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교수가 1990년대에 발표한 러시아 혁명사 관련 논문들 몇 편을 압축한 파일입니다. 참조하세요. 

아래 첨부한  글은 세미나를 위해 이정희 교수의 학위논문을 요약한 글입니다.

 

 

 

이정희, 레닌주의와 프롤레타리아독재

- 출처: 서양사론, 38권. 1992.


이정희, 「러시아 10월 혁명에서 노동자 계급과 볼셰비끼와의 관계: ‘노동자 관리’ 운동을 중심으로」

- 출처: 슬라브학보 14,2('99.12), 1999.


이정희, 「볼셰비끼 사회주의와 ‘노동자관리’(Worker's control)운동, 1917~21」

출처: 서울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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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볼셰비끼 사회주의와 '노동자 관리'(workers' control)운동, 1917∼21>, 서울대동양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8


1. 서론

공장내 작업장위원회의 발생 (1905) - 작업환경 개선 요구

공장위원회의 광범위한 건설 (1917) - 정치적 봉기의 기초활동 기구

볼셰비키에 의한 공장위원회 폐지 (1921)

- 10월혁명 당시 볼셰비키는 노동자 관리운동을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한 계급투쟁이라 설명하였으나 혁명이후 통제에서 벗어나자 거의 언급 안함. 소련 공식 역사가들은 정치적인 봉기를 위한 행동이고 사회주의를 목표로 하는 계급투쟁이라 해석했으나 수정주의에서는 실업, 물가고, 착취, 궁핍 등 경제적인 이유와 기업의 생산 사보타지에 대한 저항 또는 공동체적 자치를 희구하는 러시아 인민반란 전통의 한 형태로서 인민주의나 급진민주주의로 해석

전시공산주의 체제하에서 볼셰비키는 중앙집권적 생산관리와 전문적 경영인이나 기술자에 의한 관리를 실행하여 중앙집권적 권력통합을 목표로 했기에 노동자 관리를 억압함.


2. 2월혁명 이후 7월 봉기까지 ‘노동자 관리’운동의 정치이념적 의미


▫ 노동자 관리 운동 발생의 사회적 배경

- 2월혁명 이후 도시 산업노동자들의 격렬한 계급투쟁과 요구,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의 이중권력(노동자 소비에트는 1000명당 1명, 병사소비에트는 250명당 1명의 비율) 상태, 산업노동자의 양적 증가(페트로그라드 240만중 39만), 산업화 자체가 저항의 과정(1905~14년 사이 950만명이 파업에 가담), 대기업의 70%가 국영기업(따라서 경영자는 고급관리나 군대장교, 외국 자본가), 노동자의 저항의식(봉건 영주권과 부역에 대한 증오심과 자본주의적 공장수탈에 대한 적대감이 혼합된 계급의식)

- 공장위원회는 초기에 주로 노동자 조직, 하위위원회 구성, 식량공급과 교육 및 재정 담당, 민병대 조직 등 일상적인 문제 활동.(생산과 분배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 조직문제, 정치운동 참여, 임금, 고용과 해고, 자본가의 사보타지에 대한 투쟁, 식량배급, 경영진 축출과 승인, 소비에트 및 공장위원회 타단위와 연계, 노동자 민병대 조직과 무장, 계몽활동, 무장봉기 준비와 수행, 직장폐쇄나 생산감축과의 투쟁 등) 소비에트 다음으로 큰 민중조직. 전국적으로 920개, 페트로그라드에 500개, 모스크바에 202개. 노동자 관리 운동은 처음에 사회주의 목표 보다는 일상적인 삶과 노동에서 민주적으로 의사를 표현하고자 하는 목표에서 시작, 따라서 노동자 관리 운동은 공장위원회의 가장 직접적인 관심사가 됨.

- 노동조합은 1905년 혁명 이후 일시적으로 합법화되었으나 곧 탄압받으면서 1912년경 거의 소멸. 1917년 이후 부활하지만 호응받지 못함. (노조는 오히려 정당세력의 각축의 장) 숫적으로는 크게 증가하지만 경제적 투쟁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전체 사회질서와 권력구조의 재편성에 더 중요하게 여겨졌기에 영향력을 증대시키지 못함.

- 2월 혁명이후 파업과 같은 합법적 저항과는 전혀다른 직접행동이 빈번히 발생.(감독관에 대한 강압과 폭력, 공장점거나 재산몰수) 10월에 이르러 노동자 관리 운동은 경영에 직접 개입하거나 식량 및 이윤분배에 관해 직접 관리.


▫노동자 관리 운동의 전개와 정치의식

- 봉기직후 경영자들이 도피하거나 작업을 거부하자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를 구성하고 공장을 가동시키려고 노력, 초기 노동자 관리 운동의 확산. 3월에 '페트로그라드 협정' 체결(8시간노동제, 노동자 기구 조직에 대한 권리)

- 볼셰비키는 2월 혁명 이전에 노동자 관리에 대한 입장 표출이 없었고 이후에도 상황과 국가정책의 목적에 따라 상이하게 표명. 레닌은 4월테제에서 발빠르게 사회주의의 목표와 노동자 관리의 문제에 대한 원칙 천명(“우리의 즉각적인 과제는 사회주의의 도입이 아니라 사회적 생산과 생산물의 분배를 우선적으로 인민 소비에트의 통제하에 두는 것”) 7차 전러 볼셰비키 대표자회의에서는 “노동자 관리나 국유화는 그 자체가 사회주의가 아니다. 러시아를 파멸로부터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

- 노동자, 병사들에게 임시정부의 입장은 의심스러웠고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입장은 일치되지 않았기에 개별 공장위원회는 노동자 관리라는 구호를 통해 스스로를 방어하고 단합하려 했음. 3-4월 공장위원회의 요구사항은 사회주의적 체제 지향이라기 보다는 노동 기본권 보장과 과거의 수탈에 대한 복수심이 복합적으로 표출된 것.

- 자유주의자들의 전쟁지속 입장과 멘셰비키의 애매한 입장 속에서 격렬한 가두시위를 통한 밀류코프 외상 해임 사건은 노동자들이 ‘소비에트 권력’ 구호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됨. 볼셰비키의 영향력 증가. 또한 2월혁명 이후 실업과 물가고, 식량위기, 생산위축 등 경제위기가 심화될 때 자유주의자나 멘셰비키는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동조하는 태도를 취했으나 공장위원회나 소비에트 하부조직은 ‘소비에트 권력’ 구호로 쏠려감. 레닌은 당은 노동자 관리에 무조건 참여할 것, 노동자 관리를 법적으로 명시할 것 등을 주장.

