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하다시피 87년 투쟁은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상징을 통해 대중의 무의식을 움직일 수 있었고 일정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형식적이거나 혹은 심지어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달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상징이 더 이상 대중의 무의식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포스트-민주주의적인 상황'이라는 것이 (시간의 편차는 있다고 할지라도) 반주변을 통해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제임스 페트라스의 말처럼, 각국에 민선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통치의 메커니즘은 일관된 폭력의 적용을 통한 정권수립 및 유지로부터 선거를 통한 정권수립 이후의 폭력의 적용이라는 방식으로 변모해왔으며, 이것이 대중들로 하여금 그들이 적어도 "절차적인 민주주의"를 확보했다는 환상을 품도록 만들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술책이 대중들을 속이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상징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타협/왜곡되어 제도화되었던 것은 역사를 통해 한두 번 일어난 일이 아니며, 대중들은 항상 다시 이러한 지배이데올로기의 보편성을 전도시킴으로써 평등-자유를 위한 새로운 투쟁에 나섰던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이후에는 항상 또 다른 민주주의의 '상징'이 가능했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 대중들은 다시 투쟁에 나서지 않는가? 신자유주의 하에서 대중들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평등하고 불안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오히려 정치로부터 점점 등을 돌리며, 자신에게 강제되는 경제적, 비경제적 곤란들을 스스로의 정치적 투쟁의 조직화를 통해서 돌파해 내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비가역적으로 포스트-정치적인 시대에 진입한 것처럼 보이며 더 이상의 정치(어쨌든 '대중정치')를 꿈꾸는 것은 오지도 않을 '고도를 기다리며' 아귀가 맞지 않는 말이나 서로 주고받는 실존주의적인 부조리극을 연기하는 일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진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우경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실리주의"가 문제라고 말하지만, 이러한 진단은 사실 동어반복적이다. 왜냐하면 실리주의가 곧 우경화며 그것은 결과일 뿐 원인에 대한 진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간다면, 우리는 이제 단순히 대중들의 '의지 없음'을 개탄하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질문은 더욱 더 당혹스러운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분명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조건들은 끊임없이 악화되고 있으며 노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정하다. 즉 문제의 실리주의란 주어진 "떡고물"이 다소간 풍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실리주의가 아니라, 도망칠 곳 없는 막다른 골목(그 너머에는 실업이나 계약직 등이 기다리고 있다)에 내몰릴 때 선택하게 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떡고물"은 여기서 절대적인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경쟁하는) 다른 노동자들에 대한 상대적인 "떡고물"로서만 존재한다. 신자유주의적인 노동분할정책(유연화!)의 발톱이 할퀴고 간 자리마다 굴러 떨어지면 다시 기어오르지 못할 깊은 골짜기가 패인다. 젖 먹던 힘을 다해 벼랑 끝에 매달린다. "노동귀족"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역을 간신히 관리하는 노동자들과 그 틈에 끼지 못해 이리 저리 철새처럼 이동하는 반(半)노동자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실리주의가 불가능해져야 하는 곳에서 오히려 실리주의가 자라 나오고 있다. 실리주의가 문제라고? 진정 그러한가? 다른 한 편, 점점 늘어만 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및 주변화된 노동, 성노동, 가사노동 사이를 전전해야 하는 여성들, 또 삼엄한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최소한의 노동권마저 모두 포기할 것을 강요당하면서 죽음과 같은 노동을 하루하루 견뎌 가는 이주 노동자들은 어떠한가? (산발적인 투쟁이 없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들 또한 싸움의 단일한 대오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왜 민주주의라는 상징은 그들을 집단적으로 호출하지 못하고 있는가? 여기서 우리들의 전형적인 대답은 전국적인 전선 조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다시 우리가 좀처럼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할 논리적인 순환이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선체를 조직하기 위해 우리가 참조하는 것은 '대중정치'인데, 대다수의 대중들은 싸움에 나서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즉, 대중정치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선 전선체가 필요하고 전선체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선 대중정치가 필요하다. 끝없는 순환, 끝없는 반복이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를 '포스트-민주주의적인 상황'으로 묘사한다면, 적어도 그것은 근원적인 방식으로 그렇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현재의 곤란들은 단순히 세련된 통치술의 등장 때문만이 아니며 어떤 전국적인 규모의 전선조직의 부재 때문만도 아니다. (그 두 가지 이유들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면서도) 나는 여기서 이러한 상황의 진정한 원인들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황의 현상학적 묘사의 관점 자체를 국내적인 차원으로부터 국제적인(진정 세계적인) 차원으로 전위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선 우리는 현재 보여지는 신자유주의적인 부르주아 계급의 대응, 그들의 계급투쟁이 완전히 새로운 문턱을 넘어서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신자유주의를 단지 자본축적의 위기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대응이라고 보는 것만으로는 여전히 불충분할 것 같다. 반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르주아 계급 스스로가 어떻게 자신이 만들어낸 착취 전략들에 의해 거꾸로 규정되며 심지어 '해체'되기 시작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이제까지 (적어도 최근까지) 모든 부르주아지는 민족-국가에 결합된 '국가부르주아지'였다. "국가장치들"이야말로 노동과정의 모든 곳에 침투하여 그들의 "지배"를 보장해온 물질성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알튀세르가 말하듯) 규범과 기술적 숙련을 위한 훈육을 위해서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삶 그 자체를 '살만한 것'으로 상상하도록 항상 조작하는 이러한 "국가장치들"의 개입 없이는 노동력이 아예 상품으로 등장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 국가는 (적어도 19세기 말 이래) 핵심적으로 민족-국가였고, 따라서 민족-국가는 자본의 외부가 아니라 그것의 절대적인 내부였다. 적어도 최근까지는 그랬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신자유주의가 핵심적으로 해체해 나가고 있는 것이 또한 이것이다. 결국 변하는 것은 단순히 착취를 조직했던 과거의 이러저러한 형태들이 아니라, 정확히 그러한 착취가 조직되는 단위로서 민족-국가 그 자체다. 그렇다면 역으로 민족-국가의 해체(상대화)의 분명한 결과가 국가부르주아지, 즉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 그 자체의 해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하다. 왜냐하면 세계 부르주아지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 부르주아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권력의 중심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알튀세르는 최후에 쓴 어떤 글에서 그 중심이 "전세계 투기꾼들의 지갑 속에 있는가?"라고 물었다. "가장 중요한" 나라도 "가장 제국주의적"인 나라도 그 중심이 아니다. 여기 퍼즐의 한 조각이 있다. 세계 권력의 중심이 부재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저항 자체가 모호해진다. 비록 민족-국가가 여전히 이러저러한 정세 하에서 투쟁의 집중적인 과녁으로 나타날 수는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더 이상 반-체제 운동의 성공을 위한 아르키메데스의 점이 될 수 없다(주지하다시피 브라질 페테당의 변질은 핵심적으로 신자유주의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반제의 측면에서 접근한다고 그 중심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G7 정상회담이나 세계은행 회의장 앞에서의 시위들이 있지만, 이는 점점 성과도 요점도 없는 싸움들로 변하고 실질적인 압력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결국 세계 부르주아지가 없다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도 없다는 것만이 지속적으로 확인된다. 더 나아가서 민족-국가의 해체가 민주주의의 요구 그 자체를 곤란하게 만들기 시작한다. 사회주의적인 대안이 파산한 것과 더불어 사민주의적인 모델이 위기에 빠지고 미국적 자유주의(계급타협적 케인즈주의)는 이미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실에서 입증된다. 혹자는 신자유주의를 자유주의의 최종적인 승리라고 간주하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관념은 신자유주의가 애초에 미국적 자유주의의 불가능성의 확인으로 등장했다는 점만 기억해도 그 기만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신자유주의는 또 다른 정치의 모델이 아니라 정확히 '반(反)정치'의 모델인 셈이다. 그렇다면 '세계화된 세계'의 현실적 출현 속에서 좌우를 막론한 정치의 모델들이 '공멸'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치적 모델들이 공히 전제하고 있던 것이 바로 민족-국가라는 단위였기 때문이다. 진정 맑스주의의 위기, 사민주의적 복지국가의 위기, 미국적 자유주의의 위기, 이 삼자 모두가 신자유주의의 출현이 가시화된 70년대에 동시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은 우리를 섬뜩하게 만드는 바가 있지 않은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사실 이야기는 거꾸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계급적대 자체가 자신의 일정한 형태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민족-국가의 경계 내에서였고, 그 만큼의 정치적 모델들로 드러났던 중심(동서를 막론하고)의 민주주의들이란 그러한 계급투쟁이 다소간 해결된 것의 결과(물론 모순은 결정적으로 "위성국들"이나 "제 3세계" 쪽을 향해 전위되었다)였을 뿐이다. 그런데 민족적 경계들이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계급적대 그 자체가 가시권에서 사라지기 시작한다. 자본은 한 지역 내에서 계급적 양보를 강제 당하기보다는 계급투쟁 그 자체를 포기하고 다른 지역의 노동력을 향해 '탈주'한다. 노동력 재생산 과정의 '생략'이 발생하고, "노동의 자본에 의한 실질적인 포섭"은 오직 제한된 일부 노동자들(소위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만 유효하도록 "구조조정"되며, 그로부터 밀려난 인구들에 대해서는 역으로 '노동의 자본에 의한 실질적인 파괴'가 조직된다. 극단적인 노동분할, 극단적인 유연화 속에서 더 이상 '착취'는 사치스러운 말이다. 반대로 여기서 문제는 착취 그 자체로부터의 '배제'인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배제를 "적대의 유령"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민주주의 혹은 평등-자유 테제가 변함없는 진리로 재등장할 수 있는 것이 언제나 지배이데올로기의 '전도' 효과를 통해서였다면, 지금 민주주의라는 상징이 더 이상 대중을 호출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세계적인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신자유주의란 더 이상 어떤 보편성에 입각한 헤게모니의 확보를 목표로 한다기보다는, 차라리 민주주의의 포기를 선언(따라서 유사-카스트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잉여권리"를 누리면서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부유한 국가의 부유한 사람들, 착취 가능한 인구로 분류되어 간신히 자신의 재생산을 유지해 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착취 불가능한 인구로 분류되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소비되고 마침내 쓰레기통에 내버려지는 "일회용 인간들"의 카스트들 말이다)하고 각국의 대중들에게 '세계화에 편입되거나 죽거나'의 길만을 열어놓은 채 양자택일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과거 냉전 당시에는 도망칠 다른 진영이라도 있었다면, 이제는 빠져나갈 어떤 구멍도 남아있지 않다. 신자유주의는 진정 헤겔적이라기 보다는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가 된다! 만일 극단적인 폭력의 한계상황이 바로 정치(혹은 정치의 주체)가 사라지는 상황이기도 하다면, 현재 우리가 포스트-민주주의적인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화는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한가? 아마도 이러한 극단적인 폭력에 맞서는 길을 우리가 찾지 못한다면 당분간은 그럴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반성을 통과하면서 단지 우울함만을 느낀다면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해야할 것 같다. 첫 째, 우리가 당면한 싸움의 성격은 단지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는 문제'를 훨씬 초과한다. 둘 째, 시민권의 근본적 개조를 통해 한 편으로 자본의 미친 탈주들을 막고, 다른 한 편으로 이동/이주하는 노동인구들의 정치적 권리 보장을 각국의 시민권 자체에 동시에 각인시켜야 한다. 세 째, 각종의 배제들을 정당화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비정규직의 철폐, 여성노동의 주변화 철폐, 각종 소수자들의 시민권으로부터의 배제의 철폐를 반드시 관철시켜야 한다. 시민들의 존엄을 국가에 재인식시켜야 하며 그것을 통해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화가 가능해지는 정치의 공간을 다시 한 번 열어 젖혀야 한다. 네 째, 이 모든 것을 위해서 우리는 '반(反)폭력'의 국제주의적인 연대를 실질적으로 구성해내야 한다. 국제주의적 연대 없는 고립된 투쟁들은 항상 다시 '세계화에 편입되거나 죽거나'의 양자택일에 몰리게 될 것이고, 따라서 민족주의는 그 어떤 형태로도 우리에게 불가능한 전략이며 그 자체로 반동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확실하게 인식해야 한다. 현재적인 '계급투쟁' 혹은 '계급 없는 투쟁'(발리바르)의 유일하게 효과적인 형태는 폭력과 배제에 반대하는 국제주의적인 다중(多衆)의 연대를 형성하는 투쟁일 수 있을 뿐이다. PSSP
