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화와 노동

사회진보연대 주간웹소식지


제 643호 | 2013.10.30
첨부파일
sola_643.pdf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는 불가능하다

시간제 노동 확산이 가져올 결과

PSSP관리자
박근혜 정부가 고용률 70% 제고를 위한 핵심 정책으로 시간제 일자리를 확산하겠다고 발표한 이후, 무수한 비판이 쏟아졌다. 한국의 시간제 일자리가 저임금에, 고용불안이 심각하고, 사회보장혜택도 없는 일자리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박근혜 정부는 새롭게 공공부문에서 창출할 일자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질의 일자리일 것이라 강조한다. 소위 네덜란드 모델을 한국에 정착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 밝히는 연구도 쏟아지고 있다.
현재의 시간제 일자리 확산 정책에 대해서 많은 논자들이 비판적 입장을 갖지만, 그 결론은 조금씩 다르다. 시간제 일자리의 확산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 있는 반면, 시간제 노동자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고 시간제 노동자의 권리 확보를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후자의 입장은 한국의 노동조합도 네덜란드처럼 ‘도입반대’가 아니라 ‘시간제 노동자의 권리 확보’로 방향전환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 한국에서 가능한가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로 유명한 나라는 전체 노동자 중 37%가 시간제 노동자인 네덜란드다. 네덜란드는 시간제 일자리의 65%가 정규직이고, 법과 단협으로 동일노동-동일노동조건을 보장한다. 시간제 노동자는 비례임금을 보장받으며, 각종 수당에서도 제외되지 않는다. 사회보장제도에 관해서도 동등한 권리를 누린다. 또한 전일제에서 시간제로, 시간제에서 전일제로의 전환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정부는 한국에 네덜란드 모델을 도입하겠다며 고용안정이 보장되고, 사회보험・교육 훈련 및 승진 ・시간당 임금에서 차별을 없애 시간제 일자리를 양질로 만들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에서 몇몇 제도를 보완한다고 하여 양질의 일자리가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한국은 시간당 임금 수준이 낮아, 전일제 일자리에서도 부족한 임금을 보충하기 위해 초과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시간당 임금의 비례원칙이 지켜진다고 하더라도 적은 시간 일할 수밖에 없는 시간제 노동자는 저임금에 시달리게 된다. 사회보험 역시 법적으로 권리를 보장한다 해도 실제로는 차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저임금인 비정규직은 4대 보험에 가입할 기회가 주어져도 보험료가 부담스러워 이를 스스로 거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시간제 노동자 역시 같은 곤란에 처할 것이다. 시간당 임금이 낮은 한국의 노동구조 상,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또한 네덜란드 모델은 노사정의 안정적 사회적 합의를 통해 가능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노사정 합의는커녕 국제노동기구(ILO)의 권고조차 무시하며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있다. 노사정 합의는 정부의 의지 뿐 아니라 노동권에 대한 우호적인 사회 여론과 높은 조직률, 강력한 사민당이 존재했던 곳에서 가능했는데, 한국의 조건은 이와는 너무도 다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조차 노사정 합의는 노동조합을 노동법 개악의 들러리로 세우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박근혜 정부의 성격 상, 시간제 일자리 개선책을 요구하는 전략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양국 간 사회보장제도의 차이도 고려되어야 한다. 네덜란드는 기초연금(1층연금)의 소득대체율이 평균 33%에 이르고, 국가에 의해 강제되는 직역연금(2층연금)까지 합하면 소득대체율이 70%에 이른다. 따라서 임금소득이 다소 적더라도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된다. 네덜란드의 노인빈곤율은 2%로 OECD국가 중 가장 낮다. 기초연금의 소득대체율이 10%에도 미치지 못하고,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도 현행 45%에서 더 낮아질 것으로 예상되며, 노인빈곤율은 45%에 육박하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상황인 것이다. 사회보장제도의 변화 없이 시간제 노동자만 늘린다면 더 많은 노동자들이 빈곤으로 내몰릴 것이다.

여성을 영원히 반쪽짜리 노동자로

시간제 일자리의 정책 대상이 여성이고, 실제로도 여성들이 시간제 일자리에 많이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도 중요하다. 네덜란드 모델은 ‘1.5인 소득자 모델’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주 생계소득자를 남성으로 설정하고, 정상가족이 유지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혼이나 사별 등으로 1인분의 온전한 소득을 얻어오는 남성이 없으면 생계 불안에 시달린다. 이는 소위 모범사례인 네덜란드도 마찬가지로, 한부모 가정은 정부로부터 생계 지원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게다가 생애소득의 감소는 은퇴 후 노후까지 영향을 미친다. 시간제 일자리에 종사했던 여성은 은퇴 후에도 전일제에 종사했던 남성보다 현저히 낮은 연금을 받는다. 즉 여성은 평생 반쪽짜리 임금과 반쪽짜리 연금으로 자신의 삶을 유지해야 하며, 이는 여성의 자립을 가로막는다.
또한 시간제 일자리는 여성의 일-가사 양립이 당연하다는 인식을 전제한다. 이미 일과 가사의 이중부담에 허덕이는 여성들의 부담을 줄이기는커녕, 반쪽짜리 임금을 받으며 가사노동과 양육, 돌봄노동까지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찍부터 1.5인 소득자 모델이 정착된 네덜란드는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보육시설 확충이 지체되었고,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 가장 먼저 보육시설과 요양시설에 대한 예산이 줄어들어 여성들의 부담이 증가하고 있다.
노동조합이 여성을 노동시장에서 반쪽짜리 인간으로 못 박을 것이 아니라면, 시간제 일자리의 확산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시간제 일자리 확산 막아내자

한국은 시간제 노동 비중이 OECD국가 중 상당히 낮은 편이다. 게다가 정부의 민간기업 시간제 컨설팅 사업은 계속 실패하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2010년부터 28억 5천만 원을 들여 281개 업체에 컨설팅을 지원했지만, 새롭게 고용된 시간제 노동자는 647명뿐이었다. 정부가 밀어붙이고는 있지만, 자본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지레 시간제 노동의 확산을 현실 추세로 받아들이고 원칙을 접을 필요는 없다. 저임금・불안정 일자리로 고용률을 눈속임하려는 정부의 시간제 정책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
‘여성,고령층이 원한다’며 시간제 노동을 확산하려는 정부의 주장은 이미 시간제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사회적 목소리가 높아질 때 거짓임이 드러날 것이다. 민주노총, 특히 전교조, 공공운수노조, 공무원노조는 시간제 일자리 정책을 비판함과 동시에 시간제 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내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 시간제 일자리의 주요 대상이 될 청년, 여성, 고령층을 노동조합의 주체로 세울 수 있는 방안을 지금부터 고민해야 한다.
주제어
노동 여성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