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정권의 국토균형개발계획과 동북아중심국가 플랜의 허구성 이제까지 드러난 행담도 개발의혹의 개요 유전 투자비리 의혹에 이어 터진 행담도 개발의혹이 주를 넘기고 있다. 지난 주 중에 마무리될 듯 했던 감사원 조사도 6월9일로 연장됐다. 이제까지 드러난 의혹의 3인은 대통령 자문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 문정인, 전 한국도로공사 사장 오점록, (주)행담도개발 사장 김재복(EKI의 최대지분인수자)이고, 이들 간에 이루어진 핵심의혹은 다음 세 가지다. 첫째, 한국도로공사와 EKI투자회사간에 맺어진 특혜계약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냐는 것. 한국도로공사가 행담도 개발이 실패할 경우, 주 투자자인 EKI의 투자지분 1억5000만 달러를 주식선매형식으로 떠 안는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계약이었다. 사업이 실패하더라도 주투자자인(90%) EKI는 실투자금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자지분 10%에 불과한 도로공사로부터 보장받는 무리한 특혜가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 의혹은 동북아위원회 문정인 위원장이 EKI와 사업협력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지원의향서(일명 추천서)를 발급하는 등 개별기업을 무리하게 지원한 점. 또 여기에 EKI와 도로공사와의 이런저런 분쟁과정에 정찬용 청와대 전 인사수석 등이 중재자로 적극 개입했다. 셋째, 미국에서 발행된 에콘사(EKI의 모회사)의 회사 채권 8300만 달러 어치를 우정사업본부와 교원공제회가 전량 매입한 경위이다. 외자(外資)유치를 명목으로 동북아위와 청와대측 인사들의 지원에 힘입어 발행된 채권을 매개로 외자는커녕 정부의 통제를 받는 공기업의 자금이 제공된 것이다. 최근에는 이 채권발행을 안건으로 외교통상부와 건설교통부 등 정부 관계부처가 대책회의를 가졌다는 주장까지 제기되는 마당이다. 행담도 개발의혹의 성격 1 : 권력형비리인가 단순 직권남용인가 감사원의 한국도로공사 감사과정에서 행담도 의혹이 제기된 직후인 지난 주 26일 문위원장과 정태인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동북아위원회 전 기조실장)이 사표를 제출했다. 사표의 제출이유는 불분명했다. 행담도 개발의 몸통 격인 전라도서남해안 계발계획 S프로젝트의 성공적 진행에 누를 미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청와대 또한 사표수리 여부는 감사원 발표 이후에 결정할 일이며, 국토균형발전과 동북아중심국가 구상에 따른 S프로젝트는 변함 없이 추진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27일 청와대는 행담도 개발은 국책사업인 S프로젝트와는 별개의 사업이었고 다소 무리 있는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며, 말을 바꿔 문위원장과 정태인 수석의 사표를 서둘러 수리했다. 국토균형발전과 동북아중심국가 계획의 중심사업인 S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행담도 개발에 대한 지원이 다소 무리한 형태로 이루어졌을 뿐, 이 사건이 권력형 비리사건은 아니라는 것이 청와대측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형태로 공기업이 개별기업을 상대로 수천억원대의 특혜를 제공했고, 이 과정에 청와대 인사들과 대통령 공식자문기구가 명백한 직권남용의 형태로 개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권력형비리가 아니라는 설명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비상식적인 규모의 특혜계약과 사기성 채권매입이 고위관료들의 노골적인 비호와 직권남용에 힘입어 이루어진 마당에, 권력형비리와 단순 직권남용을 구분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넌센스다. 행담도 개발의혹의 진정한 쟁점은 이런 넌센스가 아니다. 진정으로 가려져야 할 것은 행담도 개발의혹의 본류 격인 S프로젝트와 S프로젝트가 표방하고 있는 노무현정권의 국토균형개발이 과연 어느 만큼의 진실성을 가진 계획이며, 외자유치 전략에 기반 한 동북아중심국구상은 진정 무엇을 목표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정책인가이다. 행담도 개발의혹의 성격 2 : 정권의 아마추어리즘인가 인민의 정치적 통제의 무력화인가 노무현정부는 위원회 공화국이다. 공식정부기구가 아닌 대통령산하 위원회가 22개나 된다. 직권남용의 도마 위에 오른 동북아위원회 역시 이들 위원회 중 집행권한이 없는 자문기구의 하나다. 한나라당과 조·중·동 보수언론은 이번 행담도 사건의 기본성격을 노정권의 아마추어리즘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잇따른 대규모 국책사업의 실패가 소수정예 전문가들의 견해를 무시하고, 다수우중과 NGO, 이익집단의 압력에 좌충우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들이 가장 자주 문제삼는 예는 지율스님의 단식요구를 뒤늦게 일부수용한 일이다). 즉 보수파들은 노정권의 아마추어리즘을 주되게 공격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정치현상을 거대한 금융 사기극에 뒤따르는 무능, 부패 사건임과 동시에 이것을 관리통제하는 정치시스템의 변환, 즉 신자유주의적 파퓰리즘(populism)화의 일환인 ‘정치의 사인(私人)화’로 본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전문성의 결여가 아니라 인민의 정치적 통제를 사전 봉쇄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비공식기구들은 대통령 개인의 직속 기구이거나 대의 민주주의적인 통제체계의 사각지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번 행담도 사건에 개입된 일부 인사들은 실제로 전직관료 출신의 사인신분이었다. 이들 개개인들이 별다른 전문적 식견을 갖추지 못했거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386개혁세력이라는 점은 충분히 확인될 사안이다(반대로 NGO의 전문가주의도 존재한다). 그러나 더욱 문제인 것은 이들이 적절한 민주주의적 통제권(그것이 아무리 한계적인 제도적 통제제도라 할지라도) 밖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토균형개발 한다며, 정치는 파퓰리즘적 선거표 투기!! 자본은 땅 투기!! 서남해안계발계획 일명 S프로젝트는 무안 영암 목포 등 전남 서남해안 일대에 500억 달러의 외자를 유치해 물류, IT, 생명공학 단지를 조성하고, 외국인이 3분의 1 이상 거주하는 인구 250만 명의 도시를 만들겠다는 야심 찬 내용이다. 노무현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지난해 11월 싱가포르를 방문하여 투자를 요청하며, S프로젝트를 직접 챙겼다. 그러나 목표로 밝힌 싱가포르로부터 200억 달러 외자유치는 이런 저런 말만 오고간 채 그 이상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싱가포르 기업인 에콘사와 그 자회사인 EKI가 행담도 개발에 참가하고 있던 것이 유일한 실마리였다. 하지만 에콘사의 부도로 그 자회사인 EKI는 (주)행담도개발의 사장인 김재복이 그 최대지분을 인수했던 터다. 국책사업인 S프로젝트의 입안과 집행과정에 S프로젝트와 무관한 행담도개발의 김재복 사장이 관여하게 된 경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싱가포르에 연고가 있는 김사장을 통해 200억 달러의 투자가 이루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 말 그대로 혹시나 하는 이 마음이 공과 사가 얽히고 온갖 직권남용의 도화선이 되어 오늘의 사태를 불러온 것이다. 요컨대 S프로젝트는 계획의 근간을 이루는 외자유치에 관한 어떤 신뢰할만한 근거도 없고, ‘낙후한 전라도’를 향해 던져진 선심공약일 뿐이다. 그것도 전체인구 200만 명인 전라남도에 250만 명 규모의 외국인 도시를 짓는다는 허무맹랑한 공약을 말이다. 하지만 그 같은 선심공약이 두 가지 부문에서는 만만치 않은 힘을 발휘한다. 열우당의 호남표 몰이와 전남 일부 개발 예정지의 땅 소유주와 투기자본의 돈벌이가 그것이다. 노무현과 열우당은 이미 지난 수도이전공방과 현재의 행정복합도시건설계획을 통해 충청도 표심을 다잡고, 불황기에 목말라하던 아파트, 땅투기 집단의 욕구를 만족시켜주었다. 일확천금의 로또 땅을 낳은 판교신도시계획, 노무현을 따라 해남과 영암 간척지 일대에 골프장, 호텔, 실버타운, 외국 대학·병원, 카지노, 해양리조트 등을 갖춘 상주인구 50만 명의 복합레저도시를 건설한다는 전라남도 도청의 J프로젝트가 바로 이 S프로젝트와 행정복합도시계획이 대표하는 국토균형발전계획의 아류들이다. 자본가에겐 규제완화/특혜, 노동자에겐 고용불안정화/노동통제강화를 선사하는 동북아중심국가플랜 국토균형발전과 함께 이번 행담도 개발의 명분은 바로 동북아중심국플랜이다. 동북아중심국플랜은 김영삼의 4차 국토종합개발계획 시절에 제기되어, 김대중 정권을 거쳐 노정권이 주되게 내세운 국가적 비전이다. 하지만 이 플랜은 허황된 규모의 외자유치를 전제로 추진되는 내용 없는 정책일 뿐 아니라, 과도한 자본투자특혜와 외국인 거주환경 확보라는 미명으로 추진되는 교육/의료 등 서비스부문 추가개방, 그리고 주로 노동, 환경과 관련된 무차별한 규제완화와 기존 제도개악이 외자를 유치하기 위한 유일수단으로 따라붙는 정책이다. 때문에 동북아중심국가 건설이라는 거창한 정치적 수사와 달리 이 플랜은 별달리 진척되는 일없이 개발기대이익을 노린 투기세력들의 호주머니만 채우고 노동자의 노동조건 및 고용을 심각한 형태로 위협하는 반민중적 정책이다. 그리고 자본의 공화국 안에 다시금 공화국의 기본주권개념마저 무색케 하는 ‘기업도시’ 자본천국 개발계획과 도시빈민의 눈물 위에 국제 금융거점을 건설한다며 온갖 비리를 저지른 서울시의 청계천개발, 재정난에 빠진 지방자치단체들의 공룡특구에서 카지노, 경륜, 소싸움, 개경주에까지 뻗은 도박향락 관광개발 열풍 등이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이에 뒤따른다. 차라리 뇌물 때문에 추진되었다고 고백하라 : 행담도 개발의혹은 단지 몇몇 인사들의 비리로 그치지 않는 거대한 금융 사기극의 일각이다. 올 3월에 노무현정권은 재벌기업과 반-부패NGO들을 대동하고 ‘반-부패 투명사회협약’이란 걸 체결했다. 그러나 그 즉시 자신의 대선비리자금줄들을 석방해주었고, 연이어 오일게이트가 터졌다. 하지만 여권 실세들이 개입된 황당무계한 오일게이트 수사는 막바지에 이르러 청계천개발비리와 맞바꿔 덮어주기 판이 되고, 다시 또 다시 행담도 의혹이 터져 나왔다. 허구적 축적과 투기에 기반한 빈 껍데기뿐인 국토균형발전계획과 동북아중심국가플랜이 이번 행담도 개발사건과 같이 예정된 실패를 모면하자하는 정치가, 관료들의 애처로운 직권남용과 부패비리를 낳는 것은 필연이다. 우리는 차라리 이 사태가 뇌물에 눈먼 몇몇 정치인, 관료들만 책임지는 것으로 그치고 말 사안이라면 일말의 분노를 덜겠다. IMF위기를! 벤쳐투기거품 비리를! 카드대란을! 장기내수침체를! 단순 부패비리사건으로 호도하며, 정권과 보수정치가, 자본가들은 불법 뇌물과는 비교되지 않는 합법적 이득과 정치적 대가를 챙기지 않았는가! 국토균형발전, 동북아중심국가건설을 명분으로 발생한 부패비리를 그 원인인 금융화 개발 사기극의 성공적 진척을 위해 척결하겠다는 말장난은 제발 그만 두라. 균형 잡힌 국토의 주민이며 동북아중심국가의 국민인 노동자 민중은 위기의 원인을 직시해가고 있으며, 사법당국의 형식적으로 찔끔거리는 부패수사에 더 이상 희망을 두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 민중의 참을성에는 한계가 있다.