- 공장위원회는 전국적 통합, 중앙집중적 조정을 위해 노력.

- 노조는 공장위원회에 불안감을 표시하면서 노조가 국가 행정기구의 기능은 맡을 수 없다고 표출. 노조와 공장위원회는 경쟁관계. (러시아에서 자유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사실) 볼셰비키는 이중적 태도 (노동자 관리가 노조 집행부에 소속되어야 한다면서도 노조에는 공장위원회의 자율성을 주장하고 공장위원회에는 공장위원회의 통합을 주장)

- 결국 2월혁명 직후 발생한 노동자 관리는 볼셰비키의 계획이나 사회주의적 이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인 것이며 경제적 파탄 속에서 공장을 다시 가동시켜 일자리를 지키려는 필사적인 염원에서 비롯된 것. ‘소비에트 권력’ 구호도 아직은 선언적.


▫7월 봉기에서 계급의식의 급진화와 노동자 관리

- 2월 혁명 이후 온건파 사회주의 정당에 대한 환멸과 분노로부터 임시정부 타도를 외치는 7월봉기 발생. 소비에트로 권력 이양, 부르주아 내각과 결별, 노동자 관리 실시, 기아 구제, 토지 재분배 등 요구. 4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진압됨. 진압 이후 공장위원회의 각종 권리 취소, 경영인의 경영권 회복, 대독전쟁 재개 선포. 레닌은 노동자 관리 사상을 구체적으로 개발.

- 7월봉기 이후 숙련공과 미숙련공의 정치적 급진화, 레닌의 구호 수용, 합법적 저항 채택 않음. 레닌은 조심스럽게 노동자 관리를 소비에트 권력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대표회의는 노동자 스스로가 명령자로 책임지고 홀로서야 한다고 결의.

- 레닌은 3-4월에는 노동자 관리를 주로 노사간 갈등에서 권리를 수호하고 생산을 지속시키는 수단으로 보았다가, 7-8월에는 자본가와 경영자의 사보타지에 저항하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봄. 즉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 관리나 공동경영권은 무의미하며, 노동자 관리란 단지 소비에트 권력장악과 병행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명. 따라서 레닌에게 노동자 관리 구호는 소비에트 권력 구호에 선행할 수 없는 것이었음.


3. 7월봉기 이후 10월 혁명까지 노동자 관리의 역할


▫9-10월의 반혁명에 대한 투쟁과 노동자 관리

- 임시정부는 공장위원회의 여러 권한과 노동자 관리에 의한 생산개입 활동을 금지하는 일련의 조치 단행. 꼬르닐로프의 쿠데타. 노동자 자력방어 논리 확대. 노동자들의 지지가 소비에트 집행부를 벗어나 공장위원회 지도부와 적위대, 소비에트 산하 군사혁명위원회로 옮겨감. 레닌은 재빨리 “모든 권력을 빈농과 노동자의 소비에트에게로”로 구호를 대치. 여름 이후 노동자들의 계급의식 속에 권력문제에 대해 혁명적인 내용과 목표가 포함되는 것임.

- 노동자들은 생산 사보타지를 막고 생산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전국적인 연대조직에 의한 투쟁을 벌여야 하며, 노동자 관리를 보장해줄 수 있는 정치투쟁이나 권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 9월 이후 노동자 관리는 간접적인 감시나 소극적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생산과정에 개입하고 직접 경영을 장악하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나아감.


▫10월 혁명의 배경과 노동자 관리 운동

- 전러 1차 공장위원회 총회 : 멘셰비키 국제파, 무정부주의자, 볼셰비키의 논쟁. 레닌은 다가올 무장봉기의 기구로서 공장위원회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봄.

- 무장의 강도 강화. 적위대 증가. 봉기시에 공장위원회는 도로순찰, 군사행동, 공장의 보안조치, 식량조달 및 수송, 탄약 및 의료품 공급, 피난처 조달, 봉기군 보호, 적위대 훈련 등 모든 면에서 볼셰비키를 도움. 노동자 관리 요구는 10월 혁명의 근본적 목표 중의 하나.


▫레닌의 노동자 관리 포고령과 공장위원회 구도와의 경쟁

- 모든 은행, 산업, 상업, 농업, 5인이상 고용 기업은 노동자 관리 시행한다는 포고령 발표. 전러인민위원회 직속으로 최고국민경제회의 창설. 레닌은 노동자 관리의 일차 목표를 경제 복구에 두고 생산관리권을 중앙집권적으로 재편성하려는 의도. 11월초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가 독자적으로 노동자 관리 지침에 관한 결의문을 배포함으로써 볼셰비키의 공식 선언문과 함께 두가지가 나돌게 됨. 레닌은 초안을 다시 개정, 보완하여 ‘노동자 관리에 관한 지침계획서’를 법령화함으로써 11월 전러공장위원회 소집을 사전에 막음.(레닌은 중앙집권적 경제기구를 만들고 공장위원회와 노조를 통합하고 경영이나 감독 및 통제를 엄밀히 구분해서 경영은 중앙 경제기구에 일임한다고 선포) 공장위원회는 전면적인 노동자 관리를 원함. 노조는 전국적 수준의 공장위원회와 소비에트, 노동조합의 대표로 구성되는 ‘전러노동자관리회의’가 창설되어 생산 감시나 규제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노동자 조직 사이의 경쟁을 야기시킨 제안)

- 공장위원회는 노조가 전문가에 의한 관리를 중요시하여 노동자의 창의성을 억압하고 개별공장에서 발생한 자본가의 사보타지에 대한 저항이나 계급투쟁의 과제를 포기하려는 것으로 봄. 노조는 공장위원회의 개별적 행동으로는 경제난국을 해결할 수 없다고 봄. 공장위원회는 즉흥적으로 기업을 몰수하거나 합병하고 경영하였는데 레닌은 이 행동을 묵인. 볼셰비키는 중앙 및 주 노동자관리기구를 구성하고 여기에 공장위원회 대표자를 파견할 수 있다고 규정, 또 공장위원회가 인준하지 않는 관리는 무효가 될 것이라고 약속. 노동자관리기구는 최고국민경제회의 하위기구로 배치. 지방과 개별 공장의 노동자 관리 운동을 통제할 수 없었음. 한편 노조는 공장위원회 결의문보다 볼셰비키의 포고령을 지침서로 인정.


