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뉴딜' 정책과 연기금 활용 구상의 문제점 정지영(정책부장) 한 때 국민연금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을 정도로 격했던 국민연금을 둘러싼 논쟁은 어느 순간 슬며시 잦아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지난 11월 초, 정부가 발표한 '경기활성화를 위한 종합투자계획(일명 한국형 뉴딜)'이 그 발단이다. 한국형 뉴딜은 지속되는 경기 침체와 경제 성장률 하락에 직면해 정부가 카드로 꺼내든 정책이다.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는 것이 정책의 핵심인데, 그 재원은 국민연금의 기금이 언급되었다. 한국형 뉴딜 정책이 발표되자, 여러 측면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정책이 과연 경기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인가, 정부의 재정 부담이 크지 않은가, 연금기금을 동원하는 것이 연금의 재정안정화에 도움이 되는가 등의 문제들이다. 이 글에서는 정부가 한국형 뉴딜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맥락을 간략히 살펴보고, 이 정책이 정부가 추진해 온 국민연금 개혁 방향과는 어떤 연관을 가지는가를 주되게 밝히고자 한다. 한국형 뉴딜, 대안 없는 정부의 고육지책 한국형 뉴딜이라는 경기활성화 정책이 발표된 배경은 당연히도 현재 한국경제가 처한 어려움이다. 지표상으로 봤을 때도, 각종 경제연구소들은 2004년 하반기와 2005년 경제전망에서 경제성장률을 5%대 이하로 잡고 있다. 물론 체감되는 경기는 더욱 심각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어떤 조치라도 취해야만 했다. 즉, 정부가 재정 부실화의 가능성과 연금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정책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이런 카드는 소위 전문가들로부터 실효성을 의심받을 정도로 고육지책에 불과하다. 사실 현재 한국경제가 처한 위기는 몇몇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IMF 구조조정 이래로 일관되게 추진해온 신자유주의 정책의 귀결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인 노동의 유연화는 심각한 빈곤의 문제를 낳으면서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외국인 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개방정책은 한국 경제의 대외의존성을 더욱 심화시켰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이러한 과정의 결과다. 따라서 정부가 내놓는 몇몇 경기부양책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고, 당연히도 실효성이 의심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부가 한국형 뉴딜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 이런 정책을 내놓으면서 노리는 효과는 분명하다. 현재의 위기를 정책상의 문제로 환원하면서, 좀 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좀 더 유연화 된 노동시장을 형성하고, 좀 더 예산을 풀면 경기가 회복될 수 있다는 식의 해법을 내놓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문제의 핵심은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에 두고 말이다. 국민연금 기금을 동원하겠다는 발상의 기막힘 국민연금의 문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먼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실효성도 의심되고 자신들의 위기를 가리기 위한 정책을 위해 국민연금의 기금을 동원하겠다는 뻔뻔스러움을 지적해야겠다. 이 문제는 정부가 추진해온 국민연금 재정안정화 방안과 연계를 시켜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정부는 그 동안 국민연금 기금의 고갈과 수익성을 문제 삼으면서, 보험료를 올리고 급여는 삭감하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추진해왔다. 정부는 국민들의 노후야 어떻게 되던, 아니 좀 더 직접적으로 현재의 빈곤함에 국민연금 보험료가 더욱 부담스럽던 간에 무조건 기금을 쌓아둬야 한다는 개정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해결이 불가능한 위기를 떠받치기 위해 연금을 끌어다 쓰겠다는 발상을 내놓고 있다. 이를 통해 명확해지는 것 하나, 정부가 국민연금을 사고하는 시각이라는 것이 국민들이 노후를 인간답게 살 수 있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주식, 부동산 등 어디든 필요한 곳에 끌어 쓸 수 있는 눈 먼 돈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간접자본 투자 = 건전한 투자? 국민연금 기금을 사회간접자본의 재원으로 활용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주식시장 투자보다는 낫다는 의견들이 있다. 하지만 이번 한국형 뉴딜 정책이 그 동안 진행되어온 연금개혁의 방향과 배치되는 무엇은 아니다. 오히려 연금개혁 방향에 충실한 것이다. 정부는 이번 정책을 발표하면서, 이를 위해 기금관리기본법, 민간투자법, 국민연금법 개정안 등 소위 '뉴딜 3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민연금법 개정안은 적립될 기금의 규모를 키우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공적연금을 축소하는 과정이다. 기금관리기본법은 국민연금 등 연기금의 주식 및 부동산 투자를 비롯하여 투자처를 확대하기 위한 법이다. 민간투자법은 민간투자 대상을 학교시설, 공공청사, 임대주택 등으로 확대하기 위한 것이다. 이번 정책이 건설경기 부양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간접자본을 중심으로 계획이 수립될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것이 이후에 낳을 효과는 무시할 수 없다. 어쨌든 연금의 기금은 천문학적 액수로 적립되는 것이고, 기금관리기본법 개정을 통해 이 돈이 신자유주의 정책이 낳은 위기를 관리하거나 혹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더욱 촉진시키는 버팀목으로 어디에든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뿐만 아니라 민간투자 대상을 확대하는 것은 기간시설 혹은 공공시설을 민영화하는 과정과 긴밀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 국민연금의 투자처가 사회간접자본이라는 이유만으로 건전한 투자로 볼 수 있는가? 오히려 국민연금의 투자 대상이 주식, 부동산, 각종 펀드, 해외투자, 민영화 사업 등으로 확대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연금기금이 금융세계화의 버팀목이 된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연금기금이 주식시장에만 투자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부의 이번 발표가 국민연금기금의 독립성을 침해한다는 비난이 있지만, 기금운용의 독립성이 단순히 결정 주체의 문제로 환원될 수는 없다. 거액을 쌓아두고 다양한 투자의 길을 열어두는 조치들이 취해졌을 때, 아무리 독립적인 기금운용위원회가 결정을 내린다하더라도 투자처는 현재 정부가 제시하는 것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의 출발은 국민의 삶과 노후야 어떻게 되든 활용할 수 있는 기금을 쌓아두는 것, 그리고 더 많이 쌓으려는 것이다. 연금은 민중의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 한국형 뉴딜로 인해 다시 불거진 국민연금 문제, 하지만 지금의 논란은 정말 원칙도 기본도 없이 진행되고 있다. 연금이 민중의 삶을 거덜 내는데 일조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연금이 왜 필요한가? 국민연금 문제의 원칙은 이야기했듯이, 민중의 삶이 그 중심이라는 것이다. 민중의 삶이 날이 갈수록 밑바닥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이 순간에도 지배세력은 민중의 노후를 위한 저축까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활용하는 것에 몰두하고 있다. 이 땅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늘을 살아내기에도 버겁고, 이 빈곤이 노후까지 연장되는 마당에 국민연금의 급여는 축소하고, 보험료는 올리는 작태를 보인다. 게다가 이 기금을 자신들이 저질러온 신자유주의 정책의 미봉책으로, 그리고 앞으로 더욱 이를 활성화시키는데 활용하고 있다. 언제까지 두고 보아야 할 것인가? 지금 위기의 원인은 신자유주의 정책 그 자체라고, 이를 유지하는데 민중의 노후소득을 활용하지 말라고 주장해야 한다. PSSP
