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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계약’이라는 함정을 넘어

김혜진 | 사회진보연대 여성부장

정부에서 작년 8월 9일 ‘공공부문비정규대책’을 발표한 이래 주류 언론은 공공부문의 비정규직이 대거 정규직화 되는 것처럼 보도했고, 정부는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를 ‘선도’한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지금도 장기간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는 KTX 승무원 노동자, 전북도청, 옥천, 파주 등지의 환경 미화원, 광주시청 노동자 등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공공부문비정규대책이 오히려 비정규 노동자들에 대한 계약해지와 처우악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지난 5월 8일 한국여성단체연합이 <공공부문 비정규 대책, 여성에게 평등한가>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개최했다. 주 발제는 이화여대 조순경 교수와 한국여성개발원 김영옥 선임연구원이 맡았고, 토론자로는 전국여성노조의 빈순아,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김유선, 여성노동법률지원센타 정형옥 등이 참가했다. 먼저 이 날 주 발제자였던 조순경 교수는 “공공부문에서 남성은 여섯 명 중 한명이, 여성은 두 명 중 한명이 비정규직”이라는 지적을 시작으로 정부/정책 및 노동 운동에 대한 평가를 진행했다.


‘무기계약 반대’는 정규직 노조의 입장이다?

조순경은 <2006년 공공기관 경영혁신 지침>에서 “경영합리화 차원에서 인력은 필요 최소한으로 운영하되, 운용 인력은 기관의 핵심 업무에 집중 배치”함으로써 “인사관리의 합리화”를 꾀할 것을 명기해 공공부문에서 여성 비정규직 증대에 정부가 기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기획예산처가 정부투자기관의 인사, 조직, 예산을 비롯, 경영 전반을 통제해오면서 인력구조의 슬림화와 아웃소싱의 증대를 통한 비용절감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여성 등 저임금 노동자층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한편, 현재 노동계가 ‘무기계약직’을 둘러싸고 이해와 이견을 달리하고 있으며 민주노총 계열의 노조들에서 무기계약으로의 전환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이라며 비판했다. 또한 ‘무기계약’ 내용은 매우 다양하며 반드시 우리은행식의 분리직군제나 직무급제로의 전환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고용안정은 매우 큰 의미이기 때문에 비정규 보호법이 시행되는 현재 시점에서 무기계약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고용안정을 확보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서 그렇기 때문에 학교 비정규직의 무기계약 전환을 목적으로 하는 최순영 의원의 법안이 노조의 철회 요구로 발의 되지 못한 것은 기억되어야 할 “스캔들”이며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무기 계약직은 ‘차선책’이라며 노조의 무기계약 반대 입장을 비판했다.


한편 김 연구원은 정부가 공공기관의 효율성을 독려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비정규직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비판하며 현행 공기업 경영 평가지표 틀을 바꾸고 ‘공익성 제고 및 사회적 책임성 강화’지표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유도해내고, 비정규직의 양산을 막아낼 수 있는 내용을 담도록 구체화하고, 인적자원회계의 적용 방안 등 을 모색하는 것이 현실적인 안이라고 주장했다.


이어서 여성노동자를 위한 방안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참석한 토론자들은 공통적으로 무기계약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으며, 김유선, 빈순아 등은 무기계약과 직무평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여성 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규직 중심 노동운동”과 정부를 넘어선 여성계와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공통된 지적이 이루어졌다. 이 날 발제자와 토론자들은 공공부문 비정규대책과 관련된 여성 노동자의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정부(기획예산처)와 “정규직 중심의 남성 노동자 운동”을 꼽았다. 특히 무기 계약에 반대하는 정규직 남성 노동자 운동이 여성의 고용안정을 가로막는다는 주장에 입을 모은 것이다. 토론회 이후 우먼타임스나 일다 등의 매체에서는 “노동계, 무기계약 전환 놓고 ‘찬반’ 갈라져”, “무기계약을 온전한 정규직화가 아니란 이유로 반대하는 것은 ‘생색내기 운동’일 수 있다는 것”라는 제목과 내용을 담은 유사한 입장의 기사를 게재했다.


