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봄 이후, 시민사회는 중동을 어떻 게 바꾸고 있을까?
『아랍의 봄 그 후 10년의 흐름』, 『중동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 선』
1. 들어가며
2010년대 중동 지역에서는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시위의 물결이 일었다. 이 흐름 속에서 경직된 아랍 사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싹텄다. 그러나 아랍의 봄 이후에도 많은 아랍 국가에서 분쟁이 격화되거나 또 다른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시민사회는 탄압과 감시를 받았고, 민주주의는 오히려 후퇴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로 인한 정치적 공백과 혼란 속에서 일부 지역에서는 이슬람주의를 비롯한 종교적 극단주의가 세력을 키워가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일부 제도를 이식한다고 해서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중동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와 그에 맞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특히 최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충돌 등 중동 내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중동 사회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이번에 국제정치 독서모임 ‘책으로 여는 세계’에서 『아랍의 봄 그 후 10년의 흐름』(이하 『흐름』)을 읽으며 그 단초를 얻을 수 있었다. 나아가 최근의 상황과 중동 시민사회에 대해 더 알고자 같은 저자들의 후속작인 『중동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시민사회의 힘, 그리고 미래』(이하 『시선』)도 함께 읽었다. 중동과 중동 시민사회 운동의 역사와 현재를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이 두 권의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랍의 봄 그 후 10년의 흐름』
지은이: 구기연, 김강석 외
출판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출간일: 202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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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시민사회의 힘 그리고 미래』
지은이: 구기연, 한하은 외
출판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출간일: 2025.12.10.
두 책은 비슷한 듯 보이면서도 아랍의 봄 이후의 상황을 조금 다른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다. 『흐름』은 국가와 제도, 권력 구조를 중심으로 현실의 한계를 드러낸다면, 『시선』은 시민과 네트워크, 일상의 실천을 통해 가능성을 발견한다. 첫 번째 책이 “왜 변화가 좌절되었는가?”를 묻는다면,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계속되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이어질 내용은 두 책을 토대로, 아랍의 봄부터 최근까지 아랍 각국의 정치 상황과 시민사회의 대응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이 중동과 그 시민사회를 이해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2. 아랍의 봄과 시민사회의 성장
1) 튀니지
2010년 말,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역을 뒤흔든 아랍의 봄은 수십 년간 이어진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민중의 거대한 항거였다. 그 가운데 튀니지는 비교적 평화로운 방식으로 민주주의 이행을 이뤄낸 나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혁명으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지금, 튀니지의 민주주의는 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중부 소도시 시디 부지드의 청년 무함마드 부아지지가 경찰에게 수레를 빼앗긴 뒤 분신을 감행했다. 스물여섯, 대학도 못 가고 가족의 생계를 혼자 짊어진 채 하루하루를 버티던 그의 선택은 수백만 튀니지 청년의 삶을 압축한 것이었다. 분신 다음 날부터 주민들이 거리로 나왔고, 소셜 미디어를 타고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다. 결국 2011년 1월 14일, 23년간 집권했던 벤 알리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하면서 아랍의 봄의 서막이 올랐다. 두 책 모두 이 사건이 단순한 우발적 봉기가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1984년 빵 폭동, 1987년 총파업, 2008년 가프사 광산 지역 민중 봉기 등 오랜 저항의 전통이 쌓여 있었고, 튀니지노동총연맹(UGTT)을 비롯한 시민사회 조직들이 그 동력을 유지해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튀니지가 아랍 혁명의 진원지가 된 데는 이 나라만의 구조적 조건이 있었다. 튀니지는 지중해 남단에 위치한 개방적 문명의 공간으로, 중동에서 튀르키예와 함께 현대화·서구화가 가장 앞선 나라였다. 독립 이후 대통령 부르기바는 여성 해방과 종교적 관용을 앞세운 사회 현대화를 추진했고, 군부가 탈정치화되어 있어 혁명 이후 군이 민주화를 가로막는 이집트식 시나리오를 피할 수 있었다. 이슬람주의 정당 엔나흐다 역시 다른 지역의 극단적 이슬람주의와 달리 온건하고 민주주의와 공존하는 노선을 표방해왔다. 마그레브라는 지역적 특수성도 중요하다. 프랑스 식민 지배를 공통으로 경험한 북아프리카 3국은 문화적·정치적으로 서구화가 더 진척된 반면 경제적으로는 더 취약하다는 평가가 있으며, 이것이 아랍의 봄이 중동보다 북아프리카에서 먼저 본격화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혁명 이후 튀니지는 아랍의 봄에서 민주주의 이행에 성공한 사례로 평가받았다. 2011년 10월 최초의 자유 선거, 2014년 새 헌법 제정, 엔나흐다와 세속 정당 간의 평화로운 연립 정부 구성이 이어졌다. 2015년에는 UGTT·튀니지인권연맹·튀니지변호사협회·튀니지 제조업상업수공업연맹으로 구성된 '국민 4자 대화기구'가 정치적 교착 상태를 중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시민사회에도 전례 없는 활력이 찾아왔다. 2011년 9월 제정된 새 민간단체법은 허가제를 신고제로 바꾸어 단체 결성의 문턱을 대폭 낮췄고, 그 결과 약 25,000개의 민간단체가 생겨났다. 독립 언론이 창설되고 성소수자 문제가 공론화되었으며, 인권·여성·환경·사회적 경제 등 새로운 영역으로 시민사회의 활동 범위가 크게 확장되었다. 2023년에는 사회연대경제법이 제정되어 협동조합·마을 기업·사회적 기업 등 아래로부터의 경제적 혁신에 법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화가 경제적 삶의 개선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청년 실업률은 2021년 기준 남성 15.4%, 여성 23.6%에 달했고 대졸자 실업률은 더 심각했다. IMF 구제금융의 대가로 강요된 긴축 재정과 공공 부문 삭감은 민중의 삶을 옥죄었다. 코로나19는 GDP를 8.6% 감소시키며 상황을 악화시켰다. “정치적 자유는 신장됐지만 물질적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평가가 현실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경제적 절망은 기성 정치권 전반에 대한 환멸로 이어졌다. 이슬람주의 세력과 세속 세력 간 이권 다툼의 장으로 변질된 의회 정치에 국민은 점차 등을 돌렸다.
엔나흐다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정당의 연계 단체들은 2011년 민간단체법 도입 이후 급격히 세를 불렸고, 인권·여성 분야의 세속적 단체들과 “누가 진정한 시민사회인가”를 놓고 상징 투쟁을 벌여 왔다. 여기에 외부 세계의 개입이라는 변수도 작용한다. 국제기구·외국 정부·이슬람권 자금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특정 단체들을 선택적으로 지원하면서, 시민사회 내부의 분열과 외부 종속성을 동시에 심화시켰다.
2019년 대선에서 기성 정치권과 무관한 법학자 카이스 사이에드가 당선된 것은 이러한 환멸의 산물이었다. 2021년 7월 25일, 그는 총리 해임·의회 기능 정지·다수 의원 체포라는 초유의 조치를 단행했고, 국민의 94.9%가 지지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깊은 환멸을 반영했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건설’이라는 구호 아래 추진된 그의 정책은 역설적으로 권위주의의 전형이 되어가고 있다. 2022년 새 헌법은 94.6%의 찬성으로 통과됐지만 투표율은 30%에 불과했고, 2024년 대선에서 사이에드는 29%의 투표율에 90%가 넘는 득표율이라는 기이한 결과로 재선에 성공했다.
민간단체법 개정 시도는 이 흐름의 핵심이다. 개정안이 발효되면 국가가 단체 설립과 운영에 광범위하게 개입할 수 있게 되고, 외국 자금 지원에는 총리의 사전 허가가 필요해지며, 총리가 사법 절차 없이 단체를 해산할 수도 있게 된다. NGO를 “외세의 조력자”나 “자금 세탁 범죄 집단”으로 몰아붙이는 사이에드의 전략은, 시민사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전 세계 권위주의 정권들이 공통적으로 구사하는 수법과 같다. 아직 새 법이 제정되지 않았음에도 민간단체들의 활동은 이미 크게 위축되고 있다.
두 책은 모두 튀니지의 민주주의를 “완결된 성공”이 아닌 “불안정한 이행 과정”으로 평가한다. 경제 위기, 실업 문제, 정치 엘리트에 대한 불신이 쌓이면서 대중의 불만이 커졌고, 이는 포퓰리즘 정치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결국 최근에는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과 의회 약화로 인해 권위주의 회귀 가능성까지 제기되는 상황으로, 시민사회의 역할이 앞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 이집트
2011년 1월 25일,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 수십만 명이 모였다. 히잡을 쓴 여성, 흰 가운을 입은 의대생, 십자가를 든 기독교인, 무슬림. 계층과 종교와 성별을 가로질러 이집트 시민들이 한목소리로 30년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의 퇴진을 요구했다. 시위는 18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졌고, 2월 11일 군부는 무바라크 정권의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이 시위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2010년 6월 알렉산드리아의 청년 칼리드 사이드가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해 말 알렉산드리아 교회 건물 폭탄 테러였다. 평범한 시민이라면 누구든 사이드처럼 될 수 있다는 공포와 분노, 그리고 오랫동안 쌓인 빈곤·부패·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튀니지 혁명이라는 정치적 기회를 만나 폭발했다. 시위는 특정 리더십이나 조직이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광장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강렬한 집단 감정이 18일간의 저항을 가능하게 했다. 종교 차이로 때로 분열되던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광장에서 손을 잡고 바리게이트를 지켰다.
