠. 김: 아무리 급진적인 요구라고 해도 누구에게 어떻게 요구할 것인가의 문제는 항상 남게 되고, 어차피 상층부 운동이 됩니다. 이것을 현장에서 조직하지 않는 한... 아까 이야기한 노동기준 문제에 대해 말해보면, 자본이 북반구 노동자들만 착취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 제3세계 착취를 동반하는데 이 과정에서 어떤 방법이 있겠냐가 쟁점입니다. 노동자운동의 급진화를 목표로 하고 감시운동 같은 것도 하나의 모델로서 시도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시도들이 존재할 텐데 이러한 시도들을 묶어줄 수 있는 혹은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계사회포럼이 소중하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동의합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직접적인 연대를 매우 강조했습니다. WTO는 당연히 활용할 수 없는 국제기구고, ILO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사업장, 같은 초국적기업의 사업장간 국경을 넘어선 연대가 소중합니다. 누군가를 경유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연대 속에서, 사업장을 넘어선 실천은 아니지만 사업장 내 국경을 넘어선 실천이 노동자 국제연대에 있어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 그런데 그러한 방식은 대자본을 상정하는 것이고 중소자본은 포함되어있지 않습니다. 박;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각각 주장하는 바가 모두 다른 것 같습니다.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핵심을 무엇이라 보십니까?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핵심 중 하나가 당 운동으로부터의 탈피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이미 현실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사회포럼이든 대안세계화운동이든 어떤 국제당이나 한 조직 혹은 국제정치조직 연합에 의한 전선 형태의 조직체에 의해서 주도되는 것이 이미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 사회운동들이 섞여있고 이미 세계적인 운동의 전개양상이 사회운동을 지향하는 대중운동들의 결합을 통해 진전되고 있습니다. 이; 사회운동 노조주의와 국제주의 실천이란 문제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아까도 말한 것처럼 현재에서는 노동조합운동과 국제적인 사회운동(대안세계화 운동) 사이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고, 형식적으로 공동의 의제를 공유하는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그것은 일국적 수준에서의 노동조합 운동이 시대의 과제에 맞게 혁신되는 과정을 통해서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계사회운동이 대중운동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사실 노동운동과의 결합이 필요하고, 노동운동의 입장에서는 노동조합운동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사회운동과 의제와 주체의 측면에서의 결합이 요구됩니다.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핵심 중에 박하순 동지가 이야기한 당 운동으로부터 탈피도 한 요소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급진적인 대중의 목소리를 노동조합도, 당도 대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표출구로서 세계사회포럼 프로세스가 진행된 게 어느 정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계사회포럼 프로세스가 당 운동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은 당 운동의 재구성 과정과 함께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당 운동으로부터의 탈피라기보다는 전통적인 또는 사민주의 당 운동으로부터의 탈피인 것이고, 오히려 당 운동의 재구성을 동반한다고 이해하는 게 올바를 것입니다. 저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핵심은 연대성의 확장과 강화, 이에 기반을 둔 급진성의 강화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노동자운동이 현재 사실상 정규직·남성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구조로 되어있고 자칫 이익집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상존합니다. 그러므로 연대성을 강화하는 것은 비정규직, 불안정노동과의 연대를 포함한 사회적 연대를 뜻합니다. 이를 통해 관료화되고 위기에 빠진 노동조합운동의 혁신과 급진성의 회복이 가능할 것입니다. 또한 연대성 강화를 통한 급진성의 강화는 일국적인 수준을 넘어 국제적인 수준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저는 국제주의에 사회운동의 요소가 내재되어있다고 봅니다. 아까 세계화가 노동자운동에게 던진 현안들에 대해 얘기했지만, 국제주의에는 남-북 노동자의 연대라는 쟁점이 담겨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핵심은 국제주의와 여성주의라고 봅니다. 