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채에 관한 국제민중법정 풍부한 자원, 그러나 빈곤하다?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 시에 있는 한 체육관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각 국 언어로 된 플래카드와 각 국 전통문양의 천으로 장식되었다. 무대 앞은 다양한 채소와 과일로 만들어진 각 대륙 모형으로 장식되었고, 실업노동자, 소농 조직들의 깃발이 객석 곳곳에서 펄럭였다. 체육관 입구에는 씨앗과 농산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남반구의 풍부한 자산으로 가득 메워진 이 곳에서는 2월 1일, 2일 이틀동안 '외채와 금융시스템에 관한 국제 민중법정'이 열렸다. 잠깐 민중법정이 시작되기 전 이틀동안 진행된 준비회의 풍경을 소개한다. 앙골라, 말리, 짐바브웨, 아르헨티나, 브라질, 니카라과, 필리핀, 그리고 한국까지, 이렇게 다양한 나라의 활동가들이 모이니 의사소통이 문제가 되었다. 사회자는 곧바로 '같은 나라의 식민지배를 경험했던 나라끼리 모여 앉으면 통역하기가 쉬울 것 같다'고 제안했다. 각각 영국과 미국, 프랑스, 스페인의 식민지로 세 팀이 만들어졌고, 일본과 포르투갈이 지배했던 한국과 브라질이 남았다. 그렇게 다양한 문화적 유산을 지닌 나라들을 분류하는 방식치고는 너무도 간단했다. 참석자들의 씁쓸한 웃음은 이어질 민중법정에서 쏟아져 나올 이야기를 미리 보여주는 듯 했다. 국제민중법정의 배경과 구성 이 법정은 남반구 외채거부운동 네트워크인 '주빌리 사우스(Jubilee South)'와 이를 지지하는 다양한 사회운동 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준비되었다. 북반구의 정부와 은행, 초국적 기업, 그리고 IMF, 세계은행, 기타 국제금융기관들이 발생시킨 외채가 남반구 민중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매개가 되고 있음을 드러내고, 남반구 민중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부당하게 계약된 것이라서 갚을 필요가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 법정을 개최한 취지였다. 이에 앞서 2000년 1월 브라질에서는 주빌리2000을 중심으로 교회, 정당,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직접 '정부가 IMF와 맺고 있는 협약을 유지해야 하는가?' '공공예산을 계속 외채를 갚는데 지출해야 하는가?'를 놓고 전 국민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는데, 500만이 넘는 국민들이 참여하여 90% 이상이 반대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러한 경험이 하나의 기획이 되어 그 범위를 남반구 전체로 넓힌 국제민중법정이 열리게 된 것이다. 주빌리 사우스는 작년 7월 제노아 G8 정상회담 반대투쟁에 즈음하여 열린 '외채의 불법성'에 관한 회의에서 이에 대한 계획을 제출하였고, 법정을 준비하면서 대략 남반구 45개국의 외채에 관한 사회운동들을 조직하였다. 물론 각 국의 사회운동들이 외채문제에 관한 대중적인 투쟁을 확산하는 것도 민중법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요한 과제였다. 'Court'가 아닌 'Tribunal'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이 민중법정은 사법권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견표명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각 국의 법적, 윤리적 전통, 면밀한 조사와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제출하는 의견에 최대한 공신력을 얻으려고 했다. 민중법정 참석자들은 기소, 판결, 배심원, 증인, 변호로 각각 역할을 나누었다. 판결은 라틴아메리카 각 국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민중투쟁의 힘으로 군부독재 세력들을 재판에 회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5월 광장 어머니회(Madres de Plaza de Mayo), 과테말라 진상규명위원희 출신의 활동가를 포함하여 5명이 맡았다. 또한 1908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아르헨티나의 아돌프 뻬레스 에스끼벨을 비롯,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시인 데니스 부르투스, 쿠바 노동자중앙회(CTC)의 뻬드로 로스, 탄자니아의 의원 로즈마리, 하이티 출신의 세계여성행진 활동가 마리아 프란츠 요아킴 등 총 10명이 대륙과 계층을 대표하여 배심원의 역할을 맡았다. 증인은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의 각 국에서 노동자, 실업노동자, 원주민, 여성, 소농, 청소년 등 각 계층을 대표하는 20여명으로 구성되었다. 기소는 멕시코 자유무역반대행동네트워크(RMALC)의 알레한드로 빌랴마르 등 약간명이, IMF와 WB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전달해주는 정도의 변호는 벨기에 제3세계 외채탕감 위원회의 에릭투상이 맡았다. 기소: "남반구 외채문제의 책임은 IMF, 세계은행 그리고 북반구 정부에…." 개회가 선언되고 첫 순서인 기소를 통해 민중법정은 현재 남반구의 모든 국가들이 지고 있는 외채가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IMF, 세계은행과 북반구 정부는 외채로 인한 많은 문제들을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채의 불법성이 제기되는 맥락은 다음과 같다. 첫째,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남반구 민중에게는 외채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자신의 자본을 증식하고자 하는 북반구 채권자들이 모든 부담을 외채를 통해 남반구 민중에게 전가한 것이다. 미국은 2차 대전 직후 파괴된 유럽의 재건을 촉진시킨다는 명목으로 유럽의 16개 국가에 차관 형태로 125억 달러를 원조했고 그 대가로 유럽에 자신의 시장을 개척할 수 있었다. 한편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석유채굴권을 국유화하고, 이에 따라 유가가 급등하자, 집중된 석유 달러를 리사이클링 할 필요가 생겼다. 이를 남반구에 차관을 주는 형태로 해결한 것이다. 남반구 국가는 북반구의 산업국에 천연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대가, 수출 주도형 전략으로의 전환을 지원하는 대가, 혹은 남반구 국가가 필요로 하지 않는 댐 건설 등의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대가 등의 이유로 이러한 차관을 남반구에 도입해야 했다. 또한 이에 대한 계약은 남반구의 독재정권이 민중의 의사와 아무런 상관없이 체결한 것이다. 이들은 오직 해외 금융기관의 요구에 충실하고자 했고, 북반구의 채권자들은 차관을 통해 불법적인 독재정권을 지원한 것이다. 남반구의 민중이 낄 틈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후 1970년대 말, 미국은 일방적으로 이자율을 4-6%에서 많게는 20% 이상으로 높였고, 인플레이션이 계속되었다. 남반구의 채무국들은 이제 이자를 갚기 위해 빚을 더 져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둘째, 대부분의 외채는 이미 몇 배로 상환되었다. 1982년 뒤로 지난 20년 간 자금의 흐름은 남반구에서 북반구로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98년, 41개의 중채무빈국(HIPIC)들은 그들이 빌려온 것보다 1조 6800억 달러나 많은 금액을 상환했고, 99년만 해도 3000억 달러의 외채 상환이 이루어졌다. 결국 1982년 뒤로 3세계 국가들은 그들이 빚진 금액보다 6배나 많은 3조 7000만 달러를 북반구로 이전시켰음에도 여전히 2000억이나 빚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식민지배 당시 수탈해 간 남반구의 천연자원을 계산에 넣지 않은 결과이다. 셋째, 외채는 남반구에 많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제 대다수의 남반구 정부들에겐 금융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외채를 상환하기 위해 국내 경제의 성장 가능성을 희생하였고, 대다수 민중이 교육, 보건, 주택보급, 의료, 고용 등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노약자와 어린이에 대한 복지, 원주민들의 생존조건, 토지개혁 역시 희생당해 왔다. 특히 사하라 남쪽 아프리카에서는 매년 보건의료와 사회보장을 위해 쓰이는 예산보다 4배나 되는 금액을 외채를 갚는데 사용하고 있다. 수출을 통한 수익은 자국민의 소득재분배에 기여하기보다는 외채를 갚는데 사용된다. 게다가 에이즈와 같은 전염병을 치료하기 위한 국가 예산 확보가 외채 상환과 이자 지불에 밀려,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에 방치되며, 이로 인하여 경제활동 인구가 감소되어 저개발의 악순환은 반복된다. 넷째, 외채는 IMF와 세계은행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강요하는 매개가 된다. 채무국은 외채를 해결하기 위해서 또다시 차관을 얻어야 하고, 이를 위해 치명적인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구조조정은 수출 지향적인 성장과 금융과 무역의 자유화, 긴축재정, 사유화와 탈규제화를 강제했다. 이러한 정책은 식료품 가격의 상승과 실업률의 증가, 정부 서비스의 감축, 빈곤을 심화하며 남반구 국가들의 경제를 산업화된 북반구의 이익을 위해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공급하는 장소로 탈바꿈시킨다. 또한 채무불이행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북반구의 채권자들은 부채를 주식, 혹은 환경개발권과 맞바꾸어 채권국을 투기자본의 놀이터로 만들고, 생태계에 대한 지배권을 가져가기도 했다. 증언: "외채와 IMF 구조조정은 남반구 민중을 죽음의 늪으로 내몰았다" 기소가 끝난 다음에는 곧바로 증언이 이어졌다. 증인들은 자신의 지역적, 계층적 특성을 드러내는 의상을 차려입고 증언대에 올랐다. 각 국의 사례를 통해 증인들은 외채가 불법적이고 민중의 삶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민중법정 참가자들은 이틀 동안 쏟아진 증언을 경청하며 외채 문제의 심각성을 공유하였다. 외채로 인해 보건예산이 삭감되어 의료 서비스가 취약한 짐바브웨에서 충분히 막을 수 있는 병에 걸렸지만 의약품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세상을 떠나야 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한 젊은이의 증언은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도입된 차관과 이자 지불 상환을 통계로 비교 분석하여 발표하는 등 객관성을 강조한 증언도 있었다. 서아프리카 말리 경우에는 전체 인구 80%를 차지하는 농촌의 민중이 식량사정이 열악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전체 예산의 13%를 외채 상환에 쓰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증인은 자국의 외채가 281억 달러나 되는데, 군부독재자들이 스위스 은행과 미국계 은행 비밀계좌로 빼돌린 500억 달러의 재산을 환수하면 외채를 충분히 갚고도 남는다고 이야기 해, 남반구의 독재정권과 해외의 은행은 오직 금융시스템을 활성화하는 것을 목표로 민중들의 삶과 사회적 가치들을 팽개치는 데 뜻을 같이 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필리핀의 증인 역시 4488조 페소에 이르는 외채를 갚기 위해 예산을 40%이상을 사용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민주노총 금속연맹의 김희준 전 부위원장 역시 증인으로 참석하여 98년 만도기계 부도 이후 이루어진 구조조정의 과정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사례를 통해 '97년 말 한국의 외환위기를 계기로 도입된 IMF 구조조정이 한국사회를 초국적 자본이 금융적 이익을 최대한 남길 수 있는 신흥 주식시장으로 탈바꿈시켰고, 이 과정에서 재벌에게는 개혁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특혜를 부여한 반면 노동자들에게는 정리해고와 극심한 탄압을 자행하였다'고 이야기했다. 총파업 투쟁이 전개되는 대목에서는 모든 참석자들이 환호하였다. 증언 사이에는 각 대륙을 대표하는 공연도 진행되었다. 아프리카의 '아만다!(민중에게 권력을!)'라는 힘찬 구호로 시작하는 전통리듬에 맞춘 춤, 필리핀 민중가수의 노래, 아르헨티나 12월 봉기를 재현한 퍼포먼스 등이 무대 위에서 펼쳐질 때마다 박수와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객석에 있던 많은 라틴아메리카 참석자들은 아르헨티나의 공연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판결 : "모든 외채는 불법이다." 