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18일(토) 2시에 개최될 예정인 금융세계화팀 토론간담회 발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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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과 국민국가의 위상 변화

이 호 영(한국정신문화연구원 초빙연구원)



1. 들어가며

19세기가 인민주권과 민족주의의 시대였다고 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19세기에 탄생한 다른 사회과학 분과학문과 마찬가지로 사회학은 이러한 인민주권과 민족주의를 담아내는 그릇, 즉 국민국가의 경계를 사회의 경계와 동일시하면서 사회의 통합과 변동, 해체를 연구해왔다. 이 경계 안에서 시장과 민주주의, 참정권과 사회권이 사고되었으며 다양한 사회들간의 비교가 이루어졌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러한 경계가 모호해지고 ‘사회=민족'이라는 등식을 의문시하게 된 것은 ‘경제적인 것'(the economical)과 ‘사회적인 것'(the social), 그리고 ‘문화적인 것'(the cultural)의 발전 속도가 같지 않았고 결국 각각의 차원이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국제화라고 부르든, 아니면 지구화라고 부르든, 문제의 본질은 이제 폴라니가 말했던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분리(disembedding)가 국경을 넘어서 작동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자본주의적 시장은 가장 먼저 국경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렸지만 이 시장이 스스로를 정당화하지 못하는 한, 즉 시장의 확장이 모든 사람의 이익을 자동적으로 보장하지 않는 한, 사회적인 것에 대한 요구는 함께 국가의 경계를 넘을 수밖에 없다.
현재의 유럽연합(EU)이 처한 딜레마는 이런 관점에서 가장 잘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단일시장의 건설을 통한 유럽국가들의 경쟁력강화라는 목적을 가지고 시작된 '위로부터의 유럽통합'은 사회문제의 유럽화라는 원치 않았던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특히 이 문제는 유럽에서 완전고용의 신화가 깨지고 복지국가가 위기에 처한 시기에 대두되어 몇몇 국가들이 골치 아픈 국내문제를 외부화하는 핑계가 되기도 했다. 한편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현실화시킨 유럽시민권의 탄생으로 시민권(citizenship)은 드디어 두 세기만에 국적(nationality)으로부터 분리되어 더 광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유럽연합은 과연 근대국가가 전제했던 민족적 정체성을 뛰어넘는 새로운 정체성의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을까? 사회학은 새롭게 제기된 사회/문화적 통합에 어떤 전망을 제시할 수 있을까?

2. 근대적 국민국가의 위기와 지역화의 도전

19세기 유럽에서 발전한 국민국가는 정치적 정당성을 담지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규범적 정치체(political unity)로서 전세계 속에 자리를 잡았다. 이 정치적 정당성은 국민국가에 소속되어 있는 성원들의 문화적 동질성을 극대화하는 과정 속에서 유지되어 왔으며 이는 한편에서 자격 있는 시민들의 포섭(inclusion of the qualified)을, 다른 한편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배제(exclusion of the disqualified)를 작동시키는 기제였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에서 최초의 시민권이 재산권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시민권의 확립이 곧바로 비시민(非市民), 즉 여성, 어린이, 외국인을 탄생시켰던 것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다른 한편, 인민주권에 기초한 공화국은 이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는 외부의 타자들, 즉 외세와 맞서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정당성을 구축하였다. 애국주의와 ‘근육질 민주주의'의 신화는 전쟁준비와 전쟁의 과정 속에서 강화되었으며 국가는 연대와 단결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 수 있었다.