2004년 미국에 던져진 질문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과 '제국' 기획의 불가능성 최예륜(정책부장) 부시의 재선으로 마무리된 2004년 미 대선 직후, 미군은 이라크 저항세력 소탕을 목적으로 한다는 대대적인 팔루자 공습을 자행했다. 부시는 11월 10일 연설을 통해 "일부 소수 그룹이 이라크의 민주화를 좌절시켜 권력을 잡으려 하고 있다"며 "이같은 민주주의의 적에 대처하기 위해 미군은 향후 수주간에 걸쳐 공세를 계속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9.11테러 이후 감행된 이라크 전쟁과 공세적 세계군사재편 전략이라는 미국의 일방적 대외정책이 대선을 통해 미국 국민들에게 심지어는 전세계 인민들에게 승인되었다는 식의 태도다. 그러나 무차별폭격 수준의 팔루자 학살 이후, 이라크 내 반미여론은 더욱 고조되고 미군이 창설한 이라크군 4개 대대 중 일부가 미군의 공격지원명령을 거부하는 등 미국의 이라크 점령에 대한 저항이 쏟아지는 가운데, 부시는 동맹국의 협박을 호소하는 등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2004년 미 대선은 베트남전쟁 중이던 1968년 닉슨의 재선 이래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는 점, 그리고 2000년 플로리다 재검표 사태나 총득표수 논란과 같은 사태가 불거지지 않은 깔끔한 승리와 승복의 과정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부시의 완벽한 승리로 평가된다. 나아가 미국사회의 보수화의 지표, 부시체제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강력한 지지도가 드러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는 미국 정치체제가 갖는 근원적 한계가 극대화되는 가운데 민주주의 상징으로서의 미국의 헤게모니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징후가 드러난다. 한계에 봉착한 미국 정치 체제의 '민주성' 미국 대선의 선거인단 제도는 미국이 연방국가이며 각 주의 의견을 하나로 모아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연방헌법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이 선거인단 제도로 인해 전체 득표율이 선거결과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선거인단 독식제로 민주당, 공화당 이외의 제3세력의 등장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보수성이 유지가능해진다. 이러한 선거제도는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제어하는 가운데 강력한 양당체제를 뒷받침해왔다. 미국적 정치원리의 내부 긴장은 자유주의와 그것을 방어하는 외피로서의 보수주의적 성향{{) 미국의 정치적 변화란 공화주의적 덕성관념과 지유주의적 사익관념의 대립을 현상으로 하면서 주기적으로 개혁의 이념을 형성하였다. 이는 자유주의자, 흑인, 북부 노동자, 소수 인종집단 등의 민주당의 지지연합이 형성되었던 과정, 기본적 자유주의적 전망 하에서 복음주의적 종교집단 등이 주도적으로 도덕적 이슈를 대중화하여 1980년 레이건의 집권으로 결실을 맺은 보수주의 혁명의 과정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미국의 정치체제는 미국 건국의 정신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아가서는 구래의 정신으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한계 내에서 지속되어왔다. }} 간의 대립으로 유지되어왔다. 1933년-1945년 민주당 루즈벨트의 4선 기간동안 확립되고 미국 사회의 '새로운 다수'를 지지기반으로 하는 뉴딜연합은 80년대 '스태그플레이션'과 경제불황이라는 조건 속에서 지속불가능해였다. 이는 이후의 레이건의 보수주의 혁명과 네오콘의 등장을 뒷받침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민주당은 내부의 보수화와 급진화 사이의 경합을 1992년 중도보수를 표방한 클린턴의 등장으로 일단락된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클린턴의 등장은 여성, 소수 인종집단, 북부 노동자 등 이질적인 집단들의 연합이라는 위상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는 한편, 자유민주주의의 선봉장으로서의 미국의 지위가 더 이상 불가능해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냉전의 해소는 평화,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미국 대외정책의 외피를 벗겨내고 다자주의적 개입의 틀(UN과 국제법)을 초과하는 일방주의적 대외정책을 초래하였다. 2000년 플로리다 재검표 사태는 분명한 선거조작과 플로리다의 수백 표가 미국 대통령이 될 사람을 결정했다는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후보자가 패배를 승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플로리다의 상당수의 흑인남성을 범죄자로 낙인찍어 공민권의 박탈을 초래한 '범죄와의 전쟁'은 분명 레이건-부시/클린턴-고어의 합작품이었다. 투표자의 다수가 모든 선거인단을 독식하는 선거제도는 미국 자유주의의 몰락을 '도덕적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주의자들의 강력한 결집으로 은폐하는 미국식 정치체제의 '민주성'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공민의 지위로부터 추방되거나 이탈하는 다양한 세력에 대해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도 아무런 대책이 없다. 복지의 종식을 뜻하는 '일하는 복지'와 보편성을 상실한 자유주의의 앙상함은 이러한 미국정치의 '민주성'에 대한 환멸을 안고 이탈하는 세력들을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조직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9.11 이후 군사개입의 확대로 재정적자가 심화되는 가운데 미국인 2억 9천만명 중 4천 5백만이 의료보험으로부터 소외되고 8백만 이상이 실업상태라는 조건이 대선에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주당이 내건 의료보호확대와 재정적자 해소 등이 쟁점으로 부상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미국사회의 보수화의 지표라거나 전시에는 대통령이 바뀌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는 정치적, 법적 평등을 자유의 동반자로 인식하면서도 경제적, 결과적 평등은 자유와 상반되는 것으로 보는 모순된 미국 자유주의에 대한 인민들의 회의와 환멸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비교적) 높은 투표율에도 불구하고 이미 미국 시민의 상당수는 이러한 미국 정치체제로부터 등돌린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업에 대한 감세정책, 동성애자 결혼반대, 사형제도 찬성, 낙태 불법화 등이 '도덕적 가치'로 인식되는 여론조사기관들의 분류법은 더 이상 미국 정치에 민중적 의제와 쟁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유주의의 몰락이 보수주의자의 결집으로 은폐되는 상황이란 다시 말해 미국 지배계급의 대중의 정치의식에 대한 통제력 상실의 상황이다. 체제의 위기상황은 전쟁과 종교의 상호방어라는 방식을 통해서만 관리될 수 있을 따름이다. 대중의 정치적 참여와 직접적 영향력을 배제하고자 했던 연방헌법의 이념이 자유주의의 위기 상황과 맞물려 대중에 대한 통제력 상실을 초래하는 상황을 자초하였다. 이는 '도덕적 가치'로 표상되는 쟁점들을 동원하는 것 말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며, 케리의 깨끗한 승복이란 이러한 미국 지배계급이 처한 현실을 반영한다. 9.11 - 보편적 자유민주주의의 전파에서 요새 아메리카 수호로 9.11은 미국적 자유민주주의를 보편으로 인식하는 특수한 소명의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다. 냉전시대에도 관리 가능했던 전세계 도처에서의 미 패권에 대한 비판과 반전, 반미의 기운은 이제 예측불허의 테러가능성으로 가시화되었다. 부시와 신보주주의자들에 의해 천명된 팍스 아메리카나는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보장하는 행복한 제국의 기획으로서가 아니라 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따라서 항존하는 '테러'위협으로부터 강력한 보호망을 형성하는 요새 아메리카를 상징한다.{{) 부시는 미국은 냉전 시대의 '억지와 봉쇄' 정책은 21세기의 새로운 위헙을 대처하는 데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억지'는 방어할 국가나 국민이 없는 그림자 같은 테러리스트 조직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봉쇄'는 대량살상무기를 미사일에 탑재해 공격하거나 테러리스트들에게 비밀리에 제공하는 독재자들을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일방주의를 전제로 예방전쟁 차원에서 미국의 국익을 위협하는 잠재적 적국을 선제공격한다는 것이다. (사회진보연대 기관지2002년6월호) 2002.9.17 「국가안보전략」 보고서는 '선제공격'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국경에 닿기 전에 위협을 식별하고 파괴함으로써 미국과 미국 국민, 국내외에서 이익을 지킬 것이며, 이를 위해 국제사회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지만 필요한 경우 선제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우리의 자위권을 행사하기 위해 일방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된 공격은 최선의 방어이다. }} 자본과 국방의 심장부에 가해진 예측불허의 테러는 '우월성과 모범성'을 가진 구원자로서의 나라, 타락한 구대륙과도 전혀 다르고 미개한 나라에 대해서는 인도자가 되어야 할 대단히 '예외적'인 나라라는 미국적 경험과 체제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에 대한 도전이었다. 