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와 미국의 더러운 속임수
- 아리스티드 제거는 거대한 중남미 탈안정화 캠페인의 일부분이다 -

[역자주]

미국의 제3세계 간섭정책은 대체로 유사한 모형의 반복이다. 목표물이 되
는 정부나 개인에 대한 악의적이고 그릇된 정보를 거대 미디어기업들을 통
해 유포시키고, 국제금융기관이나 다른 나라 정부가 재정 지원을 중단하거
나 삭감하도록 압박하고, 그 나라의 반대파들 특히 정부를 폭력적으로 전
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우파그룹을 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하게 지원하는
것. 이는 미국의 전형적인 "저강도전쟁" 모형이다.
이러한 전략은 현재의 아이티 사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부분의 영자
언론은 아리스티드가 2000년 총선 부정 때문에 합법성을 상실했다고 말한
다. 그러나 2000년 당시 미국 정부조차 선거 부정을 주장하지 않았고, 미
주기구(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는 대통령과 입법부 선거는 자유
롭고 공정했다고 선언하였다. 아이티의 모든 당사자들은 아리스티드가 92%
로 득표율로 당선되었다고 인정했다. 합의되지 않았던 유일한 문제는 다수
를 얻었지만 과반수를 넘지 않은 아리스티드 측의 7명의 상원의원에 대한
결선투표 문제였다. 하지만 결국 7명은 사임했고, 새로운 선거를 치른 것
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거에서의 "권력남용" 문제를 빌미로 부시정부와 유럽의
순종적인 파트너들은 수억 달러의 신용제공과 경제원조를 연기하였다. 미
리 보장되어 있었던 미주개발은행의 4억 달러 대부가 봉쇄되었고, IMF, 세
계은행, 유럽연합은 신용공급을 삭감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2003년 7월 중
반 아이티가 3200만 달러의 외채 연체금을 상환하면서 국고를 비우고 나서
야 미국은 3400만 달러가 아이티의 보건, 수도, 도로를 위해 제공될 것이
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돈은 대부분 미국의 개발사업 "계약
자"들의 수중으로 다시 돌아간다. 한편 아이티의 좌파운동들은 외채상환
의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것을 주장했으나, 거부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아이티의 우파 정당, 무장조직, 기업가나 종교 조직
에 대한 공공연한 또는 은밀한 미국의 지원은 지속되었다 (구체적인 내용
은 본 글에서 다루고 있다). 게다가 현재 미 국무부에서 카리브와 라틴 아
메리카 정책을 입안하는 인물들 중 일부는 이미 레이건 시대부터 요란을
피웠던 이들인데, 특히 존 네그로폰테, 엘리어트 아브람스, 존 포인덱스터
는 니카라과 산디니스타에 대한 더러운 전쟁과 이란-콘트라 스캔들에 깊
게 연루된 인물이다. 최근에는 국가안보위원회의 오토 라이히나 국무부
의 노리에가가 가장 눈에 띤다.
2003년 4월 노리에가는 워싱턴에서 열린 아메리카위원회 회의에서 미국의
아이티 정책과 베네주엘라와 쿠바 정책을 연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는 미주기구가 채택한 "아메리카 민주주의 헌장"의 20조가 민주주의의 핵
심적 요소를 위반한 나라들에게 취할 일련의 조치가 담겨 있는 "개입 방
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차베스와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고의적으
로 분열적이며 대립적인 환경을 조성했다. 쿠바의 선한 국민들은 민주주
의 헌장을 배우고 있다는 점은 나의 강력한 희망"이라고 덧붙였다. 아이티
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강도전쟁"은 쿠바와 베네주엘라, 나아가 라틴아메
리카 모든 곳에서 적용된다는 것이다.

* 앞머리와 본문의 역주는 아래의 글들을 참조했다.

