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제국--미국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독립> 우리가 과연 미국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5 대 4라는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부시를 미국 대통령에 당선시킨 2000년 미국 대선은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져주었다. 불행하게도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대단한 민주주의 국가 미국'이라는 위상을 전세계의 비웃음과 조롱거리로 만들었던 미대선. 흑백과 빈부로 분열된 국민, 철저한 당파적 견해를 보여준 '공평한 법의 지배', 모순으로 가득찬 선거제도, 민주와 공화당이 아닌 제3의 당은 존재하기 어려운 정당제도 등을 보면서도 우리의 언론들은 대부분 '역시, 미국은 미국이야'라는 반응이었다. 미국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이 이러한 미국에 대한 인식을 이끌어 냈는가? '민주주의의 모범국가' '자유와 평등의 아메리카' '인권과 자유, 평화의 천국' '완벽한 미국식 양당제도' 등 알게 모르게 우리의 뇌리에 뿌리박인 미국 관념이 이와 같은 빈곤한 인식을 낳지 않았을까. 촘스키, 월러스틴과 더불어 대표적인 미국의 좌파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오만한 제국--미국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독립>(당대출판사, 2001. 1)에서 아주 명료한 문체와 도전적인 시각으로 '미국의 이데올로기', 즉 지금까지 미국의 국가사상으로 간주되어 왔던 관념들을 파헤친다. 그는 "관념은 결코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의 본성,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 역사의 이용, 공산주의, 언론의 자유 그리고 은폐되어 있는 미국의 계급 문제 등에 관한 정통적인 시각들에 메스를 가한다. 그는 헌정 2백주년 기념을 둘러싼 낭만주의에 도전하면서 "헌법 수정조항 1조에 대한 재고"를 제안한다. 그는 마키아벨리와 플라톤의 사상을 중앙아메리카와 베트남의 현실과 연결시킨다. "나는 마키아벨리에서 헨리 키신저까지, 아테네 감옥의 소크라테스에서부터 코네티컷 형무소의 카톨릭 신부에 이르기까지 세기를 넘나들면서 내가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모든 연관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하워드 진은 우리가 전혀 예측도 하지 못한 채 경험하였던 사건들은 우리에게 이른바 "사회적 변화의 궁극적인 힘"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급속하게 발전하는 세계에서 이 책은 우리 시대의 딜레마에 대한 실천적인 길을 제시한다. 열정적이면서도 사려 깊은 논리정연함으로 씌어진 이 책은 한 인간의 인생경험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하워드 진의 미국역사 읽기--미국의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라 하워드 진은 다음과 같은 미국 문명의 특정한 정통(orthodox) 관념들을 재검토해 보고, 그것을 되씹어 본다. "현실적이 되어라. 그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다. 본래는 어떠해야 하는가 따위를 생각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가르치거나 뉴스를 쓰고 보도하는 사람들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 "부당한 전쟁도 있지만, 정당한 전쟁도 있다." "명분이 아무리 좋아도 일단 법을 어기면 기꺼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 "열심히 일하면 얼마든지 잘살 수 있다. 가난하다면 스스로를 원망할 수밖에 없다." "언론의 자유는 바람직하지만 국가의 안전을 위협할 때는 그렇지 않다." "인종간의 평등은 바람직하지만, 우리는 이미 할 만큼 했다." "헌법은 우리의 자유와 정의에 대한 최고의 보증이다." "미국은 공산주의를 막고 민주주의를 촉진시키기 위해 때때로 전세계적으로 군사력을 행사해 간섭해야 한다." "변화를 원한다면 적절한 절차를 밟아야만 한다." "전쟁을 막기 위해 핵무기가 필요하다." "세상에는 부당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지만, 부와 권력을 가지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등등. 하워드 진은 이 책에서 시종일관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즉 불편부당한 객관성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중립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중립적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세상에는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다. 나는 오늘날의 사상들을 객관적으로 제시하지 않으려 한다. 객관적으로 제시한다는 것이 곧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명한 견해가 없다는 식으로 비쳐진다면 말이다. 다만 나와는 반대되는 생각들도 정확히 대변해 공평성을 유지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는 현상태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또 어떻게 시정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나 자신의 견해가 실려 있다. 