두 책 모두 2011년 혁명이 돌발적 사건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집트 시민사회의 저항 전통은 영국 식민 통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9년 민족주의 운동, 1946년 학생-노동자 연합체의 카이로 시위, 1952년 군부 쿠데타의 발판이 된 민중운동이 그 뿌리다. 독립 이후에도 나세르·사다트·무바라크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군부 출신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시민사회는 저항을 반복했다. 특히 2000년대 마할라 엘쿠브라 섬유 노동자 파업, 1977년 빵 폭동 등은 ‘빵, 자유, 정의’라는 구호가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것임을 보여준다.
무바라크 대통령이 퇴진한 후 이집트는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듯 보였다. 2011년 말 총선에서 무슬림형제단의 자유정의당과 살라피 누르당이 의석의 70% 이상을 차지했고, 2012년 6월 무함마드 무르시가 이집트 최초의 민주적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무르시 정권은 단명했다. 광범위한 대통령 권한을 부여하는 헌법 개정, 경제 실패, 다른 정치 세력 배제 등으로 깊은 정치적 양극화를 초래했다. 2013년 6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고, 7월 압둘 팟타흐 엘시시 장군이 이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무슬림형제단은 테러 단체로 지정되었고 수천 명이 체포·살해되었다. 탄압은 곧 군부 행동을 비판하는 모든 정치세력으로 확대되었다.
군부가 이토록 쉽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이집트 현대사의 구조적 특성 때문이다. 나세르부터 무바라크까지 모든 대통령이 군 출신이었고, 군부는 국내 경제에서도 막강한 이권을 가진 거대 기업 집단으로 성장해 있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무르시 정권을 무너뜨린 군부의 귀환은, 수십 년간 이집트 정치의 핵심이었던 군부를 권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보여준다.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된 엘시시는 이후 2019년 헌법 개정으로 임기를 연장해 2030년까지 집권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정권하에서 시민사회 탄압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 전면적이고 체계적이었다. 2017년 제정된 NGO 법은 외국 단체와의 소통·협력에 최대 5년 징역형을 부과하고, NGO의 활동 범위를 ‘비영리 사회개발’로만 제한했다. 2019년 시민단체 활동을 제약하는 법안이 추가로 시행되었고, 국가 비상사태는 2021년 10월까지 지속되었다. 신성모독법은 정권 비판을 불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성소수자에 대한 체포·고문도 이어졌다. 경찰에 끌려가던 중 ‘블루 브라 여성’ 사건은 국제 언론에 보도되며 이집트 여성 인권의 현주소를 세계에 알렸다.
종파 갈등도 심화되었다. 2013년 무르시 축출 이후 기독교인이 표적이 되어 2013년 8월 한 달에만 미냐 지역에서 교회 80여 개가 불에 탔다. 엘시시는 집권 이후 친기독교 제스처를 취했지만,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폭력과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경제 상황 역시 나아지지 않았다. 2013년 청년 실업률은 38.9%에 달했고, 신자유주의 정책이 야기한 빈곤과 불평등은 혁명 전과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선』은 거리 시위와 광장 점거가 불가능해진 시대에 시민사회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에 주목했다.
2011년 혁명 이후 이집트에서는 청년들이 주도하는 사회적 기업이 급증했다. 전자 폐기물 재활용 업체 리사이클로베키아, 농촌 지역 교육을 위한 유치원, 사회 혁신 플랫폼 어헤드 오브 더 커브 등이 그 사례다. 이들은 혁명의 정신과 창의력을 핵심 가치로 삼고, 교육·환경·의료·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 변화를 모색한다.
엘시시 정권도 사회적 기업을 완전히 억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권은 청년들의 변화 욕구가 반정부 시위로 이어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사회적 기업을 친정권적 공간으로 유도하려 한다. 베다야, 페크레탁 셰르케탁 같은 정부 인큐베이터가 그 도구다. 그러나 많은 청년 활동가들은 역으로 이 공간을 전략적으로 활용한다. 비영리 시민단체 대신 영리 법인으로 등록하거나, 공식 단체 등록이 필요 없는 ‘모바다라(이니셔티브)’ 형태로 활동함으로써 당국의 감시를 피하면서 인권·민주주의·사회정의의 가치를 실천하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수익 창출을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구조적 변화를 지향하는 활동, ‘조용한 혁명’을 이어간다. 그러나 사회적 기업이 구조적 변화가 필요한 문제를 개인의 창업 문제로 축소시킨다는 비판, 정권이 이를 또 다른 통제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우려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집트의 오늘은 혁명이 끝난 것도, 계속되는 것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3) 시리아
2011년 3월, 시리아 남부 소도시 다라의 담벼락에 10대 학생 10여 명이 아사드 정권을 비판하는 낙서를 남겼다. 시리아 정권은 곧바로 이 아이들을 체포했고, 10~15세의 어린 학생들은 옥살이와 고문을 겪어야 했다. 소식이 퍼지면서 거리로 나서는 시민이 늘었고, 3월 25일 다라의 거리에는 수십만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이를 외부 세력의 사주로 규정하며 강경 진압을 명령했다. 정보기관 무카바라트는 시위 주동자를 색출해 고문하고 살해했다. 13세 소년 함자 알카티브의 끔찍한 시신 영상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공개되면서 아사드 정권의 야만성이 전 세계에 알려졌고, 저항의 불길은 더욱 거세졌다.
반정부 시위는 라타키아, 하마, 홈스 등 전국으로 번졌다. 7월에는 퇴역 장교 리아드 알 아사드가 자유시리아군(FSA) 결성을 주도했고, 8월에는 튀르키예에서 시리아국민의회(SNC)가 창설되었다. 정부군과 반군의 교전이 격화되면서 시리아는 내전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2012년 7월 유엔은 시리아가 내전에 돌입했음을 공식 선언했다. 아이들의 낙서에서 시작된 시위가 초유의 내전으로 비화할 것을 처음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흐름』은 시리아 내전이 단순한 민주화 운동과 독재 정권의 대립이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아사드 정권은 반정부 시위를 처음부터 알라위파 대 수니파의 종파 갈등으로 규정했다. 알라위파는 시리아 인구의 10% 정도를 차지하는 이슬람 소수 종파로, 알라위파였던 아사드 정권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종파주의 프레임을 의도적으로 활용했다. 정권이 무너지면 기독교인을 포함한 소수 종파가 위협받는다는 논리로 지지 기반을 다졌고, 반군에 대해서는 ‘급진 수니파 테러리스트’라는 낙인을 찍었다.
반정부 시위대 역시 이 함정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알라위파를 무덤으로”라는 구호가 등장하고, 일부 이슬람주의 세력은 알라위파를 이단시하는 지침을 발표했다. 다양한 세속주의 세력을 포괄했던 시리아국민의회도 종파주의 담론의 압력 속에서 다양성을 잃어갔다. 쿠르드 세력은 향후 독립 움직임에 대한 우려로 반군과 연대를 이루지 못했다. 결국 종파주의의 소용돌이는 시리아 반군 내 세속주의 요소를 잠식했고, 내전을 더욱 복잡하고 해결 불가능한 방향으로 몰아갔다.
국제 사회의 개입은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키기도 했는데, 특히 오바마 대통령은 아사드가 물러날 때가 됐다고 공개 선언하면서도 직접적인 군사 행동은 주저했다. 2013년 8월 화학 무기 공격으로 1729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자 ‘레드라인을 넘었다’고 경고했지만 실제 군사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런 일관성 없는 대응은 반군 진영의 사기를 꺾고 아사드 정권의 생존 가능성을 높였다.