Tom Reeves, "Still Up Against the Death Plan in Haiti" (2003.9/10)
http://www.thirdworldtraveler.com/Caribbean/UpAgainstDeathPlan_Haiti.
html

Michel Chossudovsky, "US Sponsored Coup d'Etat" (2004.2.29),
http://www.globalresearch.ca/articles/CHO402D.html

Heather Williams, "Haiti as Target Practice", (2004.3.1)
http://www.counterpunch.org/williams03012004.html

* * *

아이티와 미국의 더러운 속임수
- 아리스티드 제거는 거대한 중남미 탈안정화 캠페인의 일부분이다 -

그렉 구마 2004년 3월 1일

1915년 미국이 아이티에 처음 군사간섭했을 때, 아무도 그것에 주목하지
않았다. [1915년 7월 미국은 아이티 내분을 구실로 군사간섭을 시작했으
며, 9월에는 아이티를 보호령으로 만들고 1934년까지 군사점령을 계속하였
다.] 미국의 군사간섭을 직접 취재한 저널리스트도 거의 없었고, 대부분
의 신문은 미국 정부의 공식 발표를 받아 적을 따름이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말을 따르면, 아이티에 보호령을 세우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악
하고 타락한" 혁명을 중단하고, "점진적인 개혁과정"을 지원하기 위한 거
대한 노력의 일부분이며, 그의 "국제주의" 정책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사실 윌슨은 이 섬나라를 1차
세계대전의 지리전략적인 볼모로 생각했다. 그는 특히 아이티에서의 정치
적 혼란으로 독일이 이 지역에 군사기지를 세우는 이득을 취할 것을 걱정
하였다. 또한 그에게는 매우 강력한 경제적 동기도 있었다.

미국에게 아이티는 위협받는 투자자산이었다. 내셔널시티은행은 중앙은행
과 철도체계를 통제하였고, 설탕왕들은 기름진 농장을 탈취할 표적으로 생
각했다. 투자자와 중개업자에게는 불행히도, 이 나라는 4년 동안 7명의 대
통령이 갈렸고, 그들 대부분은 초기에 살해되거나 제거되었다. 북부 농촌
지역은 카코스라고 불렸던 반란 운동의 통제를 받았다 (카코스는 이 나라
의 새 울음소리를 딴 것이다). 카코스는 대개 다른 잔인한 산적 무리들처
럼 묘사되었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자였으며, 이 나라 경제를
지배하는 프랑스와 미국, 소수 물라토의 통제에 저항하였다.

미국 점령의 초기 동안, 카코스는 그들의 "산디노"[니카라과의 게릴라 지
도자]인 샤르멘느 페랄트의 지휘를 받으며 저항을 지속했다 (그는 군대의
장교였다가 게릴라 지도자로 변신했다). 페랄트는 1919년 미국 해병대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1980년대 후반 아이티의 민주주의 운동의 상징으로 되
살아났다. 1980년대의 민주주의 운동은 결국 해방신학자인 장 베르뜨랑 아
리스티드의 대통령 당선을 이끌어 내었다. [1957년 9월 대통령으로 선출
된 ('파파독') 뒤발리에는 의회를 해산했고, 1964년 종신대통령이 선포하
고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1971년 그가 죽자 19세의 ('베이비독') 장 클로
드 뒤발리에가 대통력직을 세습했다. 그는 민중저항으로 1986년 해외로 망
명했고, 1991년 아리스티드가 당선될 때까지 뒤발리에가의 군사집행자 역
할을 했던 톤톤 마쿠트가 사실상 독재체제를 유지했다.]