미국 예외주의는 미국의 특수성과 도덕적 우월성 뿐 아니라, 선을 보존 혹은 확장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이는 마치 오컴의 면도날{{)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 "Entia non sunt multiplicanda sine necessitate"(존재자의 수를 불필요하게 늘려서는 안된다.) "Pluralitas non est ponenda sine necessitate"(불필요하게 다수가 설정되어서는 안된다) "Frustra fit per plura quod potest fieri per pauciora"(소수를 가정하여 설명될 수 있는 것을 다수로 가정하여 설명하는 것은 헛되다.) 이상의 세가지 명제로 요약되는 오컴의 이론은 합리적 이성을 표방하는 서구적 세계관의 근저를 이루며, 적과 나를 이분화하는 미국적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처럼 전세계를 정확히 이분화하거나 지구상에서 미합중국만을 오려낸 자신과 타자에 대한 이분법적 개념을 포함한다. 미국의 대중동정책의 골자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 혹은 개발하고 있는 잠재적 적국에 대한 선제공격을 통해 적국의 전체주의적 정권을 붕괴시키고 미국적 가치를 존중하는 민주정권을 수립해, 주변국가 혹은 잠재적 적국을 민주화한다는 것이다. 신보주주의자의 관념(idea)의 힘이자 이미 공화/민주당 내 흡수된 이러한 입장은 강력한 대외정책의 근간을 이룬다. 부시의 재선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수행한 이라크 전을 비롯, 결정된 대외정책을 시행함에 있어 그 목적을 철저히 추구하는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도덕적 절대주의의 승리를 의미한다. 미국인이 선택한 '도덕적 가치'란 이러한 소명의식과 미국적 특수성에 도전하는 세력들에 대한 화답이며, 4130억 달러라는 엄청난 재정적자와 취약한 경제구조를 안고 있는 미국의 채권의 7000억 달러 이상을 사들이는 각국 중앙은행에 대한 미국적 보답인 셈이다. 한편 미국의 대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고 북한, 이란, 시리아 등 불량국가에 대한 개입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케리의 패배는 자유주의의 몰락을 저지하고 미국 헤게모니를 유지, 강화하는 데 다양한 이익집단(과거의 '새로운 다수'로 표현된 소수인종, 환경, 여성, 동성애 등등의 이슈)의 이해는 포괄될 수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는 1980년대 선거 이래 공화당과 보수주의에 본격적으로 합류한 신보수주의자들의 '제국'적 기획의 판정승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세계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민족국가로서의 미국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제국의 신민들에 의한 보편성의 승인은 이제 미국의 목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한 국가의 자국적 이해를 보호하는 것, 미국이라는 민족국가의 요새를 수호해내는 것이 미국 그리고 동맹국의 목표라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을 수호하기 위한 전 세계 국가들의 과제는 FTA 등의 도입을 통한 관세철폐로 미국 대외무역적자를 감축하고 미국 경제를 회복하는 데 동참하는 것, 미국을 핵심 타겟으로 하는 테러 위협에 대한 미국의 선제공격을 지지엄호하고 미국의 이분법에 따라 '우리편'의 수를 늘려 단결하는 것 등이 된다. 한편 이 보호해야 할 요새에는 미국 부의 40%를 소유한 상위 1% 그룹이 존재하며 더불어 전세계 지배엘리트들이 결집하고 있다. 세계경제를 지탱하는 이 요새에 대한 저항과 공격은 물론 모두 테러로 간주된다. 이 요새 수호전략은 테러가능성을 지닌 불량국가들이라는 위협요인을 제거하고 예방전쟁을 항구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성을 전파하는 합의적 미국정치체제가 복원되는 길은 요원하며 세계는 동맹국의 암묵적 합의(다자간 틀로 협의한 바 없다 하여도)를 기반으로 한 더욱 야만적인 미국의 폭력에 노출될 것이다. 미국의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다. 전면적인 반전반세계화 투쟁을 조직하자.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와 금융적 팽창이 새로운 헤게모니 출현의 전조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것이 미국의 헤게모니가 쉽게 지속된다거나 미국의 '제국'으로의 전환이 무난히 이루어질 전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미국은 절대적 군사력 우위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인 개입을 펼치기에는 군사력과 재정적 여력이 충분치 않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자주의적 틀을 강조하는 케리의 주장은 물론 설득력이 전혀 없다. 미국은 이라크라는 미궁에서 저항군에게 깨져나가며 친미정부 수립과정에서 난항을 겪고 있다. 미국에 대한 이라크와 전세계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으며 요새 아메리카를 수호하는 전쟁에 대한 부담으로 동맹국들의 불만과 이탈은 가속화되고 있다.{{) 이라크 전을 수행하기 위한 연합군 운영의 과정에서 미국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각 국의 군대를 말그대로 갖다 쓰고 있다. }} 이러한 상황은 다자주의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일방적으로 군사개입을 상시화 해왔던 이전의 미국의 역사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임의적 자위권 발동이라는 선제공격 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한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루 15억 달러씩 늘어나는 경상수지 적자로 표현되는 미국 경제의 취약성은 미국이 헤게모니 국가로서 지게 되는 정치적, 사회적 비용부담의 증가를 의미한다. 이는 유동성과 규제철폐 경향 속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미국으로 집중되는 금융분파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난점이다. 국방비는 점점 늘어날 것이며 반대로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사회보장비용의 지속적 삭감이 요구될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기업 감세정책과 의료보호 축소가 '도덕적 가치'를 중심으로 한 대외정책과 맞바뀌어진 점은 그러한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초국적 기업을 통한 세계시장의 장악과 이를 통한 세계적 부의 집중으로 문제를 헤게모니를 유지해왔던 미국이 이와 관련해 내놓을 수 있는 계획은 많지 않다. 더욱 더 파괴적이고 반민중적인 시장개방 압력과 각종 FTA체결을 가속화하는 한편 각종 사회보장기금의 민영화와 사회보장비용의 감소정책을 지속할 것이다. 이는 물론 미국 내에서의 노동자, 빈민들의 저항과 전 세계 개도국 정부 혹은 민중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 우리에게는 한층 가열차고 더욱 폭넓은 연대를 구축하는 반전반세계화 투쟁이 요구된다. 지금 우리에게는 왜 부시의 재선을 막지 못했을까라는 평가보다는 2004 미 대선을 통해 드러나는 미국의 몰락과 야만의 징후를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미국 내에서 공민의 지위(선거권을 비롯하여 제반 사회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미국 시민들의 불만과 미국 내 사회운동의 반전을 비롯한 투쟁의 과제는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오늘날의 반미란 전쟁과 세계화에 대한 보다 냉철한 비판과 폭넓은 저항의 조직화라는 과제를 일컫는다. 오늘날의 미 대선을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지금, 반전반세계화를 중심으로 한 모든 사회운동의 쟁점들의 연대를 통해 저항의 세계화를 이루어야 할 의무가 요구되고 있다. PSSP
