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재난사고, 세월호는 ‘천천히’ 침몰하였다
안전은 생명선, 안전규제를 강화해야 한다
박준도 |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존엄안전위원회,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
2014.7.29
반복되는 연안여객 재난사고, 원인은 모두 과적·과승
1953년 1월, 전남 여수항에서 부산항으로 가던 여객선 창경호가 침몰했다. 300명에 가까운 사람이 참변을 당했고, 8명만이 살아남았다(공식기록은 229명 사망, 7명 생존이다). 창경호는 화물선을 여객선으로 개조한 배로, 당시 선령이 20년이 넘은 상태였다.
150톤급인 창경호의 화물 적재 중량은 100톤이었지만 200톤이 넘게 실려 있었다. 창경호는 복원력이 상실된 상태였고, 악천후 속에서 거센 파도를 만나 침몰했다. 창경호는 구명보트와 구명복을 본사 창고에 두고 다녔다. 엄동설한이라 희생은 더 컸다.
1970년 12월, 제주도 서귀포를 출발해 부산항으로 항해하던 362톤급 남영호가 남해 여수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326명이 숨졌고, 생존자는 12명에 불과했다. 가장 최악의 연안여객사고로 기록되어 있는 이 사고는, 36명을 초과한 상태에서, 130톤 정량인 선박인데도, 3배가 넘는 540톤을 넘게 싣고 운항했다. 사고 지역은 급조류 지역이었다.
이 배는 애초 설계 잘못으로 복원력이 부족한 배이기도 했다. 해경은 늑장 출동하였고, 영하를 넘나드는 기온에 희생자 규모는 더 늘었다. 이 사고 이후 정부는 1973년 12월 '여객선 운항관리제도'를 도입하였다. 정부와 해운조합이 과적(過積)과 과승(過乘)을 사전에 단속하라는 취지였다.
1993년 10월, 전북 위도 파장금항에서 격포항으로 가던 110톤급 서해훼리호가 임수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악천후 속에서 무리한 운항을 감행하다 돌풍을 만났고, 선장은 회항을 시도했다. 하지만 정원을 훨씬 초과한 이 배는 회항을 시도하자마자 복원력을 상실하였고, 이내 침몰하고 말았다. 221명이 정원인 배에 362명을 태웠고 그 바람에 무게중심이 급격히 한쪽으로 기운 것이다. 이 사고로 292명이 목숨을 잃었다.
서해훼리호가 과승을 하고 무리하게 출항하게 된 배경에는 낙도 보조항로에 대한 정부보조금이 적고, 그나마도 줄어든 데 있었다. 5개월 전 정부는 예산부족을 이유로 국가보조금을 줄였다. 주민들은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며 위도―격포항 노선을 증선해 달라고 했지만, 당시 정부는 적자항로라는 이유를 앞세워 이를 무시했다.
20년마다 반복되는 연안여객선 대형참사에서 배가 침몰한 원인은 '과적과 과승', '배의 복원력 상실'이었다. 정부는 서해 훼리호 사건을 계기로 여객선안전규제를 정비한다. 연안 여객선 안전관리업무를 해운항만청에서 해양경찰청으로 이관하고, 화물의 적재상태와 과승을 감시할 운항관리자를 90명까지 늘렸다.
하지만 20여년 뒤인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또 다시 침몰했다. 60여 년 전과 이유는 같았다. 과적과 복원력 상실로 침몰했다.
사전예방을 위해서는 안전 규제 반드시 필요
해양사고는 발발하면 곧바로 대형재난으로 이어진다. 바다 위라는 공간의 특성상 구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양사고는 배를 침몰시킬지도 모르는 요인을 사전에 제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수백 명, 수천 명의 승객을 태우는 여객선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후 대응보다 사전 예방이 더 강조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과적과 과승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 배의 복원력을 위협하는 행위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를 묵과하고 허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살인행위나 다름없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지만, 앞서 세 차례의 해양재난사고는 연안여객산업에 운항관리제도를 도입하고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고 이전에는 과적과 과승을 규제할 수단이 미비했고, 정부는 이 문제를 연안 해운 선사 사업주의 양심에 맡겼다. 선박안전문제만큼은 사업주의 양심에 맡길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데, 자그마치 40년이나(!) 걸렸다.