1. 사회화 프로그램의 위기와 경제적·제도적 결과 바이마르 헌법이 실행되기도 전에 독일사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정부의 재무장관 루돌프 비셀(Rudolf Wissel)은 1919년 6월 당 대회에서 비통한 절망감에 젖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형식적인 정치적 민주주의의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우리는 다만 막스 폰 바덴(Max von Baden) 황제의 제국 정부가 이미 시작한 프로그램을 추진했을 뿐이다. 헌법을 제정했지만 심원한 대중적 참여는 없었고, 적합한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에 대중들의 암묵적 분노조차 진정시킬 수 없었다... 우리는 혁명을 좌우함으로써 새로운 정신으로 독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데 실패했다. 우리의 문화와 사회적 생활의 요체는 거의 변하지 않은 것 같다 ― 변화했더라도 개선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혁명의 성취가 전적으로 부정적인 성격만을 가지며, 한 개인의 군사적·관료적 지배가 또 다른 종류의 지배로 대체되었고, 정부의 성격은 낡은 정체의 그것과 실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부뿐만 아니라 의회(National Assembly)에 대한 역사의 심판이 아주 가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1) 사회화 프로그램의 파산에 대한 이러한 날카롭고도 솔직한 선언은 실패의 정치적 이유, 즉 제도들의 통치에 능동적인 대중적 참여가 결여됐다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사민주의의 자기비판은 문제의 급소인 당의 근본적인 경제주의와 대중적 기반, 사회화된 영역들 그리고 정치에 대한 치명적 망각에 집중되었다. 정치란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사이의 관계에 특유한 역동적 형태이자, 동시에 "보편적 지식"의 단편들을 주도적으로 개조함으로써―그것들이 주요한 생산적 힘인 한에서 ― 이행국면을 운영할 수 있는 최초의 인물, 즉 노동자 계급의 역량으로 이해된다. SPD의 방대하고 야심에 찬 경제재건 프로그램의 실패는 카우츠키, 빌브란트, 헤이만 등이 계획과 노동자 평의회(Arbeiterr te), 사회화, "산업 민주주의"를 조화시키기 위해 이끌었던 "사회화 위원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시도들 역시 종결시켰다. 2) 비셀의 마지막 제국 정부와의 비교는 매우 적절했다. 사실상, 수십 년 동안 독일 노동운동은 자신의 조직과 투쟁을 비스마르크 국가 구조에 순응시켜 왔고, 3) 11월 혁명 이후 새로운 구조도 전전(戰前)의 노조 구조의 모델에 근거를 두었다. 일례로 1919년 6월 뉘른베르크 노조 대회는 11월 협약(November Convention)의 합의를 전적으로 재가했다.4) 실제로 그것은 새로운 정치적 과정에 따라 노조와 고용주의 상관적인 기능이 조정될 "노동 공동체"(Arbeitsgemeinschaft)의 전형에 관한 연구와 기획을 장려함으로써 심화되었다. 뉘른베르크 대회의 결의안을 통해 노동자평의회는 인민위원 평의회가 차차 결정하고 사회화 위원회가 제안한 사회화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통제하는 임무를 할당받았다. 경제와 평의회를 나란히 통제한다는 노조와 사민주의의 이러한 기획은 시기적으로 매우 부적절했다.5) 헌법 실행 전야의 그것의 실패는 노동운동의 모든 구성 요소들을 재사고하는 국면에서 예고된 것이었다. 11월 혁명과 1월의 진압 사이에 특정한 유형의 국가가 발전했는데, 이 안에서 어떤 계급적 흔적을 인식하는 것은 어려웠다.6) 11월 운동의 명시적인 표현으로서 평의회들은 새로운 국가 ―사민주의 다수파의 "사회적 교리"에 의해 장악당한 바로 그 노동 조직들의 산물이었던―와 개별 고용주들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노동 공동체"에 반대했지만 생산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관리와 통제를 인수하기 위해 기다리면서 일시적으로 수용했고 이제는 그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된― 사이에 포획된 채 종말을 맞았다. 1919년 11월과 12월 사이에 사민주의자들은 낡은 에어푸르트 강령의 지령 뒤로 광범위하게 퇴각하면서 7) "무정부적 볼셰비키" 모델 ―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슬로건으로 표현된 ― 의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사회화 위원회의 실패 8) 로 인해 제 2인터내셔널의 사민주의적 전통과 레닌주의의 이론적, 조직적 모델 양자를 이론적, 실천적으로 재평가하는 순환이 생겨난다. 이것의 이유는 국제적인 경제적·정치적 상태(노동운동의 역사 문헌들이 이러한 복합적 국면을 설명하기 위해 종종 참조하는)보다는 바이마르 독일의 정치적·경제적 구조의 독특한 형태 속에서 규명되어야만 한다. 9) 너무 오랫동안 SPD는 종별적인 사회적-생산적 구조(빌헬름 독일 시대의)의 특징으로부터 정치적 범주를 도출했다. 집권 첫 주 동안, 당과 노조 그리고 평의회(몇몇 극단론자를 배제한)의 통일체가 부르주아적인 법적 규범― 휴고 프뤼스(Hugo Preuss)의 정교화를 거쳐 바이마르 헌법이 되었던 10) ―의 궤변적 통일체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사회화 기획의 실패는 노동운동의 세 가지 유기적 부분들의 통일성을 침식했고, 신생 공화국의 입법적 장치만이 남았다. 모든 시민들의 복리와 행복이라는 전통을 옹호하지는 않지만 "모든 사회적 부문에게 평등에 기초하여 정치적 삶에 참여할 권리, 국가 생산력의 경제적 발전에 따라 노동조건과 분배의 조절에 참여할 권리"를 용인하는 헌법을 통한 사민주의자들의 운영은 확실히 쉽지는 않았다. 11) 베버적인 입헌적 구조로 인해 노동자 평의회는 국가 안에서 스스로를 지배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없었는데 이는 복잡한 대의구조의 여타 요소들의 견제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다양한 계급들과 사회적 계층들 사이의 어떠한 안정적 동맹의 창출도 불가능하게 했다. 사실, 바이마르 헌정구조는 일시적이고 불확실한 동맹만이 가능하며, 이것조차 훨씬 더 불확실한 동맹으로 곧 대체되는 비례대표제에 근거한 권력관계의 강화 속에서 비위계적인 대의적 유기체들의 복합체였다. 그러므로 완전한 상태의 포럼은 발생하지 않았다. 노동자 투쟁(높은 수준의 의식성을 동반한)을 다른 계층의 "근로 인민", 특히 소농민과 결합시킬 수 있는 동맹의 정치에 대한 객관적 요구는 당면한 전술적 고려와 스스로가 다양한 계급 부문들의 대변자라고 선언하는 개인들 사이의 암묵적 타협으로 인해 약화되었다. 그러므로 군대와 SPD의 의회 그룹, 노조 총위원회가 그 안에서 제국이 무너졌던 "평의회 무정부상태"를 종결시키는 데 동의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918년 12월 6일에 있은 사민당 다수파(SPD), 독립 사민주의자(USPD), 그리고 평의회 사이의 신속한 합의만이 대(大)베를린 노동자 평의회 집행위원회에 대항한 군대의 첫 번째 폭동을 막을 수 있었다. 12) 그 결과, 그뢰머와 노스케는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단의 반란에서 소름끼치는 역할을 할 것이었다. 13) 대중적인 노조의 동원, 평의회 운동의 재개, 1920년 6월 6일 SPD의 선거 패배로부터 촉발된 1920년 3월 12일 카프 폭동의 실패는 공화국의 이러한 초기 국면을 마감하고 독일의 계급관계의 종별성을 드러냈다. 당 이론가들은 거의 이해할 수 없었고 정치 지도자들은 얼마간 만족스러워 했던 운동의 전위는 혁명 과정의 실천적 목표들과 조직적 요구를 단지 미미하게 통제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법률적 형식주의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 헌법은 1919년 6월 뉘른베르크 노조 평의회의 토론을 되풀이했다: 헤게모니 계급이 없는 상태에서 노조가 자신의 기능들을 조정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군대와 노조는 최초 사건들의 주역으로 출현했고, 전쟁 기간 동안 노동 규제 및 전시 생산에 관한 특별법 체제 하에서 부상했던 권력 대립을 지속했다. 14) 노조가 군 지도부의 반혁명 공세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은 운동의 강점과 약점을 동시에 드러냈다. 어쨌든 그것은 당, 노조, 평의회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격렬한 정치적·이론적 논쟁의 시기 동안의 공화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발전이며, 한편 군대는 주요한 부르주아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15) 카프폭동 전야에 공화국 법정이 심지어 11월 혁명기 동안 부르주아지들의 유일한 "비-군국주의" 의원이었던 중앙당 지도자 에르츠베르게(Erzberger) 조차 Dolchstoss-Legende(등에 꽂힌 칼 이론) 16) 에 희생시키는 동안, 스트레스만(Stresemann, 전(前)-민족주의자이자 인민당(Volkspartet) 지도자)과 비르흐(Wirth, 중앙당) 같은 인물들은 새로운 사회 현실에 적응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찍이 SPD와 동등한 처지에서 협력하고 경쟁할 수 있음을, 그리고 마침내는 그들을 대체하여 국가의 지도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음을 감지했던 자본의 명석한 대표자들로 등장했다. 그리하여 타협(동맹이라기보다는)의 변증법이 시작되며 이것의 결정적 요인은 사민주의의 헤게모니 무능력이다. 결코 공식적으로 시인된 적은 없었지만, 폭동 기도 이후 안정적인 제도적 협정을 위해 암묵적으로 합의의 지점들은 다음과 같았다: (1)생산과정 내 노동력에 대한 사민주의와 노조의 통제, (2)경제와 금융에 대한 자본주의적이고 독점적인 통제, (3)급속하고 합리적인 생산력 발전의 재개라는 시각에서 모든 사회화 프로그램의 포기(SPD에 따르면 다만 "보류"), (4)공장에서의 노동의 압력이 외부로 폭발한 경우에 한한 군대의 공적 생활에의 개입. 이 시점에서 경제 "합리화"의 단선적 계획이 시작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17) 그것은 노동계급의 주요 조직과 금융 및 산업자본 부문들(최대한 진보했다 할지라도)의 단순한 총계가 생산의 합리화를 낳을 것이라고 믿는 최근의 학자들의 오류의 전조라고 할 수 있다. 1920년 봄, 독일 자본주의의 현실은 장밋빛은 아니었다. ― 휴고 스틴스(Hugo Stinnes) 18) 의 표상 및 그가 운영한 공장, 광산, 호텔 그리고 금융 제도들의 복합체를 발전의 새로운 순환과 혼동하지 않는다면. 심지어 사민주의자들도 집중과 순환의 차이를 이해했다. 생산기구의 효율적 구조조정을 수행하지 못하는 독일 자본주의의 만성적 무능력은 결국 전쟁 채권이라는 성가신 문제로 요약됐다. 19) 황제 빌헬름 2세의 군사 정책은 다수의 중소 규모의 정밀기계산업과 20) 조선 및 중공업을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전쟁과 협상국의 몰수에도 불구하고 살아난 산업 기관들은 이 시점에서 완전히 이질적인 모습으로 재출현했다. 수출은 공장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고, 노동-생산성은 유일하게 당장 사용가능한 물적 자원이었다. 어떠한 급진적인 변형도 시도하지 않은 채 이런 유형의 자본과의 동맹을 수용하는 것은 당과 노조가 이미 사멸 중이었고 따라서 평의회 이데올로기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숙련" 노동 부문뿐만 아니라 매우 광범위한 노동계급 부문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것을 의미했다. 21) 전전(戰前) 경제적 수준과 수단을 재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 때, 22) (경제) 합리화에 관한 사민주의와 자본의 무능력은 대결과 투쟁의 새로운 장에서 실험할 역사적 기회를 상실했음을 의미했다. 부자연스러운 공존 속에서 각각의 계급들은 보다 높은 수준의 상호적 의식을 획득했고, 동시에 그들의 상관적인 정치적·제도적 형태들을 통해 경제적·사회적 과정에 대한 보편적 전망을 획득했다. 산업의 재전환, 계획, 화폐, 신용, 지대 등과 같은 경제적 범주들을 위해 새로운 의미들과 장소들이 발전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 비판이 경험적인 것에 관한 단순한 사회학으로 환원됨으로써(제 2인터의 교조적 판본에서처럼), 그것은 정치학과 이에 조응하는 혁명적 조직화 기획을 생산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낡은 정치경제학을 쇄신할 수도 없었다. 23) 1920년 6월 선거는 노동 운동에 내재한 이러한 일반적인 정치적, 심지어 역사적 난국으로 분명하게 기록되었다. 1919년 1월에 11,509,000의 득표를 기록했던 SPD는 이 선거에서 6,104,000 표를 얻는 데 그쳤고, 반면 USPD는 2,317,000 표에서 5,047,000 표로 성장했다. 두 당이 이제 거의 동등해졌다. 이 시점에서 당의 선택에 동화될 수 없었던 막스 아들러와 같은 과거 사민주의의 지도적 대표들뿐만 아니라 노동자 평의회의 이론가들과 투사들은 SPD가 기각한 사회화 개념을 영유하고 재검토했다. 2. 사회화와 평의회 이상의 역사-정치적 맥락 속에서, 평의회 운동의 두 국면이 식별될 수 있다. 1918년 11월 혁명부터 1920년 2월까지의 첫 번째 시기와 운동의 붕괴를 특징짓는 1923년 노동자 봉기의 패배로 끝난 두 번째 시기. 24) 평의회라는 논지에 관해 이론적으로 숙고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운동이 이들 국면에 나타났다. 이는 중부 유럽 노동운동의 두 명의 주요 지식인 칼 코르쉬와 막스 아들러의 저작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10월 혁명에 대한 상이한 평가들에도 불구하고, 코르쉬와 아들러의 전략적 모델 및 정치-이론적 제안은 처음에는 "레닌주의적이고 볼셰비키적인 개념화"에 대한 대안이라기보다는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변종들"로 나타났다. 25) 사실 두 사람은 1919-1920년이래 사회주의 운동 내 좌익적 조류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코르쉬는 도이미크(D umic)와 뮐러(Muller) 등 베를린 USPD의 성원들이 주도한 평의회 운동 진영의 "유기적 지식인"이었고, 아들러는 오스트리아 사민주의 좌익의 지도적 이론가였다. 26) 코르쉬와 아들러는 사회화의 두 측면을 검토했다. 정치-조직적 측면(사회화 기관의 문제)과 이론-정치적 측면(대중운동과 지도 사이의 관계, 역사적 주체로서 대중운동의 구성, 계급운동과 제도의 변증법, 그리고 국가의 문제). 사회화(1919-1920)에 관한 코르쉬의 저작은 27) 그 운동의 비극적 위대함과 치명적 한계를 동시에 표현한다. 코르쉬는 산업민주주의(이것은 많은 측면에서 베른슈타인을 연상시킨다)라는 주제와 직접행동에 관한 아나코-생디칼리즘 이데올로기로부터 강하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사민주의자들이 이론화하고 실천했던 권력의 단순한 행정적 관리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평의회 체계와 그것의 본질적으로 해방적인 함의를 주장한다. 이 대안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실천적 수단은 평의회로, 이것의 기능은 중앙 계획화와 기업에 대한 민주적 자주관리라는 상반적인 필수요건들을 포함해야 한다. 코르쉬는 이러한 종합을 "산업 자율성"이라는 정식으로 표현한다. "산업 자율성이란 모든 산업(여기서 '산업'은 농업을 포함한 모든 계획된 활동이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에서 생산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의 대표들이 이전의 사적 소유자나 관리 감독관을 대신하여 생산과정을 통제하는 간부가 될 때 존재한다. 동시에 이미 국가의 '사회 정책'이 생산수단의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대해 가했던 제한들은 더욱 발전하여 전체의 유효한 공공소유가 된다." 28) 코르쉬주의적 담론의 모순 속에서 운동의 실천적 요구에 따른 (있음직한) 조정을 찬양하거나 반-관료적이고 반-국가적인 인상과 같은 "급진적 유토피아적" 측면(로젠버그의 유명한 표현을 빌자면)을 비난하는 것은 모두 불공평할 것이다. 코르쉬의 평의회 테마는, 그것의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운동의 실천적 난국을 극복하려 한 불운한 이론적 시도였다. 그의 모델이 더 이상 존립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의 저작들은 이데올로기와 계급투쟁, 이론과 정치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의 극적인 복잡성을 표현했다. 국가-정치적 영역에서 경제("산업 자율성")에 이르는 혁명 전략의 탈구로 인해 평의회의 이중적 본질과 기능에 관한 개념은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민주의 전통에서 전형적인) 당-노조 사이의 균열을 직접적으로 극복하고자 했으나 결국 사회화 테마에 대한 실용주의적-노조주의적 제한에 그치고 말았다. 29) 이는 코르쉬의 분석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의 몇몇 지적들은 여전히 중요하다. 예를 들면 사회화와 국유화의 새로운 본질, 30) 사민주의적 지도부가 부과한 법인기업적 한계를 넘어 평의회 체계를 일반화할 필요성 같은 것들. 그러나 제안의 구체적 성과를 규정하려는 코르쉬의 시도는 막연한 "집합성"에 의한 "위로부터의 통제"와 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이들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통제" 사이의 중재(정치적 용어로 옮겨 놓으면 타협처럼 들리는)를 개괄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러한 형식적 해결은 코르쉬의 지적 형성의 뿌리인 법 이데올로기를 표상하는 "나쁜" 유토피아주의로 특징지어지며,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과잉 단순화한 결과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반-국가적 입장의 긴급성은,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혁명적 정치에 관한 비-유물론적 개념이자, 따라서 "구성"테마에 관한 여전히 환원론적이고 부분적 승인의 거울 반영이었다. 노동자 계급이 "대자 계급"으로 자기-구성되는 과정의 난맥 때문에 코르쉬는 "주체성이라는 객관적 요인"의 종별적 의의를 과소평가했고, 31) 역사적 현재의 절합된 복합성으로부터 그것이 출현하는 형태라는 문제를 회피했다. 그의 반-국가적 입장이 마르크스주의 국가 개념의 부재의 이면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평의회 내에서 정치와 경제의 미분화된 통일성은 의식의 형태 및 (그로부터 이어지는) 정치 분야의 과학적 토대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이라는 종별적 문제로서 구성의 문제를 회피했음을 반영했다. 