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국제동향 | 2023.11.17

①북한의 핵무장은 미국의 위협 때문인가요?

<반핵·반권위주의 국제민중연대를 위하여>

사회진보연대
 

북한의 핵무장은 세계적인 탈냉전에 동참하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정권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북한은 비핵화 약속을 지속적으로 어겼으며, 북미합의의 파기에 앞서 이미 핵개발을 진행한 정황이 있습니다. 북한 정권은 핵무기를 ‘국체’라고 부를 만큼 비핵화 의사가 없습니다. 미국이 아니라 남한을 향해 핵무기를 사용할 의사를 드러냈고, 전술핵무기 개발 전략과 핵무력법령, 대남전쟁 시나리오를 제시했습니다. 세계 반핵평화운동은 북한과 달리 핵무장 대신 평화로운 길을 통해서 강대국들의 핵 패권 해체와 세계 모든 핵무기의 철폐를 요구해왔습니다. 최근 북한 정권은 한미군사훈련 중단, 대북제재 해제, 주한미군 철수 등 그동안 자신들이 내세웠던 요구들이 설령 수용되더라도 비핵화 대화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밝혔는데, 북한 핵무장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구적인 정권 안전보장을 얻어내는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북한의 핵위협이 한반도 핵전쟁 위험을 고조시킨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북한의 핵무장을 옹호하면 한반도 정세를 완전히 오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핵무기는 그 존재 자체로 전쟁위험을 불러일으키고 인류의 절멸을 야기할 수 있다는 명제가 세계 반핵평화운동의 신념입니다. 따라서 북한이든 어느 국가든 ‘자위용’이라는 구실로 핵 보유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북한의 요구대로 ‘조선반도 비핵화’(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고 핵동결·핵감축 협상을 하자는 북한의 접근법)를 위한 협상을 진행한다면, 북한의 핵무기가 존재하는 한반도는 핵전쟁 위험이 영구화된 지역으로 남을 것입니다. NL 주류의 북핵 인식은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에서 볼 수 있듯 한국 사회운동 내에서 큰 논란이 되어왔습니다. ‘전쟁과 핵무기의 위협에 맞서 항구적인 세계평화를 실현한다’는 민주노총 강령에도 위배됩니다.
 
논자, 상황에 따라 세부 내용은 다를 수 있으나 북핵 문제에 대한 이들의 주장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옳든 그르든 북한이 핵무장에 나서게 된 책임은 미국의 대북위협에 있으므로, ‘근본 원인’인 미국의 대북적대시 정책이 철회되면(혹은 철회되어야만) 북핵 문제가 해결된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그러므로 진보 진영은 미국의 대북위협 철회 요구와 별도로 북핵 포기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주장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장창준, “[통합]진보당은 북핵을 옹호하는가–[통합]진보당 당원, 헌재 판결을 말한다⑤”, 《통일뉴스》, 2015.02.05.). 이러한 태도는 남한 사회운동의 임무를 북한 핵을 포함한 모든 핵무기에 대한 반대, 즉 본연의 ‘반전반핵평화’운동이 아닌 미국과 남한의 ‘대북적대시 정책’ 철회에 국한시키는 효과를 냅니다.
 
② 북한의 핵무장은 미국의 위협에 따른 방어 목적이라는 주장은, 그러니 궁극적으로 미국이 먼저 비핵화(핵 포기)를 하여 북한에 대한 핵 위협이 완전히 사라져야만 북한도 비핵화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한반도 비핵화” 대신 “세계 비핵화”를 지향한다는 북한 당국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원칙적으로는 “세계 비핵화”, “전 지구상에서의 비핵화”를 지향한다고 내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논리를 보면 미국이 더 많은 핵무기를 가진 이상 북한의 핵을 문제 삼는 것은 불평등하다는 주장에 중점을 둡니다(“민주당은 ‘김대중 정신’ 되돌아봐야-‘북 핵실험 규탄 결의안’ 불참한 오병윤 통합진보당 원내대표”, 《통일뉴스》, 2013.02.15.).
 
③ NL 강경파 일각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심지어 북한의 핵무기 덕분에 한반도의 전쟁위기가 해소되고 우리 민족이 미국으로부터 자주를 쟁취할 수 있다고 공공연히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북한의 핵무장이 남한 민중을 위협하고 한반도 핵전쟁 위기를 고조시키는 현실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또한 북한이 핵무기를 계속 보유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이므로, 세계 반핵평화운동의 요구와 배치됩니다.
 