증언이 모두 끝나자 배심원들은 판결문을 통해 "남반구의 외채는 사회적인 고려 없이 다수의 민중에게 전적으로 손해를 입히고 있다. 이는 남반구 엘리트의 요구에 의하여 국내외의 법적 틀을 초과하여 생성된 것이다. 이는 주권을 손상시켰고, 불법적이며, 불공정하여 윤리적, 법적, 정치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 는 결정을 발표하였다. 동시에 ① 외채 상환을 빌미로 남반구의 자연적 유산과 자원을 유출시키고 민중을 착취한 죄, ② 천연 원료를 싼값에 채취하고 사들여 산업 생산품을 높은 값에 되파는 불공평한 교환 체계를 유지하여 외채를 증가시킨 죄, ③ 남반구 채무국들이 제대로 상환을 했음에도 외채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급속도로 늘어나도록 높은 이자를 부과한 죄, ④ 남반구에서 국제 은행과 기업 간의 사기 조작으로 존재하지 않는 부채를 만들어 내고, 생산을 옹호하는 대신 착취의 메커니즘으로 소수만을 부유하게 한 죄, ⑤ 구조조정과 기타의 경제정책으로 민영화를 부추기고, 사회적 일자리 창출과 경제의 활성화에 투자해야 할 돈을 외채를 갚는 데 사용되도록 한 죄, ⑥ 민중과 UN, 인권단체에 의해 거부된 독재자들이 권력을 지탱하고 불법적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도록 차관을 주어 독재체제를 지원한 점, ⑦ 남반구 민중의 인권을 침해하면서 오직 초국적 기업과 북반구의 산업국의 이해만을 옹호하는 경제통합 정책을 부과한 죄, ⑧ 외채 재협상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내기 위해, 채무국들을 정치·경제적으로 침체된 상황에 놓이게 한 죄, ⑨ 민중을 기만하여 이미 몇 배로 상환된 채무를 계속 징수하고 있는 죄 등에 대해 북반구의 은행, 초국적기업, 정부, IMF, 세계은행, 기타 금융기구들, 그리고 남반구의 정치엘리트들이 공범이라며 이들에게 유죄를 선고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배심원들은 권고사항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민중법정 참석자들에게는 불법적인 외채를 탕감할 것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제안했고, 각 국의 의회에는 외채에 대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회계를 발의하여 실질적인 외채가 얼마나 되는지 규명해내고, 여전히 상환할 것이 남았다면 이를 사회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을 제안했다. 남반구의 채권국 정부에는 외채에 대하여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을 하여 이를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외채 이자의 지불을 중단하도록 하는 판결을 얻어낼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과, 이자 지불을 대신하여 모든 민중의 삶을 위해 지속가능한 발전 프로젝트를 위해 지출할 것을 제안했다. 더불어 주요 피고들에 이 법정의 결과를 전달하고 성실한 답변을 촉구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민중법정 참석자들은 4월 중순 IMF 봄 총회에 즈음하여 워싱턴DC에 다시 모인다. 이곳에서는 불법적인 외채 탕감 캠페인이 민중법정의 공식적인 결과로 시작될 것이다. 더불어 4월 17-18일에 주요 피고들에 대한 최종선고가 이루어진다. 이번 국제민중법정을 개최하기까지 주빌리 사우스의 활동은 아직까지는, 주요한 국제 행사를 계기로 대규모 캠페인 정도인 것이 사실이다. 이는 국제연대운동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난 99년, 북반구 NGO들이 중심이 되는 '주빌리 2000' 캠페인에서 분리한 뒤로 주빌리 사우스는 그 규모나 내용에서 주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 내었다. '주빌리 2000'과 함께 하던 아일랜드, 노르웨이, 네덜란드, 독일 등의 외채탕감 캠페인들이 '주빌리 2000'을 계승한 '주빌리 플러스' 보다 주빌리 사우스와 연계를 더욱 강화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이번 민중법정에서 객석을 가득 메운 것은 라틴아메리카의 좌익 정당들과 Via Campesina(국제 소농 조직), MTD(실업노동자운동)등의 기층 대중조직들이었다. 이것은 앞으로 주빌리 사우tm를 중심으로 하는 외채 거부 운동이 전세계 기층 민중의 대중투쟁을 강력하게 결합시키는 매개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철도, 발전노조 등 공공부문 민영화와 구조조정 추진에 맞선 파업이 한창이던 지난 2월 26일, 대법원은 하나의 판결을 선고했다. 99년 검찰의 파업유도사건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조폐공사 파업투쟁에서 노조 간부를 업무방해죄 따위로 고발한 형사사건 판결이었다. '파업유도'는 없었다고 판단해 물의를 빚었던 법원이, 아니나다를까 노조의 업무방해를 모두 유죄로 판결한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다. 구조조정은 전적으로 회사의 권한인 만큼 이에 반대하는 파업은 무조건 불법이고, 설사 단체협약에서 구조조정을 노사합의로 한다고 했더라도 그것 역시 무효여서 노조 파업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노조가 파업이라도 할라치면 노동부, 검찰 등 관계당국이 총출동하여 무조건 불법으로 매도한 것이 현실이기에, 그렇게 새롭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사후약방문으로라도 파업 이후 법원 재판에서 파업이 정당하다고 인정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번 판결만 해도 대전지방법원이 파업의 정당성을 인정해 업무방해부분을 무죄로 선고하였으나, 대법원이 이를 뒤집은 것이다. 최근 노조 파업이 불법이라는 판결로 내달려온 대법원이 작년 11월 만도기계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더니, 급기야 구조조정 반대 파업조차 불법이라며 대미를 장식한 셈이다. 소리 없이 강하다고 했던가. 지난 95년 한국통신 파업 때처럼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국가전복세력' 운운하며 엄포를 놓은 건 아닐 지라도, 이번 공공 파업에서 역시 결코 이에 뒤진 것이 아니다. . 여전히 정부와 언론은 '국민을 볼모로 한 파업'이라며, 노조파업을 불온시, 범죄시했다. 그리고 한발 나아가 민영화는 절대로 협상 대상이 될 수 없고, 그를 제외한 부분만 노사 자율 협상으로 해결하자는 수법을 썼다. 여기에 대법원은 구조조정 반대 파업이 무조건 불법이라고 선포해서, 구조조정과 민영화의 걸림돌인 노조 투쟁을 어떻게든 무너뜨리려는 전방위적 공세에 가담했다. 구조조정은 신성불가침이다! 더욱이 이번 판결은 구조조정 실시여부가 단체교섭이나 쟁의행위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는데 문제가 심각하다. IMF 이후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심각한 노동현안으로 등장하면서, 정리해고나 구조조정에 맞선 노조 파업이 합법이냐 불법이냐 논란이 많았다. 노동부, 검찰 등 관련 당국에서 정리해고는 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무조건 불법으로 매도했다. 98년 현대자동차노조 파업 때가 대표적인데, 만도기계에서는 아예 경찰병력을 투입하였다. 파업 이후 몇몇 형사재판에서 정리해고도 쟁의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전향적인 판결이 나와 기대를 모았으나, 이번 판결로 그 같은 기대는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관련하여 판결문의 주옥같은 표현을 보도록 하자. "정리해고나 사업조직의 통폐합 등 기업의 구조조정의 실시 여부는 경영주체에 의한 고도의 경영상 결단에 속하는 사항으로서 이는 원칙적으로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고, … 노동조합이 실질적으로 그 실시 자체를 반대하기 위하여 쟁의행위에 나아간다면, 비록 그 실시로 인하여 근로자들의 지위나 근로조건의 변경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하더라도 그 쟁의행위는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 할 것이다." 한국에서 구조조정은 정리해고, 희망퇴직, 비정규직 전환, 사업장 통폐합 내지 이전과 동의어다. 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비록 살아남더라도 비정규직 신세가 되든지 다른 사업장이나 부서로 옮겨야 한다. 즉 노동자 입장에서 구조조정은 노동강도 강화에 임금수준 악화를 의미한단 말이다. 구조조정을 할 때 회사에서 얼마나 고도의 경영상 결단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당하는 노동자도 자신과 가족의 생사가 달려있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가장 근본적인 노동조건이다. 그런데도 이 문제가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다니, 도대체 무슨 노동조건을 유지하고, 개선하는 단체교섭을 하란 말인가. 법원 말대로라면 낮은 경영상 결단으로 충분한 문제, 이를테면 임금인상 등만을 교섭하고 쟁의해야 한다. 그런데 임금협상 중 회사가 갑자기 고도의 경영상 결단을 발휘하여 정리해고, 구조조정을 하겠다고 나오면 어떻게 되나. 실례로 조폐공사에서도 처음엔 회사가 임금 삭감을 주장해 이를 협상하던 도중, 갑자기 옥천 조폐창을 문닫고 경산 조폐창으로 통합하겠다고 해서 노조가 파업에 돌입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대법원은 앞서와 같이 간단 명료하게 답했다. "그로 인해 근로자 지위나 근로조건 변경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고 하더라도" 파업은 불법이니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그간 법원은 자본주의 체제의 수호자답게 사용자의 경영권을 절대시하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묵살했다. 노동자에게 법은 폭력의 다른 이름이었을 뿐이니까.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대중의 조직화와 노동악법 철폐투쟁의 성과에 힘입어, 법원 판결도 반동적 판결 일색에서 다소 벗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와 IMF가 몰아닥치고서 정리해고, 구조조정의 광풍으로 그간 어렵게 쌓아올렸던 노동자의 투쟁 성과가 일거에 날아갔다. 법원 판결도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경영권의 또 다른 이름으로 정리해고, 구조조정은 신성불가침이라고 선포하고는 노조의 파업권을 원천 봉쇄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제 자본가는 내키면 고도의 경영상 결단을 해서, 법의 비호 속에서 노조를 묵살하면 그만이다. 검찰의 파업 유도는 무죄, 노조 파업만 유죄 정부의 공기업 구조조정 계획이 발표된 직후였던 98년 8월, 조폐공사는 갑자기 '조폐창 통폐합 99년 상반기 중 조기 실시' '2000년까지 인건비 50% 절감'이라는 정부 계획을 훨씬 넘는 구조조정 방침을 발표했다. 노조는 당연히 파업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런데 노조가 열흘동안 파업을 하고는 이를 철회했지만, 공사 측은 불법으로 한 달이나 직장을 폐쇄했다. 무슨 작정이라도 한 듯 강경 일변도로 치닫더니 정부 계획대로 하라는 여당 중재안도 거부한 채, 조폐공사는 결국 99년 초 조폐창이전을 강행했다. 그 과정에서 경찰병력 투입으로 다수가 부상당하고, 노조 간부들을 구속 해고하였다. 한 간부는 분신으로 항의하기도 했다. 그렇게 조폐공사 파업이 끝나갈 즈음, 점심시간 폭탄주에 얼큰하게 취한 진형구 전 대검 공안부장이 자기과시로 발언하면서 사태의 진상이 밝혀졌다. "조폐공사 파업은 사실 우리가 만든 거다"로 시작된 이 발언은, "정부 투자기업체에 구조조정이 필요한 시점인데, 우리가 지시해서 복안을 만들었다. 공기업체에 파업이 일어나면 '우리가 이렇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그랬는데 .. 그쪽(조폐공사 노조)이 너무 일찍 손을 들고 나와 버린 거야." 등의 내용이었다. 그 뒤 입수된 문건에 따르면, 대검공안부는 '직장폐쇄->철회임금삭감안 철회->구조조정안 제시->파업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기조로 한 파업대책을 대전지검 공안부와 공안합수부에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노동계의 거센 항의와 여론에 밀려 국회 청문회를 거쳐 특별검사제까지 도입하였다. 그러나 국민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특별검사팀마저 '진형구 1인 자작극'이라며, 검찰의 결론과 별반 다르지 않은, '강희복 사장 주연, 진형구 조연'이라는 결론으로, 검찰의 조직적 개입을 은폐하고 말았다. 