그러므로 1919-1920 동안의 그의 전략적 개념은 전체로서 유럽 마르크스주의의 이율배반과 전체로서 노동운동의 정치적 후진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마감되었다. 코르쉬와 달리, 막스 아들러는 "평의회 전략"의 정치적 귀결과 관련된 연관관계를 포착한 듯 보였다. 그는 평의회와 국가의 관계를 논지로 삼으려 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볼셰비키 모델"에 대한 반복된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들러는 코르쉬보다 훨씬 더한 레닌주의의 대담자였다. 32) 아들러는 이 관계의 복잡성을 알았기 때문에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슬로건이 제안한 혁명 문제의 즉각적 해결책에 신중함을 보였다. 이 같은 슬로건은 단지 시작 중이었으며 주체성의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개입에 의해서만 완결될 수 있는 과정, 즉 사회화를 이미 성취된 것으로 전제함으로써 권력 획득의 전략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경제적이고 자주-관리적인 계기의 단순한 급진화는 사실상 사회화와 대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19년 Demokratie und R tesystem에 실린 아들러의 중요한 팜플렛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노동자 평의회 체계가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는 수단이기를 중단하고, 동일한 바로 이 사회의 이익들을 방어하기 위한 제도로 변화할 수 있는 위험이 존재한다." 33) 평의회 체계가 "진정한 사회화의 기관"이 되기 위해서 그것은 국가 및 제도라는 테마와 비판적으로 대결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카우츠키가 교조적인 경멸감으로 거부한 바 있던 레닌주의의 정치-전략적 도전을 수용해야만 했다. 아들러는 유럽에서의 혁명이 갖는 정치적 문제, 즉 대중운동과 제도들 간의 변증법을 이해했다. 출발점이자 도달점으로서 이 관계는 권력의 획득 이전과 이후의 사이에서 연속성을 구성하게 될 사회화 과정, 평의회가 통제하는 그 과정―사회주의적이고 혁명적인 의미에서의 프롤레타리아 의식성의 점진적인 발전에 의해 차례로 실체화된 연속성의 한 요소―을 포함했다. 그러나 이 요구를 충족시킬 실천적 수단을 말하는 것과 관련해서 아들러는 코르쉬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타협을 제시했다. 민주주의적-제도적 구조의 수준에서 그는 평의회와 국회의 조합을 제안했고, 사회화와 대중 정치화의 수준에서 그는 "진정한 집합적 의지"의 전제로서 노동자 코포러티즘을 극복할 "혁명적인 사회주의적 선전"을 34) 제안했다. "그러나 이것의 전제는, 부르주아 국가장치로부터 최대한의 이윤을 끌어내는 데 관여하는 모든 즉각적인 경제적 이익(그것의 방어는 대개 당의 의회 투쟁의 핵심이다)은 국가와 사회의 현재적 조건, 말하자면 계급분할을 극복하도록 할 사회 변형의 공통의 이익 뒷전으로 명백히 밀려난다는 것이다." 35) 따라서 코르쉬와 아들러 모두 물질적인 노동자 투쟁(그리고 이에 조응하는 자율적인 조직 형태)의 분석적 수준과 정치적-이론적인 전망 및 일반적 전략의 수준이 양분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코르쉬에게 이 이분법은 자주-관리의 경제적 수준과 반-국가의 정치적 귀결 사이의 괴리(그리고 이어지는 병렬)에서 나타났고, 아들러의 경우 한편으로 계급투쟁(국가의 문제 및 농민 문제에 동시에 연관된)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형태의 "사회학적"(경험적-경제적) 분석과, 다른 한편으로 보편주의적-초월적 해법 사이의 간극에서 나타났다. 36) 그러므로 이 둘은 분석적인 것과 설명의 변증법적-유기적 구성요소를 연결할 핵심, 즉 생산과 계급투쟁의 연관에 관한 분석을 결여했다. 이는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수준 모두에서 생산의 사회적 관계가 규정하는 구조적(또한 계급을 구성하는 개인들에게는 경험적) 정황으로부터 "의식 형태들"의 발생을 추론할 수 있게 해 줄 것이었다. 37) 아들러는 코르쉬보다 구성의 문제에 더 가까이 접근했다. 그가 복합적이고 문제의 소지가 있는 용어들(토대-상부구조 이분법의 교조적 지지와 "국가와 사회의 사회학적 통일성" 개념에 반대하며 제출한)로 국가의 문제를 제기했을 뿐 아니라 38), 평의회 개념을 "의식의 사회화" 개념과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유럽 노동운동 속에서의 신-칸트주의와 사민주의의 내부적 정치 투쟁의 맥락에서 신-칸트주의적 테마가 영유되고 활용되었던 다양한 방식의 문제를 접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한 더욱 지적인 접근조차 궁극적으로 특정한 정치적·역사기술적 전통의 가정들에서 연원하는 환원적 도식주의의 위험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점에서 평의회 운동에 대해 제기된 비판들은 그것의 모든 복합성과 풍부함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데올로기 수준일지라도 세부사항들과 내적 분화에 대한 종별적 분석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다. 카치아리는 좌익 사회주의자 쿠르트 아이스너(Kurt Eisner: 바바리아 혁명의 유명한 영웅, 1919년 살해됨)가 평의회에 대한 방어를 세기 초의 신칸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신의 해석과 어떻게 연결시켰는가를 지적했다. 39) 실제로, 이데올로기적 수준에서 노동운동에 관한 토론에 내재한 빌헬름 시대 생철학(Lebensphilosophie)은 아이스너의 신칸트주의 담론(그리고 Vorlander와 막스 아들러와 같은 다른 지식인들의 담론) 뿐만 아니라, 프리드리히 아들러의 마흐주의, 미헬스의 사회학적 분석, 사민주의 원리에 대한 룩셈부르크적 비판의 발전을 예고했다. 신-칸트주의적 사회주의는 스스로를 자본주의적 파편화와 소외로부터 인간 경험의 총체성을 복원하는 잠재적 구원자로 간주했다. 40) 그러나 당위(Sollen)로서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문화적 원천을 이렇게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카치아리는 적절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 이 문제는 신-칸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철학적 연원으로 했던 평의회 운동의 좌익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분파들 안에 현존한 주관적이고 이론적인 후진성에 대한 사후적(a posteriori) 강조로는 해결될 수 없다. 이 이데올로기는 사민주의의 이상적-전형적 표현으로 부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기― 1차 세계대전 훨씬 전 베른슈타인 논쟁에서 부상한 당의 정치적이고 "정신적인" 위기―에 대한 효과와 반작용이었다. 베른슈타인이 SPD 구조 안에 칸트주의를 항체 격으로 도입한 것은 정치적 작업(진행 중인 자본주의의 변형들에 일반적 개념과 당의 활동양식을 적응시키려는 객관적 요구가 지시한)이었다. 만약 그 항체를 완전한 "부르주아적" 요소로 일소하려고만 든다면, 그것의 실질적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카치아리(내지 그와 유사한 입장을 견지하는 이들)에 따르면, 제 3인터 식 역사기술의 상투어가 재생되어 우리가 정치적 허위 의식이라고들 부르는 것에 대립하는 하나의 전통인 체 한다. 반-결정론 논쟁의 정치적 의미는 스탈린주의적이고 포스트-스탈린주의적인 역사기술 속에서 잊혀져 왔다. 마르크스주의의 "주관주의적-활동주의적" 수용에 대해 반-개량주의적 함의를 부여하는 것은, 예를 들어 루카치와 코르쉬처럼, 1920년대에 단호하게 볼셰비키 편에 섰던 이론가들만의 특이한 무엇은 아니었다. 비록 레닌주의와 10월 혁명에 비판적이었던 전투적 지식인들이었다 하더라도 사민주의의 퇴행에 대해 전략적 대안을, 단순히 반역적 결과가 아니라 유럽의 노동자 계급 안에 존재했던 투쟁의 단일한(unitary) 잠재력을 그 형태 그대로(in its integrity) 재획득할 수 있는 "혁명적" 결과 41) 를 생산할 수 있는 대안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수정주의" 및 그것의 "반-유물론적 이데올로기"에 맞선 투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인) "올바른 노선"과 기회주의적이고/이거나 극단주의적인 좌우 편향 사이의 투쟁이라고 교조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42) 그것의 정치 계급적 근원의 견지에서 이해하고 1920년 투쟁의 수준의 관점에서 측정한다면, 이 "정통성"은 유럽 노동 운동 사건들 이면에 있던 복잡한 이론적·정치적 틀 속의 많은 요소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바이마르 공화국 후반기, 독일 공산당이 "볼셰비키화"하던 시기가 되어서야 등장했던 하나의 요소다. 그리고 독일 공산당의 "볼셰비키화"는 운동의 이론적, 조직적 붕괴에 뒤따랐다. 즉, 유럽에서 "볼셰비키화"는 공세의 물결이 아니라, 노동자 투쟁의 방어적 퇴각과 실천적 패배 속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43) 이런 문맥 속에서, 막스 아들러의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와 루카치의 특정한 철학적 테마 간에 평행성이 있음을 지적해 두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필연(M ssen)과 당위(Sollen) 간의 신-칸트주의적 이분법 ― 사회주의의 윤리적-초월적 이상 속에 있는 자본주의적 객관성 ― 은 루카치에게서 상품 세계의 양적 객관성(물상화)과 질적 차원의 전복적 폭발(계급 의식: 노동과 인간성 양자의 주체성) 간의 대립에 조응했다. 44) 만약 신-칸트주의적인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에 관계의 내재성이 전적으로 부재하다면, 루카치의 경우엔 다만 조정(posited)되어 있을 뿐 ― 하나의 필요조건으로 선취되어 있을 뿐 ― 해결되진 않았다: 그것에서 계급 의식이 출현하는 부정변증법은 순전히 선언적인 내재성을 갖는데, 왜냐하면 루카치가 그것을 대상의 종별성 안에 기초짓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즉 그가 그것의 발생(genesis)을 생산의 사회적 관계라는 ("역사적으로 종별적인") 지형 및 계급 구성이라는 한정된 수준으로부터 설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양으로서의 "상품 세계"라는 결국에 기술적인 시각과 단절하는 것, 그것에 내재적인 질적인-변증법적인 요소를 한정된 생산관계의 추상적 표현으로 포착하는 것은, 경제(학) 비판과 계급 조직화 이론 사이에서, 자본주의 객관성에 대한 분석과 주체성의 발생을 융합하는 기초를 놓는 것을 의미한다. 3. 당, 노조, 그리고 평의회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자 계급"으로 구성하는 역사적 과정에서, 대중정당과 전위정당이 일시적으로 공존한 사례(볼셰비키의 경험)는 일찍이 있었으나, 두 대중정당(사민당과 독립사민당)이 함께 있는 경우는 완전히 새로운 상황을 상징했다. 만일 "자본주의적 주도권의 진정한 중심이 새로운 노동조직, 사회화 강령 및 제도적 질서 사이의 연관에 있었던 것이라면,"45) 그것은 1920년의 봄에 이미 광범위하게 실패한 바 있다. 사회화 강령의 좌절46)과 제도적 안정화의 실패는 (일련의 군사적 폭동에 맞서 노조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면서) 노동의 재조직화 문제 및 이와 연관된 정치적 조직화라는 물음을 재출현시켰다. 실제로, 노조는 재정적으로 취약한 공장의 노동 계획을 통제하는 것보다 헌정질서를 수호하는 데 더 능숙했다. 이는 독일 노동조합 총연맹(ADGB), 에 소속된 "자유 노조"들이 1913년에 이미 진부해져 버린 범주들에 입각하여 조직되고 분할되었음을 고려할 때, 충분히 예견됐던 일이었다. 47) 그러므로 독립사민당 좌파와 독일공산당 안에서 평의회 이론은 이미 주어진 생산 과정 안에서가 아니라(사민주의적 기획), 노동자들의 정치적 성과에 따라 규정되는 발전 모델 안에서 계급 구성을 재구조화하는 계획에 긍정적인 정치적 성과를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획으로 재출현했다. 이 기획의 지도적 이론가였던 다우밍(D umig)에 따르자면, 계급은 노동 생산성의 핵심 지점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 평의회는 또한 조합들이 더 이상 실행할 수 없는 역할들, 임금 협약을 맺는 것뿐만 아니라 기능들 및 범주들을 재정의하는 것을 떠맡아야만 했다. 경제적 평의회와 정치적 평의회로 조직적으로 세분되어, 노동자 평의회는 경제를 재정비하는 데 필수적인 직업적 탈숙련을 계급적 통일성과 정치적 기동성으로 전화시켜야 했다 ― 이때 재조직화는 물론 위로부터의 계획의 원리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필요의 견지에서 판단된다. "당연히, 내가 말하는 사회화는 독점화랄지, 혹자가 노동자들에게 제안하는 '구성적 공장'을 창조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이런 유형의 실험은 이미 여러 번 시도된 바 있으나, 그 귀결은 노동자에게 어떤 것이었는가? 48)" 공장이 국가의 법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노동자들의 자기-조직적 권력을 받아들여야 한다. 49) 오직 평의회 체계만이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을 실현하고, 직접적인 대중 가담에 힘입어 사회주의로의 이행 국면을 개시할 수 있다. 50) "나는 항상 혁명이 당의 경계를 사라지게 한다고 주장해 왔다... 다시 말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당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활력있게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작업이 늦어질수록 자본주의는 뿌리를 내리고, 정치적으로 활동적이지 않은 수많은 노동자들은 다시금 낡은 자본주의 유기체에 서서히 적응해 갈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오랫동안 기다릴 수 없다... 이런 식으로 프롤레타리아트는 혼란에 빠지고, 심지어 더한 절망에 사로잡혀 우리 중 누구도 찬성할 수 없는 일들을 하게 될 것이다." 51) 산업 안에서 계급 재구성에 관한 다우밍의 가설은, 1월 베를린 봉기와 "뮌헨 소비에트 공화국"(1919년 3월)의 선포 사이의 시기 동안 파업과 거리 시위, 봉기적 기도가 잇달았고, 그후 브레멘, 뒤셀도르프, 베스트팔리아, 브라운슈바이크, 할렐 등지에서 군대의 가혹한 탄압이 뒤따랐음을 상기할 때,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그것은 (KPD의 좌익과 함께)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 당(KAPD)의 지도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혁명의 훈련"이 아니라, 자신들의 행동을 공장 문을 넘어 확장하려 했던 가장 혁명적인 노동자들에 대한 몰살에 가까웠다. 52) 그러므로 사회화와 평의회는 새로운 조직적 과정의 토대를 대표했고, 그 과정에서 당과 노조는 끊임없이 진화하는 정치-경제적 구조 안에서 그들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단이 "가장 신비한 평의회 이론가" 53) 라고 규정한 뮐러(R. M ller)는 사회화와 평의회 체계간에 명쾌한 평행성을 도출했다. 평의회가 아직 공산주의를 창조하지 못하면서(즉 부르주아적인 법적 규범에 의존하면서)도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국면을 도입하는 것처럼, 사회화는 아직 사회주의가 아니고 공산주의는 더욱 아니다. "사회화의 의의는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경제 권력을 박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직 정치 투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54) 노동자 계급이 생산 과정을 정치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명확할 때 생산력 발전의 결정적 계기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노동자 평의회는 경제적 수준에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회적 형태(공산주의)를 반드시 정치적으로 선취해야 한다. 이때 사회화는 기껏해야 자본주의 생산의 무정부성을 대신하여 소비자들의 요구(지역 평의회에서 대표되는)를 충족시키기 위해 조직된 생산을 대체할 수 있을 뿐이다. 개략적인 사고와 프루동주의적인 조야함이 뮐러의 주장과 전반적으로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계급을 생산 과정에 종속"시키지 않는 노동자 평의회 개념이 출현했다. 55) 노동자 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주체적 조직으로 특징지어지는 이행 국면의 일반적인 정치 기관으로 등장했다. 프롤레타리아적 의식성은 스스로가 착취의 대상임을 자각하는 것을 초월하여, 자본과 노동간의 역관계가 후자에 유리한 쪽으로 결정적으로 전환되는 구체적 과정의 주역으로 스스로를 파악하는 것이다. 경제학은 더 이상 경제 운영자가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객관적 법칙의 집합이 아니라 상쟁하는 계급들 간의 사회적 관계로서, 역사적으로 변화가능하고 따라서 정치적으로 통제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로부터 코르쉬의 반-국가주의와 매우 가까운 뮐러의 개략적인 반-의회주의적 입장이 어떤 역사적 근거를 갖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제(USPD의 지도자)와의 대립은 평의회와 의회의 공존이 가능한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는데, 이것은 순수하게 정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대립은 서로 다른 이론적 전제와 의회주의적 사법 체계와 자본주의적 생산이 뒤얽혀 결합되어 있다 ― 사회화가 대의적 평의회 체계와 결합된 것과 마찬가지로 확고하게, 그 이상은 아니더라도― 는 확신에 따라 발생했다. "위에서 적용된 사회화는, 사회화 위원회 시기 시도되었던 것으로, 다만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보존했을 뿐이다. 