오바마 행정부의 대시리아 전략은 ISIS가 등장하자 변화했다. 2013년 9월 ISIS가 시리아와 이라크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미국의 국가 안보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했고, 오바마 정부는 군사 개입을 선언한다. 미국이 아사드 정권에 맞서 싸우던 ISIS 등 이슬람 급진주의 세력을 격퇴하는 데 집중하는 사이, 아사드 정권의 시리아 정부군은 그 틈을 타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여기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가 시리아 정권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음모론이 확산되면서 아사드 지지자들의 결속은 한층 강해졌다. 그리고 미국이 ISIS 격퇴에 집중하면서 아사드 정권에 맞서던 시리아 반군에 대한 지원은 점차 소홀해졌다. 오바마 행정부의 군사 개입은 ISIS 격퇴라는 목표는 달성했지만, 역설적으로 반군을 약화시키고 아사드 정권의 생존에 기여함으로써 시리아 내전을 더욱 장기화시키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2015년 9월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면서 판세가 완전히 뒤집혔다.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 솔레이마니의 모스크바 방문을 계기로 러시아-이란 동맹이 아사드 정권 지원에 나섰다. 러시아 공군의 지원을 받은 시리아 정부군은 알레포, 팔미라, 홈스를 차례로 탈환했다. 2017년에는 아스타나 프로세스를 통해 러시아가 외교 무대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했다. 러시아의 개입이 없었다면 아사드 정권은 이미 무너졌을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시선』에서는 앞서 보았듯 정부도, 국제사회도 시민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리아 시민사회가 스스로 ‘구조 자원봉사 단체’라는 해법을 만들어 낸 것에 주목했다. 2012년 말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난 구조 자원봉사 단체들이 2014년 10월 하나로 통합되면서 시리아민병대, 즉 ‘화이트 헬멧’이 공식 탄생했다. 제빵사, 약사, 소방관, 엔지니어 등 평범한 시민 2,900명이 하얀 헬멧을 쓰고 폭격 현장으로 달려갔고, 처음에는 아무런 장비 없이 맨손으로 잔해를 파헤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한 생명을 구하는 자는 모든 인류를 구하는 자와 같다”는 쿠란의 원칙을 운영 철학으로 삼았다.
화이트 헬멧은 지금까지 11만 5천 명 이상의 생명을 구했다. 구조 활동에 그치지 않고 화학 무기 공격과 민간인 폭격의 증거를 수집·공개하면서 ‘전환기적 정의’를 세우는 역할도 맡았다. 2016년 스웨덴 바른 삶 상을 수상하고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면서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그러자 아사드 정권과 러시아는 화이트 헬멧을 테러 단체로 매도하는 허위 정보 캠페인을 벌였다. 한 연구는 러시아의 화이트 헬멧 공격이 러시아의 시리아 공습 확대 시기와 정확히 맞물렸음을 밝혀냈다. 민간인 폭격의 책임을 숨기기 위한 눈가림이었던 것이다.
2023년 대지진이 시리아 북부를 강타했을 때도 화이트 헬멧이 먼저 나섰다. 정부는 여전히 반군과 교전 중이었고, 일부 국제 구호단체는 화이트 헬멧이 비정부기구라는 이유로 지원을 거부했다. 3000명의 자원봉사자가 지진 잔해를 헤치며 생존자를 찾았다. 미 국무장관 블링컨은 이를 ‘영웅적 노력’이라고 평가했다.
2024년 12월, 마침내 아사드 정권이 붕괴했다. 화이트 헬멧 대표 라에드 살레흐는 시리아 신정부의 환경·비상·재난관리부 장관직을 맡았다. 10년 넘게 폐허 속에서 쌓아온 노하우가 이제 시리아 재건의 토대가 되고 있다. 아사드 정권이 무너진 지금, 화이트 헬멧이 신정부의 재건을 이끌게 된 결말은 그나마 이 긴 비극에 남겨진 작은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4) 예멘
2011년 1월, 튀니지에서 벤 알리가 축출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예멘 수도 사나의 사나대학교 학생 수천 명이 40년 가까이 집권해 온 알리 압둘라 살레흐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실업률 30%, 빈곤율 45%에 달하는 아랍 최빈국에서의 봉기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시위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회 집단이 참여하면서 예멘 통일 이후 최대 규모로 확대되었다. 특히 여성들이 보수적 이슬람 규범을 깨고 남성과 함께 광장에 나선 것은 전통적인 남녀 분리 규범에 도전하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3월 18일 정부 저격수들이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50명 가까이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군부 핵심 인사 알리 무호신 알아흐마르 장군이 편을 바꾸어 시위대를 지지하고 나섰다.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살레흐 정권은 결국 걸프협력기구(GCC)의 중재안을 수용해 2012년 2월 권력을 부통령 하디에게 이양했다. 40년 가까이 집권한 독재자가 물러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듯 보였다.
그러나 예멘의 위기는 살레흐 한 사람의 퇴진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흐름』은 예멘을 뒤흔든 갈등의 뿌리가 역사 속 깊이 박혀 있음을 보여준다.
예멘은 18세기 이후 남예멘과 북예멘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시아파의 한 분파인 자이드파가 우세한 북부와 수니파가 다수인 남부는 각각 다른 역사적 궤적을 밟았다. 1990년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이는 진정한 통합이 아니었다. 북부 출신 정치인과 부족이 더 많은 권력을 장악했고, 남부 출신 정치인들의 불만은 2008년 남부 분리 요구 시위로 이어졌다. 살레흐는 부족주의를 권력 유지의 도구로 활용했다. 부족에게 자금과 특권을 제공하며 지지 기반을 구축했고, 그 결과 부족은 예멘 사회에서 국가를 대신하는 핵심 행위자로 자리 잡았다.
예멘 갈등의 또 다른 핵심 축은 후티 운동이다. 자이드파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후티 운동은 1990년대 수니파 계열인 살라피주의와 와하비파의 확산에 맞서 자이드파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탄생했다. 2003년 살레흐 정권의 대미 협력을 비판하며 반정부 노선을 공개화한 후티 운동은 2004년 정권의 무력 진압으로 지도자 후세인 알 후티가 사살되면서 본격적인 무장 반군으로 변화했다. 이후 6년간의 전쟁으로 수천 명의 인명 피해와 3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후티 전쟁은 단순한 종파 갈등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앙정부와 소외된 지방 사이의 갈등이자, 부족과 정권의 충돌이자, 자원 배분을 둘러싼 경제적 불만의 폭발이었다. 살레흐는 측근인 알리 무호신과 하시드 부족연합, 살라피주의자로 구성된 자원 부대 등 정권 친위 세력을 동원해 후티를 탄압했지만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다.
살레흐가 퇴진한 뒤 하디 부통령이 과도 정부를 이끌며 2013년 56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국민대화회의(NDC)가 출범했다. 다양한 정치 세력을 대표하는 이 기구는 40년 집권자가 퇴진한 이후 새로운 예멘을 논의하는 희망의 공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연방제 구성 방식을 둘러싼 갈등, 후티 운동과 히라크 남부 분리주의 운동의 불만, 기득권 세력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NDC는 구체적인 합의안을 도출하지 못한 채 2014년 1월 해산되었다.
그리고 민주화의 꿈은 더 빠르게 좌절되었다. 2014년 9월 후티 반군은 사나를 장악했고, 하디 대통령은 아덴으로 도피해 자신이 예멘의 유일한 합법 대통령임을 선언하며 국제사회의 지원을 요청했다. 한때 서로 대립하던 후티 반군과 살레흐 지지 세력이 권력을 위해 동맹을 맺고, 한때 서로 협력하던 살레흐와 하시드 부족연합이 적이 된 것이다. ‘동지에서 적으로, 적에서 동지로’라는 아이러니한 구도가 예멘을 더욱 복잡한 내전의 늪으로 끌어들였다.
2015년 3월 26일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고 아랍에미리트·바레인·쿠웨이트·이집트 등이 참여한 아랍 연합군이 후티 반군 격퇴를 위한 ‘단호한 폭풍 작전’을 개시했다. 예멘 내전은 이로써 지역 강대국들의 대리전으로 확대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후티 반군 뒤에 이란이 있다고 보았고, 이란의 ‘시아 초승달’ 세력 확대를 차단하려는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개입의 근거였다. 실제로 이란은 후티 반군에 미사일·드론·무기 등을 지원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랍 연합군의 개입은 결정적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후티 반군은 무너지지 않았고, 내전은 길어졌다. 아랍 연합군의 공습은 민간인 피해를 양산했다. 갈등 구도는 더욱 복잡해졌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후티 격퇴라는 공동 목표를 가지면서도 예멘 내 영향력 확보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셈법을 가졌다. 아랍에미리트가 지원한 남부과도위원회(STC)는 2020년 남부 자치를 선언하며 하디 정부와 또 다른 전선을 형성했다.
예멘의 혼란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게도 기회를 제공했다. 아라비아반도 알카에다(AQAP)는 살레흐 정권 붕괴 이후 예멘 남동부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했고, 2014년에는 ISIS 예멘 지부가 설립되었다. AQAP는 단순한 테러 조직을 넘어 점령 지역에서 전기·의료·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며 국가 역할을 대신하고 부족과의 우호적 협력 관계를 구축해 지역 사회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이들의 존재는 예멘 내전이 가진 종파 갈등의 성격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10년 넘게 이어진 예멘의 비극은 그 규모가 참혹하다. 2021년까지 내전 과정에서 37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희생자 중 70%가 5세 미만의 영유아였다. 유엔은 약 3,000만 명에 달하는 예멘 국민 중 절반 이상인 1,560만 명이 극단적인 빈곤에 시달리고 있으며, 내전이 계속된다면 2030년까지 130만 명이 사망하고 빈곤 인구도 2200만 명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전쟁으로 집을 떠나 피난길에 오른 예멘인도 약 400만 명에 달한다.
