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6자회담 공동성명의 의미와 한계 ‘공동성명’은 과연 진전된 것인가? “6자회담 성공은 평화통일의 지름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용산구협의회가 육교 위에 커다랗게 걸어놓은 현수막의 제목이다. 추석연휴 마지막날 북경발 뉴스를 통해 13개월만에 재개된 4차 6자회담의 극적인 합의가 알려졌다. 동북아 평화체제로의 진입, 평화통일의 이정표, 남북 정상회담의 정례화 등등 각종 장밋빛 전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이번 6자회담 공동성명 이후 경수로 제공 여부를 둘러싸고 전개된 북한과 미국의 성명전을 살펴본다면 오는 이후 6자회담이 과연 순조롭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해 반드시 낙관할 수는 없다. 우선 6개항으로 되어있는 공동성명을 살펴보면 핵심적으로 1조는 한반도 비핵화와 이의 달성방안, 미국의 대북침공 의사 없음과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권 존중과 적당한 시기에 경수로 제공논의를 다루고 있고, 2조는 북한의 주권 존중, 북미평화공존, 북미 및 북일 관계 정상화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번 공동성명의 수준은 강제적인 이행의무를 부과하는 조약이 아니라 5조에서 규정한 것처럼 추후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입각하여 상호조율된 조치를 취하기 위한 ‘말 대 말’ 수준에서의 합의에 불과하며 각국의 행동이 접속사 없이 무미건조하게 병렬적으로 나열되고 있다. 게다가 내용을 살펴보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북한의 의무는 명확하게 표현된 것에 비해 미국이 이에 대한 반대급부(관계정상화와 경수로 제공)를 어떤 시점에 어떻게 제공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서술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연 그 반대급부가 제공될 것인 지의 여부도 이번 회담에서 확인된 것은 아니다. 이번 회담은 그동안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6자회담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데는 성공했지만 6조에서 앞으로의 회담일정(5차 6자회담)을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애매하고 모호한 채 남아있는데 이는 그만큼 북한과 미국 간의 이견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현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번 공동성명의 수준은 1994년 상호 반대급부(북한의 핵동결과 미국의 경수로 제공)와 관계정상화를 명시한 ‘제네바기본합의서’에 미치지 못하는 그야말로 잠정적인 각국 행동의 일반적인 원칙을 나열한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한계를 무시하고 ‘선군외교의 승리’라든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동북아 안정을 위한 출발점’으로 이번 공동성명의 의의를 과장하는 것은 오히려 6자회담 내부의 한계는 물론이고, 과연 이를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가 정착될 수 있는지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봉쇄할 뿐이다. 돌이켜보면 현실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이후 지난 15년 동안 정부와 언론의 호들갑은 별반 새롭지 않다. 1991년 12월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되었을 때를 기억해보라. 혹은 1994년 10월 제네바에서 북한과 미국이 합의에 이르렀을 때 언론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현재와 마찬가지로 온갖 장밋빛 전망들이 쏟아졌지만 이후의 사태는 한반도 및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적 이니셔티브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요구들을 관계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는 미국의 태도에 따라 남북관계마저 경색·악화되어오지 않았던가? 지난 15년 동안 북한과 미국 사이에 형성되었던 갈등과 쟁점들은 과연 현재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는지, 한반도의 핵문제가 주기적으로 악화되는 데 대한 책임의 소재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관계정상화를 꿈꾸는 북한 vs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려는 미국: 타협의 불투명성과 한계 미국은 6자회담 내내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 원칙이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해왔다. 지난 3차 6자회담에서 미국은 ‘다단계 포괄적 비핵화방안’을 제시했는데 핵동결에 상응하는 중유지원, 3개월 후 핵폐기 절차가 시작되면 4단계에 걸쳐 잠정적 안전보장, 비핵 에너지 지원, 테러지원국 명단 제외 및 경제제재 해제 논의, 관계 정상화 등을 추진한다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핵동결에 상응하여 200만kw의 에너지 지원(이는 지난 7월 12일 남한의 ‘중대제안’으로 수용된다), 테러지원국 명단 제외, 경제제재 및 봉쇄 해제를 요구하였다. 비단 보상의 문제 뿐 아니라 동결과 폐기의 범위에 2차 북핵위기의 발원지였던 고농축 우라늄(HEU)이 포함되는지, 그리고 사찰의 주체가 IAEA인지, 아니면 6자회담의 틀 속에서 새롭게 마련될 것인지도 추가적인 쟁점들이다. 하지만 양자의 입장이 대등하게 조율되는 것은 아니며 장기적으로는 북한이 대부분 미국의 제안을 수용하고 있는데 반해 미국이 이에 대한 반대급부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 것이 회담을 더욱 모호하고 애매한 합의로 몰고 가는 주된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강력한 反확산 정책에 입각하여 우선순위를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의 제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미국과, 냉전시대의 종언 이후 외부로부터의 식량지원에 의존할 정도로 취약해진 경제적 기반을 복구하고 미국·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려는 북한의 정치적 목표가 얼마나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는 쉽게 장담할 수 없는 문제이다. 舊소련과 현실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한 이후 한반도의 군사적 대결구도는 국제적으로 고립된 북한에게 커다란 정치·경제적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0여 년 동안 줄곧 관계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서 미국은 북한에게 추가적인 양보를 강요하고 있고 대체적으로 북한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왔다(199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한 핵 프로그램의 동결과 폐기, 1998년 <페리 보고서>에서의 중장거리 미사일 프로그램의 중단).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명시하며 전역미사일방어망구상(TMD)·미사일 방어망(MD) 계획을 1990년대 내내 추진해왔을 뿐 아니라, 2001년 <핵태세 보고서>에서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 공격을 포기하는 <제네바 합의>를 명시적으로 위반하면서 북한을 핵선제공격이 가능한 7개국의 명단에 포함하는 등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적 이니셔티브의 유지·확장 속에서 대북관계를 부차적이거나 종속된 문제로 취급해왔을 뿐이었다. 따라서 6자회담의 틀 안에서의 합의는 현재로서는 결코 낙관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앞으로 북미 간의 이견과 갈등은 지금까지의 6자회담보다 훨씬 격렬하게 드러날 것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설혹 6자회담의 틀 내에서 (‘제네바 합의’와 같은 수준의) 북한과 미국 사이에 구체적인 합의점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전지구적인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의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왜냐하면 미국으로서는 현재의 한미군사동맹의 근간을 유지하는 한편, 한반도비핵화의 범위를 자국의 핵탑재 잠수함과 항공모함, 비행기의 출입을 제한하지 않는 방향으로 해석하려고 하며 이 경우 6자회담은 한반도-동아시아의 평화를 불러오기보다는 현존하는 군사적 갈등과 경쟁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생산하게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의 핵확산 억제 시도의 자가당착: 미국의 핵독점을 전제한 군사적 이니셔티브의 추구 미국의 군사안보 정책의 최우선 순위는 무엇보다 ‘테러와의 전쟁’,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예방전쟁·선제공격마저 마다하지 않는 강력한 반확산(counter-proliferation)정책이다. 따지고 보면 지난 2003년 결국 ‘제네바 합의’가 미국의 대북 중유 제공 중단과 북한의 핵비확산조약(NPT) 탈퇴로 인해 파탄에 처한 근본적인 이유는 ‘불량국가’에 대한 미국의 불신과 2003년 이라크 침략전쟁으로 가시화된 호전적인 군사·안보정책에 기인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핵무기 독점을 위한 시도는 지난 1970년 출범한 NPT를 최악의 위기상황으로 내몰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자가당착에 빠뜨리고 있다. 현재 미국의 반확산 정책은 자신의 군사적 이니셔티브를 전제한다. 이는 핵무기 개발에 대한 미국의 이중적 기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난 1995년 NPT를 무기한 연장하기로 회원국들이 합의한 전제는 핵보유국들의 핵군축 및 핵폐기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런데 미의회는 13개 핵폐기 의무사항으로 설정된 주요 조처 중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을 1999년 부결시켰고, 핵군비경쟁을 가속화할 수 있는 미사일 방어망 구축을 금지하는 탄도미사일방어망조약(ABM)을 2002년 파기하였다. 부시행정부는 NPT 내 비핵국가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하던 소극적 안전보장(핵보유국의 비핵국가에 대한 선제 핵공격 금지)을 명시적으로 철회하였고, (북한을 겨냥한 것으로 추측되는) 지하 벙커를 파괴하기 위해 지표를 관통하는 소형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예산을 지출하고 있다. 지난 5월 NPT 7차회의가 끝내 결렬된 것은 바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핵보유국들의 이중적 태도였으며, 비핵국가들은 우라늄 농축이나 플루토늄 재처리 등과 같은 기술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핵무기로 전용할 가능성이 있는 관련 기술의 확산을 엄격히 통제하기 위해 경제제재와 저지, 나포, 선제공격을 포함한 확산방지구상(PSI)을 2004년 발표하면서 핵무기의 ‘수평적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천명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제안한 5년 간 핵분열 물질의 생산 중단에 대해서는 자국의 핵이용이 제한될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핵무기를 다른 국가들에게는 금지한다는 것은 모순적이다. 이는 모든 국가가 핵개발에 대한 정당한 권리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핵무기로 전용 가능하고 사실상 평화적 목적의 핵이용의 실체가 불분명한 것이라면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반확산 정책의 전제는 바로 미국의 핵폐기임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미국은 ‘절멸의 무기’로서 순식간에 한 도시, 한 국가를 순식간에 날려버릴 수 있는 파괴력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서 오히려 다른 국가들의 핵(무기)개발에 대한 동인을 제공하면서 핵무기에 대한 국제적이고 민주적인 통제 자체를 봉쇄함으로서 스스로의 반확산 정책을 이미 무력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적 이니셔티브를 해체하거나 감축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국가들간의 국제회담으로 평화를 운위한다는 것은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것이다. 