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알게된 지 얼마나 되었는지를 세보려고 하니 제가 사회진보연대 회원이 된 시간이랑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제가 처음 들어간 날 당신이 거기 계셨고, 그 이후로도 활동하는 공간(서부모임)이 겹쳐 여러 번 마주치고, 얘기 나누고, 술을 먹기도 하고, 때로는 부대끼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겹친다고는 하나 라이프 사이클이 다른 활동가들과 직장인 회원이 마주칠 기회는 지난 2년간을 돌아봐도 사실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얼마 안 되는 기억 속에서, 집회에서, 선전전에서, 농성장에서, 세미나에서 유독 당신이 거의 항상 거기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습니다. 그냥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게 당신의 일이구나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이 일했던 만큼 우리 단체가 커왔다는 걸, 저같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회진보연대라는 이름이 조금씩 깊게 새겨졌다는 걸 이제 깨달았습니다.

"저는 해태님처럼 취업하려고 노력해본 적이 없어서,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잘 모르겠어요" 언젠가 집회 끝나고 술한잔을 하다가 당신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운동의 전망이며 활동가로써의 삶의 자존감 그런 얘기가 화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 당신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위안받는 느낌도 들었고, 이 사람에게라면 진심을 얘기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마음 속에서 몇 번의 싸움을 거치고 또 겪어야 그렇게 진심 대 진심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게 되는 걸까요? 그때 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부딪침도 있었습니다. 들어온 지 1년쯤 지난 뒤였던 것 같습니다. 서부모임에 대한 평가를 좀 하자고 마련된 자리에서 저는 평소에 갖고 있었던 생각을 몹시 거칠고 공격적으로 제기했었고,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그렇게 언성을 높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러는 저에게 바로 맞짱을 뜨지 않고 뚱한 표정으로 안건지를 보고 있다가, 저의 논리가 조악해지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을라치면 근데 그 부분에선 그건 이게 맞는 것 같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뒷풀이로 가서는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제게 항상 먼저 술잔을 내밀었습니다.

서부모임 활성화 같은 얘기를 할 때 딱히 특별한 답을 내리는 당신은 아니었습니다(아마 당신은 답도 안 나오는 토론과 결론보다는 누구 한번 더 만나고, 술 한번 더 먹는게 낫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냥 듣고 얘기하고 듣고 얘기하고, 결국은 화이팅으로 끝나는 그 당시의 저에겐 참 막연해 보였던 우리의 모임이었지만 잘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했고, 언젠간 잘 되겠지, 잘 되게 할 누군가가 나타나겠지 했습니다. 당신이 계실 때는 전혀 안해도 될 것 같던 그것들을 당신이 이제 안 계신다고 하니 뒤늦게나마 하나씩 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요? 결의하는거 아니니 너무 기대하지 마시고..

이제는 제가 오랫동안 품었던 의문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하나씩 내려보려고 합니다. 행복하게 오래 활동할 수 있고, 그 모습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해보겠다고 뛰어들 수 있고, 그렇게 조금씩 세상 굴려가면서 또 이만큼 했다고 서로 위안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이 어디 멀리 있는게 아니라고, 남의 활동에 달려 있는게 아니라고 생각하려 합니다. 또 가끔씩 잘 안 될때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당신이 하시던 대로 세상에서 가장 신나게 놀고 웃고 마시며 어차피 정해진 답 없다고, 즐기기라도 하자고 그렇게 해나가면 꼭 잘 될 것 같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소식에 가슴 아파하고 미안해하시는 건 당신께 받은 빚 한 조각씩 마음에 박혀서 그런게 아닌가 합니다. 먼저 안부 물어주고, 연락해주고, 댓글 달아주고, 웃어주고.. 당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늘 해오셨던 일들이 얼마나 크고 귀한 것들이었는지, 당신의 가까운 벗도 멀리 떨어진 옛 동지도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것 같습니다.

활동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부모임에 계셔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한 말 많이 못해 미안했습니다.
더 열심히 활동하지 못해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동지라고 불러 주셔서 행복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동지 해태는 당신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2015. 12. 6

정세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