나는 이 책이 독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를 원한다. 논쟁과 사실의 힘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적인 사회관념에서 밀려나 있는 사고방식들을 제시하고 또 그 문제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다. 좀더 많은 생각의 틀이 주어진다면 사람들이 좀더 현명한 결론에 이를 것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마키아벨리적 현실주의와 미국의 외교정책 하워드 진은, 미국의 독립선언문에는 "어떠한 형태의 정부가 이와 같은 목적(삶, 자유, 평등, 행복의 추구)을 파괴할 때는 시민은 언제라도 그것을 바꾸거나 철폐시키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권리가 있다"라고 씌어 있지만 미국의 외교정책은 국력, 정복, 지배로 상징되는 정치적 술수의 대명사인 마키아벨리를 따른다고 통박하고 있다. 그는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이 말하는 외교정책의 목적, 즉 '국가이익'에 봉사하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라는 언어는 마키아벨리보다도 더 사기성이 짙다고 말한다. 미국의 중앙아메리카 정책, 파나마운하의 지대를 독점하기 위한 침략, 베트남전쟁 등을 통해 이것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 수단에는 무력침공 외에 수많은 거짓들이 난무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워터게이트와 이란-콘트라게이트 사건에서 보여준 소위 '그럴듯한 부인'이라는 기만책이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 정치학자 로버트 터커, 맥스 러너, 딘 러스크, 아서 슐레진저 2세, 키신저 등과 같은 소(小)마키아벨리들의 역할도 빼놓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 폭력과 인간 본성 오랜 옛날부터 무게 있는 지식인들에 의해 지지되어 온 "폭력은 인간의 본성이야"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윌슨(E. O. Wilson), 스탠리 밀그램, 콜린 턴불 등의 논리와 미라이 대학살, 에마 골드만의 사상, 하워드 진 자신의 경험(2차대전 참가, 흑인 민권운동) 등을 통해 "인간이 폭력에 대해 무한한 수용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친절을 베풀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 또한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역사의 이용과 오용 역사 사실 중 특정부분을 강조하거나 삭제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가볍게 다룬 그럼으로써 결국 역사를 왜곡시킨 미국역사의 단면들을 들추어낸다. 그 대표적인 것이 러들로(Ludlow) 학살이다. 1914년 콜로라도주 남부의 록펠러가 소유 석탄광산에서 일어난 광부들의 파업 당시 13명의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정부군에 의해 불에 타죽은 사건이다. 미국의 거의 모든 교과서에 실린 이야기, 금에 눈이 멀어 자신을 순진하게도 친근하게 맞아들인 인디언들을 칼로 베고 노예로 만들고 살해한 콜럼버스도 예외일 수 없다. 또한 하워드 진은 역사적으로 사소한 사실을 강조하고 오직 사실 자체만을 위해 연구하는 문화적인 경향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것은 미국 역사교육에서 부자와 권력 있는 사람(정치지도자, 기업가 등)의 행적을 강조하고 군사(전쟁과 전투)와 군사영웅을 기리는 반면, 반전운동과 전쟁의 어리석음에 맞서 싸운 사람들에게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지 똑똑히 보여준다. 정당한 전쟁, 부당한 전쟁 하워드 진은 전쟁을 미화하는 것과 좋은 전쟁과 나쁜 전쟁으로 구분하는 두 가지 관점을 살펴보고, 전쟁이란 너무나 악한 것이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세번째 관점을 역사적 사실들을 들어 제시하고 있다. 그는 1,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중동전쟁, 베트남전쟁 등의 폐해를 생생한 사실과 증언들을 토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우리가 비록 정당한 전쟁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금세기를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속시킬 필요는 없다. … 동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전쟁으로부터 반전 비폭력 운동으로의 여행에 동참할 것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모험은 이것이다. 어떻게 전쟁 없이, 투쟁하여 정의를 획득할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 법과 정의 법의 통치(the rule of law)라는 미국의 신화가 있다. 즉 "법에 복종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하워드 진은 법에의 절대적 복종은 일시적으로 질서를 가져올 수는 있으나, 정의를 가져오지는 못하다고 밝힌다. 즉 우리에게는 법을 준수하는 것보다는 정의를 추구할 의무가 더 많다는 것이다. 법에 대한 불복종이 무정부상태로 나아갈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60년대 초 미국 남부에서 일어났던 흑인들의 대중시위를 예로 들어 반박하고 있다. 그는 법의 통치는 부와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를 해소하지 못했으며, 그 불평등을 법의 권위로 강화하였다고 쓰고 있다. 