요컨대 집합적 정체성의 근대적 형식으로서의 국민국가는 사실상 끊임없는 내부와 외부의 구별짓기(inclusion/exclusion)의 과정 속에서 성장한 것이며, 이는 시민권과 영토화된 주권이라는 서로 모순된 두 가지 권리의 길항작용의 결과물인 것이다. 겔너가 말하는 ‘문화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통일이란 하나의 영토 안에서 문화적 동질성과 정치적 통일성을 보장하는 국경의 확립에 다름 아니다.(Gellner, 1989) 계약론적 국가와 문화론적 국가를 대립시키는, 기존의 국민국가 형성의 두 가지 길에 대한 논의는 정치적 이성에 기초한 공화주의적 보편주의와 문화적 공통의 뿌리에 대한 특수주의가 대립하는 지형이지만 역사는 어떤 국민국가도 이러한 이념형적 구분에 꼭 들어맞는 길을 통해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국민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국내시장, 정치제도 및 문화는 국민국가를 떠받치는 기둥의 역할을 해왔다. 경제적인 차원에서 볼 때, 국내시장은 무엇보다도 모든 경제정책의 출발점을 이루는 가정으로서 기능해왔다. 아담 스미스를 비롯한 자유주의 경제학자나 케인즈로 대표되는 사회시장론자들은 모두 국경 내부의 인민들간의 생산과 교환을 근대 경제의 기본틀로 간주하고 경제이론을 발전시켜왔다. 브로델도 지적하는 것처럼 국내시장(national market)은 주어진 정치적 공간 속에서 획득된 경제적 응집성을 가리키며 무엇보다도 영토국가(Territorial State), 혹은 민족국가(National State)라고 불렸던 틀을 가리키는 말이다.(Braudel, 385) 근대적 정치제도 역시 그것이 대표해야 할 인민의 범위와 관련하여 형식적으로나마 전인민의 권력을 표방해왔다. 1835년, 토크빌이 갈파했건 바대로 유권자의 자격제한이 일단 완화되기 시작하면 그 자격제한은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결국 완전히 폐지되는 경향으로 나아갔다. 문화적 영역은 ‘신민'을 ‘시민'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어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출판자본주의'(print capitalism)를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Andersen, 67-68) 이 외에도 공공교육의 보급과 표준어의 제정 등을 통해 국가는 국가와 그것을 떠받치는 관료제가 만든 범주들을 보편적인 표상체계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Bourdieu, 1999) 이 과정에서 '이질성'은 언제나 사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한 국가의 문화정책은 동화(assimilation)와 통합(integration)을 목표로 영토화된 국민국가 내부에서 국기, 국가, 국경일등의 제정을 통한 상징과 동원의 정치를 수반하는 것이었다. 19세기의 분과학문 체제는 이러한 영역들을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지만 이러한 ‘분리된 사고’는 ‘분리된 실천’으로 - 경제문제는 경제논리로 풀어야 한다는 - 나아가거나, 기껏해야 환원주의로 - 문화적 변동은 경제변동을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따라서 서로 긴밀히 연관된 총체적 변동양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20세기말의 반성적 사고들은 보여주고 있다.
현실 속에서 근대적 국민국가의 두 차원, 즉 정치적 차원과 문화적 차원은 국민국가 안에 항상 공존해왔다. 혈연의 논리, 나아가 공동의 역사적, 문화적 유산의 논리는 공동체의 구성에 대한 계약론적 논리와 대립하고 있지만, 이러한 대립은 현존하는 국민국가의 지속, 유지에 걸림돌이 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이 대립의 해소를 사회통합의 일차적 과제로 삼는 여러 정책 속에서 정체성 형성을 위한 근거로 작용한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민주적인 국민국가의 구성원리 자체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의미의) 시민과 (구체적이고 특수한 의미의) 개인, 다시 말해서 공적인 인간과 사적인 인간의 대립 위에 서있다는 사실이다.(Schnapper, 1998) 전자가 공동선을 추구하며 연대를 통해 공존을 모색하는 존재로 가정된다면, 후자는 사적인 이익, 특히 경제적인 의미에서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펼치는 존재라는 홉스식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이 긴장이 결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흡수함으로써 해결될 수 없음을 눈치 채게 된다.