비정부기구와 국가의 국제화 (상) [역주] Joachim Hirsch, 'The State's New Clothes: NGOs and the Internationalization of States', Rethinking Marxism, Vol. 15, No. 2, 2003. 이 글은 미국의 좌파 이론지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생각한다}에 실린 것으로 국제정치경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한 요소로 비정부기구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히르쉬는 국내에도 몇 권의 책이 번역되어 있는 독일의 국가이론가로서 최근에는 유럽의 금융과세시민연합(ATTAC)의 학술위원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 글은 '조절이론'의 국가론적 함의를 둘러싼 몇 가지 이론적 쟁점에도 불구하고 비정부기구의 역할과 기능에 관한 중요한 이론적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 특히 NGO가 허구적 성격이 강한 '전문적 지식'에 기초한 '확대된 국가기구'라는 주장은 비정부기구의 성격에 관해 많은 시사점을 안겨주며 비정부기구와 사회운동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구별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글 분량이 많아 이번 호와 다음 호 두 번에 나눠 싣는다. 비정부기구(NGO)는 숫자 면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언론인과 정치학자에게 갖는 의미라는 면에서도 일종의 성장 산업이다. 이 개념은 몇 년 전의 '새로운 사회운동'이나 '시민사회'에 비견될만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 동안에 몇몇 사람들은 다시 지상의 현실에 눈을 떴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NGO가 해방적인 사회변화를 이끌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NGO는 더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사회 발전을 보장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관념은 특히 국제적 수준에서 널리 적용되고 있다. 국제적 수준에서는 이론적인 차원에서조차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세계화의 시대에 국제적 수준에 관한 논의의 중요성은 점차 커지고 있다. 사람들이 NGO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거는 까닭은, NGO가 정치적 투사를 위한 이상적인 스크린을 제공해 주는 동시에 사회과학자들의 자기정당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주제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자들은 종종 NGO의 세계와 가깝게 접촉하며,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문화적· 정치적으로 NGO와 밀접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NGO 개념의 인기는 무엇보다, 최근까지 '새로운 사회운동'에 걸었던 주요한 사회 변화에 대한 희망이 시들었다는 점을 반영한다. 근본적인 사회 변화에 대한 수많은 희망들이 좌절로 끝이 났고, 이제 '새로운 사회운동'도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1989년 이후 몇 가지 추가적인 난점들, 즉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최종적 승리로 보이는 현상들로 인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거스르는 정치적 방향성의 난점들이 존재한다. 1980년대 말 '시민사회'의 (재)발견이라는 사례에서처럼, NGO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체념의 표현, 즉 기본적인 변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사회 구조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내에서 실행 가능한 것을 찾아 임시변통으로 대처하려는 태도의 표현인 것처럼 보인다(Narr 1991). 따라서 NGO가 '90년대의 가장 과대평가된 행위자'가 되었다는 피터 바흘의 논평에는 얼마간의 진실이 있다(Warl, 1997: 293). 이러한 과대평가는 정치적으로 왜곡된 관점뿐만 아니라 그것과 이론의 부재에서 기인한 것이다. NGO를 대상으로 한 수많은 연구들은 국가와 사회에 관해 완전히 부적합한 이론적 개념들을 사용한다. 이 때문에 일찍이 1989년 이래로 '민주적 시민사회'에 관한 논쟁을 특징짓던 이론적 결함들이 지속된다. 그 결과 소위 세계화의 와중에서 개별 국가들이 종속되는 세계적 변형의 과정들을 올바르게 분석하는 것이 어려워진다(Hirsch, 1995, 1998; G rg and Hirsch, 1998; Hirsch, Jessop, and Poulantzas, 2001; Hirsch, 2002). '국가'와 '사회'의 관계, 그리고 정치적 조절 양식 내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이와 연동되어 자유민주주의 구조 내에서 주요한 변화가 발생한다. 비정부기구는 이런 과정의 표현임과 동시에 행위자다. 이 논문에서 나는 NGO를 더욱 엄밀하게 정의하고 이와 같은 정치적 조직 형태가 점차 두드러질 수 있게 된 조건들을 서술할 것이다. 국가 이론의 몇 가지 기본 개념을 명료하게 한 후, 나는 소위 세계화 과정에서 국가들과 그들의 국제적 체계가 종속되어 있는 변형 과정의 가장 중요한 측면들을 서술할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 관한 논의에 기초해서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국제적 조절 체계 내에서 NGO의 역할이 파악될 것이다. 이는 특히 국제적 수준에서 NGO가 얼마만큼 그리고 어떤 조건하에서 민주화의 추진자로 간주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비정부기구'란 정확히 무엇인가? NGO의 중요성이 증가하는 것은 형식적으로는 사적인 조직들이 민족적·국제적 수준에서 정치과정에 점차 더 빈번하게 개입하는 상황을 반영한다. 이러한 조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별로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문제는 이 조직들이 새로운 형태와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비정부기구'는 일종의 잡동사니 격의 용어로서 매우 잡다한 함의를 갖는다. 그 함의의 일부는 외부의 관찰자들이 활용하며, 다른 일부는 NGO 자신들이 활용하고,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상당한 이데올로기적 어조를 갖는다. 서술적 개념과 규범적 개념은 종종 양자를 구분하여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함께 뒤섞인다. 그렇긴 하지만, 비정부기구의 '비(非)'는 진지하게 취급해야 할 변증법을 지시한다. 어떻게 보면 NGO는 형식적으로 사적인 조직들이 어떻게 국가의 특성들을 띠게 되는지, 또는 국가의 기관들이 어떻게 '사유화'되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비(非)'는 일반적으로는 국가와 사회의 구조 내에서, 그리고 특수하게는 민족적·국제적 수준에서 국가 및 국가 조직들과 관련하여 NGO의 지위에 대한 분명한 묘사라기보다는 모호한 용어가 된다. 여기에 덧붙여 'NGO'라는 용어는 대체로 매우 다양한 조직들에 일반적으로 붙여질 수 있는 특정화되지 않은 이름표의 역할을 한다. 이와 연관된 딜레마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조직된 비정부기구(GONGO)와 의사 비정부기구(QUANGO) 따위의 역설적인 약어들이 등장하게 된다. 사실상 'NGO'들은 비록 정부에 의해 설립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때때로는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 받고 정부의 목적을 위해 활용된다. 예를 들어 주변부의 종속국가들에서는 종종 국가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적인 NGO의 설립이 국제적 원조를 받기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자본주의 중심부와 그들의 신흥 NGO 사업에서도 유사한 일들이 벌어진다. NGO는 종종 '국가의 권력'으로 불릴 만한 기능을 한다. 소위 '인도주의적 군사 개입'(Gebauer, 2001)에 대한 병참적·정치적 지원에서 이는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만약 NGO들이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지 않거나 정부 자금을 자신들에게 끌어들이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많은 수의 NGO들이 존재할 것인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이는 NGO가 국가 조직이 아닌 진정한 '시민사회'의 조직인지, 아니면 사실상 정부적·조절적 복합체의 일부로서 그람시의 표현을 빌자면 '확대된 국가'의 일부로 파악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Gramsci, 1986; Anderson, 1979; Kramer, 1975). 바흘(Wahl, 1997: 313)에 따르면, NGO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 자발적 연합체다. 국가나 정당으로부터의 독립성, 자선과 우애, 비영리적 정향, 그리고 인종·민족·종교·성별의 관점에서의 비배제성. 그러나 이미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것처럼 이는 규범적이고 자기-기술적인 기준들의 집합으로, 현실에서는 온전히 만족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민족적·국제적 수준에서의 새로운 정치적 조절형태라는 맥락에서 NGO의 역할을 조사하고 싶다면, 애매한 부정적 특징('비정부적')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훨씬 좁게 정의되고 분석적으로 정확한 용어를 채택하는 게 필수적이다. 나는 바흘의 정의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민족적·국제적 수준에서 정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아래와 같은 특징을 드러내는 형식적으로는 사적인 일체의 조직으로 NGO를 정의하려고 한다: 비영리적 정향(자선적 지위)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대표하지 않고 자발적인 지지 활동에 대한 참여 국가와 영리적 기업으로부터의 조직적·재정적 독립 전문가적 자질과 조직으로서의 영속성 특히 마지막 특징이 중요하다. 조직의 자기이익(예컨대 피고용자들의 일자리와 소득을 유지하려는 이해관심)은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과 특수이익 또는 공적 복리를 대표한다는 목표 사이에는 기본적인 긴장이 존재한다. 대체로 NGO는 인류적 이해의 이상주의적 담지자일 뿐만 아니라, 비록 그렇게 정의된다고 할지라도 불가피하게 경제적·재정적 제약의 기초 위에서 작동하는 '도덕 기업'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의는 NGO와 다른 조직들 특히 정치적 전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다른 '비정부' 조직들 을 (비록 매우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구별할 수 있게 해 준다. 이에 따라 NGO는 사적 영리 기업(비록 자선적 지위를 갖는 상담회사처럼 혼성적인 조직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자기 구성원들의 특수이익을 대표할 뿐인 결사체와 집단들(예를 들어 노동조합처럼 거대한 관료적 결사체와 기층의 풀뿌리 이익집단들), 그리고 일시적으로 또는 느슨하게 조직된 정치적 발의와 캠페인과 같은 여타의 형태들과 구별된다. 반면 NGO와 사회운동을 구별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대체로 사회운동은 단일한 조직과 구별되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복합적 네트워크로 정의된다. NGO가 사회운동의 일부일 수는 있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때대로 NGO는 특정한 운동 네트워크의 다소 안정적인 요소를 이루거나 운동이라는 하부구조의 조직적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Roth, 1994). 다른 한편 NGO는 종종 사회운동의 해체의 부산물로 간주되기도 한다(Brand, 2000). 그리고 만약 사회운동이 기성의 제도적 체계 이와 관련된 NGO 구조를 포함하여 로부터 독립적이거나 또는 갈등관계에 있다면, NGO는 사실상 운동과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G rg and Hirsch, 1998: 606). NGO의 발전 조건들 1864년에 창설된 적십자를 생각해보면 NGO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점을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NGO가 숫자가 크게 늘고 공적 영역에서 상당한 중요성을 얻게 됐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이는 한편으로는 국가제도의 종별적인 실패와 그것에 연동된 기성의 정치적 대의 및 이익 매개 형태의 쇠퇴의 직접적 결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운동의 증가하는 분화 그리고/또는 제도화의 직접적 결과다(Messner and Nuscheler, 1996; Brand and G rg, 1998; Brand, 2000). 이것은 근본적인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변화―즉, 소위 세계화 과정에서 새로운 축적 및 조절 형태의 확립(포드주의에서 포스트-포드주의로의 이행)과 이에 관련된 민족-국가의 '민족적 경쟁국가'로의 변형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Hirsch, 1995, 1998; Brand, 2000; Hirsch, Jessop, and Poulantzas, 2001). 다음과 같은 발전양상은 특히 중요하다. · '새로운' 사회운동의 쇠퇴, 이는 1980년대 이래로 발생해 왔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좀 더 분명한 구별이 필요하다. 쇠퇴가 가장 뚜렷한 곳은 자본주의 주변부의 민족해방운동으로, 이들은 동-서 갈등의 종언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세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토대를 크게 박탈당했다. 