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8일 레디앙 원고]
http://www.redian.org/archive/32189


시리아 저항운동의 고민과 갈래들
[분석과 전망] 시리아 봉기 이후의 쟁점들


임필수 | 사회진보연대 반전팀

2011년 1월에 시작된 시리아 반정부 시위가 사실상 내전으로 전환되었다. 2012년 7월까지 사망자가 2만 명을 넘었다. 또한 1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15만 명이 주변국인 레바논, 터키, 요르단, 이라크에 설치된 난민 캠프에 수용되었다.
빠른 시일 내에 정부군과 반정부 세력 사이의 정치적 대화나 휴전, 중재가 이뤄질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인다. 유엔 특사 코피 아난은 8월 초 사임 의사를 밝혔고, 시리아에 파견된 유엔감시단 활동도 뚜렷한 해결책 없이 8월 16일 종료되었다.
시리아 봉기가 발생하자 서방 관측가들은 아사드 정권이 곧 붕괴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시리아 사태가 장기화되자 아사드 정권이 상당히 내구성이 있다며 정반대 입장으로 돌아섰다. 과거 수십 년 동안 시리아 정권은 통일적이고 응집력이 강했던 반면, 시리아 사회는 이질적이고 분할되어 있었다. 정권은 종파, 부족, 계급, 지역에 따라 시리아 사회를 분할하기 위해 수십 년간 노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시리아에서 현재 벌이지고 있는 전투가 '대리전'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시리아 분쟁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 전략적 경쟁을 지역적 배경으로 한다. 또한 미국과 러시아의 긴장은 그 적대관계를 강화한다. 지역적, 국제적 경쟁, 적대관계는 시리아를 점점 더 고강도 폭력으로 이끌 가능성이 크다.

누가 시리아 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는가?

시리아 정권을 지지하는 세 부류의 핵심 집단이 있다. 군사·정보기관의 고위 인사, 신흥 자본가 계급, 모든 종교 분파의 고위 인사.
전 대통령 하피즈 아사드는 1970년대 정권을 장악한 후 군부와 정부 관리들의 거대한 부패를 용인했다. 특히 대통령의 가족과 가장 충성스런 보좌진을 포함한 이너서클은 국가기구를 현금인출기처럼 사용했다.
또한 국가와 연계된 신흥 자본가계급은 다양한 부문에서 부를 축적했다. 1991년 투자법은 신흥계급의 돈 세탁을 위한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법령은 사적 부문 투자를 허용하고 수출입 산업을 장려했다. 하지만 여전히 경제는 국가 통제 하에 있었고 부패가 만연한 시스템이 지속되었다. 2000년 바샤르 알아사드가 권력을 인수한 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소규모 과두세력에 큰 이익을 주었다. 바샤르의 사촌인 라미 마클르푸는 정권이 주도한 마피아 스타일의 사유화를 대표한다. (그는 시리아 전기통신 사업을 지배한다.) 사유화 과정은 바샤르 친족에 의한 부의 독점을 창출했지만 상품, 서비스의 질은 하락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상위 계급과, 특히 아랍 걸프 지역의 외국인 투자자는 큰 이익을 얻었지만 시리아 민중의 다수는 인플레이션과 생계비 상승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시리아의 농업부문과 공공부문이 쇠퇴했지만, 그 부문을 강화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이 제시되지 않았다.
모든 종교 분파의 고위 인사들도 지난 20년간 정권으로부터 큰 이익을 얻었다. 시리아 정권과 보안기구는 특히 1980년대 이후로 수니파 공동체를 포함해 종교 인사들과 정치적, 경제적 연계를 구축했다. 시리아 정권의 행동은 시리아가 세속국가라는 공식적 입장과 완전히 모순된다. 정치담론에서 종교 용어가 점점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또한 1980년대 이후로 종교 사원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1만 개의 이슬람 사원과 수백의 이슬람 학교가 건설되었다. 문학, 예술에 대한 검열은 늘었으나 종교 서적이 도서관을 채우고 고등교육에서 이슬람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반정부 세력은 누구인가?