이러한 모순은 유럽통합과정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유럽연합의 성립과정을 들여다보면 상위의 국가공동체 - 일종의 유럽적인 국민국가의 건설 - 의 조건을 재창출하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Morley & Robins, 1995) 그러나 아래에서 보게 되듯이, 전후의 유럽은 냉전의 산물로서 출현한 것이며 서로 다른 목표를 추구했던 이해관계의 이합집산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EU내부에서 국민국가가 성취했던 것과 같은 통합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은 기존의 사회학적 범주들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며 나아가 새로운 정체성이 생성되는 기제를 이해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3. 전후의 유럽통합 : 다차원적 과정

주지하는 바대로, 20세기 초반 유럽에서 세력균형의 붕괴는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이 전쟁은 세계질서 속에서 유럽의 위상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1차 대전 후 유럽지도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 터키 등의 제국들이 사라졌으며 대신 핀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우크라니아와 같은 새로운 독립국들이 최초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민족주권의 원칙을 내세워 평화를 확보해줄 것이라 믿었던 베르사유 강화조약은 승전국과 패전국 모두에게 복수심만을 심어주었으며 많은 유럽인들은 이 아슬아슬한 평화가 장기적인 휴전상태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을 주창한 아리스티드 브리앙을 비롯하여 여러 이상주의적 정치가들이 범유럽적인 정치조직을 국제적인 대규모 전쟁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대안으로 내세웠지만 그 어느 것도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1920년대 말의 위기는 산업과 금융으로부터 도래했지만 그 효과는 대단히 정치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1936년 독일이 로카르노 협정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섬에 따라서 다른 국가들 역시 재무장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는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했던 유럽국가들의 경제를 회생불능의 지경으로 바꾸어 놓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유럽국가들은 이제 더 이상 유럽이 문명의 중심에 있지 않을 뿐더러 유럽이 추구해온 가치와 신념에 대한 정당성이 총체적인 위기에 빠졌음을 스스로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의 재편과정은 ‘서구=문명=근대'라는 등식을 부등식으로 바꾸어 놓았고 유럽을 서양(Occident)의 전부가 아닌 서방세계의 일부로 강등시켜 놓고 말았다. 1928년에 조인된 켈로그-브리앙 협정은 더 이상의 무력에 의한 식민지 확장을 못하게 하는 국제 규범으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고, 전간기와 전후에 만들어진 국제연맹 - 국제연맹은 전세계적인 규모의 동맹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미국과 소련을 포함하지 않은, 취약한 조직이었다 - 과 유엔은 형식적으로나마 모든 주권국가의 평등을 기치로 내걸었다.
이 와중에서 유럽의 정체성은 자신의 외부에 대해, 또한 내부적 연속성에 근거해서 다시 정의되어야 했다. 이론적인 차원에서 볼 때 정체성은 가족, 계급, 학교 제도, 노동, 국가와 같은 사회 제도들의 효과이지만, 동시에 특정한 정황과 특수한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기도 하다. 유럽은 변화된 제조건 속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지만 이 새로운 길은 반드시 과거의 유럽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유럽통합은 전쟁과 경제적 파산이 끊어놓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다리를 잇는 작업으로부터 출발해야 했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본 논문은 유럽통합의 과정이 다차원적 과정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고 경제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성립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도록 하겠다.

1) 경제적 차원: 단일시장의 건설
두 번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에 재건을 위한 자본을 공급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유럽부흥계획(ERP)을 통해 유럽국가들의 구조조정에 체계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일부인 마샬플랜은 소련 및 공산권의 위협으로 표현된 냉전 이데올로기 속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적 무기로 비쳐졌다.(Delanty, 1995) 그러나 마샬플랜이 유럽에 들여온 것은 단순한 원조가 아니었다. 볼탄스키에 따르면 이른바 영미식 경영학이 수입되어 기존의 노동경제학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Boltanski, 1981) 이후 30년 동안 유럽의 번영은 유로아메리카(EuroAmerica)의 건설과정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유럽대륙의 일부였던 동유럽과의 심리적, 역사적 단절은 유럽경제협력위원회(CEEC, 1948)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1949)로 표현되는 새로운 북대서양 질서로의 편입과정과 함께 진행되었다. 냉전이 끝날 때까지 미국외교정책의 기조를 이룬 트루먼 독트린(1947)과 ERP, NATO,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체제의 수립이 2차 대전 종전 후 만 4년이 지나기 전에 모두 이루어졌다는 것은 결코 역사적 우연이라고 보기 힘들다.