노무현정권의 ‘중재자적 역할’의 한계와 한반도-동아시아 평화를 향한 아래로부터의 운동 세계평화의 대전제는 미국의 군사적 이니셔티브의 감축과 해체, 그리고 미국의 핵폐기이다. 이는 한반도-동아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번 6자회담을 해석하면서 마치 이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당장이라도 구축할 수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과 오산이 아닐 수 없다. 당장 노무현 정권은 이번 공동성명의 의의를 설명하면서 남한정부의 중재 아래 미국의 유연성(경수로 추후 논의 인정)과 북한의 결단(핵포기)을 이끌어내었다며 스스로의 외교적 노력을 자찬하기에 바쁘고 한반도-동북아 평화번영의 전기로 삼아야 한다며 목청을 높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6자회담이 타결되면 플랜A에 따라 남북정상회담을 정례화하고, 북한경제발전종합계획으로서 ‘북한식 마셜플랜’을 가동할 것으로 알려졌다(《국민일보》9월 24일).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은 “굳건한 한미동맹”의 종속변수일 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정부는 플랜 B를 동시에 상정하고 있는데 이는 대북 경제제재와 PSI 참여, 봉쇄, 군사적 조치를 포함하고 있다. 언제든지 과거 역대정권이 그러했던 것처럼 미국의 전략에 따라 대북관계가 부침을 거듭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노무현정권의 ‘중재자적 역할’이 무력해질 수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 속에 포섭되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모습을 ‘평화체제’라 부른다는 것은 이라크 침략전쟁이 이라크 민중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는 미국의 변명만큼이나 궁색하기 짝이 없다. 현재 전세계를 통틀어 나머지 국가의 국방예산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군비를 지출하는 미국에게 대적할 수 있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러할 것이다. 향후 미국의 군사적 패권을 위협할 수 있는 경쟁국가의 부재는 바꿔 말하자면 오늘날의 세계평화를 국가간 체계의 유지나 존속을 통해서 기대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비현실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6자회담을 통해 북·미 관계정상화와 북한의 핵포기가 조율되는 것조차 지난한 과정일 뿐만 아니라, 설혹 어떤 합의가 도출된다고 하더라도 그로 환원되지 않는 그 이상의 것(한반도-동이사이의 평화)을 기대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한반도․동아시아의 평화를 향한 과정은 6자회담의 성공과는 완전히 다른 수준에서, 다른 정치적 목표를 제기하는 문제이며, 미국의 군사패권을 해체하고 감축하는 아래로부터의 반미반전운동, 현실의 대중운동 속에서 그 해결의 단초를 찾을 수밖에 없다.
지난 9월 23일~25일까지 고려대학교에서 진행했던 2005 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학교 자료집입니다. 학교 진행당시 빠져있던 글들을 다시 편집하였습니다. 토론 속기도 곧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내용> 페미니스트 정치와 가족형태 비판 세계노동운동사와 사회운동 노조주의 노동자운동 혁신의 방향과 과제 비정규투쟁의 현재와 과제 노동조합은 페미니즘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지역운동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노동자운동 혁신의 방향과 과제」,「비정규 투쟁의 현재와 과제」에 대한 토론문 「노동조합은 페미니즘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한 토론문 미국헤게모니의 쇠퇴와 ‘제국 대안세계화운동의 현황과 전망 한반도 핵 위기의 현재성과 반전평화운동
지난 9월 13일 광주 반전평화행동 발바닥에서 주최한 강연의 자료입니다. "반전평화행동 발바닥"은 격주간의 캠페인과 세미나, 토론 등을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아펙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의 목소리를 함께 고민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한반도의 핵 현실과 반전반핵운동 | 정영섭
핵문제에 대한 대중적 무감각 지난 8월 6일자 동아일보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국민의 52%가 한국의 핵무기 보유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서는 한국 응답자의 57%가 반대했고 41%는 용인해야 한다고 답했다. 일본인은 86%가 핵무기 보유에 반대했고 독일인도 93%가 반대의견을 나타냈다. 이는 2차 대전 패전국인 일본과 독일이 핵무기 반대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은 데 비해, 오히려 승전국인 미국, 소련 등이 핵 숭배와 군사주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한 역사를 반영한다. 한국 국민들이 승전국의 핵 숭배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번 조사에서 한국의 30, 40대 응답자들은 20대나 50대 이상에 비해 한국의 핵무기 보유 찬성률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고(각각 58.5%, 58.7%, 46%, 46.35%), 북한의 핵 보유를 용인하는 비율도 더 높았다. 기사는 이를 ‘진보적 386세대의 성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이는 반미의식은 높지만 그만큼 미국에 대한 열패감으로 인해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미국을 따라잡으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386의 진보에 대한 관념이 민족주의적인 열등감, 피해의식을 반영하고 결국 호전적 팽창주의로 전환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한반도는 약소국으로 외세의 침략을 당해 왔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누구도 넘볼 수 없게 힘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는 과거 지배세력이 적극적으로 유포한 것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이러한 대중의 의식은 역사적으로 핵과 관련된 논의가 억압되어 온 한국사회 지형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한국 지배계급은 미국의 한반도 핵 정책(핵무기 배치, 핵 발전)을 시종일관 지지했으며 민중적인 논의는 철저하게 차단했다. 따라서 반핵을 주장하는 것은 국가안보에 반하는 것이었고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이었다. 특히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떨어뜨린 핵폭탄 피폭자가 6만 명에 이르지만, 한국정부는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철저한 금기가 되게 했다. 한국은 핵폭탄 피폭의 당사자이면서도 해방의 ‘은인’ 미국에 보은하고, 일본을 패망시킨 핵폭탄을 축복하기 위해 이를 은폐하고 억압해 온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멀게는 1980년대 반전반핵운동부터 가까이는 작년 부안 핵폐기장 건설 반대투쟁에 이르기까지 ‘반핵평화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대중운동이 한국사회에 이어져 왔지만, 아직 핵에 대한 논의가 충빈히 대중화되지 않은 까닭이 가장 클 것이다. 한편, 소위 ‘북핵 문제’는 15년이 넘도록 ‘미국에 의한 북한 핵개발 의혹 제기-의혹을 둘러싼 장기간의 대치-어정쩡한 타협’이라는 도식을 반복하고 있다. 최근 6자회담 내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체제보장과 전력공급이 현실적 목적이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토론 과정에서도 한반도 핵 문제에 대한 역사적이고 총체적인 접근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한반도 핵문제의 역사와 현실을 조망하여 대중적인 인식을 확장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핵무기와 비핵화선언 1980년대까지 한국에서 미군 핵무기의 중심 저장지는 군산공군기지였다. 1985년에도 핵공격 능력을 가진 F-4, F-16폭격기에 탑재하는 핵폭탄 60기가 군산에 저장되어 있었다. 또한 용산기지에는 폭파용 핵지뢰(ADM) 담당 공병부대가 있었고, 이들을 포함하여 남한에는 근해 핵무기(핵항공모함, 핵잠수함에서 발사하는 무기),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랜스미사일, 핵 포 등이 있었다. 이처럼 미국이 남한에 배치된 미국 핵무기의 위력은 일본에 투하한 원폭의 1,750배 수준이었다. 또한 미군이 1978년 한미연합사를 창설하고 국제연합군으로부터 작전통제권을 인수함에 따라 한미연합사령관이 미합동참모본부의 지휘 아래 핵사령관의 역할을 하였다, 즉 남한 대통령이 핵통제권을 지휘한 게 아니었다. 남한 육군의 역할은 핵탄두를 관리하는 미군에게 핵능력을 갖춘 운반수단을 제공하는 것뿐이었다. 애초 남한 당국에는 핵무기에 대한 결정권이나 핵전쟁에 대해 논의할 권리, 국내에 있는 핵무기의 종류와 숫자, 핵무기사용 시나리오 등을 알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남한에 배치된 미국 핵무기는 미국이 북한 핵사찰을 압박하기 위해 1991년 핵무기 감축선언을 한 이후 철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한국전쟁 이후로 40여 년 간 남한 땅에는 미군이 통제하고 사용을 결정하는 핵무기가 국민들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수천 기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2년 남북이 한반도 비핵화선언에 서명하고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 핵안전협정을 체결하였지만 한반도의 핵 위험성은 나아졌다고 볼 수 없다. 군사적 효용가치 감소, 정치적 부담 증가로 미국은 주한미군의 전술핵을 철수했지만 한반도에 대한 핵우산정책과 유사시 핵무기를 사용하는 핵 선제공격 옵션을 유지했다. 애초 북한은 1991년 7월에 한반도 비핵평화지대화를 제안했는데, 이는 비핵3원칙(핵무기 제조, 보유, 반입 금지)을 명시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남한 정부에서는 ‘비핵화’로 답했는데, 비핵지대화와 비핵화는 커다란 간극이 있었다. 즉 비핵지대화는 핵무기 반입을 금지하고 한반도에 씌워진 핵우산을 제거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비핵화는 핵무기 제조와 소유만을 금지할 뿐 미국과 같은 핵보유국들이 정치 군사적 이해에 따라 핵무기를 들여오는 것에 대해서는 제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핵화 논리는 한반도의 핵 위협을 제거하지 못할 뿐 아니라 미국의 핵우산 유지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컨대 2005년 3월에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급 핵추진 잠수함이 경남 진해의 해군기지에 정박했다고 운동진영이 폭로했고, 북한도 미국이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위반했다고 연일 비난했다. 군 당국은 “비핵화 원칙은 핵무기에만 관련된 것이므로 핵연료로 추진되는 핵잠수함의 입항은 위배되지 않는다”고 둘러댔고, 더욱이 “미국의 핵추진 잠수함과 항공모함은 한미 연합작전 등에 참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한반도 해역으로 들어온다”고 하면서 스스로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것들은 상황에 따라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공격형 핵잠수함이었고, 특히 로스앤젤레스급은 토마호크 미사일을 탑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미국 해군은 지역분쟁용 전술핵의 두 가지 지주로서 핵잠수함의 핵 토마호크와 공군의 핵폭탄을 유지하기로 밝혔고(1994년 NPR), 특히 핵잠수함의 핵무장 해체만큼은 늘 소극적이었다. 한반도 주변의 핵무기도 커다란 문제다.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지역에 핵무기를 비롯하여 주요 군사전력을 배치하고 있는다. 특히 핵항공모함과 핵잠수함, 핵무기적재함들이 배치되어 있고 이들은 군사작전이나 한미 연합훈련 시에 남한의 군항을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하와이에는 미태평양사령부를 비롯하여 미태평양 각 군의 공격전략사령부들이 있으며 수백 대의 항공기와 핵잠수함, 순양함 등 10여 척의 함선들이 주둔하고 있다. 