그나마도 서울지방법원은 그 두 명을 재판 중간에 보석으로 석방하더니, 결국 작년 7월 '파업유도'는 실체가 없다면서 무죄를 선고해 충격을 주었다. 당사자가 취중 무용담으로 파업유도를 털어놓았고, 국회 청문회나 검찰, 특별검사도 명백히 인정한 파업유도 사실을 "강요나 압력은 아니었다"고 판단했던 법원이, 파업유도 범행으로 초래한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노조 간부를 유죄라고 선고했다. 정말 완전히 전말이 전도된 격이다. '파업유도' 재판에서 파업유도사실을 인정한 강희복 전사장의 진술은 일관성이 없고, 진형구 전공안부장의 진술은 취중이었다는 이유로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 판결에서 대법원은 공안기관이 작성한 동향보고서를 근거로 당시 집회 발언 내용까지 들먹이면서, 노조가 노동조건 개선과 상관없이 오로지 구조조정 자체를 반대할 목적으로 파업을 했다는 왜곡된 사실마저 인정했다. 노동자가 자신의 일자리와 근무조건이 걸려있으니까 구조조정에 반대하면서 파업을 벌인 것이지, 아니라면 왜 무조건 구조조정에 반대했겠는가. 아울러 이번 판결 내용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기업의 구조조정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나 합리적인 이유없이 불순한 의도로 추진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 이를 반대하는 쟁의행위는 그 목적이 정당성이 없다" 백번 천번 양보하여 판결 내용을 따르더라도, 당시 조폐공사가 진행한 구조조정은 '파업유도'라는 명백히 불순한 의도로 추진한 것이다. 그러나 법원 판결은 이에 대해 함구했다. 경영상 필요와 하등 상관없이 공안검찰의 '본때 보여주기'식 조직적 개입으로 노조 파업이 유도되었다는 사실을 만천하가 알고 있는데, 어찌 지엄하신 대법관 나리들만 모른단 말인가. 이 땅에 진정 노동삼권이 존재하는가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한민국은 헌법상 기본권으로 노동 삼권을 보장한다고 배웠다.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한 마디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사측과 교섭하고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파업을 할 수 있다는 권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동등한 위치가 아닌 노동자를 보호하려고 집단적인 권리를 보장한다는 취지도 기억이 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현실은 '파업'이란 말 앞에 항상 '불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고, 심지어 노조 파업은 불법을 넘어 사회불순세력의 혼란 조장 수준으로 매도당했다. '합법파업은 몰라도 불법파업은 용납할 수 없다'는 그럴싸한 말 뒤에서, 노조 파업은 언제나 불법으로 규정당했다. 노동자에게 일자리만큼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는가. 그런데 그 일자리를 내놓으라는 정리해고나 구조조정은 신성불가침이니 이에 반대하는 노조 파업은 무조건 불법이라면, 결국 대한민국 헌법의 '노동삼권 보장'은 공문구에 불과하게 된다. 더구나 이번 판결의 경우 노사가 체결한 단체협약의 효력마저 아무 법적 근거 없이 부정해버려 노동삼권을 더욱 빈 껍질로 만들어버렸다. 관련한 판결문의 내용을 보자 "경영권의 본질에 속하여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항에 관하여 노조와 '합의'한다는 단체협약 조항이 있는 경우, … '협의'의 취지로 해석함이 상당하다" 당시 조폐공사의 단체협약에는 '공사는 정리해고나 사업장조직 통폐합에 따른 직원의 해고시 노조와 사전에 합의한다'고 되어 있었다. 노사가 체결한 단체협약은 일반 계약 차원이 아니라 노동법상 근로계약이나 취업규칙보다 우선해서 적용한다. 그런 단체협약에 '노조와 사전 합의'라고 명문한 것을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항을 정한 것이므로 효력이 없다고 간단히 부정해버렸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노사가 단체교섭을 하여 체결한 단체협약을 법원이 부정해버리면, 단체교섭이나 단체협약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단체협약을 위반했을 때 벌금 몇 푼만 내면 되고 말아 사용자들이 상습적으로 단체협약을 어기는 판에, 법원이 앞장서서 단협 불이행을 조장하고 있는 꼴이다. IMF 이후 몰아닥친 정리해고에 맞서 노동조합은 많은 노동조건 개악을 감수하고 고용안정 협약을 따내려고 했다. 그 결과 일부 사업장에서나마 고용안정협약을 쟁취하기도 했는데, 이번 대법원 판결로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평소 노동 관련 사건에서 법원은 회사측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근로계약서나 취업규칙의 문구를 그대로 금과옥조로 받아들였다. 노동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회유, 강요로 작성한 근로계약서의 문구를 그대로 노동자의 의사인 것처럼 받아들였다. 예컨대 정규직으로 일하다가 사측의 강요로 계약직으로 전환한 경우 노동자가 그 계약직 계약서에 서명한 이상, 노사가 자유의사로 계약직 전환을 합의한 이상 아무 문제가 없다는 식이다. 그런데 유독 노조와 회사가 체결한 단체협약을 그것도 노조가 쟁취해낸 조항에는 법의 잣대랍시고 정치적 판단을 들이대, 효력을 부정하느냐 말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아예 이 땅에서 노동자의 권리는, 노동삼권은 보장되지 않는다고 공식 선포를 하라. 글을 마치며 문득 한 개그프로의 유행어가 생각나 패러디 해본다. "대법원 말씀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아니 대관절, 구조조정 반대파업은 무조건 불법이라굽쇼. 그렇다면 노동자 보고 나가 죽으라 이말입니까"라고. 그렇다. 법원은, 이 사회의 법 제도는, 이 사회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충실하게 노동자들에게 순종만을 강요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너무 정해진 정답 같지만, 노동자 민중의 힘으로 이의를 제기하여, 스스로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닌가.
1. WTO 가입의 과정 중국은 2001년 11월 10일 142번째로 WTO에 가입하였다. 이는 1986년 GATT 가입을 신청한 이래 15년만의 일이다. 중국 방송에서는 WTO 가입이 중국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중국의 대외수출을 촉진할 것이며, 중국의 경제구조를 세계적 기준에 더욱 가깝게 만들 것이라는 낙관론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WTO 가입이 가져올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적지 않고 1990년대 들어서면서 깊어진 사회적 양극화가 더욱 심각한 문제로 드러날 것이라는 지적도 일어나고 있다. GATT 가입을 신청한 뒤로 중국의 가입 요구가 바로 수용되지 못한 것은 가입조건에서 이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핵심산업의 통제와 외국인 소유제한, 정보통신과 금융업에 외국인 진입 제한을 주장해왔지만, 미국을 비롯한 세계무역의 주도국이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가입협상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개혁개방 뒤로 중국의 대서방 수출이 봉쇄된 적은 없었고, 중국은 미국이나 유럽으로 수출에서 WTO 가입국가에 비해 큰 차별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 이는 중국의 가장 큰 수출시장인 미국과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매년 미국 의회에서 최혜국대우 연장 비준을 얻어야 했고, 이것이 항상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압력의 빌미가 되기는 했지만, 중국이나 미국 어느 쪽도 정치적 이유 때문에 중국에 대한 최혜국대우 조치가 중단될 것이라고 예상한 적은 없었다. 중국 지도부는 GATT, 그리고 1995년 이후에는 WTO 가입이 중국의 세계시장 편입을 기정사실화하고, 중국 내의 경제적 구조조정과 사회적 재편을 가속화하는 중요한 동력이 될 것이며, 이를 통해 정치적으로도 중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늘려 가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장쩌민 국가주석과 리란칭 부총리를 중심으로 이 국제기구의 가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그렇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는 WTO 가입보다는 국내의 국유기업의 구조조정이 더 시급한 과제로 상정되어 있었다. 이 상황은 1998년쯤부터 빠르게 바뀌었다. 1998년과 1999년에 중국은 WTO 가입을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하였다. 이렇게 상황이 바뀐 배경에는 아시아 금융위기로 중국의 수출도 둔화되기 시작했고, 국유기업의 구조조정 속도가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국내적 반발이 적지 않음에 따라 새로운 충격의 계기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1997년 15차 당대회에서 총리에 임명된 주룽지는 국유기업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우선적 과제로 삼았지만, 이 작업이 예상과 달리 빠른 속도로 나아가지 않음에 따라 WTO 가입을 국유기업 구조조정을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로 판단하고, 1998년 뒤로 WTO 가입을 위한 협상안 마련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1998년 6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국방문은 그동안 정체상태에 있던 중국의 WTO 가입 협상에 새로운 계기가 되었으며, 중국은 이듬해 봄, 예정된 주룽지 총리의 미국 방문일정에 맞추어 중-미간의 WTO 가입 협상을 위한 물밑 접촉에 적극적 자세를 보였다. 1999년 초에는 중국의 WTO 가입을 독려하는 클린턴의 친서가 세 차례나 중국에 전달되었고, 이를 미국의 적극적 자세로 해석한 중국은 1999년 4월 주룽지 총리의 미국 방문 시 광범한 양보조항이 담겨있는 협상안을 준비해 갔다. 그러나 막상 워싱턴에 도착한 주룽지 총리가 협상의 조건을 제시하자 클린턴의 측근 정책결정자 사이의 의견이 갈라지면서 미국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처럼 미국이 태도를 결정하지 못한 것은 이미 상당한 양보를 담고 있는 중국의 제안에 대해 미국이 더 많은 양보를 받아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제기된 데다,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의회에서 중국의 WTO 가입 협상안을 비준 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 내에서 국무장관 올브라이트를 비롯해 안보보좌관과 무역대표는 중국의 제안을 수용해 협상을 타결하자는 쪽이었고, 재무장과 루빈을 비롯해 국가경제회의 의장과 국내정치 보좌관은 노조를 설득하고 경쟁산업에 대한 보호조치가 없으면 의회 동의를 얻기 어렵다는 이유를 내세워 협상을 당장 타결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행정부 내의 이견이 조정되지 못함에 따라, 잔뜩 기대하고 워싱턴을 찾은 주룽지 총리는 아무런 대답을 얻지 못한 채 남은 방문일정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협상이 중단된 상태에서 미국 무역대표부는 중국의 양보안에 대한 미국 내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중국 쪽 제안을 무역대표부 홈페이지에 게시하였는데, 이일로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났다. 중국 쪽 양보안이 중국 국내에 즉각 알려지게 되면서,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들이 거세게 일어난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과 정부 내에서조차 반대여론이 거세게 일어나자 주룽지 총리는 더 이상의 협상을 진행할 수 없었고, 주룽지가 귀국하기 직전 클린턴은 중국의 협상안을 수용할 의사를 비쳤지만 이미 상황은 협상을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달 1999년 5월에는 코소보 전쟁 중에 나토의 전폭기가 유고의 중국대사관을 폭격하는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해 중국 내에서 반미의 분위기가 높아졌고, 대미 양보안의 책임을 물어 주룽지에 대한 정치적 공격 또한 점점 더 늘어났다. 