4. 초기 사회주의 국가 수립기의 노동자 관리에 관한 논쟁


▫제1차 전러노조대회와 ‘노동자 관리’ 논쟁

- 1918년 1월 혁명정부의 구성문제를 둘러싼 볼셰비키와 온건사회주의자들의 치열한 권력암투, 볼셰비키는 노동조합의 지지를 확보하는데 관심을 기울임. 노조는 산업별로 중앙집권적인 조직망을 갖고 있어서 공장위원회에 비해 생산 경영이나 노동규율의 강화면에서 더 효율적. 10월 혁명 이후 노동자 관리가 점점 분권적 성향을 띠게되자, 볼셰비키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우려함. 차라리 노조기구를 활용하는 것이 노동자들을 전국적으로 통합하는데 유리하다고 생각.

- 1918년 1월 제1차 전러노조대회는 공장위원회의 위상을 격하시키기로 결정한 대회. 첫째, 공장위원회를 노동조합으로 통합할 것, 둘째 노동조합은 개별공장에 의한 분권적 생산관리보다는 전국민경제를 위해 중앙관리를 옹호할 것, 셋째 지방경제기구는 정책결정 기구가 아니라 집행기구로서 운영할 것 등.

- 그러나, 노동자들은 개별 공장의 공장위원회가 존속할 것을 바람. 공장위원회는 원칙적으로 전인민경제 수립을 위해 노조와 통합해야 한다는데 반대하지 않았음. 계급투쟁적인 열의에 있어서 공장위원회가 노조보다 월등히 앞섬.

- 국가기구와의 관계에 있어 노조지도자들은 노조가 국가기구로 변모하면 곧 국가의 이익에 종속될 가능성이 클 것이라 생각. 따라서 근본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자율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조를 행정기구화하는 것 거부. 따라서 노조는 생산관리에 참여하되 직접적, 전면적 경영이 아니라 국가 행정기구 활동에 대해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는 것이 유리하다고 봄.

- 볼셰비키 내에서는 노조가 모든 계급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중앙집권적 기구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지노비예프, 노조의 국가기구화를 배격하면서 그 합병이 시기상조라고 보는 로조프스키, 그 중간적인 똘스키 등 크게 세가지 입장. 레닌은 토론 중재하는 신중한 입장(레닌은 노조의 이해관계는 생산력의 향상이라는 과제와 맞물릴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노조가 만일 노동자만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노동자국가가 과연 사회주의국가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것인가라는 물음 제기) 레닌은 공장위원회의 극단적인 자율권 요구에 직면하여, 공장위원회를 대신하여 노동조합에 임금과 생산규율 및 생산조직 문제를 협상할 권한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결정지으려 함.

- 제1차 전러노조대회 이후 볼셰비키는 공식적으로 ‘최고국민경제회의’가 ‘전러노동자관리회의’ 기구를 주재하고 공장위원회를 노조의 하위기구로 통합하는데 성공. 개별공장의 공장위원회에 의한 ‘노동자 관리’운동의 범위는 제약됨. 사회혁명당 좌파는 공장위원회가 자율권을 갖지 못한 종속적인 기구가 아니라 노동자 조직의 기초로서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체험과 요구를 전달하는 민주적인 기구가 되어야 하고 노동자 대표와 경영이사회가 중앙관리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


▫레닌의 ‘국가자본주의’ 이념과 ‘노동자 관리’

- 레닌은 소비에트를 통해 은행과 국영기업부문을 국유화하면서, 한편으로는 생산관리권을 행사하는 공장위원회를 노조의 휘하에 두어 통제하려고 계속 시도. 이에 대해 무정부주의자들과 철도, 항구노동자들은 이를 거부하면서 격렬 시위. 자본가, 경영자들의 생산거부로 직장폐쇄나 생산중지의 위기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더욱 맹렬하게 직접적 산업경영권 요구.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관리’란 경제적 지위 뿐 아니라 정치적 입장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장치를 의미. 반면 볼셰비키는 노동자 관리를 노동자계급을 통제하고 국가의 지시 하에서 생산을 복구하는 수단으로 생각.

- 레닌은 1918년 3월, 다시 자주적 ‘노동자 관리’의 역할을 공장의 회계장부 감독 기능으로만 한정시키려 함. 이는 아래로부터의 강제적 국유화나 몰수운동과 충돌. 여기서 레닌은 이중적으로, 한편으로는 노동자 관리 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찬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 관리가 산업을 관리하거나 조정하는데 불충분하다고 비판. 이는 첫째 경제파국 상태가 심화될수록 노동자계급이 볼셰비키로부터 등을 돌리는 사태를 두려워한 것이고 둘째, 당내에서 노동자 관리에 대한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당내의 의견 분열을 막는 최선의 방책으로서 노동자들의 경제적이 요구를 충족시키고 생산력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보고 생산성의 문제에 집착한 것. 이 방안으로 1918년 봄 레닌은 ‘국가자본주의’ 구상.

- 국가자본주의란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로서 국가가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국가의 비호와 감독 하에 사기업 몰수를 유보하고 자본가와 기술자를 고용하며, 차등임금제와 노동규율을 강화하여 이윤을 최대로 늘일수 있는 각종 자본주의적 투자와 경영을 허용하는 과도기적 노선. 경영인에게 기업을 맡기는 ‘일인관리제’ 도입과 행정적 감시. 레닌에게서 노동자 관리는 ‘노동자 국가의 관리’였기에 국가로부터 임명된 노동자대표가 자본가나 경영인에 대해 감독권을 갖는것이지 결코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개입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음.

- 그러나, 격심한 반발에 부딪친 레닌은 1918년 3월 제4차 전러노조대표회의에서 타협안으로 노동자와 전문경영인에 의한 ‘집단관리’를 제안. 이에 대해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 오신스키는 사임하면서 집단관리 비판. 이는 후일 노동자 반대파의 사상적 근거가 됨. 그는 프롤레타리아가 회계와 감독, 규율을 책임지고 부르주아 경영인이 의사결정과 재산권을 책임진다면 실질적인 기능은 부르주아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비판. 국가사회주의란 프롤레타리아에게 모든 생산과 경영의 결정권이 있는 것이라고 주장. 그러나, 오신스키를 위시한 당내 좌파 역시 ‘노동자 관리’의 상위기구로서 중앙행정의 역할을 거부하지는 않았음. 이는 중앙권위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이나 생디칼리스트들이 요구하는 산업생산의 자치주의적 원칙 혹은 분권적 주장과는 다름.

