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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서비스 시장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정지영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장

 

보이지 않는, 그러나 필수적인…

사람이 살아가는 데, 그리고 사회가 재생산되는 데에는 많은 노동이 필요하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소득을 벌 수 있는 노동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 생각되며, 경제 전체에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다. 소득으로 구입한 재료를 요리하고, 빨래와 청소를 하고, 아이를 비롯하여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을 돌보는 “가사노동”, “돌봄 노동”이 없다면 사람이 먹고사는 것과 사회의 재생산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가사노동, 돌봄 노동은 늘 무시되었다. 원칙적으로 여성이 있을 곳은 가정이고 그 속에서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일이 여성의 본성이라는 성별분업 구조와 이데올로기 속에서 가사노동과 돌봄 노동은 여성에게만 전가되었다. 더군다나 여성이 가족 내에서 수행하는 많은 일들은 여성이면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특별한 숙련과 지식을 요하지 않는 일로 치부되어 평가 절하되어왔다.

그 동안 많은 페미니스트들과 여성운동은 이런 성별분업에 도전해왔다. 여성운동은 여성이 가족 밖에서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싸워왔고, 또 여성이 가족 내에서 무급으로 수행하는 노동이 사회와 경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밝혀왔다. 게다가 현실의 많은 여성들은 가족 내에서 가사노동만을 담당할 수 없었다. 현실에는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늘 가족 밖의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던 여성들이 훨씬 많았고 지금도 그러하다. 하지만 여성들은 일차적으로 가정 내의 일을 담당한다는 성별분업의 구조와 이데올로기는 여성이 하는 일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규정하는 조건이 되어, 대다수 여성들이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내몰렸다.

 

여성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

그러나 신자유주의 정책 하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이 나타나는 것 같다. 정부가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장려하고 이를 위해 보육을 비롯한 돌봄 서비스를 지원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는 듯 보이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적으로 실행된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여성 전담 부서인 여성부가 생겼고 ‘직장과 가사의 양립’이라는 기조 하에 여성정책이 추진되었다. 이런 여성 정책은 여성인력 활용을 위한 방안과 저출산, 고령화라는 조건 등이 맞물리면서 여성, 복지, 노동 등을 망라한 포괄적인 사회 정책의 주요 부분이 되었고, 이제는 ‘사회서비스’라는 생소하고도 모호한 용어 속에 포괄되고 있다. 물론 사회서비스 확충 전략이 여성 정책 전체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 계획과 기존에 여성들이 가족 내에서 담당해왔던 돌봄 노동을 사회서비스 영역으로 포괄하여 확충하는 계획을 담고 있는 바, 이 둘은 긴밀한 연관이 있다.

가사 도우미, 산모 지원, 노인 돌봄, 장애인 활동 보조 등 당연히 엄마, 아내, 며느리가 하는 것이라 여기는 일들이 국가가 확충하려는 서비스의 목록에 포함되었다는 점은 어찌 보면 획기적이기까지 하다. 게다가 2007년부터 2010년까지 매해 20만개씩 80만개의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만들어 사회서비스를 확충하겠다고 하니, 마치 정부가 여성들의 부담을 경감하고 일자리가 필요한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구나 싶다. 그렇다면 이제 여성들은 정부의 정책만 믿고 열심히 일하면 될 것이다. 진정 그러한가?

 

사회서비스 정책의 배경

정부가 추진하는 사회서비스 확충 전략은 그 실행에서 심각한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이 전략은 일자리 확대와 사회서비스 확충을 목표로 하면서, 한 축으로는 돌봄 노동을 중심으로 불안정하고 열악한 일자리를 확대하고, 다른 한축으로는 서비스의 질 향상을 명분으로 공급 기간들 사이의 경쟁을 가속화하고 이윤 추구를 허용함으로써 사회서비스를 시장화한다. 사회서비스 확충 전략 하에서 핵심적으로 추진되는 4대 바우처 사업은 그 이용자나 서비스 공급 노동자 양측 모두에게서 심각한 반발을 사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정부의 사회서비스 확충 전략은 현재 사회서비스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는 상황의 원인을 호도하고, 이 요구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적절히 관리하면서 또 하나의 이윤 창출의 장으로 만들겠다는 방향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서비스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불안정 노동의 일반화, 사회의 위기, 가족 해체, 빈곤 심화와 같은 조건을 반영한다. 현재의 상황은 매우 복합적이고 복잡하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적으로 실행된 이후, 대량해고를 중심으로 한 구조조정이 자행됐고 비정규직이 확산되어, 이제 비정규직이 더 일반적인 고용형태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가계의 소득은 줄어들었고, 공기업 민영화에 따른 공적 서비스 비용 상승, 의료와 교육 비용 증가(사교육 열풍은 불안정한 노동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둘러싼 경쟁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등으로 가계의 부담은 더욱 증가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 진행될수록 빈곤층은 늘어나고, 빈곤의 정도도 심각해지고 있다. 가계 빚과 빈곤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혼이나 가출(부모든 아이든) 등으로 가족이 해체되는 문제도 심각하다. 이런 상황에 더해 최근에 가장 심각한 문제로 부상한 것은 저출산, 고령화 문제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른 속도의 고령화는, 고령인구에 대한 사회적 비용이 크게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를 낳았고, 이에 정부는 적극적으로 이를 관리하고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전반적인 한국사회의 상황은 사회의 재생산이 불안정해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사회서비스 확충 전략은 이런 불안정성을 관리하기 위한 정부와 지배세력의 적극적 대응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불안정성을 야기한 신자유주의 정책이라는 근본적인 원인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전략은 계속해서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다.