CEEC는 마샬플랜의 기금을 분배하기 위해 설립된 기구였지만 이후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지금의 OECD)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선진자본주의국가간의 경제협력을 담당하게 되었다. OEEC가 그토록 빨리 원조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측에서 한 나라라도 거부하면 모든 나라에 원조를 줄 수 없다는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이었다. 유럽국가들이 이 조건을 수용함으로써 재건을 위한 자본은 마련되었지만 이 기금의 용도에 대한 재량권은 미국에게 있었다. 기금의 관리를 담당했던 미국측 행정기구, 경제협력원(ECA)이 기금의 지원연장에 관한 결정권을 갖고 있었으므로 사실상의 모든 실권을 쥐고 있었던 셈이다. 예를 들어 ECA는 국유화 절대불가와 모든 정책은 시장지향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 당시 많은 유럽국가들은 상호간의 물고 물리는 채무관계 속에서 엄청난 양의 경화를 필요로 했으나 산업기반이 대부분 파괴되고 국내통화의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한 경화를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950년에 만들어진 유럽지불동맹(EPU)을 통해 미국은 3억 5천만 달러를 제공하여 상호채무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해주었다. 이전까지 OEEC 국가들은 쌍무협정을 통해 채무시한을 연장해주거나 상대방의 통화로 결제하는 방식을 채택해왔는데 EPU는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함으로써 경색된 무역을 활성화하는데 일정 정도 기여하였다. 결국 OEEC 국가들의 통화안정과 교역의 자유화는 달러 중심의 세계경제에 대한 종속을 대가로 얻어진 것이었다. GATT가 1947년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시간상의 우연이 아니다. EPU는 무역제한(QR, Quantitative Restriction)의 철폐를, GATT는 관세의 철폐를 추진함으로써 미국은 OEEC 안의 무역 자유화를 꾀했던 것이다.
제도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ERP와 ECA 및 OEEC는 이후 유럽통합에 있어서 구체적인 모델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병행한 NATO의 설립으로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방위를 초국가적 기구에 맡기게 되어 실질적인 의미에서 주권의 일부를 상실하게 된다. 요약하면 전후 유럽의 재건은 미국의 헤게모니 하에서 진행된 것이며 미국의 안보우산과 원조를 절실히 요구했던 유럽국가들의 적극적인 협조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화(Europeanization)와 국가재건이라는 두 가지의 목표는 배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수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전후의 유럽통합과정은 앞서 지적한 것처럼 유럽인의 자기의식의 위기라는 배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유럽통합을 제도적으로 가시화한 ECSC(유럽석탄철강공동체)는 경제와 방위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전쟁도발국으로 각종 물리적 제재를 받고 있던 독일의 경제력을 회복시키지 않고서는 유럽의 재건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쟝 모네를 비롯한 유럽통합 추진세력은 초국가적 통합을 최종목표로 하되 부문별 우선통합(sectoral integration)으로부터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57년의 로마조약으로 성립된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은 ‘시장 중심'의 통합이라는 취지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장 중심의 통합은 결코 시장의 통합 그 자체만으로 달성될 수 없는 목표였다. 시장을 통합하기 위해서 필요한 제도적, 법적 조정(regulation)과 공통의 기준을 마련하는 과정(coordination)에서 현존하는 국가간, 지역간 격차들을 줄이기 위해 농업정책(CAP), 지역정책(ESF, EIB) 등이 실시되었고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유럽시민권이 의제에 오르게 되었다. 이 과정은 유럽화가 자국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한도 내에서만 추진되기를 바랬던 각국 정부를 당황하게 만들어 결국 연방주의자(federalists)와 정부간주의자(intergovernmentalist)간의 갈등의 골을 깊게 만들었다. 이들은 방위문제, 화폐통합, 동유럽에의 문호 개방, 사회보장, 지역개발, 정책결정과정(가중다수결과 만장일치) 등의 문제에서 첨예하게 대립했으며 이 과정에서 ‘국가의 주권' 문제가 새로운 이슈로 부상하게 되었다