- 스쩨빠노프는 「노동자 관리에서 노동자 행정으로」라는 논고를 통해 10월 혁명 이전의 노동자 관리의 주된 기능은 노동자에 대한 기업인의 수탈에 저항하는 것이었으나 10월 이후 기업인의 생산 사보타지를 감시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강제적 기업몰수 이후부터는 노동자 관리 운동이 종종 전인민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망각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 노동자 관리가 시대적 소임을 다했으며 중앙행정기구의 관리에 통합되는 노동자 행정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


▫노동자들의 반발과 노동자 반대파의 발생

- 1917년 11월부터 1918년 6월 사이에 자주적 노동자 관리운동은 절정에 달함. 1918년 3월 모스크바의 경우 288개의 공장 가운데 222개의 공장이 노동자 관리위원회 감독아래 자주관리 시행. 1918년 중반까지 공장위원회가 공장경영진의 3/5이상에 참여. 그러나 원료와 연료 수송 마비, 전국적인 생산조직망 파괴, 숙련공 감소의 상황에서 생산성의 측면에서는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함. 공장위원회 내부 구성상의 변화(숙련공 다수가 국가기구나 노조, 적위대로 선발됨으로써 남아있는 노동자 사이에서 효율적인 자주관리가 어렵게 됨. 생산의 실패는 노동자 관리 그 자체에 있었다기보다는 전반적인 경제위기에 있었고, 1918년 1월 이후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이 통합된 이후에도 결정권을 위한 경쟁이 존재하였으며 볼셰비키의 간섭으로 노동자계급의 자율권이 침해받아 효율성이 떨어지게 된 것.)

- 1918년 봄 이후 실업난, 식량난 가중되고 생산이 극도로 침체되자 볼셰비키는 생산력 향상을 위해 차등임금제와 성과급제 및 노동규율을 강화하는 정책을 도입하였으나 사태를 호전시킬 수 없었고 오히려 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킴. 결국 레닌의 국가자본주의 정책은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경영인과 노동자 쌍방으로부터 반발을 받으면서 중단됨.

- 레닌의 중앙집중적인 노동정책을 반대하는 당내좌파들이 ‘노동자 반대파’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의 자율권 확대를 요구하면서 레닌의 노선을 전면적으로 비판.(오신스키, 콜론타이, 슈미트 등) 1918년 6월무렵 볼셰비키는 1917년보다 기반 약화. 지역 경제기구나 소비에트, 지역 당위원회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음. 소비에트 선거에서도 볼셰비키 지지율 하락. 철도노동자들은 ‘노동자관리’ 구호를 걸고 상부지시 거부, 일부 공장에서는 노동자 관리를 위하여 정부에 저항하는 파업도 발생.

- 그러나 공장위원회의 노동자 관리 운동은 볼셰비키와의 동맹에 기초를 두고 성장하였기에 볼셰비키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고 ‘소비에트 권력’ 구호는 여전히 위력을 가지고 있었음. 또한 반혁명의 위협이 항존하는 상태에서 볼셰비키를 전적으로 반대할 수 없었음. 혁명의 체험에 의해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은 크게 성장하였으나 혁명이후 노동자 자신의 자율적인 조직을 키우지 못한 것이 결정적 약점. 결정적으로 내전의 개시에 의해 노동조합이나 공장위원회의 노동자 관리는 새로운 위기를 맞이함.


▫‘6월 국유화령’과 노동자 관리의 변화

- 내전에 대비하여 볼셰비키는 온건한 국유화노선을 중단하고 1918년 6월 ‘국유화령’ 선포, 국가주도의 급속한 국유화 정책 추진. 노동자계급은 사회주의 국가권력 건설이라는 포괄적 목표 이외에 구체적인 정치강령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내전이 시작되자 ‘내전기 심리상태’하에서 볼셰비키에 정치적 구심력을 줌. 국유화령 이후 정부는 노동자 관리를 폐지하기 위해, 사전 경영과 사후 감독을 구분하고 경영은 ‘최고국민경제회의’와 지방 경제위원회에 맡기고 사후 감독은 중앙 인민위원회 산하 ‘국가관리위원회’의 권한하에 통합시킨다는 계획 세움. 결국 공장위원회를 강제적으로 폐쇄하는 정책. 노조는 생산성 향상 교육이나 노동규율 감독에 전념해야 하는 기구로 위축됨.


5. 내전기 전시공산주의 하에서 노동자 관리의 억압


- 내전에 대해 첫째 내전기를 근본적으로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과의 군사적 투쟁의 시기로 보는 시각, 따라서 전시공산주의 정책은 볼셰비키 이념의 당연한 귀결. 둘째 반혁명세력의 군사력은 실제 취약했고 부르주아 세력은 거의 궤멸되어 있었다고 보는 시각, 이에 따르면 내전의 개시와 함께 볼셰비키는 권력장악에 장애가 되는 모든 사회적 요소와 투쟁했고 이를 위해 전시공산주의 정책이 시행되었으며 그결과 노동자계급의 복속과 사회계층간의 구조적 변동 초래, 볼셰비키 내에서나 볼셰비키와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분열 발생.

- 자무엘리는 전시공산주의 대원칙은 전쟁의 승리뿐 아니라 국유화, 노동의 의무, 중앙집권적인 생산관리, 계급간의 평등분배 원칙, 화폐와 시장경제 소멸 등 사회주의 이념을 추구했으나 시장경제를 폐지하고 국유화를 시행하려는 노력이 피상적인 결과만 가져왔다고 봄. 즉 소유와 분배면에서 불평등을 형식적으로 없앴으나 생산에서 경쟁과 물신숭배원리를 여전히 고수함으로써 사회주의 이념의 한계를 가졌다는 것.