『흐름』은 예멘의 비극을 부족주의나 종파 갈등이라는 단순한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을 경계한다. 부족은 유전적으로 변하지 않는 본질적 특성이 아니라,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개인과 집단의 안전을 제공하는 대안 기구로 부상한 것이다. 살레흐가 부족을 권력 유지 수단으로 활용한 통치술이 부족주의를 공고히 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결국 예멘이 전쟁의 상처를 딛고 새로운 봄을 맞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역사가 남긴 뿌리 깊은 상처를 극복하는 길고 어려운 일이 남아 있다.
책에서 언급하듯 우리나라에서도 2018년 제주도에 유입된 예멘 난민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예멘 내전은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며, 오늘날 중동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다.
5) 이라크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도입된 정치제도는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미국이 설계한 권력분배제도인 무하사사는 종파와 민족별 인구 비율에 따라 요직을 배분하는 방식으로, 대통령은 쿠르드인, 총리는 시아파, 의회 의장은 수니파가 맡는 암묵적 합의가 굳어졌다. 선거에서도 공약보다 종파 정체성이 투표 기준이 되면서 종파 간 갈등이 심화되었다.
2006년에는 수니파 극단주의 조직의 시아파 성지 공격과 시아파의 대보복으로 전면적인 내전이 폭발했다. 같은 해 총리직을 맡은 누리 알 말리키는 군대와 경찰력을 장악하고 측근을 요직에 앉히며 권력을 독점했다.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전, 미국의 침공으로 이어진 장기적 위기 속에서 이라크 시민들의 정부 불신은 갈수록 깊어졌다.
2011년, 아랍의 봄의 물결이 이라크에도 닿았고, 시민들은 부패, 공공서비스 부재, 실업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요구는 혁명이 아닌 개혁이었고 시위는 바그다드를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알 말리키 정부는 시위대를 테러리스트, 반민주주의자로 낙인찍고 통행 금지, 인터넷 차단, 언론 통제로 억압했다. 2월 25일 ‘분노의 날’에는 전국에서 수만 명이 참여했는데, 경찰의 발포로 20명 이상이 사망하고 300여 명이 불법 체포되었다.
알 말리키는 집권 2기부터 수니파와 쿠르드 정파를 배제하고 시아파를 우대하는 종파적 정치를 강화했다. 이는 사회 분열을 심화시켰고, ISIS가 그 틈을 파고들어 2014년 이라크 영토의 3분의 1을 장악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알 말리키는 2014년 3선 연임을 포기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알 말리키의 뒤를 이은 알 아바디 총리 시기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2015년 바그다드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전기 공급 중단에 항의하는 시위가 다시 불붙었다. 초기에는 기본 공공서비스를 요구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점차 교사, 공무원 등 중산층으로 참여층이 넓어지면서 시민운동의 성격을 띠어 갔다. 시위 구호도 “이라크인은 변화를 원한다”는 수준에서 “무하사사 반대! 정치적 종파주의 반대!”로 구체화되었다. 2018년에는 남부 바스라에서 열악한 공공서비스와 식수 오염에 항의하는 시위가 폭발했다. 이는 이란의 이라크 내정 개입에 대한 분노로까지 이어졌고 시위대는 바스라 주재 이란 영사관에 방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알 아바디 총리는 연임을 포기했고 압둘 마흐디가 총리로 지명되었다.
2019년 10월, 누적된 불만이 폭발하면서 2003년 이후 이라크 최대 규모의 시민 저항인 ‘티슈린(10월) 시위’가 일어났다. 바그다드 타흐리르 광장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시아파 저소득층 청년, 교육받은 도시 청년, 중산층 전문직이 주도했고 상인과 사업가들이 물자로 지원했다. 특정 지도부 없이 자발적인 시민 협력 네트워크인 탄시키야가 시위를 조직했으며 SNS를 통해 참여를 독려했다. 광장은 수니파와 시아파가 함께 이라크 국기를 들고 종파를 넘어 이라크 시민으로 재탄생하는 공간이 되었고, 이라크 최고 시아파 성직자 시스타니도 정부의 폭력 진압을 비판하며 개혁을 지지했다. 시위대의 요구는 무책임한 정치인들의 사퇴와 정치 개혁, 개정 선거법에 따른 조기 총선 실시, 부패의 온상인 무하사사 폐지로 요약되었다. 구호도 “나가라, 이란!”, “우리는 조국을 원한다”는 반외세 주권 회복 요구로 한층 진화했다. 그러나 정부와 이란 연계 민병대(PMF)는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2019년 10월부터 12월까지 528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을 입었다. 반정부 활동가와 언론인에 대한 암살 시도도 81건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34명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티슈린 시위는 압둘 마흐디 총리 사임과 기존 18개 선거구를 83개 소선거구로 개편하는 선거법 개혁이라는 실질적인 성과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헌법 개정이나 무하사사 폐지 같은 근본적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광장에서 결실을 얻어내지 못한 활동가들은 직접 정치에 뛰어들었다. 2021년 총선에서 티슈린 운동 출신들이 만든 임티다드 정당이 9석을 획득하고 시위대와 가까운 정치적 성향을 가진 무소속 후보 43명이 당선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종파와 외세에 기대지 않고 시민 기부로 운영되는 이들의 등장은 이라크 정치사에서 새로운 흐름이었다. 그러나 기성 정치권의 벽은 높았다. 친이란 무장조직의 위협으로 일부 시민사회 정당은 선거에 참여조차 못했고, 2023년 기성 정당들은 선거법을 다시 정당명부제로 되돌려 신생 정당의 진출 길을 막았다. 2023년 지방선거 투표율은 역대 최저인 41%에 그쳤고, 실업률은 티슈린 운동 이전보다 오히려 높아진 15.5%를 기록했으며 전력난과 물 부족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두 책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것은 이라크의 비극이 단순히 종파 갈등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예멘의 사례에서 보았던 것처럼 종파주의는 원래부터 이라크 사회에 뿌리박힌 숙명이 아니라, 권력을 유지하려는 정치 엘리트들이 의도적으로 동원하고 증폭시킨 결과물이다. 티슈린 운동이 보여준 가장 강력한 증거가 바로 이것이다. 광장에서 수니파와 시아파가 함께 이라크 국기를 들었다는 사실은, 이라크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종파 갈등이 아니라 통합과 연대임을 증명한다.
6) 레바논
튀니지, 이집트, 시리아에서 아랍의 봄이 뜨겁게 타오를 때 레바논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2011년 ‘존엄의 인티파다’라 불리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지만, 종파를 넘어 통합된 국민의 목소리를 내는 데는 실패했다.
레바논의 종파주의는 1943년 독립 이전부터 형성되었다. 7세기 무슬림의 유입으로 마론파 기독교인들이 레바논산으로 밀려난 이후, 18세기 드루즈파가 같은 지역에 정착하면서 두 공동체 간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갈등이 유혈 사태로 번지자 오스만제국은 종파별 행정구역 분리라는 방식으로 봉합을 시도했고, 이것이 훗날 레바논 종파안배주의의 시초가 되었다.
이 체제는 고스란히 레바논이라는 국가 형성에 적용되었다. 1차 대전 이후 프랑스가 시리아-레바논 지역을 위임통치하면서 프랑스는 레바논산을 중심으로 레바논의 국경을 형성했다. 이때 드루즈파와 기독교를 포함한 무슬림 수니파, 무슬림 시아파 그리고 다양한 기독교 종파의 영토가 레바논에 포함되었고, 레바논은 모든 종교와 종파를 포괄하는 유일한 다종교 국가가 된다.
1943년 레바논 공화국이 선포되고 레바논 정부는 영토 내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무슬림의 수니파와 기독교 중에서도 다수인 마론파 위주로 형성된다. 이 두 종파의 수장들은 국민협약을 맺고 통치 체제 내에서 기독교-무슬림 간 균형을 도모했다. 이때부터 레바논은 기독교 마론파 출신 대통령, 무슬림 수니파 출신 국무총리, 무슬림 시아파 출신 국회의장을 내세운 트로이카 체제의 정권을 수립한다. 국회 의석수는 1932년 시행한 지역 인구 총조사 결과를 반영해 기독교 54석, 무슬림 45석이라는 비율로 분배했다.
하지만 이 균형은 매우 취약했다. 1948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피해 레바논으로 쏟아져 들어온 팔레스타인 난민, 그리고 1970년대 요르단에서 넘어온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게릴라들이 종파 간 인구 균형을 뒤흔들었다. 대부분 수니파였던 이들의 대규모 유입은 기존 체제가 전제하고 있던 종파 간 균형을 무너뜨렸고, 결국 팔레스타인 민병대와 기독교 정파 간의 충돌을 계기로 1975년 레바논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은 무려 15년간 이어졌다. 1989년 사우디아라비아 타이프에서 주변국의 중재 아래 각 종파 지도자들이 타이프협정을 체결하면서 비로소 내전이 종결되었다. 협정 이후 내각 구성은 종파별로 일정 비율 배분하도록 조정되었고, 장관직, 군 지휘관, 중앙은행장 등 주요 직책도 특정 종파에 집중되지 않도록 제도화되었다. 그러나 트로이카 체제 자체는 오늘날까지 변하지 않았다.