대체로 보면, 사회운동 영역 안에서 분화와 제도화의 과정이 벌어지는데, 이로 인해 느슨하게 조직됐던 운동들이 보다 견고한, 그리고 어느 정도 전문화된 조직으로 변형되었다(Roth, 1994). 이는 전직 활동가들이 국가와 상업적 기업 외부에서 일할 수 있는 새로운 조건과 영역을 찾고 발전시키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문제는 사회운동의 쇠퇴라기보다는 차라리 구조적 변화다. 이는 의회 외부 정치의 광범위한 위기의 표현으로, 여기에서는 협력적인 정치 활동 형태가 비제도적인 항의와 저항을 지양하고 있다. · 세계화 그러니까 국제적 통신·운송·자료관리의 발전과 상품·서비스·금융·자본 시장의 자유화에 기초한 새로운 국제화된 생산 형태의 확립. 이는 개별 국가들이 개입 능력의 일부를 상실하고 그 결과 자유민주주의적 제도들이 침식되어 대의체계의 위기가 발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적어도 사람들의 전반적인 인식에 따르면 둘 이상의 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 문제들은 개별 국가에 의해서는 적절하게 혹은 아예 처리될 수 없다. 이것들의 기저에 깔린 원인 중 하나로 들 수 있는 사실은 동-서 갈등이 종말에 이른 까닭에 세계 질서가 그 구조와 단층선이라는 면에서 훨씬 복잡해졌다는 점이다. · 세계적 과정의 관리에서 새로운 쟁점들과 난점들의 출현. 과학적 이론과 지식은 정치에서 점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어 급기야는 항의와 저항보다 지식과 전문가들의 의견이 정치적 영향력의 행사에서 점점 더 중요한 전제조건이 되고 있다. 이는 특히 환경 위기 같은 사례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G rg and Brand, 2001). 과학적 분석과 문제-해결 전략이 정치적 갈등에서 점점 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관료적 국가 조직이 이러한 업무에 부적합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복잡하고 다양한 정치적 목표들은 오직 다양한 국가적·비국가적 행위자를 참여시킴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고, 특히 사회적인 현대화 및 조정 과정이 관련된 곳에서는 더 그렇다. 이와 함께 세계화와 지역화의 모순적 과정('세계지방화'(glocalization)) 때문에 다양한 수준 지역적 수준에서 국제적 수준까지 의 정치들 사이의 교통의 통로를 발전시키는 것이 점점 더 긴급해진다. 국가와 국가 체계의 변형 '국가'와 '시민 사회': 몇 가지 간략한 정의 NGO의 기능과 역할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가 및 시민사회 이론의 전제가 되는 가정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용어로 어떤 현상을 이해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변화를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극히 중요하다. 여기서 나는 유물론적 국가이론과 조절이론에 따른 자본주의 분석에 기초해서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특히 1970년대 서독의 국가논쟁, 그리고 풀란차스와 그람시의 기여가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몇 가지 기본 전제에서 이들 접근을 연장하는 것으로 논의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다(Holloway and Piciotto, 1978; Poulantzas, 1978; Jessop, 1982; Hirsch, 1995). 유물론적 국가이론에 따르면, 분리된 실체로서 국가의 존재와 '경제'로부터 '정치'의 분리, 또는 '사회'로부터 '국가'의 분리는 비록 기능적으로 보증되지 않고 언제나 갈등의 주제가 되긴 하지만 부르주아-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적 특징이다. '국가'와 '사회'는 서로 독립적이지 않으며, 동시에 단순한 형태로 서로 대립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모순들로 가득 찬 사회체계의 특수한 표현이다(Gramsci, 1986; Poulantzas, 1978; Hirsch, 1995). 국가는 물리적 강제력의 집중과 그것의 사회계급들로부터의 분리의 산물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들 중 하나다. 국가는 자본주의 생산체계의 일부이자 그 재생산의 전제조건으로서 비록 특정 계급의 단순한 도구는 아닐지라도 일종의 계급 국가다. 따라서 국가는 하나의 인격, 주체 또는 그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순수하게 합리적인 조직 등으로 간주될 수 없다. 대신 국가는 사회 내부의 적대 관계의 결정체(crystallization)로 이해되어야 한다. 동시에 국가는 그 자신의 역동성과 제도적 안정성을 보여주며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다. 이는 국가가 폐쇄적 조직이 아니라 일종의 복합체로, 즉 사회의 상이한 계급 및 집단과 다양한 때로는 갈등적인 방식으로 관련되고 종종 서로 대립적으로 행동하는 집합적 실체들의 복합체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국가는 물리적 강제력 행사의 재량권이라는 수단을 갖는 중앙 집중적인 지배체(ruling body)다. 반면 '시민사회'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독립적인 모든 사회·정치 조직들을 지칭하는데, 여기에는 특수이익을 대변하는 결사체, 정치 집단, 언론매체, 교회, 학술기구, 연구소, 지식인 집단, 그리고 '두뇌 집단'(think tank) 따위가 포함된다. 시민사회는 공적인 논쟁에서 상이한 관점들과 이익들이 표현되고 대결할 수 있는 포럼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이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들, 즉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임금노동자, 시장, 핵가족 등에 의해 광범위하게 규정된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권력 행사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상이한 경제적·정치적 강제형태들에 예속된다. 공적 토론과 논쟁은 국가권력 정당화에 봉사하며 국가가 그 지배권(dominance)을 주장할 수 있게 해 준다('합의'). 동시에 국가는 공적 토론과 논쟁에 개입할 수 있다('강제'). '시민사회'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전장으로 볼 수 있는 바, 여기에서 사회 질서와 발전의 대안적 개념들이 출현할 수도 있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는 모순으로 가득 찬 권력관계의 복합체, 또는 강제와 합의 양자 모두에 기반한 '지배 체계'―그람시적 용어로 '헤게모니 블록'이라 불리는―를 형성한다. 우리는 시민사회의 모순적 본성을 고려함으로써 시민사회를 '확장된 국가'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매우 많은 (민족) 국가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체계의 근본적인 측면이다. 국경에 따라 계급들(과 계급들 안의 집단들)을 분할하고 국경을 가로질러 계급들을 결합시키는 것은 자본주의 체계를 조절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이는 무엇보다 계급들과 그 분파들을 서로 반목시켜 어부지리를 꾀하고 민족국가 내에서 사회협약을 확립할 수 있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사회경제적 구조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이질적 제도들의 모순적 복합체로서 국가의 본성은 국가들의 체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국제적 수준에서 재생산된다(Hirsch, 1995: 31.). 변형 과정: 탈민족화, 사유화, 그리고 정치체제의 국제화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세계화'라 일컬어지는 은 부르주아-자본주의 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정치구조의 주요한 변형을 동반해왔다. 바로 이러한 연관 속에서 NGO는 현재적 의미를 획득했다. 특히 다음과 같은 발전양상이 중요하다(Jessop, 1997a; Sassen, 1996, 1999; G rg and Hirsch, 1998; Z rn 1998). 첫째,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는데, 이는 '탈민족화'로 묘사될 수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생산의 국제화다. 이 과정에서 자본은 내부 시장의 발전 포드주의에 전형적인 '민족' 경제 안에서 에 초점을 맞추는 축적과 조절 체계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려고 한다. 세계화와 이에 동반되는 탈규제 전략의 핵심적 구성 요소는 특히 경제·사회 정책의 영역에서 개별 국가의 개입 범위를 제한하는 것이다. 이는 국가가 사회발전을 일관되고 협력적인 방식으로 조절하는 능력을 축소한다. 이 과정에서 민족적 사회들은 더 이질화된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사회적 불균형과 분할이, 다른 한편으로는 국경을 가로지르는 경제관계의 확립이 증가한다. 이와 동시에 국제적 불균형으로 인해 이주자와 난민들의 흐름이 더욱 거대해진다. 이는 다시 계급구조의 재조직화, 노동형태의 전화, 그리고 사회에서 권력 관계의 변화를 초래한다(Sassen, 1996: 59; Samers, 1999; Pellerin, 1999). 그 결과 사회들은 전반적으로 점점 더 '다민족적'이고 '다문화적'이게 된다. 사회적 불균형과 분할의 증가는 분명한 역설로 귀결된다. '탈민족화' 과정은 점증하는 민족주의적·인종주의적 경향을 동반한다. 민족국가라는 현상은 그 자체로는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족국가는 여전히 핵심적인 중요성을 갖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에 기초하여 계급관계의 조절 및 일정한 사회적 응집력의 창출이라는 목적에 복무하는 핵심적인 제도이기 때문이다(Jessop, 1997b). 둘째, 경향적으로 정치가 '사유화' 또는 '탈-국가화'된다. 이때 핵심은 조절적 네트워크의 발전인데, 여기서 국가 다소 독립적인 사회적 행위자와 집단들의 집합체를 조정하고 매개하는 존재로서 는 다만 동급 최강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은 국가를 포함하는 더 포괄적인 사적 협상과 (가장 넓은 의미에서) 집합적(corporate) 구조로 이동한다. 이러한 '협상' 국가가 전적으로 새로운 현상은 아닌데, 왜냐하면 정부는 언제나 강력한 사회 집단들과 타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사유화 과정에서 국가는 점점 더 빈번하게 이러한 역할을 맡고 있다. 시장의 탈규제화가 행정적 개입의 범위를 축소시키는 반면, 강력한 '사적' 행위자들 특히 점차 개별 국가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게 된 초민족적 기업들 은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여기에 덧붙여 점증하는 '지방적 활동들의 경쟁'에 직면해서 다양한 권력 및 지식 자원을 동원할 필요성이 있다. 이는 사법적·행정적 수단을 통해서는 제한된 정도로만 달성될 뿐이다. 따라서 '협력적' 전략들이 요청된다. 바로 이러한 배경 위에서 '거버넌스'와 '네트워크' 이론들이 지금 현재 붐을 일으키고 있다―물론 그 이론들이 언제나 이러한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Scharpf, 1996; Messner-Nuscheler, 1996; Messner, 1995, 1997; Kommission, 1995; Rosenau, 1999).{이러한 이론들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적 평가를 위해서는 Brand et al. (2000)을 참조하라.} 거버넌스나 네트워크 같은 개념들은 종종 그릇된 관념, 즉 모든 국가들, 국제기구들, 상업적 기업들, 그리고 비-정부 조직들이 다소 동등한 수준에서 서로 협력하거나 대립한다는 관념을 동반한다. 이런 식의 관념은 경제적·정치적 자원이라는 측면에서의 주요한 불균형을 고려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국가의 물리적 권력 국가에 고유한 정당성을 동반하는 이 여전히 국가의 '교섭력'의 주요한 원천을 이룬다는 점을 무시한다. 너무 자주 간과되고 있지만, '거버넌스' 구조의 발전과 연결된 국가와 사회의 관계 변화는 민족적·국제적 수준에서 계급간 관계의 근본적 전화를 의미한다. 이는 한편으로 초민족적 자본의 출현, 다른 한편으로 사회 안에서의 점증하는 이질성과 분할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비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발전은 정치의 '재-봉건화'인 것처럼 보인다. 