▫내전의 개시와 자주적 ‘노동자 관리’ 폐지의 결정

- 말레는 볼셰비키의 주장과는 달리 전시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자주적 노동자 관리의 요소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주장. 내전기의 산업경영이 1)자주적 노동자 관리 2)국가의 감독하에서 자본주의적인 전문기술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집단관리 3)당에 의한 중앙집권적인 국가관리의 방식이 혼합된 것이었고 또 단계별로 심한 변질을 겪었다고 주장. 결국 세가지 방식이 뒤섞여 생산관리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끊이지 않음.(1918년 여름 공장위원회가 경영에 직접 개입하는 정도는 64.3%, 국가가 지정한 특별기구가 경영에 개입하는 경우는 64%)

- 내전은 공장위원회와 정부의 경쟁에서 전적으로 볼셰비키에 유리하게 작용. 3월에 철도, 10월에 금속, 11월에 피혁부문에서 분권적 관리기구가 강제로 폐지됨. 정부는 개별공장에서의 저항을 제어하기 위해 중앙의 인민위원회 산하에 ‘국가관리인민위원회’를 신설, 기존의 ‘전러노동자관리회의’를 대체함.

- 레닌은 국가행정기구나 기업의 업무에 관한 감시, 감독권한을 개별 공장위원회에서 빼내어 국가관리인민위원회에 통합시키고자 노력. 이 기구에 대중을 참여시킬 것을 약속하였지만 과거의 노동자 관리와 달리 이 ‘국가관리’는 중앙집권적인 국가기구나 당에 의한 감시를 의미하였기에 모든 계급과 집단에 대한 정치적인 감시의 성격을 내포함. 또한 중앙에서 지명한 인물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즉각 지방경제회의와 공장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부름.

- 내전이 격화되던 1918년 8월까지 볼셰비키는 노조 가운데에서 볼셰비키 성향 인물로 과반수 채우는데 성공. 내전기에 노동조합 내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인물보다 중앙정부에 복종하는 인물이 숫적으로 우세해짐. 레밍튼에 의하면 새로 임명된 사람들은 명령을 수행하는데 몰두하는 요원들로서 출세지향적이고 더 이상 노동자들의 생산개입을 옹호하던 과거의 운동가처럼 저항적이지 않았다.

- 노동자 입장에서 볼 때 공장위원회는 이미 노조 하위기구로 전락했고, 공장위원회 내부의 자율적인 조직을 고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집단관리의 실패에 대한 책임까지 져야하는 입장이었기에 중앙집권적 경제기구나 ‘국가 관리’에 공개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 따라서 ‘노동자 관리’ 폐지 이후 변화는 명백히 혁명의 목표면에서 근본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


▫전시공산주의의 노동정책과 생산관리권의 변화

- 크리츠만은 내전기의 산업 경영방식을 6단계로 구분 1)10월혁명까지 노동자 자주관리 단계 2)10월혁명 직후부터 1918년 6월까지 ‘노동자 직접경영’단계 3)1918년 6월 국유화령 선포이후 1918년 말까지 전문경영인과 노동자에 의한 집단관리 4)1919년 이후부터 중앙경영기구 창설까지 전문기술자들의 의무적인 봉사와 관리 5)국가의 중앙경영기구에 의한 관리 6)1921년의 ‘일인관리제’의 단계. 그러나 이는 갈등을 감추고 경제의 실패에 따른 미봉책의 연속임을 은폐하는 것.

- 1918년 말까지 ‘집단 관리’는 실패로 끝남. 가장 큰 이유는 공장 내부에서 경영인과 노동자들 사이의 상호불신으로 갈등 심화하여 생산성 향상을 위한 효과적인 정책 수행 불가능. 또한 백군 공격으로 수송력 마비, 볼셰비키의 가격고시제 도입으로 기업간 물품교환 체제 균열.

- 경제사정 악화로 노동자들의 작업장 이탈이 늘자 정부는 그 경우 직장폐쇄후 강제징집령을 내리거나 강제노역장으로 노동자 배치. 6월 국유화령 선포 이후 모든 노동자는 개별 노동장부를 가지고 다녀야 했으며 이주의 자유는 제한됨. 직업선택과 일상생활은 정부와 노조의 감시하에 놓임. 1918년 통과된 새 노동법에 따라 강제적 노동의무, 노동업적 카드제가 도입됨. 작업장 이탈과 파업은 반역행위로 규정되었고 사보타지나 작업태만의 경우 강제노동장으로 보내짐.

- 전시공산주의 노동정책은 생산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과도한 물질 보상제와 차등제 도입. 1919년 3월부터 ‘최고국민경제회의’는 특별상여제와 추가배급제, 돌격노동제 시행. 이는 노동자 사이의 계층적 위화감을 불러일으키거나 계급적 결속감을 약화시킴. 결과적으로 전시공산주의 노동정책은 생산성 향상에 성과를 거두지 못함.(오히려 농촌의 소규모 수공업 공장인 꾸스따리의 생산성이 높았음) 전시공산주의 노동정책을 수행할 중앙관리체제가 엉성하고 실행능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난 것임.

- 내전 동안 중앙과 지방경제기구 사이의 가장 심한 마찰은 군수산업 부문에서 일어남. 이때마다 적군사령관인 트로츠키와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인 리코프 사이에 불화와 갈등이 생김. 기업내 집단적 경영방법과 복잡한 행정절차는 노동자와 경영인 사이의 불화 초래, 비효율적인 경영과 관료주의로 인해 ‘비상노동국방회의’는 지방의 꾸스따리로 생산을 주문하기에 이름.

- 1919년 11월 비상노동국방회의는 모든 자원과 인원을 징발할 권한을 부여받음. 트로츠키는 이 기구를 활용하여 노동자를 징집, 노동군대를 결성하고 생산현장에 이들을 배치함. 이는 군사적 방법을 사용하여 노동을 조직하고, 사보타지는 군사재판소에서 재판받도록 한 것. 이것은 가히 노동의 군사화라고 할 수 있는 독재적 조치. 더 놀라운 것은 이 강제노동이 내전에서 불리한 시기에 실시된 것이 아니라 승리가 확실시되는 순간에 강화된 것임. 즉, 볼셰비키의 투쟁대상이 반혁명군이 아니라 노동이탈자나 소극적인 노동대중으로 변한 것. 레닌도 암묵적으로 승인.

- 트로츠키는 생산성 하락의 원인을 노동자의 게으름과 국가기구의 관료주의로 돌리면서, 자유노동제를 불신하고 의무노동제를 주장하면서 토요일 무보수노동제를 주장. 의무노동제와 더불어 배급제와 차등임금제 및 강제적 곡물징수가 감행됨. 또한 트로츠키는 강력한 ‘일인관리제’ 도입을 주장.