괌 섬에서는 핵전략폭격기인 B-52가 정기적으로 발진하여 한반도와 주변 상공을 오가고 있고 일본에는 미 제5공군사령부, 미 제7함대사령부가 주둔해있고 역시 미국의 핵항공모함 등이 드나든다. 요컨대 남한에 핵무기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미국은 언제든지 해외 기지에서 한반도에 핵을 사용할 수 있으므로, 한반도에 핵무기가 배치된 것과 다를 바 없다. 미사일방어체제와 핵태세보고서 미국이 1985년 발표한 전략방위구상(SDI)은 미소간의 핵무기경쟁과 우주공간에서의 군사력 경쟁(스타워즈)에서 미국이 확실한 우위를 점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이미 이전부터 미국은 ‘상호공멸보장’에 근거한 핵전쟁 억지론, 즉 미소가 서로를 확실하게 파괴할 수 있는 대등한 핵전력을 보유하게 되면 서로가 선제 핵공격을 회피할 것이라는 논리에 따라 핵전력을 계속 증강시켰다. 나아가 미국은 소련을 비롯한 적국의 핵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방어체계를 개발하고자 했고, 우주를 이용하는 군사기술을 결합시켜 SDI를 추진했다. 물론 미국은 SDI와 함께 MX나 Trident II와 같은 전략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완벽한 방어망은 압도적인 공격적 전략핵무기를 수반해야만 ‘승리하는 핵전쟁’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소련의 몰락 이후 전략방위구상은 미사일방어체제(MD)로 이어졌다. 1996년 2월 미 국방부는 MD개발 프로그램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소련의 위협이 사라진 자리를 대체한 것은 북한이나 이란과 같은 소위 ‘깡패국가’들에 의한 미국 본토에 대한 (핵)탄도미사일 위협이었다. 물론 이는 동시에 중국과 러시아를 잠재적인 적국으로 상정한 것이기도 했다. 즉 미국은 MD를 통해 방어체제를 완벽하게 해야만 완전한 최강의 핵무기국가가 되고 핵 선제공격의 자유를 확대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반도에 있어서 MD의 의미는 핵 위협과 동의어일 수밖에 없다. 지난 김대중정부는 MD체제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말해 왔지만 이미 MD체제 구축에 필요한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미군기지에 배치되어 있고 이지스함 도입을 추진하는 등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구상에 편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일본, 대만의 MD 참여까지 포함하면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한-미-일 삼각 핵 군사동맹이 실질적으로 완성된다. 한편, 미국은 2002년도에 핵태세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는 중국, 러시아, 이라크, 이란, 북한, 리비아, 시리아 등 7개국에 대해 핵무기를 선제사용 할 수 있다는 것과 벙커버스터와 같은 신형핵무기를 적극적으로 개발하겠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심지어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신형핵무기 개발의 목적은 핵무기를 억지무기가 아닌 실전무기로서 활용하기 위한 기술적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핵사용의 유연성을 높여 기존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를 망라하는 공격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핵 비보유국에 대한 핵선제공격, 신형핵무기 개발은 미국 스스로 NPT(핵확산방지)체제를 위반하는 것이고 세계를 핵무기경쟁으로 몰아가는 것으로서 미국이 “핵 깡패”임을 시인한 것에 다름 아니다. 더욱이 북한에 대한 핵무기 선제공격 가능성 천명은 북한의 격렬한 반발을 불렀고 이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더욱 부추겼다. 남한의 핵개발 문제 남한은 적극적인 핵 개발정책으로 일관해 왔다. 1970년에 미국정부가 아시아 동맹들의 자주국방을 강조하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2만 6천명의 주한 미군을 철수하자 안보보장에 불안감을 인식한 박정희는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비밀리에 시작했다. 이에 미국은 1975년까지 프랑스로 하여금 핵 재처리시설을 남한에 넘기지 못하게 압박함으로써 남한의 핵 개발 시도를 저지했다. 이러한 미국의 압력으로 남한은 1975년 4월에 핵확산방지조약(NPT)을 체결하였다. 1977년에 박정희는 더 이상 핵 개발을 시도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비밀 프로그램은 계속되었고 이는 1979년 박정희 암살로 인해 끝난 듯 했다. 1980년대에도 핵무기 개발 계획이 있었는데 이 역시 미국의 압력 때문에 중단되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를 미국이나 남한당국이 공식적으로 확인한 적은 없다. 미국은 남한에 대한 플루토늄 공급을 계속 금지해왔다. 1975년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핵안전협정을 체결할 때 남한 핵시설은 연구용 원자로 2개가 전부였으나 이후 남한정부의 적극적인 핵 발전 정책으로 인해 현재 33개의 핵시설이 있다. 남한정부는 언제나 핵무기 개발에 대한 강렬한 유혹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2004년에 불거진 핵물질 실험문제에서도 드러났다. 영국 BBC를 비롯한 외신은 남한이 2000년에 극비리에 우라늄 농축실험을 실시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과기부는 대덕 원자력연구소에서 핵연료 국산화를 위해 소수 과학자들이 극소량인 0.2g의 우라늄(235) 분리실험을 한 사실이 확인돼 IAEA에 이 내용을 보고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과기부 발표는 남한이 처음으로 핵무기 제조의 핵심기술인 농축 우라늄 추출에 성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004년 9월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은 한국이 1982년에 국제원자력기구에 신고하지 않은 시설에서 우라늄을 전환해 1백50㎏의 금속 우라늄을 생산했으며, 당시 한국에는 천연 우라늄을 '농축에 적절한 우라늄'으로 바꾸는 전환시설이 세 곳 있었고, 이 우라늄이 2000년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 실험에 사용됐다고 밝혔다. 또한 국제원자력기구는 남한이 1982년에 소량의 플루토늄 추출 실험을 했다고 밝혔다. 1백50㎏의 금속 우라늄은 원심 분리법을 사용하면 90% 농축도의 무기급 우라늄 0.7㎏을 얻을 수 있는데, 핵무기 1기를 만들기 위해서 25㎏의 고농축 우라늄이 필요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양이 적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로 핵무기 프로그램이 계속 시도되어 왔고 1980년대에도 그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2000년도의 실험이 비록 실험실 수준이더라도 핵무기 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 핵심기술에 관한 실험이었으며, 이미 1982년에 핵 재처리를 통해 플루토늄 추출에도 성공한 것이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결국 2004년 11월 국제원자력기구는 남한이 과거 핵실험을 통해 플루토늄과 ‘무기급 우라늄’을 생산했지만 핵무기 생산시도와 관련 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며 UN안보리에는 회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는 막판에 미국이 한국 손을 들어준 결과일 뿐이었다. 한편 남한의 핵 개발을 말할 때 핵 발전 산업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한국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핵 발전량이 많은 나라이다. 국내에는 이미 고리, 월성, 영광, 울진에 18기의 원자로가 가동되고 있고 전체 전력의 40% 정도를 충당하고 있다(1,572만kW 용량). 더욱이 울진에 2기(200만kW)의 핵발전소가 추가로 더 건설되고 있으며 2015년까지 8기(960만kW)의 추가 건설이 계획 중이다. 이 추세대로라면 2020년까지 한국은 총 36기, 2,732만kW 용량의 핵발전소가 가동될 것이다. 또한 동일한 부지에 최고 12∼10기의 핵발전소가 동시에 가동되어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최대 용량, 최다 기수의 핵단지가 조성될 것이다. 핵 발전은 저렴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으며 인류와 생태계에 치명적인 핵폐기물을 양산할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핵무기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 핵물질과 핵기술 자체가 평화적 목적과 군사적 목적으로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발전 용도를 위해 사용되고 나온 사용 후 핵연료는 재처리를 통해 언제든지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될 수 있다. 특히 캐나다형 중수로 원자로는 경수로 원자로에 비해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방법이 용이하다. 국내 원자로 가운데 월성의 4개 원자로가 캐나다형이다. 이것은 1974년 인도의 핵무기 개발을 가능하게 했던 원자로와 같은 유형이다. 더욱이 핵발전소의 사고는 핵발전소를 ‘시멘트·콘크리트로 포장된 핵폭탄’이라고 불리게 했다. 서구에서 체르노빌, 드리마일 등 핵발전소의 대규모 사고가 발생하면서 핵발전소 폐기론이 대세를 형성했지만 여전히 한국에서는 핵무기와 핵발전이 무관한 것이고 핵 발전이 꼭 필요한 것으로 선전된다. 이를 바탕으로 다국적 핵기업들은 대거 한국을 공략했고, 그 결과 미국의 웨스팅하우스, 컴버스쳔엔지니어링, 프랑스의 프라마톰, 캐나다 원자력공사 등이 한국 핵발전소의 원자로 대부분을 공급하였다. 한국 핵 산업은 이제 국내를 넘어 국제적으로 진출하는 상황이 되었다. 최근 두산중공업은 미국 웨스팅하우스 원자력사업본부 인수에 나섰고 9월 예비 입찰과 12월 본 입찰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웨스팅하우스는 전 세계에서 가동 중인 443개 가운데 절반 가까운 200여기에 원천기술을 공급했고 ‘한국 표준형’의 원천기술도 보유하고 있다. 두산중공업은 또한 지난 8월 29일 중국 최대의 발전설비 회사인 하얼빈 전력집단(HAEC)과 중국 내 신규 원전시장에 공동 진출키로 하여 중국 원자력시장에도 뛰어들었다. 언론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비판하기는커녕 대담한 투자로 치켜세우고 정부가 지원하라고 촉구한다. 그러나 핵 자본은 다른 말로 핵 군수산업이며 양자는 뿌리가 같다. 한국이 핵 자본을 키울수록 핵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워질 것이다. 북핵문제의 현재성 1992년 IAEA의 북한 핵시설 사찰, 1993년 북한의 NPT 탈퇴와 뒤이은 전쟁위기, 1994년 제네바 합의, 클린턴정부의 제네바 합의 불이행, 1998년 미국의 북한 금창리 지하시설 핵의혹 제기, 1998년 대포동 1호 시험발사, 2002년 1월 부시의 ‘악의 축’ 발언, 2002년 10월 켈리 특사의 북 핵개발 시인 발표, 2002년 12월 북한의 핵동결 해제선언과 IAEA 사찰관 추방, 2003년 8월 1차 6자회담, 2004년 2월 2차 6자회담, 2005년 2월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핵무기 보유 및 6자회담 무기한 중단 선언, 2005년 7월 3차 6자회담 등 북핵을 둘러싼 갈등은 해를 거듭하면서 반복되고 있다. 이른바 ‘우리식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체제위협과 경제봉쇄에 시달려 왔고 내부 경제위기를 심각하게 겪고 있는 북한이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체제를 보장받으며 외부의 경제 원조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생존전략의 일환이다. 그러나 핵무기 개발을 그 수단으로 삼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미국의 핵전쟁 위협과 체제위협에 대해 핵무기 개발로 맞서는 것은 과거 북한이 주장하는 한반도 비핵지대화에 모순되는 것이고 핵을 둘러싼 대중의 불안을 키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겉으로는 핵무기를 가질 의사가 없다고 하지만 핵무기에 핵무기로 맞서는 것은 군사적 대결을 높이는 것이다. 또한 이는 수십 년 간 지속된 미국의 한반도 핵 위협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게 될 위험도 있다. 따라서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북한이 미국에 대해 핵무기 개발로 대담하게 맞서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것은 극히 주관적인 사실인식이자 위험한 주장이다. 둘째,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논리 역시 근본적으로는 위험하다. 