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유도제 필수의약품 지정 촉구! 이것이 우리의 ‘사회적 합의’다

- 시민/의사/약사 1856명 진정서에 성의없는 복붙으로 회피한 식약처 답변에 부쳐

 
[기자회견 순서]
사회 : 문설희(진정인, 사회진보연대)
발언1 : 이서영 (진정인, 의사)
발언2 : 서은솔 (진정인, 약사)
발언3 : 오진방 (진정인, 변화된미래를만드는미혼모협회 인트리)
기자회견문 낭독: 달연(진정인,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동윤진(진정인,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김성이(진정인, 시민건강연구소)
 
** 첨부자료: 발언문, 기자회견문, 기자회견 사진, 진정서 답변 원문
 

[기자회견문]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끝났다! 유산유도제 즉각 도입하라!
- 시민/의사/약사 1856명 진정서에 성의없는 복붙으로 회피한 식약처 답변에 부쳐 -
 

식약처는 근래 유산유도제 필수의약품 지정과 도입을 촉구하는 세 건의 진정서를 접수했다. 지난 5월 4일에 약사 172인이, 6월 21일에 의사 59인이, 그리고 6월 26일에는 시민 1625명이 유산유도제 필수의약품 지정과 신속한 도입을 촉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도합 1856건의 자필 진정서는 산적한 임신중지 제도화의 과제들 중 가장 작은 첫 걸음인 유산유도제 도입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약처는 세 건 모두에 대해 지정 요청을 반려하며, 순차적으로 ‘복붙’이나 다름없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복붙’한 내용의 요지는 ‘유관부서간 협의’가 필요하며 ‘사회적 합의’가 없기 때문에 반려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탁상공론식 답변에 깊은 유감을 표하며 다음과 같이 지적 · 요구한다.

첫째, 식약처는 ‘유관부서간 협의’와 ‘이해 당사자 간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답변하며 지정을 반려했다. 우리는 식약처가 이야기하는 ‘이해 당사자’란 누구를 칭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임신중지 권리에 있어 최전선의 당사자들은 바로 여성들[1]이다. ‘사회적 합의’는 다름아닌 임신중지의 당사자들을 포함해야 한다. 유산유도제 도입은 이미 2017년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23만명 이상이 요구한 바 있으며,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른 '낙태죄'의 법적 실효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다. 안전한 임신중지와 재생산권리의 보장을 요구하는 수많은 시민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계속해서 유산유도제 도입을 요구해왔다. 그리고 임신중지 의료를 제공하는 일선의 보건의료인들도 최선의 의료를 제공하기 위해 유산유도제 도입과 임신중지 의료 건강보험 적용을 요구하고 있다. 임신중지의 가장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주체들이 한목소리로 진정서를 제출한 지금의 상황이 ‘이해당사자 간 사회적 합의’가 아니라면, 식약처가 이야기하는 ‘이해당사자 간 합의’는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것인가? 혹 정부가 말하는 이해당사자는 전문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일부 직능단체와 종교단체에 국한된 것은 아닌가? 임신중지 최전선의 핵심 이해 당사자의 목소리를 배제한 합의는 탁상공론일 뿐이다. 또한, 우리는 지정요청을 반려하면서 유관부서간 협의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검토하겠다는 식약처의 답변은 순서가 뒤바뀐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원에 대해 유관부서간 협의를 시작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협의가 미비하니 민원을 반려하겠다는 것은 말장난이다.