무기계약의 함정과 나아가야 할 길

그런데 앞서의 입장에는 몇 가지 대단히 중요한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 먼저 몇몇 여성/노동운동계에서는 무기계약을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안정→점차적인 차별 탈피’로 이어지는 단계적인 처우 개선의 방향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공공부문 비정규 대책’ 자체가 비정규직의 권리 보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용 불안정을 확산하고 고착화시키는 것임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무기계약은 정부가 밝힌 공공부문 비정규대책 초안 상의 상시고용 비정규 노동자에 대한 ‘정규직화’ 대책이 당정 협의와 부처 간 협의과정에서 ‘무기계약근로’로 수정되며 제시된 것으로 이는 비정규직에 대해서 기존의 정규직 직제가 가지는 고용안정의 권리를 그대로 보장해주지 않으며, 처우 상의 차별을 용인하겠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무기계약에 기대하는 ‘고용안정’ 역시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공공부문 비정규대책 관련 언론보도에서는 약 2천 억 원의 예산이 소요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예산 확보방안은 없는 상태이며, 이미 무기계약으로 간주된 지자체 상용직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조례 등을 통해 ‘예산이 폐지되면’ 언제든 해고할 수 있게 하여 상시적 구조조정이 가능하도록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정이 독립적인 공기업, 산하기관의 경우에는 정부가 실효성 있게 강제하지 않을 경우 대책 자체가 유명무실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고용안정’에 대한 기대는 일종의 ‘눈가리개’용 미끼일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해야 한다. 실제로 몇몇 직업에서는 무기계약으로 고용안정을 기대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공공부문 비정규대책은 “합리적인 외주화(간접고용) 원칙 확립”조항을 두어 ‘주변업무’를 외주화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이는 그 동안 주변업무로 저평가되어 오던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을 다시 한 번 ‘주변’적인 업무로 떼어내 외주화하는 결과를 가져와 대다수 여성 노동자들을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런 선별 기준을 가지고 있는 공공부문 비정규대책의 무기계약이 마치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적’ 대안인양 이해하는 것은 오히려 대다수 여성노동의 현실을 은폐하는 효과를 나을 것이 분명하다. 이는 조순경 교수가 지적한 ‘국무총리 훈령의 간접차별’의 성격을 초과하는 ‘직접’적이고 적나라한 여성 직종에 대한 공격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운동이 여성 노동의 배제를 전제한 무기계약을 덥석 받아들이는 것은 이율배반적 행동임과 동시에‘무기계약’이라는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듯 무엇 하나 분명한 것이 없는 ‘무기계약’은 불안정 노동을 심화시키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정책 개혁의 일환으로 제시된 안이기 때문에 이러한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우먼타임스 기사처럼 “노동운동의 대의나 원칙을 위해” 무기계약직 전환 그 자체를 반대하고 비정규직 노동의 불안정성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불안정성을 심화하는 비정규법안과 공공부문 비정규 대책에 대한 반대의 전반적인 맥락 안에 ‘무기계약’에 대한 입장도 위치해 있는 것이다. 이는 여성 노동자의 권리문제를 노동자간의 성별 대립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전반의 문제로 인식하되 다만 그 안에 성별화된 시각을 접목시켜야 하는 문제이다.