정부 내에서는 개방의 영향을 심하게 받게될 중공업, 서비스업, 농업, 정보통신, 금융부문과 지방정부가 반대의 의사를 적극 표명하고 나섰고, 반발이 거세지자 WTO 가입을 주도해 온 대외경제무역합작부조차 WTO 가입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다시 반전되어 6월 이후 빠르게 다시 미국과의 WTO 가입 협상을 재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장쩌민 국가주석이 전면에 나서 반미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잠재우고, 국유기업 구조조정 일정을 늦추는 양보안을 제시하고, 미디어를 적극 활용해 WTO 가입만이 중국이 살 길 임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미국 내에서도 정부와 재계가 의회에 로비를 적극 벌이게 되어, 결국 1999년 11월 베이징을 방문한 미국 무역대표 바쉐프스키와 중국 대표 사이에 중국의 WTO 가입에 대한 중-미 협상이 타결되었다. 2. 중국의 WTO 가입 조건 중국과 미국간 타결된 협상안은 이듬해인 2000년 미국 의회에서 통과되어, 미국은 중국에 대해 항구적 정상무역관계(PNTR) 지위를 부여하였다. 중국은 이어서 EU와의 협상도 타결하였다. 2001년 중국이 정식으로 WTO에 가입하면서 수용한 조건은 이 두 협상에서 타결된 내용을 기본틀로 삼고 있다. 중국이 WTO 가입을 위해 수용한 조건은 발전도상국 지위보다는 선진국에 조금 더 가까운 선진발전도상국 지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의 WTO 가입 조건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공산품과 농산품의 관세인하와 서비스 시장의 개방으로 요약된다. 농업 영역에서 중국은 농산물 수입관세를 현행 22%에서 15%로 낮추기로 하였고, 농업보조금을 국내 농업 생산의 8.5%로 제한하였다. 공산품 관세율은 1997년의 24.6%에서 2005년까지는 평균 8.9% 수준으로 인하하기로 하였다. 특히 공업부문 중 그동안 중국 정부의 보호를 받아온 자동차 산업에서는 관세율이 현행 80∼100%에서 2006년까지 25%로 인하되며, 정보통신 산업 분야에서도 통신부품, 컴퓨터, 반도체 등 첨단 기술 제품의 관세가 2005년까지 폐지된다. 자동차와 정보통신 부문의 서비스 시장도 개방되는데, 자동차 산업에서는 외국기업의 독자적 영업 및 서비스 망이 허용되고 자동차 구매자에 대한 개인신용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동통신 서비스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한도를 3년 뒤에 49%까지 높이고, 인터넷이나 무선호출, 기타 부가 통신 서비스의 외국인 지분을 2년 후까지 50%로 늘리도록 하였다. 유통과 서비스업에서도 3년 내에 진입 제한이 철폐되고, 대형 백화점과 체인점에 대한 합작 제한도 철폐된다. 지금까지 외국자본의 진출이 상당히 제한된 금융부문도 개방되어, 은행업, 보험업, 증권거래업에 외국자본이 합자형태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지금까지 외환업무만 취급할 수 있던 외국계 은행은 2년 뒤에는 기업을 대상으로, 5년 뒤에는 개인을 대상으로 인민폐 거래 업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증권업 영역에서는 펀드매니지먼트 합자회사의 투자가 허용되어, 3년 후에는 49%까지의 지분을 가질 수 있고 보험업에서도 50%까지의 지분을 허용하는 합자형태의 진출이 허용된다. 이상이 주로 중국이 미국과 유럽에 제시한 양보안이라면, 그 대가로 중국이 받게된 가시적 혜택은 섬유산업에서 중국산 제품의 수입쿼터제가 2005년 폐지되고, 다섬유협정 폐지 혜택을 중국이 받게된 것이다. 그러나 세이프가드제나 반덤핑 규제수단이 앞으로 상당기간 존속되기 때문에, 이 영역에서 중국이 얻게될 실이득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3. 1990년대 말 중국의 위기 구조 1990년대 말 중국이 WTO 가입을 서두르게 된데는 국유기업의 위기가 배경에 깔려있었으며, 중국정부는 외부의 자극으로 국내 구조조정을 가속화하려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말과 비교해보면 1990년대 말 중국 국유기업의 상태는 매우 악화되었다. 10년 사이에 국유기업의 이윤액은 64% 하락하였고, 적자액은 10배 가까이 늘어났으며, 적자기업의 비율이 350% 증가하였다. 그동안 '점진적 이행'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국유기업 처리의 문제는 1990년대 들어 중국의 신자유주의의 진행과 더불어 점점 더 핵심적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대체로 1992년 이후이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진압 뒤 가라앉은 투자분위기를 높이기 위해 1992년 떵샤오핑은 선전 경제특구를 출발점으로 중국 남부의 경제발전 지역을 순시하는 '남순'(南巡) 행사를 벌인바 있는데, 이를 계기로 중국의 경제는 대외개방을 더욱 촉진하고 자본주의 지향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게 되었으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에 조응하는 '궤도진입'(接軌)을 중요한 목표로 삼게되었다. 이런 변화를 반영해 1992년 14차 당대회에서는 중국의 발전노선을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로 정립하여, 과거의 계획경제의 요소를 상당부분 제거하고, 중앙정부는 거시적 경제조정을 중심으로 방향전환을 모색하였으며, 기업은 주식회사제도를 모델로 하는 구조전환을 모색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본격화하기 시작하였으며, 중국의 세계경제에 대한 의존도는 매우 빠르게 높아지게 되었고, 초국적 기업의 중국진출도 대대적으로 증가하였으며, 사회적 양극화 또한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 1992년의 계기 이전에 1980년대 중국의 성장모델은 국유기업 문제를 유보해 둔 채 그 외곽을 확장해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농촌의 인민공사체제가 해체되고 대신에 가족 중심의 농업 체제가 수립되었으며, 농촌 소재 기업인 향진기업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농촌주민의 비농업 소득이 증가해 전반적인 농촌 주민의 소득수준이 일시적으로 증가하였다. 도시에서는 국유기업에 대한 청부경영제도가 실시되면서 경영자의 권한이 확대되긴 했지만, 아직까지 기업파산이나 고용의 불안정화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 전이어서, 자율적으로 배분할 수 있는 늘어난 유보자금을 그동안 억제되어온 임금인상에 배분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도시 노동자의 소득과 소비수준도 다소 향상되었다. 대외개방의 면에서 살펴보면 1980년대 중국에 유입된 외국인 직접투자는 홍콩을 중심으로 하는 화교자본이었는데, 이들 자본은 기존의 공업지대가 아닌 남부 연해지역의 노동집약적 공업에 투자되면서 기존의 국유기업과 경쟁을 피해 새로운 고용을 빠르게 창출해갔다. 이처럼 국유기업에 대해서는 파산을 억제하는 국가의 정책이 시행되고, 사회 전체적으로 소득수준이 상승하면서 '소비열'이 형성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중소규모의 투자가 지방정부의 지원으로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과잉 중복투자 문제는 결국 1988년의 인플레이션을 낳았고, 내구성 소비재에 대한 수요가 포화상태에 이르게 된 뒤로, 1989년 정부가 긴축정책을 펴게되자 국유기업 사이에 채무관계가 물리는 '삼각채' 현상이라는 위기로 표출되게 되었다. 이 시기까지는 외양상 사회 전반적으로 소득과 소비수준이 향상되는 윈-윈 게임처럼 보이던 상황은 1990년대에 들어서는 '제로섬 게임' 형태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떵샤오핑의 남순 뒤로 투자가 대대적으로 늘어나긴 했지만 토지와 부동산에 투자가 몰리는 거품현상이 나타났고, 중복투자는 오히려 심해져서, 가동이 중단되거나 설비가 유휴상태에 빠지고 적자가 커지는 기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기업의 파산 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1990년대 들어서 고용계약제를 전체 노동자에게 확대하는 전원노동계약제가 실시되면서, 적자 국유기업 노동자의 실업문제가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정식 실업 외에 기업에 이름만 걸어둔 실업자인 '면직'(下崗)이 새로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번역 : 김공회(진보저널 읽기 모임) 자본축적과 공황, 계급투쟁의 관계는 CSE가 설립된 이래 중심 주제였다. 사실 그것은 1848년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에서 처음으로 제기한 뒤부터 맑스주의의 중심 주제였다. 동아시아의 위기가 훑고 지나간 흔적에서, 그리고 어쩌면 세계 자본주의의 또 다른 위기의 파동 전야인 지금, 세계자본global capital의 최초의 위기를 언급하면서 맑스와 엥겔스가 발전시켰던 개념들로 돌아가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1847년 11월에 {공산당 선언}을 써 줄 것을 의뢰 받았다. 그 {선언}은 이미 1847년 6월과 10월에 엥겔스에 의해 작성된 초안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프랑스 2월혁명이 발발하기 바로 직전인 1848년 1월에 출판되었다. {선언}은 맑스와 엥겔스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동학dynamics과 계급투쟁의 정치적 발전을 직접 연결해 보려는 첫 번째 시도였다. 맑스는 이미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Introduction to the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든 개별적인 계급이익에 반하는 이해관계를 가진 보편적인 계급이라고 입증한 바 있다. 또한 {경제학·철학 수고1844 Manuscripts}에서 소외된 노동 개념을 사적 소유 및 정치경제학 비판의 기초로 확립하였다. {포이어바하에 관한 테제Theses on Feuerbach}에서 중요한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것이며, 맑스 자신이 아무리 세상을 잘 이해한다 하더라도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몫임을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깨달을 것인가 이다. 이는 추상적인 이론적 질문이라기보다 자본주의적 발전의 역사적 경향을 구별해내는 문제다. 애초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경향을 분석한 것은 맑스가 아니라 엥겔스였다. {정치경제학 비판 개요Outlines of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1843)에서 그는 과잉생산에 대한 자본주의적 경향의 원인을 자본가 사이의 끊임없는 경쟁에서 찾았다. 바로 그것이 자본가가 시장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생산을 늘리도록 충동질한다는 것이다. 과잉생산은 소생산자들과 약소한 자본가들을 시장에서 몰아내 자본을 집중centralisation of capital케 하고, 과잉과 결핍, 과로와 실업이 공존할 수 있도록 하며, 호황과 불황을 반복케 한다.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Condition of the English Working Class}(1844-5)에서 이미 엥겔스는 고용의 주기적 순환과 기술 혁신으로 산업 '예비군reserve army'이 일반적으로 증가(CW4, 384, 429)하고 이에 따라 노동자 계급의 조직화가 촉진된다고 논한 바 있다. 따라서 그는 상업 공황을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독립적 발전을 위한 강력한 지렛대'(CW4, 580)라 불렀다. 당시 부상하던 노동자의 혁명적 계급운동에 직접 관계를 맺었던 맑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동학이 내재한 문제에 주의를 기울인 것은 1847년에 이르러서다. 1847년 초반에 쓴 {철학의 빈곤The Poverty of Philosophy}에서 맑스는 '과잉생산과 산업의 무정부성이라는 다른 많은 특성들'(CW6, 136)은 경쟁의 결과―엥겔스의 설명과 같이―일뿐만 아니라 더욱 근본적으로 '노동시간에 따라 상품 가치를 평가'한 결과이며, 여기에서 경쟁은 단지 피상적인 표현형태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모든 생산자는 생산력을 증대시켜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단축하려 하는데, 그 결과 생산의 규모는 증가한다. 이는 생산량의 증가와 가격의 하락을 초래하는데, 이렇게 해서 더욱 효율적인 생산자가 덜 효율적인 생산자를 대체한다. 