또한 '법의 통치'가 '사람의 통치'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시민들을 기만하는 데 불과하다고 역사적인 증거들을 들어 설명한다. 플라톤의 슬로건 '사랑하든지 그렇게 못하겠거든 떠나라'에 대해서는 시민불복종의 정당성으로 반박한다. 여기에는 법정에서 정의가 어떻게 무너졌으며 수많은 시민불복종 운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상세히 제시되고 있다. 경제정의 하워드 진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미국에서의 경제정의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미국의 성공과 실패는 이런 것이다. 경이로운 기술적 진보와 함께하는 가난과 기아. 너무나 엄청난 부자계층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풍요를 지켜보며 절망과 비참 속에 살아가는 남자·여자·아이 들의 계층. 이토록 극명한 대조 속에서 범죄와 폭력, 마약중독이 생겨난다는 게 과연 놀라운 일일까? 이런 불안정 속에서 정신질환, 결손가정, 알코올 중독이 생겨난다는 게 또한 놀라운 일이겠는가? 분명 우리는 나라 전체에 통용되는 하나의 계급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만인에게 자유와 정의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일부 계층은 극한적 호사를 누리고 나머지는 비참함을 누릴 뿐인 사회에서, 정의는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가? 또한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진정으로 분노하여 이런 질문을 던져볼 길이 가로막혀 있는 상태에서, 중산층은 편안할까?" 언론자유 미국은 언론의 자유가 있는 축복받은 나라라고 배우며, 헌법 수정조항 1조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믿음은 미국 사회의 이데올로기 중 일부라고 하워드 진은 말한다. 그는 '사전제약 금지'를 명시한 헌법 수정조항 1조의 위선에 대해 수많은 증거들을 들어 비판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는 국가안보에 의해 거부되고 있으며 헌법에 보장된 언론자유권은 지역경찰의 결정에 좌우되며 직장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보다 더 심각한 주제는, "언론의 자유란 단순히 '예, 아니오'의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그것은 또한 '얼마나 많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자유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돈을 갖고 있는가, 어떤 힘을 갖고 있는가, 또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어떤 물질적 자원을 갖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은 엄청난 수단상의 불평등을 인정하고 시정할 수 있는 조취를 취하지 않는 한 헌법 수정조항 1조의 실질적인 의미는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하워드 진이 말하는 언론자유의 두 번째 큰 문제는, 국내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또 정부가 국내외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 그런 정보가 없다면, 자신을 표현할 자유를 가진다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풍부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의제 정치 하워드 진은 미국 흑인들의 기나긴 투쟁의 역사와 미국 헌법에 보장된 제권리의 유린을 약 200년에 걸친 역사적 사실들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는 미국 흑인운동이 가르쳐준 소박한 진실은, 인권 쟁취의 중대한 고비에서 대의제 정치가 표방하는 공식적 절차, 이른바 공식 경로는 간혹 유용하긴 하지만 결코 충분치 못하며, 장애물이 되기 십상이며, 역사를 움직여온 것은 대의를 위해 결속하여 위험을 같이 겪고 희생을 함께해 온 민중들의 직접행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공산주의와 반공주의 국내외에서 그토록 많은 인권을 희생시키면서 오랫동안 고수해 온 반공주의라는 광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덧붙이기를, "다가오는 새로운 세기는 전세계 사람들이 낡은 교조와 얼어붙은 도그마, 단순무식한 규정들을 폐기하기에 적절한 시대가 될 것이다. 새 세기는 아마도 관습의 경계를 벗어나 생각하는 걸 반겨주는 시대가 될 것이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자유주의와 아나키즘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대, 좋은 아이디어라면 그것이 속한 주의주장이 무엇이든 괘념치 않는 시대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좋은 아이디어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라고 희망하고 있다. 