2004년 ‘4대 개혁 법안’ 관련 투쟁을 비판하며 17대 국회의 첫 정기국회에서 보인 지배분파들 사이의 다툼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국가보안법은 낡은 유물’이라는 노무현의 지적 이후 17대 국회는 이른바 ‘4대 개혁 법안’과 ‘한국형 뉴딜 3대 법안’을 둘러싸고 아예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2005년 예산안과 파병연장동의안을 볼모로 삼아 서로 윽박지르다가, 여야 4인 대표회담을 열어 타협의 여지를 모색하였다. 노무현은 ‘민주주의는 타협의 정치’라고 전제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고, 여야는 4인 대표회담에서 합의와 번복을 반복하였다. 이 진통을 겪고서야 17대 국회는 몇 가지 급하다는 법안을 처리하며 2004년 정기국회를 마감하였다. 예산안과 파병연장동의안을 먼저 통과시켜 놓고는 2005년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경제자유구역법 개정안, 공무원노조특별법, 신문법, 민간투자법, 기금관리법을 처리한 것이다. 파병연장동의안은 전쟁범죄행위를 연장하겠다는 것이고, 경제자유구역법안은 초국적 자본의 국내 활동을 무제한적으로 보장하겠다는 것이며, 공무원노조특별법은 공무원의 노동3권을 부정하는 법안이다. 언론관계법 중 하나인 신문법은 조■중■동을 견제하겠다는 애초 취지(?)조차 무색케 하는 것이다. 기금관리법은 투기자본에게 갱생의 기회를 주고자 연기금의 주식■부동산 투자의 길을 열어주려는 것이며, 민간투자법은 사회기반시설과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민간투자의 길을 열어 공공재에 대한 사유화를 확실히 보장하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시급한 민생법안이라 하니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다. 그렇게 다투다가도 민중을 수탈할 때만큼은 확실히 단결하는 17대 국회의 진면목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한편, 정기국회가 끝남과 동시에 여의도 국회 앞 농성텐트들도 철수했다. 수많은 요구사안을 내걸었던 10여개의 농성텐트들은 전에 없던 풍경이었다. 이 많은 천막농성은 오늘 민중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어떤 것이 요구사안인지를 낱낱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러한 방식의 투쟁을 무작정 지지할 수만은 없는데, 이런 방식의 운동이 민중운동에 고착화되고 지배적이게 되었을 때, 그것은 민중운동을 매우 우려할만한 상황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17대 국회의 정기국회 개원을 전후하여 시작된 이 농성은 그간 민중운동이 지키려고 했던 최소한의 원칙(자주성, 연대성, 전투성, 변혁성)들을 상당부분 훼손했다. 우리는 국회 앞 천막 농성 투쟁을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전선의 성격은 무엇이고, 우리가 운동하는 목적이 무엇이며, 왜 운동하는 가에 대한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다. 소위 ‘4대 개혁 법안’의 허구성 노무현 정권에게 (정치적) ‘개혁’은 언제나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한다. (그것이 설사 ‘민주주의’의 외피를 두른다 한들) 신자유주의 정책에 우호적인 정치적 환경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자유주의 분파들의 세력규합을 시도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우호적인 정치적 환경이 곧 자유주의 분파의 안정적인 세력규합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위기에 대한 지배세력의 여러 조치들 즉, 신자유주의 개혁은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 행정부 모두 공유하는 프로그램이기에, 이것만 가지고는 자신의 정치세력을 규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프로그램들로 대중들의 정치적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노무현은 어떤 수단을 써서든 자신의 정치세력을 규합해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처지에 빠지게 된다(이는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는 지배세력 내 여러 분파들 사이의 정체성 논쟁이 쉽게 불붙기 마련이다. 자신의 세력규합에는 이것말고는 별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6월 한나라당 박근혜가 당대표로서 재신임된 이후 정치권에서 불거진 청와대-열린우리당-한나라당 사이의 ‘국가정체성’ - ‘유신청산’ 논쟁을 상기해보자) 이를 위해서는 어떤 의제라도 ‘개혁’(반대로 ‘색깔시비’)을 이유로 쟁점을 삼을 수 있는데, 세력규합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수도이전, 호주제, 성매매, 국가정체성, 과거사진상규명, 심지어는 국가보안법, 북핵 문제까지 모두 다 의제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노무현과 그의 추종자들(그리고 한나라당 역시 마찬가지로)은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접근하는 게 아니면서, 대중을 동원하고 소모해버린다는 사실이다. 촛불시위가 되었건 반대편의 보수집단 시위가 되었건 간에 말이다. 이 때 내걸린 ‘개혁’과 ‘민주주의’는 빈곤-실업 대중의 삶과 전혀 관계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 ‘민주주의’에는 민중에 대한 어떤 양보 조치도 전제되어 있지 않으며, 그 배경에는 어떤 정치이념도 없다. 이런 짓을 지배세력들이, 특히 노무현과 그의 추종자들이 반복해 왔던 것이다. 이른바 ‘4대 개혁법안’ 역시 그러한데, 정치적 반대 세력을 공격하고 그 쟁점으로 지지세력을 결속하고 심지어 운동진영도 흔들려는 의도가 노골적이었다. 염불보다는 잿밥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지난 10월 중순 경 열린우리당이 ‘4대 개혁법안’을 일괄처리 하겠다고 밝힌 후 여야 사이에서 본격적인 정국 주도권 다툼이 벌어졌는데, 이는 그 성격을 드러낸 것이다. 사실 '4대 개혁 법안'은 의회주의적인 정치테크닉으로 보았을 때, 사안 사안을 분리해도 의회차원에서 처리하기에는 녹녹치 않은 것들이다. 한나라당이 당의 존폐를 걸고 막겠다고 공언한 것인데 열린우리당이 이를 일괄적으로 처리하겠다는 것은, 실제로 이를 처리하는 것보다는 정국 주도권 장악에 더 관심이 있음을 반증할 뿐이다. 열린우리당에게 ‘4대 개혁입법안’은 꽃놀이패였던 것이다.(그리고, 노무현이 이야기하는 민생법안이란 구조조정을 뜻하고, 일자리 창출은 노동유연화 확대에 불과했다는 점도 환기해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같은 허구적인 정치쟁점이 지배세력들의 반동적 공세를 은폐해 버렸기 때문이다. ‘4대 개혁법안'이 논란의 정점을 차지하고 2004년 하반기 내내 정치쟁점이 되면서, 노동법개악, 쌀 수입 개방 확대, 미군기지 평택 이전, 파병연장동의안 등이 별다른 저항없이 진척되거나, 확정되어버린 것이다. 민중운동의 NGO화 상당히 격렬한 논쟁이 있었지만 탄핵정국은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상당부분 유실시켰다. 시민운동 진영은 ‘민주주의’의 승리라며 노무현의 복권을 자축했고, 여러 개혁 사안에서 자신의 입지를 높였다고 자부했다. 그들은 파병반대운동을 하면서도 자국민을 죽음으로 내몬 노무현에 대해 끝끝내 애정과 미련을 버리지 않았고, 한나라당과 그 지지자들의 무지함과 반동성을 부각하는 것에만 골몰했다. 그들은 또한 민주노동당이 원내진출을 했고, 운동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연대사업에서 민주노동당을 상대화하려고 했으며, 수도이전 공방에서는 서울시와 헌법재판소를 비난하며 노무현을 두둔했다. 노무현과 정치운명을 함께 할 것임을 공공연히 내비쳐 왔던 것이다. 민중운동진영은 2003년 열사투쟁 당시 노무현 정권을 심판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민중운동진영은 이들과 거리를 두며 자신의 정치적 단결력을 고무시키려 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민중운동이 걸어왔던 길의 귀결일 것이다. 지배세력은 그동안 범세계적 변화에 조응하여 일관된 비전(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추진해왔다. 지배세력 - 특히 행정 관료들과 이른바 ‘개혁’세력은 10년이 넘도록 거의 모든 정치적 의제를 선점해왔다. 그들은 농민의 권리를 말하기도 전에 농업시장을 개방해왔고, 노동자의 권리를 이야기하기도 전에 구조조정을 추진했으며, 여성의 권리를 거론하기도 전에 삶의 기반을 해체하며 빈곤에 몰아넣었다. 그들은 구조조정을 부문별 산업별로 진행시켜왔다. 구조조정 대상을 국가권력과 모든 언론매체를 동원해서 다른 부문들로부터 고립시킨 뒤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리고 나서 다른 부문을 구조조정 할 때 앞서 진행된 부문의 구조조정 사례를 들먹였다. 차례로 구조조정을 진척시킨 것이다. 그들은 또한 이 구조조정의 대가가 소비자(시민)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는 노동자와 농민, 여성이 소비자(시민)가 누려야 할 권리를 가로막고 있었다는 듯이 꾸미면서 손쉽게 구조조정 했다. 이 과정은 다른 부문으로 이어졌고, 구조조정이 늦어진 부문일수록 특권계층(?)