하지만 1990년대 동안 역사는 다시 반복되었다. 1991년 선거 7개월 후 아
리스티드는 군사 쿠데타로 전복되었다. 군사정권은 3년 동안 지속되었고,
1994년 아이티의 곤경[대량난민사태]은 커다란 뉴스거리가 되었다. 하지
만 보도는 매우 선택적이었고, 쿠데타 주도 세력에 대한 CIA의 지원이나
아이티 군부의 마약거래 개입 사실은 결코 보도하지 않았다. 미국의 점령
에 앞서, 미디어는 아리스티드가 "속임수 봉쇄"라고 부른 것에 대해 의심
스럽게도 침묵하였다. [군사구테타와 반대파 인사들에 대한 학살이 벌어지
자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은 인권회복과 민정이양을 촉구했다. 그러나 군
사정권이 이를 무시하자 미국 부시정부는 '아이티 경제제제'를 가하고, UN
은 1993년 6월 전세계적인 석유, 무기 금수 및 해외 자산 동결조치를 취하
였다.] 봉쇄조치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짜내었지만, 그러나 외국자본
의 각종 이윤 사업들은 면제 대상이었다. 석유 봉쇄가 이루어졌으나, 연료
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통해서 쉽게 밀수입되었다. 반면에 아리스티드를 더
럽히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또 다른 미국의 점령이 시작되었다. [1994년 8
월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아이티의 민정복귀를 위해 무력을 포함한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의 사용을 승인한 결의안 940호를 통과시켰다. 이에 대
해 아이티 군사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대응하였다. 1994년 9월 18
일, 미군 2만 명을 포함한 30개국에서 파견된 총 2만 2천 명의 다국적군
이 아이티에 도착하여 쿠데타 세력을 축출하고 아리스티드 민선 대통령을
복귀시켰다.] 그러나 윌슨이 안정과 민주주의라는 수사로 미국의 경제적
이해와 횡포를 숨겼던 것과 같이, 클린턴은 "민주주의의 지지"를 내걸었
다. 그러나 사실 1990년대 점령의 실제 목표는 아리스티드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아이티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미디어는 분
명한 것을 가리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미국은 아리스티드와 결코 편한 관
계를 유지한 적이 없으며, 미국은 다음 선거까지 아이티 군부세력과 이 나
라를 공동 관리한다는 것을 합의하였던 것이다.

되돌아보면, 정책결정가와 분석가 대부분은 미국이 본래 [민주주의에 대
한 지지가 목표가 아니었고] 단지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아이티에 들어갔
다고 주장한다. 아이티에서 일종의 혁명이 진행 중이었다고 말하는 분석가
는 거의 없으며, 심지어 그들은 아이티의 상황을 항상 카오스로 묘사한
다. 상투적인 지식을 따르면, 아이티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스스로를 통치
할 수 없거나 민주 제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은 20세기 초반 19
년 간 아이티에 머물렀던 것이다. 아이티인들은 1915년 당시 준비되어있
지 않았고, 어떤 회의적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1990년대에도 여전히
그러하다는 것이다.

1994년 9월 선거에서 로스 페로는 "노우나싱"(Know-Nothin)[무지당
(1853~1856년)의 당원, 미국 태생 시민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
다] 스타일로 대중적 편견을 널리 퍼뜨렸다. 그는 "아이티인들은 독재자
를 좋아한다"며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말하였다. 페로는 미국의 개입을
강력히 반대했는데, 그 함의는 그가 아이티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에 대해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
이었다.

부시정부는 2003년 말 아리스티드에 반대하는 무장봉기를 기꺼이 받아들였
고, 또한 2월 29일 그를 납치하여 아프리카로 보내었다. 이 때 부시정부
는 그와 유사한 대중적 편견에 의존했다. 그 후 물러난 대통령은 그의 사
임이 미국 대사관 관리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물론 그는 결
코 미국이 선호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이 지원하는 탈안정화 정책
이라는 환경에서 질서를 유지할 수 없었고, 그의 무능력은 "아이티 스타
일"의 "정권 교체"를 위한 최고의 구실을 제공하였다.

2월 초 "반란"을 일으킨 준군사조직 군대는 국경을 넘어서 도미니카 공화
국으로부터 건너왔다. 이들 잘 훈련되고 훌륭한 장비를 갖춘 부대는 <아이
티 진보전선>(FRAPH)의 전 멤버들을 포함하였다. <아이티 진보전선>이라
는 이름은 아리스티드의 첫 번째 정부를 전복한 1991년 군사 쿠데타 이후
대중학살과 정치암살에 연루된 "죽음의 군대"의 이름을 부드럽게 바꾼 것
이었다. [군사쿠데타 기간 동안 최소한 3000명이 죽고 수천명이 추방되었
다]. 스스로 <민족해방재건전선>(FLRN)이라고 선언한 조직 역시 활동적이
며 기 필리프가 이끌고 있다. 그는 과거 경찰 수장이었고 아이티 군대의
멤버였다. 그는 쿠데타 기간 동안 다른 수십 명의 아이티 군대 장교들과
함께 에콰도르에서 미국 특수부대의 훈련을 받았다. 고나이베와 깝 아티
안 공격을 이끌었던 다른 두 명의 반란 지휘자인 엠마뉴엘 "토토" 콘스탄
트와 조델 샹블렝은 뒤발리에 시대의 톤톤 마쿠트 군대의 집행자였으며 <
아이티진보전선>의 지도자였다.