그런데 이마저도 한순간 역전되고 말았다. '재정적자'이니 '비용절감'이니 이런 말들이 돌더니, 얼마 있지도 않은 안전규제를 정부가 도리어 완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까지는 규제가 없거나 규제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하지만 세월호 침몰은 달랐다. 도리어 규제를 풀어준 게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규제는 정부가 완화하고, 돈은 기업주가 벌고…
서해훼리호 참사 이후 운항관리업무가 안착되나 싶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시사저널>, 1284호,'해수부, 세월호 운항관리 소홀 드러났다'). 참사가 잊히기 시작한 1996년부터 정부는 운항관리자 유지를 위한 정부보조금을 줄였다. 2005년~2010년까지 6년 동안에는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다.
2011년 정부보조금이 다시 늘어났지만 이번에는 여객운임수수료 부과율을 5%→4%→3.5%→3.2%로 낮췄다. 운항관리업무를 지탱하는 재원이 정부보조금과 여객운임수수료인데, 후자를 줄인 것이다. 여객운임수수료 부과율을 낮추면 선사들은 수입이 늘어난다. 운항관리자 유지를 위한 정부보조금을 가지고 정부가 해운회사의 이윤을 늘려 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2008년 11월 '여객선 안전관리지침'을 전면개정하면서 운항관리자에 대한 해경의 교육마저도 포기한다. 연안해운선사들의 이익집단인 해운조합에 운항관리업무를 민간위탁한 것도 문제인데, 교육마저 일임한 것이다. 과적과 과승을 단속해야 할 운항관리업무는 이렇게 유명무실화되었다.
선박운항연령을 완화하면 새 배를 건조해 운영하는 것보다 중고여객선을 수입해 고쳐 쓰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훨씬 비용이 절감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고선박을 고쳐 쓸 때는 안전성보다 수익성이 우선시 된다. 실제로 2009년 1월 이후 선령제한이 30년으로 완화되자, 중고수입선박 중 15년 이상 된 배가 29.4%→63.2%로 급격히 늘어났다(주영순 의원실). 그리고 2014년 현재, 중고 수입 여객선의 52.8%가 다양한 방식으로 개조되어 있다(김춘진 의원실).
뿐만 아니었다. 정부는 2011년 반기에 한 번씩 하는 노후여객선 특별점검대상 선박도 선령 15년에서 20년으로 완화했다. 이 모든 것이 '200억 절감'을 위해 선령규제를 속절없이 무너뜨리고 난 뒤의 일이다.
과적과 과승에 대한 선사와 선주의 책임 완화
2009년 12월 연안여객 선사 및 선주에 대한 양벌규정이 완화되었다. 이전에는 양벌규정에 따라 선장이 과승, 과적을 하면 선박소유자에게도 벌금형을 부과했다. 이건 당연한 것인데, 선주나 선사의 압력이 없으면 선장이 과적이나 과승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선박안전법'을 개정했다. 과적, 과승에 대해 주의와 감독만 '일정하게' 했으면 이를 어긴 당사자에게만 책임을 물리고 선사의 최고경영자나 실소유주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항을 추가시킨 것이다. 이유는 하나였다. 양벌규정이 '사업주의 경영 의욕을 떨어뜨린다'는 거였다.
경영의욕이 고취된 연안 해운회사들은 더 많은 이윤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내항여객선 선사들은 비정규직 고용을 선호했다. 교육비도 아꼈다(청해진해운의 2013년도 교육비는 54만 원). 2014년 현재 연안여객 선원 802명 중 602명이 계약직 비정규직이다. 무려 75%다.
그리고 청해진해운은 '짐을 너무 많이 실으면 배가 위험하다. 더 실으면 배가 가라앉을 수 있다'는 승무원의 경고, '세월호의 복원력이 낮아 화물 적재를 자제해야 한다'는 세월호 선장의 경고, '조타기가 고장 났으니 고쳐달라'는 조타수의 요구를 모두 무시했다. 이 모든 일들에 대한 선사의 책임은 완화되어 있었다.
세월호는 ‘천천히’ 침몰했다
세월호는 과적을 하지 않고는 운송수입률 25%를 넘을 수가 없는 배였다. 하지만 세월호는 2013년 3월 인천-제주 취항이 인가되었고, 취항 첫 달부터 2000~3000톤씩 화물을 싣고 다녔다. 규제를 포기한 무능한 정부가 새로운 선로를 허가하면서 과적을 사실상 묵인해 준 것이다.