최상의 경우, 생산수단의 소유자를 차치하더라도, 국가 스스로가 노동력의 수령자로 등장하여 양자가 노동이 창출한 잉여가치를 분할한다."56) 평의회에 관한 뮐러의 "순수" 이론에서, 당과 노조는 이제 사멸해 가는 사회-경제적 구성체에 속하는 계급적 제도로서 소멸하는 경향이 있다. 57) 그러나 코르쉬와 마찬가지로 뮐러의 주장이 갖는 문제적인 특색은 그것이 정치적 곤란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노동운동 조직이 경제주의적이고 특정한 실천(때때로 단순한 의회주의적 도식주의나 간관료주의적 전술주의로 이해된 형식적이고 난해한 "정치" 개념에서 변형된) 같은 부담을 지고 있으므로, 혁명적-정치적 실천의 요구는 최초에는 공식 "정치"의 거부 및 자율적인 노동자 계급 조직에 대한 이론적 주목 같은 엄격한 양극화로 표현되었다. 이때 (노동자 계급 조직은) 그것들이 논리적이고 역사적으로 속해 있던 생산의 사회적 관계의 전체 구조로부터 절연되어 있고 외삽적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평의회 이론의 표현이 제 2인터의 개념적 뼈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지만, 여전히 전체로서의 운동의 요구에는 상당히 미달했다. 반면, 이 운동의 공산주의적 분파들도 정치적·조직적 문제에 대한 명료한 이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스파르타쿠스단원 E. Ludwig는 USPD와의 통합을 앞둔 KPD 4차 대회(1920년 4월 14-15일)에서 58) 당과 노조, 평의회 간의 외재적 절합을 제안했다. 이는 룩셈부르크적 사상과 볼셰비키적 경험을 이론적으로 올바르게 종합하려는 의도로 해석되었고, 미래의 당이 겪을 이질성과 모순에 대한 근심어린 예견에 지나지 않았다. KAPD가 설립한 AAU(일반 노동 조합)에서 손쉬운 목표물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프루동주의적인 쁘띠-부르주아 지식인들의 머리 속에서 태어난, 그 전망이 기껏 해야 노동자 자본주의의 형태로 귀결될 뿐인 편협하고 몽상적이고 종파적인" 조직으로 공격받았다. 59) 이 같은 "소수파적" 경험이 생겨나게끔 했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원인을 분석하기보다는, 루트비히는 "정치"와 "조직"의 추상적이고 도식적인 개념에 매달렸고 USPD의 평의회 이론가들조차 비판했다. 60) 뒤이어 노동자 평의회의 "이데올로기"가 초기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의 견지에서 비판받았다. 61) 권력 획득 및 이행 국면에서 소비에트의 정치적 지도를 위한 레닌의 복합적 전략은 독일에서는 매우 일그러진 주장을 낳았을 뿐이다. 1920년 당시 독일의 현실은 루트비히의 불모적인 노선보다 훨씬 복잡하여, 당의 다수파들은 정치 지도에서 끊임없는 중단과 갑작스런 전환을 대가로 치러야 했다. 62) 고립된 정치가들이나 당을 떠난 그룹들의 문건, 논설, 선언, 그리고 호소들은 일반적 후진성과 운동의 전반적인 정치적 요구들에 대한 자각에 직면하여 대안적인 정치 노선의 독특한 부재를 반영했다. 이는 복잡한 정치적 개성의 소유자인 폴 레비의 사례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1920년 초입에 독일의 정치 상황을 개괄적으로 분석했는데, 이는 그의 팜플렛 Unser Weg: Wider den Putschismus(이 팜플렛은 1921년 4월에 그가 공산당과 제 3인터를 떠났음을 증명한다)의 논리적이고 정치적인 전제라고 할 수 있다. 레비에 따르면 11월 혁명은 사민주의 지도자들 편에서의 어떤 "배신" 때문에 희생당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간단한 이유 때문인데, 즉 사민주의 지도자들은 다만 군사기구와 관련하여 굴종의 정책을 추종했을 뿐이며, 이는 1914년 8월 4일보다 훨씬 일찍 시작됐던 것이다. 63) "11월 혁명에서 다수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이 부르주아 혁명들에서 매번 해 왔던 역할을 재연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스스로의 목적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움직이는 세력으로서의 역할 말이다." 64) 그러므로 부르주아지뿐만 아니라 사민주의자들도 융커와의 연계를 끊을 수 없었다. 65) 사민주의와 부르주아지간의 동맹이 효율적이고 기능적인 자본주의 국가를 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독일 프롤레타리아 조직이 감내하기 어려운 함의들로 가득찬 쓰라린 깨달음, 즉 이들의 통일성이 깨졌던 것은 사민주의 지도자들의 "배신" 때문이 아니라 군사적 패배 때문이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계급 운동이 내적으로 분할되는 근원적 요인은 무엇인가? 전쟁은 모든 층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균등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모든 사회적 출신의 개인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체 프롤레타리아트 층도 전쟁의 영향을 면할 수 있었다. 당시는 자본가들뿐만 아니라 많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행복한 정세였다. 모든 범주의 노동자들은 군역을 면제받았고 전문 분야에 따라 고용되었다. 전시 생산의 막대한 발전 덕에 실업을 면할 수 있었고, 절대적인 고임금때문에 배고픔에서 벗어났다... 힌덴부르크와 뤼덴도르프는 자신들이 한 거래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66) 이것은 몇 년 후 제 3인터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스탈린적인 정치 안에서 모든 패배를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로 기능하게 될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인 "노동 귀족" 이론의 최신 판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특수한 역사적 관계에 대한 비-도덕주의적이고 비-이데올로기적인 분석이라 할 것이다. 전쟁이 그 최종 고리를 표상했던 노동자 계급과 독일 군수 산업의 동시 성장. 휴고 프뤼스(Hugo Preuss)는 스파르타쿠스단과 마찬가지로 착각했다. 스파르타쿠스단이 스스로 싸우고 있다고 믿었던 부르주아지 국가를 Preuss는 자신이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Preuss는 국제적 자본의 일가에 의존한 반면, 스파르타쿠스단은 사민주의 대중이 마침내 미몽으로부터 깨어나길 기다렸다. 그러나 "휴전의 조건은 평화주의와 선명하게 대립했다... 베르사이유 조약은 카우츠키와 그의 벗들의 모든 수다에 종지부를 찍었어야 했다." 67) 위대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독일을 위한 케인즈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68)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다만 실업과 절망만을 약속했다. 그러나 사민주의적-부르주아적 공화국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레비는 또한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계급으로 재통일될 수 있다는 스파르타쿠스단의 망상이 가망 없음을 폭로했다. 69) 그러나 그는 단일한 혁명적 노동자 당이라는 "위대한 관념"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당 동지들의 악화된 주관주의, 새로운 당을 세우기 위해 이미 당을 떠난 이들의 "전형적 행위", 그리고 운동의 실천적이고 이념적인 분열 앞에서, 레비는 위기와 노동자들의 자생성의 파국론적 상호의존 속에 잠재한 혁명적 모형을 재출현시키기 위해 룩셈부르크의 주장을 선별해내고자 했다. "얼핏 보기에 호의적인 경제 조건은" ― 마르크화의 평가절하로 인한 수출의 증가 ― "프롤레타리아에게 자본주의의 붕괴와 그들의 역사적 과업, 공산주의를 은폐했다." 70) 그러나 자본주의의 전성기는 끝장났다. "위기는 독일에서 폭발했다" 71) 그리고 착취 체계는 그것의 맨 얼굴을 프롤레타리아에게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레비의 글들이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의 장황한 이론적 종합은 운동 안에 널리 퍼진 불안을 반영했는데, 이는 당시까지 다양한 노동자 당들이 분열(및 연합)하는 복합적 연쇄 속에서 표현되어 왔다. 독일공산당의 하이델베르크의 분열에서부터(이는 KAPD의 창당을 초래하는 한편, 룩셈부르크주의 출신의 엄격한 스파르타쿠스단 노선이 폴 레비의 지도 하에 재결집하는 결과를 낳았다), 할렐 대회에서 USPD가 분열하면서 다우밍이 지도하는 좌익 다수파가 제 3인터 지지 및 스파르타쿠스단과의 통합 결정을 선언하기에 이르기까지. 이 분열로부터 1920년 12월에는 통일공산당(VKPD)이 출현했는데, 이들은 레비와 다우밍의 지도 아래 노동운동의 정체성의 위기를 긍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연 듯 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정치 조직의 타이밍은 계급 운동과 조응하지 않았다. 새로운 당은 혁명적 대중 정당의 뿌리가 아니라 다만 요구를 표현했다. 당은 장래를 예견하는 과학이 아니라 "미네르바의 부엉이", 즉 당면한 앞날의 긴급한 과업보다는 최근의 패배들을 반성할 뿐인 때를 놓친 현자였다. 조직적 자생주의가 봉기의 시절에 벌어진 정면 충돌의 와중에서 노동 계급이 상실한 위치를 더 이상 재획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조직은 너무 늦게 만들어졌다( 로젠베르그(Rosenberg)가 말했듯이). 독일 정치 상황에 관한 레비의 논설(1920년 11월)과 팜플렛 Unser Weg(1921년 4월)에 따르자면, 일련의 중대한 사건이 잇달았다: "공개 서한" 정책의 실패, 72) 라덱과의 충돌, 73) 중앙위원회에서 다우밍 및 제트킨과 함께 레비가 숙청된 것 74), 그리고 "3월 전투". 루트비히는 노동자 평의회를 설명하면서 다우밍과 뮐러가 베를린에 조직하려 했던 평의회 조직의 유형을, 튀링가(Thuringa)의 켐니츠(Chemnitz) 그리고 공산당에 의해 통제된 작소니(Saxony)의 모든 할레-만스필드(Halle-Mansfield) 지역의 "혁명적 평의회"의 긍정적 모델과 대립시켰다. 노동자 평의회가 카프 폭동에 도전하여 지역을 무장해제하는 데까지 이른 곳은 독일에서 이 지역뿐이었다. 오직 이곳에서만 노동자 평의회가 공장 밖에 있는 영토적 실체가 될 수 있었다. 75) 이 전장에서 라덱과 벨라 쿤에 정치적으로 가까웠던 새로운 당 중앙위원회(브랜들러, 탈하이머, 스토이커 (Stoeker), 프뢰리히(Fr lich))는 "타격 이론"을 실행하는 결정을 내렸다. 76) 여기에는 긴장 상황을 활용하자는 판단이 개입되어 있었는데, 이는 작소니(Saxony)주 당국 쪽에서 그 지역을 재무장화하기 위해 할레-만스필드(Halle-Mansfield) 지역의 민간인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법(중앙 독일의 모든 다른 지구에서 이미 강제되고 있던)을 적용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는 과정에서 유발되었다. 독일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 것으로 예견되었던 불씨, 곧 계급의 무장한 분파로서 당의 개입은 그 지역을 재탈환하려는 국가의 시도를 예기치 않게 도와준 것으로 밝혀졌다. 77) 공산주의 그룹들의 "봉기적" 행동은 이미 무의미하게 되어, 3월 31일의 참담한 퇴각 후엔 그 작전의 기술적 측면만이 비판받았을 뿐, 일반적인 정치적 문제는 도마에 오르지 않았다: 노동자 평의회와 당 간의 동질성이 완전히 부재했다는 점 말이다. 이는 "3월 전투"와 "타격 이론"이 공장 투쟁과 사회적 투쟁,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 간의 경계를 극복하는 방도라고 보았던 많은 이들에게는 애석한 결과였다. 78) 불과 한해 전만 하더라도 다우밍과 뮐러의 베를린 "경제 평의회"와 대립하면서 튀링가(Thuringa)와 작소니(Saxony)에 있는 노동자 평의회의 "혁명적 의식"을 치켜세웠던 루트비히의 무디고 종파적인 분석은, 이로써 당혹스러운 역사적 거부에 직면했다. 사실이 보여준 것은, "계급"과 "당" 같은 이데올로기적 통념을 가지고서 혁명적 시점을 측정하는 것, 그리하여 봉기적 직접성과 복합적인 정치 형태 간의 간극을 명료하게 지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위기와 제도 간의 관계 안에 있는 결정적 지점을 향해 노동자 투쟁을 지도하여 그것을 사회주의화할 수 있는 일반적인 대안 전략의 요구는, 노동자 계급의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을 당의 직접적 행동으로 역전시키려 했던 "3월 전투의" 개략적 시도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79) 이 같은 비판적 전제를 별도로 하자면, 레비의 팜플렛은 1920년의 초기 저작을 긴밀히 따르면서도 VKPD에 대한 희망을 포기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다르다. 1920년의 논설에서 레비는 전전(戰前)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보인 경이로운 계급 통일성의 뿌리에 독일의 군사주의 정치, 즉 세기 초부터 모든 생산적 장치들의 거대한 추진력이 되었던 프러시아 국가가 놓여 있음을 강조했다. 노동자 평의회는 빌헬름 2세 및 그를 따르는 장군들을 구래의 사민당으로 대체함으로써 통일성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 마지막 통합 제스쳐 이후 프롤레타리아트는 갈등하는 조직적 경험으로 분열되었는데, 그러면서도 각자가 전체 계급의 요구를 표현하는 체 했다. 만일 "Die politische Lage in Deutschland,"에서 레비가 자본주의의 위기를 자동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재통일을 가져올 최종 해결사(deus ex machina)로 여전히 믿고 있었다면, 폭동주의에 반대하는 팜플렛에서 통일적 요소는 "독일 민족 문제"에 놓여 있었다. 80) 레비가 볼 때 볼셰비키의 성공은 노동자들의 혁명적 기획을 농민 문제와 같은 광범위한 민족적 문제와 결합시킨 데 있었다. 같은 식으로 독일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을, 전쟁과 베르사이유 조약이 제기한 거대한 민족 문제의 결정의 배후에 있는 추동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어야 했다. 선동 및 이러한 문제의 정치적 활용은 융커나 우익들에게 내맡겨질 수 없었다. 민족적 볼셰비키 라우펜베르그(Laufenberg)와 볼펜하임(Wolfheim)은 정상 합의(아마도 협약을 위해 증오를 버리고 소비에트 연방에 접근하려 드는 반동적 장군들과의)를 통해 새로운 독일의 민족적(그리고 국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오류를 범했다. 81) 대신 필요했던 것은 독일 인민으로 하여금 VKPD가 소련과의 동맹을 지지한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코민테른(당이 그것의 한 분파였던)을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적 자율성을 수호하기 위한 사활적인 경제적·정치적 중요성이 있다는 근거에 따라서 말이다. 82) 당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적으로 재조직하고 새로운 민족적 동일성을 재구성하는 기획은 동시에 추진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양자는 충돌하여 노동자 계급에게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83) "민족 문제"와 노동자 계급이 민족적 삶의 정치적 주역의 수준까지 올라서야 한다는 명백한 요구를 강조하면서, 레비는 위기 및 제도적 불확실성의 상황에서 계급투쟁과 맞서는 방도에 관한 주장을 기각했다. 정치의 심급은 따라서 "자율적"인 것으로 표현되었는데, 그러나 생산 영역과 생산자들의 직접적 자기-조직화의 계기에서 볼 때 외삽적이라는 부정적 의미에서 그렇다. 일반적 정치 조직(당) 및 "민족적 길"의 테마는 실질적으로 중단됐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평의회와 사회화라는 전체 쟁점들을 고립시켰기 때문이다: 즉 노동 계급의 정치적 임무는 생산력의 서로 다른 부분들을 재구성하고 생산의 (사회적) 관계의 객관적 차원에 내재한 정치적 심급을 포착하는 종별적 임무를 피하는 일반성의 심급에서 실체화되었다. 복합성의 심급에도 불구하고 레비의 입장은 자신의 논쟁적 목표와 관련하여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결점을 보여 주었다. 물론 공산당의 폭동주의는, 심지어 "3월 전투"와도 독립적으로, 다른 사회 집단들과 연합하고 동맹하는 데 있어 분명한 무능을 보였다. 노동자 계급과 이들의 당은 완전한 고립 속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열띤 논쟁을 넘어 보자면, 레비와 폭동주의자들은 무언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성장을 재조직·촉진하고 이들의 투쟁을 일반화하려는 시도는 이같은 행동을 생산 과정, 공장의 현실, 공장 평의회(Betriebsr te)의 종별성과 연결시키지 못했다. 거기에는 그것들의 공장적 한계, "생산력주의" 내지 "노동자주의적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레비가 소묘한 "사회주의로의 민족적 길"이나 벨라 쿤의 "타격 이론"에서 공히 찾아볼 수 없는 치밀함과 계급 의식의 심급을 포함하고 있었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정책자문위원회에서 10월 초 발간한 "국가 비전과 전략", [2002 미래를 향한 희망과 도전]입니다. 노무현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개혁세력의 고민을 살필 수 있는 자료입니다. 한 번 읽어보길 권합니다.