무장 반란자들과 민간인 지지자들 모두는 명백히 최근의 음모에 연루되었
다. G-184 지도자인 앙드레 아파이드는 아리스티드를 전복했던 그 주간에
미국 국무장관 콜린 파월과 접촉했다. 필리프와 콘스탄트는 CIA와 연계되
어있고, 미국 관리와 접촉했다. [현재 아이티의 대표적인 민간인 "반대
파" 그룹은 <민주주의 집합점>(Democratic Convergence, DC)과 <G-184>
(184 시민사회조직그룹)다. DC는 15개의 반-아리스티드 정당 연합이며, 서
로 적대적인 아이티 지배계급의 분파들로 구성되어있다. 이들에 대한 대중
적 지지는 빈약하다 (이들은 선거에서 20%를 넘은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러나 그들이 집합한 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기부>(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 NED)와 연계된 <국제공화당기구>
(International Republican Institute, IRI)가 매년 제공하는 300만 달러
의 기금 때문이다. NED는 1983년 레이건 정권 당시에 창설된 것으로, CIA
가 벌이는 정치인에 대한 은밀한 매수나 거짓 민간인조직 창설에 대한 비
난이 일면서, CIA를 대체하여 정당들과 NGO 부문에서 중요한 정보기관 역
할을 수행하게 된다. G-184를 이끄는 앙드레 아파이드는 미국 시민이며 아
이티에 4000명 규모의 공장을 소유했고 1991년 군사쿠데타를 지지했다. G-
184는 엘리트기업가조직과 종교조직 등의 우산조직의 성격을 띠었고, 역
시 IRI나 유럽연합으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았다.]

시애틀타임즈에 따라면 2월 20일 미국 대사 제임스 폴리는 미군 남부사령
부로부터 4명의 군사전문가로 이루어진 팀을 불렀다. 공식적으로 그들의
직무는 "미국 대사관과 인사들에 대한 위협을 평가"하는 것이었다. 하지
만 "예방 조치"로서 3척의 미 해군 군함을 아이티로 출발시킬 준비에 돌입
했다. 한 척에는 수직이착륙 전투기인 해리어와 공격용 헬리콥터가 탑재되
어 있었다. 또한 최소한 2000명의 해병도 배치될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아리스티드가 납치되면서, 워싱턴은 그들의 대리인인 준군사조직
부대를 무장해제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고, 이제는 "과도기" 동
안 정치적 역할을 맡을 세력으로 내세우고 있다. 달리 말해, 부시정부는
아리스티드 대통령의 제거 후 아리스티드 지지자들에 대한 학살을 막기 위
한 준비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위기를 다루면서 미디어 기업
들은 CIA가 개입한 역사와 역할에 대해 눈감고 있다. 그 대신에 이른
바 "반란 지도자", 곧 1990년대 죽음의 군대의 지휘관들을 반대파의 합법
적인 대변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부시 정부는 효과적으로 아리스티드를 속죄양으로 삼아, 그를 "사회경제
적 상황을 악화시킨" 유일한 주범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이는 그레이 데이
비스를 물러나게 하고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를 당선시킨 2003년 캘리포니
아 소환선거와 매우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사회경제적 위기는 대부
분 1980년대 이후 IMF가 강제한 경제개혁에 기인한 것이다. 아리스티드가
1994년 아이티로 돌아올 때 그에게 강요된 조건은 IMF의 경제 "요법"의 수
용이었다. 그는 이 조건을 받아들였지만, 어쨌든 그는 블랙리스트에 올랐
고 악마로 묘사되고 있다. [아이티의 IMF 경제개혁은 뒤발리에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1991년 아리스티드는 진보적 개혁을 추진하려했지만, 군사쿠
데타가 벌어진 후 이전에 세계은행의 관리였고 1983년 뒤발리에 집권시 총
리를 맡았던 마르크 바쟁이 다시 총리로 복귀하였다. 1994년 아리스티드
가 돌아온 후 1996년까지의 남은 임기 동안, "긴급경제복구계획"이 진행되
었다. 긴축재정과 공적서비스 삭감이 강요되었고, 엄격한 외채상환이 세계
은행과 미주개발은행, IMF의 새로운 융자를 위한 조건이 되었다. 한편
1996년 클린턴 정부와 체결한 협정으로 쌀, 설탕, 옥수수 등 미국 농산품
관세가 철폐되면서 농산물이 덤핑으로 수입되었고, 이는 인구의 75%가 농
업에 종사하는 아이티 현실에서 농민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한편 클린
턴정부는 2003년 11월 아이티 대선을 두 주 앞두고 발전기금 제공을 중단
시키고, 아이티 정부에게 IMF와 양해각서를 체결할 것을 강요했다. 당선
된 아리스티드는 최저임금의 상승, 학교건립과 문맹퇴치 등을 약속했지
만, 정부예산, 공공부문, 공적 투자, 사유화, 무역과 통화정책 등에 걸쳐
이미 IMF와 체결된 합의로 인해 손발이 꽁꽁 묶이게 된다.]