궁극적인 힘 하워드 진은 다음의 두 가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첫째는 희망이 없다는 이유로, 즉 총과 돈을 쥐고 있는 자들 그리고 권력유지의 결의를 완강히 내보이는 자들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힘이 압도적으로 우세해 보인다는 이유로 정의를 위한 투쟁을 포기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회현상의 명백한 예측 불가능성에 비춰볼 때, 전쟁과 전쟁준비를 위해 동원된 역사상의 온갖 변명들, 즉 국가방위·국가안보·자유·정의·침략저지 등은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폭력 없는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한 '비폭력'이 아니라 비폭력 직접행동(nonviolent direct action)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미국의 정통적인 이데올로기에 거침없는 비판을 들이댄 하워드 진. 그러나 오랫동안 진보적인 활동가들이 침체되어 있고 약세를 면치 못했던 보수적인 정치풍토임에도 불구하고, 하워드 진의 역사 읽기는 미국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우리는 부와 권력이 지배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하지만 다른 많은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여지와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배자들은 우리가 이 열려 있는 틈들에 만족할 것이며, 따라서 그 틈들을 이용하여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과감한 변화들을 모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점치고 있다. 우리는 이 새로운 모험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다. 미국에는 정통적인 사상에 맞서 기존 제도에 저항해 온 기나긴 역사가 있다. …18세기의 보스턴 빵폭동과 캐롤라이나의 세금반대운동을 벌였던 농민들,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시절의 흑인과 백인 노예폐지론자들, 기찻길·광산·섬유공장·자동차공장에서 경찰의 곤봉과 군인의 기관총에 맞서 싸운 노동자들, 부엌에 매여 있기를 거부하고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위해 행진하다 감옥에 갇혔던 여성들, 1960년대의 흑인 시위자들과 반전 행동주의자들, 1980년대에 산업공해와 전쟁준비 반대 시위를 했던 사람 등이 그들이다. …우리 세기의 경험은 낡은 교리들, 즉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기존 이념들의 탄탄한 다발을 해체하고, 그 모든 요소들을 탐색·검토하고 서로 다른 요소들을 섞어, 좀더 느슨한 새로운 이념의 다발들을 창조해 낼 것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인간적인 문제들에 관해 새롭고 창의성 넘치는 접근방법을 반드시 창출해 내야만 한다." 140년 전 프랑스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책을 써서 미국을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찬양했다. 그로부터 130년 후 하워드 진은 <오만한 제국>(Declaration of Independence: Cross-Examining America Ideology)을 통해 미국의 지배적인 관념, 이데올로기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라고 당당히 말한다. 이제 우리는 하워드 진을 통해 비로소 미국의 실체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는 수단을 얻게 된 것이다. 미국 최고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 하워드 진은 애틀랜타의 스펠만대학(Spelman College)과 보스턴대학교(Boston University)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현재는 보스턴대학교의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미국 민중의 역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미국 민중저항사} 1·2, 일월서각, 1986) 이외에도 10여 권의 책을 집필, 편집해서 발간했다. 에마 골드만의 삶을 그린 그의 희곡 {에마}(Emma)는 보스턴과 뉴욕, 런던, 에든버러, 도쿄에서 상연되었다. 현재 그는 매사추세츠주 오번데일에 살고 있다. 미국인으로서 미국의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 반전운동을 공부했거나 이런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대에 자라난 사람이라면 대개 하워드 진을 안다. 아니 콜럼버스를 영웅이라기보다 오히려 금수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혹은 영화 <굿 윌 헌팅>을 보았다면 아마 하워드 진과 그의 저서를 접하였을 것이다. <굿 윌 헌팅>에서 심리적으로 불안한 천재 역을 맡은 배우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매트 데어먼은 심리학자 로빈 윌리엄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워드 진의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는 "결국 당신을 궁지로 몰아넣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1950년대에 애틀랜타에서 하워드 진에게 배운 소설가 앨리스 월커(Alice Walker)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스승이자 은사이셨던 이 겸손한 영웅, 이 래디컬한 역사학자이자 민중을 사랑하는 트러블메이커, 우리 곁에서 늘 우리와 고통을 함께하는 이 분에게 내가 느끼는 사랑과 존경과 찬양을 어떤 식으로든 전하고 싶다는 것이다. 하워드 진은 지금까지 나의 스승 중 최고의 스승이셨고 가장 재미있는 분이셨다." 하워드 진은 결코 실천이 없이 힘없는 이론만으로 무장한 역사가가 결코 아니다. 