이는 제도적 의사결정 과정의 중요성이 쇠퇴하고 비공식적 협상공간들이 선호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그러한 공간들은 전통적인 민주적 제도와 절차의 통제로부터 거의 완전히 벗어나 있다(Maus, 1991; Sassen, 1996: 40). '경쟁력 있는 국가'나 '심의 민주주의'라는 개념들로의 '현실주의적' 변화도 이러한 배경 하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개념들은 민주주의를 지극히 불평등한 행위자들의 시민사회 내에서의 협상 절차로, 또는 단순히 지방들의 국제적 경쟁을 위한 참여적 동원으로 축소시킨다(G rg and Hirsch, 1998: 326). 셋째, 정치 조절체계가 점점 국제화되고 국제적 수준에서 조직, 제도, 그리고 비공식적인 '체제'의 한층 밀집된 네트워크가 창출된다. 이러한 변화의 직접적 이유로는 세계적 축적과정 및 그 결과들(국가의 붕괴, 금융시장의 현재적 위기, 세계적 환경 위협 등)이 만들어 낸 문제들이 개별 국가의 능력과 국경을 넘어 확장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동시에 정부들은 개입 범위의 상실을 보완하기 위해 국제적 조절 체계를 창출하거나 강화시키려 한다. 이는 정부들을 새로운 협력 형태에 속박하고 특히 약소국들의 선택권을 제한한다(Hein, 1998). 또한 세계화는 점증하는 지역화와 민족이상적인(supranational) 경제 블록을 창조하려는 시도들을 동반한다. 따라서 지역적·민족적·거시지역적(macroregional) 수준들 사이의 조정의 필요성이 증가한다. 전통적인 국가-행정적 정치 제도의 맥락에서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기란 매우 어렵다. 새로운 국제적 권력 구조에서는 자본주의 3극의 더 강한 국가들이 갈등적 협력 형태를 통해서 세계를 다소간 지배한다. 이는 이들 중심의 공통이익을 대표하는 국제조직들(특히 신자유주의적 입헌주의의 중심적인 제도적 표현으로서 세계무역기구(WTO),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은행(WB), 국제화폐기금(IMF),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의 중요성이 증가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덜 제도적인 조정과 네트워크 형태들도 존재하는데, 여기서는 초민족적 기업들과 비정부기구(NGO)들이 각각 차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협상 국가'는 국제적 수준에서도 발전 중이다. 다른 한편 전후 시대의 구(舊)세계질서가 종언을 맞고 미국의 일방적인 군사적 우위가 확립되면서, 과거에 평화로운 '신(新)세계질서' 창조라는 거대한 희망과 기대를 받고 있던 국제연합(UN)은 점점 더 그 의의를 상실―적어도 국제연합이 자본주의 중심부의 이해에 복무하도록 활용될 수 없는 한―하고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와 같은 환경에서 세계시장 수준에 배태된 경제적 과정의 단순한 탈구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특히 국제적 수준에서, 신자유주의적 입헌주의에 조응해서 새로운 정치적·제도적 '배태성'의 새로운 형태들이 창조되고 있다는 것이 사실에 더 부합할 것이다(Gill, 1995; Scherrer, 2000). 국제적·민족이상적 기구들, 그리고 어느 정도 제도화된 각양각색의 협력관계와 '체제'(Mayer, Rittberger, and Z rn, 1993)의 중요성이 점점 커진다고 해서 개별국가들로부터 진정으로 독립적인 국제적 정치 영역이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국제조직 및 체제는 협력체 내에서 더 강한 국가들의 이익에 상당한 정도로 의존하며, 더 강한 국가들은 국제조직과 체제의 유효성을 지속적으로 제한하고 규정한다.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비공식적 네트워크는 회원자격과 의사 결정 과정에 관해 분명한 규칙을 갖고 있는 공식적 국제조직와는 대조를 이루는 데, 이는 더 강한 국가들과 초민족적 기업을 한편으로 하고 약한 국가들을 다른 한편으로 할 때 그 양자의 불균형을 반영한다. 가장 강력한 국가들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은 강대국들의 우위에 의해 협력을 강제 받는다. 오직 미국만이 협력의 압력에 때때로 저항할 수 있다. 유럽연합은 특별한 사례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민족이상적 국가의 몇몇 특징을 띠고 있지만 이 경우에도 의사결정 권력이 여전히 개별 국가들에게 있으며 이 국가들이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을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입안 '체제'의 국제화는 확실히 개별 국가들의 체계를 지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국가들이 행동할 수 있는 맥락과 제도적 구조 내에서 영속적인 변화를 초래하는데, 왜냐하면 광범위한 부정적 결과와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무시할 수 없는 구조들과 조절형태들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국제조직과 체제의 중요성이 점증하면서, 다수의 민족적 사회들에 관련된 국가 관료기구는 더 큰 적실성을 획득하고 있다. 국가의 '국제화' 종합적으로 볼 때, 이와 같은 발전들은 국가장치의 국제화를 구성한다. 이는 국제조직, 체제, 그리고 여타 국제적 협력 형태들의 중요성이 점증하는 것으로, 그리고 지역적·민족적·민족이상적 수준들의 한층 복잡한 연계들이 발전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 과정의 주요한 특징은 국가장치 그 자체의 국제화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그것에 동반되는 탈규제 및 사유화의 과정에서, 개별 국가들은 점점 국제 금융시장에 의존하게 되는데, 여기서 일차적 행위자들 무엇보다도 '강대'국과 초민족적 기업들 은 효과적인 경제적 메커니즘에 힘입어 개별 국가들의 정책을 점점 더 많은 정도까지 결정한다. 이는 개별 국가들의 정부적 장치의 배치의 중대한 변화를 통해 제도적으로 표현된다. 이 과정의 의미심장한 부분은 재무부와 중앙은행의 비중이 증가하는 것인데, 이 장치들은 대체로 민주적인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으로부터 독립적이다. 양자 모두 국제 자본의 이해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국제적 자본의 흐름과 개별 국가의 정책들의 매개자, 심지어는 아예 단순한 전달 벨트로 행동한다. 이는 무엇보다 개별 국가들의 정치 과정에서 세계적 규범의 행정적 내면화를 제도적으로 표현한다. 민족국가는 지리적 경계로 둘러싸인 사회 내에서 집중된 권력과 의사결정 능력을 갖는 통합적 실체인 한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재배치, 분산화, 그리고 분절화라는 강력한 힘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족국가가 '민족적 경쟁 국가'(Hirsch 1995, 1998)로 변형된 것은 정부의 수준과 정치적 기능의 점증하는 지리적·사회적 분기와 연관된다. 민족국가는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함으로써 여전히 현존 사회질서와 사회적 통합의 주요한 보증자로 기능한다. 그것은 여전히 계급간 관계 조절의 주된 중심이다. 또한 그것은 여전히 기본적 생산 조건, 즉 하부구조, 연구, 기술 등의 공급을 보장하는 과업을 맡고 있다(Sassen, 1996; Boyer and Hollingworth, 1997; Hirst and Thompson, 1997). 사회 내에서 집단간·계급간 갈등 관계를 조절하는 것은 여전히 기본적으로 개별 국가의 소관이며, 이로 인해 세계시장이 극히 불균등한 생산 및 가공 조건을 가진 민족적 '생산 현장들'의 체계로 존속할 수 있게 보증되는 바, 이는 여전히 세계적 착취와 축적의 근본적 토대가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정부 수준 및 국가 기능의 분화 포드주의적 민족-국가라는 역사적 현상과 비교해 볼 때 는 정치적 과정과 관련된 중대한 결과들을 낳는다. '협상 국가'로의 변형이 진척되고 국제조직 및 네트워크의 중요성이 점증하면서 여전히 개별 국가의 경계로 제한된 민주적 체계는 심각히 침식되고 있다(Hirsch, 1995, 1998; Hirsch, Jessop, and Poulantzas, 2001). 이 때문에 대의 구조의 위기가 초래되고 정치 체계의 정당성은 더욱 부족해진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NGO의 중요성이 증가하는 주된 요인이 된다. 지구 전체에서 점증하는 불평등과 이 때문에 생겨나는 이주와 난민의 물결들 때문에, 강력한 거대중심(metropolitan) 국가들의 민주적 체계는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시민들의 결사체로 변질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러한 특권적 결사의 일차적 목표는 타자들을 내쫓음으로써 부자들의 요새를 지키고 주변부의 위기 지역에 군사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민족적 안보와 경제적 번영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 모두에서 물리적 자원에 대한 접근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 따라서 '민족적 경쟁 국가'는 또한 '민족적 안보 국가'가 되기 위해서 무장력을 갖춘다(Hirsch, 1998). 여기서 개별 국가들이 단순한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차라리 전략적 행위자라는 사실을 주되게 강조해야 한다. 이들은 국제 정치체계에서 진정으로 핵심적인 행위자들인데, 왜냐하면 군사적 강제력에 대한 최종적 통제권이 이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국제화는 세계적 수준에서 계급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조화하는 원인이자 결과다. 개별 국가 안에서 정부의 행정적 장치의 구조조정은 금융제도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사회사업부, 정당, 그리고 사회적 협력의 코포러티즘적 구조 등과 같은 제도 광범위한 주민대중의 이해를 대변하고 통합적 역할을 수행한 의 약화를 수반한다(Baker, 1999; Lukaukas, 1999). 세계적 수준에서 볼 때 개별 국가들의 체계는 점점 더 피착취·예속 계급들을 민족적 경계 내에서, 그리고 그 경계를 따라 분할하기 위한 토대가 된다. 세계화는 자본의 국제적 신축성과 이동성을 더욱 촉진했다. 이에 따라 분절화와 분할의 과정이 더욱 분명해지는 반면, 노동자들과 그/녀들의 조직은 여전히 민족적 경계 너머로 시야를 넓히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화와 국제화의 결과로 '국가'와 '자본'의 관계도 변형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본이 '무국적화'되어 간다거나 국가로부터 상당한 정도까지 독립성을 갖게 된다고 가정하면 잘못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탈규제화의 과정에서 확실히 국제적 자본은 자본축적에 대한 국가적 조절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워졌고 국가의 조절제도는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또한 초민족적 기업은 세계적인 다국가 체계 내에서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위치에서 유연하게 행동하는데, 이는 그들이 '생산 현장'으로서 개별 국가들의 비교우위를 이용하고 증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국가의 권력과 조직적 능력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 국가는 자본들 사이의 경쟁적 이해를 초월하는 '자본의 정치'를 확립하는 데 있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국가는 세계시장 내에서 특수한 자본 집단에게 토대를 제공한다. 그러나 국제적 자본이 점차 WTO나 세계은행, IMF 등과 같은 국제조직에 준거를 두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자본이 국가적 토대를 활용해서 세계시장 내에서의 분절화를 심화시킨다는 논의의 중요성은 점차 약화되고 있다. 그러나 국제 기구들의 정책들은 여전히 상당 부분 개별 국가 내에서 형성된 이익들에 의해 결정된다. 초민족적 기업들은 민족적 시장, 관련 생산 조건, 그리고 사회협약 등에 점차 덜 구속된다. 이 때문에 이들은 국가와의 관계에서 훨씬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국가들을 서로 반목시켜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생산 및 유통의 국제화는 '민족 자본'과 '민족 부르주아지'라는 용어의 타당성을 의문에 부친다(Poulantzas, 1974: 77; Jessop, 1997b). 