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정부의 경제개혁 윤소영 (한겨례 가리사니 2000년 3월17일) 현정부가 출범한 지 2년이 지났다. 김대중 후보의 지지자들은 호남 차별에 대한 `한풀이'를 넘어서 김 후보의 `진보성'에 기대를 걸었다. 그렇지만 나는 지난 대선이 유례없는 경제위기 속에서 치러졌음을 지적하면서, 몇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우선 경제위기를 김영삼 정부의 부패와 실정으로 환원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는 김대중 정부의 경제개혁이 김영삼 정부의 그것과 과연 무엇이 어떻게 다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기도 했다. 한보 및 기아의 부도로 인해 무력화한 김영삼 정부는 권력 재창출이 난망한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이인제씨가 후보 경선 결과에 불복해 탈당과 출마를 감행한 것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예상치 못했던 디제이피 연합은 김 후보의 승리에 작용한 또다른 주요한 계기였다. `워싱턴 컨센서스' 이런 의문들에 대해 당장 직접적인 설명을 제시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그렇지만 경제개혁을 위한 워싱턴 컨센서스에 주목함으로써 간접적인 설명을 시도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수출 주도적 공업화를 지향하던 남미의 신흥공업국들은 80년대 들어와 심각한 외채위기에 빠진다. 그런데 외채위기는 단지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기에, 미국 재무부가 나서서 해답을 모색하게 된다. 85년의 베이커 플랜과 89년의 브래디 플랜을 통해 형성된 워싱턴 컨센서스가 그것이다. 미국 재무부의 지도 아래 국제통화기금이 외채위기에 빠진 신흥공업국에 직접 개입하면서,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경제개혁을 요구한다. 기왕의 부채-부채 전환(리스케줄링)보다 부채-주식 전환(워크아웃)을 강조하고, 고금리에서 저금리로 정책기조를 바꿔 주식시장을 육성하라는 것이 그 핵심이다. 신흥공업국이 `신흥시장'이라는 이상한 새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말기에 강경식 경제팀에 의해 제안됐고 결국 김대중 정부에서 실행된 금융개혁, 재벌개혁, 노동개혁, 요컨대 구조조정이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김영삼 정부가 실패한 구조조정을 김대중 정부가 성공할 수 있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양자의 차이는 권력 누수로 무력화한 전자에 비해 후자가 공식 출범 이전부터 이미 일종의 `비상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또 전자에 대해 제동을 걸었던 국회가 일종의 `가사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도 후자한테는 호기로 작용했다. 김영삼 정부에 비해 김대중 정부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경제개혁의 부정적 효과를 완화하려는 노력을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노사정위원회나, 해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는 사회안전망, 생산적 복지 등을 그 증거로 들 수는 없다. 혹시라도 노동이나 사회 문제와 관련된 비정부기구들에 대한 직·간접적인 지원을 두고 아전인수로 하는 말은 아닐까 걱정스럽다. 사실 워싱턴 컨센서스는 경제개혁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조건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다. 노사정위원회나 각종 비정부기구들의 동원은 경제개혁의 실행을 위한 조건이다. 무엇보다도 경제개혁 실행을 위해서는 군사정부에서 문민정부로 넘어가는 것이 결정적인 조건이다. 90년 피노체트 군사정부에서 에일윈 문민정부로 이행한 칠레의 사례가 여러모로 모범적이다. 전두환-노태우 군사정부에서 김영삼-김대중 문민정부로의 이행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3당 합당이든 디제이피 연합이든, 아니면 이번 총선 이후에 시도될 또다른 정계 개편이든, 모두 경제개혁의 실행을 위한 조건일 뿐이다. 포용정책 또는 햇볕정책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 94년을 전후로 미국의 동아시아 외교정책은 기왕의 봉쇄정책에서 포용정책으로 돌아선다. 지난해 가을 발표된 페리 보고서는 이런 정책기조 위에서 97년 말부터 98년 초 사이에 미국 외교관계위원회가 작성한 특별보고서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김대중 정부의 경제개혁과 포용정책 또는 햇볕정책은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