다음 내용을 통해 이런 류의 한반도 정세인식의 오류를 밝혀보겠습니다.
 
① 북한의 핵무장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억압과 봉쇄”가 더 두드러졌던 냉전 시기에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계가 탈냉전과 핵군축, 개혁·개방을 통한 블록경제 해체로 나아가고, 이것이 한반도에서도 남한 내 미국 핵무기 철수,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한미군사훈련 중단으로 나타나는 시점에서 이러한 대세에 역행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즉, 북한의 핵무장은 세계적인 탈냉전에 동참하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정권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한반도 1차·2차 핵위기, 6자회담 등 실제 비핵화 협상의 역사를 보아도, 북한은 스스로 한 비핵화 약속을 지속적으로 어겼으며 북미합의의 파기에 앞서 물밑에서 핵개발을 진행한 정황이 있습니다.
 
② 현재 북한 정권은 핵무기를 “공화국의 국체”라고 부를 만큼 비핵화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또한 미국이 아니라 남한을 향해 핵무기를 사용할 의사를 드러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전술핵무기 개발 전략과 핵무력법령, 대남‘통일전쟁’ 시나리오를 제시합니다. 이는 소위 ‘협상용’ 핵이 아닌, 실전에서 사용 가능한 핵전력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뜻입니다.
 
③ 미국의 핵 패권과 “적대시정책”에 맞서는 비핵평화의 길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대부분의 비핵국가와 세계 반핵평화운동은 NPT(핵무기비확산조약), 비핵지대조약, TPNW(핵무기금지조약) 등을 통해 강대국들의 핵 패권 해체와 세계 모든 핵무기의 철폐를 요구해왔습니다. 이러한 길 대신 핵무장을 선택한 북한의 행보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④ 북한 정권은 비핵화 대화의 문턱을 높이고 있습니다. 스스로 비핵화 대화의 조건으로 들었던 “대북적대시 정책의 철회”를 의미 없는 것으로 규정하며, 심지어 주한미군 철수조차 대화 재개 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행보는 결국 북한 정권이 핵무장을 통해 얻으려 한 것은 ‘한반도 평화’나 북한 민중을 위한 조치가 아니라, 영구적인 정권 안전보장이라는 점을 드러냅니다.
 
 
누가 탈냉전과 한반도 비핵화를 거부했습니까?
 
이들은 미국과 남한의 냉전적인 봉쇄·고립 전략이 북핵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북한의 핵 개발이 본격화되고 이른바 ‘1차 한반도 핵위기’가 일어난 것이 1990년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주장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이 시기는 갈등과 봉쇄·고립 정책이 고조되던 시기가 아니라 세계가 ‘탈냉전’이라는 중대한 전환을 겪던 시기이며, 탈냉전의 주요한 특징은 바로 ‘핵 군축·폐기’였기 때문입니다.
 
1987년 12월 8일, 미국 백악관에서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 서명 중인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왼쪽)과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오른쪽).
 
1994년 1월 14일, 모스크바에서 우크라이나의 핵 폐기와 안보 보장을 약속한 부다페스트 안전보장각서에 서명한 뒤 손을 맞잡은 미국 클린턴 대통령(왼쪽), 러시아 옐친 대통령(중간), 우크라이나 크라우추크(오른쪽) 대통령.
 
‘냉전 종식’의 시작을 알린 사건은 다름 아닌 미국과 소련이 상호 핵무기 감축에 합의한 1987년 중거리핵전력조약(INF) 체결이었습니다. 이 조약에 따라 미국과 소련은 사거리 500km~5,500km인 중거리 핵미사일을 폐기했습니다. 1991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핵무기비확산조약(NPT)에 가입했고, 1993년 그동안 자력으로 개발, 은닉했던 핵무기를 공개하며 이를 자진 폐기할 계획을 밝혔습니다. “아프리카 국가들과 국제사회와의 새로운 관계인식에 근거하여 핵무기를 포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핵보유국의 핵군축 노력 의무를 명시한 NPT 가입을 거부하던 중국과 프랑스도 1992년 NPT에 가입했습니다. 소련이 해체하면서 과거 소련의 핵무기를 대거 보유하게 된 구소련 국가 우크라이나·벨라루스·카자흐스탄도 1994년 부다페스트 안전보장각서를 통해 핵무기 전량 폐기와 미국·영국·러시아가 약속하는 안보 보장을 교환합니다. (러시아는 바로 이 각서를 위반하고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오랫동안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한반도도 이러한 흐름에서 예외가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1990년 9월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개시되어 1991년 9월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UN에 가입했습니다. 같은 시기 미국 정부가 남한 내 미국 전술핵무기의 철수를 공식화했습니다. 1991년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며, 1991년 12월 31일 남북한이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가서명하고, 1992년 1월 7일 한미연합군사령부가 ‘팀스피릿’ 한미군사훈련 중지를 선포합니다. 이때가 역사 속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최고조에 달했던 때였습니다. 만약 “북한의 핵무장이 한반도의 자주와 평화를 보장한다”는 NL 일각의 논리를 따르면, 이때는 북한이 그러한 자주평화의 길과 ‘핵 주권’을 포기할 뻔한 오판을 저질렀다고 주장해야 일관성이 있을 것입니다.
 