세계 최대의 핵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비핵보유국의 핵보유를 억압하는 미국의 이중성은 철저하게 비판되어야 한다. 그러나 핵 발전은 원래 핵무기 개발로부터 시작되었고 핵발전과 핵무기 개발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언제든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핵무기와 근본적으로 단절된 핵의 평화적 이용권, 핵 발전 권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 경쟁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인도는 1974년 핵 개발에 성공했다. 이는 사실 핵기술의 평화적 이용과 군사적 이용 간 경계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사례이다. 1990년대 인도-파키스탄의 핵 경쟁 와중에 벌어진 칼길전쟁은 핵보유국 사이의 가장 큰 재래식 전쟁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은 상호 13번에 걸쳐 위협적인 핵공격 선언했다. 수천 만의 민중들은 절멸적인 핵미사일 공격 앞에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고 되었고 핵미사일 공격 시 양자가 3분만에 끝장나는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그 아슬아슬한 순간에 양국은 외부의 압력으로 핵사용 결정을 중단했지만 이는 핵무기 보유는 언제라도 핵공격에 의한 민중의 절멸이라는 파멸적인 상황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 것이다. 핵무기 보유국은 항상 핵무기를 사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들고, 평화가 아닌 군사주의적 방향으로 전진한다. 핵무기 없는 한반도와 세계를 향하여 비핵지대화에 대한 구상은 오래 전부터 등장했다. 이는 구체적으로 세계비핵지대(NWFW) 혹은 비핵지대(NWFZ) 등의 개념으로 제시되었다. 비핵지대는 해당 지역에서 핵무기의 개발, 제조, 반입, 통과를 금지하고 핵무장 국가들에게 이 지역에서의 핵무기 공격이나 공격 위협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요구하는 제도적 장치를 말한다. 현재 세계에는 4개의 비핵지대가 존재하는데 1)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지역의 트라테롤코 조약(1967년), 2) 남태평양 지역의 라로통가 조약(1985년), 3) 동남아 지역의 방콕 조약(1995년), 4) 아프리카 지역의 펠린다바 조약(1996년, 미발효)이 있다. 2002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열린 비핵지대 국제회의에서는 세계비핵지대를 위한 네트워크 결성이 선언된 바 있다. 비핵지대에 대해서는 일본과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 지역의 핵경쟁을 막기 위한 동북아 비핵지대, 인도-파키스탄의 핵전쟁 위협을 차단하기 위한 남아시아 비핵지대, 이스라엘의 핵무기를 없애고 핵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중동 비핵지대, 전술핵무기 철수와 나토 해체를 위한 중부 및 동부유럽의 비핵지대 등이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비핵지대 구상은 핵무기 없는 세계를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한 관심을 촉구한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하지만, 여러 가지 한계도 지닌다. 핵 문제의 핵심에는 미국과 핵보유국의 핵무기와 핵전략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를 우회하고서는 비핵지대의 실효성이 없다. 또한 핵무기를 제거하기 위한 투쟁 속에서 사후적으로 조약의 형태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조약 체결을 중심으로 비핵지대를 달성하기 위해 UN에 의존한다거나 핵보유 국가들에게 조약 준수를 촉구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수 대중의 운동이 아니라 정치외교 수단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담고 있다. 한반도 비핵지대화는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없애고 핵무기 사용가능성을 없애는 것이므로, 필수적으로 동북아 비핵지대화, 나아가 전 세계의 비핵지대화와 직결된다. 또한 핵무기 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핵 개발에 반대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전쟁과 핵에 반대하는 반전반핵평화운동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제일의 과제는 미국의 핵 선제공격 옵션 폐기와 한국과 일본에 대한 핵우산 정책 폐기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미국의 일방적인 핵공격 전략을 폐기하지 않고서는 핵무기의 위험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특히 미국은 핵 비보유국에 대해서도 핵 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최소한의 핵확산방지체제인 NPT마저 심대하게 위협하고 있다. 둘째, 미국의 핵공격 전략은 한-미 군사동맹, 미-일 군사동맹과 연결되어 있고 이러한 군사동맹은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으로 표현되고 있으므로, 군사동맹의 해체와 주둔 미군의 철수 역시 필수적이다. 한미일 군사동맹은 이라크 전쟁에서 침략동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군의 신속기동군화와 더불어 앞으로는 아시아 분쟁지역에 있어서 언제든지 개입하는 체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군사동맹 해체와 주둔미군 철수를 위한 투쟁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가야 한다. 이라크 점령과 파병 반대투쟁,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은 그러한 의미에서 중요한 투쟁이다. 셋째, 전 세계와 우주를 군사화하고 핵군비경쟁을 야기하는 미국의 MD체제를 저지해야 한다. 레이건 시대부터 추진된 ‘스타워즈’의 축소판인 MD체제는 승리하는 핵전쟁을 위한 핵 개발을 동반하는 것이고 이는 우주핵무기로 이어진다. 특히 이는 북한과 중국의 위협론을 명분으로 삼고 있는 만큼 핵 없는 세계를 위해서는 반드시 철폐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핵폐기장 반대투쟁을 비롯하여 핵발전소 반대투쟁을 지속해야 한다. 한국의 반핵운동은 핵폐기장 반대운동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989년부터 2004년까지 여섯 차례에 걸친 핵폐기장 건설을 정부가 추진했지만 번번이 반대운동에 밀려 실패하였다. 안면도, 굴업도, 부안 등에서 주민들과 한 몸이 된 반핵운동의 끈질기고 격렬한 투쟁은 익히 알려져 있고 그에 따라 핵에 대한 인식도 많은 부분 바뀌었다. 그리하여 핵폐기물을 만들어 내는 핵발전소 가동 중단, 핵폐기물의 수송 반대, 핵폐기물의 지하저장 반대와 같은 원칙도 대중운동에 각인되었다. 죽음을 부르는 핵산업과 핵발전소, 핵 폐기장을 반대하는 대중운동을 강화해야 한다. 우리의 적극적인 반전반핵평화를 향한 국제주의는 미국의 핵전쟁 전략과 핵무기 정책, 군사동맹과 미군주둔을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세계전략을 변화시키고 헤게모니를 허물어뜨리는 투쟁이 핵무기 없는 세계와 한반도를 불러 올 수 있다.
번역: 사회진보연대 반전팀 이탈리아 헌법 11조는 "이탈리아는 침략전쟁을 할 수 없고 비폭력적인 수단으로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2005년 8월 현재 이탈리아는 점령에 개입하고, 분쟁 지역에 주둔해 있다. 8월 4일, 이탈리아는 유엔의 위임을 받아 아프가니스탄을 통제하는 (1) 26개 나토(1946년에 설립한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국과 (2) 7개 다른 국가로 구성된 평화유지군(ISAF)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라크에서 이탈리아는 ‘의지연합’의 일부이며 3000명의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이탈리아 부대는 2003년 5월 1일 이라크에 파병됐고, 공식적으로 ‘평화유지임무’를 띠고 낫시리아 지역을 책임지고 있다. 낫시리아는 이탈리아의 국영 에너지 산업체 ENI의 석유 이권이 달려있는 지역이다. 그곳은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석유공급지로 기대되던 지역이다. 이탈리아에서 청년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징병제가 없어진지 2년이 지난 후 ‘직업’ 군대가 발전해왔다. 1990년대, 이탈리아가 NATO를 통해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파병되었을 때(이탈리아는 코소보에서 여전히 ‘정상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탈리아가 헌법을 위반했다는 사실은 평화주의 연합과 시민사회 조직들로 구성된 반전 그룹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다. 반전 그룹은 정부가 선전하는 ‘평화유지 임무’가 이탈리아인과 다른 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무력간섭이라며 분명히 비판했다. 또한 군사 예산 증액에 의해 사회, 공공 예산의 축소를 초래한다고 비판했다. 전쟁과 점령의 동기가 된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정치경제적 식민화 계획은 모든 정부가 공유한 것이었다(유고슬라비아 내전 참가는 사민주의 정부가 결정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이런 문제를 제기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 평화주의자와 반제국주의 그룹은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탈리아의 미군 기지와 나토 확대 2차 세계대전 이후로, 그리고 동유럽과 걸프 지역으로 확장하려는 [미국과 나토의] 최근 시도 이전에도 이탈리아는 지중해 지역에서 미국 헤게모니를 지키는 문지기였다. 이탈리아는 미국과 NATO에게 군사기지를 제공했다. 이탈리아에는 미군 173여단 사령부가 주둔하는데, 이는 2003년 이라크에 최초로 파견된 부대다. 이탈리아 미군 기지에는 무기가 저장된 병참기지가 있고, 거기에는 (의회의 토론 없이 비밀 양자협상에 의해) 핵무기도 존재한다. 1980년대 국민투표를 통해 민간 핵 발전과 군사적 목적의 핵 개발을 금지해서 이탈리아가 법적으로 핵 국가가 아니지만 미국의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다. 미 공군 비행대는(31전투비행단, 16비행대대)은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해 있다[이탈리아 아비아노 공군기지는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발칸반도와 마주한 전략적 요충지다. 유고 보스니아 내전 당시 작전에 참여한 나토 전폭기는 아비아노 기지에서 출격했다-역주]. 미군 해군 사령부는 나폴리에 있고, 해·공군 합동부대는 시실리에 있으며 이라크 전쟁에 활용된 잠수함은 사르디니아에 정박해있다. 이러한 부대는 (열화우라늄 무기를 포함하여) 수천 명의 군인, 훈련시설과 사격장을 수반한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수 백 개의 군사기지는 공간 이용이 경제·생태·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통제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나 법적 관점에서 볼 때 시대를 거스른다. 이러한 문제는 여러 군사기지 지역에서 기지반대운동 그룹이 성장한 이후로 오랫동안 제기되었다. 1999년 이후로 새롭게 등장한 군사화의 양상은 나토의 변형이다. 나토는 세계 곳곳에서 전면적이고 활동적으로 무력개입을 벌이고 있으며, 나토 가입국가의 수는 계속 확대되고 있다. 나토 통합연합군(CJTF)을 창설하자는 제안은 초국적 군대의 권한을 완성할 것이다. 나토는 미군이 지휘하는 17000명의 ‘신속대응군’을 보유하고 있고, 타란토에는 (해상신속군) 해군기지가 있다. 동유럽으로의 확장과 나토의 지휘·병참 구조의 재배치는 현재 진행 중이다. 나폴리는 지중해에서 나토의 전략 지휘부가 될 것이며, 타란토는 지중해의 가장 큰 해군지원기지가 될 것이며, 사르디니아의 잠수함 기지는 확장될 것이며 투스카니아에 새로운 기지를 건설될 것이다. 이러한 재배치는 지중해 남부 해안과 중앙아시아의 먼 곳까지 병력 투입을 가능케 하는 방향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또한 군사화에 발맞춰 유럽 군대 창설도 제안되었다. 이탈리아 반전운동의 배경과 2001년 제노바 G8 반대시위 평화주의 그룹, 반제국주의 그룹을 막론하고 이탈리아 반전운동의 배경은 유고슬라비아 내전 개입 반대 운동, 미군기지 반대 운동, 이탈리아 주둔 미군의 1차 걸프전쟁 파병 반대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그것은 무기판매 반대 캠페인(이탈리아는 비인간적인 지뢰와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는 소형무기, 전자 표적장치가 탑재된 무기산업 수출분야에서 선두를 유지해왔다), 군사기지를 반대하고 (소음과 화학적, 원자력 오염에 대항하여) 오염되지 않은 바다와 하늘,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캠페인과도 연관이 있다. 