 

재생산의 위기, 여성의 위기

재생산이 불안정한 상황은 누구보다 여성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하에서 재생산은 생산과 분리되어 가족의 영역에 맡겨졌고, 여성의 장소를 가족으로 할당하는 공사분할, 성별분업 이데올로기 하에서 재생산의 일차적 책임은 여성에게 전담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자유주의 정책은 여성을 저임금의 유연하고 온순한 노동력으로 간주하며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데, 이에 따라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가가 권장되고 국가 정책의 주요 대상이 된다(여성인력활용방안). 하지만 이런 정책은 여성의 소득은 (남성)가장의 소득을 보충하는 것이고 여성들은 일차적으로 가족을 담당한다는 성별분업의 구조와 이데올로기는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여성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통해 가족 생계를 부양하고, 가족 내 가사노동, 돌봄 노동을 전담해야 하는 이중부담에서 전혀 자유로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강화되었을 뿐이다.

사회서비스 확충 전략은 여성들의 이런 지위와 상황을 활용하여 착취를 강화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전략에서 여성들을 위해 마련하겠다는 일자리는 거의 대부분이 기존에 가족에서 수행되던 재생산 노동이다. 하지만 이런 노동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나 평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사회서비스 영역을 시장화하는 지금의 방식은 사회서비스 부문이 자본의 이윤 창출의 한 영역으로 사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속에서 사회서비스 노동자의 조건은 더욱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 이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당연히(!)’ 저임금을 받을뿐더러, 노동조건은 담당하는 사회서비스 이용자의 요구나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데다가 사랑의 마음으로 수행해야 하는 노동이라는 인식 하에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서비스 확충 전략은 사회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사회가 책임진다는 의미보다는 개별 가족을 그 수혜 단위로 삼으면서 기존에 가족이 재생산 노동을 담당하던 구조는 전혀 건드리지 않고 있다. 가족 내에서 여성이 수행해야 하는 역할은 전혀 변하지 않고, 이제 각 가정의 주부들은 ‘사회서비스 이용자’라는 규정 속에서 자신의 가사와 돌봄 노동을 보조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정부 지원을 통해 돈을 주고 이용하는 사용자의 위치도 갖게 되었을 뿐이다. 결국 맞벌이 부부든, 한 부모 가정이든, 자식들의 돌봄이 없는 독거노인이든, 어쨌든 여성의 역할에 빈자리가 있는 가족을 다른 여성의 노동으로 채워주는 양상이다.

 

사회서비스의 사회적 책임 강화

재생산 노동의 결과는 사회의 재생산에 필수적인 것으로, 사회가 그 성과를 누리지만, 재생산 노동에 대한 책임은 늘 가족 내 여성의 몫이다. 지금 정부의 사회서비스 확충 전략은 얼핏 여성의 책임을 덜어주는 듯하지만, 재생산 영역은 가족이라는 전제와 구조를 전혀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가족의 책임을 강화하고 있다. 어쨌든 가족에서 여성들이 할 일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기존에 가족에서 무급으로 수행되어 온, 보이지 않는 노동을 드러내고 그 사회적 가치와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이런 상황이 변화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가족 내에서 수행되어 온 노동에 대한 요구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이제 가사, 간병, 노인 돌봄, 산모 지원과 같은 여러 서비스를 정부의 지원으로 이용하게 되었고, 따라서 자기 가족에 부족한 부분을 이를 통해 보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 가족과 여성에게 사회서비스 이용자로서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늘 사회서비스의 질 향상이라는 요구를 동반한다. 이는 가정 내에서 이뤄지는 가사와 돌봄 노동의 질, 기준을 더욱 높이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이것이 여성들이 바라는 해방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오히려 가족 내에서 수행되는 사랑과 정성의 노동의 기준과 내용을 더욱 높이고 여성들의 부담을 더욱 키우는 것은 아닌가?