레바논의 종파주의는 권력 분배를 넘어, 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적 부패를 낳았다. 종파 지도자들은 지지자들에게 이익과 현금을 약속하며 표를 사고, 국민은 문제가 생기면 국가가 아닌 종파 지도자에게 의존하는 ‘후견주의’가 자리 잡았다. 이 구조는 국민이 국가가 아닌 종파에 충성하게 만들었고, 지도자들은 ‘우리’와 ‘그들’이라는 프레임으로 손쉽게 대중을 선동할 수 있었다.
2005년 하리리 총리 암살 사건은 이런 구조에 균열을 드러낸 첫 번째 계기였다. 당시 시리아와 헤즈볼라가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국민적 분노가 폭발했고, 같은 해 3월 14일 종파를 초월한 대규모 시위, 이른바 ‘백향목 혁명’이 일어났다. 이 시위는 시리아군 철수라는 실질적 성과를 거두며 레바논 최초의 성공적인 대중 시위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헤즈볼라는 이에 맞서 친시리아 시위를 조직했고, 이를 계기로 레바논 정치는 종교 중심에서 친시리아 성향 3.8 세력(친시리아 시위가 3월 8일에 있었다)과 반시리아 성향 3.14 세력 간의 양극 구도로 재편되었다.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레바논 국민들은 “국민들은 종파주의 정권의 타도를 원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다른 아랍 국가들의 시위와 연대했다. 그러나 종파 지도자들의 기득권 구조가 워낙 견고했기 때문에 반대의 목소리는 하나로 뭉치지 못했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약 2년 5개월간 대통령 공백 사태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쓰레기 처리 시스템이 마비되는 이른바 ‘쓰레기 대란’이 발생했고, 국민의 정부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2015년에는 쓰레기 사태에 분노한 시민들이 ‘유 스팅크(You Stink!)’라는 구호를 외치며 다시 거리로 나왔다. 이들은 특정 종파가 아닌 레바논 정치 엘리트 전체를 향해 “당신들 모두에게서 썩은 냄새가 난다”고 외쳤다.
레바논 ‛유 스팅크(You Stink!)’ 시위 사진 (사진출처: 《AP》)
2019년 10월, 정부의 세금 인상 발표를 계기로 다시 대규모 시위가 터졌다. 사전 계획 없이 자발적으로 수천 명이 모인 이 시위는 평화적인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때 등장한 구호가 바로 “모두는 모두를 의미한다(kullun ya'ni kullun)”로, 여당뿐 아니라 야당을 포함한 기존 정치권 전체를 향한 불신의 표현이었다. 레바논에서는 이를 ‘10월 혁명’이라 부른다.
2020년 8월 베이루트항 폭발 사고는 국가 무능의 극단을 보여주었다. 2014년부터 수차례 경고가 있었음에도 방치된 질산암모늄 2,750톤이 폭발하면서 200명이 넘는 사망자와 약 3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국가 부채는 GDP의 170%를 넘어섰고, 물가상승률은 144%에 달했다. 레바논 위정자들은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하기 전까지 피해 지역을 찾지 않았으며, 사태 수습은 정부가 아닌 시민사회와 적십자사가 맡았다.
『시선』은 이 흐름 속에서 등장한 ‘베이루트 마디나티(나의 도시, 베이루트)’의 운동에 주목한다. 2015년 베이루트 아메리칸대학교 출신 학자와 활동가가 설립한 이 단체는 시위와 압력 대신 직접 정치권에 진입해 변화를 만들겠다는 전략을 택했다. 구체적인 정책 의제를 제시하고, 녹지와 공공장소에서 토론회를 열어 시민과 직접 소통하며 신뢰를 쌓았다.
2016년 베이루트 지방선거에 뛰어든 베이루트 마디나티는 41%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기성 정치권을 크게 놀라게 했다. 비록 과반수에 미치지 못해 의회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이 결과는 레바논 정치권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2022년 총선에서는 베이루트 마디나티 자체는 의석을 얻지 못했지만, 2019년 10월 혁명 참여 세력을 포함한 탈종파주의 신생 정당들이 128석 중 12석을 확보했다. 이러한 성장은 분명한 진전이다. 그러나 기성 정치 세력은 불법 선거 방식을 동원해서라도 이들의 국회 진입을 막으려 했고, 대통령 선출은 또다시 난항을 겪으며 약 2년간의 두 번째 공백기가 이어졌다.
2024년 말 아사드 정권 붕괴로 시리아의 레바논 내정 간섭이 사라지고,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헤즈볼라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레바논 정치 지형에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이 생겼다. 2025년 1월, 기존 종파주의 권력 구도에 비판적인 3.14 세력 성향의 조셉 아운이 제1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시리아 과도정부 역시 레바논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직 미약하지만 종파주의를 벗어나려는 시민사회의 노력으로 새로운 정치 지형이 형성되는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레바논 국민이 종파로 나눠진 모자이크 조각을 다시 맞추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 한 변화의 가능성은 계속될 것이다.
7) 튀르키예
아랍의 봄 당시 튀르키예는 무슬림 민주주의의 모델로 큰 주목을 받았지만, 현재는 권위주의 체제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역설적인 결과를 이해하려면 튀르키예의 정치사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 튀르키예 정치는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세력 간의 치열한 갈등 속에서 발전해 왔다. 1차 대전 패전 후 오스만제국이 해체되고 무스타파 케말이 세운 공화국은 강압적·급진적인 세속화 정책을 전면 추진했다. 이후 튀르키예에서는 이슬람 정당이 군부에 의해 네 차례 해산되는 역사가 반복되었다.
2001년 에르도안과 압둘라 귈이 주도하는 정의개발당이 창당되었다. 정의개발당은 이슬람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양립 가능성을 표방하고, 중도주의 노선을 채택하며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구축했다. 2002년 총선에서 34.2% 득표율로 350석을 차지해 압승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이 정당을 조직해 정치 활동을 시작한 지 30여 년 만에 기존의 강경한 이슬람 원리주의와 반서구 입장을 완화하고 실용 중도 노선을 채택한 결과였다.
정의개발당 집권 이후 튀르키예는 국내외적으로 주목할 만한 변화를 이루었다. 집권 공약으로 내세웠던 정치·경제 개혁을 추진해 우려와 불신을 해소했고, 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성장, 중견국 외교의 공고화를 이루었다. 2003년 IMF 프로그램을 이행하며 민영화 활성화를 위해 40억 달러의 투자 계획을 밝혀 유럽 투자자들의 각광을 받았다. 2004년에는 군부의 정치 개입 금지, 소수 민족 쿠르드어 방송 허용, 78년간 지속된 사형제의 완전한 폐지, 고문 폐지 등을 실행에 옮겼다. 집권 10년간 1인당 국민소득은 3배 이상 올랐고 2010년에는 44년 만에 최저 인플레이션율을 기록했다.
정의개발당이 부상한 데는 이슬람 자본가의 역할이 컸다. 세계화 과정에서 빠르게 부를 축적한 신흥 이슬람 부르주아는 효율적인 사업 운영 여건을 확보하기 위해 온건 이슬람 정치세력을 호응했다. 한편 튀르키예의 이슬람 종단인 낙쉬벤디, 누르, 펫훌라흐 종단은 해체되었다가 1925년 이후 철저히 개인 영역에서 지하조직 형태로 활동했고, 이들 종단 중 펫훌라흐 종단은 1980년대 중반 이슬람 최고지도자였던 펫훌라흐 귈렌에 의해 시작되어 미디어 사업에 크게 성공해 빠르게 성장했다.
정의개발당 정부의 성공 덕분에 무슬림 민주주의의 연착륙이 이루어진 듯했다. 그러나 이슬람과 자유민주주의의 공존 가능성을 보여 준 에르도안 총리는 집권 10년을 넘기면서 일인 체제를 공고히 하는 권위주의의 리더로 추락했다. 2013년 정부가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게지 공원 재개발 정책에 항의하는 평화 시위를 강경 진압하면서 민주주의의 후퇴는 확연해졌다. 2014년 3선 연임으로 더 이상 총리직을 맡을 수 없게 된 에르도안은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했다. 대선 후보로 나선 그는 51.7%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슬람 공동체 분열의 대표적 예가 에르도안과 귈렌의 갈등이다. 과거 온건 이슬람주의 구호 아래 함께 뜻을 모았던 귈렌이 에르도안의 권력 사유화를 비판하자 펫훌라흐 종단 관련 사람들은 대대적인 숙청 대상이 되었다.
2016년 7월에는 군부 내 소수세력인 친이슬람 성향의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는 6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전국적으로 고강도 폭압 정치가 시작되었다. 현직 군인 1만 7,000명 숙청, 공직자 14만 명 해임, 지식인과 언론인 5만 명 투옥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2017년 에르도안 대통령은 대통령중심제 개헌을 국민 투표로 통과시켜 장기 집권을 제도화했다.
2018년 대선에서 52%의 득표로 재선에 성공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전횡적 권력 행사를 공고화했다. 2019년 3월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은 앙카라, 이스탄불, 이즈미르 3대 도시에서 패했다. 특히 25년 만에 최대 도시 이스탄불을 잃자 에르도안 대통령은 10월 쿠르드계 시리아인을 점령지에서 몰아내고 자국 내 시리아 난민을 이주시키는 군사 작전을 감행했다. 프리덤하우스에 따르면 2015년 튀르키예 민주주의 지수는 전해보다 5포인트 하락했고, 2021년도 지수는 7년 전보다 30포인트 떨어져 최저치를 기록했다.