이른바 '사회주의 정치세력화'와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 구축에 대하여 이 글은 최근 제기된 '사회주의 정치세력화' 및 '사회주의 독자 후보'의 기치를 규정하고 있는 전제를 비판하고 대선시기 전국적인 대중투쟁 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일 계획을 논하기 위해 쓰여졌다. 사회당이라는 특정 정치세력을 비판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사회주의 정치세력화'라는 기치가 지난 '잃어버린 10년'의 한계와 오류를 집약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한계와 오류에 관해서는 지난 10년을 살아 낸 어떤 정치세력도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하면, 문제는 고질적인 분열주의와 고립주의이다. 그러나 이는 사회당만의 문제가 아닐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치세력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난 10년간 민중들 사이에 일반화된 분열과 고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정치세력들의 분열과 고립은 오직 민중들의 분열과 고립을 극복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노동자 민중의 분열과 정치적 보편성의 해체 잘라 말하자. "오늘날 노동자 민중들은 왜 분열하거나 단결을 지속하지 못하는가?" 이 서늘한 물음을, 도덕적 비난이나 무기력한 승인으로 회피하지 말자. 그/녀들의 단결을 선험적으로 전제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도래할 장미빛 미래 따위로 여기면서 억압하지도 말자. 차라리 모든 정치적 사고 및 행위의 가장 긴급하고 중심적인 문제 혹은 과제로 받아들이자. 경제 위기로 인한 삶의 불안정화는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답일 테지만, 그러나 불충분한 대답이다. 왜냐하면 삶의 불안정화가 그것을 초래하는 원인에 맞서 민중들의 단결로 이어질 수도 있고, 이는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수많은 혁명들에 의해 실천적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요소가 있다. 특히 단결의 조건으로서 정치적 보편성 혹은 정치전선의 해체가 결정적 요인이라고 본다. 정치적 보편성은 개인들(이나 집단들)이 갖고 있는 (환원할 수 없는) 차이를 제거하지 않으면서도, 이들 사이의 교통이 가능할 수 있도록 각자의 정체성(identity, 동일성)을 상대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갈등을 없애지는 않지만 갈등이 적합하게 해결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한다. 또한 그것은 단결과 투쟁을 통해 쟁취된 보편적 권리가 지속될 수 있는 우애를 창출한다. 정치적 보편성이 민중의 단결 및 그것의 지속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같은 기능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정치적 보편성으로 들 수 있는 것은 80년대의 '반파쇼 민주주의'다. 그것은 군부독재정권의 비정통성과 폭압성에 맞선 민중들의 단결에 중요한 조건이 되었고, 87년 6월 항쟁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6월 항쟁에 뒤이은 7·8·9 노동자대투쟁 및 대선을 거치면서 반파쇼 민주주의는 명확한 계급적 분화를 겪고, 자유민주주의(혹은 개혁주의)와 민족/민중민주주의로 나뉘기에 이른다. 민족/민중민주주의는 반파쇼 민주주의의 성과를 급진적으로 영유하는 가운데, 1990년대 초반까지 활발하게 벌어졌던 노동자 민중들의 투쟁을 조직하는 데 기여한다. 하지만 1991년, 그것이 암묵적·실질적으로 동일시했던 정치적 보편성으로서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이를 전후하여 몰아친 정권의 탄압 속에서 민족/민중민주주의는 돌이킬 수 없는 쇠퇴의 길에 이르게 된다. 자유민주주의의 경우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에는 그리 강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다가 민족/민중민주주의가 쇠퇴하는 틈을 타 스스로 반파쇼 민주주의의 적자를 참칭하면서 양대 문민정권을 출범시킨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이들의 반민중성은 민중들에 의해 피와 눈물로 체험되었고, 이제 우리는 개혁세력의 붕괴 및 (노무현이 정권을 잡는다 해도 전혀 예외일 수 없는) 국가권력의 반동적 재편을 눈앞에 두고 있다. 시간의 흐름상 민족/민중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동시적 실패의 중간 즈음에 IMF 경제위기가 놓인다. IMF 이후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대중들은 국가나 사회로부터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음을 스스로 깨달았고 각자의 방식으로 행동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민족/민중민주주의의 해체로 인해 교통과 연대의 가능성이 축소된 상황에서 민중들의 단결과 조직적 대응은 여의치 않았다. 자유민주주의는 그 자신이 IMF의 진두지휘 하에 민생파탄 민주압살을 집행하는 주체가 되었으므로, 그것에 기대봤자 처절한 배신이 돌아올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들이 살아 남기 위해 분열을 택하거나 단결을 지속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민주노조운동을 비롯한 계급대중운동의 고질적 병폐로 제기되는 '실리주의'란 실상 이와 같은 (지도부에 국한되지 않는) 민중들의 일반적 상태를 지시하는 것이다. 각 주체들이 생존을 위한 경쟁에 내몰리면서 정치적 보편성의 해체는 더욱 심화된다. 노동자 대중들은 서로간에 교통과 연대를 강화하여 스스로의 역량을 증대하기 어려워지고 경쟁을 통해 생존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이들은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배타적 역량의 증대에 몰두한다. 이를 위해 각 주체들은 경쟁에 매진하여 특정한 정체성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정체성은 절대화·배타화된다. 자연히 정체성들의 갈등이 심화되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의 정치적 보편성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 시점이 되면 주체들의 상호파괴가 지배적 상태가 되고 관계(및 정치) 자체를 거부하고 불신하는 심각한 정치적 무기력화 및 냉소주의가 초래된다. 민중들이 집단적 실천을 통해 공동의 미래를 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한 상태. 이는 모든 정치의 무덤이다. '정체성의 정치'와 '사회주의 정치세력화' 민중들이 겪고 있는 분열과 정치적 무기력화는 정치세력들 안에서도 동일한 형태로 나타난다. 조합주의 내지 종파주의가 강화되는 한편으로 정치적 활력이 심각하게 축소되며, 양자는 서로를 강화하는 악순환을 형성한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정치세력들은 서로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는데, 이때 보편성을 새롭게 구성하기보다 정체성을 절대화하고 그에 의지하여 경쟁에서 이기려는 경향이 강화된다. 오늘날의 어떤 정치세력도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 중에서 특히 '사회주의 정치세력화'를 외치는 동지들은 이러한 경향이 봉착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 내놓은 [통일좌파] 문건을 통해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이들의 기본 노선이 '좌파'(최근에는 '사회주의')라는 정체성을 절대화하고 이에 입각하여 동맹과 배척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말하는 '좌파'라는 정체성의 보수적 성격이다. 그것은 정세에 대한 '현재적' 개입 방식과 효과에 의해 매번 상대화/재구성되는 역동적인 개념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설정된 특정한 '기원' 이래 불변의 정신으로 계승되는 '족보적'인 개념이다. 이는 "좌파(혹은 우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전혀 상이한 이해방식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한편에서는 이것을 해당 정세에 대한 판단 및 계획에 대한 물음으로 간주하고, 다른 편에서는 "누구는 옛날에 무슨 일을 했고, 누구는 어디에서 어떻게 갈라져 나온 것인가?" 라는 물음으로 이해한다. 현재적 입장이 아니라 특정한 과거의 공유 여부에 따라 규정되는 정체성. 이는 강한 의미에서 퇴행적인 것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92년 대선투쟁을 좌파(라는 정체성)의 기원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이러한 진술은 그들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사실을 폭로한다. 기실 92년 대선투쟁은 91년 5월 계투의 패배와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라는 양대 사건으로 민족/민중민주주의가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정치적 보편성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기 전 자신의 명예를 걸고 치룬 최후의 전투였다. 92년 대선투쟁은 새로운 보편성을 낳지 못했고, 이는 지난 10년간 지속된 전선의 상황을 통해 냉혹히 입증된다. 정치적 보편성이자 전략노선의 이름으로서 민족/민중민주주의는 좌파라는 아주 모호한 정체성으로만 명맥을 유지했고, 96-97 총파업과 IMF 경제위기 이전까지 활로를 찾지 못했음은 우리 모두가 체험한 사실이다. 요컨대 92년 대선투쟁이 좌파의 기원이라는 것 자체는 정확하나, 그것은 [통일좌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새로운 운동의 시작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기존의 정치적 보편성이 해체되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불명료한 정체성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잃어버린 10년'의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는 비단 좌파나 '사회주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하는 세력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92년 이후'의 모든 정치세력에게 공히 적용되는 한계로서, 예를 들어 자유민주주의와 민족/민중민주주의의 동시적 위기를 '진보주의'(혹은 진보-보수 전선)라는 정체성으로 착취한 NGO 운동이나, 진보정당-산별노조 양날개론을 제기한 정치세력화 운동 역시 이 문턱을 전혀 넘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지난 10년은 정치적 보편성의 해체 이후 새로운 보편성을 구성하지 못한 채 각자의 방식으로 더 혹은 덜 실패해 왔던 시기로 보아야 한다. 2002년 각 정치세력은 지난 10년의 한계를 공통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어느 입장을 선험적으로 특권화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보편성을 구성하기 위해 교통하고 연대해야 한다. 우리가 그동안 정치세력화 운동을 강하게 비판했던 이유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며, '사회주의 정치세력화'를 비판하는 것 역시 동일한 준거에 입각해 있다. 핵심적인 문제는 그런 태도가 새로운 정치적 보편성을 구성하기 위한 교통과 연대를 봉쇄한다는 데 있다. 최근 그들이 좌파 개념의 모호성을 사회주의 개념을 빌어 채우려 드는 것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사회주의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상대화함으로써 교통의 호조건을 만들기보다, 역으로 정체성에 종속되어 권위를 빌려주는 도구로 착취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는 그것의 역사적 맥락에서 분리되고 내용을 비워낸 일종의 '초월자' 혹은 그들의 독창적 표현에 따르자면 '술어적 개념'으로 변질되어, 반성과 전화의 노력이 닿을 수 없는 천상의 세계로 나아간다. 실상 그것의 철학적 심오함에 대해 알 수 없으나, 실천적으로 볼 때 그것은 실용주의와 종파주의라는 속류적인 목적에 복무한다. 자신들이 볼 때 좌파 내지 사회주의라는 자의적 경계 안에 있는 주체들에 대해서는 실용주의로, 경계 밖에 있는 주체들에 대해서는 근거가 불충분한 비난으로 일관하는 종파주의로 변신한다. 혹은 역으로 경계 안에 있는 주체들의 고민과 실천은 결국 다 스스로의 정체성(소위 '사회주의')으로 수렴될 것이고 그래야 한다는 종파주의로, 경계 밖에 있는 주체들은 어차피 다 똑같은 부류라는 판단에서 귀결되는 '유연한' 실용주의로 나타나기도 한다. 결국 이들에게 정체성(역량)의 상대화(축소)는 곧 역량(정체성)의 축소(상대화)고, 정체성(역량)의 절대화(확대)는 곧 역량(정체성)의 확대(절대화)이다. 이들이 정체성의 상대화를 전제하는 정치적 보편성 구성에 반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정체성의 정치를 통해서는 현재 우리가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오히려 위기를 심화시킬 뿐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위기의 구성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은 다수 운동진영이 내재하고 있는 문제이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정체성의 정치에 내재한 객관적 가능성이다. 조합주의이든, 사민주의이든, 민족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혹은 또다른 무엇이든 말이다. 각 주체들의 교통과 연대, 그 전제로서 기존의 정체성을 상대화하려는 사고와 실천만이 민중운동의 단결을 복원하고 대중투쟁전선을 구축하는 유일하게 가능한 길이다.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의 진실 현재의 분열상 및 그것의 반영이자 악화요소로서 '정체성의 정치'를 지양하고 새로운 정치적 보편성을 구성하는 데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 구축은 하나의 유력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를 지연하고 관리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전략이자 이데올로기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일반적 위기'를 하나의 전제로 명확히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 위기가 도래한 지금, 현 체제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전향적인 대안은 신자유주의다. 부르주아가 말하는 "대안은 없다!"는 구호에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하지만 가장 전향적인 대안조차 유례없는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민중들의 '억압할 수 없는 최저한도'를 수시로 침해하지 않는 한 욕된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지배계급 스스로 현재 위기의 깊이와 강도를 알기 때문에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고, 이는 그들을 더욱 난폭하게 만든다.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상처입은 이리가 더 사나운 법이다. 이로 인해 민중들은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끊임없이 내몰리고 동시에 야만적인 폭력에 노출된다. 이때 그들의 요구는 운동의 전성기에 비해 아주 소박한, 주로 생존에 관한 기본적인 요구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아마도 자본주의의 물질적 팽창기에는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었을지 모르나, 현재의 체제는 그것을 감당할 만한 여력을 대폭 상실하였다. 체제가 유지되는 한 '개량의 물적 토대'가 완전히 소멸되는 일은 없을 것이나, 그것이 심각하게 취약해진 것은 객관적 현실이다. 이같은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과 체제의 심장부에 내장된 모순의 지양(이행) 사이의 거리를 무한히 가깝게 만들고 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을 유효하게 진행하는 것과 체제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갖는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다. '사회주의 정치세력화'를 주창하는 이들은 '반자본주의' 내지 소위 '사회주의' 기치를 중심으로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과 별개의 전선을 구축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전혀 부적합한 대응으로서 정체성의 정치를 퇴행적으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현재 '신자유주의 반대'를 말하지 않는 정치세력은 아무도 없다. 소위 '조합주의'이든, '사민주의'이든, '민족주의'이든, 자칭 '사회주의'든 말이다. 