평화주의 그룹과 반제국주의 그룹들은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1회 세계사회포럼으로 촉진된 더 광범위한 운동에 참여했다. 반전 그룹은 2001년 7월 제노바에서 열린 G8 반대 시위를 통해 성장했다. 이때 광범위한 세력은 G8이 민중의 삶과 경제를 세계적으로 통제하는 것에 저항하자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모였고 연합을 형성했다. 이때 반전 그룹은 이탈리아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발전시키고 부의 정의로운 재분배와 인권과 시민권을 위해 투쟁해온 운동들과 결합했다. 여기에는 페미니스트, 좌파정당, 청년들의 비판적 운동과 사민주의 중도파, 일부 노동조합 조직들, 환경운동가들 그리고 남반구 민중과 연대하는 그룹들(팔레스타인 연대 그룹, 걸프전·아프리카 내전 피해자 지원 그룹, 인권 페미니즘 운동, 종교 그룹과 교파통합 그룹)과 함께 했다. 행사를 준비하며 이러한 모든 집단들이 모여 1년 여 동안 광범위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조직적 토론이 진행되었고, 국제운동과 결합했다. 이는 상호 간에 만남과 이해의 계기로 작동했고,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차이를 메우고 연대와 교류를 형성해냈다. 제노바에서 열린 G8은 풍부한 생각들과 참여를 위한 만남과 많은 이탈리아인에게 보편적인 정치적 행동을 제공한 최초의 기회였다. 하지만 G8은 이탈리아에서 민주주의의 재앙이었고, 많은 참가자들이 G8의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의식하는 순간이었다. G8 반대 시위에는 모든 연령대의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참여했다. 조직되지 않은 민중들이 참여했고, 우리와 전 세계를 위한 정의로운 세상을 요구했다. 물론 제노바 시내를 분할하기 위해 벽이 세워졌고, 회담에 반대하는 것은 폭력적이라고 주장하는 시끄러운 선동은 도시 거주자들을 교외로 떠나라고 외쳤다. 경찰에 의한 도발과 공격, 카를로 줄리아니 살해, 학교에서 잠자던 92명에 대한 폭력, 죄목도 없는 사람들에 대한 불법적인 구류가 벌어졌다. 제노바에는 불법적인 공격이 벌어진 사실을 알고 분노하여 시내로 돌아온 30만 명의 거리 목격자들이 있었다. 젊은이들은 한번도 공권력과 경찰관을 공격자로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놀랐다. 좀 더 나이가 많거나 정치적인 사람들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독재로 전환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후 반전운동의 성장을 지지하는 사고와 행동이 물결을 이루었고, 광범위한 반전운동을 가능케 하는 네트워크가 결성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전쟁에 저항하기 위해 모인 거대한 “평화를 위한 사람들”은 제노바에서 G8반대 시위를 경험했다. 이것은 이탈리아에서 광범위한 반전운동의 기초를 세우는 첫 번째 행동이었다. 이들은 각각의 정당, 비정부기구, 조직을 넘어서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서로 합의를 창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전쟁의 나팔이 울려 퍼질 때 그들은 반세계화 운동에 대한 지지와 세계 통치자들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2003년 2월 15일 로마 시위 9/11이 벌어진 후 미국 정부가 아프가니스탄 침략 계획으로 화답했을 때, 우리는 11월 10일 로마에서 전쟁에 저항하는 첫 번째 전국 집회를 개최했다. 전쟁반대 깃발 아래 제노바의 모든 조직과 다른 지역의 더 많은 조직에서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부유한 전직 사업가이자 테러리스트의 옛 친구인 부시에 의해 지목된 소그룹을 목표로 한 나라 전체를 대상으로 역겨운 전쟁을 선포한 것에 저항하는 행진을 진행했다. 제노바의 모든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시민사회 그룹 등 몇 개의 크고 다양한 색깔을 가진 집단들과 몇 단체가 추가되어 2002년 11월 피렌체에서 최초의 유럽사회포럼을 조직하였다. 포럼의 폐회 행진은 미국의 이라크 전쟁 위협에 대항하는 유럽 최초의 저항이었다. 포럼이 유럽 반전연합 프로젝트의 모양새를 잡아가는 동안 우리는 포럼이 전쟁에 반대하는 유럽의 모든 민중을 통합하고 힘을 증진시킬 수 있는 기제가 되도록 노력했다. 연합은 두 가지 목표를 확정했다. 하나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 선언에 반대하는 유럽 민중의 광범위한 합의를 드러내도록 모든 정당과 시민사회를 포괄하는 연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미국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도록 공격이 감행되기 전인 2003년 2월 15일에 유럽에서 대규모 집회를 조직하자는 것이다. 연합은 “이라크 전쟁 반대”를 공통 구호로 확정했다. 2월 15일 집회를 세계적으로 더 확장하기 위해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회의를 열자는 이탈리아의 제안으로 세계 여러 단체들이 모였고 전 세계 반전, 반세계화 운동과 농민 그룹이 이를 지지했다. 이것은 피렌체의 씨앗을 72개국 수백만의 단단한 대오로 변형시켰다. 이탈리아에서 2월 15일 집회를 준비하기 <전쟁을 멈추자>(Fermiamo la Guerra)라는 이름의 연합을 형성했다. 이 연합은 단순히 기존 반전 그룹이 모인 게 아니었고, 이라크 전쟁 반대라는 목적을 위해 적극적이고 비판적인 활동을 펼치는 모든 부문이 결집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전국적 반전운동의 첫 단계에서 제기된 특정한 반전 이슈(이라크 전쟁 반대)가 다른 세력과 시민·정치사회의 그룹에게 확장되도록 해야했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이슈가 제한되었다. 이라크 침략전쟁이 허약한 유엔의 결의를 위임받은 것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집회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해야만 한다는 주장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마침내 “무조건 이라크 전쟁 반대”라는 구호로 통일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 구호는 참가자들의 기본적인 입장이 되었다. 사민당과 중도파 당들은 과거 나토가 유고슬라비아에 개입하기로 결정했고 발칸전쟁에 참가한 책임이 있었지만, 이번 경우에는 모호하게 스스로를 평화주의자라고 선언하면서 유엔이 결의안을 통해 침략을 인정한다면 이라크 전쟁을 수긍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행진을 장려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지지자는 불만을 드러냈고 행진에 참여했다. 2월 15일 집회에 많은 참가자들이 참여하는 데 성공한 것은 2002년 11월부터 이탈리아 각 도시와 마을에서 조직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지역적 동원 과정에서 전쟁 반대를 지지하는 전국적인 목소리가 표출되었다. 그리고 집회 참여를 고무하고 조직했던 조직을 통해 동원될 수 있었던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로마에 모일 수 있었다. 2월 15일 집회에 수백만 명이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참가자들의 양심과 열성의 결과이자, 전쟁에 반대하는 이탈리아인의 진심이 우러난 결과였다. 이라크 전쟁 개전과 반전운동 내부의 논쟁 특이하게도 2월 15일 성공과 이라크 전쟁의 개전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이탈리아 반전운동은 두 번째 국면에 들어섰다. 반전운동에 참여한 그룹들 사이에서 반전투쟁의 방법론과 수단을 둘러싼 지속적인 토론이 벌어졌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반전투쟁에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았으며 대개 다른 관심사로 활동을 펼쳤던 그룹들은 2월 15일 집회를 위해 노력하고 다양한 참가자들을 결합시켰지만, 그들은 다른 사업과 목표를 증진하기 위해 동원의 성공을 활용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또한 운동에 참여하는 그룹들의 입장의 다양성 때문에 운동 노선이 전략적이지 못했으므로 더 많은 토론이 필요했다. 또한 UN 결의 이후 반전 집회를 중단하려는 그룹들이 연합으로부터 이탈했다. <전쟁을 멈추자>에 머물렀던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논쟁이 이어졌다. 이 논쟁은 우선 전쟁 반대 투쟁을 위한 수단이 적합한가와 관련 있었다. 투쟁방법으로 직접행동을 검토했고, 직접행동이 폭력적이면 안 된다는 주장도 나왔다. 세계 대다수가 반대를 무시하고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한 사실에 사람들은 환멸을 느꼈고,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쟁을 반대하는 의견은 계속 높아졌고(도시의 창문마다 반전을 표현하는 무지개 배너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후에 전쟁을 반대하는 행동이 조직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4월 12일에 다시 한번 수십만 명이 모인 집회가 열렸다. 또 한편 이탈리아 정부가 미국의 전쟁을 지지한 바로 그 때 소규모 집단은 다른 행동을 취했다. 이탈리아 영토에 있는 미군 기지가 침략에 사용됐다. 이라크 침략에 쓰일 미국 군대와 무기가 이탈리아 영공과 영토를 지나가는 것을 이탈리아 정부가 허락했다. 이탈리아 반전운동은 수송을 저지하기 위해 행동했다. 사람들이 철도 선로와 도로, 군기지 입구에 앉아서 며칠동안 수송을 방해하고, 전쟁의 기계에 “모래 낟알”을 뿌렸다. 평화주의자, 사민주의 중도파, 단체, 여성, 일부 노조와 비정부기구들 사이에서 “불복종 직접 행동” 참가가 확산되었다. 하지만 불복종 직접행동에는 불가피하게 적은 수의 기동력 있는 행동 그룹이 적합했으므로 2월 15일 집회에 참가한 모든 세력들이 참여할 수 없었고, 시민 불복종은 반전운동의 모든 그룹이 참여하는 실천이 될 수 없었다. 경찰과의 대립이 다시 불거지면서 폭력에 대응하는 수단에 대한 내적인 논의가 강제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반전연합에 참여하는 그룹들의 정치문화의 차이가 드러났다. 이 논쟁은 전적으로 건설적으로 발전된 것은 아니다.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차이를 둘러싸고 역사적인 상호 불신이 다시 나타나 논의가 교란되기도 했다. 이는 제노바와 <전쟁을 멈추자> 연합 사이에 공존한 것이었다. 따라서 행동을 위한 공통의 수단을 명확하게 수립하고 일치된 전략을 모색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쟁점의 하나는 경찰의 물리적 폭력을 어디까지 참을 수 있고, 언제 대응해야 할 것인지 하는 문제였다. 좀 더 들어가 보면 논쟁은 투쟁을 일반화하기 위한 요구들 사이의 대립을 포함하고 있었다. 오직 사회체계의 급진적인 변화만이 세계의 “전쟁 건설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입장, 평화주의자와 시민 불복종 경향을 포함하는 중간적인 입장,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빼낼 수 있는 의회 내의 방법을 찾기 위해 사회민주당의 관료들과 대화하는 것에 특권을 부여하는 또 다른 극단적 입장들이 대립했다. 따라서 전쟁이 시작되면서 이전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가 불거졌고, <전쟁을 멈추자>연합과 활동을 조정하는 데 문제가 생겼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2월 15일 국제적인 행동을 통해 결정했던 것, 즉 새로운 광범위한 연합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잊기도 했다. 또한 전쟁이 더 이상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크나큰 파괴를 불러올 수도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도 했다. 좀 더 폭넓은 전망을 유지하는 것은 반전운동 내에서 전략적 논쟁을 발전시키고 정치문화적 차이를 객관적으로 다루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 이와 유사한 갈등이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발생했다. 이라크 종전선언 이후 이라크 저항운동에 대한 토론 부시가 2003년 5월 1일 종전을 선언한 후, 이탈리아가 이라크 의지연합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은 평화유지임무라는 정부의 핑계로 인해 곤경에 빠졌다. 우리는 이탈리아의 전쟁 “임무”에 반대하고 안보 관련 입법과 군비 증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도록 사민당과 다른 정당들에 충분한 압력을 행사하지도 못하고 논쟁을 자극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에 대한 유엔의 선언은 미국과 이탈리아 지배세력을 만족시켰다. 