시리아 봉기가 전개되는 과정에 적극적인 시위 참여 청년들을 주축으로 삼는 세 개의 전국적 집단이 형성되었다. 시리아지역조정위원회(LCC)는 2011년 3월에 설립된 조직으로 시리아 봉기를 조직하거나 그에 관한 정보를 교류하는 지역 집단들의 네트워크다. 시리아 봉기의 ‘중추’라는 평가를 들었다. 네트워크는 매우 다양한 종교적, 계급적 배경을 지닌 청년 시위자들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지역위원회는 다마스쿠스 외곽의 다라야에서 구성되었고 그 후 홈스에서 구성되어 2012년 2월 현재 총 14개 지역에 구성되어 있다. 지역조정위원회는 시민불복종 운동이나 총파업을 호소하며 평화적 운동을 지지한다. 지역조정위원회는 2011년 8월 무장저항과 국제사회의 군사개입에 호소하려는 경향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군사화는 대중적 지지와 도덕적 우월성을 감소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조정위원회는 평화적 시위가 혁명 후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더 좋은 조건을 창출할 것이며, 군사화는 시리아 사회를 위한 적법한 기초의 창출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하나의 전국조직 중 하나인 시리아혁명최고평의회(SCSR)도 주로 청년들로 이뤄진 단체다. 최고평의회는 정치적 해결책이 필요하지만 무장투쟁의 중요성도 인정한다는 점에서 지역조정위원회과 구분된다. 최고평의회는 시리아민족위원회(SNC)에 대표를 보냈지만, 공식 구성원은 아니다.
시리아혁명총사령부(SRGC)는 2011년 8월 19일 터기 이스탄불에서 창립을 선언했다. 총사령부는 시리아 내부 40개 조직이 연합한 조직이다. 혁명총사령부는 지역 군사위원회를 통한 무장 반락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또한 앞의 두 조직과 달리 시리아민족위원회(SNC)와의 협력을 거부했다. 민족위원회가 끝없는 내부 권력다툼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존 야당의 재편: 민족조정위원회와 시리아민족위원회

시위 확대 와중에 기존 야당 세력도 재결집을 이뤘다. 먼저 2011년 6월, 30여 년간 정권의 탄압을 받던 야권 정당과 인사들은 다마스쿠스에서 <민주적 변화를 위한 민족조정위원회>(NCC) 결성을 선언했다. 조정위원회에는 민족민주회의(RND)를 비롯해 좌익 정당들과 쿠르드 정당이 속해 있다. (<민족민주회의>(RND)는 1970년대 말 바아스당과 협력을 거부하는 좌익성향의 야권 세력을 조직하기 위해 결성된 조직으로 시리아 공산당(정치국파), 아랍혁명노동자당, 아랍사회주의부흥민주당, 아랍사회주의자 운동, 민주아랍사회주의동맹이 참여했다.)
조정위원회는 정치범 석방, 군사행동 중지, 독립적인 조사위원회 설립, 발포책임자 처벌, 긴급조치 해제, 즉결처벌 중지, 평화적 시위 인정, 헌법 8조 폐지를 정부가 받아들인다는 필수적인 조건 하에 정부와 야권 세력 간의 진지한 대화를 촉구했다. 또한 9월에는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고 세 가지 구호를 제시했다. '폭력 행위 반대, 군사적 개입 반대, 종파주의 반대'.
따라서 전국조정위원회는 결성 시점부터 정권 퇴진을 우선시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예를 들어 11월 11일 일단의 반정부 운동가들은 조정위원회가 시리아 전역의 시위대들을 대표하지 못하며 많은 운동가들은 위원회가 정부 측에 기울어져 있다고 비난했다. 심지어 몇몇 운동가들은 조정위원회가 정권의 수족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한편 2011년 8월 23일에는 터키 이스탄불에서는 시리아민족위원회(SNC) 구성이 선언되었다. 민족위원회는 시리아 국내외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민족위원회는 시리아 인민이 직접 위원을 선출하지 않았지만, 시리아 인민의 관심사와 요구를 대표한다고 선언했다. 2011년 10월 2일에는 총회, 사무총장, 집행위원회를 포함하는 조직 구성을 결정했다.
SNC에는 무슬림형제단의 망명자 집단, <다마스쿠스 선언>, 아시리아민주조직, 일부 쿠르드 조직, 지역조정위원회(LCC) 등이 참여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민족민주회의는 2008년에 다마스쿠스 선언 조직이 "피상적인 행동, 소수 집단과 인물에 의한 독점으로 인해 어떤 목적도 달성하는데 실패했고 아랍-이슬람 정치 동맹으로의 변질되었다"며 탈퇴하였다.) 민족조정위원회와 시리아민족위원회에 각각 참가하는 단체는 거의 중복되지 않는다. 민족위원회는 자신이 시리아 저항세력의 약 60% 정도를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부 성원은 민족위원회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주의자라고 주장했다.