슈만플랜이 만들어진 1950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유럽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 초기 유럽통합이 원활히 진행된 것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경기호황의 효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 환시장이 불안정해지자 유럽국가들은 그 동안 논의수준에 머물러왔던 화폐통합을 현실화하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비슷한 시기에 터진 오일쇼크는 30년간의 경제적 번영과 복지국가의 성가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제 유럽은 완전고용과 연간 5% 성장의 신화를 과거의 것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당시 EC의 주요회원국 정부들로 하여금 전후의 성장을 가능케 했던 일국적 발전모델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데 동의하고 ‘더 많은 통합'을 지지하고 나서게 된 배경이 되었다.
1985년에 출범한 들로르 집행위원회가 설정한 유럽의 경쟁력 강화, 단일시장을 통한 규모의 경제 실현, 유럽적 정체성의 수립이라는 목표는 이후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만드는 데도 반영되었다. 그러나 당시까지 유럽통합을 이끈 중심논리는 여전히 무역장벽의 제거와 탈규제 및 자유화에 의한 경쟁 도입, 그리고 단일시장 건설이었다. 1992년의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체결로 유럽공동체는 유럽통화동맹(EMU)과 정치적 연합(유럽연합, EU)으로 거듭 나게 되었다. 이 과정은 다시 한번 연방주의와 정부간주의, 최대한의 통합과 최소한의 통합론 사이의 대립을 야기하였다. 실제로 EMU는 일국단위의 통화정책과 환율정책이 작동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중앙은행의 역할을 무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로 유럽의 고질적인 통화불안정을 해소하고 달러에 대한 종속성에서 탈피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위기에 처한 국가가 거시경제정책에 대한 재량권을 가지지 못하게 함으로써 국민국가의 기본적 전제인 경제적 주권을 명시적으로 상위권력에 이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수립을 전후하여 독일이 통일되고 냉전체제가 종식되어 통합의 조건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동유럽국가들이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유럽연합에 가입을 신청하고 나선 것이 그 하나다. 또한 80년대 이래로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한 정보산업은 기존의 산업체제를 전면적으로 재편하는 결과를 낳았고 자본자유화, 금융자유화를 가속화시켜 미국이 주도하는 전지구적 규모의 시장의 창출이 급류를 타게 되었다. 1993년 GATT 협상이 마무리되면서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된 세계무역기구(WTO)는 명실상부한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적 시장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미 EU의 틀 내에서 흔들리기 시작한 국경은 이제 전세계적인 자본의 공세 속에서 방어적 기능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1993년 이후로 EU가 당면한 문제는 어떻게 새로 탄생한 유로화 공동체를 방어하면서 동시에 EU 내부에서 제기되는 여러 문제에 잘 대처할 수 있는가로 집약될 수 있겠다.