반전운동은 충분히 행동을 통일하지 못했고, 한 나라의 반전연합이나 국제 반전연합은 군사주의와 무기개발에 반대하고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캠페인을 벌여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2004년 3월 다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자는 거대한 흐름이 나타났고, 이탈리아 북부에서 남부까지 전쟁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치는 순회투쟁을 준비했다. 캠페인 조직화는 2004년 1월 뭄바이 세계사회포럼 조직화로 인해 잠시 주춤했다. 2004년 반전연합의 전략적 전망을 둘러싼 차이들은 이라크 인민과 함께, 이라크 인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불행히도 이것은 우리의 입장과 전략에 대한 토론이나 이라크의 서로 다른 분파들이 지휘하는 저항을 지원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논쟁은 오히려 쟁점을 바꾸어 놓았고, “저항”의 적법성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다.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적, 전략적 견해가 드러났다. 따라서 유엔이 인정한 이라크인의 자결권을 위해 이라크를 지원할 실질적인 수단과 방법에 초점을 맞춰야 했던 논쟁은 더 이상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자결권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며, 2차 세계대전에서 점령에 저항했던 이탈리아의 민족적 유산의 일부분이다). 2004년 8월부터 이탈리아 반전 투쟁 내부 혹은 주변 사람들을 겨냥한 납치가 시작되었다. 나자프가 공격당할 때 프리랜서 리포터인 엔초 발도니가 납치되었고, 1992년 이후로 이라크의 독립 비정부기구인 <바그다드로 가는 다리>에서 일했던 두 명의 시모나(이들은 이탈리아가 이라크에서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할 때 어떠한 정부 보조도 거절했다), 일 마니페스토 신문의 저널리스트로서 이라크 민중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려고 일했던 줄리아나 스그레나가 차례로 납치됐다. 미국이 팔루자 공격을 시작했다. 팔루자 공격은 계획적으로 생명을 파괴했고, 화학무기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에서 운동의 모든 요소들이 참여하는 연대 행동의 물결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 2주년에 이탈리아 운동의 서로 다른 부문들은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 운동의 한 부문은 “사회적 유럽”이라는 이슈에 더욱 개입하면서, 유럽사회포럼에 참여했고 브뤼셀 집회를 소집했다. 반제국주의자들과 평화주의자 그룹들은 로마에서 전국 반전 행진을 개최했다. 이탈리아 반전운동의 다양한 정신은 더욱 명확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고, 인권과 시민권을 위한 더 강력한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과 이라크의 저항을 지지하는 투쟁이 형성되었다. 현재 이탈리아 반전운동 내에는 다양한 정신들과 운동들이 공존한다. 그 운동들은 연대를 나누었다. 이제 다양한 정치적 주체들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으며, 그들은 각기 다른 이라크 내부의 파트너들과 결합하고 있다. 이탈리아 반전운동의 다양한 경향들 이라크 전쟁 이전에 미국과 나토 기지에 반대하는 캠페인, 군비 증대와 분쟁국가들에 대한 무기판매를 금지하기 위한 캠페인, 이라크 시민사회와의 연대캠페인, 소위 작은 전쟁"을 고발하는 캠페인을 펼쳤던 반전운동 부문은 이탈리아 헌법 11조항을 존중하고 이를 유럽헌법에 포함시키자는 캠페인과 이라크 국제전범재판 운동(2004년 2월부터 2005년 3월까지 3회를 개최함)을 펼쳤다. 이러한 운동들의 대부분은 다른 나라의 동일한 운동과 통합되거나 통합을 모색했다. 다른 그룹들은 이라크와의 연대 캠페인에 중점을 둔다. 그들은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권리와 이라크인의 자율적인 선택을 지지하고 이라크 저항세력과의 연대하기 위한 캠페인을 펼친다. 이라크 사회의 구성요소인 사회와 시민 내의 대화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수단이 되고, 점령과 학대에 저항하는 도구가 되고, 이라크 사회에서 반제국주의 세력의 세력화를 위한 전략이 되며, 이들 세력이 미국의 점령에 대한 저항과 사회주의적인 새로운 이라크를 건설하는 핵심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반전운동 집단들 내에서 공존한다. 양자의 운동들은 미국이 이라크를 연방주의로 분할하고 종교 국가를 수립하려는 시도에 대항하는 이라크 사회의 저항세력을 지지한다. 이라크 저항세력의 신중한 무장투쟁에 대한 이탈리아 반전운동 내의 입장은 서로 다르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반전운동은 이라크 내의 서로 다른 집단과 연대한다. 교회와 가까운 관계를 맺거나 점진주의와 갈등의 제도적 해결을 선호하는 사회민주주의 전망에 가까운 평화주의 분파가 새로운 운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교회, 노동조합, 도시 대표, 비정부기구, 시민사회 조직을 통해 현재 유엔을 “인민의 유엔”으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그들은 유엔 헌장의 원칙은 여전히 가치 있으나 내부적인 구조와 기능을 규정하는 규칙을 바꿔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유엔을 개혁하기 위해 유엔을 다시 생각하자는 캠페인을 펼친다. 반전운동이 연대하고 공동의 장기적인 목표를 선언하기 위해서는 상호 교육과 투명한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이는 대중들의 광범위한 반전 정서와 계속 결합하고 대중들이 더 강력한 투쟁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다. 군사적 침략 수단이 (미국 기업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미국 정부와 동맹국들이 침략한 나라의 자원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고, 선례가 없는 파괴의 가능성을 열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반전운동은 모든 경향들을 포함하고, 현재 점령과 확전에 저항하는 운동의 통합과 발전을 이뤄야 한다. 우리는 전술적 목표들을 발전시키려면 독자성과 협력 사이의 역동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공동의 목표와 통일성을 형성하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경험하였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활동가들의 광범위한 참여가 이루어졌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변증법적인 활동을 통해 전쟁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운동들의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캠페인을 조직하는 그룹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요소들 간의 토론을 촉진하며 전략적 동맹을 정의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대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문제들을 더욱 숨김없이 제기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점령당한 국가들을 외부가 지지하는 형태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군사주의의 단계적 발전을 막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토론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지원을 받아들이는 주체에 대해 토론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침략, 사회관계와 생활조직의 파괴, 변질을 겪은 곳에서, 게다가 테러리즘이 강화되고 있는 곳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게 현재 무엇을 의미하는지 토론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저항의 행위자가 누구인지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부의 재분배와 시민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권리의 향유에 대해 평등주의적인 입장을 지닌 정치조직의 등장을 지원하기 위해 이탈리아와 이라크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직시해야 한다. 이탈리아 반전운동의 발전을 위한 제언 마지막으로 아직은 상상에 지나지 않지만 이탈리아 반전운동의 행위자와 행동은 다음과 같이 발전해야 한다. 첫째, 평화주의 프로젝트. 이는 종교집단, 지역기관, 노동조합, 좌파정당의 분파, (비무장화, 국방예산 반대, 무기판매 통제, 지뢰 판매 반대, 유엔 개혁을 위해 캠페인을 벌이기 위해 탄생한) 소규모 직접행동 집단들의 집합을 통해 구성되어야 한다. 둘째, 보건과 교육 분야와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집단들의 시민사회 연대 프로젝트. 이는 독립적인 비정부기구, 시민사회, 노동조합, 서비스 조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이는 이라크인이 이라크 외부에서 벌이는 활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활동을 증진해야 한다. 이는 페미니스트 집단과 연대해야 하며, 이라크 감옥에 있는 수천 명의 인민들의 구금에 반대해야 한다. 셋째, 저항과 연대하기 위한 프로젝트. 이는 반제국주의 집단, 노동조합, 일부 좌파정당의 분파, 청년과 불복종 집단의 중심세력으로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군사기지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펼쳐야 한다. 물론 위의 구상은 어느 정도 자의적인 방식으로 구분된 것이며 프로젝트들의 수렴을 고려하지 않았지만 행위자 각각이 자신의 정체성과 전략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정체성과 전략이 반전운동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지식인, 예술가, 활동가, 전국적인 반전포럼과 국제네트워크(예를 들어 전쟁에 반대하는 여성 네트워크, 이라크국제전범재판, 사회포럼에 참여하는 반전 연합체들 대부분)는 반전운동의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촉진할 것이며 이탈리아 반전운동 내부의 열린 토론을 지속하도록 기여할 것이다. 이러한 주체들은 지역적 행동과 국제적으로 조정된 행동들 사이의 변증법을 촉진할 것이며, 포위공격, 점령, 공습에 처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매일 풀어야만 하는 진정한 모순에서 유래하는 문제들에 대해 다양한 제안들을 개방할 것이다. 우리는 다가오는 전쟁의 암운에 대처할 것이다. 이러한 주체들과 운동 사이의 동력은 인민들이 캠페인에 새롭게 참여하도록 이끌 것이며 일관된 반전운동을 형성할 것이다. 반전운동은 자원과 생명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현재 진행중인 전쟁과 점령, 사회의 전반적인 군사화에 반대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며, 모두를 위한 선과 기회에 접근할 수 있는 평등한 사회를 위한 길을 발전시킬 것이다. 누군가는 최근 몇 년 동안 진정한 세계반전운동을 창출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할 것이지만, 수많은 나라에서 우리는 분명히 투쟁을 고양했고, 세계반전운동을 건설하는 데 따르는 몇몇 어려운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역사의 현 시점에서 반전운동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우선적인 기초다. 현재 반전운동의 방법론과 전략에 대한 토론을 시작한 것이 이미 중요한 성과일 것이다. 이러한 토론은 왜 현재 세계시민사회가 변화해야 하는지, 전쟁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이데올로기적, 윤리적 입장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지, 분쟁을 해결하고 새로운 분쟁을 금지하기 위한 인민들의 동맹을 어떻게 형성하고 무엇을 제안할 것인지 직시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반전운동은 팔레스타인과 이라크에서 인민들의 자율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 8월 23일 개최된 '테러와 이슬람에 대한 왜곡된 시선' 토론회자료집입니다. - 발제 1 : 이슬람과 테러를 둘러싼 오해 (이슬람문화연구소 이희수 교수) - 발제 2 : 이슬람과 테러에 대한 왜곡된 정보전달 비판 (팔레스타인평화연대 미니) - 토론 1 : 한국 시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무슬림 - 이스탄불문화원장 에르한) - 토론 2 : 바람직한 언론의 역할 (언론기자 - 프레시안 박인규 대표) - 토론 3 : 테러방지법 비판 (테러방지법반대국민행동 박성희 민가협 간사) <토론내용 - 정리:이라크모니터팀> 발제 1 : 이희수 이슬람과 테러 : 제국주의 미국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허상 26년동안 이슬람 세계에서 필드워크를 해 왔지만, 911 이전에는 한 번도 테러나 위해의 위협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 신문을 보면 너무 위험한 곳에 다녀온 것 같다. 