- 1920년 1월 제3차 전러노조대회는 ‘일인관리제’를 인정하고 그대신 경영인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 부여받음. 그러나 노조 다수파가 볼셰비키로 채워졌기에 노조는 당에 종속되어갔고 최고국민경제회의조차 당 기구의 지시에 따라야만 했음. 결국 개별 공장의 노조는 모든 종류의 관리에 개입하는 권한을 금지당하고 단지 노동조건과 복지에 관해 건의하는 기능만을 허용받음.

- 자율적인 권리를 요구하는 철도노조에 대해 트로츠키는 철도노조 지도부를 중앙의 산업관리기구와 합병하여 중앙수송위원회로 재편성하고 이를 통해 철도노동자를 군사적으로 훈련시키고 통제하는 정책을 강행. 극단적으로 군사화된 생산감독 방식은 노조와 당 사이의 분쟁을 불러일으킴. 1920년 8월 철도노동자들의 파업 발생. 일시적인 계엄령 선포. 마침내 정부는 트로츠키 방식을 포기하고 노조대표와 협상을 통해 집단적 경영방식으로 되돌아갈 것을 약속.


▫산업 중추부의 창출과 중앙생산관리권의 확장

- 산업별 생산책임관리제는 중앙 특별행정기구로서 산업중추부를 창설하여 당중앙 정치국과 상부 정치기구에 직속시키고 모든 산업을 부문별로 나눈 후, 이들 각 산업부문을 지역을 초월하여 철저하게 중앙 산업중추부의 책임하에 두는 것. 산업중추부는 각 분야의 원료구입, 생산량, 생산물 교환, 가격, 수송, 납품 등 모든 면에서 상부의 지시에 따라 전국적으로 총괄하여 책임지고, 다시 결과를 상부에 보고하도록 정해짐. 이는 경제관리 기구들이 지역적으로나 횡적으로 연계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당과 중앙 정치기구의 지시에 따라 종적으로 움직이는 제도.

- 산업중추부 책임이사회 구성원 가운데 공장위원회 임원과 노조원은 각각 20%, 3.1%에 머무름(1919년). 또한 전문기술자에 비하여 육체노동자 비율이 현저히 떨어짐. 1920년 말에 이르면 ‘노동자 행정’이란 말조차 공허한 소리에 지나지 않게됨. 일인관리제는 내전이 끝날 무렵 정착되었는데 1918년 3.4%, 1919년 10.8%, 1921년 71.2%로 증가. 또한 지도부 가운데 1920년에 65.3%가 노동자 출신이었으나 1923년에는 대기업에서 33%, 소기업에서 46%로 줄어듬.

- 레닌은 산업생산력 하락에 직면하여 노동자출신 경영인 양성을 시급성을 절감했지만 동시에 노동력 동원에 대한 노동조합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었음. 또한 노동자와 노조의 괴리가 심화된 시기에 노조를 정치기구에 직접 종속시켰을 경우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우려함. 이에 그는 노조를 당장 정부기구에 종속시키는 것은 비하고 대신 노조를 볼셰비키 정부에 협조적으로 만들고 또 노조로부터 일부 경영인을 선발하는 권한을 주고 기업내 경영이사회에 참여시킨다는 방식을 택함.

- 레닌이 노조의 국가기구화를 반대한 이유 첫째, 국가 관료기구가 지나치게 커져서 볼셰비키와 프롤레타리아가 괴리되는 것을 우려함. 노조가 당과 인민을 연결하는 역할을 행하기를 바람. 둘째, 인민소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 전체를 위해 존재하므로 입법과 집행을 맡을수 있지만 노조는 노동자계급의 권익을 우선시하는 기구이므로 법률을 수립하거나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 즉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노조는 노동대중과 소비에트를 중재하는 역할.

- 1920년 말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현실과 부합되지 않은 말이 됨. 노조나 공장위원회 같은 혁명적 기구들은 권한을 상실하였고 소비에트나 최고국민경제회의와 같은 10월 혁명기의 기구들조차 산업중추부와 당 앞에서 퇴색되어 갔기 때문. 생산과정에서 노동자 이익은 무시되고 상부에서 지명된 산업중추부 관료와 전문기술자, 경영인이 결정권을 독점함. 노조는 결정권한에서 밀려나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동자들을 훈련시키는 감독기구로 전락. 볼셰비키 중에서 자주적 노동자 관리를 어떻게 실제적이고 과학적으로 운영할 것인가 연구한 이도 없음. 결국 내전기 동안 산업 경영면에서 노동자계급의 자율적 조직은 완전히 파괴됨. 따라서 중앙집권적 경영과 전문가에 의한 ‘일인관리제’ 방식을 이용하여 생산력을 향상시키면서 사회주의적인 노동자 문화를 발전시킨다는 레닌의 두가지 목표는 엄청나게 변질됨.


6. 신경제정책의 채택과 노동자 관리의 종말


▫노동자의 최후의 저항과 신경제정책의 채택

- 내전 동안 산업중추부가 독점적 산업 경영권을 확보하고 행사하자 자치적 공장위원회나 자주적 노동자 관리라는 단어는 사라짐. 그러나 내전이 끝날 무렵인 1920년 말부터 노동자 농민의 억눌려있던 불만이 표출됨. 볼셰비키 지도부에서는 신 체제하의 노조의 역할과 노동자의 권리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과 분열 재개. 트로츠키에 의하면 노조는 국가에 통합되어 노동자로 하여금 국가관리를 받아들이게 하고, 국가계획에 따라 노동자를 훈련하고 교육시키며 이들을 규율을 통해 감시하고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선봉대의 임무. 오신스키와 콜론타이 등 노동자반대파는 노동조직을 군사화함으로써 사회주의 체제 선봉그룹을 만든다는 트로츠키의 구상을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비판. 이들은 순수 노동자조직의 창조성과 자율성을 통해 노동자를 사회주의 국가의 기초로 삼아야 하며 노조가 노동과정을 총괄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 또한 1919년 당 계획에 따라 ‘노동자 관리’를 회복할 것을 주장. 지노비예프를 중심으로 하는 주류는 당의 중앙집중적인 권위에 통일적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 생산력 저하의 원인은 당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기에 중앙집중적인 노동규율과 감독권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 트로츠키는 볼셰비키의 약점이 관료주의화에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한편으로는 노동자반대파와 연합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음.