물론 조순경 교수가 주장하듯 현재 노동운동은 여성의 권리를 접목시켜낼 수 있는 시야와 실천을 갖추고 있지 못하고 때로는 여성 노동자를 배제시키는 조력자 역할까지 하는 것이 사실이며 이는 비판해마지 않아야 할 점이지만, 이것이 노조의 ‘무기계약’에 대한 입장의 근원적 배경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조순경 교수 등이 제기하듯 ‘무기계약 반대(정규직 남성 노조) vs 무기계약 찬성(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는 지금의 노동문제와 여성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현재의 쟁점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비정규직 법안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기계약 찬/반’쟁점을 넘어 불안정한 노동과 여성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배제를 종식시키려는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와 비판과 투쟁의 대상을 명확히 다시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현재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여성에게 단적으로 ‘전문화’와 ‘빈곤화’라는 결과로 귀결시키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남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과거에 비해 실제로 몇몇 ‘전문’분야, 주류 영역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여성들이 과거에 비해 증가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강조해서 확인해야 할 점은 소수의 여성들이 ‘전문화’되고 있는 것에 비해 전 세계 빈곤 인구의 70%에 여성이 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빈곤의 여성화’, ‘여성의 빈곤화’로 보아도 무방하다. 또 특이할 만 한 점으로 ‘노동의 여성화’ 경향을 들 수 있어야 한다. 노동의 여성화란 여성이 노동 시장에 많이 진출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여성 노동에 대한 부차화와 저평가가 노동 전반으로 확산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것은 일을 해도 가난한(비정규직 고용형태의) 노동을 많은 여성들이 수행하고 있다는 의미이며, 남녀를 떠나 노동자 전반의 하향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순경 교수와 김영옥 연구원이 거론한 기획예산처와 같은 국가 기구들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행하는 ‘관리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신자유주의 시대, 국가는 시장의 영역으로부터 철수했다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오히려 각종 경제규제의 완화나 철폐 등을 적극적으로 국가기구가 주도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확산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위와 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속성을 종합해봤을 때야, 비로소 지금 남한 여성 노동자의 삶의 양상을 이해해볼 수 있다. 남한 역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조응해 들어가면서 여성 노동이 증가하지만, 동시에 불안정 노동에 처하게 되며, 즉 ‘일을 해도 가난한’ 형편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지적했듯 신자유주의 그 자체에 원인이 있으며 근본적으로 이를 종식시키기 위한 ‘운동’의 방향이 설정되지 않은 채, 노동 조건이 ‘단계적’으로 좋아질 것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바뀌는 것이’ 당장 가능하지 않다면 무기계약이 ‘차선’이라는 이들의 주장은 대단히 한계적이다. 현재 제시된 안은 ‘최선’과는 전혀 출발지가 다르기 때문에 최선 다음의 ‘차선’이라기보다 오히려 ‘차악’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올곧은 여성 노동권 쟁취투쟁에 나서고자 한다면, 남/녀 노동자의 성간(性間) 대결이 아니라 성별화된 권리를 향한 공동의 전략을 만들어 연대해야 할 것이며 신자유주의 반대와 비정규직 철폐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은 현재 노동운동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이다.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과 성별화된 권리를 위한 투쟁은 지난 역사에서 노동 운동 역시 수행해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기업들은 노동시장에서 비용 절감과 이윤 창출을 위해 ‘노동 유연화’를 달성하고자 하는데, 이 때 더 순종적이면서 노조를 조직할 경향이 더 낮고, 더 열악한 작업 환경을 감내할 수 있으며, 부족한 가계 소득으로 출혈 노동을 해야만 하는 여성을 활용한다. 지난 98년 제정된 파견법이 비서, 타자원 및 관련 사무원, 간병인, 조리사 등 소위 ‘여성직종’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즉 노조 조직률이 낮고, 여성들이 집중 고용되어 있는 직종의 업무가 선정된 것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여성과 남성에게 중립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 값싸고 더 유연한 여성 노동자를 활용하여 구조조정을 단행해나가고, 그를 기반으로 노동강도의 증대와 유연한 노동력을 활용하는 노동시장을 안착화해 왔다. 신자유주의적 재편의 정점에 바로 여성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의 불안정화에 맞선 투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운동이나 여성 운동에서 이러한 여성 노동의 성격을 바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노동자 전반의 노동조건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 노동자가 겪는 특수한 경험은 성별 관계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및 국가의 구조를 변혁시키기 위한 중요한 토대를 형성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가운데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이 서로의 해방을 위한 연대를 이루어나가야 하며,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공격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여성 노동자의 권리, 여성권과 노동권의 융합을 위한 토대를 만드는 현실의 운동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비정규직 개악안의 예고편과 다름없는 공공부문 비정규직대책은 저임금의 차별적인 일자리를 고착화하고 확대하기 위한 구조조정을 정부에서 스스로 민간부문에 ‘모범’을 보이려는 방안임을 이해해야 한다. 지난 5월 17일 노동부가 비정규법 시행령을 확정한 것도 기간제 예외조항을 16개 직종에서 26개로 확대했으며, 고객 상담 업무 등 파견대상업무 또한 입법예고안보다 10개 직종이 확대되었다. 여성들이 주로 근무하는 고객상담 등 고객 관련 사무원 업무가 추가되었으며, 우체국 노동자들과 택배 노동자들까지 파견을 허용하여 심각한 고용불안에 빠지게 하였다. 이렇듯 여성 노동자에 대한 강도 높은 공격에서부터 시작하여 노동 전반의 불안정화로 확산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대한 반대 투쟁은 여성운동, 노동 운동 양자에 모두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이제는 분할과 대립을 넘어 신자유주의 반대! 비정규직 철폐! 여성 노동권 쟁취!의 기치 아래 연대와 투쟁을 모색하자.




