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 10월 19일자 [특집] "워싱턴 컨센서스"
존 윌리엄슨 박사가 말하는 '왜곡의 실상'
'워싱턴 컨센서스(합의).'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만들어 가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경제 교리쯤으로 이해되는 이 용어만큼 정치적이고, 이념적으로 도발적인 말은 찾기 힘들다. 이 용어는 '신자유주의(시장 지상주의) = 미국의 이해 = 세계화 = 워싱턴 소재 국제기구(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 등)가 선호하는 정책'이라는 가정을 만들어냄으로써 현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운동 영역에 걸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위의 등식이 잘못된 것이라면?
<시사저널>은 1989년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개념을 처음 선보였던 미국 워싱턴 소재 두뇌 집단인 국제경제연구소(IIE)의 존 윌리엄슨 박사를 직접 만나 위의 등식을 정밀하게 재검토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워싱턴 컨센서스와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한껏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장 지상주의는 별로 닮지 않았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민과 관을 구분하지 않고 걸핏하면 등장하는 시장의 신뢰 혹은 시장의 판단을 앞세운 시장 지상주의는 워싱턴 소재 국제기구인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World Bank) 이코노미스트들의 시각보다 훨씬 오른쪽으로 편향되어 있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용어를 직접 만들어 낸 존 윌리엄슨(63)은 이 말이 현재 신자유주의와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크게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기자는 워싱턴 특별구 중심인 듀퐁서클 지하철역 바로 옆에 위치한 국제경제연구소에서 존 윌리엄슨을 만났다. 건네받은 이력서에서 그가 미국인이 아니라 영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매우 흥미로웠다. 그는 1981년 이 연구소의 창립 멤버로 워싱턴으로 건너온 이래 영국 국적을 유지해 왔다. 미국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미국의 이해를 옹호하고 영국 사람이라고 해서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는 미국 사람으로 간주되기를 원한 적도 없고, 또 자신이 미국인이라고 느껴본 적도 없기 때문에, 그냥 태생적으로 분류된 영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 컨센서스' 용어, IIE 토론회에서 처음 등장
그의 친구인 미국 중앙 은행의 경제학자 모이세스 네임에 의하면, 사람들은 경제 사상을 단순화하는 도구로서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용어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기에 적합했던 것 같다. 우선 워싱턴 컨센서스는 냉전 종식 이후 승자를 위한 경제 이데올로기로 떠올리기에 적당한 상품이었다. 역으로 그들 승자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워싱턴 컨센서스의 본래 내용을 극단화한 후 이를 비판함으로써 본래 워싱턴 컨센서스에서 제안된 개혁의 내용마저 매도함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기대할 수 있었다.
정치적 이해에 기반을 둔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세계적 현상인 것 같다. 한국의 신자유주의자들도 자기네 주장이 워싱턴 소재 국제기구들이 공인하는 국제적 규범(인터내셔널 스탠더드)에 기반을 두는 것이라고 치장함으로써 정치·경제적인 이득을 보려고 한다. 또 이에 반대하는 세력 중 일부는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세계화와 관련된 모든
것을 싸잡아 비난함으로써 단기적 이해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를 통해 특히 후자의 세력이 치르는 대가는 작지 않다. 그들은 세계화를 무조건 반대함으로써 세계화 반대라는 구호 자체를 어쩌면 공허하게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또 세계화의 특정한 측면을 거부하는 재벌의 논리에 동조하는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외국인 직접 투자를 반대하는 일부 시민운동의 사례가 그 범주에 들 수 있다.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말은 1989년 국제경제연구소가 주최한 토론회의 발제 자료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존 윌리엄슨은 남미 사람들이 당시 남미를 비롯해 세계를 풍미한 자급자족적· 폐쇄적 경제 체제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으며, 스스로 별 다른 노력을 하지않은 채 외채 탕감만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워싱턴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 자료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대부분의 워싱턴 경제학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경제 개혁의 내용을 정리하고, 이 목록에 비추어 볼 때 남미의 각 나라들이 이만큼 진전했다고 규정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워싱턴 컨센서스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는 워싱턴의 미국 정부와 국제기구 당국자들이 생각하기에 남미 국가들이 수행하기를 바라는 열 가지 정책 목록을 정리했다.
△재정의 건전성 확보 △경제적 성과를 높이고 소득 재분배를 향상시킬 수 있도록 공공 지출의 우선 순위를 정하는 것 △조세 제도 개혁 △금리 자유화 △경쟁 환율 제도 도입 △무역 자유화 △외국인 직접 투자 자유화 △민영화 △시장 진입과 퇴출을 자유롭게 하는 탈규제 △사적 소유 보장제도 확보 등이 그 내용이었다. 때문에 이 제안은 1980년대 말이라는 시간과 남미 국가들의 정치 경제 발전 단계라는 구체적 공간을 염두에 두고만 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윌리엄슨의 지적이다.