앞선 설비를 지닌 생산자가 벌이는 경쟁은 과거의 방식으로 생산하여 시장에 남아있는 상품들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동시에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깨트려 결국 '생산은 필연적으로 호황과 불황, 공황, 침체, 회복 등의 부침(浮沈)을 끊임없이 겪어야만 한다'(CW6, 137). 따라서 공황을 발생시키는 것은 단순히 자본주의적 경쟁의 무정부성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의 조건이다. 과잉생산이란 생산기술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한 생산자들을 시장에서 몰아내는 수단이므로, 그것은 단지 경쟁 때문에 생긴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이 지니는 특징 형태이다. 과잉생산은 생산력 발전에 따른 대가다. 이는 공황이 시장 경제가 아니라 발전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그것을 추동하는 힘driving force은 생산력의 발전이다―의 특성임을 뜻한다. 이와 같은 분석은 1847년 12월에 맑스가 브뤼셀에서 일련의 강좌를 진행하면서 발전된 것으로, 나중에 개정을 거쳐 {임노동과 자본Wage Labour and Capital}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여기에서 맑스는 위와 같은 과잉생산에 대한 자본주의적 경향을 설명하는데, 이는 비슷한 시기에 썼던 {공산당 선언} 명제의 기저에 흐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동학을 설명하는 기반이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동학에 관하여 위 분석이 지니는 독창성과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든 부르주아 경제학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시장의 한계에 적응해 나가는 경향을 띤다는 취약한 가정에 기대면서, 그러한 적응의 실패를 개인의 무지나 불확실성, 혹은 개별 자본가의 판단착오에서 기인하는 피상적인 불완전성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이윤을 그저 자본가의 미덕에 대한 부수적인 보답으로 간주하면서 '소비야말로 생산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말한 애덤 스미스Adam Smith로부터 유래하는 기본적인 가정의 표현일 뿐이다. 스미스는 이 경구(警句)를 '너무도 자명해서 이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일'(Smith, 1910, Vol. I, 385)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의 존재 자체에 의해 부정되는, 명백히 그릇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목적은 소비가 아니라 이윤의 추출과 자본의 축적이다. 자본축적의 수단은 소비자의 욕구―그것의 한계는 자본가가 넘어야 할 장애물이다―충족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지배를 받는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생산력의 발전으로, 바로 그들의 생산물을 자본가들이 착취하는 것이다. 생산력을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은 단순히 자본가들의 주관적 동기일 뿐만 아니라 경쟁의 압력에 의해 자본가가 부과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쟁의 압력이란 다름 아닌 [자본주의 경제에/역자] 내재하면서 자기 증식하는 과잉생산의 경향인데, 이는 모든 자본가가 시장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생산력을 발전시킴으로써 생산을 늘리도록 강제한다. 과잉생산의 경향은 시장의 한계에 대한 무지 혹은 판단착오의 결과가 아니다. 혁신적인[생산기술을 혁신하는/역자] 자본가는 그의 생산물 증가분 전체를 수지타산에 맞게 처분할 수 있는 반면, 다른 자본가들은 상품의 과잉생산의 결과로서 시장의 한계를 떠안기 때문이다. 과잉생산과 공황의 경향은 자본가가 생산수단 혁신의 원인이자 결과다. 이는 새로운 생산방식이 과거의 것을 대체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생산양식과 생산수단이 어떻게 계속 변화하고 혁신되는지, 또 어떻게 필연적으로 노동의 분업 뒤에 더 고도의 분업이, 기계의 사용 뒤에 더 많은 기계의 사용이, 대규모의 노동 뒤에 더 큰 규모의 노동이 뒤따르는지를 보게 된다'(CW9, 224). 노동자에게 이는, 자본가들이 '더 많은 노동자soldiers of industry를 해고하기 위해 경쟁'(CW9, 226)할 때 발생하는 노동의 탈숙련화, 노동시장에서의 경쟁의 격화, 임금하락, 과잉인구화redundancy를 의미한다. 따라서 과잉생산과 공황은 한편으로는 생산력의 발전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뒤떨어진 생산력을 가진 생산자를 축출하고, 노동자의 궁핍화 및 탈숙련화하는 문제와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사실 {선언}에서 자본주의의 위기 경향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을 실현하는 것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도출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이는 놀랍게 들릴 수도 있을텐데, 바로 {선언}이 세계 자본주의를 휩쓸었던 대규모의 공황을 배경으로 쓰여졌으며 또한 이는 당시 {선언}을 준비해야만 한다는 긴박함의 이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엥겔스가 1847년 6월에 쓴 {공산당 선언}의 초고에는 자본주의 발달과정에서 공황의 중요성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두 번째 초고가 나오는 1847년 10월 사이에 공황이 발생했고, 엥겔스는 '공황이 노동자들에게 부과하는 막대한 고통과 사회 전반전인 혁명적 동요, 나아가 기존의 체제 전반을 위협한다'는 주장을 삽입했다. 엥겔스의 초고에서 공황의 경향은 '경쟁 그리고 일반적으로 산업 생산이 개인에게 맡겨지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질서는 따라서, '사회전체가 모든 생산의 부문을 운영'함으로써 경쟁에 내재된 공황의 경향을 제거할 것이다. '사적 소유 또한 철폐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개인에 기반한 산업의 운영 및 경쟁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CW6, 347-8). 그러나 맑스가 쓴 완결 판에서 공황의 경향은 경쟁이 아니라 [생산 방식들에 대한 계속적인 혁신을 방해하는] '부르주아 소유의 조건들'의 협소함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CW6, 490). 비록 그 최종판이 '부르주아지들 사이의 증가하는 경쟁,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상업공황'을 언급할 때 공황의 원인으로 경쟁을 다루고 있지만 말이다(CW6, 492).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동학에 대한 분석은 과잉생산에 대한 이전 설명에 기대고 있다. 이에 따르면 과잉생산은 자본이 끊임없이 생산력을 혁신하고 세계시장을 발전시키도록 압박하는데, 이는 과잉생산이라는 주기적 공황을 대가로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적 축적의 위기 경향은 부르주아지가 '스스로를 죽음에 처하게 할' '무기'가 무엇인지를 밝혀주는데, '그 무기를 휘두르는' 것은 다름 아닌 프롤레타리아트다(CW6, 490). 그렇다면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무기를 휘두르게 되는가? {공산당 선언}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에 관한 설명을 자본주의적 공황의 경향에 대한 설명 바로 뒤에 제시하나, 둘을 명시적으로 관련시키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노동자를 '기계의 부속물'로 전락시키면서, 임금을 최소수준으로 낮추고, 노동강도를 강화함과 동시에 노동일을 늘리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발전시킨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반화는 장인적 소생산을 파괴시킨다. 반면 소규모 자본가들은 거대 자본들의 경쟁을 견뎌내지 못하고, 그리하여 '중간계급의 낮은 층은 ... 점점 가라앉아 프롤레타리아트가 되'(CW6, 491)며 사회는 점차 두 개의 계급으로 양극화된다. '산업의 발달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는 수적으로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거대한 대중으로 결집하게 되고, 그 세력도 점증하며 그들 스스로 더욱 커진 자신의 힘을 인지한다'(CW6, 492). '기계가 노동의 차이를 제거하고 거의 모든 곳에서 임금을 똑같이 낮은 수준으로 제한해 나감'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에서 부문별, 문화별 구분이 붕괴되는 한편, 상업 공황은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의 변동성을 더 크게 조장'하며 '멈추지 않는 기계의 혁신은 ... 그들의 생계를 더욱 더 불안정하게 만든다'(CW6, 492).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고용주에 대한 투쟁을 조직한다. 그렇다고 바로 노동자의 승리가 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 국면에서는 맑스도 노동자가 노조 투쟁을 통해 임금을 상승시키는 것은 어려울 것이며, 오히려 '그들 전쟁의 진정한 결실'은 '노동자가 조합을 계속적으로 확장하는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투쟁이 국가적 규모로 확대됨에 따라 그것은 계급투쟁의 성격을 취하면서 필연적으로 정치적 형태를 띄게 된다. 맑스와 엥겔스는 {선언}의 출간 전야인 1847년 위기가 혁명적 투쟁의 물결을 촉진시킬 것이라 기대했으나, 1848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하리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는 계속 사기가 치솟는 시기였고, 맑스와 엥겔스는 향후 5년 안에 혁명이 가능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1847년 공황이 자본주의 최초로 세계적 호황인 빅토리아 시대의 서곡이 될 것이라고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점진적인 발전에 대한 그들의 설명이 [어떤 지적 회의주의에 의해서도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을 의지에 대한 낙관에 의해 추동되는] 사회학적 분석에 기대고 있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맑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낙관주의는 자신의 글로도 논박된다. {선언}에서조차 맑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화가 '노동자 자신들 사이의 경쟁 때문에 계속적으로 방해받고 있'으며 이 경쟁은 위기와 불황depression의 특성임을 명기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 엥겔스는 베른슈타인Bernstein에게 보낸 편지(1882년 1월 25일)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러한 위기가 정치적 대변동의 강력한 지렛대 중 하나임은 이미 {공산당 선언}에 언급되었네 … 호황으로 복귀하는 것은 혁명을 중단시키고, 반동 세력들이 승리하는 기반을 닦는 다는 점 역시 설명되었지'(Letters on Capital, 209-10). 경기후퇴recession가 노동자 사이에서 경쟁을 부추겨 서로의 단결을 약화시키고, 되돌아오는 호황은 그들의 혁명적 욕구를 둔화시켜 그들의 혁명을 파괴시킨다는 설명은 이후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에서 여러 번 발견된다. 어쩌면 혁명은, 호황에서 성취한 노동자의 단결을 공황에서 뒤따르는 경쟁의 압력이 파괴하기 전에, 그러니까 바로 그 위기의 순간에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맑스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The Class Struggles in France}(1850)에서 다음과 같이 썼듯이 : '이렇게 전반적으로 호황일 때 … 실질적인 혁명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그러한 혁명은 오직 근대적 생산력과 부르주아적 생산 형태라는 두 가지 요소가 서로 충돌할 때에만 가능하다. … 새로운 혁명은 오직 새로운 위기의 결과로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위기만큼이나 필연적이다'(CW10, 135; c.f. CW39, 96). 