동시에 적합한 투쟁을 조직하는 세력 역시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시 '체제의 모순을 어떻게 전화시킬 것인가' 라는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바, 최소한 지난 10년 동안 완전히 억압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적합하게 다루지 못하고서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관건은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을 광범위하게 구축하는 가운데 현 체제의 일반적 위기를 전화시키는 문제를 전 민중의 과제로 제기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각 운동세력과 계급 대중들이 이 문제를 광범위하게 합의하지 않는다 해도, 투쟁의 과정에서 문제의 회피불가능성을 인식하고, 기존의 정치적 입장을 '실천적으로 배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올 것이다. 이렇듯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의 구축은 정세적으로 기존의 정체성을 전반적으로 상대화하고 새로운 정치적 보편성을 구성할 수 있는 유력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특히 IMF-DJ 5년 동안 계급 대중의 단결 없이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울 수 없음을 피눈물로 배워야 했다. 하물며 개혁세력이 붕괴하면서 김대중 정권보다 훨씬 더 반동적인 방식으로 권력이 재편되려 하는 지금, 전선 구축 없이 2003년을 맞게 된다면 '잃어버린 10년'을 넘어서려는 그동안의 필사적인 노력은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것이 누구의 주관적 상황도 고려해 주지 않는 정세의 냉혹함이 아니던가.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 구축의 주요 계기로 공동투쟁본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 현재 반제-반신자유주의 기치 하에 노동해방 대선실천단이 발족했고, 공투본 결성 논의가 진행 중이다. 우리는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 구축에 있어 이 계기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 가지 이유를 말하겠다. 우선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에 뼈와 살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선 구축은 계급대중들의 구체적인 투쟁과 결합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하반기 투쟁의 핵심 동력은 WTO에 반대하는 농민 투쟁이다. 단언컨대 '이 투쟁에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 없이 하반기 투쟁을 힘있게 전개할 수 없으며, 하반기 투쟁을 준비하는 대중운동과의 결합을 사고하지 못하면서 전선을 구축하겠다는 것은 몽상일 뿐이다. 우리는 이 투쟁을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촉진하는 무역기구인 WTO에 대한 반대, 이를 주도적으로 집행할 민주당과 한나라당, 재계를 아우르는 신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단호한 반대로 조직하고, 노동자·농민·여성을 단일한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는 계기로 만들어 내자. 둘째,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 구축의 문제의식을 확산시키기 위한 논쟁의 계기로서 대선 국면을 활용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서는 특히 '민중경선'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우려 지점에 대해서만 간략히 언급할 것이다. 혹자는 민중경선이 범추와 같은 상층 논의에 머물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표한다. 누구는 민주노동당과 다수 노동조합원들이 보이고 있는 실리적인 태도가 공투본의 투쟁을 가로막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민중경선은 정확히 그것에 대한 비판으로서 제기된 것이다. 우리는 상층의 협의를 통한 후보단일화를 비판하며, 더 나아가 후보전술 자체는 기본적으로 부차적이라고 생각한다. 더 중요한 것은 대중들에게 논쟁과 토론의 권리를 되돌려 주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의 구축 및 급진화를 동시에 꾀하는 것이다. 물론 공투본은 현재 운동의 지형을 전변시키지는 못할지라도, 미약하나마 2002년 하반기 투쟁의 조건을 바꾸어내고, 대중투쟁을 일구어가는 계획으로서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계기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계급대중들을 견인하지 않는다면 언제 대중적 영향력을 확장할 것인가? 우리 모두는 '정체성의 정치'의 관성에서 과감히 벗어나 운동진영의 입장을 보편화하는 체험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이 과연 활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고, 이것은 사민주의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고 본다. 사민주의는 물론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어떤 비판의 형태를 취할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한국사회에서 사민주의는 전통도 깊지 않고, 그것의 논리 역시 일관되지 않다. 그것이 세력화하는 것은 한편으로 이전의 정치적 보편성이 해체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편으로 사민주의 전통의 부재로 인해 아직 그것의 한계가 대중적으로 폭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민주의에 대한 적합한 비판은 한편으로 새로운 정치적 보편성을 구축해 내고, 다른 편으로 사민주의의 불가능성을 각각의 구체적 계기 속에서 폭로해 내는 것이다. 오직 이 과정에서만 사민주의는 분할·급진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적합한 형태는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 안에서의 사상·실천투쟁을 전개하는 것이다. 우리는 민중경선이라는 한 번의 계기를 통해 이같은 중대한 과제가 완료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계기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으며, 우리는 가능한 모든 계기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대선 시기를 넋 놓고 보낸 후 2003년 반동적 권력 재편을 맞이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격이다. 전선 구축 없이 새 정권을 맞았다가 운동의 성과를 몇 년 이상 후퇴시킨 것은 김대중 정권 때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던가. 사실 이 점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새로운 정권이 출범하기까지 100일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사이에 대선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대선에 개입하는 것은 세 살짜리 어린애도 믿지 않는 장밋빛 미래를 유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2003년 이후 어떻게 싸워갈 것인가를 토론하고 공유하기 위해서이다. 즉 민중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투쟁의 중요성을 광범위하게 알리고 투쟁의 과제를 공유하는 것이 관건이지, 이전에 전개해 왔던 투쟁을 이번에도 보편화시키지 못한 채 몇 달 더 끌고 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대선은 '반신자유주의 정치강령'을 토론하고 공유하는 데 보다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줄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활용해야 한다. SO-LA
거기에는 이 짧은 지면에서 모두 다룰 수 없는 많은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만 한 가지만 지적하려 한다. 즉 '정치세력화' 논의의 후과라는 측면. 9월 동안 진행되었던 논의가 왜곡된 것은 한편으로 90년대 정치세력화 논의를 무비판적으로 연장하려는 입장과, 다른 편으로 정치세력화 논의의 '진짜 적자'는 자신들(주로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칭하는)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 서로 간의 거울유희 속에서 정치세력화 논의가 가지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억압했기 때문 아닐까? 정치세력화라는 형식을 좀더 '현실적'이거나 좀더 '급진적'인 내용으로 채울 것인가 에 대한 토론이 과열될 뿐, (정치세력화라는) 형식이 운동의 내용을 어떤 식으로 규정하는지 혹은 심지어 어떻게 억압하는지 에 대해서는 아예 비사고로 일관하였기 때문 아닐까? 우리는 그동안 정치세력화 논의가 갖는 가장 큰 문제점이, 이미 구성되고 통일된 대중들을 선험적으로 전제하는 데 있다고 지적해 왔다. 이에 따라 정치세력화는 대중들의 요구를 '정치적' 영역에서 충실히 '표현'하는 것이거나, 대중들의 열망을 왜곡하는 '개량적' 지도부를 '급진적' 지도부로 대체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거기에는 현재 대중들이 처한 조건, 그/녀들의 상태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나 개입의 노력이 없다. "왜 대중들은 단결을 지속하지 못하는가?"라는 가장 서늘한 물음과 대결하는 인내가 없다. 자의적으로 재단된 대중들의 의견을 근거로 서로를 비난하는 동안 정작 대중들은 철저히 소외된다. 여기에 지배정치와의 차별성이란 전혀 없다. 이상의 논의를 반성하면서 우리는 정세와 대중이 대선을 포함한 모든 논의와 계획의 중심에 놓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번 특집은 그런 취지에서 풍부하게 마련하였다
대선 투쟁전략 수립의 논점 정치위기 비판의 관점 확보와 전선복구 : 대선 투쟁전략 수립의 논점 2002년 대선투쟁은 누구나 인정하듯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5년을 심판하고 경제위기를 비판하는 의의를 갖는다. 또한 IMF-DJ 체제의 성립 이래 계속된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연장이기도 하다. 이는 현재 대선투쟁을 규정하는 엄중한 제약을 사고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왜냐하면 지난 5년 간의 반신자유주의 투쟁은 곧 거듭되는 노동패배의 역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남한자본주의의 (종속적) 발전모델 자체의 파산이라는, 지배세력의 유례없이 심원한 실패와 위기가 동시에 피지배계급의 패배를 동반한다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지배계급의 위기를 지나치게 크게 본 나머지 적을 가벼이 여긴 '경적(輕敵)의 우(愚)'인가? 아니면 어느 때보다 광범위하고 폭발적이었던 기층대중의 투쟁을 좀더 좌익적이고 전투적으로 조직하지 못한 투쟁 지도부의 책임인가? 문제의 원인을 경적(輕敵)의 잘못에서 찾는 이들은 자연히 좀더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명분 아래 현실적인 개량의 추구와 사민주의적 지향을 노골화하고 있으며, 그 반대편엔 반개량주의·반사민주의에 입각한 카운터 대안으로서의 좌파결집을 사고하는 이들이 서 있다. 하지만 이같은 고색창연한 좌우대립에도 불구하고(혹은 바로 그 때문에) 양자 모두 지배계급의 실패가 자동적으로 피지배계급의 기회로 이어질 것이라는 얼마간 기계론적인 낙관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이다. 이 때문에 위기 자체와 대중이데올로기에 대한 구체적이고 비판적인 분석은 소홀하기 십상이고, 기껏해야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 뿐이다. 냉정히 볼 때 사태는 우파의 사민주의적 후퇴마저 일정한 성과를 장담하기 어려울만큼 비관적이고, 좌파의 결집만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복잡성을 띠고 있다. 하지만 민중운동진영의 이번 2002년 대선 투쟁전략 역시 이같은 거울놀이를 되풀이하면서, 사민주의적 정당(후보)이냐 사회주의 정당(후보)이냐 혹은 선거투쟁인가 대중투쟁인가 따위의 대립을 증식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2002년 대선을 정치위기 비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번 대선투쟁을 통해 보수정치에 대당(couple)하는 진보정치의 세력화가 아닌 전선복구와 새로운 민중의 연합과 연대를 이뤄내야 함을 주장할 것이다. 정치위기 비판의 관점을 세울 것에 대하여 자본주의는 민족국가형태와 정치/경제(국가/시민사회)의 분리라는 주요한 두 가지 계기 없이 자신의 신민(臣民)을 재생산할 수 없다. 민족국가형태가 소유없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민족(국가)의 틀로 통합시키는 계기라면, 정치와 경제의 분리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와 같은 계기들과 함께 작동함으로써 민족국가(지배정치)로 통합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를 봉쇄한다. 전쟁과 경제위기는 이같은 지배정치 재생산 매커니즘에 내재된 결정적 결함이다. 특히 현재와 같은 구조적 경제위기(공황) 시기에 (지배)정치는 착취체제의 내일을 책임질 민족적 사회적 통합을 더 이상 보장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게 된다. IMF경제공황으로부터 금융세계화로 편입되기 시작한 한국정치는 이같은 근본적인 위기 국면에 처해 있는 전형적 사례라 할 것이다. 지배계급은 이제껏 남한 자본주의를 지탱해 온 종속적인 반공-발전모델과 신식민지 파시즘의 붕괴 이후 달리 새로운 발전비젼을 제시하지 못한 채, 경제적 통제권과 자율성을 침식당한 상태로 금융세계화에 따른 미봉적인 위기관리책에만 의존하고 있다. 대중은 이전까지의 정치 불신에 더하여, 금융세계화로의 통합과정에서 되려 심화된 민생파탄, 민주압살과 끊이지 않는 부정부패의 결과에 분노하면서, 정치 자체의 혐오에까지 이르게 된다. 조금이라도 진보적으로 채색된 안경을 쓰고 본다면, 너무나 명백하고 거대한 계급투쟁전선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배계급의 통치불가능성, 국제관계의 불안정성, 그 자신의 포퓰리즘(인민주의)의 모순들에 봉착하는 경향 등... 하지만, 이같은 위기는 동시에 노동자운동의 제도적 형태 즉 조직화한 계급투쟁의 해체와 탈(脫)정당화(正當化)라는 부정적 성공을 내포한다. 경제위기는 노동자계급의 재구성이나 계급투쟁전선의 복구로 저절로 이어지기는커녕, 지리적 장벽뿐 아니라 인종적, 세대적, 성적 장벽들로써 프롤레타리아화의 차별적 측면을 더욱 근원적으로 분리하는 것으로 귀착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지배세력의 패배가 곧 피지배세력의 승리라는 거울쌍을 이루지는 않는다. 이는 우리나라에 앞서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종속적 발전전략의 파탄과 민간화를 경험한 뒤에 급작스러운 세계경제 위기에 빠져들어 파괴적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겪었던 남미의 대다수 나라들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되는 바이다. 이들 나라의 구조조정을 책임졌던 집권세력들은 하나같이 반복되는 경제위기와 부패로 인해 몰락했고, 새로운 집권세력들 역시 권좌에 앉는 그날로 전임자가 걸었던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그렇지만 이같은 지배세력들의 반복된 교체와 몰락의 전과정 속에서 노동자 민중운동진영의 패배 또한 지속되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금은 몰락한 DJ정권의 무덤 위에서 춤추고 있는 다음 무덤의 주인공인 이회창과 함께 DJ 몰락의 과실을 다툴 때가 아니다. 우리가 맞서야 할 현실이 지배정치의 통치불가능으로부터 파생되는 사회적 해체 경향인 만큼,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역시 지배정치 위기의 반사이득을 어떻게 얼마만큼 추수할 것이냐 와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IMF 위기 이후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대중들은 국가나 사회로부터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음을 스스로 꺠닫고 다양한 직접행동에 나섰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한편으로는 스스로 행동하는 주체화의 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적 이상의 해체로 인해 교통과 연대의 가능성이 축소된 상황에서 더욱 심화되는 삶의 위기를 겪음으로써 심한 불안감과 공포에 휩싸인 정념적이고 수동적인 상태로 빠져들기도 한다. 이렇게 됐을 때 대중은 과학적 인식에 기반한 집단적 문제해결 방식보다는 실리적인 생존게임에 몰두하거나 무너진 과거의 어떤 이상(중산층적 삶, 혹은 발전주의적 대망)에 집착하게 된다. 대중이 당면한 문제에 대한 적합한 인식과 집단적인 문제해결방식을 찾지 못해 공통의 '집단적 미래'를 상실해 가는 상황. 이같은 위험이야말로 이번 대선투쟁을 통해 우리가 가장 시급히 타개해 나가야 할 현실이다. 정치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은 정확히 이같은 위험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우리가 마주치게 될 최대의 난관은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일 것이다. 