자유 시장과 건전한 재정이 핵심 취지
이상의 열 가지 요소를 살펴보면 본래의 워싱턴 컨센서스는 지금 시장지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같이 국가의 최소화나 후퇴를 주장하지 않았으며, 경제 효율성만을 강조하고 소득 재분배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편향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 완전한 자유변동 환율제로 전환하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가 워싱턴 컨센서스라고 부른 열 가지 항목을 정리하던 1989년은 이미 레이건 행정부 1기 중 창궐했던 시장근본주의가 이성적 경제 정책으로 대체되고 있던 때였다. 이미 레이건 시절의 경제 정책 중 무엇이 살아 남을 수 있고 무엇이 소멸될 것인지 전망이 분명해지던 시점이었다. 통화적 규율은 남지만 통화주의는 소멸하고, 조세개혁은 계속되지만 조세감축론은 퇴조하고, 무역 및 외국인 직접 투자는 계속 주창되지만 완전한 자본 자유화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식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진입과 퇴출에 대한 자유는 보장되지만 금융기관에 대한 건전성 규제나 환경 보호를 위한 규제 강화가 필요한 것으로 인정되던 시점이었다. 레이거노믹스가 수명을 다하던 때, 경제 정책 방향에 대한 최소 공통분모를 정리한 워싱턴 컨센서스가, 죽어가는 레이거노믹스의 극단적 형태인 시장 근본주의로 인식된다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느냐고 윌리엄슨은 반문한다.
레이거노믹스의 시장근본주의는 1980년대 초반 한 시기를 풍미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때도 그 정책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나 세계은행의컨센서스로 자리 잡은 적은 없다고 그는 말한다. 앤 크루거가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일하던 레이건 행정부 때 세계은행은 레이거노믹스의 보루가 아니었고, 이후 1987년 이래 수석 이코노미스트였던 스탠리 피셔
(현 IMF 수석부총재)는 레이거노믹스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최근까지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레이거노믹스에 조금도 연민을 갖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완고한(Die-hard: 브루스윌리스가 주연한 영화 제목) 자유주의 주창자' 혹은 '워싱턴 컨센서스의 신자'(일본정치경제학자 다카토시 이토가 IMF를 평하며), '워싱턴 컨센서스는 시장 근본주의'(헤지펀드의 원조 조지 소로스의 최근 저서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에서)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암호명의 새로운 제국주의'(경제학자 쉐히드 아람의 한 논문에서) '브라질 위기는 자유 방임 세계 경제의 창조라는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경제학자 람키슨 라잔의 논문에서)는 등의 예에서 등장하는 워싱턴 컨센서스는 본래의 의미와는 아주 다르게 쓰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폴 크루그먼도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해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한다. 윌리엄슨의 워싱턴 컨센서스는 경제 정책의 열 가지 측면을 포함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정부와 시장에 대한 믿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간략히 정리할 수 있다. 그것은 경제 정책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미덕(자유 시장과 건전한 재정)이 경제발전의 핵심이라는 믿음이다.
왜 워싱턴 컨센서스의 본래 의미가 이렇게 변질했는가? 윌리엄슨의 친구인 미국 중앙은행의 모아세스 네임이올 봄 <외교정책(Foreign Policy)>이라는 학술지에 '워싱턴 컨센서스 혹은 워싱턴 혼란?'이라는 논문을 기고했다. 이에 따르면, 우선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말이 등장한 때가 1980년대 말 소비에트 시스템이 붕괴한 시기와 일치했던 데서
혼란은 출발했다. 소비에트 블록 이외의 많은 개발도상국에서도 받아들여졌던 사회주의 사상과 중앙통제주의라는 마법이 붕괴한 것은 각 나라로 하여금 어떻게 정치적 경제적 삶을 조직해야 하는가에 대해 긴급한 대안을 찾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워싱턴 컨센서스는 부적당하지만 일시적인 대체물로 사용되게 되었다. 하지만 각국에서 실제 실현된 정책들은 본래 워싱턴 컨센서스 모델의 불충분한 형태들이었고, 그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경쟁 정책이 받쳐주지 않은 거대 국영기업의 민영화나 시장 제도가 불충분한 상태에서의 자유화는 사회적 불평등과 자본의 국외 유출이라는 최악의 상황만을 야기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윌리엄슨은 말한다. "쓰는 사람이 시시각각으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라고 결정하는 대로 그 의미가 해석될 수 있는 추상적이고 불분명한 개념을 공격하는 게임을 더 이상 하지 말자.' 대신 비판할 대상을 분명히 열거하고 그에 근거해 관련 정책을 토론하자." 민과 관에 골고루 박혀있는 신자유주의자들과 세계화의 모든 측면을 반대하는 집단 모두가 한번 곰곰이 되새겨 보아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워싱턴·김용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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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내가 만든 용어 잘못 쓰이고 있다"/존 윌리엄슨 박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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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윌리엄슨은 영국 런던경제대학(LSE) 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0년대 초반 전후 브레튼우즈 체제가 위기를 맞은 시점에 IMF 자문위원으로 국제통화체제 개혁에 관해 연구했다. 국제경제연구소(IIE)가 설립된 1981년 이래 연구위원으로 엄청난 양의 저술을 쏟아냈고, 1996년부터 지난해까지 세계은행의 서아시아 지역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일했다. 점진적으로 환율 변동을 꾀해 간다는 뜻의 크롤링 페그(Crawling Peg)라는 말은 그가 처음으로 지어내 옥스포드 사전에 등재된 용어이다. 하지만 그는 신자유주의와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는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용어를 창시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 워싱턴 컨센서스가 신자유주의와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때가 언제였나? 또 알고 나서 어떤 반응을 보였나?