- 1921년, 10월혁명 이후 사상 최대의 반볼셰비키적인 노동자 반란이 폭발. 1921년초 산업생산성은 혁명 이전에 비해 16%이하로 떨어짐. 농산물 생산은 혁명이전의 50%이하로 감소. 노동자들은 궁핍의 원인이 내전이 아니라 정부의 강제적 식량공출과 배급제, 노동동원령이라 생각. 크론슈타트 섬의 수병과 노동자들이 반볼셰비키적 반란 일으킴. 그들은 노동자들과 소 수공업자의 자유로운 노동과 자주적 결정권 요구.(노동자 관리는 더 이상 관심대상이 아니었음) 볼셰비키는 이를 쁘띠부르주아적인 반혁명운동이라 규정짓고 유혈 진압.(그러나 아브리치에 의하면 크론슈타트 반란자들의 강령의 본질은 ‘반 볼셰비키’가 아니라 ‘더 나은 볼셰비키’였다고 함) 이 사건은 볼셰비키가 권력장악에는 성공했으나 당과 민중을 연결하는 사회적 조직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했음을 뜻함. 노동자반대파 역시 자신들의 급진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건 발생시 당 차원을 넘는 해결책을 제안할 수 없었음.

- 이후 노동자들의 저항과 당내 분열에 극도의 우려를 느낀 레닌은 트로츠키나 노동자반대파를 공히 비난. 그는 노동조합은 산업관리에 직접 개입하거나 정부와 대립적인 역할을 행해서는 안된다고 보면서 정치적 중립성과 중재역할, 노동자들의 계몽과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술교육에 몰두해야 한다고 주장. 레닌은 노조가 국가에 통합된 것도 아니고 독립된 것도 아닌 애매한 지위를 지니면서 노동인민의 권리와 책임을 대변한다고 하면서 트로츠키와 노동자반대파의 의견을 물리침.

- 그러나 정치적 중립 요구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발언권 제한과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효과를 가져옴. 콜론타이는 레닌이 생산력 향상에 골몰한 나머지 새 체제에서 노동대중이 어떻게 창의적으로 생산과정과 경영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새로운 문제를 완전히 무시했다고 비판. 1921년 볼셰비키는 크론슈타트 반란을 진압하면서 전시공산주의정책을 폐지하고 대신에 사적기업과 사적농업을 부분적으로 하용하고 잉여농산물의 사적처분권을 허용하는 신경제정책 채택. 동시에 모든 분파주의 활동 금지, 노동자반대파를 반혁명세력으로 규정하고 숙청. 노조는 정치기구에서 배제되어 완전히 당의 하위에 복속됨. 신경제정책 이후로 농민층은 경제적으로 조금 나아졌으나 산업과 노동부문에서는 오히려 차등임금제, 식량배급차별제, 노동카드와 성과급제 등으로 노동자들의 지위는 하락.


▫‘당-국가 관리’의 정착과 ‘관리자 간부’집단의 등장

- 내전 말기까지 볼셰비키는 여러 종류의 감시, 감독기구들을 ‘국가관리인민위원회’로 통합. 레닌은 네프 시기동안 인민대중이 사회주의 경제수립과 정부기구의 관료주의화를 타파하는 과제에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 그러나 당과 노동자 사이의 괴리는 극복되지 못함.

- 산업중추부 책임이사회 임원 가운데 노조 회원은 극히 낮았음. 볼셰비키 당원도 1921년 3월까지 60만으로 급증하였으나 이들은 노동자 출신이라기보다는 주로 행정 목적을 위해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조직하는데 기술을 발휘하는 조직책임자, 기술자, 전문경영가 등 간부급에서 충원되었음. 다시말해 내전 동안 볼셰비키는 당원 자격으로서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의식이나 혁명에 대한 열성보다도, 높은 교육적 배경이나 실용적 능력을 선호한 것임.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도 사무직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게 됨. 레닌은 당과 국가기구 내에서 노동자 비율이 줄어들고 당의 지지기반이 약화하는 추세를 우려하여 당의 주도하에 더욱 많은 노동자들을 국가기구 감시, 감독에 가담시키기 위해, 국가기구 자체의 관료주의화를 고발하는 민중적 기구로서 소비에트 산하의 ‘노농감시위원회’를 적극적으로 활용.

- 그러나 네프 이후 정부기구에 대한 감시 업무량은 방대하였고 대부분 회계학에 대한 지식을 요하는 일이어서 노동자 참가비율은 낮았음. 지방에서는 일반 노동자보다 기업체의 간부들 사이에서 관리자요원을 선발하는 경우가 늘어남. 1921년 6월까지 노농감시위원회에는 3만 4천여명이 참가하였는데 노동자출신은 11%, 비당원 기술자 및 전문가 출신은 88.9%였음. 그리하여 국가관리에 인민대중을 광범위하게 참여시키려던 레닌의 계획은 좌절됨. 레닌은 노농감시위원회를 강화하고 관료주의 폐단을 막기 위해 당의 ‘중앙통제위원회’가 이 기구와 공조를 하여 당원을 파견해야 한다고 생각. 즉 당의 직접적 개입만이 노동자들에게 관리기술을 가르치고 헌신적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고 생각. 1922년 봄 개편된 ‘중앙통제위원회-노농감시위원회’ 공조체제는 통합된 ‘당-국가 관리’ 방식으로 불리면서 감시, 감독권 행사. 그러나 다시금 그 내에서 전문가 출신 인물들이 임무를 떠맡는 추세가 켜져감. 결구 네프시기에 노동자계급은 계속 당과 국가관리기구에서 밀려남. 더욱이 통합된 관리기구는 점차 정치적 감시와 통제 임무까지 수행하여 볼셰비키 권력 확립에 이바지.

- 이 과정에서 새로운 ‘관리자 간부’ 집단이 발생했는데, 오를로프스키에 의하면 이들은 1)짜르시대부터 관리직에 종사한 자들 2)전제정에 저항한 적이 있던 반정부적인 조직 출신이나 혁명적 행동조직의 간부 3)볼셰비키에 의해 임명된 열성적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를 통해 네프시기에 사회구조상 복합적이고 중첩적인 변동이 일어났고 그중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성격이 분해되었으며 노동자 일부가 새로운 ‘관리자 간부’ 집단에 합류한 것으로 추측. 이들은 높은 보수와 식량, 연료, 주택 등 물질적인 보상을 받고 중앙집권적인 감시, 감독체계에 참여하였으므로 국가정치로부터 자유로운 계급을 성장할 수 없었고 소비에트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세력으로 변할 수도 없었음.


