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결혼한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의 미드를 봤다. 드라마는 두 남녀 주인공의 시점을 번갈아 가며 보여주는데, 누구의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이미 벌어진 사건이 다르게 그려진다. 두 사람은 본인의 행동은 물론 상대방이 입었던 옷, 표정, 말투부터 제삼자의 반응도 다르게 기억한다. 만남 초반을 보면, 남자의 기억 속에서는 여자가 도발적으로 유혹했고, 여자의 기억 속에서는 남자가 선을 넘어왔다. 누구의 기억이 맞는 것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아마 서로 조금씩 맞고 조금씩 틀렸으리라.
“민영이가 찍은 2015년의 네 사진이야.”
윤영언니가 사진을 보여주자마자 그 사진 속 상황이 기억 저편에서 떠올랐다.
“이 날 기억나요! 저 제주도 여행 갔다가 올라오는 길에 민영언니한테 연락해서 서울 도착하자마자 만나서 낮술 했어요.”
“이것도 있다!”
“이건 2013년에요. 이때 상근자 소풍 갔는데 승하 언니가 아팠어요.”
그러다 갑자기 그 미드의 주인공들이 떠올랐다. 나의 기억은 얼마나 주관적이며 띄엄띄엄 일까. 내 기억이 맞다는 확신을 가지고 말해도 될까? 누군가와 서로 자신의 기억이 맞다, 아니다를 가지고 싸우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든다. 모두가 당시에 본인이 느꼈던 감정과 받았던 상처를 중심으로 사건을 취사선택해 기억하기 때문이다.
민영언니의 죽음은 여전히 내게 여러 가지 상실감과 슬픔을 준다. 앞으로 민영언니에 대한 나의 기억이 더 이상 업데이트될 수 없다는 사실도 큰 상실이다. 민영언니가 살아있다면, 언니의 삶과 말, 행동, 그리고 언니가 겪는 스스로의 변화들이 내게 영향을 주고, 그로 인해 내가 아는 언니의 모습이 재구성될 텐데. 하지만 이제 민영언니는 내 기억 속에서 나의 주관에 의해서만 재구성된다.
민영언니의 장례를 치르고 몇 번의 추도식을 거치며 나는 생각했다. 죽음에 대한 추모와 애도는 결국 남아있는 자들을 위한 시간이라는 것. 하지만 언니와의 추억이 멈춰버렸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시간은 멈추지 않아 나는 다섯 살이나 더 먹었는데, 언니와 함께 했던 날들은 늘지 않고 그대로다. 나중엔 다른 시간들이 너무 커져, 언니와 함께 한 시간이 너무 작아질까 두려웠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가진 민영언니에 대한 추억을 나눠 받고 싶기도 했다. 각자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언니가 서로의 마음을 오고 가면 점점 더 커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 날이 있다. 너무 좋아서, 혹은 너무 힘들어서. 그런 날 나는 민영언니를 많이 찾았다. 아마 혼자서 처음으로 제주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던 날이었을 거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다른 여행객들과 어울렸던 경험은 무척이나 신선했다. 여행을 마치고 올라오면서 민영언니 생각을 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언니를 만났고, 대낮부터 술을 마시며 여행 얘기를 했다. 그때 언니가 음식을 주문하자마자 저 사진을 찍어주었다.
언니는 그 후에 내가 갔던 게스트하우스로 떠났다. 하지만 마침 같은 날 제주에 머무르고 있던 서울 친구들을 만나 어울리느라 결국 외박을 했다고 했다.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를 놔두고 다른 데서 놀다 와서 아침에 게스트하우스 사람들 얼굴 보기가 어색하다고 했다.
그때의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늘 같은 곳에 머물렀다. 많은 친구들은 떠나려 했고 떠났다가 돌아왔다가 다시 떠났다. 우리는 벗어나려는 친구들을 말렸다. 하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불안정한 기류가 비행기를 항로 밖으로 흔들듯이, 청춘들은 대부분 불안정했다. 아니다. 그때는 떠난 친구들만 흔들린 건 줄 알았는데, 우리 전체가 불안정한 기류를 탄 비행기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모두 불안정했다. 민영언니는 흔들림을 잘 참고 버틴 사람이었다. 흔들림을 겪어낸 그 마음속에는 얼마나 많은 흔적이 있었을까. 나는 언니가 여전히 궁금하다. 많은 친구들이 떠났다 돌아올 때 늘 그 자리에서 반겨주던 언니는 가장 먼저 멀리 떠났다.
민영언니가 이 세상에 없는 게 슬픈 건, 언니에 대해 내 주관대로 생각하는 게 싫어서다. 내 생각과 다르고 나와 다르더라도 상대방의 모습 그대로를 알아가고 싶다. 언니의 말로 듣고 싶다. 이 마음은 사랑인 것 같다. 언니에게서 받아왔던 마음이기도 하다.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안정감. 사랑을 맘껏 주지 못해 아쉽고 아쉽다.
나는 이제 새로운 친구를 잘 사귀지 않는다. 오랜 친구들만으로도 충분해서 그런건 아니다. 오랜 친구들도 여러가지 이유로 여럿 잃었다. 이렇게까지 쓰고보니 민영언니는 여전히 내곁에 있기에 언니를 잃었다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마음도 든다. 언니가 살아있었다면 틀림없이 내 곁에 있었을거라는 나의 믿음이 맞는지 아닌지는 영원히 알 수 없지만 그 믿음 덕분에 언니는 영원히 내곁에 있다. 나는 어디서든 언니를 떠올리면 사랑이 인다. 원망도 억울함도 없이 오로지 사랑. 그뿐. 나의 주관적인 기억만으로 언니가 존재하는게 싫었지만 언니가 내게 준 좋은 것들만 간직하고 누릴 수 있다는 점은... 어 좋은데? 영원한 친구. 그게 누구일까 묻는다면 단연 첫번째로 말할 수 있는 민영언니.
5주기 추모 페이지에 올라온 겨울 강 앞에서 찍은 언니의 사진이 예쁘다. 그동안은 언니에 대한 사랑이 갈 곳이 없어 시렸는데 이제는 보낸다. 사랑을.

언니, 겨울이 왔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보낸 사랑으로 따뜻하게 지내고 있기를 바랄게. 어디서든 다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