교육의 기회를 거의 가지지 못한 블루칼라의 자식으로 태어난 하워드 진은 찰스 디킨스의 책을 읽고 또 조선소 노동자로 일하면서 사회의식에 눈을 떴다. 그는 2차대전 때 전투기 폭격수로 복무하면서 전쟁의 끔찍한 본질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1950년대에 애틀랜타의 흑인 대학들에서 교수로 있었을 때, 당시 학생들과 함께 흑인민권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들의 투쟁을 여러 글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노엄 촘스키와 팀이 되어 베트남전쟁을 비판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순회강연을 계속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역사적인 진실들이 그의 명저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에서 농락당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으나, 그는 공식역사는 세계의 정복자들에게 편향되어 있고 그들을 중심으로 엮여져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라디오의 한 인터뷰에서 그는 콜럼버스를 히틀러와 비교하면서 위험하고 잔인한 사람이라고 그 특징을 묘사한다. 하워드 진은 역사에 대해 보다 공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다음은 한 전화인터뷰에서의 하워드 진의 말이다. "미국은 번창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 쇠락해 가고 있는 사람은 소수이다. 하지만 바로 이 소수를 기억하는 것은 변함없이 중요하다. 바로 이들이 전세계 대부분의 삶의 가시적인 지표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21세기는 절대로 전쟁으로 점철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전세계 모든 나라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전쟁으로 몰고 가는 국가적 레토릭에 지쳐 있다고 생각한다. 또 나는 부의 재분배를 생각한다. 지구상의 60억 가운데 50억 사람들이 빈곤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나는 구속에 대해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을 구속상태에서 풀어줄 대안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학자이자 활동가로서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하워드 진은, 역사에 대한 지식은 민중의 일상생활에 매우 중요하며 또 사회적 변혁의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역사적 변혁은 이른바 위대한 사람들의 지혜와 통찰력보다는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의 대중운동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인식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 그는 역사가가 짊어져야 할 사회적 책임은 인간들이 직면한 갈등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워드 진의 널리 알려진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는 그의 이러한 시각에서 미국의 역사를 살펴본 책으로서 현재 40만 부 이상이 팔렸다. 그러나 하워드 진은 역사적 변혁운동에 대해 집필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는 시민권운동과 학문자유화 운동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베트남전쟁과 걸프전에 대한 반전운동에도 열심이었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늘 사회적 이슈들과 결부시키려고 노력한다. 이 점은 내가 남부의 스펠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실제로 경험한 바이며 또 그때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나는 A People's History를 쓰게 되었다. 이때 비로소 나는 역사책에서 한 번도 거론되어 본 적이 없는 민중들이 만들어나가는 역사를 내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하워드 진은 오늘날 미국의 풍경, 즉 임시노동자와 다국적기업, 시민들의 고립 증대는 대중운동의 형성을 저해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오늘날처럼 사람들이 고립 분산되어 있고 매우 다양한 인종이 뒤섞여 있는 미국에서 대중운동을 건설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들이 겪는 부당함과 학대와 모욕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고 느낄 때, 그때 새로운 사회운동은 태동할 것이다." 오랫동안 진보적인 활동가들이 침체되어 있고 약세를 면치 못했던 보수적인 정치풍토임에도 불구하고, 하워드 진의 역사 읽기는 미국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나는 희망을 가진다. 그러나 그 희망이 실현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나가는가에 달려 있다. 만약 당신이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아무런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희망을 가질 권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