이는 잘 알려진 주장으로, 나는 이 글에서 더 이상 이 문제를 다루지 않을 것이다. 다만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여전히) 달성하지 못한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경향에 대한 맑스의 분석을 무력(無力)하게 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으로 매우 적절히 설명된다는 점만은 지적해 둔다. 마지막으로 내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좀 다른 문제다. 1850년대 맑스의 이론적 작업의 주된 초점으로, 바로 공황의 원인과 형태 사이의 문제이다. 이는 복잡한 이론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1848년과 오늘날 모두 중요한 정치적 결과를 가져왔다. 문제는 1847년 공황의 원인이 영국―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노동자의 조직화가 가장 높은 수준의 발전 양상을 보이고 있던 나라―에서 막대한 자본의 과잉축적 탓이었는데도 공황의 충격은 대륙, 특히 프랑스에서 더 크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영국의 상업 및 산업 공황이 프랑스에 미친 영향은 매우 파괴적이었다. 그것은 프랑스의 산업 부르주아지와 금융귀족들 사이의 갈등을 극도로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발생한/역자] 공황에 의해 촉발된 투쟁이 영국 노동자와 그들의 고용주 사이에서 벌어진 계급투쟁이 아니라, 프랑스의 산업 부르주아지, 금융 및 토지귀족과 공무원들 사이의 투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과잉생산의 공황이 금융공황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공황은 장기간에 걸친 영국 산업자본의 과잉축적으로 뒤이어 출현하였으나, 사실 이는 상업과 금융의 투기를 촉발시킨 흉작으로 폭발하였다. 영란은행The Bank of England [영국의 중앙은행/역자]은 1844년 은행법Bank Act의 효력을 일시 정지시켜서 이 위기를 타개하고, 한편에서 인상된 이자율 덕에 대륙으로부터 금이 유입되면서 금융제도에 대한 압력이 경감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금의 유출로 대륙에서는 금융공황이 퍼져나갔다. 이는 1848년 혁명의 발생에도 나름의 역할을 하였으며, 금이 안전을 찾아 런던으로 유입되면서 영국에 가하는 압력을 더욱 경감하였다. 이 결과로 발생한 유럽의 경기후퇴로 세계시장은 영국의 생산물에 개방되었고, 영국 자본의 새로운 축적은 이내 유럽으로 퍼져나갈 빅토리아 중기 호황의 시작을 알렸으며, 반혁명에 의해 집권한 반동적 정권들은 안정되었다. 1852년에 맑스와 엥겔스가 예측했던 공황은 발발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더욱 낙관적이 되었다. 왜냐하면 공황의 발생이 지연될수록 그것은 더더욱 극심해질 것이고 더더욱 적절해질 것이며 이전 공황과는 달리 더욱더 영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잉여자본이 금융과 상업적 투기가 아닌 생산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은 공황이 '산업이 아니라 상업이나 화폐 부문에서 발생했던 1847년보다 훨씬 더 위험한 성격을 지닌다'(CW11, 361)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분석이 제기하는 핵심적 질문은 공황이 막상 닥치는 나라와 공황으로 드러나는 모순이 성숙한 나라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해서 혁명이 계속될 수 있는가 이다. 맑스는 공황과 혁명의 상호작용은 영국을 진앙지로 세계적으로 펼쳐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공황이 영국보다 대륙에서 나중에 발생하듯, 호황도 그렇다. 이 과정은 항상 영국에서 먼저 발생한다; 이는 부르주아적 우주의 조물주demiurge다. … 그러므로 공황이 대륙에서 최초의 혁명을 촉발시키지만, 이 혁명의 기반은 항상 영국에 있다. 맹렬한 봉기는 부르주아의 심장부보다 자체 조절능력이 덜한 몸통의 가장 말단에서 일어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다른 한편으로, 대륙에서 혁명이 영국에 미치는 영향의 정도는 이 혁명이 부르주아적 삶의 조건에 대해 얼마만큼 실질적으로 문제제기 하는지, 혹은 그것의 정치적 양태formations에 얼마만큼 충격을 가하는지를 나타내는 척도이다' (CW10, 509-10). 대륙은 정치적 혁명의 장소이지만, 사회혁명은 영국에서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회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계의 나머지 부분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는 20세기 모든 혁명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로, 그 혁명 모두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으로 어느 정도 촉진되었지만, 그 중 어떤 것도 이러한 모순이 충분하게 발전한 자본주의 심장부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동아시아 위기에서 제기된 문제이기도 하다. 동아시아를 강타했던 공황의 뿌리는 서유럽, 일본, 미국을 근거지로 하는 세계 자본의 과잉축적에 있지만, 막상 이 공황이 발생한 것은 제국주의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다. (잘해봐야 자본의 가치를 모두 잃어버려서 인도네시아 혹은 한국 대중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 생산수단만을 남겨놓고) 자본은 녹아서 이미 공기 중으로 흩어진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인도네시아 혹은 한국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정치적 우위를 이용하여 부르주아지로부터 자본을 차츰 빼앗을'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자본의 세계화에서 정치적 쟁점은 이미 맑스가 1848년 바로 직후에 직면했던 바로 그 문제다.
2회 세계사회포럼의 한 행사로 2002.2.1-2.2에 열린 '외채에 관한 국제민중법 정'의 최종 판결문입니다. 한글로 번역된 글입니다. 원문은 http://jubileesouth.net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출 처] 한국개발연구원 [발행일] 2002.02.14 [목 차] Ⅰ. 주요 경제여건의 전망 Ⅱ. 우리 경제의 성장기반 평가 1. 경제시스템 측면 2. 성장동인 측면 Ⅲ. 2011년 한국경제의 비전 Ⅳ. 주요 부문별 추진과제 1.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는 시장경제 구축 2. 지식정보시대의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 3. 지속적 성장을 지원하는 인프라 확충 4. 경제수준에 맞는 삶의 질 향상
1. 신자유주의는 지속가능한가 (1) 거시적 불안정성, 경기후퇴 남한경제는 "통화/금융위기의 위험들을 회피할 수 있는 경제적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는가?", 그리고 "안정적 자본축적이 가능한가?" 남한경제는 금융세계화의 깊은 통합단계에 들어서 있는 만큼, 세계경제 특히 미국경제의 침체에 따라 심각한 불안정성에 직면하였다. 미국경제의 회복을 전제하지 않는 한 금융세계화에 깊이 편입해있는 한국경제를 비롯한 세계경제의 추락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모건스탠리 스티브 로치는 2001년 이후 미국경제가 금융적으로 붕괴했지만, 실물적으로 붕괴하지 않았고 건실하게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에 대해 비판하며, 지속적인 금융버블붕괴와 엔론사, K마트, 거대 통신회사 등 거대기업 파산의 연관성을 설명하였다. 버블붕괴에 이어 실물경제가 붕괴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금융버블의 붕괴에 따라 실물경제가 따라 붕괴할 것이라는 주장은 틀렸다. 반대로 새로운 기술혁신과 분배에 따라 움직이는 이윤율의 하락 때문에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회하지 못하고, 자사주 매입과 포트폴리오 투자에 전념하고 있는 다수 기업의 경기후퇴적인 금융화 전략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적 특징은 바로 비(非)금융기업들의 투자가 자기 재정에 의해 조달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강력한 축적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로 자사주 매입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부의 마이너스 축적을 불러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 지배계급은 기생적이다. 금융세계화는 세계경제 수준에서 자본의 과잉과 노동력의 과잉, 금융화와 궁핍화로 표현된다. 분명, 금융화는 일정한 수익률이 보장되건 그렇지 않건 경제성장에 역행한다. 축적위기에 대한 자본의 대안은 이윤율 하락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도록 자본을 파괴하고 효율성을 강화하여 주주가치를 극대화하는 것,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금융 팽창을 지속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자본생산성이 낮은 과잉자본의 처리, 기존의 생산설비와 고용의 일부를 파괴를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전적 의미의 경제성장은 달성되지 않는다. 실제 2001년 하반기부터 세계자본주의의 침체 속에서도 남한경제는 매력적인 투자처임을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고정자본투자 증가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으며, 실업률이 증가하고, 불안정노동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적 의미의 경제성장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남한경제는 투기처로서 매력이 높다지만, 이 매력이 금융버블인 한, 절대 생존조건이 되지 못한다. 다만, 남한경제는 연착륙 방식으로 위기를 지속시키고 있을 뿐이다. (2) 사회적 타협체계 구축; 정치적, 금융적 포섭 신자유주의가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적 타협체계가 필요했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전략이 구축하는 새로운 사회적 타협은 사회적 불평등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증대하는 소수의 번영에 보다 폭넓게 다른 사회 계급을 결합시켜내는 과정이다. 금융 팽창과 사회적 부의 불평등의 심화. 임금비용과 이윤 사이에 역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이윤율 저하에 직면한 지배계급은 임금 증가를 엄격하게 통제하게 된다. 그러나 기술이 지속적으로 진보하지 않는 상황에서 금융팽창과 부의 불평등의 심화 사이에서 오는 모순은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새로운 사회적 타협을 구축하거나, 보다 권위주의적인 체제로 전환할 것을 의도한다. 남한경제의 경우, 노사정위원회와 NGO의 동원은 경제개혁 실행을 위한 정치적 토대가 되었다. 지속되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위기관리의 물적토대는 매우 미약하다. 금융세계화로의 통합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불안정성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을 갈등과 협상의 틀로 포괄할 수 있는 노사정위원회를 필요로 한다. 또한, 국가와 긴장관계를 갖으면서도 갈등을 조율할 수 있는 NGO를 자신에 대한 지지와 동원의 파트너로 활용하게 된다. 즉,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을 기꺼이 지지할 중요한 사회세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국가는 구조조정을 강력히 밀고 나갈 수 있는 일종의 대체 사회세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DJ정부은 재경부-금감위를 필두로 구조조정 선봉대의 역할을 수행하며, 시민사회의 지지세력으로 NGO운동을 주목한다. 신흥시장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는 OECD 워킹페이퍼에 명기된 바, NGO는 국가와 기업 간 관계, 국가와 노동간 관계에서 매우 주요한 역할을 맡게된다. 