으로 몰리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민중운동은 부문별, 산업별로, 사업장별로 저항해왔다. 연대를 호소했지만 해당 사안의 문제로만 멈추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자신의 생존권 투쟁이 사회적으로 지탄받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민중운동은 소비자(시민)들이 자신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시민운동을 끌어들이려 했다. 소비자(시민)를 설득할 때, 민중운동 인사들은 해당 사안의 이해관계가 국민의 이해와 같다는 것을 호소하기 바빴고, 산업의 이해가 곧 자신의 이해인 것처럼 꾸미기 바빴다. 이렇게 해서 ‘사안별’ (범국민) 대책위가 오늘날 민중운동의 연대 사업 모델이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민중운동의 광범위한 참여와 단결보다는 시민운동의 참여여부가 사안별 대책위 구성의 중요 잣대가 되었다. 사안 해결이 중요해질수록 민중운동의 활동은 국가기구와 협상을 하거나 압력 행사에 집중했다. NGO의 활동방식이 민중운동에게까지 일반화된 것이다. NGO들이 홀에서 서류를 들고 로비를 했다면, 민중운동은 행정부처나 청와대, 국회 앞에서 수많은 피켓을 들고 시위하며 압력을 행사했다. 청와대 앞에서 관련 사안이 계류 중이면 청와대로 달려갔고, 국회에서 진행 중이면 국회로 달려갔다. NGO들도 이렇게 동일하게 좇아 다녔었다. 정치 1번지는 대중과 만나는 시위 현장이 아니라 청와대와 국회 앞이었다. NGO와 민중운동의 시위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찾아내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만 갔다. 압력의 수위를 높이기 위해 민중운동은 청와대 앞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하고, 국회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 시위와 달라진 것이었다. 이제 이 시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사람은 시민들이나 대중이 아니었다.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과 국회에 있는 의원들, 그리고 여의도에 있는 기자들이었다. 시민들을 향한 정치폭로도 국가를 상대로 하는 압박 수단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민중운동의 정치활동은 국가기구를 매개로 해서만 진행되었고, 그럴수록 민중운동은 지배세력과 대중 사이에 유리된 공간(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자신이 대신 메워주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런 모습은 NGO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리고 2004년 국회 앞 농성투쟁 4■15 총선 이후 열린우리당은 원내다수가 되었지만 ‘아파트 분양가 공개’ 약속조차 지키지 않았고 심지어는 ‘비리의원 체포동의안’ 부결에 앞장서기까지 했다. 열린우리당에 대한 대중의 실망은 늘어만 갔고, 평당원마저 대거 탈당하기까지 했다. 반면, ‘한나라당’은 국가정체성 논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매우 높였고,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은 국감에서도 수세에 몰렸다. 탄핵무효운동의 자장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한나라당의 의기양양한 목소리는 정치위기의 징후였다. ‘개혁’ 사안을 둘러싸고 한나라당의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시민운동세력은 물론이거니와 상당수 민중운동 세력도 함께 목소리를 외쳤다. ‘민주개혁전선 강화’, ‘수구냉전보수세력 해체’. 열린우리당은 11월 국회에서 '4대 개혁법안'을 일괄 처리할 것을 공언했다. 대규모 군중동원에 실패한 사안별 대책위들은 모두 11월 국회를 겨냥했고, 어떻게든 자신의 사안을 부각시키려고 했다. 그렇게 하나 둘씩 국회 앞 농성에 돌입하였다. 장애인이동권, 사립학교법개정, 국가보안법폐지, 언론관계법개정, 과거사진상규명, 노동법개악저지, 의료시장개방반대, 파병연장동의안반대, 평택미군기지이전반대, 쌀수입개방저지, 공무원노동3권보장 ■■ 이제는 역으로 이 수많은 농성텐트들 사이에 자신의 요구가 없는 것이 조바심 날 지경이었다. 경쟁적으로 들어온 만큼 또 자신의 사안이 묻히길 원치 않았던 만큼 이들 사이의 연대는 과거 어느 때보다 약했다. 여기서 연대라곤 약간의 생활물품을 나누어 갖고, 시간을 쪼개어 서로의 집회시간을 조절하자는 예의수준에 불과했다. 공동의 적(최소한 17대 국회를 향해서라도)을 향한 규탄의 목소리를 모으려는 노력은 없었다. 이제 국회 앞 농성 텐트는 자신의 의제를 부각시키려는 거점으로서 특정 부문의 개별적인 요구를 해결하고 압박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농성과 시위도 달라졌다. 그리고 연대의 의미도 분명히 달라졌다. 2004년 늦가을과 초겨울 국회 앞 농성투쟁의 중심은 국보법 폐지 투쟁이었다. 국보법을 둘러싼 논란은 정치권에서도 '4대 개혁법안' 중 핵심이었다. 그런 만큼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은 다른 어느것 보다도 수구보수 대 민주개혁 전선을 분명히 했다.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이하 국민연대)를 주도했던 시민운동 과 민중운동 세력은 6월 항쟁과 탄핵무효 운동 그리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잇는 민주주의의 ‘완성’을 이야기했다.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경기 침체로 대중들의 삶은 유린되고, 빈곤-실업-막대한 부채로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마저 위기에 빠지는 상황에서 (민주주의 ‘쟁취’가 아니라) 민주주의 ‘완성’을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개혁세력과 그 추종자들이 쳐놓은 ‘민주주의’의 울타리를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한편에서는 국보법 폐지를 염원하는 시민의 힘이 보이지 않아서 열린우리당이 주저한다는 평가가 나왔고, 한편에서는 결연한 투쟁의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국민연대는 11월 정기국회 내내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몇 사람의 무기한 단식에서 지도부 단식으로 그리고 천여명이 참여하는 집단 단식으로 투쟁의 수위를 높여나갔다. 농성은 점차 규모가 커졌다. 그만큼 ‘여의도’에서는 확실히 ‘부각’되고 있었고 이곳에서만큼은 다른 투쟁에 우위를 지켰다. 연내처리가 불투명하다는 전망이 흘러나오면서부터 상황은 극단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열린우리당의 이중대’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연내’에 폐지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들은 국보법 폐지를 한사코 반대하는 수구보수세력 한나라당만을 보았을 뿐, ‘비정규직보호입법안’, ‘용산기지이전비준동의안’은 물론이거니와 같은 날 처리될 운명이었던 ‘파병연장동의안’, ‘공무원노조특별법’, ‘민간투자법’, '기금관리법‘ 등 지배세력들의 반동적 공세와 이를 주도하는 열린우리당의 작태는 보려하지 않았다. 공동의 의제를 내걸어 공동투쟁하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에 가서 국민연대는 이 모든 사안이 한꺼번에 처리되는 날, 국보법을 어떻게든 ’연내‘에 폐지하자고 ‘직권상정’할 것을 주장했다. 지배세력의 반민중적 조치가 한꺼번에 처리되는 날, 그것도 열린우리당이 이 모든 조치가 달린 상황에서 민중운동은 들러리가 될 것이 불 보듯 뻔한데도 ‘직권상정’을 외치며 국회의장과 열린우리당을 압박했던 것이다. 민중운동이 지키려했던 원칙이 실종되는 순간이었다. 열린우리당과 협력으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 했다는 점에서, 지배세력의 반민중적 조치를 보고도 열린우리당과 그 일당들에게 의존했다는 점에서, 자기 사안만이라도 해결하자고 다른 사안들은 등한시하고 공동투쟁의 정신마저도 소홀히 했다는 점에서 국보법폐지투쟁은 민중운동의 자주성과 연대성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민족주의 진영의 실용적 주장에 따르면) 2004년 가장 유력한 정치투쟁이라는 국가보안법폐지투쟁이 가장 최악의 조합주의적 투쟁의 면모(자기중심적 실리주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이들은 열린우리당을 국회에서 국회 앞 광장으로 끌어낸 성과가 있었다며 2005년을 기약하자고 자평했지만, 사실은 민중운동이 (거리에서, 대중들 앞에서) 국회 앞으로, 국회의원 앞으로 끌려간 것이다. 열린우리당과 친 노무현 개혁세력에 의해서 말이다. 민중의 정치적 단결력을 높이면서 반미반전■반신자유주의 전선의 복원을! 사안별 투쟁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국회 앞 투쟁 자체가 문제인 것도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운동을 했는지가 문제다. 