둘째, 식약처는 ‘국가필수의약품’이 보건의료상 필수적이나 시장기능만으로는 안정적 공급이 어려운 의약품이라고 밝히면서도, 유산유도제가 시장기능만으로 도입되지 않고 있는 현실은 외면하고 있다. 우리는 유산유도제가 시장 기능만으로는 한국에 도입되기 어렵다는 것을 지난해 현대약품 사태에서 확인했다. 유산유도제 상품 중 하나인 미프지미소를 도입 신청했던 현대약품은 신청을 자진 취하하였다. 이에 현재 어느 제약사도 유산유도제 도입을 신청하지 않아 도입 논의조차 전면 중단된 상태이다. 그럼에도 식약처는 답변서에서 ‘의약품 제조업체 또는 수입업체에서 의약품의 제조판매(수입) 품목허가 신청 또는 신고 시 의약품의 안전성과 유효성, 기준 및 시험방법 등 제출자료 심사 및 평가 등을 통해 품목허가’를 하고 있으며 유산유도제도 마찬가지 절차를 거쳐 도입할 계획이라고 답변했다. 이는 시민의 건강권 보장에 대한 공적 책임을 지닌 식약처가 개별 민간 제약사의 신청 없이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수수방관하고 있음을 스스로 답변에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식약처 답변 중에 무엇보다 실망스러운 것은 유산유도제 미비로 인한 건강권의 공백 상태에 대해서는 어떠한 답도 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의사 진정서에도 밝힌 바와 같이, WHO는 이미 2005년부터 유산유도제를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하여 각국이 확보하고 접근성을 보장할 것을 권고하고 있으며, WHO에서 발간한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12주 미만의 임신중지에서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의 병합요법은 1순위로 권고되고 있다. 약물적 임신중지는 외과적 임신중지에 뒤지지 않는 효과적이고 안전한 임신중지 방법이다. 임신 9주 이내에서는 95% 이상, 임신 10주 이내에서는 93% 이상의 성공률을 보이며, 임신 1분기 이내 사용 시 중증 합병증(입원, 수혈, 응급실 내원, 감염, 사망 등)은 0.15% 수준으로 여타 전문의약품보다도 안전성이 입증된 필수재이다. 반면 이를 사용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건강권 침해는 다층 다단하다. 단적으로 외과적 임신중지가 불가능한 여성의 경우 유산유도제가 도입되지 않는 이상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가로막히는 심각한 건강권 침해에 직면한다. 또한 유산유도제 도입 지연으로 한국의 여성들은 여전히 약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하고 온라인에서 약을 구하거나, 병원에서도 효과가 더 좋은 약을 사용하지 못해 대체 약물을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불법 의약품 근절’프레임으로 일관할 뿐 정작 정부의 책임 방기로 국내 미비한 유산유도제를 어떻게 공급할지에 대한 계획이 전무하다. 유산유도제를 둘러싼 이 모든 논쟁에서 건강권 보장에 나서야 할 정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여전히 임신중지를 공중보건과 권리의 차원이 아니라 통제의 대상으로 치부하는 과거의 굴레를 정부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 2020년 12월 31일 낙태죄가 비로소 효력을 상실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임신중지가 이제는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합의를 확인한 것이다. 임신중지 비범죄화라는 헌법적 권리가 인정된 지금의 한국사회의 ‘합의’를 식약처를 비롯한 행정부처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우려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유산유도제 도입을 포함하여 안전한 임신중지가 누구에게나 가능하게 하기 위한 사회적 과제는 산적해 있다. 임신중지 의료전달체계, 의료인력양성, 건강보험 급여화 등 안전한 임신중지 의료를 위한 기반 마련 등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개혁과제는 물론이고, 보건복지부와 식약처 등은 가장 기초적인 과제라 할 수 있는 유산유도제 도입조차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우리는 유산유도제 도입에 있어 국가 책임을 실현할 경로로써 유산유도제에 대한 ‘국가필수의약품’ 지정과 신속 도입을 다시한번 촉구하며, 제대로 된 답변을 요구한다. 비범죄화 3년째 중언부언을 반복하는 이 세 건의 답변서는 우리에게 백지나 다름없다. 우리는 계속해서 보건복지부와 식약처에 인권과 건강권, 그리고 과학적 이해에 기반하여 책임 있는 답변과 행동을 요구할 것임을 밝힌다.

 

 


[1] 젠더 이분법에 따른 지정성별 여성만이 임신중지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퀴어 또한 임신중지의 당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한 ‘여성’이라는 표현은 국가가 임신할 수 있는 신체들에 대해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언어를 전유하여 표현한 것이며, 임신중지를 경험하는 다양한 젠더를 배제하고자 사용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