실제로, 국가-기업-노조의 관계에서 NGO는 지대추구적 부패행위(예; 정경유착)를 감시하고, 이를 통해 금융의 이해에 부응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 활약상은 참여연대 중심의 소액주주운동을 포함한 재벌해체운동/정치개혁운동/사법감시/부정부패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 비정부기구는 정치·노동·사회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해결책을 마련하고 갈등을 조정한다. 이런 점에서 NGO는 자본의 금융세계화/노동의 불안정화로 특징 되는 한국경제 구조적 위기의 총체적 성격을 희석하고, 위기에 대한 민중적 대안의 형성이라는 과제를 '개혁'의 이름 하에 왜곡되도록 하였다. 한편, 새로운 사회적 타협체계는 금융을 지향하는 새로운 소득흐름과 밀접히 관련되었다. 이른바 다양한 계급간 협력을 가능케 하는 금융적 포섭이다. 이러한 포섭형태는 금융을 지향하는 새로운 소득흐름과의 관련 덕분에 보다 폭넓은 계급에까지 확장되었다. 예를 들면, 임노동자에게 임금보상을 대체하는 주식의 분배, 스톡옵션, 연금기금 등이 바로 그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금융적 포섭 체계에 따라 개인과 가계는 주식시장의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 자본은 더 넓은 층을 혜택이라는 명목으로 포섭하고자 하며, 노동자들은 이러한 금융적 수혜를 받기 위해 스스로를 주식시장에 내맡겼다. 가장 좋은 사례가 연기금체계의 재편에 대한 것이다. 최근 DJ정권은 기관투자가의 육성, 시장의 기관화, 주식시장의 부양을 위해 개인연금과 기업연금의 도입 및 국민연금의 주식시장으로의 투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또한, 우리사주제도를 이러한 연금제도에 결합시켰다. 그렇다면, 기업연금과 종업원지주제를 짝을 이루어 추진하려고 하는가? 목적은 종업원지주제를 통해 노동자의 퇴직 적립금을 해당기업의 자금으로 전환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임금의 일부를 다시 기업의 자금의 일부로 전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주가에 따라 퇴직금이 오르락내리락 하기 때문에 기업연금제는 노동자의 이해를 금융시장의 이해에 속박하며, 종업원지주제는 기업의 이해 속에 해당기업의 노동자들의 이해를 구속한다. 중요한 점은 노동자의 피땀어린 돈이 구조조정을 가속화시키는 기제가 되어 주식시장에 투자되고, 노동자들의 노후를 금융시장의 이해와 논리에 결속시켜 볼모화 한다는 점이다. 남한경제는 금융세계화에 통합되면서, 즉 투자의 수익률 높은 신흥시장으로 자리잡으면서, 일정한 경기회복의 효과를 누려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초민족적 금융자본과 금융화에 필사적으로 편입하는 재벌에게만 부가 집중될 뿐, 노동 대중에게 금융(주식시장)의 이해를 주입하여, 주가상승을 위해 노동신축화, 착취 당 할 권리만을 강요할 뿐이었다. 과연 신자유주의는 지속가능한가. 결론적으로, 오늘날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기존의 생산설비와 자본파괴를 동반하면서 금융적 팽창을 지속하는 것이기에 항상적인 불황을 낳는다. 때문에 금융세계화는 경제성장에 역행하고, 소수의 금융적 이해를 위해 사회적 부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기에 결코 대안적 축적체계가 될 수 없다. 2. 남한경제 구조조정의 현재와 전망 (1) 금융시장개방과 금융구조조정 남한경제에서 금융개혁은 금융시장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약했던 각종 금융규제를 완화하여, 자본시장을 활성화하는 한편, 이를 통해 소유-경영의 분리와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맞춰져있다. 특히, IMF 금융개혁 프로그램은 남한경제를 금융세계화에 깊숙이 편입시켰다. IMF 이행각서 15항에 "프로그램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금융부문의 광범위한 구조조정과 개혁이다" 라고 명시되어 있듯이, 한국에 대한 IMF지원의 특징은 금융기관의 구조조정과 전면적인 금융개방에 있다. 물론, IMF는 금융개혁을 목적으로 구성된 기구가 아니라는 점에서, 당시 프로그램에는 미국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외채위기를 해결하는 기본방안인 부채-주식 스왑과는 위기처리방식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한국의 경우, 라틴아메리카에 비해 거시경제적 불균형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IMF구제금융을 받는 대신, 정부지급보증 하에 가산금리를 붙여 채무상환일정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채무불이행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채를 크게 줄일 수 있는 방안은 국내기업과 은행에 대한 외국인 소유를 대규모 허용하는 것뿐이었다. 결국, 외국자본이 국내기업과 금융기관을 자유로이 M&A 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했고, 외환이동의 자유화 역시 필요에 따라 강제되었다. 한편, 국내자본의 해외도피, 즉 자본도피가 가능하도록, '외국환관리법'까지 개정되었으며, 기업에 의한 해외차입 자유화 조치도 취해졌다. 여기서 해외차입 자유화 조치는 재벌분파의 성격, 즉 국가자본의 성격을 크게 탈각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재벌은 국내경제 상황에 따라 자유로이 자본을 이동시킬 수 있어, 외국금융기관으로부터 자본을 차입하고, 이를 다시 부당한 방식을 통해 외국금융기관에 예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은 경제위기가 급격히 심화되었을 때, 더욱 선명히 부각된다. 결론적으로, 남한경제는 금융규제완화, 자본시장자유화 조치에 따라 상시적인 자본도피와 국부유출이 가능해졌고, 항상적인 위기에 취약해졌다. 특히, 자본시장(주식시장)의 자유화와 이에 따른 경제구조 변화는 현재 남한경제 위기심화의 주된 원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을 관통하는 쟁점을 제공하고 있다. 자본시장은 정부투자기금법에 따라 교육업 등 일부투자금지항목, 공기업 등 투자지분 제한항목 이외에 모든 부분을 완전개방 하였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공기업에 대한 개인소유, 외국인 투자지분의 제한정도를 완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공기업은 투기대상으로 전락했으며, 초민족적 기관투자가의 포트폴리오 투기전략과 정부의 필사적인 주식시장 부양전략에 따라 사유화되고 있다. 현재 거대 공기업과 재벌그룹 기업들이 망라되어 있는 상장회사 주식 중 외국인 소유비중이 36.6%에 이르고 있다. IMF 위기 직후만 해도 19.0%이던 것이 불과 3년도 안되어서 이렇게 늘었다고 한다. 일부 공기업에 대해 외국인 주식 소유가 아직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한편 포철과 삼성전자 같은 거대 우량기업의 경우, 지분비율은 더 높아서 50-60%대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듯 한국경제를 잠식하고 있는 외국인 투자자본의 성격은 어떠한가? 대부분 순수 투기적 목적의 투자, 위험헤징 목적의 투자, 인수합병(M&A)을 통해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대우자동차와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하는 GM과 마이크론도 인수합병 시장을 통해 생산적 목적을 가장했을 뿐, 노동자의 고용불안(실업과 비정규직 증대)을 증대시키고, (반)주변부에서 금융위기를 야기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거대한 수익을 얻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이들은 외국 투자자본은 적절한 이윤율이 확보되지 않으면 투자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시적인 구조조정을 강제한다. 게다가 상황이 나빠질 것으로 예측되면, 주식을 팔아 거대한 이익을 실현하고 쉽게 떠날 수 있다. (2) DJ의 마스터플랜과 구조조정 전망 2001년 상반기 김대중 정부는 '상시적 구조조정 시스템'을 완비하겠다고 선언하였다. DJ는 집권 초기, 재벌 총수들을 직접적으로 압박하고 명문화된 기업구조조정 합의를 매개로 하여 기업구조조정(경영조직 및 이사회 개혁)을 시행했다. 후반기에 들어서는 상반기 구조조정의 결과로서 상품시장, M&A 시장, 금융시장을 통해 기업경영을 규율하고자 했다. 즉, 시장규율 또는 금융규율을 견고히 확립하기 위해 ①상품 시장개방 및 진입자유화를 통해 경쟁을 촉진하며, ②자본시장의 자유화와 M&A의 활성화를 통해 경영자를 견제하고 주주이익을 보호하며, ③간접금융시장(은행)의 심사 및 감독기능과 직접금융시장에서 주주의 경영감시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림참조> <그림> 기업경영에 대한 규율장치 모든 정책 목표는 '주식시장 부양'에 맞춰져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기관투자가의 주식운용 확대에 역점을 둘 것으로 보인다. 기관투자가의 주식운용 확대는 한마디로 증시 수요기반의 확충, 수급개선, 증시의 효율화, 자본시장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촉발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에 금융기관이 자본시장, 특히 주식시장에서 기관투자가로서의 역할을 늘려 시장의 기관화를 촉진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2002년 대선을 고려하여, 현정부는 다른 신흥시장에 비해 한국이 상대적으로 균형적인 경제기반 갖고 있다고 선전하여, 주식시장을 부양하기 위해 여러 탈규제 조치를 취할 것이다. 공기업의 사유화 추진 및 정부지분 은행의 사유화 추진 역시 '주식시장의 부양'이라는 목적에 맞춰져있다. 즉, 소유주체 이양의 문제뿐만 아니라 주식시장 부양의 문제가 구조조정 일정을 크게 결정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에 따라, 은행 사유화를 추진함에 있어 주가를 상승시키는 것이 급선무이고, 이를 가능케 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으로 보인다. 즉, 자사주 매입을 중심으로 한 재무구조개선, 경영투명성 및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투자를 유도하고, '민영화 뮤추얼펀드'를 조성해 주가상승을 조장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은행사유화는 97년 이후 금융부문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단행되어, 일부 은행은 외국투자가들이 대규모 지분을 인수, 이 기관투자가들이 이사회 결정을 크게 좌우하게 되었다. 이 말은 구조조정을 촉진하는 가장 중요한 동인이, 한국 기업을 감시하고 주식시장에 압박을 가하는 국제적 기관투자가들이라는 말이다. 은행의 사유화 확대는 향후 국가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이는데, 미국과 IMF가 강제했던 중앙은행의 독립 이후 은행 사유화는 주권상실의 문제가 제기된다. 즉, 중앙은행이 정부 재정적자를 보전하지 않기 때문에, 공공부채가 (기관투자가들에 의해 운영되는) 사적은행과 금융기관에 의해서만 보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환율과 이자율 결정과정에서, 이에 개입하는 국가정책은 사적은행과 기관투자가의 금융적 이해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 최근 구조조정의 경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바, 기업경영에 대한 정부의 직접규제 형태로 자본파괴를 유도하는 방향보다는 금융규율의 가속화, 금융화에 조응하는 법제도적 관계법령 정비, 그리고 사회의 제도정착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구상에 따라, 상품시장/금융시장/자본시장 중심의 금융화 전략, 사회의 제도적 측면에서 의료 등 기존 복지영역에 대한 금융질서로의 재편, 주5일제근무 도입의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는 불안정노동의 확산/노동신축화는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3. 구조조정 반대투쟁의 쟁점과 문제점 (1) 잘못 뀌어진 단추, 재벌해체 DJ 집권 초기 재벌책임론/재벌총수사재출자/재벌압박을 통한 기업구조조정 방안의 통과로 이어지는 드라이브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난 쟁점은 재벌총수의 무능·부패문제, 재벌일가의 문어발식-선단식 경영을 특징으로 하는 재벌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집중되었다. 김대중 정권은 IMF협약 이행을 위해 상호지금보증의 축소와 결합재무제표의 도입, 국제적 회계기준의 도입 등 재벌관련 정책을 정비하였다. 또한, 이를 위해 '독점금지 및 공정거래법'을 개정하였다. 