2) 사회적 차원 : 사회문제의 유럽화

EU의 사회정책은 유럽인들의 삶의 질과 노동조건의 향상이라는 목표에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 유럽시민권이라는 보편적 권리를 어떻게 제도적으로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소위 ‘사회적 유럽’(Social Europe) 프로젝트는 유럽통합의 과정에서 다른 정책 목표에 비해 우선순위에서 밀려 잔여적 범주로만 취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EU의 사회정책은 한편에서 가속화되는 전지구적 경쟁과 다른 한편에서 기존의 국민국가가 갖고 있던 복지국가와 조세제도를 통한 재분배의 실현이라는 두 가지의 원심력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다. 켈너에 따르면, 지구화는 제국주의/근대화를 대체한 용어로 선진국에 의한 후진국의 지배, 다국적 기업에 의한 민족, 지역 경제의 지배를 뜻하는 말이다. 경제의 지구화는 먼저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상호침투에 의해 진행된다. 특히 북미, 유럽, 최근의 아태지역은 주변지역을 지구화 과정에 포함시키는 구심으로서 기능하게 되며 이 과정은 나머지 지역(특히 아프리카)을 주변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의 지구화 과정은 새로운 국제분업 속에서 모든 나라들이 수혜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선진자본주의 국가들 내부에서조차 지구화는 국제경쟁력을 위해서 복지국가가 가장 먼저 포기되어야 한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전지구적 경제를 만들어가는 글로벌 가버넌스의 형태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다자간협상기구와 국제금융기구들이다. GATT에서 WTO, NTM, MAI에 이르기까지 최근의 다자간 협상은 거의 모든 부문에 걸친 의제를 다루고 있다. 먼저 재화와 서비스의 교역 영역(이 중 40%가 초국적 기업들 간에 이루어진다), 둘째, 생산영역(지금 생산기지는 전세계 어디로나 이전가능하다) 셋째, 금융영역(외환시장의 유동자금은 상거래의 자금의 30배에 이르고 있다) 넷째, 정보 영역 등. 그런데 이 네 영역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특히 금융자유화는 나머지 세 영역의 발전에 의해 가능해졌지만 현재는 이 세 영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면서 모든 부문에 걸친 자유화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서방 자본주의 세계를 중심으로 진행된 금융자유화는 기본적으로 세계적인 규모의 경쟁을 그 이념형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금융자유화 정책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사회적 효과에는 무관심하다. 각국의 조건과 발전단계를 고려하지 않은 금융시장의 개방은 궁극적으로 사회적 덤핑을 초래하게 된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탈규제화의 흐름은 당분간 지속될 것처럼 보인다.
1995년 GATT의 후속 다자간 협상기구로 성립한 WTO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결과의 실행을 담당하게 되었다. 소위 단일한 세계 경제의 헌법을 제정한다는 야심 하에서 가장 먼저 진행된 것은 투자의 전면적 자유화 정책이었다. 1973년에서 1995년까지의 기간동안 해외직접투자의 규모는 12배로(250억 달러에서 3,150억 달러로) 성장하였고 같은 기간 상품수출은 8.5배(1995년에 4조 9천억 달러)의 성장을 보였다 이 투자액의 대부분은 신흥공업국에 쏟아부어졌다. 물론 이 성장곡선은 OECD 국가만으로 한정할 경우 훨씬 더 가파른 것이다. 이러한 경향과 더불어 탈규제화와 탈독점화, 민영화와 구조조정이 세계 경제의 규범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다자간 투자협정(MAI)은 이처럼 변화한 환경에 대한 상이한 입장들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MAI의 기본 취지는 내국인과 외국인의 투자에 대한 모든 종류의 차별을 철폐한다는 것이다.(MAI 텍스트) 이는 WTO의 논리와 일치하는 것이지만 한꺼번에 WTO회원국 모두의 서명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미국이 일단 OECD 국가 내부에서 투자협정을 체결한 뒤 적용범위를 넓히자는 의도로 먼저 실시하려 한 제도이다. 당시 OECD 서기장이었던 도날드 존스턴은 이러한 조치가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줄, 게임의 법칙을 확립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번영과 성장, 고용에 이로울 것이라며 옹호하였다. 그러나 극비리에 진행되던 이 계획은 인터넷상에 유포되면서 NGO와 회원국정부들의 반발에 부딪혀 무효화되고 말았다.