◎ 용어 소개

남북기본합의서란?
1991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채택한 문서로 정식 명칭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입니다. 남북한 관계가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명시하고, 남북한의 상호 체제 인정, 상호불가침, 교류와 협력을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1차 한반도 핵위기와 맞물려, 합의서의 구체적 이행 방안은 논의되지 못했습니다.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이란?
1992년 1월 20일 남북한이 합의한 조약으로 정식 명칭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입니다. ▲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않는다 ▲ 핵 재처리시설과 우라늄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 ▲ 비핵화를 검증하기 위해 상대측이 선정하고 쌍방이 합의하는 대상에 대하여 사찰을 실시한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북한은 2006년 1차 핵실험으로 공동선언을 깨뜨리고 핵무장에 나섰으나 남한은 현재까지 이를 준수하고 있습니다.
 
1) 1차 한반도 핵위기: 북한의 IAEA 사찰 거부와 NPT 탈퇴 선언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한은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하면 팀스피릿 군사훈련을 중지하기로 하였고, 북한은 남한에 배치되었던 미군 핵무기의 철수를 확인하고 팀스피릿 훈련을 중단한다면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고 핵 관련 시설 사찰을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한미 군 당국은 1992년 봄으로 예정된 팀스피릿 훈련을 취소했습니다.
 
북한은 1992년 1월 30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 협정에 서명했고 5월에 최초보고서를 IAEA에 제출했습니다. IAEA는 1992년 5월~1993년 1월까지 여섯 차례 사찰을 실시했는데, 그 과정에서 북한이 제출한 보고서와 달리 북한이 이미 핵무기용 플루토늄을 생산했다고 의심할 여러 정황이 발견되었습니다. 따라서 IAEA는 미신고시설 사찰을 주장했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하고 1993년 3월 12일, 초유의 NPT 탈퇴를 선언합니다. 이 사건이 이른바 ‘1차 한반도 핵위기’입니다. 북한은 IAEA의 사찰 요구가 “미국의 거짓 정보제공과 압력에 의한 것”이라거나 “자주권에 대한 난폭한 침해”라고 주장했으나, IAEA가 NPT 체약국인 북한에 특별사찰을 촉구한 일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습니다.
 
8차례의 예비회담 끝에 서울에서 열린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 [출처: 연합뉴스]
 
평양에서 열린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이 발효되었다. [출처: 동아일보]
 
김영삼 정부는 1994년 3월 20일, 북한이 NPT에 복귀하면 ①팀스피릿 훈련 규모를 축소하겠다 ②북한뿐만 아니라 남한 국가시설(미군기지 포함)에 대한 핵사찰을 받아들이겠다 ③북한에 핵공격을 가하지 않겠다고 보장하겠다 ④남북 간 교역을 확대하겠다 ⑤한국, 미국, 일본이 대북관계를 진전시키겠다고 발표합니다. (조건의 내용을 보면 미국과도 협의를 거쳤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4월 2일에는 북한이 IAEA 사찰을 받을 경우 남한 내에 있는 군사기지와 미군기지의 IAEA 사찰을 수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4월 20일에는 북한의 NPT 복귀, IAEA 특별사찰과 함께 남북 상호핵사찰을 실현할 것을, 8월 3일에는 이를 위해 한반도비핵화선언이 명시한 ‘핵통제공동위원회’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러한 제안들을 남한과 미국이 “봉쇄·고립 전략을 고수했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은 제안을 모두 거부했습니다.
 
