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제정될 당시부터 일본의 노동법은 국제기준에 맞춰 복수노조가 보장되어 있었다. 노조의 조직형태와 단체교섭 방식에 대해서도 별도의 법적규제없이 전적으로 노사관계 주체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기는 법체계를 갖추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렇지만 일부 일본의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복수노조는 노동에 대한 공격 수단이었을 따름이라고 잘라 말한다. 일본에서 복수노조와 관련한 역사적 사건과 그 함의를 짚어보도록 하겠다.


일본의 복수노조 상황

일본의 노동법에 따르면 2인 이상의 종업원은 노조를 설립할 수 있고, 사측은 이렇게 설립된 노조와 단체협상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복수노조가 병존하는 경우 각 노조는 고유한 교섭권을 갖는 교섭대표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복수노조의 취급과 관련해서는 판례법에 의해 경쟁적 조합주의(사용자에 대해서 평등한 권리를 지닌 각 조합은 조합원을 두고 상호간 경쟁), 조합간 차별금지(사용자는 각 조합과 노동조건에 대해서 별개로 교섭하되, 조합간 노동조건 격차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를 지님), 사용자의 중립의무(사용자가 특정한 조합의 운영에 개입하거나 세력의 약화를 의도하는 것을 금지)라는 원칙이 확립되어 있다. 창구단일화를 전제로 하고 있는 한국의 복수노조 제도와의 근본적인 차이는 명확하나, 이를 한국적 현실에 비추어 보자면 “자율교섭”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일본 노조의 기본적 조직형태는 특정기업의 종업원을 가입자격으로 하는 기업별 노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종업원 일괄가입형’ 조직체계 아래서 통상 1기업 1노조가 존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 현재 동일 사업소 내 복수노조가 존재하는 기업의 비중은 14.5%에 이르며 기업규모 5,000인 이상의 기업에서는 27.1%, 인원수 기준으로는 조직노동자의 약 40%가 복수노조 병존 상황 아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복수노조 병존 상황에서 복수의 노조들은 보통 제1노조, 제2노조라고 불리는데, 이는 단순히 먼저 설립된 조합과 나중에 설립된 조합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거의 보통명사처럼 쓰이는 제1노조는 소수파 노조를 지칭하며, 제2노조는 노사협조적 다수파 노조를 지칭한다. 이는 1950~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노사간의 사활을 건 장기간 쟁의가 조합 분열과 계급투쟁 패배를 거치며 만들어낸 역사적 산물이 오늘의 상황을 낳은 것이다. 직원층(화이트칼라)과 현장감독층을 중심으로 한 경영협조노선의 기업별조합 세력(제2노조)은 회사의 지원을 배경으로 다수파 조합이 되었고, 소수파인 제1노조는 소수파로 소멸하지 않고 생존한 결과 현재의 복수노조 병존 상황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사례 중 역사적으로 유명한 쟁의 사례는 일본 전기산업노동조합(약칭 電産), 일본철도노동조합, 닛산 자동차, 미이케 탄광 등이 있다.


협조적/실리적 제2노조의 출현, 산별노조에서 기업별 노조로

일본의 전후 노동운동은 산별노조를 정착시키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산별노조 건설은 일본 노동운동의 지상과제였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산별노조 운동은 1960년대의 노동운동의 패배를 거치며 기업별노조 체제로 정착되었고, 이 과정에서 복수노조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중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미쯔이(三井)광산 미이케(三池)광업소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미이케노조는 미쓰이탄광노동조합연합회의 핵심노조로서 ‘노동자의 자치구’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직장통제를 행해온 대표적인 사업장이었다.

미이케쟁의는 석탄위주에서 석유위주로 바뀐 일본의 산업정책에 따라 미쯔이(三井)광산 측에서 1959년 6,000명 가량의 구조조정을 단행한 데 대해, 1960년 1월 25일 미이케광업소 지부가 무기한 파업에 돌입하면서 시작되었다. 미이케 탄광의 해고 저지 투쟁은 총자본과 총노동 간의 일대 격돌의 장(場)이 되었다. 노동으로서는 당시 세계자본주의에 급속히 편입되며 진행되던 자본의 합리화 운동에 제동을 걸고 노사관계의 세력구도를 바꾸어 낼 결전장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석탄 업계와 경단련(經團連)에서도 그 중대성을 인식하고 공동기금의 마련 등을 통해 대응하였기 때문이다. 10개월에 걸친 이 투쟁은 미이케노조가 패배를 시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노동의 패배로 끝난 이 투쟁에서 이후 일본의 사용자측이 즐겨 사용한 제2노조 전술의 전형적인 패턴이 등장하였다. 미이케투쟁은 온건 제2노조가 사용자 측의 파트너가 되어 강성 제1노조를 무력화시키고 노조대표권을 확보하는 전형적인 패턴을 보여준다. 즉 “강성노조의 파업 투쟁 → 직장폐쇄 → 조합분열(60.3.17일 2,870명의 제2노조 결성) 및 제2노조의 취로 → 제1, 제2 양 노조의 충돌로 인한 형사사건의 발생 → 제1노조원의 공장 출입금지 및 생활고, 신분불안 증대로 인한 제1노조원의 격감 혹은 조합 소멸”이 바로 그 패턴이다.