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당시 방송 토론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참여해서, 당시 현지에서는 언론에서도 매일 얘기되고, 지식인들 사이에 동의가 형성돼 있던 견해를 소개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미국의 중동 전략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따라서 미국과 사전 모의가 있었을 것이고 시나리오에 따라 전개됐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 얘기는 토론 참석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결국 녹화방송이었던 까닭에 방송되지 못 했다. 당시 이라크는 우리 나라와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였는데도 이런 견해를 소개하는 것 자체가 죄악시되는 분위기였다. 또 다른 경험을 얘기하고 싶다. 중동 관련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수업을 시작하기 전 학생들에게 “이란”이라고 하면 뭐가 떠오르는지 생각나는대로 적어보라는 퀴즈를 내곤한다.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악의 축’, ‘테러지원국’이다. 그런데 이란은 우리나라와 4번째로 교역량이 많은 나라다. 이란의 건설 플랜트 수주에서 한국이 1위이며, 가전제품의 80%, 자동차의 35%가 한국 제품이다. 이란은 우리가 원유를 2번째로 많이 수입해오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떠오르는 것은 악의 축, 테러지원국 뿐이다. 미국에게 악의 축인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선의 축이 아닐까? 얼마 전 테러대책반 강연을 갔는데 경찰 한 명이 지금 국내에 이란인 2400명이 있는데 1:1로 감시하고 있다면서 귀찮다는 말을 해서 화를 낸 적이 있다. 이란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나라인지 전혀 모르는 소리인 것이다. 그럼 중동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어떨까? 한마디로 근면, 성실이다. 70, 80년대 중동에서 쉬지 않고 일하던 한국인의 모습에 대한 이미지가 가장 강하다. 그래서 한국 제품에 대한 신뢰도도 높은 것 같다. 최근에는 한류 열풍이 이 지역에까지 도달했다. 카이로에 가면 아랍어를 유창하게 하는 배용준의 ‘겨울연가’를 볼 수 있다. 너무 인기가 많아서 한 번 방영된 뒤 몇 주 뒤 바로 재방영에 들어가서 현재 방영 중이다. 만일 비슷한 스토리의 미국이나 영국 드라마였다면 방영조차 안 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중동과 이슬람을 싸잡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만 인식하고 있다. 우리가 테러 얘기를 하려면 국가테러리즘을 얘기해야 한다.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국가테러리즘을 얘기하지 않고 어떻게 테러를 논할 수 있을까. 사실 테러리스트 분류도 미국 중심이다. 알다시피 현재 테러리스트라고 불리는 많은 사람들이 예전에 미국 CIA의 손에 큰 사람들이다. 이들이 친미적일 때는 테러리스트가 아니고 반미가 되면 테러리스트가 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언론들은 통신사 기사 번역해서 올리기 바빠 우리 잣대, 우리의 프리즘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미국의 적을 우리의 적으로 그리고 있다. 다행히 2002년 이후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시각으로 보려는 노력이 상당히 커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의 시각에서 이슬람과 중동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발제 2 : 미니 이슬람은 테러리즘인가? -> 발제문 참조 토론 1: 에르한 아타이 무슬림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하고 싶다. 나에게 이슬람은 모기나 파리 조차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종교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이슬람이 전 세계 사람들의 미움과 걱정을 사고 있는지” 또 그렇다면 “이 사태에 대한 이슬람의 책임은 없는지”가 나의 고민이다. 내가 좋아하는 꾸란 말씀을 하나 인용하겠다. “지상에 해악을 끼치지 아니한 자 가운데 만일 한 사람을 죽이면 전 세계 모든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고 한 사람을 살리면 세계 모든 사람을 살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선지자 무하메드께서는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슬람을 믿고 남에게 편안함을 주며 해를 입히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답하셨고, 이슬람에서 가장 훌륭한 행동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 모두에게 인사하고 음식을 먹을 때 초대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이슬람의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지하드가 뭐냐는 질문에 “큰 지하드, 작은 지하드가 있다. 작은 지하드는 나를 공격하는 사람과 전쟁하는 것이지만 큰 지하드는 내 마음 속의 악행과 전쟁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큰 성전에 나서라”고 말씀하셨다. 무슬림에게 정말 중요한 지하드는 자신의 나쁜 마음과 싸우는 것인데 지금은 전혀 잘못 알려져 있다. 두 번째 칼리페 요메로는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에게 ‘밭과 과일 정원들을 해치지 말라. 어떤 종교든 예배중인 신앙자들에게 손대지 말라. 다른 종교의 성직자들을 존경하라. 민간인들을 죽이지 말라. 들어가는 지역의 국민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명했다. 그런 군인들이 전쟁에 나가서 무슨 일을 했을지 상상해보라. 물론 이슬람 세계의 문제도 있다. 이 지역은 대부분 19세기부터 식민지였다. 주로 민족주의와 종교에 기댄 독립 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그 뒤 권력을 잡은 자들은 서구의 영향을 받아 정치를 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보장받는데 주로 관심이 있었다. 왕위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부를 독점하는 경우, 미국의 지지 받았던 사담 후세인 등이 그렇다. 그러자 국민들은 지도자를 좋아하지 않고 계속해서 식민지 시대처럼 느낀다. 그렇다보니 무지함, 가난함, 나라 안 여러 민족 사이의 분쟁이 이슬람세계의 문제가 되었다. 또 다른 나라가 잘 사는 것을 알게 되면,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게 되고 잘 사는 나라에 거부감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오사마 빈 라덴처럼 미국이 아프간 전쟁 당시 키우던 인물이, 이제 다른 방식으로 미국에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슬람 나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진정한 이슬람 나라는 없다. 국가가 이슬람 법으로 다스려져야 하고 모든 국민들이 이를 인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리고, 테러의 개념 정리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지금은 누구에게는 테러리스트이고 누구에게는 독립운동가인 상태가 아닌가. 한국 내에도 20만명 이상의 외국인 노동자가 있다. 한국에서도 세계화를 자주 얘기하지만, 진정한 세계화란 다른 문화를 좀 더 넓게 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보는 것은 문제다. 유태인 학살 때문에 모든 독일인이나 모든 기독교인을 테러리스트라고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토론 2: 박인규 바람직한 언론의 역할 배우려는 자세로 나왔고 많은 것을 배웠다. 바람직한 언론의 역할이라는 주제가 주어졌는데 이는 언론이 바람직하지 못 하다는 얘기 아닌가. 원론적인 얘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언론의 역할이란 한 마디로 진실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사실(fact)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 진실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스라엘이 가자에서 철수하는 것 가지고 38년만의 철수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부분적인 얘기일 뿐이다. 가자 지구에서 정착촌은 21개 뿐인데 서안 지구에서는 수십만명이 살고 있다. 샤론이 일방적으로 가자지구를 조금 떼주고 서안 지구를 먹겠다는 것 아닌가 싶다. 지금 가자 지구에서 돌아가는 사람에게는 가족당 25만 달러를 지급하고 있으며, 현재 가자지구 철수를 취재하기 위해 모여든 기자가 6천명이라고 한다. 팔레스타인 가옥이 3천 채 파괴될 동안 보도 하지 않아던 기자들이 말이다. 가자 철수의 의미란 국제적 협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서안을 먹겠다는 계획인 셈인데 이게 언론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특히 국제 문제에 대해 총체적 진실을 한국 언론이 전하지 못 하고 있나. 한국이 기본적으로 외국의 역사적 지식에 일천하기 때문이 아닐까. 게다가 언론은 매일 일어난 새로운 사건을 쓰는게 기본이 되고 그럼 그 텍스트가 필요한데, 그것이 이른바 서방측 텍스트다. 깊이있는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이 이를 받아 적다보면 가자 철수가 중요한 것처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력을 갖춘 기자가 아랍 지역에 상주하면서 기사를 쓴다면 다르겠지. 그러나 일단 서방 언론에 대한 정보 의존이 제일 큰 한계라고 본다. 일본 같은 경우 프리랜서 언론인이 꽤 있고 이들이 팔레스타인 등에 상주하면서 깊이 있는 기사를 낸다. 이를 시도하는 분들이 한국에도 몇 분 계시지만 아직 부족한 셈이다. 또 하나는 우리 나라의 위상 자체가 미국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건국부터 시작해서 미국의 안보 우산 등 미국의 영향은 매우 크다. 국민들이 이라크 전쟁의 부당함을 알면서도 군사를 보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경제 안보 등에서 여전히 미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소파를 평등하게 개정한다 하더라도 주한미군 전면 철수를 전국민적인 목소리로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미국 사람이 역사에 무지하다는 책을 하나 봤다. 중동에서도 이란, 오스만 제국 등에서 의회 수립 등 민주주의 노력이 있었는데 이를 막은 것이 바로 식민주의자들이었다. 특히 이란 같은 경우 영국과 미국이 정부를 무너뜨리고 왕정을 세운 바 있지 않냐. 중동지역에서 미국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기 국익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우디는 1년에 수십명씩 참수되는 나라인데도 미국이 문제를 삼지 않는다. 얼마전까지도 미국의 최대 관심사가 유럽과 동아시아였는데 이제 중동으로 돌리고 있다. 중동에서의 문제점이 기본적으로 미국의 무리한 세계전략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프레시안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테러도 미군에 대한 테러와 민간인에 대한 테러는 분명 다르다고 본다. 83년 레바논에서 미군이 자살폭탄으로 200명 죽어서 철수한 적 있다. 주로 이렇게 군인을 대상으로 하다가 90년대 후반 이후 민간인 대상으로 바뀐 것 같다. 저항이라고 하지만 문제가 있다고 본다. 물론 무조건적인 것은 아닌 것을 안다. 마드리드는 스페인 총선, 런던테러는 G7 회의를 노린 것이긴 했다. 또 미국의 강경 정책이 이란의 강경파 당선을 낳았다는 점도 사실이다. 이런 점에 좀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 보도에 반영되려면 아직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토론 3. 박성희 테러방지법 입법 주장의 위험성 발제자가 주로 남자다.