이러한 재벌개혁 방향은 금융에 의한 기업규율체제를 강화한다는 측면에서 경쟁규범의 재정비, 기업 인수합병 시장의 활성화, 금융부문의 기업감시기능의 강화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한편, '구조조정 반대'를 둘러싸고 계급대중운동의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참여연대,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금융의 원리를 통해 기업지배구조를 미국화 함으로써 재벌해체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경제민주화운동' '소액주주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역시 재벌총수의 무능과 부패, 전횡을 개혁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국민적(?) 호응을 얻게된다. 그러나, 이 운동들은 재벌의 기업지배구조가 투명한 주식시장을 통해 자본을 조달하고, 기업의 능력을 평가받으며, 나아가 여타 주주들의 이해, 즉 주가상승을 달성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금융규율 형성에 앞장서는 운동이다. 결국 신자유주의적 금융 축적체제를 완성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실제로 진보운동진영이 재벌해체·개혁논점에 휘말리는 사이, 한국경제는 금융적 축적체제로의 편입을 위한 구조개혁이 급물살을 타고 추진되었다. 정부는 금융구조조정 및 기업구조조정을 통해서, 금융적 축적의 조건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시장구조도 변하는데, 수출주도형 모델의 산업정책은 후퇴하였으며, 금융규율 하에 자본간 경쟁을 강화하는 경쟁정책과 저금리 기조를 유지하는 화폐정책이 부상하여 주식시장 부양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결국, 기업지배구조 변화는 누가 지배하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얼마나 금융적 축적에 걸맞는 책임경영을 이루어 낼 것인가의 문제, 즉, 가시적인 경영성과를 주식시장에 제공하여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에 핵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주주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운동은 기업 경영 투명성 제고, 재무제표 작성 기준의 국제화, 연결재무제표 작성의 의무화, 사외이사제도 도입과 소액주주의 권익 보호 등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취해진 각종 조치들과 함께 전세계적인 금융화에 편승하기 위한 성공적 구조조정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2) 민중운동의 대응의 문제점 오늘날 금융세계화 국면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정치적 지형과 쟁점들을 발생시켰다. 과거의 진보와 개혁으로 명명되던 조치들과 이데올로기들이 새롭게 탈바꿈하고 등장하기도 하였으며, 금융세계화에 조응하는 운동들이 새롭게 조직됨에 따라 민중운동 내부에서 큰 분열을 낳았다. 한국의 경우 97년 외환위기 이후 전사회적 자본파괴·고용파괴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고용조건과 임금 중심의 투쟁들은 가시적 성과를 획득하기 어려운 조건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급 민중은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여왔지만, 실제 고립 분산적으로 투쟁이 진행되었고, 양보의 폭을 놓고 싸우는 관행이 일반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력감축을 주로 하는 구조조정 반대투쟁을 벌여내며, 부정부패 척결 및 기업투명성 제고, 사외이사제 도입, 종업원지주제 쟁취를 주장하는 등,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크게 강박(의존)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최근 몇 년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항한 노동자 투쟁은 정치적으로 강화되지 못하고 생존권 투쟁 또는 임단협을 연계하는 투쟁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연대지향적 방식으로 전 민중의 공동 요구를 실현해나가는 과정과도 괴리되어 왔다. 사실상 진정 필요한 것은 금융세계화 시대, 자본의 과잉/노동의 불안정화에 맞서 노동대중이 어떻게 단결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노동자 민중운동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구조조정 반대투쟁의 과제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 즉,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방향 하에 전사회적 구조조정과 금융화에 대항하는 정치쟁점과 전선의 형성, 그리고 이를 실현해 나가기 위한 과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4. 금융세계화에 맞서는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의 정치적 과제 현재의 위기가 신자유주의의 방식으로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현재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그것이 어떤 형태를 취하건 성장이 아니라 금융적 확장을 위한 제도적 변화를 의미하며, 스스로 자본을 파괴하여 노동자들에게는 과도한 착취만을 요구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조조정에 반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조조정이 문제인 것은 그것이 자본파괴적이고, 노동감축적이어서 민중의 생존권을 위협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에 더하여, 구조조정은 한국 사회의 금융화와 금융세계화로의 편입을 위해 전사회적인 기생성과 투기성을 증가시키고 초민족적인 기관투자가와 재벌에게 막대한 부를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안정적 축적과 기술혁신은커녕, 상시적인 외환위기와 외채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것이다. 노동자 민중운동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주도하는 쟁점들을 '개혁'과 '진보성'의 명분으로 흘려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본질을 명확히 폭로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가 몇몇 세력의 정치적 타협, '단기적 위기관리' 중심의 절충과 타협, 그리고 정권교체에 의해 풀릴 수 있는 '만성적·구조적 위기'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명확하게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으로 종속을 심화시키고 민생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정권에 대한 정치적 반대를 응집시켜나가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금융세계화 반대/불안정 노동 철폐투쟁을 중심으로 기존 대중조직운동의 급진적 요구를 보다 정식화하고 새로운 정치적 쟁점을 조직하면서 공동행동의 전망을 밝혀나가자. 금융화 공세에 대한 정치적 대응력을 강화하고, 반정권 대중정치전선의 형성을 위한 투쟁의 계기들을 검토해 보도록 하자. 한국과 일본 정부의 합의에 따라 한일투자협정의 체결이 확정적이고, 한미투자협정이 3월내 체결될 예정이라고 한다. 한·미·일 투자협정에 따라 투자의 개념이 더욱 확대되고 광범위하게 적용되어, 단기성 투기자본을 규제할 수단을 상실하게 된다. 하물며, 이러한 투기자본에게도 최혜국 대우 및 내국민 대우가 적용됨에 따라, 민족경계를 넘어서 자본의 사회적 경제적 필요에 따라 이들이 요구하는 권리를 지켜줘야 한다. 또한, 투자협정과 자유무역협정은 노동자와 농민이 공동으로 투쟁할 수 있는 계기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노동자 농민의 연대투쟁에 보다 많은 중심점을 두어야 한다. 한미투자협정은 반드시 체결 저지되어야 하고, 한일투자협정은 반드시 무효화되어야 한다. 금융화 반대투쟁은 시장개방 정책일정에 대응하는 것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금융세계화 속에서 경제위기는 외환위기와 외채위기, 국부유출과 자본도피라는 특수한 양상을 띠기 마련이다. 신흥시장과 제3세계를 중심으로 한 외채지불거부 및 외채탕감 운동, 프랑스 아탁(ATTAC)과 같은 금융과세 운동은 실현 여부의 문제를 떠나, 정치적으로 강화해 나가야 할 운동이다. 해외자본유치 미명 하에 직접투자와 주식투자의 형태로 초민족적 금융투기의 점증, 상시화된 해외로의 자본도피에 따른 문제들은 금융세계화에 편입하는 전세계 모든 신흥시장들에서 일반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우리는 금융세계화 국면에서 발생하는 지배계급의 투기성, 기생성에 대해 보다 분명한 대응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정권말기 금융비리 등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사건에 대한 물리적 대응을 높여야 한다. 금융세계화 속에서 DJ정권은 코스닥 열풍 조성했고, 자본시장(주식시장) 활성화를 위해 M&A 전용펀드, 기업구조조정 전문회사(CRV, CRC)등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를 발판으로 삼아 정권-안기부-검찰 등 권력기관과 연루된 금융비리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최근 3대 게이트 사건은 단지 정권이 부패했기 때문에 투명해져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금융세계화의 기생성에 대한 민중진영의 분노를 모아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강력한 계기로 형성해야 한다. 김대중 집권 중반기에 이르러 교육·의료·사회복지 등 기존 사회제도 전반의 기업화-금융화의 영향이 민중생존권을 위협하는 요소로 다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따라 빈곤과 실업이 급증한 상황에서 DJ는 구조조정의 희생자에 대한 최후의 보루로 복지정책(예;국민기초생활보장법)과 주식시장 부양을 위해 기관투자를 육성하는 차원에서 민간의료보험을 도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동시에 사회적 위험에 대한 사적 책임을 증가하고 시장원칙을 강화하면서, 임금 및 노동관련 각종 보호제도의 탈규제 강화, 사회보장수준의 하락, 건강보험 본인부담금 증가 등 사회정책전반은 금융화-기업화 흐름에 부합하여 재편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응은 불안정 노동 층 특히, 장애, 이주, 실업, 비정규 노동자들이 노동권, 생활권의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금융화의 동전의 양면인 불안정노동의 일반화에 대한 가장 공세적인 타격으로서 노동유연화 반대, 노동법개악 반대투쟁을 중심으로 형성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고 있다. 동시에 노동권, 생활권의 문제를 넘어서 이 사안에 흐르는 금융적 재편에 대한 문제를 적극 폭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계급대중운동은 연금기금의 금융적 재편에 대해 정치 쟁점으로 형성시켜야 한다. DJ정권과 금융자본은 주식시장 부양을 위해 더욱 큰 규모의 기관투자가가 필요하겠지만, 노동대중에게 퇴직금제도 철폐 및 기업연금 도입, 그리고 기업연금의 종업원지주제와의 연계는 자신을 향한 구조조정의 칼날에 지나지 않는다. 땀 흘려 번 돈의 일부가 퇴직금의 형태로 누적되지 않고 기업연금의 형태로 주식시장에 투입되며, 이러한 기업연금이 종업원지주제와 연결되어서 금융의 이해는 기업의 이해와 결합된다. 결국 이렇게 형성된 금융자금은 자신을 정리해고 시키는데 쓰이게 되는 것이다. 이는 금융세계화가 노동자민중에게 베푸는 수혜가 절대로 아니며, 자신의 이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일 뿐이다. 참고문헌 불안정노동연구팀, '불안정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와 노동의 위기, 문화과학사 윤소영, '이윤율의 경제학과 신자유주의 비판', 공감 최원탁,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연금체계의 변화; 한국에서 국민연금제도 변화의 함의', 사회복지와 노동 3호 G. Dumenil, Neoliberalism; Nature, order, disorder, and future, October, 16, 2001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