이런 국제정치의 변화 속에서 EU는 환경, 노동, 복지, 문화 등의 영역에까지 파고든 개방의 압력에 대해 적극적인 방식으로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정책기조의 변화를 꾀하기 시작하였다. 유럽의 경우, EU의 사회정책에 대한 심도 깊은 고려가 이루어진 시기가 유럽의 실업률이 최고조에 이르고 이러한 자유화의 흐름에 가속이 붙기 시작한 시기와 같았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사실상 최초의 유럽차원의 사회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사회기금’(ESF)은 1960년 장기 실업자와 25세 미만의 청년 직업교육을 지원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졌다. 1974년에 ‘사회정책강령’(social action program)이 만들어지기까지 ESF는 EEC의 유일무이한 사회정책으로 기능해왔다. 물론 사회정책프로그램도 EEC조약에 사회적 강령이 부재했고 실제로 EEC가 회원국의 사회정책에 개입할 근거도 없었기 때문에 회원국간의 협조를 진흥하는 수준에서 진행되었다.(Hantrais, 1995)
유럽통합에 있어 사회정책 상의 질적 비약은 1989년 영국을 제외한 11개 회원국에 의해 조인된 ‘기초사회권헌장'(Community Charter of Fundamental Social Rights of Workers, 일명 Social Charter)에 의해 이루어졌다. 1981년 프랑스가 의장국일 때, ‘유럽의 사회적 공간’(European social space)이라는 개념이 제시된 적이 있긴 하지만 이는 사회적 대화를 활성화하고 회원국간의 입법을 조율하는 등의 보다 협소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Lodge, 1993) 앞서의 헌장은 취업자의 권리에 집중하고 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유럽통합에 명실상부한 사회적 차원을 부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헌장을 통해 회원국들은 노사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유럽형 모델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르면 모든 노동자는 공정한 보상을 받아야 하며,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모든 사람들은 충분한 서비스와 소득의 혜택을 누려야 하고 개인적이나 직업적인 피해를 입지 않고 노조에 가입할 수 있어야 하며 의무 교육 기간이 끝나기 전의 아동노동을 금지하고, 최대노동시간 규정에 따라 노동하는 등 유럽차원에서의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특히 당시 미테랑에게 있어서 이러한 사회적 차원의 유럽화는 국내의 사회개혁을 외부화(=유럽화)하는 효과를 가진 것이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사회정책 의정서(이른바 Social Chapter)를 통해 앞서의 헌장에 명시된 원칙들을 추진하기 위해서 각국의 사회정책의 조화(harmonization)를 꾀하고 각각의 사안에 대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것을 명시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이러한 조치가 유럽시민권에 포함된 기본적 권리의 일부로서 작동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미쉬라가 지적하는 대로 70년대 이후 유럽경기의 퇴조 속에서 시민권을 구성하는 세 가지의 차원, 즉 정치적 권리, 시민적 권리, 사회적 권리 중 마지막 사회권이 집중적인 공격을 받은 것은 사회권이 추상적 권리가 아닌 자원의 동원과 배분을 포함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Mishra, 1999) 게다가 역사적으로 각국 정부는 동일한 사회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정책을 내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미 존재하는 사회 경제적 조건상의 상이함뿐만 아니라 국가 개입에 대한 정치적 이데올로기 상의 차이를 감안할 때 유럽연합 차원의 사회정책이 회원국들의 공감과 시민들의 연대의식을 획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낙후된 지역들을 유럽단일시장에 통합시키려는 목적 하에서 탄생한 구조기금(Structural Funds)은 유럽연합의 예산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제도는 공동체 내의 후진국(특히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에서 크게 환영을 받았다. 이는 국가간, 지역간의 불평등 문제에 대한 EU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국가간의 재분배 문제라는 새로운 이슈를 낳았다. 지역불균등 해소라는 의미에서 국가에 대한 지원을 제공하는 것 외에 유럽차원에서 초국적 차원의 재분배를 실시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구조기금에 대한 부자회원국들의 반발이 심해지고 있는 상황에 비추어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Rhodes & M ny, 1998, chap.1)
이상의 과정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럽통합은 유럽에서 발발한 양차대전과 그로 인한 냉전체제의 성립의 결과물이었다 둘째, 유럽공동체는 시장을 중심으로 한 경제통합으로부터 출발하였고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세계경제 속에서 유럽의 위상을 제고하려는 목표를 최우선시하였다 셋째, 유럽통합은 불가피하게 국가의 축소를 강제함으로써 과거 국민국가의 몫으로 여겨져 왔던 사회적 문제, 정치적 문제, 문화적 문제를 유럽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넷째, 통합의 과정은 세기 후반부에 일어난 세계질서의 지각변동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EU의 위상과 목표에 대한 재조정을 강제하였다.