국가와 (국제화된) 자본의 관계는 새로운 형세를 취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자본과 국가 장치의 상호연계 정도가 감소되지는 않는다. 초민족적 기업들은 여전히 국가에 의지하여 시장이 제공할 수 없는 생산 조건의 공급을 보장받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며, 필요하다면 강제력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이해를 보호한다. 거의 모든 초민족적 기업들이 세계적 체계의 강대국 내에서 활동하거나 그곳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Sassen, 1996: 1). 이 때문에 그들은 이들 국가의 군사적 우위와 이들 국가가 제공하는 사회 구조(예컨대, 특히 군산복합체의 틀에서 유래하는 선진적 기술 발전에 대한 적합한 환경)로부터 편익을 취할 수 있다. 그들은 심지어 국가를 자신들만의 이해에 복무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초민족적 기업과 국가의 관계는 여전히 모순적인데, 왜냐하면 이 관계는 협력과 함께 갈등의 특징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내재적인 갈등은 개별 국가 장치들 내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국제적 자본, 국가, 그리고 국제조직의 복합적 상호연관 때문에 국가간의 국제적 관계의 수준에서도 재생산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삼극의 기업들이 지배적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에 기반을 두려고 시도할 때 이러한 모순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좀더 비판적으로 살펴보면, 정치학자들은 종종 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OECD 세계'(Z rn, 1998) 역시 초민족적 자본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다. 국가와 다국적 기업들 간의 갈등적 관계는 특히 다자간투자협정(MAI)에 대한 합의가 (적어도 지금까지는) 실패한 것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MAI는 무엇보다 산업화된(초거대) 국가들이 초민족적 자본의 이해를 주변부 국가들에게 강제하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MAI에 대한 합의에 실패한 것은 범세계적인 여론의 동원과 주변부 국가들의 저항(서서히 조직되고 있는)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초거대 국가들과 추정컨대 그들이 대변하는 기업들의 이해가 분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99년 가을 시애틀에서 열린 국제무역기구 총회가 실패한 것도 유사한 이유 때문이었다. 초거대 국가들과 주변부 국가들 간의 이해 갈등 외에도, 미국 정부와 유럽 연합이 대변하는 기업들의 이익 갈등(예컨대 유전공학 분야에서)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McMichael, 2000; Chakravarthi, 2000). 초민족적 기업들은 통일된 블록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경쟁한다. 이러한 경쟁은 국제적 국가 체계와 국제조직 내에서도 벌어진다. 전체적으로 볼 때, 자본과 국가의 모순적 관계는 자본주의적 계급 체계의 일관성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다. PSSP
1. 이면합의에 대한 정부의 입장 2. 정부의 계속되는 거짓해명 1) 쌀협상과 양자현안(쌀이외 다른 품목)과의 관계에 대해 2) 쌀협상 과정에서 양자현안(쌀이외 다른 품목)이 협상내용으로 제기된 시점에 대해 3) 쌀협상 최종발표(2004. 12.30) 당시 이미 공지를 하였기 때문에 이면합의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4) 양자의 부가적인 사항에 대한 이면합의 여부 및 정부의 은폐기도에 대한 문제 5) 기타 쟁점이 되는 사항 (1) 중국과의 양자차원의 부가합의 사항중 “국내여건을 감안하면서 조정관세 대상품목 축소 및 세율 인하를 위해 공동 노력”의 건 (2) 인도 이집트와의 양자차원의 부가합의 사항중 “MMA수입과 별개로 식량원조용(대북지원) 쌀 구매시 우선권 부여”의 건 (3) 아르헨티나와의 양자차원의 부가합의 사항중 “닭고기, 쇠고기 등의 가금육과 오렌지 등에 대해 수입위험평가가 원활히 진행되도록 합의함”에 대한 건. 3. 정부 쌀협상안 및 거짓해명에 대한 전국농민회총연맹 요구사항
인터넷 저작권 논란에 숨어있는 정치적 배경 양 희 진| 정보공유연대 IPLeft 운영위원 *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센스: 영리불허, 개작허용(http://freeuse.or.kr/license/by-nc/)'에 따라 자유롭게 복제, 배포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2005년 2월 25일 작성되었습니다. 최근 개정 저작권법이 발효된 것을 계기로 네티즌의 관심이 저작권에 쏠려있다. 실연자와 음반제작자에게 전송권이 부여되자 네티즌들은 음악파일(mp3)을 블로그나 까페의 배경음악으로 깔거나 개인홈페이지에 업로드하는 행위, p2p 서비스를 통해 음악파일을 공유하는 행위가 새롭게 금지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블로그나 까페에서 배경음악을 삭제하거나 업로드했던 음악파일을 대거 삭제하는 네티즌들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불복종운동을 벌이며 오히려 대량으로 음악파일을 업로드를 하는 네티즌들도 생겼다. 뿐만 아니라 'No Music No Blog' '개정 저작권법 반대' '네티즌을 범죄인화하는 저작권법 반대'라는 슬로건의 까페가 만들어져 네티즌 스스로 조직적인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문화관광부는 당초 '이번 법개정으로 새롭게 불법이 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불법이었는데 다만 네티즌들이 몰랐을 뿐이며 앞으로 대대적인 단속을 벌일 예정'이라고 밝혔다가, 네티즌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한발 후퇴했다. 문광부 홈페이지에 2차 공지를 내어, 일정한 '계도기간을 거친 후에 영리적 사이트를 중심으로 한정하여 단속을 벌이겠다'고 네티즌을 다독이고 있는 상황이다. 인터넷에서 음악파일을 전송하는 행위가 애초부터 불법이었다는 문광부의 말은 맞지만 중요한 것은 언제부터 불법이었는가가 아니라, '현재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네티즌이 '이제서야 불법을 인식했다'라는 것은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준법의식이 없다고 핀잔주고 '계도할'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네티즌이 비로소 지금 그 금지가 정당한가'라고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문광부가 해야 할 일은 그 정당성을 설명하든가 네티즌의 비판과 항의를 받아들여 정당하지 못한 법을 개정하는 것이지, 나중에 단속하겠다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 정보공유연대를 비롯한 31개 시민사회단체들은 문광부나 음반업계에 맞서 저작권법재개정 투쟁을 선포하고, 이를 위한 지지서명을 받는 등 여러 캠페인을 벌여나가고 있다 ({{{{http://www.ipleft.or.kr/antilaw }} }}). 지난주부터는 대통령에게 애국가선물하기, 애국가 배경음악채택하기 등의 저작권법 불복종운동을 벌였다. 동시에 국회 앞에서 1주간 1인 시위를 벌였다. 문광부 담당자나 국회문광위 소속 의원들도 네티즌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의 문제제기에 약간은 긴장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네티즌과 시민사회단체들의 핵심적 요구사항인 저작권법 재개정 요구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며, 오히려 저작권법을 개악하려고 준비중이어서 3월, 4월은 저작권법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이 계속될 전망이다. 시민사회단체들 주장의 핵심은 지금의 저작권법이 인터넷의 자유로운 정보소통구조를 전혀 배려하지 못하고 있어 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 저작권법에 따르면 동호회게시판이나 카페에 시 한 편, 노래가사 하나만 업로드 해도 저작권침해이다. 블로그에 배경음악을 깔면 손해배상청구를 당할 지도 모른다. 신문기사를 퍼 나르는 것도 모두 불법이다. 블로그나 까페 등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지는 다양한 소통과 새로운 창작의 과정이 저작권법에 의해 원천적으로 막혀있는 것이다. 이는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의 행위는 복제와 전송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음에도 저작권법이 복제권과 전송권을 저작권자에게 거의 무제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터넷에서의 저작물 전송과 복제를 일정한 범위에서 허용하는 쪽으로 저작권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저작권법의 재개정이 궁극적인 대안이다. 혹자는 저작물을 복제하고 전송하고 공연하는 등 저작물의 모든 처분 권한은 저작자에게 있으니 그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그러니 그들의 권리주장은 정당하고 법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단지 이용자들의 무임승차 의식이 문제가 아니냐고 묻는다. 심지어 국회의원도, 문광부 공무원도 같은 질문을 한다. "우리 헌법은 사유재산권을 보장한다. 저작권법도 그 재산권의 하나이다. 그러니 저작권법도 보장되어야 할 기본권이다"라고. 사유재산권을 운운하며 헌법을 들먹이지만, 실상 사유재산권은 제한할 수 없다는 논리야말로 위헌적 발상이다. 우리 헌법은 입법자가 법률로써 재산권의 내용과 한계를 정하도록 위임하고 있다. 따라서 본질적인 내용의 침해가 아니라면 재산권도 얼마든지 제한할 수 있다. 토지소유권은 그린벨트로 묶거나 거래허가제를 통해 제한하고 있다. 자기 땅에 건물을 세우더라도 건축법에 따른 허가를 받거나 신고를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일조권을 침해하지 않으려면 일정한 높이 이상으로 지을 수 없다. 저작권법도 마찬가지다. 제한할 수 없는 권리가 아니다. 저작권을 제한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리로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국어 책을 낭송하게 하면 아이와 선생은 공연권 침해가 될 것이다. 글을 쓰면서 남의 글을 인용하는 것도 복제권 침해가 될 것이며, 저작권이 만료되지 않은 건축물 앞에서나 조각, 그림이 장식된 실내에서는 시사보도를 위한 취재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소풍간 학생들은 같이 노래를 부를 수도 없고 학교 방송에서 음악을 틀지도 못할 것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들이 저작권법 위반으로 처벌될 것이다. 그러나 안심해도 된다. 이런 행위들은 타인의 저작물을 공연하거나 복제하는 행위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저작권법에서 허용하고 있다. 즉 저작권법은 공연권이나 복제권을 저작권으로서 보호하는 한편, 저작권을 제한하고 있다. 왜? 저작물을 일정한 범위에서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보장하지 않으면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매우 불편하고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저작권을 통해 달성하려고 하는 문화의 발전이라는 것도 어느 만큼은 저작물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작권법 제1조에서 보듯 저작권법의 역사는 저작권과 이용자의 권리간에 균형을 금과옥조처럼 유지하려는 과정이었다. 그 균형점이라는 것이 사회변화에 따라 좌우로 이동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인터넷 디지털 환경으로 변화되면서 변화된 환경을 법, 제도에 수용하는 방식은 권리자를 강력하게 보호하는 쪽으로만 기울어져 왔다. 우리가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저작(인접)권자에게 전송권이 보장되고, 전송권에 대한 제한은 거의 두지 않으면서 저작권과 이용권 간의 균형이 깨어지고 있다. 또한 개인적인 목적의 비영리적인 사용을 위해서라면 저작물의 복제도 허용되었으나, 인터넷 환경에서는 실질적으로는 개인적, 비영리적 사용임에도 네트워크 환경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한정된 범위에서 사용됨에도 개인적 사용의 범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비영리적 사용이면서 저작권자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 한 실질적으로 보아 개인적 사용이라면 인터넷 상에서도 보장되어야 한다. 이 만큼은 저작자의 권리가 제한되어야 한다. 우리가 저작권 문제를 주목하는 이유는 비단 '불편'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작권의 강화는 바로 '차별'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저작권법에 의하여 정보의 소통이 규제되고 인터넷이 하나의 시장으로만 전락할 때는 정보의 부익부빈익빈이 강화되고 이는 정보사회의 삶의 질의 격차로 이어질 것이다. 저작권의 강화는 실제로 미국 헐리우드 자본에 의한 요구가 미국 정부를 매개로 국제적으로 관철된 것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시장의 논리가 세계화과정에서 정보의 소통과 활용에 적용된 결과이다. 결국 저작권 문제에 대해 공유의 공간을 넓혀 가는 것은 빈곤과 차별의 원천인 자본의 세계화에 맞서는 길이기도 하다.PSSP