북한 정부는 1993년 3월 12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대북특별핵사찰 요구에 대해 성명을 발표하여, "나라의 최고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조치", "공화국의 사회주의 제도를 견결히 옹호, 수호하기 위한 응당한 자위적 조치"라며 NPT 탈퇴를 선언했다. [출처: 경향신문]
 
2020년 민주노총 통일학교 교안은 “북의 비핵노력”을 강조하며 1980년대 당시 북한의 동북아 비핵지대, 한반도 비핵지대 제안과 NPT 가입을 예시로 듭니다. 그런데 정작 냉전 종식과 한반도 내 미국 핵무기 철수가 이뤄진 1990년대 초, 북한은 1차 한반도 핵위기를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비핵’ 수사를 철회하기 시작합니다.
 
한 예로, 북한의 NPT 탈퇴 선언 뒤인 1993년 4차 범민족대회 공동결의문은 이전과 달리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가 빠져있었습니다. 1991년 2차 범민족대회 결의문에는 “우리들은 한반도를 비핵화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 벌여나갈 것이다. 우리나라의 비핵화는 민족의 사활과 관련한 중대한 문제이다”라며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이 명시되었고, 1992년 3차 범민족대회 결의문에도 “남북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의 조속한 이행”이 담겨 있었던 데 반해, 1993년 결의문은 한반도 핵 문제에 대해 “핵 문제를 빌미로 한 외세의 부당한 내정간섭은 중지되어야한다”는 언급만이 있었습니다. 이때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북측본부, 해외본부가 각각 채택한 결의문과 공동결의문을 비교해보면, 남한측 결의문은 ‘한반도 비핵평화지대’라는 언급이 있고 해외 결의문은 ‘비핵화공동선언의 성실한 이행’이 담겨 있는 반면, 북한측 결의문은 미국의 핵무기, 한미 전쟁연습,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을 규탄한다는 내용만 있을 뿐, 한반도 비핵화라는 지향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공동결의문은 북한 결의문과 동일한 내용으로 나갔고, 남측과 해외본부가 언급한 한반도 비핵평화지대와 비핵화공동선언은 빠졌습니다.
 
이를 통해, 1차 한반도 핵위기 당시 북한은 어떤 식으로든 비핵평화지대나 비핵화공동선언을 언급하면 북한에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판단했으며, 이에 따라 남한과 해외의 통일운동이 ‘한반도 비핵지대’, ‘비핵화공동선언 이행’과 같은 구호를 삭제하게 했고, 남한과 해외의 통일운동은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 북한은 국제사회에서도 한반도 비핵지대를 주장하는 대신 ‘나보다 강대국의 행태가 더 나쁘다’ 식의 수사를 쓰기 시작합니다. 북핵 문제가 UN 안보리에서 논의되자 1993년 4월 3일 북한은 “미국은 남아공의 핵무기 개발을 적극 지원했고 IAEA도 남아공의 핵무기 개발을 묵인해 NPT를 위반했으면서도, 우리에 대해서 특별사찰을 강요하고 NPT 불이행국으로 규정하여 UN에 넘기는 것은 부당하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설령 IAEA의 과거 정책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이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는 1977년에 남아공의 지하 핵실험 시설이 소련과 미국의 인공위성에 포착되어 UN 안보리가 제재를 단행했습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 남아공은 결국 자발적으로 핵무기를 폐기했습니다.
 
1991년 8월 1일 고려대 학생회관 앞에 범민족대회 사수를 위해 모인 대학생들. 사진 왼쪽 위에 "반미 비핵 군축" 구호가 보인다. 이 시기 범민족대회에는 "한반도 비핵지대화", "전쟁 반대, 핵 반대"와 같은 구호들이 자주 등장했다. [출처: 경향신문]
 