평화시위와 무장투쟁

정권이 행한 고강도의 억압과 학살에도 불구하고 민중운동은 초기 몇 달간 평화적 운동으로 남아 있었다. 간혹 일부 시위대가 폭력을 사용했지만 이는 보안기구의 광적인 폭력 도발에 대한 개별적 대응이었고, 민중운동의 지도자들은 폭력을 통제할 능력을 지녔다. 2011년 12월 총파업과 시민불복종 운동도 큰 성공을 거뒀다. (정부발표로도 2011년 1월부터 2012년 2월까지 85,000명의 노동자가 해고되었고 187개 공장을 폐쇄했다.)
보안기구는 민중운동의 폭력을 유도하는 간계를 부렸다. 평화시위대에 대한 학살을 정당화하며 자신이 ‘테러집단’과 대치 중이라고 선전하려는 의도였다. 정권은 두 가지 방식을 활용했다. 첫째, 보안기구와 무기상인의 관계를 이용해 시민들이 값싼 경무기를 손에 얻기 쉽게 했다. 둘째, 시위 중 살해, 감옥에서의 처형, 지도자 구금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지도부를 제거했다. 이는 보안기구와 무장투쟁을 선호하는 새로운 지도부의 등장을 가능케 했다. 국외에서 무장투쟁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커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군대 사병들의 탈영이 늘어나지 않았다면 민중운동은 평화적 시위를 유지했을 것이다.
시리아 군대의 지휘부와 부대들은 하피즈 아사드 시절에 구성되었는데, 어떤 반란이나 집단 불복종이 어려웠다. 하지만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민중운동을 야만적으로 탄압하라는 임무가 주어졌을 때 군인이 이를 거부하고자 한다면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으로서 반란을 선택하는 길 밖에 없었다. (또한 혁명에 동조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수천 명의 장교가 투옥된 것으로 알려졌다.)

시리아민족위원회와 자유시리아군의 공조

자유장교운동은 2011년 7월 정부군에서 이탈한 후세인 하르모쉬 중령에 의해 설립되었다. 한편 자유시리아군(FSA)은 2011년 7월 29일 정부군에서 이탈한 알아스아드 대령 및 장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9월 23일, 아스아드 대령은 FSA와 자유장교운동이 하나의 군사 지도부 아래로 통합되었다고 발표했으며 11월 14일 시리아 내의 최고군사지휘권을 가지는 군사위원회의 결성을 선언했다. 군사위원회는 FSA에 가담하지 않는 군인 및 보안군에게 처벌을 가할 권리를 부여했으며, 민간인 피해에 가담하지 않은 모든 군인 및 보안군이 즉각 FSA에 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자유시리아군에는 탈영병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참여하고 있다. 자유시리아군의 민간인 자원병들의 다수는 하층계층 출신이다. 그들은 혁명에 대한 열정으로, 또는 보안기구의 추적을 피해서 자원했다.
2011년 10월 SNC는 리비아 시나리오가 시리아에서 반복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민족위원회는 저항의 군사화를 경고하고 시민불복종 행동의 확대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민족위원회는 입장을 변경했다. 현재 저항세력이 선택할 수 있는 두 개의 길은 ‘지역 저항의 더 강한 군사화’ 또는 ‘외국의 개입’인데 중국과 러시아가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개입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군대 내부 이탈이 확대되는 맥락에서 민족위원회는 자유시리아군과 협약을 체결했다. 자유시리아군을 시리아 내부에서 전투를 벌이는 반군 단위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민족위원회는 반군을 지지하는 것이 반정부 세력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민족위원회는 자유시리아군에 직접 무력을 지원하지 않지만 자유시리아군을 유지하기 위한 기금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2012년 1월 중순 시리아 국가위원회는 FSA의 지도부와 연계된 사무국 설립을 선언했다.