작년 우리가 국회 앞에서 벌인 투쟁들이 운동의 원칙들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우리의 운동이 계속 이런 식- 그러니까 ‘오로지’ 국회만 바라보며 ‘오로지’ 자기사안만을 해결하겠다고 애쓰는 식으로 진행된다면, 그리고 이런 운동이 확산되고 장려된다면,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중단시키기는커녕 도리어 (시민운동세력들과 똑같이)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의 하위 파트너로 전락할 것이다. 대중의 불만을 (대변한다는 명목으로) 적절히 관리하고 조절하는 신세가 된다는 뜻이다.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정치적 주체를 형성하려는 노력보다 ‘오로지’ 사안 해결에만 골몰하여 대중운동에 참여한 주체들의 정치적 열망을 소비시킨다면, 그것은 사안을 해결할 수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더 지체시킬 뿐이다. 정치적 주체 없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말 그대로 환상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사태가 해결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대부분 봉합이거나 결국에는 정치적 주체의 부재로 얼마 안 있어 역전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10여 년의 역사가 이를 온전히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노무현 집권 2년이 증명하지 않았던가? 그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개혁’을 내세우며 국민을 동원하고 국민의 정치적 열망을 소모시키고는 도리어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조치를 더욱 강화하면서 민중을 우롱해온 것을 우리는 보지 않았는가? 민중운동은 자신의 독자성부터 확립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과 시민운동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정치적 주체를 형성할 수 있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오늘 (한국)자본주의의 위기가 지배세력들을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지, 지배세력들이 민중을 어떻게 착취하려 드는지, 그것이 필연적으로 어떤 파괴적 결과를 야기하는지를 분명히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신자유주의 정책개혁, 노동의 불안정화와 빈곤과 실업의 구조화, 배제의 원리와 공동체의 위기 - 민족국가/학교/가족의 위기, 그리고 폭력의 증대 - 군사적 긴장의 고조). 그리하여 오늘 지배세력과 민중의 핵심적인 대립지점이 무엇이며(반미■반전, 반신자유주의), 이 같은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민중의 정치적 단결력(의식화와 조직화)을 높여나갈 것인지 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민중의 정치적 단결력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 농민, 여성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토론하면서 구조적 모순을 타파할 해법을 공동으로 모색하며 대안을 스스로 수립하는 것(의식화), 전체 민중의 보편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이 과정에서 자기 스스로를 조직하며 수평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운동의 질서를 찾아내고 개인의 자발성이 전체를 한 걸음 나가게 하는 조직을 건설하는 것(조직화). 바로 반미■반전, 반신자유주의 전선의 정치적 주체를 형성하려고 우리는 운동하는 것이 아닌가? 2004년 국회 앞 투쟁을 반성하면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국가보안법, 법전에서 이름만 지우면 되나. 지난 10월 17일 열린우리당은 정책 의원총회를 열어 형법조항을 수정, 개조하여 '내란목적단체' 규정을 두기로 하는 것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방침을 당론으로 결정, 이번 회기 내 처리 의지를 밝혔다. 북한을 '반국가 단체'로 규정하거나 '찬양, 고무', '불고지죄' 등의 명목으로 56년 간이나 무소불위의 칼날을 휘둘러온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그 자체로 의의가 있다. 그러나 형법보완안을 살펴보면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을 법전에서 삭제하는 것 이상의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고자 폭동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통솔체제를 갖춘 단체를 구성하거나 이에 가입한 자" 또는 "예비, 음모한 자"를 처단하는 규정을 신설하겠다는 것은 사상, 결사 자유를 제한했던 기존 국보법의 역할을 고스란히 형법으로 이전하는 것이며, 오히려 형법의 확대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또한, 북한을 외국으로 규정해 적국 규정의 해소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적대적인 외국은 적국이라 규정한다는 형법조항을 그대로 남겨놓아 북한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고 평가하기는 힘들다. 이런 식으로 법전에서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을 지우는 것만으로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역사를 청산할 수 없다. 안보와 권력유지의 명분으로 국가권력이 사회구성원에게 가할 수 있는 폭력의 여지를 제거하는 것, 온몸으로 식민지배와 군사독재의 수호자임을 자청해왔던 국가권력이 개인에 행한 인권탄압의 역사에 대한 성찰이 요구된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국가보안법이 국가안보와는 하등 상관없는 것이었으며 식민지배의 정당화, 독재수호와 반공발전주의 관철의 도구였을 뿐이었다는 사회적 선언을 의미해야 한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말하고자 한다면 이 역사적 선언에 대한 책임을 갖고 전 사회적 동의지반을 얻기 위한 노력과 조건 없는 전면폐지를 말해야 한다. 국가안보와 국가보안법 여당의 국보폐지 발언이 있은 후 보수수구 세력은 위기감을 드러내며 국보법 사수의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보수수구 세력의 위기감과 그에 따른 결집은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서울시내에 인공기가 휘날리고 적기가가 울려 퍼질 것이라는 망상에서 비롯되기보다는 점령과 식민 지배를 일삼아온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반공발전주의를 내세워 한국사회를 휘둘러온 기존의 지배세력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그에 따른 균열이 예상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안보위협의 원인을 북한에 돌리고 군사독재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을 반공발전주의의 이름으로 처단해왔던 대한민국에서 이들에게 국가보안법이란 "자유민주주의의 최후의 안전장치"이며, 자신들의 기득권의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단지 이들만의 최후 안전장치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전면폐지에는 쉽사리 동의하지 못하며 국가보안법의 안보 기여도를 긍정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개폐 논쟁이 이렇듯 수면 위로 떠오르기까지 수 십 년간 인권과 정치사상의 자유를 유린당해온 민중들의 끊임없는 증언과 투쟁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자의적으로 국민 개개인의 사상, 이념을 검열, 억압하는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의식의 확장이 있었다. 이러한 의식의 확장이 개정 내지는 폐지 입장의 근거로 작동하는 반면, 전면폐지가 선뜻 동의되기 힘든 조건은 여전히 안보위협의 최대 적으로서의 북한이라는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바로 이 북한을 최대 위협 존재로 간주하는 안보이데올로기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열린우리당의 국보폐지는 안보 불안의 원인을 북한에 돌리고 반공발전주의의 그늘 아래 민중들을 통제해왔던 지난 56년간 역사에 대한 평가에 기반한 것인가. 낡은 시대의 유물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기 위해서는 낡은 시대에 대한 평가가 필수적임에도, 열린우리당에게 시대의 변화는 세대와 정권 교체만을 의미하는 듯하다. 제국주의의 식민 정책은 이념, 사상 투쟁의 가능성을 인위적인 국토 분단의 맹목적 전쟁으로 비화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국토 참절의 주범은 바로 미제국주의 세력이었다. 