2) 2차 한반도 핵위기: 제네바합의 물밑에서의 핵 개발
 
1차 한반도 핵위기는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합의를 통해 일단락됩니다. 제네바합의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 능력을 동결하고 점진적으로 해체하는 대신 북한에 대체에너지를 제공하기로 하고, 북한의 과거 핵무기 개발 의혹 해소는 대체에너지 제공 이후로 미루는 합의였습니다. 그런데 2002년 10월 미국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보유를 시사하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북한에 전했으며, 북한이 놀랍게도 이를 시인했다고 발표합니다. 부시 행정부는 이에 따라 12월부터 제네바합의에 따른 대북 중유제공을 중단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자 북한은 2003년 1월 NPT 탈퇴를 선언합니다. 이 제네바합의 파기와 북한의 NPT 탈퇴가 ‘2차 한반도 핵위기’입니다. 제네바합의로 1차 핵위기가 가까스로 봉합된 뒤 늦었지만 드디어 한반도에 탈냉전이 도래할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진 상태에서, 2차 핵위기가 일어나며 모든 노력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에는 미국의 주장이 오해나 왜곡이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2003년 초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에 대해서도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한다는 증거가 있다며 침공을 개시했으므로, 이런 분석은 설득력 있어보였습니다. 여러 NL 그룹들은 그 뒤로도 제네바합의 파기의 책임은 전적으로 미국에 있다고 주장해왔습니다(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언론본부, “HEU, 위조지폐, 마약… 근거 없는 북한 때리기 반성해야”, 2007.03.02./강호석, “매번 합의를 먼저 깬 쪽은 미국이다”, ≪민플러스≫, 2018.05.21. 등)
 
2003년 1월 11일 평양에서 열린 <NPT 탈퇴 지지 100만 명 군중 대회>. 북한 정부는 전날 NPT 탈퇴 성명을 내어, "NPT를 탈퇴하지만 핵무기를 만들 의사는 없으며 현 단계에서 우리의 핵 활동은 오직 전력 생산을 비롯한 평화적 목적에 국한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출처: 조선중앙통신]
 
그러나 2010년 11월 북한을 방문한 핵 전문가 지그프리드 해커 박사는 영변 핵시설 내 현대식 우라늄 농축시설을 둘러본 뒤, 이 정도의 시설을 갖추려면 십수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또한 북한 핵무기 프로그램과 밀접히 관련을 맺었던 파키스탄의 핵 과학자와 정치인은 1999~2000년에 북한에 핵기술을 지원하고 원심분리기를 제공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부시 정부가 들어서기도 전인 클린턴 정부 시기이자 제네바합의가 이행되는 기간에 북한이 선제적으로 제네바합의와 한반도비핵화선언을 무시하고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지속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북한의 핵 프로그램은 부시 정부의 대북 강경책 탓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3) 6자회담의 붕괴
 
2000년대 중후반까지는 그래도 북한의 비핵화 논의가 지속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남한과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참여하는 6자회담이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6자회담에서 합의한 2005년 9·19 공동성명(북한이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 IAEA로 복귀하겠다고 약속)을 깨고 1차 핵실험(2006년 10월)을 단행한 후에도 6자회담은 계속 열렸습니다. 2007년에도 2·13 합의(북한은 영변 핵시설을 봉인하고, 5개국은 북한에 에너지를 지원하기로 함)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돌연 북한이 핵 신고서의 검증을 위한 시료채취를 거부하면서, 6자회담은 2008년 말 중단되었고 그 뒤로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북한은 미국이 제안한 양자 간 회담마저 거부한 채, 미사일 실험과 핵 실험을 거듭하면서 핵무기 보유를 향한 길로 달려 나갑니다. 북한은 미국에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2009년 4월 미사일 실험을, 5월에는 2차 핵실험을 단행합니다. 만약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정말로 부시 행정부의 대북 압박 때문이라면, 이때는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내세우며 등장한 오바마 행정부와 본격적인 협상을 준비해야 할 시기였습니다. 그 대신 핵·미사일 실험을 아주 짧은 기간 내에 진행한 북한의 모습은, 북한이 미국과의 외교협상을 위해 핵 프로그램을 이용한다기보다 핵무기 보유 자체가 목적이라는 의혹을 낳았습니다. 실제로 오바마 정부는 북한이 미국과 협상을 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전략적 인내’를 택하여 이후 8년간 아무런 실질적인 비핵화 대화가 이뤄지지 못합니다.
 