캐나다의 경제학자 미셀 초수도프스키가 설명한 것처럼, 부시의 목적
은 "아이티를 민주주의의 외양으로 완전한 미국의 식민지로 회복"하는 것
으로 보인다. 그 목표는 포르토프랭스에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고 미군이
아이티에 영구 주둔하는 것이다. 결국 미국 정부가 추구하는 것은 카리브
지역을 군사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이것을 원하는가? 이스파니올라(아이티와 도미니카 공
화국이 있는 섬)는 카리브 지역의 관문이며, 쿠바-북서아메리카와 베네주
엘라-남아메리카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다. 이 섬에 미군이 주둔하면 쿠바
와 베네주엘라 모두에게 정치적 압력을 가하는데 큰 이점이 있으며, 더 광
범위한 지역 군사작전을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아이티의 야만적인 스파이들의 사례처럼, 미국은 정보기관들이 "한번에
될 일을 두 번에 하는 일"이라고 부르는 비밀작전[대리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미국 시민권을 주겠다는 약속으로 모집된 베네주엘라인들이 과거 <
안보협력을 위한 북반구기구>(WHISC)였고 지금은 <미국 아메리카군사학교>
(SOA)로 이름이 바뀐 곳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 그리고 미군 남
부사령부가 관할하며 페루 북부 정글에 있는 이퀴토스 훈련소로 옮겨진
다.

미국 지도자는 베네주엘라의 휴고 차베스 대통령을 달갑게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차베스는 부시 정부를 격노하게 하고 있다. 2002년 4
월 미국이 취한 첫 번째 조치는 쿠데타였다. 그러나 친미적인 페드로 카르
모나 에스타냐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폐기한 후 단 이틀만에 권력에
서 물러났고, 차베스는 복귀하였다.

차베스는 줄곧 미국 정부와 CIA가 베네주엘라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다양
한 반대 움직임을 지원한다고 비난했다. 베네주엘라 사태의 배경은 그 나
라가 세계 4위의 석유수출국이며 미국의 세 번째 석유수입처라는 점이다.
베네주엘라는 필립스 페트롤륨과 엑손모빌의 주요한 달러박스이며, 세브
론 텍사코와 옥시덴탈 페트롤륨도 주요한 이해관계자다.

아이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문제며, 이는 더
욱 격렬한 폭력 사태와 함께 나타날 것이다. 아루바(네덜란드령 앤틸리스
제도)의 미 공군과 해군 분견대는 병참과 물자를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으
며, 미 해군 병원선은 사태가 발생했다는 신호가 처음 나타나면 북부 해안
에 배치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아이티 사태는 이라크나 미국 경제 문제에 관한 미국 시
민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고자 하는 미국 정부에게 유용한 전환점을 제
공하고 있다. 미국의 비밀 작전이 실제로 아이티의 불안을 자극하고 심지
어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제거하였다는 책임은 간단히 부정되고 있
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