‘죄가 안 됨’ 한 통의 편지

이꽃맘 | 회원, 참세상 기자

편지가 한 장 도착했다. 서울서부지방검찰청에서 온 편지였다.


지난 2월 안양경찰서에서 처음 연락이 왔을 때가 떠올랐다. 안양경찰서에서는 누군가가 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으니 조사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거참 별 일이 다 생기는 구나. 결국 발렌타인데이 날 나는 용산경찰서로 갔다. 고소한 사람은 내가 쓴 성폭력 관련 기사의 가해자였다. 그는 내가 허위사실을 유포했으며 실명을 공개했기 때문에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했다. 그래서 나를 고소했다.


그 기사는 쓰기 까지 그리고 쓴 후에도 나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줬다.


제보를 받고 많이 망설였다. 성폭력 사건에 대해 기사를 쓰는 일은 참 힘든 일이다. 특히 노조 안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쓰는 일은 더 어렵다. 왜냐면 그 사건으로 인해 얽혀서 드러나는 많은 일들을 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되도록 그런 일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이 사건에 대해 취재를 요청 받았을 때 사건은 명확했다. 노조 안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이고 이에 대한 2차 가해가 발생한 것도 명확했다. 이미 꾸려진 진상조사위원회에서는 성폭력 사건으로 이에 대한 결과를 보고한 바 있었고, 가해자와 노조는 실명으로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렸다.


하지만 나에게 돌아온 것은 명예훼손이었다. 기사를 쓴 날, 나를 고소한 그 사람에게 전화를 받았다. 그 사람은 참 당당했다. 기사에 대한 충고는 물론이며 기자에 대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명예훼손으로 나를 고소했다.


나는 경찰에 가서 성폭력 사건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왜 이 사건을 다뤘는지, 왜 성폭력 사건인지, 노조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라 이로 인해 얽혀진 정치적 관계는 무엇인지, 내가 기자인지…. 등등 세 번의 경찰서 출입이 나에게 알려준 것은 앞으로 노조 안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였다.


결국 5월 17일자로 서울서부지방검찰청에서 온 편지는 나에게 ‘처분죄명: 명예훼손’, ‘처분결과: 죄가 안 됨’이라는 사실을 통보했다. 이렇게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황당한(!) 사건을 겪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그동안 해왔던 반성폭력 운동이 남긴 후과였다. 물론 그간 해왔던 반성폭력 운동이 남긴 성과는 많다. 성폭력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는 것, 이것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 사실을 알린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성과이다. 그리고 해결의 과정을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많은 피해자들이 주체로 나서서 문제제기 했다는 것만으로도 성과다.


하지만 또 남겨진 성과(?)는 성폭력 사건이 특정한 정치적 관계에서 활용이 되고 있다는 것, 그저 해결의 과정만 남을 뿐 그것이 어떤 공간에서의 운동으로 발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조에 있는 여성위원회는 무수히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공간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이것을 넘어서는 고민은 부재하다. 겉으로 드러났던 몇몇 반여성적 행태에 대해 지적하는 기사를 쓸 때면 “잘 몰랐다. 알아보고 고쳐나가겠다”라는 말만 남을 뿐이다. 그리고 성폭력 사건은 공동체의 반여성적 문화와 모순들을 벗기는 하나의 운동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해결하면 되는 폭력 사건 정도로 남는다. 답답하다. 답답해.


그래도 반성폭력 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반성폭력 운동은 단순히 폭력이 아니라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저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억압에 대한 일상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여성이 처해있는 사회적 조건들을 바꿔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누군가 나에게 명예를 훼손했다고 말해도 계속 써야 한다. 나는 누구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성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일들이 그저 조용히 해결하고 넘어가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것이 운동이 되고 세상을 바꾸는 흐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이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성폭력 사건도, 고소도... 힘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