@@ 1992년이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뜻이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려 애썼다. 하지만 경제학자 브레서 페레이라(1980년대 후반 브라질 재무장관, 현재는 공공부문 구조조정 담당 장관)가 내게 이렇게 충고했다. '어떤 표현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표현의 저작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게 아니냐. 어떤 용어가 대중에 의해 사용될 때, 그 용어는 이미 대중의 것이 되는 것이다'라고. 지금은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 워싱턴 컨센서스에서 밝힌 열 가지 경제 정책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하는가?
@@ 네 번째 정책인 금리 자유화는 진작부터 금융 자유화로 바꿨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1994년 이래 금리 자유화가 금융 자유화의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이뤄져야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 점에 동의한다. 나는 1998년 저술을 통해 금리 자유화는 금융 자유화의 여섯 가지 분야 (신용규제 철폐, 금리 자유화,금융산업에 대한 진입 자유, 은행의 실질적
자율성 보장, 은행 민영화, 국제간 자본 이동자유화)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워싱턴 컨센서스가 21세기의 컨센서스가 되려면 적어도 두 가지 부분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경제의 효율성뿐 아니라 수입의 평등한 분배를 증진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본다.
## 워싱턴 컨센서스가 빈곤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나?
@@ 워싱턴 컨센서스를 시장 근본주의나 신자유주의, 자유 방임주의, 레이거노믹스와 동일시하여 '국가를 때려부수자' '시장이 모든것을 해결해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빈곤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금융 자유화가 금융 위기로 연결되지 않으려면 금융기관에 대한 건전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상대적으로 부유한 자들이 빌려간 은행 빚을 탕감해 주는 데 세금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수입재분배 정책에 대해 시장근본주의자들은 강탈이 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 때문에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빈곤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본래의 컨센서스는 앞에 열거한 것들 때문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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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큰일 낸 '한국의 신자유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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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 시절 경제관료들, 위험한 '배짱 정책'으로 위기 불러
한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정통적인 미국의 신자유주의자들과는 다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속한 한국 사회의 정치·경제 체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강한 이해 집단의 정책 선호도에 따라 정책을 세우고 이를 집행하는 수동적 존재라면, 한국 정부는 경제의 주체로서 이해 집단들을 직접 장악하고 키워 왔다. 한국 정부가 1965년 이후 30년
넘게 경제를 주도해 온 결과 중 하나는 관료적 이해를 양산해 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국민 스스로가 경제 성과에 대한 책임을 정부에 묻고자 하는 경향이 고착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시장의 발전은 낮은 단계에 머물러 왔다. 특히 금융 시장과 금융산업은 경제규모에 비추어 상당히 취약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와 함께 경제 성장의 핵심 주체로 자리매김 된 한국의 재벌은 다른 어느 나라의 기업들보다도 높은 비율의 외부 자본조달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재벌의 이해 때문이기도 하고 정부가 원해서이기도 하다. 취약한 재정 구조를 지닌 재벌은 무역 신용을 확보하고 설비 투자 자본을 끌어들여야만 공장을 가동할 수 있고 그나마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역 확대와 설비확장은 경제성장률과 직결되어 항상 정치 권력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 왔다. 그 정치 권력 뒤에는 물론 고도 성장에 길든 국민의 보이지 않는 압력이 존재한다.