대중은 더 이상 정치와 정치인을 믿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는 곧 지배정치이므로, 이는 지배정치의 위기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배정치의 위기는 그것이 왜곡된 형태로나마 포섭하려 했던 정치적 보편성의 해체를 항상 동반하고, 이는 정치 일반에 대한 냉소로 이어진다. 지배정치의 위기가 진보정치의 해방으로 (약간의 굴곡은 있더라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라는 진보주의적인 낙관은 냉소주의가 모든 정치의 무덤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과소평가한다. "나는 당신이 우리의 삶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지배정치의 무능과 부패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분노한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정치인들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신도 '어쨌거나' 정치인이 아닌가?(따라서 당신도 환멸의 대상일 뿐이다)" 이렇듯 냉소주의에 빠진 대중은 지배정치의 헛된 약속이나 공염불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진보진영의 어떤 폭로나 선동에도 쉽게 감동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후자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기고, 자신에게 현실적인 실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보다 타락했지만 정확히 그 이유 때문에 더 '유능한' 정치인을 선호한다. 진보정치의 가장 대중적인 버젼이라고 할 수 있는 개혁적 국민정당의 386들이 표방하는 '감동과 희망의 정치'란 이 높은 문턱에 내걸린 진정한 넌센스일 것이다. 이러한 냉소주의는 몇몇 유별한 개인들의 품성 따위가 아니라 대중들의 객관적인 삶의 조건에 뿌리박고 있다는 점에서 극히 상대하기 곤란할 뿐만 아니라 아주 일반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운동의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되고 있는 '실리주의'는 지도부의 타락으로 한정할 수 없는 대중적 냉소주의와 연관되어 있다(가장 완화된 형태의 실리주의-냉소주의는 "나는 당신의 말이 모두 옳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와 다른 존재로 느껴지고, 따라서 나는 당신과 함께 할 수 없다."의 논리를 취한다). 즉 이것이 바로 대중의 상태이고, 우리의 출발점인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매우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고, 우리 역시 완전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여기에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원칙, 즉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비대칭성'만을 다룰 것이다. 애초에 프롤레타리아 정치란 지배정치와 같은 형식에 다른 내용을 지닌 무엇이 아니며, 그렇다고 그것과 전혀 별개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지배정치에 의해 억압되어 그 안에 '비정치'의 영역으로 폐쇄되어 있으나, '지배정치 비판'과 결합한 대중정치라는 형상으로 지배정치를 내·외부로부터 파열시키면서 항상 다시 회귀하는 대중의 '봉기적 보편성'이다. 이는 정치에 대한 혐오 그 자체에 편승하는 반(反)정치나 대중의 탈정치적 이탈에 영합하는 입장과 엄격히 구별되면서도, 지배정치의 형상을 전화시키지 못하고 그것에 포섭되거나 (특히 현 정세에서) 지배정치의 위기 속에서 그것과 공명·공멸하는 진보정치 류의 입장과도 무한히 멀다. 이때 관건이 되는 것은 비록 허구적으로나마 봉기적 보편성을 포섭해 냈던 지배정치가 더 이상 그것을 감당할 수 없거나 심지어 '억압할 수 없는 최저한도', 예컨대 생존이나 민주주의, 평등-자유의 원초적 부정으로까지 내몰고 있는 구체적인 타락 지점을 비판·가격함으로써, 기존의 지배정치로부터 봉기적 보편성을 해방시키고 그에 근거하여 운동을 재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은,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을 근대적인 민족국가형태를 매개로 포섭하여 형성된 민족적 시민('국민')이라는 주체성, 그리고 그에 기반하여 조직된 국가 및 사회가 지배정치의 통치가능성을 넘어 해체 지경에까지 이르면서 대중을 압살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비판과 투쟁을 조직하여 민중의 민주주의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경험과도 부합한다. 돌이켜 보면 한국정치는 발전주의와 반공주의, 그리고 종속적 발전독재정권이 장악한 억압적 국가기구의 무력통치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이로 인해 (대중)정치는 줄곳 과소결정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역으로 (정권의 비정통성과 폭압성, 국가=정치동일성으로 대표되는) 이 '정치의 과소결정요인들'은 경제위기로 인한 대중의 궁핍화 및 반독재민주화 전선이라는 보편적 상징과 결합할 때에는 노동자 민중의 '역설적인 정치'로서의 '대중정치'를 가능케 하는 '과잉결정요인들'로 작동하였다. 하지만 현재는 군사정권이 민간정권으로 바뀌고 민주노조와 진보정당이 건설되면서 반독재민주화 전선이 소멸하고, IMF 경제위기라는 충격적 사건으로 인해 삶의 문제를 얼마간 주어진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한국정치는 다시 과소결정 상태로 회귀하였다. 또한 개발독재의 경우 '국가'가 적어도 상상적으로는 모든 책임의 원인으로 간주되었던 것과 달리, 신자유주의로 이행하면서 중립적이고 익명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시장'의 원리가 부각되면서 책임의 주체가 상대적으로 불분명해지고 사회의 통합력 역시 약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현 시기 우리 운동에게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은 이미 허구적 신화가 되어 버린 기존 운동의 (정치적) 성과들의 이합집산으로 정치적 계획을 대체함으로써 반복되어 온 (정세에 대한) 관성적인 정치적 무기력을 걷어내는 것, 지배정치의 위기로 인해 형성된 새로운 국면에 맞게 '운동성' 자체를 새롭게 구성하고 그 조건으로 실제적인 전선 형성을 이루는 것이 아니겠는가! 역사의 '나쁜 방향'과 대결하고자 하는 강인한 사고 및 전략과 이론 없는 대중운동의 미확정적인 계기들로부터의 재출발이야말로 우리의 임무인 것이다. 의회정치의 전화와 대중정치 오늘날 구조공황의 지속에 따른 재정상태 악화와 구조조정의 압력으로 인한 국가 예산구조의 방향 재편 및 국가개입의 변화는 유권자의 물질적 요구에 대한 대응능력과 함께 의회의 정당성을 약화시킴으로써 지배(의회)정치의 위기를 재생산해낸다. 국가는 단기적이고 근시안적인 위기관리와 갈등관리에 주력하게 되고, 정당들은 대체로 뚜렷한 이념적 지향보다는 모든 쟁점들에 대해 미봉책들에 의존하게된다. 신자유주의 집권자들은 보다 효과적이고 안정적이며 빠른 개혁을 위해서 민주주의는 걸림돌일 뿐이라고 여기며, 제국과 종속국 내외의 소수 엘리트집단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기껏해야 대중조작적 기능만을 수행할 뿐이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과정은 국가 폭력{{) 신자유주의 시대 국가폭력은 1> (주로 배제된 지역에서의) 세계도처에서 끊이지 않는 국지전(도시전)적인 전쟁폭력, 2> 정보적 통제/폭력, 3> 구조조정 과정에서 자행되는 직접적으로 사익화된 공권력의(구사대, 용역깡패화된) 폭력의 세가지 층위에서 날로 증대하고 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개혁의 과정에서 점점 더 증가하는 국가의 경찰적인(혹은 군사적인) 폭력수단에의 의존은 시민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정권의 취약성, 즉 사회세력 중재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지표이다. }}의 증대와 민주주의 후퇴의 과정인 것이다. 또한 작은정부라는 슬로건에도 불구하고 행정부는 비대화되며, 구조조정의 신속하고 강력한 추진을 위한 각종의 행정권이 남용되는 가운데, 의회는 점점 정치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져간다. 의회는 더 이상 정치의 공간이기보다는 절차적인 입법공간으로서의 의미만을 가진다. '국민주권'이라는 의회정치의 보편적 가치는 그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더욱이 한국사회에서의 의회정치는 군사독재정권 말기와 문민정권 출범 직후에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던 과거 청산기를 거쳐 단 한번도 온전하게 실현됨 없이,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돌입함으로써 급속도의 위기와 전화과정에 돌입했다. 이는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종속적이고 반동적인 특성에 근본적으로 기인하며 양대 문민정권의 취약한 정치적 토대로 드러났다. 양김정권은 공히 민간 개혁정부를 표방하면서(개혁/수구간의 갈등 위에 존재한다고 믿어진) '상대적 진보성'에 의존한 국민적 정당성을 명분으로 하여 권력기반을 구축하였지만, 이들의 역사적 기반인 개혁/수구간의 갈등은 이미 국가권력 내적인 타협을 통하여 왜곡된 지역갈등으로만 존재할 뿐이였다. YS와 DJ라는 대중적 지도자 1인중심의 포퓰리즘적(또한 탈의회적인) 정치행태만이 근거없는 이들의 국민적 정당성과 상대적 진보성을 유지시켜주는 대안이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양 문민개혁정권의 성립은 이들이 극복하고자했던 낡은 군사독재의 유물인 JP의 캐스팅보드를 유지시켜 주었다(현재 JP는 토사구팽 당한 처지이지만). 강한 지역적 한계와 자민련과의 불안정한 연합에 의해 출범한 김대중 정권의 출범과 어느 때보다도 신속하고 강력한 행정부의 대응을 필요로 했던 IMF외환위기 사태는 의회정치의 위기와 전화를 결정적으로 강제한 계기이다. 즉 항상적인 위기와 구조조정의 반복적 재연, 개혁이데올로기로 특징지어지는 금융세계화의 정치·이데올로기적 효과는 독재정권과 비민주적인 (민족)국가체제를 시장의 불투명성을 초래하는 불안요인으로 인식함으로써, (구조조정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적 안정을 가져올 형식적 민주주의와 시장투명성의 확보를 위한 반부패와 경제적 자유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는 민중의 민주주의적 권리확보와 역사적 진보와는 전혀 무관한 조치들이며, 민족국가적 자율성의 제약과 금융세계화로의 편입만을 의미할 뿐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한국과 같은 반주변부 국가들에 있어 세계적 차원에서 일반화된 케이스이며, 그같은 여파는 의미있는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대부분이 의회 외적인 투쟁방식을 취할 수 밖에 없도록 강제한다. 이는 많은 좌파 (의회)정당들이 실용주의화되는 과정에서 각각의 대중운동들내에서의 실질적인 지도력과 중요성을 잃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에도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왔던 남미와 유럽의 (의회주의적) 좌파들은 신자유주의 재편과정에서 대부분 이미 사회민주주의에서 사회자유주의로 변질됐다. 경제위기로 인해 각종의 계급정치적 사안들은 넘쳐나지만, 이미 의회와 국가의 실패가 명확해진 상황에서 의회 민주주의의 발달을 자신의 생존조건으로 하는 사민주의는 정작 자신의 이념적 지향인 계급정치와 자신의 존재조건 사이의 매울 수 없는 간극으로 인해 흔들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은 생존을 위한 자유주의적인 변모의 길을 택했고, 그러한 실용주의적 변신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상당한 현실적인 이득을 얻어냈다. 그러나 (좌파의 생존을 위해) '유권자'로 동원된 대중은 지극히 수동화된 상태로, 대부분의 경우 사회의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낼 에너지를 가지고 선거에 참여하기보다는 과거로부터 가져온 헌신성이나 연고관계 때문에 투표했다. 사회적 대결은 TV토론으로 대체되었으며, 중도좌파 정당은 자신의 정체성, 즉 다수 대중의 기본적 생활조건에 대한 불만의 판단기준이라는 자신의 이념적 정치적 근거를 상실하였다. 그 가운데 비정치적인 전문성과 법률적-대안적 진보주의를 내세운 관리주의{{) 여기서 관리주의란 "코포라티즘(corporatism)"이라는 용어에 기본적인 영감을 둔 개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것은 이른바 법인 자본주의(corporate capitalism) 혹은 관리 자본주의(managerial capitalism)에 영감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특히 DJ정권은 이 양자를 수렴시키면서, 노사정으로 대표되는 코포라티즘을 하나의 대안적 정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DJ의 코포라티즘적인 대안정책인 노사정은 경제위기상황을 관리하고자하는 한계적인 역할만을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본래의 코포라티즘에 미달하는 허구성을 가지고 이것이 신자유주의 정책개혁과 결합한다는 점에서 심한 불안정성을 가진다. 또한 관리주의는 "자유주의"의 변종의 하나이다. 관리주의는 갈등의 실존을 부정하지 않으며, 또 그것의 해결을 위해 보수적 회귀를 지향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관리주의는 갈등의 실용적 해결을 주요한 활동근거로 삼는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지속적인 법률적 개정이나 전문적 지식의 대중화 등을 활용한다. 그 결과 법률주의나 전문가주의는 NGO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만, 그것의 구조적 특성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그것이 계급투쟁의 관리와 동시에 대중의 지성, 혹은 대중의 지적 권리를 법률이나 전문성 등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적 NGO의 국가정치 보조적 기능이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양 문민정권의 등장 이후 전선의 붕괴와 노동조합, 진보정당으로 수렴되어 버린 우리 운동, 역시 매 사안별로 개별화되고, 계급투쟁은 이론, 사상과 분리된 실용적인 정책대결로, 정치투쟁은 위기에 빠진 의회정치의 기반을 재확보하기 위한 '정치개혁' 투쟁으로 변형되는 경험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사태는 IMF 경제위기 이후 더욱 고착화되어갔고, 대중과 분리된 운동은 지배정치의 공간에서 대중의 실리적 경향에 영합하는 실용주의적 변질을 겪는다. 운동의 외형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밑으로부터 붕괴되고 해체되고 있으며, 이 전과정을 아우르는 정치세력화라는 전략은 매우 역설적이게도 급진적인 대중운동의 쇠퇴라는 특수한 역사적 조건으로부터 기인한다. 즉, 진보정당-노조의 쌍으로 결말지어진 지난 10년간의 정치세력화 프로젝트는 대중운동의 쇠퇴에 대한 대응 혹은 그것의 결과로 제기되어 왔고 또 현재도 그러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정치정당의 위기{{) 노동계급만의 이익보다는 다양한 사회세력의 이익을 골고루 대변하려는 전취정당(catch-all party)의 경향을 강화시켰고, 특정 이념의 실현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선거에서의 승리와 그에 입각한 정권획득 자체를 목표로 삼는 선거전문 수권정당으로 변모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필연적으로 정당조직에 대한 노동계급의 직접적 참여를 감소시켰고, 또 노동조합과 정당과의 관계 역시 점점 긴밀성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한편 매스미디어의 발달은 거대 정당조직에 의한 정치적지지 동원화의 필요성을 현저히 감소시킴으로써 대중정당 조직의 쇠퇴를 또한 촉진시켰다. 당원의 감소는 당 재정의 당비 의존도를 서서히 줄여 갔으며, 서구 대중정당들은 그 대안으로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을 확대시켜 왔다. 그 결과 오늘날 서구 정당들은 시민사회와의 연계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약화된 반면 국가에 대한 정당활동의 의존도는 보다 강화된 소위 담합정당(cartel party)적 특성을 보다 뚜렷이 띄게 되었다. }}는 당노선과 구체적인 조직형태를 특정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형태로부터 국민정당(catch-all party)과 수권정당을 거쳐 미디어-정책정당, 심지어는 담합정당(cartel party)으로 나가도록 강제하는데, 이같은 과정은 대중운동의 (정치적) 지도부와 대중운동의 지속적인 괴리 과정이며 대중정치에 대한 억압과 부정에 다름 아니다. '대중정치'는 (지배)정치로부터 내부적으로 배제된(그러나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비정치'인 생산과 대중의 삶을 대중 스스로의 정치로 변형(급진화)함을 통해 비로소 가장 진지하고 진정으로 현실적인 정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열려진 거리와 생산현장(및 재생산)의 정치적 공간들이야말로 지배정치에 대당하는 또 다른 (지배)정치가 아닌 대중의 반역이자 지배정치비판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태반(胎盤)이다. 