이와 같은 경위를 거쳐 미이케탄광에는 제1노조(탄노 미이케노조)와 제2노조가 병존하는 복수노조 상황이 초래되었다. 그 후 제2노조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데는 회사의 조합차별정책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회사는 정기적인 승급, 상여, 승격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탄광노동의 특성상 임금수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직무배치(장소와 직무내용)에 있어서 제1노조 및 조합원에게 매우 불리한 차별을 했다. 제1노조의 주도 세력인 갱내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차별정책으로 인해 제1노조가 사실상 붕괴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투쟁의 패배와 뒤이은 노동조합의 분열을 통해 형식상의 산별조합 체제나 그 시도가 좌절되고 기업별조합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전까지 일본 노동조합의 조직형태는 형식적 차원에서는 산업별조합체제를 취하거나 이를 지향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분열에 의해 결성된 제2노조는 거의 예외 없이 기업별조합의 형태를 띄며 우파(동맹계)의 상부단체에 가맹하게 되었다.


사용자의 선택에 의한 노동조합 차별

일본의 복수노조법은 사용자의 노동조합 차별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노동조합 지배개입과 차별을 통한 부당노동행위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그 중에서 닛산 자동차의 사례는 단협을 통해 사용자에게 부여된 재량권 남용이 비협조적인 노조의 고사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1953년 당시 일본자동차산업의 산별노조인 전자동차산업노동조합(全自) 닛산분회가 5월 23일 전자동차의 통일요구인 ‘경험별(연령별) 최저보장임금제’ 요구에 더해 임시직의 본공 채용, 퇴직금제도의 개선 등 8개항 요구를 닛산 자동차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사용자는 이를 전면 각하하는 한편, 역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안을 제시하면서 1953년 닛산 자동차 쟁의가 시작되었다. 사용자가 역제안 한 의도는 당시 조합원이 현장감독자를 선출하고 생산계획이나 수당지급 등에 관해서 노조가 강력히 규제하는 직장관행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전자 닛산분회는 100일에 걸쳐 시한부파업, 무기한파업 등의 투쟁을 전개했지만 경영측의 단호한 직장폐쇄에 직면하여 전면 패배했다. 닛산분회는 4개월 여 만에 회사측의 요구안을 그대로 승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가장 강력한 자주적 직장통제로 유명했던 닛산분회가 패배한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도 역시 조합 분열이었다. 쟁의가 전개되는 가운데 의식적인 분열파(‘직장방위’ 조직)와 그에 호응한 사무․기술계의 직원층(조합원), 계장, 조장 등 현장감독층(현장직제층)을 중심으로 8월 30일에 닛산 자동차노동조합(닛산노조: 제2노조)이 기업별조합의 형태로 결성되었고, 직원 및 현장감독층의 탈퇴는 조합 분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탈퇴자가 생산현장의 평노동자까지 확대되는 상황에서 분회는 사용자측의 역요구를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쟁의 결과 회사가 조합활동에 지배개입 할 수 있는 경로가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제1노조와의 협정서를 보면 취업시간 중의 조합활동 일반은 금지되어 있지 않으나 회사가 승인 또는 허가하지 않는 조합활동 참가자에 대해서는 해당시간에 대해서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또 회사가 승낙하지 않는 집회 등은 회사에 신고하도록 되어 있다. 협정상 이 규정에 따르면 회사가 승낙하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조합활동이 금지되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말하면 회사가 승인하는 경우는 불취업시간에 대해서도 임금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이 협정서의 의도는 조합활동 전반을 회사 자신의 재량적 승인권의 범위 안에 두는 것이었다. 이와 동일한 내용의 협정이 제2노조와도 체결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 조문은 결국 회사의 재량에 의해 닛산노조와 닛산분회의 조합활동에 대해서 조합 차별을 할 수 있게 하는 근거로 이용되었다. 이 같은 조합 차별 등에 의해 1954년 12월에는 닛산분회(제1노조)가 소멸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전일본자동차산업노조(全自) 자체가 해산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의 노동운동은 투쟁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단협체결 위주의 양상에서 경영기반의 강화와 그 성과의 분배로 방점 이동이 이루어지게 되며, 이는 또한 협조적 노사관계로의 전환과 병행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동시에 산별노조 건설의 시도가 좌절하면서 기업별노조체제의 형성으로 귀결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복수노조라는 제도의 효과는 제도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계급 역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행 노동법에 대한 개정 투쟁을 벌여나가는 데 있어서도, 법 개정 자체를 넘어서는 사고와 기획이 필요할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복수노조 시대 민주노조 운동의 대응 방향에 대한 제언을 싣는다.(계속)




















연재 순서
<1회> 민주노조 운동, 복수노조 시대 맞을 준비됐나 (1월28일)
<2회> 복수노조시대 전망 1: 신규 노조 설립 (1월31일)
<3회> 복수노조시대 전망 2: 단체교섭 변화, 비정규직과 복수노조(2월7일)
<4회> 해외사례 1: 미국, 분권화된 경쟁구조를 중심으로 (2월10일)
<5회> 해외사례 2: 일본, 제2노조 활용한 노사협조주의와 기업별 체제(2월14일)
<6회> 복수노조 시대, 민주노조의 대응 방향에 대한 제언 (2월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