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일부러 자리를 앞쪽으로 바꿨다. 한 사회에서도 여성이 자꾸 소외받다보면 테러를 하게 되지 않을까.(웃음) 테러방지법에서 그 이름자체보다, 한 사회에 법제가 도입된다는 것이 그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면서 생각해보길 바란다. 2001년 11월부터 지금까지 매년 테러방지법 입법이 시도되고 있다. 그래서 겨울마다 여의도에서 살고 있다. 또 논의에 앞서 국가보안법은 48년, 형법은 53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형법이 제정될 때가 전쟁이 종료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전시상황에 입각해서 형법을 제정했다. 그래서 우리 형법은 전시형법으로서 매우 가혹한 법이다. 국가보안법은 더 심하다는 것을 알고 들어주기 바란다. 테러방지법은 2001년 11월 국정원이 느닷없이 입법청원했다. 이것이 무산되자 2003년에는 국회 발의로 형식을 바꿨다. 그리고 국회 공청회 등에는 국정원 직원이 시민사회보다 참석자가 3배 이상 참가하기도 하는 등 국정원에서는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16대 국회에서는 법안심사소위까지 가기도 했다. 당시 소위의 문제 때문에 다행히 중단,무산되었지 우리가 막은 것은 아니다. 테러방지법은 올 3월 15일 공성진 한나라당 의원이 국회정보위에 법안을 상정했다. 열린우리당에서는 김선일 씨 이후로 끊임없이 물밑에서 논의하고 있었다. 태스크포스팀까지 꾸렸는데, 조성태, 안영근, 최성, 김성곤 의원 등이 참여하고 있다. 시민사회가 열린우리당을 주로 만나면서 테러 관련해서 어떤 대책이 있는지 면담을 요구했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다가 8월 21일 조성태 의원이 의원서명 중이라고 밝혔다. 시민사회에서 2001년부터 시민안보를 어떻게 지킬지 논의하자고 할 때는 무시하더니 자기들끼리 법안을 마련해서 추진 중인 것이다. 이 2개 안은 매우 유사하며 국정원 입법 시도 법안과 비슷하다. 여기에는 대테러센터를 국정원에 두게 되어 있다. 대테러센터의 임무 중 일부는 국정원이 이미 하고 있는 고유 업무이며 테러 관련 인물 진행 정황을 탐지하는 것은 국정원에 수사권을 부여하게 된다. 또 테러정보 통합관리 부분은 모든 정보를 국정원이 통제, 재생산되는 상황마저 예견할 수 있다. 이런 위험한 법안이 논의되고 있다. 다시 국가 정보기관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내주게 될 수 있는 법안이다. 테러 관련한 법안이 없지 않다. 아웅산 테러 당시 통합방위법 제정 등 대테러 활동이 이미 여러 기구, 법을 통해 예비되고 있다. 그리고 전시형법인 우리 형법에는 이와 유사한 내용을 담은 내용이 매우 많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인천공항 테러 보안대책협의회 과장이 런던 테러 이후 인터뷰에서, 테러가 일어나자 바로 이 협의회가 가동되었으며 출입국 관리 등 탁월하게 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리고 7월 19일 경찰 대테러 센터가 문을 열고 경찰특공대가 테러 진압 훈련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국정원이 이렇게 이 법에 목을 매는 까닭은 국정원의 권한과 임무 확대 때문이다. 경찰 보안국도 사실 만만치 않다. 직제가 일제부터 대한민국으로 흡수. 그래서 경찰이 과도하게 보안 관련 업무를 맡고 있다. 직제가 할 일이 줄자 새로운 업무로 떠오르고 있는 대테러 업무를 두고 경찰과 국정원이 싸우고 있는 셈이다. 논의되는 법제가 인권 침해 우려가 있으면 신중해야 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많은 의원실을 찾아다녀도 토론 준비가 된 의원도 거의 없다. 실질적 민주주의를 논의하는 단계라고 하는데도, 테러에 대해서 원인이 무엇이고 그래서 무엇을 준비할 것인지를 얘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게다가 다른 의견에 대해서 너무 배타적이다. 테러가 왜 일어나는지 생각해보자는 것 자체도 위험시한다. 이대로 의원들끼리 얘기되거나, 이런 식으로 공론화되면 코앞에 닥친 테러라는 공포물을 가지고 이성적인 토론이 불가능 할 거라는 걱정이 든다. 더 많은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 <<질의, 응답>> 지은 : 많은 기사에 애매하게 나오는 “이슬람단체”라는 용어가 있다.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사용하고 계시는지. 박인규 : 이라크 내에서 저항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이슬람 세력인지 민족주의 세력인지 모르는 것 같다. 이슬람 세력이라는 추정을 하고 그래서 그냥 그런 용어를 쓰는 것 같다. 자마일이라는 기자가 10개월 이상 자르카위를 추적했는데 현존인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이런 기사는 뉴욕타임즈 등에 안 나온다. 하지만 매일 기사를 쓰다보니 매일 기사꺼리를 주는 언론을 베끼게 된다. 기본적 한계는 기자들이 이런 내용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언론 내부로 가서 보자면, 우리 나라에는 신문사 순환 보직이라는 제도가 있다. 2-3년 하면 다른 부서로 돌린다. 게다가 국제부 내에서도 고참은 미국, 일본 가고 초보 기자들이 중동 가는 식이다. 그러니 깊이있는 기사를 기대하기 어렵다. 기자들이 공부를 하면서 해야하겠지만. 나만해도 아랍어를 모르니까 영어로 된 진보 매체, ZNET이나 커먼 드림스 등 참고하려고 애쓰지만 역시 시간이 많이 걸리고 어렵다. 물꽃 : 미군에 대한 테러랑 민간인 테러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언론에서 사실 민간인에 대한 테러를 확대하는 경향이 있다. 군사 공격까지 민간인 공격인 것처럼. 프레시안에서 이라크 보도할 때 그런 점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지. 박인규 : 전 CIA 국장 울시는 오사마 빈 라덴이나 알카에다 같은 경우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라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정치적 목표와 메시지를 가지고 테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식의 테러가 해결책이 될 수 있냐는 것이다. 중동의 석유 자원에 대한 서방측의 탐욕, 그리고 아랍측의 비민주화 이렇게 2가지를 문제라고 지적한다. 민간인에 대한 테러를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것이 건설적인 대안이냐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것이다. 대안은 그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테러가 그런 과정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정영섭 : 이희수 선생님 대테러 대책반과 간담회 하셨다고 했는데 궁금하다. 이희수 : 강연은 여기저기 많이 간다. 대테러대책반 강연 가서 들은 얘기다. 이슬람권 이주노동자 중 테러지원국 출신 노동자들은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분류를 하고 밀착 감시를 하고 있다고 한다. 대사관 직원, 유학생 이주노동자 모두 포함된다. 이란인이라는 이유로. 정확한 정보에 근거해서 국가 안보를 지키겠다는데 반대할 국민은 없겠지만, 우리 입장에서 보면 선의 축 국가인데도 미국의 이해구도에서 악의 축으로 보면서 감시, 의심하는 것이 공무원의 기본 인식이라는 데 안타까움을 느낀다. 청중 : 에르한씨에게 질문드리겠다. 주변 분 중 최근 테러 관련된 조사를 받았거나 감시를 받고 있는 듯한 경험을 한 사례가 있는지. 에르한 : 많이 있다. 우리 단체도 받았다. 내가 속한 이스탄불문화원은 민간문화원이다. 한국에서 터키 문화를 알려보자는 취지로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경찰청, 국정원 등에서 와서 문화원은 왜 건립했냐, 한국에는 왜 왔냐, 어떤 일을 하냐, 일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묻는다. 어떤 때는 한국 내 모든 터키 사람 리스트 가지고 와서 한 명씩 아냐 모르냐 묻기도 했다. 터키의 어떤 이슬람 단체와 관계있는지 묻기도 한다. 사실 국가에서야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한다. 또 우리는 단체이고 조직이기 때문에 그런 정보를 요청할 수 있다고 본다. 기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상관없는 터키 유학생까지 집에까지 찾아가고 그런 질문을 해댄다. 이슬람이라는 것 말고 터키는 테러와 관계도 없다. 보호하러 오셨겠지만, 무슬림 예배보는데에도 경찰이나 혹은 얼굴보면 국정원 사람이라고 써 있는 사람이 항상 나와계시다. 물꽃 : 앞으로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한 활동 계획은 어떤 것이 있는지. 박성희 : 지루하게 되풀이되고 있는데 그런만큼 국회 내 작업은 이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시민사회, 국회 양측에서 테러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 새로운 눈을 뜨게 하는 관점과 의제를 제안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국가정보원같은 비밀정보기구가 개혁되어야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는 것이다. 사실 지금 민주적이라는 것 상당히 허상이라고 본다. 따라서 논쟁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하지 그냥 이 법이 입법되어야 한다 말아야 한다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래서 다양한 시각을 가진 젊은 학자들, 테러에 대한 연구자들 등과 함께 노력하려고 한다.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가 되어야 위험성을 넘어갈 수 있으리라고 본다. 정기국회 때 서명한 국회의원들을 면담할 계획이긴 하지만 이것보다는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바로 : 질문을 좀 더 이어서 하고 싶다. 국정원이 자기 연명하기 위한 마지막 노력이 아닐까 싶은데 국회보다는 바로 이 국정원을 개혁해야 하지 않을까. 박성희 : 정보기관이 수사권을 갖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미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국정원의 규모와 예산은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오직 대통령만 안다. 이것 자체가 문제다. 과거부터 존재하는 여러 조직과 제도에 대해 민주적 잣대를 가지고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국정원은 중정 이후 계속 청사와 방대한 규모의 인력, 권력을 누리고 있다. 국회 업무 보고도 93년에 처음 시작됐다. 거기에 기무사령부, 경찰청 등도 개혁의 대상이다. 시민안보, 인간안보를 보장할 수 있는 민주적인 기관으로 바꾸도록 해야 한다. 청중 : 최근에는 그래도 군대가는 것이 당연한 것만이 아니라 거기 폭력이 있다는 것을 시민들이 인식하게 되었다. 국정원이 도청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대해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그 전에는 전혀 몰랐던 일들인데 일상에서 이를 느끼는 것이 그나마 좀 나아졌다는 증거다. 이런 때에 이슬람과 테러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넘어설 뿐 아니라 더 큰 연대로 한국 사람들이 모두 평화를 요구하고, 주한미군도 필요 없다고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해주기 바란다. 여러가지 왜곡된 시선을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희수 : 짧게 마무리하는 말을 하고 싶다. 이슬람 테러 얘기를 하는데, 국제적 이슬람 테러 연계조직은 없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하마스, 헤지볼라, 이슬람 지하드 등이 예전에 말하던 소위 테러 조직이지만 이들은 팔레스타인, 레바논 내에서 자치 투쟁하는 단체였다. 이들이 미국에 가서 활동한 적 없다. 이들은 지역 단위의 자발적 저항조직이다. 하마스는 자치정부다. 그게 이스라엘과 미국의 이익과 다르니까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거다. 그런데 알카에다가 911에서 국제연계테러가 역사상 처음 드러낸 셈이다. CIA가 키운 3천명의 최정예 요원이 세계에 흩뿌려진 것이고 이들이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과 지역 투쟁 단체와는 차이가 있다. 지역에서 투쟁하는 단체들은 대중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국제연계 테러 조직은 대중 지지가 없다. 그냥 미국이 만들어낸 비극적 산물인 것이다. 대중 지지 없이 지리멸렬해가던 국제연계테러조직이 이라크에 가서 힘을 얻고있다. 그래서 전공자들이 보기에도 누가 저항 조직인지 테러조직인지 알기 너무 어렵다. 어떤 점에서 군과 민간인 구분으로 테러 규정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라크에서 십만, 팔레스타인에서도 민간인이 계속 죽어가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못 하냐는 정서가 현장에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