일제 시대 치안유지법을 본 따 만든 국가보안법은 그 태생이 바로 제국주의에 의한 한국사회 반공발전주의의 성공적 수행을 뒷받침하는 체제의 수호신이었던 셈이다. 달라진 시대라 함은 6.15 공동선언 이래 경협 등 남북 교류가 점증하고 있고, 그러한 활동에 국가보안법이 걸림돌이 된다는 것일 뿐이지, 미·일 제국주의에 대한 근본적 입장의 변화 없이 한미일 공조 체제를 유지하며 안보위협의 제일 요소로 북한을 꼽는 정부의 관점이 변화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대북 군사력 증강에 경제 제재 등의 수단을 통해 위협을 가하고 한편으로는 북한에 자본주의 질서로의 편입을 강요하고 포섭하는 것은 바로 현재의 미일동맹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의 북한의 안보 위협이란 오히려 제국주의 동맹의 외압으로부터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방어를 의미한다. 따라서 제국주의 세력과 한국사회의 반공발전주의 성장 과정에 대한 근본적 성찰 없는 지금의 국가보안법 폐지 논의는 한계적이다. 이러한 한계적인 국가보안법의 변신은 사상, 결사의 자유를 사회불안요소 제거, 안보위협의 제거라는 차원에서 무지막지하게 억눌러온 지난날의 역사를 계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는 언제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날카로운 검이 되어 민중들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조건 없는 전면폐지! 한편, 수도이전 위헌판결과 국무총리 파면요구 등을 계기로 정기국회가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 이에 대해 개혁과제를 결사저지하려는 한나라당의 방해공작이라고 결론짓거나, 이 방해세력들의 위협에 정부여당이 무릎 꿇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애시당초 열린우리당의 개혁입법은 과거 진보/보수 관념에 기대어 현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도구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폐지 후 형법보완이라는 입장이 버젓이 발표되고 있으며, 이라크 파병연장동의안 처리, 비정규노동법 개악안 입법추진이 이런 개혁과제의 나열 속에 은근슬쩍 끼워 넘겨지고 있다. 정부와 여당이 좌/우 색깔론을 펼치며 4대 개혁입법에 대해서도 위헌소송으로 대응하겠다는 한나라당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점은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지금의 정치 파행은 세대교체를 위한 진통이나, 개혁에 대한 보수 세력의 발목잡기가 아니라, 한국사회 지배세력의 정쟁이자 이전투구에 불과하다. 무엇이 노동자민중을 위한 법인지, 무엇이 민주주의의 확장을 위한 정책인지에 대한 하등의 쟁점이 묵살되어버린 상황인 것이다. 이에 우리는 개혁을 발목 잡는 한나라당은 우리 사회의 민주과제인 개혁에 동참하라거나, 열린우리당은 후퇴없는 개혁을 천명할 것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여야 정당이 묵살하고 있는 노동자민중의 쟁점을 수면위로 부활시켜야 하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전면폐지는 바로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56년간이나 노동자민중에 대해 부당한 탄압을 일삼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눌러온 반민중적 역사의 청산이라는 점에서 지금 민중들의 의제이다. 국가보안법의 무덤 앞에서 겉으로는 묵념을 하며 속으로는 부활을 부르는 이중성과 안보 공백을 어떻게 메꿀 것인가 등을 정점으로 하는 지금의 국보법 개폐 논쟁은 국보법 폐지 투쟁의 역사적 의의를 왜곡하고 있다. 이 왜곡된 논쟁구도에 여전히 민중들의 정치사상은 검열당하고 있으며 '진정한 안보불안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국가안보란 무엇인가'라는 전사회적인 성찰을 가로막는 조건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민중의 정치적 자유의 말살이라는 반민중성에 대한 평가이자, 한반도에서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반공발전주의의 역사를 청산하는 과정이다. 국가보안법은 지금 즉시 조건 없이 전면 폐지되어야 한다. PSSP
신문법안 관련 논쟁 현황 9월 21일 언론개혁시민연대(공동대표 김영호 이명순)가 신문법을 포함한 3대 언론개혁법안을 국회에 입법청원함에 따라 신문법 제정에 대한 논쟁이 본격화됐다. 한나라당은 국정감사가 시작되는 10월 4일 오전 당내 문광위 소속 의원 9명의 공동 보도자료를 통해 언개련 안에 대한 입장을 밝혔는데, 한나라당 문광위 소속 의원들 간에도 의견통일이 이뤄지지 않는 등 당내 합의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그 예로 한나라당 한 의원은 신문발전기금 조성이 정권의 '신문 길들이기'라며 반대했고, 다른 한 의원은 신문발전기금을 조성해 유통구조 개선사업에 지원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10월 15일 열린우리당은 기자회견을 통해 자체 신문법안을 발표했다. 열우당은 정간법의 이름을 '신문등의기능보장및독자의권익보호등에관한법률(이하 신문법)'로 명칭을 바꾼 개정안을 냈고, 이와는 별도로 '언론중재및피해구제에관한법률'을 제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발표 때 완성된 법안은 신문법 하나에 불과했고, 나머지 두 개에 대해서는 법안 자체를 발표하지 않았다. 특히 방송법 개정안의 경우 조문작업 자체가 미진하다고 밝혔고, 이날 발표한 신문법안에 대해서도 열우당 내 문광위 의원 중 일부가 "한국 신문의 역사적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몇몇 의원들의 일방적 주장을 당론으로 발표했다"며 당내 의사결정 과정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열우당 내 혼선 또한 만만치않게 심각했다. 민주노동당은 별도로 신문사주의 지분 제한을 한층 강화한 형식으로 3개 법안 모두를 독자 발의했다. 여기에 한나라당까지 제·개정안을 낼 경우 11월 국회 문광위 상임위 안에서 언론개혁입법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현재 신문법안은 앞의 표에서 표현한 대로 소유지분 분산 시장점유율 상한선 강화 편집권 독립 법제화 신문유통공사 설립 신문발전기금 조성 신문방송 겸영(교차소유) 허용 여부 등을 둘러싸고 여야는 물론, 언론개혁진영까지 포함해 논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여기서는 핵심인 지분 분산과 유통공사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쟁점1-사주 소유지분 분산 열우당이 15일 기자회견을 통해 당론이라고 밝힌 신문법안은 언개련 입법청원안을 상당부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논란이 예상됐던 신문사주의 소유지분 분산과 신문유통공사 설립은 법안에서 제외했다. 이러한 신문법안은 한국의 신문 산업 황폐화의 근본원인은 그대로 둔 채 결과만 치유하겠다는 발상이다. 한국 신문시장을 불법이 판치는 감당할 수 없는 독과점시장으로 전락시키고, 기사의 신뢰도마저 끝없이 추락시킨 장본인은 족벌신문의 사주들이다. 시장 파괴의 근본원인인 족벌사주의 지분 분산에 대해서는 입 닫고, 대신 족벌사주 전횡의 결과물인 편집권 유린과 독과점만 고치겠다는 발상은 단기 처방일 뿐이다. 이런 단기 처방은 반짝 효과는 내겠지만, 다시 족벌사주의 전횡을 정점으로 하는 시장 혼탁은 재연될 수밖에 없다. 며칠 전(10월14일)에 한 일간신문이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열어 새 사장을 뽑았다고 사고(社告)를 냈는데, 해당 신문의 주주총회는 고모(5%), 큰 삼촌(40%), 작은 삼촌(30%), 막내 삼촌(5%), 장조카(20%)까지 5명이 둘러앉아 밥 한 끼 먹는 것으로 끝났다. 단 한 주라도 들고 있는 주주를 다 합쳐야 이들 일가 5명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대한민국에 어떤 주식회사가 주총 열면 100% 가족회의가 되는가. 열우당 문광위 소속 의원들은 이 같은 사실을 알기나 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한국 신문시장의 왜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1인 사주의 전횡으로부터 비롯됐다. 열우당이 그토록 없애려고 하는 신문시장의 독과점의 근원은 다름 아닌 1인 사주의 전횡으로부터 출발한다. 사주의 전횡을 용인한 채 그 결과물인 독과점과 불법 판촉, 편집권 유린을 막으려 한다면 대문을 열어 두고 쪽문을 지키겠다는 짓이다. 원인은 그대로 둔 채 결과만 다잡는 이상한 망치질로는 언론개혁은커녕 족벌신문들의 입지만 키워줄 뿐이다. 어느 신문사에서 지분 100%를 가진 채 국가 정책마저 제멋대로 농락하는 1인 사주를 그대로 둔 채 편집자율권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74년 동아투위 이후 족벌신문으로부터 언론자유를 유린당한 채 거리로 쫓겨난 수 백 명의 언론인을 해고했던 장본인은 국가권력도, 광고주도, 독과점도 아닌 1인 사주였다. 족벌사주에게 쫓겨난 언론인이 70년대의 과거사가 아니다. 91년에도 그랬고, 2002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편집 자율권을 법으로 명시한다고 한들 사주와 충돌한 언론인들은 앞으로도 계속 쫓겨날 것이다. 