시리아 봉기 향후 전망

시리아 봉기의 전개과정은 점점 더 리비아를 닮아가고 있다. 평화시위에 대해 정권의 폭압이 가해지고 이에 대응해 무장투쟁이 전개되고, 해외에서 기존 야당들로 구성된 정치기구가 강대국과 채널을 형성해 외국의 군사개입을 호소하고 있다. 반면 시리아 아시드 정권은 훨씬 다른 아랍 정권들에 비해 견고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바아스당, 군부, 대기업가, 고위 종교인사들로 구성된 정권 지지기반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리아 봉기는 중대한 쟁점들을 낳고 있다. 첫째, 평화시위와 무장투쟁이라는 쟁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리아 내부에서 형성된 전국조직들도 무장투쟁에 대한 지지와 참여 여부를 두고 큰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어느 관측가는 이렇게 말했다. “초기에 대부분 자발적인 저항운동을 지지한 빈민, 실업자 그리고 대학생은 이제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부분적으로 정권의 억압 때문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나토-사우디-카타르 그리고 특히 무슬림 형제단이 주도하는 시리아국민회의(SNC)와 자유시리아군(FSA) 등 반대 진영의 군사화에 대한 반대 때문이다.”
둘째, 시리아 국내에서 무장투쟁이 강화될수록 외국의 군사개입을 지지하는 경향과 반대하는 경향 사이 갈등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이제 미국은 반군을 간접적으로 지지하는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미국은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완전한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시리아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7,400만 달러로, 통신장비 등 '비살상' 원조금을 2,500만 달러로 증액했다. 미국 재무부는 자유시리아군을 대표해 워싱턴에서 활동하는 시리아지원단(SSG)의 반군 지원 모금활동을 허용했다. 미국 중앙정보부(CIA) 등 정보기관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비밀명령에 따라 반군을 지원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바아스당은 아랍민족주의, 반제국주의에 뿌리를 둔 이데올로기로 외국 침략자에 저항한다는 명분으로 지난 수십 년 간 당원을 동원했다. 수백 명의 당원이 비폭력 시위자 살해에 항의하며 탈당했지만, 외국의 군사개입이 노골화된다면 더 이상의 탈당은 거의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강대국의 힘에 호소해 바샤르 정권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정권 지지 집단들의 결속력은 강화시키면서 역으로 민중운동의 정치적 분열을 가속화시킬 위험이 있다.
셋째, 현재 국제사회가 대체로 지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시리아민족위원회의 정통성 문제다. 시리아 봉기를 주도한 시리아 내부 집단들은 민족위원회 결성 당시 지지를 표했지만, 이는 민족위원회의 강령이나 그 내부 구조에 동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모든 경향을 대표하는 구조 내부에서 통일성과 집중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민족위원회는 민중운동을 지지하고 활성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약속했으나 점점 민중운동으로부터 멀어졌다. 민족위원회는 리비아의 경험에서 영감을 얻어서 주로 강대국의 영향력에 호소할 뿐, 혁명운동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짧은 시간 내에 시리아 봉기가 바샤르 정권의 퇴진과 시리아 사회의 급진적 전환을 성취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사우디와 이란의 적대관계와 미국과 러시아의 긴장관계는 시리아 내전을 격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시리아 봉기를 이끌었던 ‘아랍의 각성’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초기 시위를 주도했던 시리아 대중운동이 봉기 이후 가장 큰 위기에 처한 현재 시점에 어떤 운동을 선택할지 주목해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