『흐름』은 튀르키예가 아랍의 봄 당시 무슬림 민주주의의 희망으로 여겨지다가 권위주의로 회귀한 원인을 구조적으로 분석한다. 온건 이슬람주의 세력이 권력 기반을 다진 이후 이를 무절제하게 남용할 경우를 제어할 구조적·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이슬람 자본가 계층이 정치권의 과욕과 갈등을 조율하며 지탱해 온 튀르키예식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많은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약화하면서 튀르키예의 선거 권위주의 체제는 확실한 권위주의로 빠르게 퇴행했다. 튀르키예 권위주의로의 회귀 배경에는 미국의 쇠락, 러시아의 부상, 유럽의 관망으로 요약되는 지정학적 지각 변동도 자리 잡고 있다.
한편, 『시선』은 이런 권위주의적 현실 속에서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었지만 가장 강력한 저항의 목소리를 키워온 쿠르드 여성운동에 주목한다.
쿠르드족은 약 3,300만 명의 인구 중 1,500만~2,000만 명이 튀르키예에 거주하는 이란계 산악 민족이다. 쿠르드 여성운동은 소수민족이자 여성이라는 이중의 억압 속에서 살아왔다. 이 운동은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의 강력한 여성해방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외잘란은 “여성이 자유롭지 않으면 국가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창하며 1987년 최초의 여성 연합회를 창설했다. 그가 제시한 ‘지니올로지(Jineology)’는 ‘여성, 생명, 자유(Jin, Jiyan, Azadi)’라는 구호로 구체화되었고, 이는 이제 이란과 아랍 여성운동의 구호로도 사용되며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쿠르드어로 여성을 뜻하는 Jin과 학문을 뜻하는 ology가 결합한 단어로, 여성학 또는 여성과학을 뜻한다.)
쿠르드 여성운동은 정치운동과 긴밀히 연결되며 성장했다. 친쿠르드 정당들은 여성 비율을 지속적으로 높여왔으며, 2005년 민주사회당에서는 여성 비율이 40%에 달했다. 2024년 지방선거에서는 친쿠르드 정당인 인민평등민주당(DEM) 출신 컬리스탄 쇠눅이 바트만주 최초의 여성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인민평등민주당은 남성 의장과 여성 의장을 공동으로 두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에르도안의 반젠더 정치는 쿠르드 여성들에게 이중의 위협이 되었다. 정의개발당은 ‘여성가족부’를 ‘가족사회부’로 명칭을 바꾸고 여성의 역할을 가정 내 어머니로 규정했으며, 2011년 튀르키예 여성운동가들이 주도해 체결한 ‘이스탄불 협약’에서 2021년 탈퇴했다. 정부가 임명한 수탁자(카위윰)들은 쿠르드 여성센터를 예식장으로 용도 변경하고 여대생 기숙사를 게스트하우스로 바꾸는 등 여성의 공간과 권리를 공격했다.
이러한 공동의 위협이 역설적으로 과거 연대하지 못했던 쿠르드 여성운동가와 튀르키예 여성운동가를 하나로 묶었다. 튀르키예 여성운동가들은 “전쟁은 성 불평등을 덮어버리는 담요와 같다”고 외치며 쿠르드 여성 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기 시작했다. ‘보라연대(Mor Dayanısma)’는 “문제는 명백하고 해결은 연대에 있다”는 구호로 양측의 연대를 이끌고 있다. 2024년 바트만 시장으로 당선된 쇠눅은 “만약 정부가 여성운동 그룹을 폐쇄하려 한다면 정부는 우리와 싸울 뿐 아니라 튀르키예 모든 여성들을 상대로 싸우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튀르키예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지만 그 불씨는 결코 꺼지지 않았다.
8) 이란
1979년 이슬람 혁명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자처했다. “자유, 독립, 이슬람 공화국”을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란 사람들이 꿈꾼 것은 권위적 부패 사회를 대체할 이상적인 이슬람 공동체였다. 그러나 혁명의 이상은 목을 죄는 수단으로 변모했고, 높은 기대만큼이나 깊은 실망을 낳았다. 이란인들은 혁명을 ‘최대의 실수’라 말하며 자조적인 이야기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란 시민사회는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1906년 입헌혁명기부터 시작된 여성들의 참정권 요구, 1979년 혁명 직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히잡 의무화 반대 시위, 1997년 하타미 정권 시기의 시민사회 형성, 2006년 백만서명운동, 2009년 녹색운동, 2017~2019년 유가 인상에 따른 시위, 그리고 2022년 ‘여성·생명·자유’ 시위까지. 이 모든 흐름은 서로 단절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긴 저항의 역사를 이루는 연속된 장이다.
이란의 현대적 시민사회 담론은 1997년 모함마드 하타미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본격화되었다. ‘시민사회’를 선거 슬로건으로 내건 하타미는 70%의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이 시기 여성 NGO가 급증하고, 여성 잡지 《자넌》을 중심으로 젠더 이슈의 공론장이 형성되었다. 이슬람의 틀 안에서 여성의 권리를 재해석하는 이슬람 페미니즘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젊은 층과 여성, 중산층의 폭넓은 지지를 받은 하타미는 이란 현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보수 강경파의 견제로 정치 개혁 의제를 실질적으로 관철시키지 못했고, 이란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냉소와 소외감에 빠져들었다. 1999년 대규모 학생 시위는 이 시기 개혁에 대한 열망과 보수파의 반발이 충돌한 결과였다.
2005년 아흐마디네자드의 당선으로 보수 강경파가 권력을 장악하자, 시민사회의 저항은 다른 형태로 이어졌다. 2006년 시작된 백만서명운동은 차별적 가족법 개정을 목표로 100만 명의 서명을 모으는 운동이었다. 거리 서명 수집이 탄압으로 막히자, 운동은 택시·미용실·쇼핑센터·대학 캠퍼스 등 일상의 공간으로 파고드는 ‘조용한 침투’ 전략으로 진화했다. 구금된 활동가들은 감옥마저 새로운 집단행동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2009년까지 70명 이상의 활동가가 체포되었음에도, 이 운동은 이란 여성들의 주체성을 명확히 증명하고 이후 녹색운동으로 이어지는 활동가 네트워크와 저항의 언어를 축적했다. 백만서명운동에서 단련된 여성들이 2009년 녹색 히잡과 녹색 팔찌를 끼고 선거 캠페인의 전면에 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2009년 제10대 대통령 선거는 이 모든 축적된 분노의 폭발구가 되었다. 30년간 꾹꾹 눌려 온 정권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터져 나왔다. 아흐마디네자드의 재선 결과에 불복한 시민들은 개혁 후보 무사비의 상징인 녹색을 앞세워 거리로 나왔다. 분노의 뿌리는 단순히 부정 선거 의혹이 아니었다. 30년간 누적된 울분이었다. 이슬람 공화국 수립 이후 최초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였으며, 사적 공간에만 머물던 고질적 갈등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시위에 참가한 26세 여성 네다 아가-솔탄의 총격 사망 장면이 전 세계로 퍼지며 이란 녹색운동을 국제 사회에 알렸다.
그러나 정부의 강경 진압 앞에 녹색운동은 혁명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지도자 무사비의 소극적 태도, 노동자계급의 미참여, 혁명수비대라는 강력한 군사조직의 존재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이 운동은 이슬람 혁명 이후 30년 사이 최대 규모의 민주화 운동으로서, 2022년 오늘의 이란 시민들이 다시 거리로 나설 수 있는 원동력을 심어 놓았다.
2013년 개혁파 로하니의 당선은 다시 한번 변화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2015년 핵 합의(JCPoA) 타결은 그 정점이었다. 그러나 2018년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적 핵 합의 파기로 이란 경제는 급격히 추락했다. 리알화 가치는 폭락하고 인플레이션은 최고치를 기록했다. 청년 실업률은 평균의 두 배 가까이 치솟았고, “당장 다음 달 생활비와 지출을 가늠할 수가 없다”는 탄식이 쏟아졌다. 2017~2019년 시위는 2009년과는 성격이 달랐다. 도심 중산층 중심의 녹색운동과 달리, 지방 소수 민족, 저임금 노동자, 트럭 운전사 등 사회 하층이 주축을 이루었다. 2019년 11월 유가 인상 발표 하나가 도화선이 되어 전국에서 수십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일주일간의 인터넷 차단 속에서 최소 208명이 사망했다. 이는 단순한 경제 시위에 머물지 않았다. 먹고사는 문제가 이란 저항운동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었다.
2021년 강경 보수파 라이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이란 사회가 내부 불만과 외교적 고립의 이중 압박 속에 놓여 있던 2022년 9월, 22세의 쿠르드계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 단속 중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은 이란 전역을 뒤흔드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약 200만 명이 160개 도시의 거리로 나왔고, ‘#MahsaAmini’ 해시태그는 2억 8400만 건의 트윗이라는 세계 기록을 세웠다.