따라서 편집 자율권 보장 조항은 사주의 지분 분산과 반드시 연동돼야만 소정의 효과라도 거둘 수 있다. 쟁점2-신문 유통공사 제외 열우당이 정부 차원의 신문 유통공사 설립 대신 유통전문법인을 지원하겠다는 것도 문제다. 유통전문법인은 한두 푼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따라서 현재 언론개혁의 차원에서 추진 중인 공동배달회사 대신 과점신문들이 막대한 자본력을 무기로 유통전문법인을 설립해서 지원해달라면 결국 1년 안에 최소 2∼3개의 유통법인이 만들어져 지원을 요청하게 될 것이다. 현재 과점신문 3사는 신문 산업에서 수직적 통합을 거의 완결한 상태다. 다만 교차소유 금지조항 등에 묶여 수평적 통합만 봉쇄된 상태다. 한 예로 중앙일보는 신문의 기획, 취재, 편집, 제작(인쇄), 판매, 독자관리, 시장개척 등 유통의 모든 단계에서 각종 자회사를 건설해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중앙일보의 인쇄는 A-프린팅, I-프린팅, J-프린팅에서 전담하고, 판매 및 유통은 중앙일보미디어유통이란 회사에서 전담한다. 유통망의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판매지국의 수익을 제고시키는 신문전단광고대행회사인 '제일PR'을 두고 있으며, 자회사인 중앙일보정보사업단을 통해 유통과정의 오류를 보정하고, 중앙일보에듀라인을 통해 새 시장개척한다. 결국 정부는 과점신문들이 앞다퉈 신청하는 지원요청에 대해 이중·중복{{) 자율적으로 신문업자들이 조합을 구성해 운영해왔던 프랑스식 신문 공동배급제가 오늘날 위기에 봉착한 사실을 열우당 문광위 의원들이 알 턱이 없다. 프랑스는 2차 대전 직후 'NMPP(Nouvelles Messageries de la presse parisienne)', 새로운 빠리 신문 공동 배급회사라는 신문유통회사가 안정적인 공급을 해왔지만 최근 일부 거대신문들이 독자배급망을 기획하는 바람에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는데다, 93년까지 NMPP의 지방 배급을 하청받았던 MLP(Messageries Lyonnaises de Presse)마저 1994년부터 직접 경영을 시작, 95년에는 파리에까지 진출하는 등 급성장하고 있어 프랑스 정부로서는 중복 지원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지원을 해야 할 것이고, 복수의 유통법인 간의 치열한 시장 쟁탈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 결과 2∼3년 안에 합법적인 방법으로 족벌신문들이 출자한 유통법인이 신문시장을 독식해 신문시장의 독과점은 완결적 구조를 구축할 것이다. 지금은 그나마 불법 경품이나 무가지 살포를 도덕적 비난과 함께 실정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있지만 유통의 독점은 중소신문들의 마지막 숨통마저 끊어 놓을 것이다. 열우당 문광위 의원들은 언개련이 왜 정부 차원의 신문유통공사를 설립하라고 요구했는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신문유통공사를 정부 돈으로 지원해달라는 것은 적어도 '신문의 유통'과 같은 고도의 공익적 사업은 공적인 정부가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문유통공사에 대해 '(정부)비판신문 죽이기'라는 소리도 있다. 이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논리다. 언론개혁진영은 다음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한다 하더라도 정부차원의 유통공사 설립을 요구할 것이다. 현재의 정권이 좋아서 신문유통공사를 설립하라고 한 것이 아니다. 열우당은 온전한 신문법 제정에 나서라 한겨레, 조선, 서울신문을 통해 신문사주의 소유 지분 분산을 뺀 열우당의 언론개혁 신문법안이 흘러나온 지난 12일 아침 같은 열우당 이부영 당의장은 관훈 클럽의 초청를 받고 프레스센터에서 '사주의 소유지분 제한'에 대해 강력한 어조로 분명히 이번 언론개혁법안에 그 내용을 담겠다고 밝혔다. 열우당 내 중앙당과 원내 의원들 간 손발이 안맞는 게 한 둘이 아니었다. 국보법 역시 우왕좌왕하다가 대통령 말 한마디에 폐지쪽으로 가닥을 잡아, 많은 국민들에게 당정 분리의 허구성을 또 한번 드러내고 말았었다. 열우당 문광위 의원 12명의 의원들 사이에 충분한 토론도 없었다. 17일 정책위 의원총회에서 확정한다는 밝혀놓고서도 12∼15일 잇따라 4대 개혁법안의 주요 내용을 법 조문의 형태로 발표한 정황도 여전히 열우당이 민주적 정당일 수 없음을 반증한다. 17일 정책위 의총에서 반발하는 의원들의 입을 미리 막기 위해 "'높은 곳'의 뜻은 이거다"는 식으로 미리 발표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4대 개혁법안 중 나머지 3개는 몰라도 언론개혁 법안만큼은 한국의 언론시장을 전혀 모르는 의원들이 오로지 정치적 타협의 대상으로만 이 법을 고려했음을 15일 발표를 주도했던 의원들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불필요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소유제한을 뺐다"는 대목이 이를 반증한다. 그런다고 불필요한 마찰이 최소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족벌신문과 한나라당은 교차소유 허용을 주장하며 지금 있는 정간법마저 개악하자고 하는 사람들이다. 사주 소유지분을 뺐다고 한나라당이 송덕비라도 세워 줄 것으로 착각하는 순진한 열우당을 믿었던 국민들은 통탄할 뿐이다. PSSP
지난 11월 16일 국무회의에서 경제자유구역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동북아경제중심국가 건설을 위해 초국적 자본의 ‘자유’를 가로막는 모든 제한을 없애겠다는 구상으로 노동자 민중의 기본적인 권리를 끊임없이 침해하고 한국 경제의 불안정성만을 더욱 가속화할 경제자유구역법안에 대해 우리는 비판해왔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자유구역법안에는 노동기본권 박탈, 기업 조세 감면 조치 이외에도 친환경 규제를 폐지하고, 외국인 병원 설립을 허가하는 등의 사업이 포함되어있다. 외국인 투자 유치라는 명목 하에 국내 외국인 병원을 설립하고 내국인 진료를 허용하는 것은 본격적인 의료시장 개방을 가져올 것이라는 점에서 경제자유구역법 개정안을 규탄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선거 당시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아 죽는 국민이 있는 나라는 나라도 아니다’라고 말하며 공공의료 30%, 의료보장성 80% 확대를 약속했었다. 그러나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와 공공의료를 언급한 것은 그토록 중요한 사안에 대한 선거용 립서비스에 불과한 것이었나. 자신의 공약을 이행하기는커녕, 초국적 의료 자본의 이득을 극대화하고 공공의료의 붕괴를 가져올 제도를 지금 노무현 정부는 추진하고 있다. 경제자유구역 내에서 허용되는 영리법인 의료기관은 고가의 의료비를 지불할 수 있는 내국인에게만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다. 영리법인 허용과 함께 추진되는 민간의료보험 도입은 국민이면 모두 건강보험에 당연 가입하여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던 시스템을 무색케 한다. 능력껏 민간보험에 들고 그에 따라 의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돈 없는 사람들만 건강보험에 들게 될 것이고, 이 건강보험마저 점점 왜소해져 의료 이용의 양극화를 불러올 것이다. 더욱이 민간의료보험 도입은 금융업의 활성화를 위한 경제정책의 일환으로서 제기되고 있다. 국민의 건강을 초국적 자본의 이익의 대상으로 팔아치우고 경제 ‘부흥(?)'의 일환으로 사고하는 노무현 정권을 규탄한다. 이렇듯 영리병원의 허용, 민간의료보험의 도입 등 의료 공공성 파괴를 가져올 중차대한 사안임에도 노무현 정부는 어떠한 합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법안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 개정안 입법 과정에서 공청회도 단 한차례 밖에 하지 않았고, 주무부서인 보건복지부는 “사회적 공론화 과정 및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와 공공의료 확충 계획 마련 후 추진 필요”라는 반대의견을 낼 정도로 행정부 내에서의 합의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자유구역 개정안은 마련, 통과되었다. 정부는 연 1조원이라는 해외원정 의료비 방출을 막기 위해서라도 내국인 진료를 허용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런데 어차피 외국의료기관에서 진료를 받으면 진료비는 외국자본에게 돌아가고 만다. 이는 의료 상품화를 전면화하고자 하는 의도를 감추려는 술수에 다름 아니다. 정부의 의료 시장 개방 및 공공성 파괴 기도를 저지하기 위한 민중의 투쟁이 필요한 시점이다. “경제자유구역법 폐기와 의료개방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의 선도적인 투쟁을 지지하며 의료 공공성의 최후의 보루를 지켜내기 위한 투쟁에 함께 할 것이다. 정부는 경제자유구역법 개악안을 즉각 폐지, 철회하라 국민의 건강을 포기한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민에게 사죄하라 국회는 우리 의료제도의 붕괴를 초래할 경제자유구역법 개악안을 거부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