세월호는 평형수 1565.8톤을 전제로 화물을 최대 1077톤 실을 수 있었다. 하지만 2014년 4월 15일 밤, 인천에서 출항할 당시 세월호는 2142톤의 화물을 싣고 있었고, 평형수는 762톤 밖에 안 실었다. 화물은 1000톤이나 더 실었고, 평형수는 절반이나 줄였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팽목항 앞바다에서 세월호는 변침을 시도했고, 배에 똑바로 붙들어 매지 못한 화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6700톤급의 세월호가 무게중심을 잃었다. 파도가 높거나 악천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세월호는 이렇게 침몰했다. 지난 10여년간 '천천히' 침몰한 것이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침몰하는 배 위에 승선해 있던 단원고의 학생들과 선생님들, 우리 이웃과 시민들, 비정규직 승무원들이 한꺼번에 희생당했다. 규제는 정부가 완화하고 돈은 기업주가 벌었다. 그리고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의 몫이었다.
여전히 실행되지 않는 안전규제
20년마다 반복되는 연안여객 침몰 원인은 모두 '과적과 과승'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를 효과적으로 규제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배에 싣는 화물의 '품명, 총중량, 화물 실중량'이 적힌 '중량계근표' 부착을 의무화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운송업체들이 반발하고 나서자 정부는 시행을 유보했다. 운송업체들의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현재 운송료가 낮다느니, 계근대를 설치할 공간이 없다느니, 출항시간이 늦어진다느니, 유래가 없는 일이라느니… 결국 정부는 여객선에 화물을 과적하겠다는 운송업체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광역버스 입석 금지 역시 마찬가지다. 과승을 규제하기 위한 조치로 당연한 것이지만, 정부는 10년이 넘게 미뤄왔던 일을 졸속으로 시행하면서 시민들을 불편하게 했다. 그리고 '입석 금지에 대한 거부감'을 조성시켰다. 열심히 일하려는 시민을 볼모로 정부와 사업주들이 줄다리기하면서, 알아서 포기하기를 기다리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세월이 흐르면 시민의 안전 문제는 다시 후순위로 밀려나고 만다.
1980년대 이래 정부는 '시민'의 안전보다 '시장'의 안전을 더 우선시했다. 안전규제는 후순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안전을 지키는 방식도 바뀌었다.
정부는 해상안전을 위한 규제를 강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선주들의 해상보험, 승객들의 여행보험 가입을 권장해 왔다. 구조·구난 민간업체 '언딘'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 정부는 치안업무는 물론 구조·구난업무에서도 민간위탁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부는 이 과정에서도, 또 다른 어떤 사업주들이 돈을 벌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안전이라는 의제가 엉뚱하게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방식들은 시민의 안전 문제를 시장화 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시민의 권리로서 보장받아야 할 안전은 없었다.
「416 특별법」이 말하고 싶은 것
정부는 대형 참사사건이 있을 때마다, 눈에 띄는 증상만을 손보는 식으로 위기를 넘겨왔고,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걸 제자리로 되돌려놓았다. 정부는 이런 참사사건이 있을 때마다 사고 책임자에 대한 대중적 증오를 증폭시켰고, 몇몇 행정 관료들의 직위를 해제하고는 유가족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보상금 문제로 제한해왔다.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이고, 시민들이 살아가는 곳이기에, 마땅히 모두가 안전에 대해 토론하고, 위험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정부는 이 정치 공간에서 노동자들과 시민들을 배제해왔다. 정치적으로 토론할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랬듯, 안전이라는 문제에 대해, 우리가 스스로, 민주적으로 토론하고,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힘과 권한을 갖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나아질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4·16 특별법'은 우리가 무언가 하나 더 응시해야 할 것이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4·16 특별법에는 '안전사회 소위원회'를 두고 한국사회 안전 문제를 모조리 되짚어 볼 수 있는 논의의 장을, 노동자와 시민의 정치공간을 열자고 제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천천히' 침몰하는 세월호의 생존자일지도 모른다. 누구든 세월호의 승객이 될 수 있었고, '천천히' 침몰하는 세월호에 승선했다면 누구든 희생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 '세월호'에 승선하지 않고, 살아남은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이 있다. 이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바꿔내는 것이다. 생명선과도 같은 안전규제를 만들고, 위험을 통제하려는 시민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려는 노동조합운동, 각급 사회운동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것... 살아남은 시민들 모두가 나서야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달라진 한국사회... '세월호'는 이제, 이렇게 기억되어야 한다. 팽목항 앞바다의 '4·16'은 그렇게 기억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