재벌·관료, '경쟁력' 구호 아래 짝짜궁
1980년대 말은 재벌들이 신자유주의적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하던 때였다고 할 수 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있었던 무역 흑자의 결과로 재벌의 재정 상태가 호전된 반면, 정부의 무역금융 지원은 축소되었다. 때마침 몰아닥친 미국의 개방 압력으로 무역 자유화가 아주 높은 수준으로 진행되었고 자본 자유화도 시작되었다. 미국의 강한 금융 시장 개방 압력에 대해 한국 정부의 대응은 선별적이었다. 국내 금융산업의 대외진출과 국내 자본의 해외 유출을 조기에 자유화하면서 외국 금융산업의 국내 진출과 외국 자본의 국내 유입은 될수록 점진적으로 자유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국의 금융 시장 개방 압력은 한국내 강력한 지지자를 만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1990년대 초반을 넘기면서 자신의 신용을 바탕으로 외자 조달이 가능하게 된 5대 재벌 그룹이 그들이었다.
이때쯤 되면서 한국 정부의 대응 또한 적극적으로 돌아섰다. 박재윤·한이헌 청와대 경제수석 시절 정부는 선별적이지만 조직적으로 외환 규제를 완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역금융 차원에서는 수입 연지급 기한 완화로 나타나고, 설비투자 지원의 형태로는 외화대출 용도 및 한도 확대로 나타났다. 우선 박재윤 경제수석 시절, 김영삼 정부는 1993년 4월1일 외화자금 조달 및 운용의 건전성을 규제하는 유일한 지도 기준인 외화자금 중장기 재원조달 의무 비율을 70%에서 50%로 낮추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94년 1월 외화대출 융자 비율을 높여줌으로써 늘어난 외화자금 수요를 단기 차입금에 의존하게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외화대출이라는 것은 한국계 은행이 한국계 기업에 외화로 자금을 빌려주고 외화로 돌려받는 것을 말하며, 그 용도는 해외 직접 투자, 국내설비 투자 등으로 제한되었다. 수입 연지급기한 확대라는 것은 수출을 목적으로 원자재를 수입할 때 그 원자재 수입 대금을 결제하는 시기를 늦춰주고 그 기간에 무역 신용을 쓸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의미이다. 김영삼정권 초기 3년 동안의 호황은 이렇듯 재벌과 정부의 배짱이 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맞아떨어져 생긴 것이었고, 그 결과 단기 외채와 무역 수지 적자가 급속히 확대되었다.
박재윤·한이헌 경제수석이 경쟁력 확보라는 명분 아래 재벌과 결탁해 국가 규제를 조직적으로 후퇴시켰다고 한다면 이후 경제 책임자들은 시장을 믿는 구석으로 삼아 시장의 수호자 행세를 했다고 할 수 있다. 1997년 1월23일 한보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이석채 경제수석이 보여준 호기는 시장 만능주의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는 금융기관의 해외 차입 여건이 악화하고 자본 유입 규모가 감소해 외환수급 불균형이 심해지던 1월30일 은행이 도산하면 정부의 지원이 없을 것이라는 폭탄 발언을 했다. 그 결과 일본의 단자회사가 한국계 금융기관에 대한 자금 공여를 중단했고, 한국 금융기관들의 일본 소재 지점들은 결제 마감 시간까지 자금을 조달하지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한보·기아 사태 맞고도 '시장지상주의'만 연발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 금융기관의 외화 유동성 사정은 급속히 악화했다. 당시 한국은행 총재가 2월1일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해외 점포에 대한 자금 지원 의사를 밝히고 한국은행이 수차례 한국계 은행의 본점과 해외점포에 한은 보유 외화를 예탁함으로써 결제위기는 넘겼으나, 외국 금융기관들은 한국계은행에 대한 신용 공여 한도를 대폭 축소하게 되었다. 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외환·신한 등 7개 시중 은행은 한보사태 이후 2∼3월 중에만 크레딧 라인이 91 억 달러가 줄어들게 되었다.
한보사태로 허덕이다가 기아사태로 빈사 상태에 빠진 제일은행에 대한 지원 대책을 세울 때 강경식 부총리가 보인 태도는 금융 시장 안정을 위한 중앙 은행의 최후 대부자 기능의 기본조차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이는 이석채 경제수석의 발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1997년 7월 대기업의 잇단 부도에 따라 금융기관의 부실 채권이 급증하고 금융 시스템에 대한 대외 신뢰도가 급격히 떨어진 시점에서 연 3%의 한은 특융으로 2조5천억원을 지원해 제일은행의 경영을 단번에 정상화시키자는 한은의 건의를 무시하고 시장 금리수준으로 1조원을 지원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제일은행은 재기 불능 상태에 빠져들었다. 정부와 민간의 신자유주의자들이 규제를 완화하는 데 배짱을 맞추고 시시때때로 시장의 수호자인 양 호기를 부림으로써 결국 위기가 현실화한 것이다. 자신의 이해나 이념에 기반을 두고 시장지상주의를 실현하려는 한국판 신자유주의자들은 지금도 민과 관, 여와 야 정치권을 가리지 않고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포진해 있다.
런던·김용기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