시위의 슬로건 ‘여성·생명·자유(진·지얀·아자디)’는 쿠르드 자유운동에서 비롯된 구호였다. “여성이 자유롭지 않으면, 그 사회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선언이 이번 시위의 본질을 압축했다. 이 시위는 단순한 히잡 반대 운동이 아니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누적된 정치·경제·문화의 모든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었다. 이 거대한 저항의 흐름 속에는 2006년 백만서명운동에서 싹튼 조직력, 2009년 녹색운동에서 쌓인 연대의 경험, 2014년 온라인 히잡 벗기 운동에서 단련된 디지털 감각이 모두 녹아들어 있었다.
이번 시위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10대 여학생들이었다. 교실에서 최고 지도자의 사진을 떼어내고, 교과서를 찢고, 교복을 벗어 던지는 등 기성세대가 상상하지 못한 저항을 보였다. 이들은 공적 공간에서는 히잡과 남녀 분리를 강요받으면서도,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 또래 문화를 경험하며 자란 세대였다. 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극명한 괴리가 저항의 폭발력이 되었다. 23세 하디스 나자피를 비롯해 520여 명이 정부군의 진압으로 사망했음에도 시위는 수개월간 지속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카불 주재 이란 대사관 앞 연대 시위, 전 세계 이란 디아스포라의 집결, 할리우드와 유럽 배우들의 지지까지. 이 시위는 진정한 국제 연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란 정부는 2023년 9월 히잡 미착용에 최대 10년 징역형을 부과하는 ‘히잡과 정숙함’ 법안을 통과시키며 강경 대응으로 맞섰다. 그에 굴하지 않고 쇼핑몰 내 80% 이상의 여성들이 히잡을 쓰지 않거나 목에 걸치는 방식으로 일상적 저항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날 이후로 거리에서 히잡을 쓰지 않았어요. 우리가 세상을 바꾼 거죠. 여성들이 바로 이 땅에 혁명을 일으킨 거죠.” 60대 여성의 이 한마디는 이란 시민사회의 현재를 어떤 통계보다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것은 주디스 버틀러가 말한 ‘수행적 저항’이자 아세프 바야트가 언급한 ‘일상적 저항’이다. 여성들이 공적 공간에서 히잡을 벗는 반복적 행위는 단순한 개인 선택이 아니라, 이슬람 공화국의 젠더 규범 전체에 도전하는 집단적 수행이자 ‘등장의 정치’다.
이란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혁명수비대라는 강력한 군사조직, 국제 제재로 인한 경제적 고립,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인한 지역 긴장 고조, 보수 강경파와 개혁파의 끝없는 갈등. 이 모든 요소가 이란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2025년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격으로 이란이 큰 혼란에 빠지자, 일부에서 2022년 시위를 소환하며 이를 봉기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여성·생명·자유’ 운동을 이끌었던 여성운동가들은 “전쟁 반대! 우리의 이름으로는 안 된다!”고 외쳤다. 이란 시민의 자유를 향한 열망은 외부의 전쟁 논리에 종속되지 않는 고유한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2009년 녹색운동이 2022년 시위의 씨앗이 되었듯, 오늘의 일상적 저항은 이란 사회가 아직 쓰지 못한 다음 장을 향해 조용히 축적되고 있다.
9)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태생부터 모순을 안고 출발한 국가다. 독립선언문은 이스라엘을 ‘유대 국가’이자 ‘민주주의 국가’로 동시에 규정했다. 그런데 실상은 훨씬 복잡하다. 인구가 유대인(74%)과 아랍인(21%), 유대인 중에서도 출신에 따라 유럽계 아슈케나짐과 중동·아프리카계 미즈라힘, 혹은 성향에 따라 초정통파 하레딤과 세속파로 나누어질 정도로 다층적이다. 이렇게 종교·종족·문화적으로 이질적인 복합사회에서 보편적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향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팔레스타인 점령지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된 이스라엘에서, 사법부가 비교적 자유주의적 성향을 띠는 반면, 집권 정당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며 행정부와 사법부는 오랜 긴장 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 속에서 이스라엘 시민사회는 지난 십 수 년에 걸쳐 눈에 띄게 성장해 왔다. 2011년 텐트시위, 2020~2021년 검은 깃발 운동, 2023년 사법개편반대시위는 서로 단절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 속에서 이어진 시민사회 진화의 연속된 장면들이었다.
건국 초기 이스라엘 정부는 끊임없는 주변국과의 전쟁 속에서 민족 서사와 국가 안보를 앞세워 시민을 적극적으로 포섭했다. 정부와 시민사회의 관계는 후원에 가까웠고, 자발적 시민집단의 등장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정부가 반대 시위를 철저히 통제하려 할수록, 역설적으로 시민들은 정치적 주체로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71년 미즈라힘 청소년과 청년들이 주도한 블랙 팬더스 운동은 종족에 따른 빈부격차를 처음으로 공론화시켰고, 욤키푸르 전쟁(1973) 이후 시민들은 정부의 무능함을 비판하는 대중 시위와 청문회를 연달아 열어 결국 골다 메이르 총리의 사퇴를 이끌어 냈다. 수동적 충성에서 적극적 대응으로 이스라엘 시민과 정부의 관계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스라엘의 경제적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2011년 6월, 코티지 치즈 불매운동이라는 작은 불씨에서 시작된 저항은 한 달 뒤 텔아비브 로스칠드대로에 텐트가 하나씩 설치되는 광경으로 번졌다. 20대 여성 다프니 리프가 페이스북에 올린 텐트시위 이벤트에 며칠 만에 수천 명이 ‘참석’ 표시를 했다. 텐트는 홈리스 상태의 주택 위기를 상징하는 동시에 도시 공간의 사적·공적 경계를 무너뜨리는 시위 공간이 되었다. 강연, 토론, 콘서트, 영화 상영이 이루어지는 시위 현장은 마치 축제와 같았다. 시위의 관심사는 일시적인 물가 해결을 넘어 경제구조와 정책의 근본적 변화 요구로 확장되었고, ‘사회정의운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인구의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질적인 시위이기도 했다. 팔레스타인 점령지 문제, 젠더·종족 갈등 같은 논쟁적 사안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면서 이스라엘 내 모든 집단을 동등하게 포괄하는 새로운 정치적 언어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 시위는 이스라엘 시민운동의 역사를 여는 혁명적 사건이었다. 정부는 특별위원회를 통해 소형 아파트 추가 건설, 무상교육 대상 확대, 복지 예산 확대 등 일부 요구사항을 반영했다.
텐트시위 이후 이스라엘 시민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2016년부터 뇌물 수수·사기·배임 혐의로 기소된 네타냐후 총리가 모든 혐의를 부인하며 재판을 회피하는 행보가 이어지자, 민주주의의 위기를 자각한 시민들이 발코니와 창문에서 ‘민주주의의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 깃발을 흔들기 시작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인 2020~2021년, 거주지 반경 1km 이동 제한과 20명 미만 집회 제한이라는 규정 속에서도 시민들은 마스크를 쓴 채 각자 거주지 근처에서 검은 깃발을 들고 시위를 이어 갔다. 중앙집권적 리더십 없이 수평적으로 운영된 이 시위는 16개 이상의 단체가 함께 이끌었으며, 노웨이 운동, 크라임 미니스터, 핑크프론트, 보놋 알터나티바, 옴딤 베야하드 등 텐트시위에서 성장한 시민단체들이 조직의 근간이 되었다. 2021년 6월 네타냐후가 12년 연임 총리직에서 물러나자 시위는 ‘역사적 승리’를 선언하고 해산했다. 그러나 이듬해 네타냐후는 극우 내각을 꾸려 다시 돌아왔다.
2023년 1월 4일, 재출범한 네타냐후 정부는 대법원 판사 최종 임명권을 정부에 부여하고 내각이 법적 조언을 거부할 수 있다는 내용의 사법개편안을 발표했다. 성문헌법 없이 쉽게 수정 가능한 기본법에만 의존하는 이스라엘에서, 유일한 권력 견제 기관인 사법부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이 법안은 독재로의 퇴행을 의미했다. 네타냐후가 자신의 형사 재판을 피하기 위해 사법부를 무력화하려 한다는 비난까지 더해지며,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정부 운동이 시작되었다. 시위가 시작되고 7개월 만에 이스라엘 인구의 21%가 한 번 이상 참여했다. 매주 토요일 텔아비브 카플란 거리에서 열린 이 시위에는 재계와 지방정부, 노동조합, 시민단체가 사상 처음으로 연대했다. 국방부 장관 해임 발표 이후 노동조합과 대학은 무기한 파업을, 하이테크산업과 의사협회, 공항, 심지어 재외 이스라엘대사관 외교관들까지 파업에 동참했다. 항공사 엘알 조종사들은 네타냐후 총리 부부의 로마행 비행을 보이콧했다.