4. 새로운 집합적 정체성 : 시민들의 유럽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유럽 단일시장 건설은 탈규제화(deregulation) 프로젝트이면서 동시에 재규제화(re-regulation) 프로젝트였다. 탈규제의 측면에서 보면 상품, 서비스, 자본,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에 장애가 되는 물리적 장벽을 제거하고 이를 위해 국영 독점 산업에 경쟁을 도입하며 국가의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또한 재규제화의 측면에서 보면 기존의 일국적 ‘기준들’ 사이의 조화를 꾀함으로써 유럽차원에서 공통의 ‘최소’ 수준을 달성한다는 것이 목표였다. 시장의 실패를 교정한다는 명분이 유럽의 재규제화를 정당화해주었다(Hix and Goetx, 2000: 4). 환경기준, 사회적 기준, 소비자 기준 등이 그 좋은 예다.
립프리드가 지적하는 것처럼 현재의 유럽통합은 아래로부터의 미국화(Americanization)와 위로부터의 유럽화(Europeanization)에 의해 특징지어지고 있다.(Liebfried, 1993) 전후의 역사 속에서 미국의 존재는 유럽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얼룩과 같은 것이었다. 미국은 한편으로 유럽인들이 만든 신생독립국으로 역사 없는 나라(A country without memory)이면서 동시에 이른바 유럽적 가치를 공유하는 서방세계의 맹주로 간주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은 유럽의 타자이자 유럽의 거울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서 유럽공동체는 미국과 비견할 만한 경제력과 패권을 지향하면서도 - 미국을 닮으려고 하면서도 - 미국이 거대국가(Superstate)로서 가지는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구별되는 - 미국과 닮지 않아야 하는 -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통합과정은 대다수 시민들에게 지역(local)-국가(state)-EU라는 위계적 지배체제의 확립으로 여겨졌을 뿐이고 통합의 의미는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듯이 제도적 통합이 실질적 통합으로부터 계속해서 유리될 때, 유럽 민주주의의 결핍 증세는 호전되지 않을 것이다. 유럽통합의 현단계는 유럽연합이 갖고 있는 지향성의 문제를 드러내준다. 유럽이 유럽시민권과 민주주의에 기초한 실질적인 통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아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극적인 의미의 국가연합이 아닌 적극적인 통합에 기초한 탈국민국가적 정체성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EU는 정치적 과제와 경제적 과제에 더하여 공동체 내의 문화적 다양성을 보장하면서도 유럽의 독자적인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임무, 그리고 사회적 권리의 확장이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 20세기 말, 시험대에 오른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해 유럽의 사회시장모델이 해답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유럽시민권은 민족적 대의제와 민주주의를 동일시해왔던 전통적인 서구의 국민국가관을 뛰어넘을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Closa, 1998) 이런 의미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대하여 유럽 스탠더드를 확고히 정립하는 일이 현재 EU가 당면하고 있는 중심과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