대안세계화와 한국 사회운동 임 필 수 | 정책국장 오늘의 세계화는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며 새로운 제국주의다. 극단적인 착취와 강탈, 전쟁의 폭력, 빈곤의 여성화와 여성에 대한 폭력은 세계 민중에게 유례 없는 도전이다. 이에 저항하는 세계의 사회운동은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라는 지배세력의 온정주의나 보수적·퇴행적 '반세계화'를 넘어서 '대안세계화'의 이름으로 이념과 운동을 발견하고 있다. 이들은 인민의 권리의 자율적 실현, 사회적·경제적 변혁, 사회운동과 공동체 간 교통과 연대를 추구하고 있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지배세력의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라는 미망과 새로운 파퓰리즘적인 정치 행태 속에서 심각한 동요를 경험하고 있으며, 동시에 '대안세계화' 운동의 전진적인 요소들을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에 사회진보연대는 한국 사회운동의 긴급한 과제와 앞으로 사회진보연대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를 밝히고자 한다.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 미국 경제의 위기와 이와 날카롭게 대비되는 미국 군사력의 압도적인 우위는 세계 인민들에게 진정한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은 해외직접투자와 포트폴리오투자를 통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로 엄청난 양의 소득을 빨아들였다. 미국의 부유계급은 미국 내 신자유주의 개혁의 흥청거림 속에서 풍요한 소비를 향유했다. 하지만 이제 미국은 저축률의 감소, 경상수지 적자로 외채증가, 외국으로의 거대한 소득유출, 국내 자본소득의 감소라는 악순환을 맞이하고 있다. 미국은 달러화 약세라는 궤도로 돌아섰고, '글로벌한 정책협조'라는 미명으로 그 부담을 타국에게 분산시키려 하고 있다. 미국 경제가 짧은 시간 내에 대파국을 맞으리라 예상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경향이 장기적으로 미국의 금융적 지배와 제국주의 권력으로서 행동할 수 있는 능력과 모순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 미국은 이라크를 군사력으로 강점한 후 신속한 신자유주의 개혁을 위한 발걸음을 걷고 있다. 2004년 말 19개 나라로 구성된 '파리클럽' (주요채권국회의)은 이라크의 1200억 달러에 이르는 외채 가운데 파리클럽에 지고 있는 400억 달러 중 80%에 대한 부채탕감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초기 30%를 탕감한 후에는 IMF 프로그램이 승인된 후 30%를 탕감하고 마지막 20%는 IMF 조사위원회가 프로그램의 이행 여부를 판단하여 탕감한다는 게 가장 중요한 점이다. 이라크 인민의 시각에서 볼 때, 전쟁을 감행한 당사자들에게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전제 자체가 증오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아가 앞으로 진행될 IMF 프로그램은 이라크 인민의 민주적 결정 과정을 철저히 배제한 중심부 국가의 이익을 위한 개혁이 될 터이므로 심각한 저항을 야기할 것이다. 이미 정통성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이라크 임시정부가 이를 감당한 능력을 과연 조금이라도 보여줄 수 있을까? 미국이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과 점령은 미국이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한 사회를 한순간에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은 지녔지만 그것을 재건할 수 있는 정치적·경제적 능력은 결핍되어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부시의 대통령 재선은 도덕심, 애국주의 등 어떤 치장을 하더라도 미국 사회가 종교적 이데올로기나 전쟁의 폭력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야말로 미국 스스로가 주도한 금융세계화의 부메랑 효과에 대한 퇴행적, 반동적 대응의 한 측면이다. 이는 오늘의 자본주의 세계가 착취와 강탈, 이데올로기적 맹신과 전쟁의 폭력이라는 첨예한 국면으로 이미 진입하였음을 보여준다.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는 세계화의 새로운 국면이자 '새로운 제국주의'라고 부를 만하다. 이는 세계 민중에게 유례 없는 도전이자 투쟁의 대상이다. 세계화에 대한 불만들 오늘의 세계 자본주의의는 18-19세기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의 '원시적 축적' 과정과 비견할 만하다. 마르크스는 '원시적 축적'을 광범위하게 관찰했다. 토지의 상품화와 사유화, 농민 인구의 강제적인 구축, 다양한 형태의 소유권(공공소유, 집단소유, 국가소유)의 배타적인 사적 소유권으로 전환, 공공의 권리의 억압, 노동력의 상품화와 생산과 소비의 대안적·토착적 형태의 억압, 자연자원을 포함하는 자산의 식민지적·신식민지적·제국주의적 영유과정, 교환과 납세의 화폐화(특히 토지), 노예무역, 고리대금·국채·신용체계 등등. 마르크스가 언급한 이러한 특징들은 현재에도 강력하게 남아 있으며, 어떤 것은 과거보다 더 강력한 역할을 한다. 신용체계와 금융자본은 약탈, 사기, 도둑질의 중요한 수단이다. 주식부양, 인플레이션을 통한 구조적인 자산파괴, 인수합병을 통한 자산약탈, 한 나라의 모든 인민을 부채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채무부담의 증대, 신용과 주식 조작을 통한 기업의 사기와 자산 강탈(연금 기금의 유용과 주식과 기업의 붕괴를 통한 대규모 피해) 등등. 또한 강탈에 의한 축적은 완전히 새로운 메커니즘을 형성하고 있다. WTO 협상에서 지적소유권에 대한 협상(TRIPS 협정)이 강조되는 것은 중요한 사례다. 지적재산권은 지배세력이 주장하는 자유무역의 유용성, 즉 지식과 기술, 사상의 자유로운 교통이라는 이념이 무색한 대표적인 보호무역의 사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유전물질의 세계저장량에 대한 약탈이 소수의 거대 초민족기업의 이득을 위해 진행 중이다. 세계 환경 공유물(토지, 대기, 물)의 점증하는 고갈과 생물서식지의 하락은 대대적인 자연의 상품화의 결과며, 이는 자본집약적 농업생산 양식을 제외한 모든 농업을 제약한다. 문화적 형태, 역사, 지적 활동의 상품화는 대대적인 강탈을 동반한다. 이러한 강탈의 과정은 세계화에 대한 불만들을 누적시키고 있으며, 광범위한 저항을 야기하고 있다. 반세계화인가, 대안세계화인가? 그러나 세계화에 대항하는 운동은 다양한 경향들을 포함하고 있다. 1999년 미국 시애틀 WTO 각료회담 반대투쟁은 그러한 요소들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예컨대 당시 미국노총이 보여준 입장은 중요한 사례다. 그들이 시애틀투쟁에 참가한 중요한 동기의 하나는 중국의 WTO 가입 반대였다. '중국의 가입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낮은 임금제공을 통해 중국의 엘리트들이 대중을 억압하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담론은 사실상 국수주의·보호무역주의, 그리고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것이었다. 금융세계화가 동반하는 생산과 고용의 파괴라는 현실의 원인을 외부의 국가 또는 인민에게 돌리는 매우 위험스러운 주장이다. 또한 외부의 국가 또는 인민을 적으로 삼는 이데올로기는 곧바로 내부의 적-이주자, 여성, 실업자 등등-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국민 중에 기생충이 있다"는 대처의 발언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미국말고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의 범죄화를 주장하는 극우세력에게도 '반세계화'는 중심 구호가 되고 있다. 나아가 시민권의 '민족 우선' 원칙을 세운 유럽연합은 배타적인 권리부여를 체계화한다. 세계화가 낳은 혼돈으로부터 또는 '미국화의 물결로부터 자기 민족에게 고유한 무언가를 지켜야 한다는' '반세계화'의 논리는 이처럼 보수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도 이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세계화에 대한 불만이 보수주의로만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 반대'의 코포라티즘 경향도 분명히 존재한다 (민족경제의 재건, 국유화나 '투자의 사회화'를 통한 산업의 균형발전, 노동자 전체의 고용증진과 복지개선 등등).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금융세계화의 현실에서 이미 '미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배세력 중 일부는 이러한 경향을 대중조작을 위한 간판으로 간혹 활용하기도 하지만,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이후 먼 훗날의 신기루로 한없이 지연된다. 대안세계화: 세계 민중운동의 저항의 전진적 요소들 이처럼 '반세계화'라는 명칭이 우리의 운동을 지칭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세계농민운동조직인 비아캄페시나(소농의 길)는 '투쟁을 세계화하자, 희망을 세계화하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민족적·인종적 분할, 성적 억압과 배제라는 현실의 조건을 지양하는 보편적인 이념과 그에 적합한 운동을 건설하는 것만이 능동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사회운동의 흐름에서 어떤 전진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계발해야 하는가? 첫째, 인민들의 권리의 자율적인 실현이라는 원칙을 발전시켜야 한다. 세계경제기구나 글로벌 NGO가 내세우는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라는 미망이나 '반세계화' 운동의 보수적, 퇴행적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안세계화 운동은 모든 인민들의 권리의 목록을 재작성하려는 노력을 펼치고 있다. 세계화의 고통 속에서 인민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요소를 제거하고 상호확장적인 권리를 발견하며, 또한 인민들의 자율적인 운동을 통해 쟁취하고자 하는 원칙이다. 둘째, 금융세계화의 현실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사회적·경제적 전화의 전략과 요구를 계발해야 한다. 예컨대 세계 자본주의 주변부와 신흥공업국을 휩쓴 외채위기를 겪으며, '국제금융·무역기구' 반대(또는 전화), 제3세계 외채탕감, 금융거래과세를 통한 자본통제 등의 요구를 제시했다. 현재 세계사회운동의 가장 활동적인 세력의 하나인 농민운동은 식량주권(단순한 민족적 식량자급이 아닌 토지, 생명종과 유전자원, 농업지식에 대한 농민의 권리), 토지개혁과 대안적 농업모델을 두고 활발한 모색과 투쟁을 펼치고 있다. 거대한 사유화·상품화의 물결 속에서 지식에 대한 소유권과 자연 공유물에 대한 소유권에 반대하는 투쟁도 성장하고 있다. 세계화가 낳은 여성의 빈곤,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는 여성운동의 모색과 투쟁도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기된 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세계화는 복합적인 현실의 변화를 낳고 있으며, 대안세계화 운동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몇몇 제한적 요구의 제기로 단순화될 수 없다. 예를 들어 금융세계화에 조응하기 위해 화폐통합을 매개로 신자유주의 경제통합을 단행하고 유럽헌법을 제정하고자 하는 유럽연합의 현실은 이 문제의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참조점이다. 현재 유럽연합의 건설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긴급한 과제로 떠오르게 한다. 