▫볼셰비키 사회주의의 변화 - 계급해방의 이념에서 생산력주의 이념으로

- 네프시기 볼셰비키는 생산관리권과 사후감독권을 당 아래에 두는데 성공하였고 생산력 회복에도 어느정도 성공하였으나 노동자내부의 차별을 심화시켰고 전문가에 의한 일인관리체제를 강화시켰으며 노동자를 결정권에서 배제하여 노동자조직의 복속을 가속화함. 결국 네프시기 노조 지도부에서는 노동자들의 참여와 권리보다 생산력 향상을 최우선으로 하는 생산력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쥐게됨.

- 레닌은 네프를 사회주의 경제 기반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며 노동자-농민의 자발적 연합을 추구하는 방법이라고 보았고 국가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과도기 정책이라고 합리화하였으나 더 정밀하지 못했음. 그러나 민중의 의식화는 국가기구나 상부의 지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중의 민주적인 발언을 가능하게해줄 통로를 통해 이루어 지는 것.

- 쿄거에 따르면 사회구조적으로 볼 때 내전을 거치면서 페트로그라드는 인구가 250만에서 70만으로, 모스크바는 200만에서 100만으로 줄어들었는데 그 결과 노동자계급은 혁명 당시보다 계급적 응집력이나 위력이 감소하였다고 함. 인구의 유출과 유입을 통해 대도시에 남은 자들은 자유직종과 사무직, 여성, 나이든 숙련공 등이었고 그 외에 신체제에서 새로운 직업과 경력을 추구하려는 자들이었음. 그리하여 도시 인구는 복합적 특색을 띠었고 성향도 다양하게 됨. 이들에게 내전은 악몽이었고 달리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신빙성있는 경제와 안정된 사회를 희구함. 체이스에 따르면 네프정책 이후에 성장한 신세대 노동자 대다수는 10월혁명 당시 투쟁 경험이 없었기에 다양한 경향으로 뭉쳐있었고 경쟁이나 질투, 불만을 가지고 움직이는 집단이었음. 이들은 네프맨(부농, 상인, 전문기술자)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정부의 억압적 노동정책에 대해서는 냉담과 체념, 작업장 이탈, 음주나 태만 등 소극적 저항의 태도만을 취했음.

- 내전 이후 러시아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은 약화되었으며 노동자계급은 쇠퇴하고 있었음. 크론슈타트 반란 당시에도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은 자주적 조직이 와해되었기에 이에 동조할 수 없었음. 정부의 행정기구와 당조직에 선발되어 지위 상승한 숙련공이나 사무직은 노동자계급이라기보다는 ‘국가간부’집단이라고 해야 할 것.

- 10차 전당대회 이후 노동자반대파는 숙청되었고 노동자 출신 구당원 역시 대대적으로 숙청됨. 1922년 흉작으로 네프에 대한 볼셰비키의 자신감이 흔들리자 정부는 무정부주의자, 사회혁명당 및 비볼셰비키 지도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투옥 소동으로 권력 강화. 트로츠키는 1921년 노동조합 대논쟁에서 패한 이후로 독자행동 취하지 못함. 스탈린은 트로츠키 추방이후 급격한 산업화를 옹호. 그는 도시 노동자와 신참 당원에서 행동대원 선발하여 지식인과 부농에 대한 인위적 계급투쟁 전개시켜 네프를 종식시키고 권력 장악. 이후 급격한 산업화 추진과 동시에 형식적으로 남아있던 산업의 집단적 관리 원칙과 노조의 권한 폐지.

- 스탈린은 2만 5천의 열성적 당 간부 집단을 선발하여 가공할 만한 노동규율 강화에 동원. 생산집단들은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당은 이를 ‘사회주의적 경쟁’이라 부름. 이는 점차 개인간 경쟁으로 확대되어 극도의 노동강화와 착취를 위한 운동으로 확산됨. 대다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적 경쟁에서 패배자로 밀려남.

- 베틀렘은 볼셰비키 사회주의 이념의 근본적인 결함은 국유화 이후 생산과정에서 직접생산자들이 주체의식을 가지고 공동체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관계에 관해 미흡한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라고 지적. 네프시기에 자주적 노동자 관리를 폐지한 이후 산업생산의 사후 감독에서조차 노동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실패할때에도 볼셰비키는 새로운 민주적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수립에 관한 과제에 대해 당의 감시를 더욱 중앙집권적으로 강화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떠한 이론도 계발하지 못했음.


7. 결론


-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를 위시한 각종 노동자 조직에서 직접적인 참여와 토론 및 계몽활동의 경험을 통해 계급적 주체의식과 사회주의 질서에 대한 열망 및 혁명의 목표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키웠음.

- 노동자 관리를 둘러싸고 노동자계급과 볼셰비키는 동맹과 경쟁 그리고 갈등의 관계를 반복하였고 궁극적으로 노동자계급이 ‘노동자 행정’의 미명하에 당에 복속함.

- 공장위원회는 작업장과 생활 모든 면에서 투쟁을 지도하였고 전쟁문제, 경제규제, 현실정치에 대한 토론과 계몽을 지도하여 노동자 관리 운동을 소비에트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정치운동으로 발전시킴.

- 내전기에 노동자 관리가 쇠퇴한 것은 그들의 조직력이 약화된 것에서 비롯. 볼셰비키는 내전 승리와 생산력 향상이라는 명분하에 생산과 분배에 관한 노동자 관리를 노동자 가운데 지명된 인물들이 국가경제기구와 전문경영인을 감시한다는 ‘노동자 행정’으로 변형시켜 노동자의 자율성을 박탈하고 주체적 조직을 약화시킴.

- 볼셰비키는 취약한 권력기반 탓으로 경제위기에 부딪힐때마다 빈곤계층 해방보다는 생산력 향상에 집착하였음. 레닌은 노동자 관리 폐지 이후 행정기구의 관료화를 막기 위한 기구를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그 기구가 관료주의에 빠짐.

- 민중의 참여가 문제가 아니라 민중이 얼마나 주체적이고도 자율적인 권한을 가지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척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