그러므로 이같은 우리의 관점은 반(反)정치나 탈정치적 이탈을 옹호하는 입장과 구분되어야 하지만, (근원적인 위기에 빠진 지배정치의 지반을 공유함으로써) 현재의 위기를 보수정치(혹은 자본가 정치)에 대당하는 이른바 '진보정치'(혹은 사회주의정치)의 기회로 활용하자는 입장과도 전혀 다르다. 진보정당의 정치노선이라 할 수 있는 진보정치론의 요체는 보수-보수를 보수-진보의 구도로 바꾸자는 이른바 '제3의 세력론', 혹은 '천하삼분지계'에 입각한 정치(정책)개혁론인데, 이는 기본적으로 (지배)정치의 구성을 다양화함을 통해 현재의 '정치위기'는 극복될 수 있다는 발상에 근거한다. 그러나 만약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정치이외에 다른 정치가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배정치와 같은 형상에 다른 내용(정책)을 가진 무엇일 수는 없다. 프롤레타리아 정치와 지배정치를 종별화하는 근본적인 구분점은 지배정치의 존재근거를(민족국가형태와 정경분리) 기각하는 종별화된 정치의 형상으로서의 대중정치라는 존재형태이며, 이것은 지배정치의 위기를 대체할 보완물이 아니라 지배정치 비판이자 생산양식의 변형을 자기 존재이유로 하는 변혁의 정치로서만 실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의 위기가 양산해내는 갖가지 계급정치적인 문제를 '정책'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기획이다. (국가)정치에서 등장하는 정책이란 이미 자본축적과정에서 그 대략의 방향과 기조가 결정된 한도 내에서 조절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재와 같은 구조공황 상황에서 취해질 수 있는 '정책'적인 선택의 폭은 대단히 협소할 수 밖에 없다. 진보정당으로 결말지어진 정치세력화 운동의 문제를 '사민주의적 진보정당인가 사회주의적 진보정당인가'라는 논점에 의해 개조하려는 시도가 현시기 전선복구와 대중운동 혁신이라는 과제 안으로 인입되지 못한 채 일부 운동세력들간의 종파적인 이합집산 논쟁으로 그칠 수 밖에 없는 이유 또한 이같은 맥락 위에 놓여있다. 대중투쟁과 선거투쟁 선거시기에 제출되는 '대중투쟁과 선거투쟁의 결합'이라는 전술은 그 뜻을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진실이 없는 언술이다. 선거시기에 벌어지는 선거투쟁이 아닌 대중투쟁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고, 대중투쟁이 아닌 선거투쟁은 또 무엇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컨대, 선거투쟁 아닌 대중투쟁은 선거시기에 벌어지는 비정치적인(!) 조합적인 이슈와 집회일정 등을 일컫는 것이고, 대중투쟁 아닌 선거투쟁은 대중운동적·정세적 의의를 찾기 어려운 선거활동을 가르키는 듯하다. 그러나 만일 그러하다면 그같은 양자는 결합과 분리를 말하기 전에 우선 척결되어야할 경제주의적 실천과 정상배 정치일 뿐이 아닌가. 오히려 이 애매한 언술 뒤에 숨은 진정한 오류는 대중운동의 경제투쟁으로의 부당한 한계짓기와 (대중투쟁과의 결합을 빙자한) 정세적 해명 및 배치 없는 선거투쟁으로의 매몰이다. 특히 2002년 대선전략을 수립함에 있어 우리는 2002년 하반기 투쟁과 2003년 이후 전선재편에 관한 해명없는 대선투쟁론을 경계해야할 것이다. 정세적 의미와 무관한, 대선을(혹은 2004년 총선) 위한 대선투쟁은 어떤 투쟁과 결합되건 선거참여자들의 집회참가 이상의 의미가 없다.(그 역인 경우의 폐해는 더욱 심각하다) 그같은 결합관계가 양자 상호간에 득이 될 성과를 남길 리 만무하다. 관건은 선거투쟁의 의미를 분명히 함을 통해 선거투쟁 자체를 하나의 대중운동으로 조직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중투쟁은 어떤 공치사로 치장되더라도 실상은 선거운동의 동원대상에 불과할 뿐이며, 선거투쟁은 스스로가 개개의 대중투쟁에 대한 정치적 조직자라는 환상만을 품은채 선거를 위한 선거투쟁으로만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이른바 '건강한 기층'으로, 진실 없는 '대중투쟁 우위론'으로 한껏 떠받들여지고 신비화된 채 정작 과학적 분석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비운의 군주이다. 우리는 대중(이데올로기)을 다시금 정세분석의 중심으로 복귀시켜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대중에 덮어 씌워진 괜한 공치사를 걷고, 한없이 복잡하고 때로는 모순적인 성격으로 다양하게 분열되어 있으며 때때로 반동적이고 진보적이어서 그 진로를 알 길이 없는 이 역사의 주인공에게 그들의 말과 행동을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과 그에 입각한 대중 공동의 행동계획으로서의 전술만이 이 비운의 군주 앞에 지켜져야 할 유일한 예(禮)이다. 보론1> 정치투쟁관의 정정 지난 반신자유주의 투쟁에 대한 우리운동의 대부분의 평가가 지적하고 있는 두가지 난점은 바로 생존권(경제) 투쟁의 고립분산성 극복과 경제투쟁의 정치적 조직화이다. 그리고 그같은 평가의 대부분은 첫째, 각각의 경제적 요구들에 어떤 전국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을 부여할 것인가 둘째, 어떤 조직적 틀(들)로 각각의 고립분산적인 경제투쟁들을 묶을 것인가라는 쟁점을 낳았다. 그러나 막상 이같은 전술논쟁의 근거가 되는 우리 운동의 현실은 전투적인 현장중심주의가 경제주의와 공명하고, 조합을 넘어선 대사회(정권)투쟁을 강조하는 입장이 개량주의와 공명하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희비극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 우리는 이 혼탁한 반신자유주의 전술논쟁의 근저에는 이른바 '정치·경제투쟁관'(이하 정경투관)으로 불리는 오랜 부르주아적 운동관의 폐해와 '당의 계획으로서의 전술'이라는 식의 위계적 운동관이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정경투관의 핵심은, 첫째, 생활 경제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이 경제투쟁인 반면 대국가 혹은 대정권관련 투쟁이 정치투쟁이라는 구분법과 둘째, 경제투쟁에 대한 정치투쟁의 우위 및 그에 입각한 상호결합의 원칙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대국가투쟁의 실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가, 정경투간 결합의 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관한 현격한 입장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같은 차이가 아무리 크더라도 투쟁의 소재 및 영역의 차이를 정치와 경제의 분리라는 부르주아적 구분법에 입각하여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으로 나누고, 이 둘간의 결합이라는 틀로 운동의 배치 방법을 대체해버리는 관념은 자체로 타파되어야 한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이같은 사고는 역사발전의 유일한 원동력인 '계급투쟁'을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이라는 현실에서 그 근거를 찾기 매우 어려운 관념적인 두 운동으로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실의 계급투쟁은 자본과 국가라는 두 머리를 지닌 자본주의의 지배계급과 자본주의 역사발전의 반작용으로 탄생한 프롤레타리아트간의 계급투쟁이 존재할 뿐이고, 다만 하나의 계급투쟁의 경제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이 존재하는데 이 둘간의 분리와 구분은 지배계급의 계급투쟁의 효과로 나타난 지배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은 그것이 자본과의 투쟁과 국가와의 투쟁으로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낳고 사멸해가는 자본주의의 양측면에 대한 투쟁으로서만 현실에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이같은 '정경투관'이라는 과학아닌 과학, 사상아닌 사상에 속박되어왔을까? 그 원인은 레닌의 '경제주의 비판'과 (민주주의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성장전화론'이 가지는 (레닌 자신의) 역사적 한계와 그것의 (우리의) 교조화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레닌은 [무엇을 할것인가](1905년)에서 당대의 경제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을 수행하면서, 경제주의자들의 정치활동을 조합주의적 정치투쟁으로 규정하였고, 그것의 본질을 경제투쟁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비판했다.(정경투관의 출발{{) 그러나 물론 이같은 레닌의 비판은 짜리즘타도와 국가권력 획득이라는 당대의 혁명적인 보편적 대의를 그르친 경제주의자들이 범한 정치활동상의 오류를 지적하고자 함이였지,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분리를 창안하고자 함은 아니였다. }}) 게다가 당시까지도 레닌은 당면 혁명의 성격과 목표를 사고함에 있어 BgR에서 SR로의 성장전화라는 단계론적 혁명전략을 버리지 못한 처지였다. 그로 인해 레닌은 정치투쟁을 짜리즘의 타도/민주공화정의 수립을 위한 '민주주의 정치활동'과 Bg혁명의 SR로의 성장전화를 담보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정치활동'으로 나누어 사고하고 있었다.(1897년 [러시아사회주의자의 임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위계적인 결합 및 성장전화관계에 있는 차별적인 주제와 수위를 가지는 운동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이는 '외부주입'테제로 대표되는 카우츠키류의 분열적이고 위계적인 대중(지도)관이 레닌주의의 이름으로 정형화되는 주요한 계기중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당면 변혁을 위한 운동들이 정치/경제운동, 민주/사회주의 정치활동, 당(지도)/대중(피지도)라는 위계적인 결합과 분열적인 구조로 배치된 것이다. 레닌의 성장전화론은 1917년 4월테제를 계기로 하여 자기부정되기에 이르지만, 정작 혁명전략의 수정이 곧 성장전화론에 고유한 전술·정치활동관의 혁신과 일반화로 이어진 것은 아니였다. 다만 비로소 '레닌이 된 레닌'이 4월이후 내전과 NEP기에 내놓은 구체적이고 풍부한 정치방침과 당조직/소비에트 및 노조 운동론의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레닌적인 전술·정치활동관의 혁신적 면모들의 단편을 애써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사실상 레닌 '경제주의 비판'의 요체는 '정경투관의 창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주체)성장에 따른 당(주체) 과제의 성장"이라는 제2인터의 오랜 진화주의적 관념에 정면 대항함으로써, 당(주체)'과제'가 지니는 혁명적 보편주의는 자본주의 위기발전의 객관적 조건(정세)에 의해 과학적으로 분석되어 주어지는 것일뿐, 주관적 요인에 의해 선택되는 문제가 아님을 설파한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레닌의 성장전화론은 제2인터의 대기주의적 진화론과 바로 이 지점에서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해석에도 불구하고 당형태와 대중관 및 전술관등을 통해 잔존하고 있는 이 둘간의(진화론과 부정된 성장전화론) 친화성이야말로 레닌주의의 역사적 한계인 것이다. 한편 1871년의 맑스는 [런던에서 뉴욕의 볼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레닌과는 다른 정치투쟁(운동)관의 일단을 선 보였는데, 그는 정치운동이란 "보편적인 사회적 강제력을 가진 형태로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일체의 운동"이라고 규정했다. 여기에는 정치와 경제라는 투쟁의 소재를 중심으로 한 운동의 구분도, '경제투쟁의 정치투쟁으로의 상승발전'이라는 성장전화론적인 위계적 결합관계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정의의 핵심 개념으로 파악되는 것은 "보편적인 사회적 강제력"를 띤 "~~을 관철하기 위한 일체의 운동"이라는 규정이다. 여기서 '보편적 사회적 강제력'이란 판단컨데,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될 힘과 정당성을 갖춘 '과학적 이성'과 '집단적인 문제해결능력'과 같은 주체적 조건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이같은 주체적 조건이 전 프롤레타리아트적인 보편적 요구(이익)을 관철시키기위한 혁명적 성격과 결합된다면 그것이 바로 혁명운동, 혹은 혁명적 정치활동일 것이다. 당대의 레닌은 "~~을 관철하기 위한"을 짜르타도/민주공화정 수립이라는 전인민적인 과제로 보았던 것이고, 이를 실현하기위한 주체를 "전위당"으로 상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대항하여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예속됨 없이, 과학적 인식과 집단적 문제해결능력에 입각하여 스스로를(사상과 저항 이데올로기=곧 조직) 지키고 발전시키는 이른바 '봉기적 주체'는 곧 역사적으로 정형화된 '전위당'이 아니라 '능동적 대중'과 그들의 자발적인 '연합'에(전위당은 이같은 주체형태의 하나일뿐) 다름 아닐 것이다. 결국 (레닌에게 주어진 운동의 조건과 역사적인 제약을 감안하여 본다면) 우리의 전술과 정치활동관의 재정립에 있어 주요한 것은, 객관적으로 변화된 정세적 요인과 이로부터 객관적으로 부여되는 전인민적인 보편적 운동의 목표와 과제, 맑스의 일반적 정의로부터 도출되는 주체적 조건 및 운동(조직)형태일 것이다. 대중의 공동 행동계획으로서의 전술 -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더 이상 '전술=(지도)당의 계획'이라는 관념은 전술수립과 실행의 난점이 아니라 현시기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의 하나일뿐이다. 전술은 해당시기에서 전략적 승리를 앞당기기 위해 당면 투쟁의 전술적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구호, 투쟁형태, 조직형태를 결정하는 '운동주체의('능동적 대중'의 '연합') 실천계획'이다. 그러므로 전술은 언제나 '대중의 공동행동 계획'으로 받아들여지고 실현되도록 노력해야하며, 그같은 실현정도야 말로 전술평가의 핵심일 것이다. 또한 전술은 구체적 정세(분석)을 통해서만 도출될 수 있을뿐, 선제하는 전략적 과제로부터 자연히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관건적인 문제는 정치활동이 그때그때의 사건들에 대한 협소하고 즉자적인 대응에 머물지 않토록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중외곽에서 지도지침을 주입하는 위계적인 지도조직의 선험적 구축 혹은 자임!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맞는 '정치적 지도'의 의미를 조직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실제로 확보하는 것이다.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전과정을 통해 그것은 1> 위기비판과 전화의 관점을 명확히 할것 : 운동의 전과정을 인식한 가운데 제반의 운동들이 전략적 방향과 목적을 견지하기 위한 노력, 2> 집단적인 분석(총화)능력의 조직을 통해 피착취 근로대중의 보편적 이해를 대변하고 조직하는 것, 3> 자기부정에서 자기긍정으로 : 과학적 인식에 기반한 '자기통치-자기해방'의 출발인 인민의 자주성을 옹호하며, 다수자 혁명의 사상에 입각하여 자기소유와 통제를 실현하도록 할 것이다. 이같은 세가지 원칙을 대중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조직적 구조를 마련하고 그것의 성과를 안정적으로 축적해가는 일이야말로 '부재한 당의 계획'으로 국한되지 않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시기 우리운동에게 주어진) '전술활동'일 것이다. 정치활동관의 정립 우리는 이상과 같은 논의에 근거하여 특히 현시기 '정치투쟁'이란 "제반의 위기관리기제와 주어진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역, 즉 대중의 '봉기적 주체'화와 대중 스스로의 자주적 연합(보편적 이해의 자기이해화)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라는 기본관점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1987년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노조건설 운동은 비록 경제적이고 조합적인 소재를 요구하는 투쟁이였지만, 87년 정세에서 이 투쟁은 스스로 당대의 반파쇼투쟁의 주력을 형성해 내었다고 평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단순한 경제투쟁이 아니였던 것이다. 임금인상을 매개로 단결한 대중들은 '파쇼타도 없이 노조없다'는 즉자적인 이데올로기였을지언정 그같은 반역에 입각하여, 집단적인 문제해결 능력을 조직하는 것의 중요성을 확인한 가운데 스스로 통치하고 스스로 해방하기 위한 조직적 거점으로서 민주노조를 축으로 한 계급적 단결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1> 정세를 초월하여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주체'화 경로와 그것에 반역하는 '봉기적 주체'화가 구분되는 것이며, (신자유주의 재편과 경제위기 심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대중의 수동화와 그에 따른 실리주의적 경향, 민중운동의 실용주의적 퇴행화야말로 현시기 정치활동의 주요타격방향이다) 2>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허구적인 결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중 스스로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단적인 해결방식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조직적인 결집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투쟁의 정치적인 성패를 가로 짓는 열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