예컨대 유럽의 입법·사법·행정기구의 민주화 (특히 유럽연합의 사법체계는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율화되면서 전횡을 휘두르게 된다), 사회적 노동의 재조직화('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이라는 목표의 갱신), 국경의 민주화 (인민들의 순환과 거주의 보편적 권리), 교육의 일반화 (특히 획일적인 민족적 교육체계에 의해 억압되는 익명의 이주자들 사이에서) 등등. 이는 세계화가 억압하는 인권·시민권의 재건을 위해 필수적인 과제이자 사회의 변혁을 위한 출발점일 수 있다. 대안세계화 운동은 세계적·지역적 시민권(노동권, 여성권)의 재건을 위한 경로들을 발견해야 한다. 셋째, 사회운동은 (앞서의 목표를 위해서도)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분리된 민족 또는 공동체 간 교통과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특히 '문명의 충돌'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갈등과 전쟁을 불변으로 간주하거나 이를 진압·순치하는 게 '성스러운' 임무라고 주장하는 세력과 대결하는 게 긴급한 과제다. 오늘 세계에서 전쟁과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발호는 세계화가 낳은 가장 극단적인 결과이자 인민운동의 진정한 무능력을 표현한다. 현재 움터나고 있는 반전운동은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명분으로 감행되는 '인도주의' 전쟁이나 침략전쟁을 거부하며, 전쟁과 폭력의 전장에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바라는 사회운동들간의 연대를 추구하고 있다. 전쟁이 벌어지는 곳은 곧 저발전 지역이며 곧 퇴행적인 사회이며, '인도주의' 개입을 통한 민주주의의 이식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서구 제국주의가 제공하는 시각을 거부하고, 인민운동 차원의 교통과 연대의 틀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대안세계화와 한국의 사회운동 한국의 사회운동은 '반세계화'를 넘어서 '대안세계화'라는 이름을 찾고 있는가? 한국의 사회운동은 노무현 정권의 파퓰리즘이라는 조건 위에 있다. 노무현정권은 김대중 정권의 노선을 보완하며 신자유주의 개혁을 신속하게 강도 높게 추진하기 위해 새로운 파퓰리즘적인 정치 행태를 창출하고 있다. 행정부 권력의 비대화, 미디어의 적극적인 활용, 대통령 개인에 대한 대중적 지지나 지역주의(실리주의)적 동원 등의 정치 행태는 민중운동의 저항을 무력화하는 전형적인 방식이 되고 있다. 또한 정권과 NGO의 결탁은 위기의 순간마다 민중의 단결을 교란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게다가 노무현정권의 파퓰리즘은 기본적으로 기존 노동자운동을 배제하는 (과거 남미의 페론주의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물론 '참여와 대화'라는 수사는 계속 허구적으로 활용된다). 이 과정에서 사법부와 같은 억압적 국가기구가 자율화되면서 민중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권력을 휘두르며 사회의 위기를 한층 강화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국가의 민주화'는 우회할 수 없는 과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인민이 우선 '국가의 민주적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세계화의 승리자(수혜자)'라는 미망을 타파하며, 전쟁의 폭력이라는 위급성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우리 운동의 공동의 과제를 인식하고 분석과 입장을 마련해나갈 것이다. 첫째, 대안세계화운동에 적합한 노동자운동의 개조. 현재 국제노동자운동은 형성 중인 대안세계화운동에서 가장 비활동적인 부문으로 남아 있다. 이는 국제자유노련 등으로 대표되는 국제노동자운동조직의 전통적인 '반공주의·코포라티즘' 지향과 그 몰락의 유산이다 (북반구 노조운동의 쇠퇴, 로비중심의 활동 행태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에는 경제협력기구(OECD)나 국제노동기구(ILO)가 제시하는 '괜찮은 노동'(decent work)이라는 슬로건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금융세계화의 현실에 대한 진정한 맹목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한국에서는 노무현정권이 기본적으로 노동자운동을 배제하는 파퓰리즘 형태를 창출함으로써, 현존 노동조합 운동이 큰 동요를 겪고 있다. 즉 노동조합은 최소한의 코포라티즘적 지향조차 포기하며 정권의 '위기관리' 파트너가 될 것인가 동요한다. 한편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면 현재 민주노총 지도부의 지향을 '사회적 합의주의'라고 부르기에는 부적합한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최소한 '사회적' 또는 '코포라티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합의의 결과가 노동자대중의 포괄적인 부문들에게 그 결과가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현재의 지향은 노동자의 상층 일부의 현상유지를 목적으로 할 뿐이다. 한마디로 사회적 합의주의나 코포라티즘에 미달하나, 그것을 허구적으로 주장할 뿐이다. 예컨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라는 구상이 일부 노동자의 '삶의 질 개선'으로 현실적으로 전환된 것은 코포라티즘에 미달하는 현재의 노조운동의 지향을 증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현재 '비정규직 철폐투쟁'도 갈림길에 있다. 비정규직권리보장 입법과 같은 '법제화' 시도는 사회 전체에 걸친 '사회적 노동의 재조직화'-일례로 '모두에게 일자리를'이라는 구호가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 정도의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이나 여성의 가사노동과 같은 광범위한 사회적 활동의 사회적 인정. 또는 이와 전혀 다른 방식의 생산관계의 전진적인 변혁-가 동반되지 않으면 비정규직 철폐의 현실적 경로를 발견할 수 없다. 현재의 구조에 단순히 편입되는 게 불가능하다면 현재의 구조를 변혁하는 게 유일한 경로다. 방향의 전환이 시작되지 않는다면 실업·빈곤, 이주노동자의 권리의 문제를 동시에 사고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둘째,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양립. 지난 세기 노동자운동은 가족을 매개로 재생산의 부담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구조를 온존시켰다. 신자유주의 공세는 여성이 출산, 양육과 전반적인 가사노동을 책임져야 할 뿐만 아니라 생계비용을 보충하기 위해 이중적 노동을 해야만 하는 상태를 촉진했다. 이는 여성의 출혈적인 노동력 판매를 확대하고 그 결과 여성의 빈곤과 고통은 악순환되었다. 여기서 남성 가장의 임금이 가족의 재생산을 담보한다는 '가족임금'은 하나의 맹목점이 되었고, 현실의 고통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이 양립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빈곤 문제에 관한 전진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만 한다. 물론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한편,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는 여성이 경험하는 폭력적 현실을 더욱 증폭한다. 먼저 전쟁은 대부분의 전쟁이 증언하듯이 '성별화된 폭력'을 확대한다. 전쟁은 여성에 대한 잔혹한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상징적 폭력을 동반한다. 또 한편으로 금융세계화가 강요하는 여성의 빈곤은 성매매의 문제를 더욱 증폭한다. 전쟁과 성매매라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문제에 직면해 여성의 권리의 견지에서 운동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셋째, 대안세계화 운동과 반전운동의 결합. 현재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침략전쟁만이 유일한 전쟁이 아니다. 현재 미국은 동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중동과 같이 미국의 이해관계가 '사활적인 지역'에서는 기존의 군사동맹과 무기체계를 강화하면서 도발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지금도 콜롬비아나 베네수엘라에서 저강도 전쟁(마약과의 전쟁, 정권의 전복)이 꾸준히 시도되고 있으며,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이외 배제된 지역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전쟁에 대해서는 어색하게 침묵하거나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미명으로 중심부로의 분쟁확대를 저지하는 군사작전을 펼치고 있다. 세계화로부터 배제된 지역은 과거 식민주의·제국주의·신식민주의의 역사를 거치며 인간생명과 자연자원의 착취, 외채를 통한 수탈을 겪었고, 구 식민권력이 이식한 부정한 토착정권의 이중수탈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는 황폐화되었고, 군벌들 간 약탈전쟁마저 만연하다. 이러한 사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세계의 배제된 지역에서 반전운동과 대안세계화운동이 결합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사회운동 차원의 교통과 연대가 확장되어야 한다. 세계자본주의의 주변부에서 전쟁과 빈곤은 극단적 폭력의 지대를 공고히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또한 현재 한반도는 '신자유주의 경제통합'과 '절멸 전쟁'의 위기에서 장기적인 미래를 내다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은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희망하는 한미동맹의 안정적인 분쟁관리인가 아니면 또 다른 급진화의 길인가를 두고 갈림길에 서 있는 시점이다. 역시 이 뿐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복합적인 과제들이 존재한다. 대안세계화 운동에서 가장 활력 있는 부문으로 성장하고 있는 농민운동, 식량주권과 농업개혁에 관한 요구와 분리될 수 없는 생태운동, 현재의 실업/반실업·빈곤의 문제와 깊게 연루된 대중교육의 위기 등의 문제는 우리가 공동으로 풀어나가야 할 긴급한 과제다. 사회진보연대는 이와 같은 한국 사회운동의 중장기적 과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공동의 전망을 세워나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PSSP
이목희 의원이야말로 민주노총이 단호히 ‘결별’해야할 신자유주의 세력이다! - 이목희 의원의 이른바 ‘결별’ 망언에 부쳐 - 1.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사회적 교섭안을 둘러싼 극한 대립 속에 또 다시 무산된 가운데, 그간 국회 환경노동위 여당 간사로서 비정규개악안 처리를 주도해온 열린우리당 이목희 의원이 민주노총에게 이른바 ‘극좌 맹동주의자와의 결별’을 주문하고 나섰다. 이목희는 지난 15일 기자회견에서 “민주노총이 한줌도 안 되는 극좌 맹동주의자에 의해 나락에 떨어지는 모습이 안타깝고 그들에 대해 깊은 분노를 느낀다”는 열린우리당의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그는 “민주노총 지도부에 연민의 정을 느낀다”며 다소 흥분된 어조로 노동운동에 대한 그의 지나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또한 이목희는 “이번 민주노총의 대의원대회와 관계없지만”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여야합의에 따른 정부 비정규법안의 4월 조기 처리'를 분명히 한 뒤, “노사관계 로드맵안은 오랜 기간동안 한국노총과 논의해왔기 때문에 6월내로 처리하겠다”며 갑작스레 그 지나친 애정은 온데 간데 없이 오히려 ’민주노총의 배제‘를 시사하기도 했다. 2. 이목희의 이 같은 망언은 한 마디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무산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 원인을 고의적으로 외면한 채, 전직 노동운동가라는 경력을 앞세워 대의원대회의 물리적 충돌에 대해서만 ‘감 놔라 배 놔라’ 식의 훈수를 두는 것이다. 특히 “민주노총이 사회적 교섭기구 참여를 결정하더라도 비정규 법안의 4월 처리는 불가피하다”거나 “민주노총이 참여하지 않더라도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 논의를 끝내겠다”는 대목은 그가 전직 노동운동가라는 명함을 팔아먹으면서까지 비정규개악입법을 반대하는 노동자대중의 피맺힌 절규를 묵살하려는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폭로해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이목희의 어처구니없는 망언을 규탄해 마지않는다. 