김; 사회운동 노조주의가 제기되는 맥락도 급진성의 발현이 아닌가요. 현실 문제에서 노동조합을 통한 노사 교섭을 통해 해결되지 않는 것이 많기 때문에 사회운동 노조주의가 제기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제기가 동반되지 않고서는 문제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의 반증이죠. 이창근 동지가 말한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의 연대'는 노동자 국제주의의 중요한 측면이라고 말했는데 굳이 그렇게 볼 문제냐는 생각도 듭니다. 제 생각에는 사회운동이 급진화된 노동자운동과 별개가 아닙니다. 이; 노동자운동과 여러 사회운동이 현실적으로 괴리되어 있는 상황에서 연대성을 강화하는 것이 일차적 과제라는 의미입니다. 김; 제가 사회운동 노조주의가 수입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에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노동운동은 사회적·계급적 쟁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자기 조직을 중심으로 조합주의적 실천을 벌여왔던 북반구 노동운동을 비판하기 위해 제기된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역수입할 필요가 있냐는 것입니다. 박 ; 한국의 여러 활동가들이 사회변혁을 위해 노력해 왔다고 하더라도, 현재 조합원 대중의 주류가 그러한 목표로 운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런 맥락에서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제기하고 급진화의 계기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지요. 김; 그래서 저는 노동자운동의 국제주의가 매우 중요하고, 국제주의가 하나의 이념 또는 운동의 전망을 표현한다고 말했습니다. 박; 워낙 방대한 주제를 제한된 시간에 진행하느라 많은 쟁점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 듯합니다. 더욱 깊은 토론을 위한 자리를 다음에 또 마련해야 할 것 같습니다. 토론에 참여해주신 동지들께 감사 드립니다. PSSP 1)국제자유노련(ICFTU)은 1949년 11월 세계노동조합연맹(WFTU)에서 공산주의 계열 노동조합과 심한 의견충돌 끝에 탈퇴한 영국 노동조합회의(TUC)를 중심으로 미국의 산업별노동조합(CIO), 미국노동총연맹(AFL:후에 CIO와 합병) 등이 런던에서 결성한 국제노동조합 조직이다. ICFTU는 국제노동기구(ILO), 세계무역기구(WTO), IMF 등과 긴밀하게 협력한다. 2002년 현재 148개국 225개 노동조합이 가입해 있다. 한국 민주노총과 한국노총도 가입해 있다. 본문으로 2)다국적 기업인 프랑스 르노 자동차는 1987년 3월 2일 회사의 적자를 보전하기 위하여 3천여 명을 고용하고 있는 벨기에의 빌보르드 조립공장을 3월 7일부터 폐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반발한 프랑스 본사와 벨기에 공장의 노동자들은 즉각 파업에 돌입하였다. 벨기에 공장의 폐쇄는 곧 각 국의 르노 노동자들 공동의 문제라고 인식한 노동자들은 범유럽적 저항을 조직하였다. 마침내 7일에는 프랑스와 벨기에뿐만 아니라, 스페인, 포르투갈, 슬로베니아의 르노 공장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1시간 동안 일시 파업을 단행했다. 루이 슈웨치르 르노 회장은 벨기에 공장 노동자들의 요구로 열린 긴급회의에서 일부 노동자들은 전환배치를 통한 고용승계가 있을 수 있지만 공장폐쇄 결정은 되돌릴 수 없다고 했다. 본문으로 3) 미국노총산별회의(AFL-CIO)는 "WTO가 자유무역에 있어 노동기준의 문제를 항상 고려해야 하며, 이를 위해 대화를 시작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노동자 권리 및 환경보호 조항이 WTO 내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자유무역협정 혹은 투자협정 자체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일본 노총, 렝고[聯合]의 한일투자협정에 대한 입장도 비슷하다. 그러나, 설사 WTO 혹은 투자협정에 사회조항이 편입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겠는가에 대해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무역협정 중에서 최초로 노동과 환경이슈가 도입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악명높은 NAFTA가 최초다. NAFTA는 부속협정의 형태로 환경보호위원회와 노동위원회의 설치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협정들은 지금까지 어떠한 기능과 역할도 수행하지 못한 채 유명무실화되고 있다. 한편, 사회조항 노선이 갖고 있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점은, 금융세계화 체제를 강화하고 공고히 하고 있는 WTO 및 투자협정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해줌으로써, 현재의 제국주의적 지배·종속관계를 유지하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창근,〈금융세계화, 한미한일 투자협정 그리고 우리의 대응〉, 《진보평론 2000 여름호》를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4) 피터 워터만, 〈새로운 지구적 운동의 국제적 노조주의에 대한 도전에 다른 해방적 노동전략 탐색〉, 《사회진보연대》, 통권 52호, 67p.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