보놋 알터나티바는 ‘시녀 이야기’의 붉은 망토를 입고 거리로 나가 사법개편이 여성에게 미칠 위협을 침묵으로 재현했다. 예비역으로 구성된 전우회는 사법개혁이 무산되기 전까지 예비역 복무를 거부하겠다고 선언해 이스라엘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10대 청소년 단체 ‘독재에 반대하는 청소년들’은 병역 거부 선언까지 포함한 공개서한을 발표하며, 사법개편 문제와 팔레스타인 점령 문제는 분리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2024년 1월 1일, 이스라엘 대법원은 사법개편안이 “민주주의 국가로서 이스라엘의 핵심 원리에 심각한 해를 끼친다”는 판결을 내리고 건국 이래 처음으로 기본법 일부를 무효화했다. 텔아비브시는 28주 동안 시위의 중심지가 된 카플란 거리를 ‘민주주의 광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민간인 학살과 납치 사건으로 시위는 일시 중단되었다. 시위대는 곧 피해 지역 구호와 인질 가족 지원 활동으로 전환했고, 이후 인질 귀환과 휴전을 요구하는 집회가 매주 토요일 텔아비브에서 이어졌다. 2025년 6월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은 인질 협상을 지연시킨다는 비판과 함께 네타냐후 지지율을 반등시키는 복잡한 결과를 낳았다. 이스라엘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진행 중인 실험이다.
3. 아랍의 봄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지금까지 본 각국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 아랍의 봄은 전조 없이 전격적으로 찾아왔다. 2011년 아랍 세계를 강타한 정치 변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기대로 세계를 충만하게 했고, 일부는 이를 프랑스 혁명에 견주어 중동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거라 예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흐름』은 그 후 10년이 지난 지금, 아랍의 봄이 국제정치에 남긴 것은 희망이 아니라 좌초된 이상의 잔해였다고 이야기한다.
아랍의 봄 이전에 아랍의 민주화 운동은 오랫동안 지체되었다. 그 이유는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이 자기 편인 권위주의 정권을 묵인했고, 탈냉전 이후에도 걸프 산유국과 군부 출신 집권 세력은 건재했기 때문이다. 9.11 테러를 기점으로 미국이 적극적으로 중동에 개입하게 되었고, 부시 독트린 아래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이 이어졌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선 이 두 나라에서조차 폭력과 혼란은 끝나지 않았고, 민주주의의 뿌리는 내리지 않았다. 이런 배경에서 튀니지 부아지지의 분신으로 시작된 아랍의 봄은 예고 없이, 그러나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아랍의 봄은 단일한 시민 혁명이 아니었다. 튀니지와 이집트는 시민 혁명의 성격이 강했지만, 리비아는 오랜 부족 갈등이 내전으로 번졌고, 예멘은 종파 분쟁의 성격이 짙었으며, 시리아는 두 성격이 뒤섞인 채 국제사회의 대리전 무대가 되었다. 궤적 역시 제각각이었다. 권위주의로 회귀한 이집트, 조합형 분립 정부를 구성한 튀니지, 내전이 지속되는 리비아와 예멘, 그리고 실패국가(failed state)로 전락한 시리아까지. 아랍의 봄은 하나의 결말이 아니라 다중적이고 불가측한 궤적을 그렸다.
여기에 종교 정체성의 부상이 더해졌다. 기대와 달리 아랍의 봄이 도달한 귀결점은 세속적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이집트에서는 무슬림형제단이, 튀니지와 리비아에서는 이슬람 정당이 선거를 통해 세력을 키웠다.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이슬람 정치세력이 제도권에 진입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혼란을 틈타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등장한 것이 2014년 ISIS였다. ISIS의 출현은 9.11 테러 이후 미국의 군사 개입이 중동의 정치적 혼란을 심화시키고, 아랍의 봄이 그 혼란을 더욱 가속화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아랍의 봄은 미국의 중동 전략을 근본적으로 흔들었다. 9.11 이후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재건하겠다는 의지로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정작 그 나라들을 안정시키고 민주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오히려 전쟁 과정에서 중동 전역에 반미 감정이 퍼지면서 미국의 이미지와 영향력은 크게 떨어졌고, 막대한 전쟁 비용과 인명 피해까지 겹치면서 미국은 오바마 정부 때부터 중동 철수를 모색했다.
그러나 아랍의 봄은 미국의 중동 철수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집트 무바라크 정권의 실각은 동맹국 이스라엘의 안보에 직결되었고,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의 테러 피살은 충격을 안겼다. ISIS 격퇴를 위해 다시 개입이 불가피해졌지만, 미국은 지상군 파병 대신 ‘역외 균형’ 전략으로 간접 개입을 택했다. 『흐름』은 오바마의 아시아 재균형,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바이든의 ‘미국의 귀환’ 선언은 표현만 달랐을 뿐 자국 중심주의라는 큰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한다. 2021년 아프가니스탄 철군은 20년에 걸친 한 챕터에 마침표를 찍었을 뿐이다.
아랍의 봄 이후 중동에서 밀려든 난민과 잇따른 테러는 유럽과 미국 사회에서 자국민을 먼저 챙겨야 한다는 자국 우선주의 정서를 강화했고, 이는 브렉시트와 트럼프주의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다. 이슬람권과 기독교권의 단층선도 더욱 선명해지며 문명론적 지역주의가 부상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미국이 주도해 온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구상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게 했다.
『시선』은 아랍의 봄이 중동 시민사회에 짧은 전환의 계기를 가져왔지만, 권위주의 정권이 다시 들어서고 강한 반동의 흐름이 형성되면서 한때 열렸던 정치적 기회 구조는 다시 닫히고 시민사회의 활동 영역은 더욱 좁아졌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를 중동 시민사회의 종언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수면 아래로 내려간 운동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재부상을 준비하는 ‘휴지기 운동’으로 볼 수 있다. 이란의 히잡 시위, 이라크 티슈린 운동, 레바논의 반종파주의 운동, 튀르키예의 쿠르드 여성운동은 모두 보이지 않게 축적된 힘이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폭발적으로 결집한 사례들이다.
특히 이 책은 정치적 기회 구조·프레임 과정·네트워크 구축이라는 사회운동론의 세 가지 분석 메커니즘을 중동이라는 특수한 맥락에 적용하여 분석한다. 아랍의 권위주의 정권은 NGO법 개악과 테러리스트 프레임으로 시민사회의 숨통을 조이지만, 이에 맞서 시민사회는 비공식 공론장 발굴·사회적 경제로의 전환·초국적 연대 확장 등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해 왔다. 쿠르드 여성운동의 ‘젠더 정의’, 이란 히잡 시위의 ‘여성·생명·자유’는 종파와 국경을 넘는 마스터 프레임. 즉, 하나의 공통된 구호로서 가능성을 입증해왔다. 또한 디지털 혁명 세대의 참여는 연대를 더 빠르고 넓게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쉬운 연결이 깊은 헌신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과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저자의 분석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권위주의 체제 아래 시민사회가 억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동 사회 안에서는 고유한 저항과 실천의 방식이 다양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다. 쿠웨이트의 디와니야(사랑방 모임) 같은 비공식 공론장, 이집트의 사회적 경제 활동, 이란의 일상적인 히잡 벗기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아울러 이슬람 문화의 특수성을 근거로 중동의 민주화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시각에도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슬람의 종교적 권위나 종파주의, 부족주의가 민주주의와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이 관점은, 중동을 변화 불가능한 예외적 공간으로 못 박아버림으로써 오히려 권위주의 정권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악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란의 녹색운동과 히잡 시위, 레바논의 반종파주의 운동, 이라크의 티슈린 운동 등은 이슬람 문화권 안에서도 민주화를 향한 시민사회의 동력이 꾸준히 쌓여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책의 표현처럼 중동 시민사회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는 중동을 단일한 위기의 지역이 아니라 복수의 시간대가 공존하는 역동적인 사회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하는 ‘새로운 시선’의 핵심이다.
4. 맺음말 : 중동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
두 권의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란 단번에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눈에 보이는 정치적 성과가 없다고 해서 변화 자체가 멈춘 것은 아니다. 중동에서처럼 반복되는 분쟁과 쉽게 풀리지 않는 복잡한 문제일수록, 일상적인 차원에서 꾸준히 이어지는 작은 실천이 장기적으로 더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두 책 모두 한계를 지닌다. 『흐름』은 국가 중심 분석에 집중한 나머지 사회 내부의 역동성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시선』의 시민사회에 대한 기대가 다소 낙관적으로 보일 여지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책이 함께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중동은 ‘실패한 혁명의 공간’이 아니라, 여전히 변화가 진행 중인 ‘복합적인 장’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종종 중동 내 갈등을 반미·친미, 혹은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대립 구도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그 사회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와 현실을 가려버린다. 끊임없는 혼란과 갈등, 정체 속에서 중동의 시민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 그럼에도 내부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어떤 노력을 하고 있고,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중동의 변화를 만들어 갈 ‘중동 시민’과 진정으로 연대하기 위해서 무엇을 질문하고,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야할 시점이다. 그 답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중동 시민들과 그 여정을 함께할 수 있다면 중동에서 다시 한 번 따뜻한 ‘아랍의 봄’을 맞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