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자본의 이해 -- 윤소영 20세기 세계경제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는 자본의 법인적 형태, 나아가 초민족적 형태를 토대로 한다. 법인자본은 소유와 경영 또는 금융과 산업의 분리를 의미하고, 게다가 전자에 대한 후자의 우위를 의미한다. 법인자본은 1930년대 대불황을 거치면서 케인스주의적 경제정책이 소유 또는 금융을 억압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법인자본의 초민족화는 전후 유럽의 분단과 서유럽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을 통해 미국의 직접투자가 급증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한반도의 분단과 한국전쟁을 통해 일본의 재건이 시도된다는 점에 지정학적 특수성이 있다. 또 미국은 일본으로 초민족적 법인자본이 진출하는 것을 억지하고 오히려 일본의 수출지향적 공업화를 위해 자국의 시장을 개방하는 이른바 `역개방' 정책을 채택한다. 이에 따라 일본의 재벌은 계열 또는 그룹의 형태로 복원되고, 게다가 한국과 대만은 일본경제의 `후배지'로 재통합된다. 미국경제의 위기와 기회 경제위기란 본질적으로 자본축적의 위기이고 그 궁극적 원인은 이윤율 저하 및 이윤량 감소에 있다. 미국의 경우 65년을 전후로 이윤율 저하가 관찰된다. 이윤율 저하가 급기야 이윤량 감소를 촉발시켜 경제위기가 발생한 것은 73~74년께이다. 위기에 빠진 미국경제의 성격은 크게 변화한다. 단적으로 소유-금융에 대한 억압이 철회되면서 금융화가 전개되는데, 이는 크게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우선 70년대는 석유달러의 환류를 통해 초민족적 은행자본이 크게 확장하고 전통적인 초민족적 법인자본은 얼마간 위축된다. 남미를 필두로 여러 발전도상국이 전통적인 수입대체적 공업화를 포기하고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무시한 채 수출지향적 공업화로 전향한 것은 초민족적 은행자본으로부터 저금리의 풍부한 외채를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80년대의 고금리로 인한 외채위기는 초민족적 은행자본이 주도하는 금융화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후 초민족적 은행자본 대신 초민족적 법인자본이 다시 대두한다. 그렇지만 80년대를 거치면서 주식시장이 활성화되고 법인자본의 지배구조도 금융화했기에 법인자본의 초민족화는 금융세계화라는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된다. 초민족적 법인자본의 활동에서 직접투자와 증권투자는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경제정책에서도 케인스주의가 화폐주의적 요소를 통합해 새 케인스주의로 전환한다. 70년대 이래의 경제위기를 타개하려는 이런 시도 덕분에 90년대에 들어와 미국은 주식시장의 호황과 여피족의 과소비에 근거한 이른바 `신경제'를 창출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아직도 이윤율은 경제위기가 발생한 73~74년 수준을 겨우 회복했을 뿐이다. 게다가 이마저도 60년대 노동자와 중산층을 사로잡았던 `보통 사람의 위대한 사회'라는 미국의 꿈, 그리고 제3세계 민중에게 근대화를 약속했던 `진보를 위한 동맹'을 희생한 대가일 뿐이다. 금융세계화에 통합되는 한국경제 90년대 소련 및 동유럽의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에 따른 냉전의 종식으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봉쇄정책에서 포용정책으로 전환한다.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특수성은 소멸하여 역개방 정책이 철회되고 금융세계화로의 통합 압력이 제고된다. 이에 따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신흥공업국은 97년에 금융위기를 맞게 된다. 경제위기를 타개한다는 구조조정의 화두가 금융개혁, 즉 금융세계화로의 통합인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국내외 기관투자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른바 `소액주주운동'이 요구하는 재벌개혁의 핵심도 다름 아니라 금융세계화로의 통합에 있다. 바야흐로 신흥공업국에서 신흥시장으로 변모하고 있는 한국경제의 앞날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