사회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은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 누군가를 돌보고 키우는 일이 없다면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이런 일들을 사회 전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일이다. 우리는 아직까지 이 상식적인 사회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 사회가 지금처럼 돈을 약간 지원하고 저임금의 사회서비스 노동자의 노동을 활용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점은 알고 있다. 또한 더 좋은 서비스를 더 저렴하게 제공하겠다는 시장화 방식과 함께 갈 수 없음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사회를 재생산하는 노동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고, 이는 가사와 돌봄 노동을 각 가족의 여성에게 전담시키는 성별분업의 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제거하는 과정과 함께 가야하는 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을 뿐이다

 

5만 원 권이 말하는 여성의 삶


이꽃맘 | 회원, 참세상 기자


5만 원 권이 나오고, 10만 원 권이 나온단다. “나오면 뭐하나 만져보지도 못 할 텐데”라며 헛웃음을 날리고 있는 순간 고액권에 들어갈 위인을 놓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5만 원 권에 신사임당이 들어간 것.

한국은행은 신사임당 선정이유를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 의식을 제고하고 여성의 사회 참여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한편 문화 중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라며 “자녀의 재능을 살린 교육적 성취를 통해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등의 효과가 예상 된다”라고 밝혔다. 차라리 그냥 “여자는 자고로 가정에 충실해야 하며, 이런 사실을 널리널리 알리기 위해”라고 속 시원히 밝혔으면 미친놈들 하고 넘어갔을 수도...  하지만 주저리주저리 내 놓은 설명은 오히려 화를 불렀다.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은 여성인물 선정에 대해서는 “진일보한 일”이라고 평가했으나 신사임당이 선정된 것에 대해 “자녀의 교육적 성취와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보조적 역할로 한정하고 있어 시대의 상황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라고 지적했다.

이런데 관심 갖는 것이 여연 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 여연도 그저 신사임당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얘기할 뿐 별다른 건 없다. 우리 쪽(!)에서도 입장을 한번 내 보는 게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한국은행의 의도는 뻔하다. 아니 남성의 시각이 지배하고 있는 이 사회의 의도는 뻔했다. 출산율도 낮아지고 있고, 이혼하는 부부가 늘고 있고... 이는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커다란 체계 하나가 무너지는 것이기에 기를 쓰고 막아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이를 가장 대표적인 상징물인 화폐를 통해 또 한 번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4천 만 민중이 절대 피해갈 수 없는 ‘돈’에 신사임당이라는 현모양처의 표상을 넣어 “여성들이여! 가정으로 돌아오라”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말 잘 듣고 돈 조금 줘도 군말 없는 노동자가 필요하니까 “여성들이여! 사회로”를 외치며 사회서비스 확충 전략이니 뭐니 내 놓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여성들에게 “가족도 파괴하면 안 돼! 애도 낳아야지”를 외치고 있다. 맨 날 반복이다.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아이도 낳을 수 없고, 여성이 주체적으로 일하려면 지금 형태의 가족은 불필요한 것이고, 아니 오히려 해악이 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이는 매주 한 번 씩 하는 ‘사랑과 전쟁’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그렇다고 ‘사랑과 전쟁’이라는 프로그램이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많은 여성들은 그저 가르침 받은 대로 참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잠깐 딴소리. 이 논란에서 나를 가장 웃게 만들었던 것은 ‘이프’라는 여성단체의 기자회견 내용이다. 이프는 음모론을 들고 나섰다. 이승일 한국은행 부총재가 이율곡, 신사임당과 같은 ‘덕수 이씨’ 종친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음모론은 이승일 부총재가 “나는 덕수 이씨가 아닌 신평 이씨”라고 호적등본을 제시해 유야무야 되었다. 왜 이런 제기를 어떤 생각으로 했을까 그냥 궁금하다.

어쨌든 이프와 여연을 비롯한 여성단체들의 반발에 남성의 얼굴을 한 언론들은 “아이를 기르고, 살림을 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고 스스로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을 패배적으로 만든다”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마치 여성들 편을 들어주는 듯 한 모습을 하고 말이다. 이 반박에 여연을 비롯한 여성단체들은 뭐라고 대답을 할까.

나는 이렇게 반박하고 싶다. 아이를 기르고, 살림을 하는 것에 즐거워하는 수많은 여성들을 패배적으로 만드는 것은 남성의 얼굴을 한 언론이며, 자본주의이며, 국가이다. 그 수많은 여성들이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노동을 하고 있음에도 그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 그녀들을 절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이번 화폐 논란을 그저 단순히 어떤 인물을 선택 하느냐로만 볼 수 없다. 이데올로기 장치들이 모두 다 그렇듯이 화폐에 들어가는 상징 하나도 그 사회의 생각과 자본주의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가 한국사회에서의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녀들의 삶은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 정말 그녀들이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등을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신사임당도 마찬가지이다. 꿈이 많았던, 다재다능했던 그녀가 왜 아들에게, 남편에게 목메고 살아야 했는지, 당시 사회가 어떻게 그녀를 가족 안에 가둬놓게 했는지를 진지하게 돌아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여성들이 제대로 인정받으며, 권리를 누리고 책임을 다하며 살 수 있는 가장 자유롭고 평등한 방식은 무엇인지 논의할 수 있었으면 한다.(불가능할 것처럼 보이지만)

덧붙임. 나 같으면, 10만 원 권에 현재를 가장 열심히 살아가는 뉴코아-이랜드 비정규직 언니들을 넣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