사실 이목희를 위시한 신자유주의 개혁 세력은 애초부터 비정규직 노동자의 실질적인 권리입법을 위해 노력할 의지가 눈꼽만치도 없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조응하는 노동유연화 정책의 관철이었을 뿐이며, 이목희 스스로가 폭로하듯 사회적 교섭이라는 것 역시 참여라는 외양을 뒤집어쓰고 비정규직을 전면 확대하기 위한 수순에 불과했다. 노무현 정권은 바로 이 수순에 민주노총이 들러리서주기를 주문했던 것이다. 3. 이목희의 망언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바로 현재 민주노총 지도부가 보이고 있는 행보이다. 이처럼 뻔뻔스럽게 자신들의 의도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는 신자유주의 개혁 세력과 이른바 ‘교섭’이 가능하다는 판단은 도대체 어떻게 나올 수 있는 것인가? 노무현 정권이 사회적 교섭을 추진한 의도는 무엇보다 노동운동을 '교섭'의 이름으로 묶어두기 위함이었다. 오직 지배계급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것에만 목적이 있는 사회적 교섭기구를 통해 노동운동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민주노총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사회적 교섭에 지금까지 헛된 노력을 쏟아 붓고 혼란에 혼란만 거듭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더 이상의 사회적 교섭을 위한 노력을 중단하고 투쟁의 전면에 민주노총이 나서야 한다.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은 “정부가 비정규법안을 강행 처리하면 사회적 교섭을 폐기하겠다”고 이미 수 차례 선언한 바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지금이 바로 정권과 자본의 비정규법안 강행 처리 의사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시기이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민주노총이 사회적 교섭안을 폐기하고 노동법 개악에 맞선 단결된 계급대중의 투쟁을 조직하는 길에 떨쳐나설 것을 진심으로 촉구한다. 4. 정작 민주노총 지도부가 결별해야 할 세력은 이목희가 말하는 ‘극좌 맹동주의자’가 아니라 바로 이목희와 같은 신자유주의 개혁 세력이다. 지금과 같은 노동운동의 혼란과 동요, 분열이야말로 신자유주의 개혁 세력이 진정 원하는 것이며, 이목희의 ‘결별’ 발언은 이러한 동요와 분열을 더욱 촉구하고 나선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사회적 교섭안의 무리한 강행으로 인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파행은 그 찬반을 떠나 전체 민주노조 운동과 전선에 심대한 혼란과 위기를 초래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틈을 타 정권과 자본은 기아자동차 노조 비리 문제와 귀족노조 운운하는 보수언론의 비난공세 속에서 궁지에 몰린 노동운동을 이참에 아예 뿌리 채 뽑으려는 듯 공격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또 다시 물리적 충돌이 불 보듯 뻔히 예상되는 대의원대회 강행 방침만을 거듭한다면 한국 노동운동은 정말 회복하기 힘든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전체 노동운동의 위기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면밀하게 진단하고 그 위기의 해법을 계급대중의 단결된 투쟁 속에서, 비정규개악입법 저지 투쟁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마련해나가야 할 때이다. 2005. 3. 16 사회진보연대
한국형 '뉴딜' 정책과 연기금 활용 구상의 문제점 정지영(정책부장) 한 때 국민연금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을 정도로 격했던 국민연금을 둘러싼 논쟁은 어느 순간 슬며시 잦아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지난 11월 초, 정부가 발표한 '경기활성화를 위한 종합투자계획(일명 한국형 뉴딜)'이 그 발단이다. 한국형 뉴딜은 지속되는 경기 침체와 경제 성장률 하락에 직면해 정부가 카드로 꺼내든 정책이다.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는 것이 정책의 핵심인데, 그 재원은 국민연금의 기금이 언급되었다. 한국형 뉴딜 정책이 발표되자, 여러 측면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정책이 과연 경기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인가, 정부의 재정 부담이 크지 않은가, 연금기금을 동원하는 것이 연금의 재정안정화에 도움이 되는가 등의 문제들이다. 이 글에서는 정부가 한국형 뉴딜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맥락을 간략히 살펴보고, 이 정책이 정부가 추진해 온 국민연금 개혁 방향과는 어떤 연관을 가지는가를 주되게 밝히고자 한다. 한국형 뉴딜, 대안 없는 정부의 고육지책 한국형 뉴딜이라는 경기활성화 정책이 발표된 배경은 당연히도 현재 한국경제가 처한 어려움이다. 지표상으로 봤을 때도, 각종 경제연구소들은 2004년 하반기와 2005년 경제전망에서 경제성장률을 5%대 이하로 잡고 있다. 물론 체감되는 경기는 더욱 심각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어떤 조치라도 취해야만 했다. 즉, 정부가 재정 부실화의 가능성과 연금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정책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이런 카드는 소위 전문가들로부터 실효성을 의심받을 정도로 고육지책에 불과하다. 사실 현재 한국경제가 처한 위기는 몇몇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IMF 구조조정 이래로 일관되게 추진해온 신자유주의 정책의 귀결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인 노동의 유연화는 심각한 빈곤의 문제를 낳으면서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외국인 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개방정책은 한국 경제의 대외의존성을 더욱 심화시켰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이러한 과정의 결과다. 따라서 정부가 내놓는 몇몇 경기부양책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고, 당연히도 실효성이 의심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부가 한국형 뉴딜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 이런 정책을 내놓으면서 노리는 효과는 분명하다. 현재의 위기를 정책상의 문제로 환원하면서, 좀 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좀 더 유연화 된 노동시장을 형성하고, 좀 더 예산을 풀면 경기가 회복될 수 있다는 식의 해법을 내놓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문제의 핵심은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에 두고 말이다. 국민연금 기금을 동원하겠다는 발상의 기막힘 국민연금의 문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먼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실효성도 의심되고 자신들의 위기를 가리기 위한 정책을 위해 국민연금의 기금을 동원하겠다는 뻔뻔스러움을 지적해야겠다. 이 문제는 정부가 추진해온 국민연금 재정안정화 방안과 연계를 시켜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정부는 그 동안 국민연금 기금의 고갈과 수익성을 문제 삼으면서, 보험료를 올리고 급여는 삭감하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추진해왔다. 정부는 국민들의 노후야 어떻게 되던, 아니 좀 더 직접적으로 현재의 빈곤함에 국민연금 보험료가 더욱 부담스럽던 간에 무조건 기금을 쌓아둬야 한다는 개정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해결이 불가능한 위기를 떠받치기 위해 연금을 끌어다 쓰겠다는 발상을 내놓고 있다. 이를 통해 명확해지는 것 하나, 정부가 국민연금을 사고하는 시각이라는 것이 국민들이 노후를 인간답게 살 수 있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주식, 부동산 등 어디든 필요한 곳에 끌어 쓸 수 있는 눈 먼 돈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간접자본 투자 = 건전한 투자? 국민연금 기금을 사회간접자본의 재원으로 활용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주식시장 투자보다는 낫다는 의견들이 있다. 하지만 이번 한국형 뉴딜 정책이 그 동안 진행되어온 연금개혁의 방향과 배치되는 무엇은 아니다. 오히려 연금개혁 방향에 충실한 것이다. 정부는 이번 정책을 발표하면서, 이를 위해 기금관리기본법, 민간투자법, 국민연금법 개정안 등 소위 '뉴딜 3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민연금법 개정안은 적립될 기금의 규모를 키우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공적연금을 축소하는 과정이다. 기금관리기본법은 국민연금 등 연기금의 주식 및 부동산 투자를 비롯하여 투자처를 확대하기 위한 법이다. 민간투자법은 민간투자 대상을 학교시설, 공공청사, 임대주택 등으로 확대하기 위한 것이다. 이번 정책이 건설경기 부양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간접자본을 중심으로 계획이 수립될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것이 이후에 낳을 효과는 무시할 수 없다. 어쨌든 연금의 기금은 천문학적 액수로 적립되는 것이고, 기금관리기본법 개정을 통해 이 돈이 신자유주의 정책이 낳은 위기를 관리하거나 혹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더욱 촉진시키는 버팀목으로 어디에든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뿐만 아니라 민간투자 대상을 확대하는 것은 기간시설 혹은 공공시설을 민영화하는 과정과 긴밀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 국민연금의 투자처가 사회간접자본이라는 이유만으로 건전한 투자로 볼 수 있는가? 오히려 국민연금의 투자 대상이 주식, 부동산, 각종 펀드, 해외투자, 민영화 사업 등으로 확대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연금기금이 금융세계화의 버팀목이 된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연금기금이 주식시장에만 투자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부의 이번 발표가 국민연금기금의 독립성을 침해한다는 비난이 있지만, 기금운용의 독립성이 단순히 결정 주체의 문제로 환원될 수는 없다. 거액을 쌓아두고 다양한 투자의 길을 열어두는 조치들이 취해졌을 때, 아무리 독립적인 기금운용위원회가 결정을 내린다하더라도 투자처는 현재 정부가 제시하는 것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의 출발은 국민의 삶과 노후야 어떻게 되든 활용할 수 있는 기금을 쌓아두는 것, 그리고 더 많이 쌓으려는 것이다. 연금은 민중의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 한국형 뉴딜로 인해 다시 불거진 국민연금 문제, 하지만 지금의 논란은 정말 원칙도 기본도 없이 진행되고 있다. 연금이 민중의 삶을 거덜 내는데 일조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연금이 왜 필요한가? 국민연금 문제의 원칙은 이야기했듯이, 민중의 삶이 그 중심이라는 것이다. 민중의 삶이 날이 갈수록 밑바닥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이 순간에도 지배세력은 민중의 노후를 위한 저축까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활용하는 것에 몰두하고 있다. 이 땅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늘을 살아내기에도 버겁고, 이 빈곤이 노후까지 연장되는 마당에 국민연금의 급여는 축소하고, 보험료는 올리는 작태를 보인다. 게다가 이 기금을 자신들이 저질러온 신자유주의 정책의 미봉책으로, 그리고 앞으로 더욱 이를 활성화시키는데 활용하고 있다. 언제까지 두고 보아야 할 것인가? 지금 위기의 원인은 신자유주의 정책 그 자체라고, 이를 유지하는데 민중의 노후소득을 활용하지 말라고 주장해야 한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