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합의 재협상해야
셀리그 해리슨 (미국 국제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출처: 한겨레 2002.11.18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이달초 북한을 방문한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를 만났을 때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가 “몹시 위태롭다”고 말했다. 달리 말해 기본합의가 사멸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제임스 켈리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지난달 4일 강 부상이 자신에게 합의는 “파기됐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강 부상이 켈리 차관보에게 뭐라고 했든간에 기본합의가 깨질 경우 한국과 미국·일본이 곤란을 자초할 것은 분명하다. 폭탄 5개를 만들기에 충분한 플루토늄은 94년 합의 조건에 따라 현재 저장돼 있는 영변 원자로의 사용후 연료봉으로부터 재처리될 수 있을 것이다. 한·미·일은 북한에 플루토늄을 재처리할 핑계를 줘서 위기를 부추겨서는 안된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케도)는 스스로 합의를 파기하거나 북한이 파기하도록 하는 대신 북한과 이 문제를 재협상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케도의 결정이 자칫 북한의 대응조처를 낳아 군사적 움직임의 확대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막고 기본합의의 효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미국의 그것과 상충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한국과 일본은 일시적으로 자신들의 석유를 북한에 공급해야 할 것이다.

또 재협상을 통해 북한이 핵개발 계획을 끝냈음을 확증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사찰을 끌어내야 한다. 엄격한 사찰을 받아들이게 할 전제조건은 북한이 미국에 요구한 불가침협정이다. 이와 함께 새 합의는 북한이 심각한 에너지난에 대응하는 것을 돕고 러시아 사할린에서 북한을 거쳐 한국에 이르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공사를 지원하는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 미국 엑손모빌과 일본쪽 파트너가 백악관의 승인 없이 파이프라인을 북한을 거치도록 추진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은 중동산 석유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러시아의 가스를 이용할 수 있는 데다, 훨씬 떨어진 동부시베리아 코비차로부터 오는 파이프라인보다 값싸게 사할린 가스를 확보할 수 있다. 북한은 파이프라인을 통과하도록 하고 로열티를 받을 수 있고 파이프라인을 자체 발전소나 비료공장에 연결할 수도 있다. 남북한은 파이프라인 사업을 위해 경수로 2기를 모두 포기한다는 식으로 94년 합의를 개정하는 데는 분명히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남북한이 핵 협정을 따르고자 한다면 케도가 지을 경수로 2기 가운데 1기를 줄이는 것은 고려해볼 만하다.

이런 타협에 미국도 관심을 갖게 하려면, 북한은 경수로 사업 추진과 동시에 플루토늄을 생산하도록 고안된 핵시설을 해체하도록 돼 있는 제네바 합의의 비핵화 규정을 지키겠다는 것을 재확인해야 한다. 게다가 북한은 적절한 사찰조건 아래 우라늄 추가확보 노력을 못하게 하는 새 규정을 받아들이고, 94년 이전에 축적한 핵분열 물질의 양을 국제원자력기구가 사찰을 통해 측정하도록 한 지금의 규정에서 한걸음 나아가야 한다.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는 이런 사찰이 즉각, 합의가 정한 때보다 더 일찍 개시되기를 바라고 있다. 사찰 일정이 경수로 건설 진도와 연계돼 있다면 북한도 이렇게 앞당겨진 사찰을 받아들일 것이다. 미국도 엑손모빌 파이프라인의 북한 통과에 대한 반대를 멈추고, 파이프라인 옆에 발전소와 송전망·비료공장을 짓도록 다각적으로 지원하며, 경수로와 파이프라인을 완성할 때까지 케도의 대북 에너지 지원을 지지하게 될 것이다.

부시 행정부로서도 북한이 강화한 핵사찰과 함께 경수로 1기 건설을 수용하도록 하는 것은 정치적 승리로 비칠 수 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제네바 합의에서 그다지 엄격하지 않은 조건으로 북한에 너무 많은 것을 줬다는 공화당의 주장을 정당화하면서 말이다. 북한으로서도 기본합의에 김일성 전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에 최소한 1기만이라도 세워 가동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긴요하다.

한국의 경우 케도 프로젝트에 대한 지지는 원자로 건설 계약과 관련한 기득권에서 일부 비롯된다. 한국은 올해 말까지 8억달러를 원자로에 쓰게 되며 한국 회사들은 이후 공사에 23억달러를 더 투입하는 계약을 맺고 있다. 한국이 지금까지 낸 돈은 인프라와 첫 경수로 건설에만 쓰였다. 한국은 경수로가 언젠가는 통일 한국에 귀속될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에 케도 프로젝트를 선호한다. 반면 일본은 케도에 마지못해 10억달러를 주기로 했지만 질질 끌어왔다. 일본은 북한이 핵 안전기준을 지킬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데다 뒷마당에 또하나의 체르노빌 사태가 터질 것을 우려한다. 일본은 이미 4억달러를 썼기 때문에 이 사업이 완전히 백지화하는 것은 꺼린다. 하지만 한국처럼 경수로 1기로 줄이는 안은 수용할 수도 있다.

사할린 가스 개발에서 30%의 지분을 가진 일본 국영 석유자원개발주식회사(JAPEX)가 엑손모빌의 핵심 파트너라는 점이 중요하다. 북-일 수교 교섭이 계속된다면 일본은 사할린으로부터 북한을 거쳐 한국에 이르는 27억달러 규모의 파이프라인 건설을 지지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명심할 점은 파이프라인과 경수로 1기의 건설비가 대략 경수로 2기 건설비인 49억달러와 비슷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