4)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과 북한의 ‘자력갱생 정면돌파전’ 돌입
 
2018년 남북·북미대화는 사상 초유의 북미정상회담, 9.19 남북군사합의 등으로 이어지며 기대를 모았지만,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은 아무런 합의 없이 ‘노딜’로 끝났습니다. 그뒤로 현재까지 실질적인 대화가 전무한 상황입니다. 당시 북한이 밝힌, 하노이 회담에서의 북한 측 요구는 “영변 핵단지 전체 폐기에 대한 상응조치로 2016년부터 취한 UN 안보리 대북 제재 중 민생에 관련된 것 5개를 해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북한 내에 여러 다른 비밀 핵시설들이 있는 상황에서, 영변 폐기가 결정적인 비핵화 조치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면 5개 제재 해제는 사실상 경제 제재 전면 해제 요구와 다르지 않은데, 2016~2017년 북 핵·미사일 실험에 따른 5개 제재 조치는 북한 주요 수출품의 수출 금지, 원유 수입량 제한 등 핵심 경제 제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북한은 하노이 회담에서 핵시설 일부 폐기를 약속하되 핵 능력 자체는 그대로 보유하면서, 핵 관련 제재의 전면 해제를 요구했습니다. 따라서 북한 정권의 궁극적 목표는 실질적 핵보유국 상태에서 핵 능력을 동결하고 경제 제재 해제와 안전 보장을 얻어내는 것이라는 의심이 더욱 커졌습니다. 2차 북미정상회담의 결렬은 제아무리 “김정은은 내 친구”라는, 미국 대외정책 전통에서 한참 벗어나있는 트럼프 대통령일지라도 의회와 여론의 반대를 무시하고 북한이 원하는 대로 협상을 해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2019년 2월 28일 하노이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에 관한 기자회견을 열고, "완전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는 매우 중요하다. 북한은 핵을 다 포기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비핵화를 우리에게 주어야지만 우리도 북한에 제재 완화를 해줄 수 있다"고 밝혔다. [출처: 연합뉴스TV]
 
‘영변 핵시설 폐기’보다 더 실질적인 비핵화 의지를 보여주지 않는 한 대화를 재개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결국 북한 정권이 택한 ‘새로운 길’이란 핵 개발을 지속하는 대신 고강도 대북제재 속에서 상당 기간 ‘자력갱생’을 통해 살아갈 것을 결의하는 ‘정면돌파전’이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직후 북한 주민들에게 “물과 공기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각오”를 가지라고 주문했습니다. 2021년 1월 조선노동당 8차 당대회는 ‘자력갱생’을 핵심으로 하는 새 5개년 전략을 공식화했습니다. 2022년에도 “지금 겪고 있는 곤란을 잠시라도 면해보자고 자위권을 포기할 우리가 아니다”, “우리 인민은 물과 공기만 있으면 자기의 이상과 포부를 실현해나가는 신념과 의지의 강자들”과 같은 수사가 계속되었습니다.
 
2021년 1월 북한 «노동신문»은 조선노동당 8차 당대회가 끝난 뒤 '자력갱생'을 홍보하는 새 포스터를 공개했다. [출처: 노동신문]
 
결론적으로, 북한의 핵 개발이 세계와 한반도가 ‘탈냉전’으로 접어들던 시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사실은, 북한은 바로 이 탈냉전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핵 개발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추론을 낳습니다. 북한이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북미 제네바합의, 6자회담에서 나온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와 같은 약속을 반복해서 깨뜨리는 과정도, 비핵화를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의 탈냉전을 실현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을 낳습니다. 북한이 제네바합의가 붕괴하기 이전에도 물밑에서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지속하고 있었던 일, 전향적 대북정책을 내세운 오바마 행정부 취임 직후에 2차 핵실험을 단행한 사실을 고려하면, 북한의 핵무장과 비핵화 약속 위반을 미국의 압박정책 탓으로만 돌릴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핵 카드’라는 발상이야말로 냉전적인 접근법입니다. 맨 처음에 강조했듯 ‘절멸의 무기’인 핵무기는 정의의 무기가 될 수 없고, 핵무장 과정 자체가 전쟁위험을 불러일으킵니다. 탈냉전으로의 시대 전환 과정에서 핵 개발 카드를 택하겠다는 발상은 주변국, 또는 세계 전체와 냉전을 지속하겠다는 전략일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과 동북아시아의 탈냉전은 도저히 동시에 성립할 수 없습니다.
 
결국, 북한은 1990년대 탈냉전이라는 세계적 전환 속에서 한반도 비핵화, 동북아 비핵지대를 실현하고 주변국과 교류·협력으로 나아갈 기회를 스스로 박찼습니다. 이를 전부 두둔해온 NL 주류 노선은 남한 통일운동의 위기와 축소를 낳았습니다.
 
 
핵은 국체이며 남한을 겨냥하고 있다고 직접 밝힌 북한 정권
 
다시 현재로 돌아오면, 북한 정권은 조금도 비핵화 의사가 없으며 핵무기에 ‘선제적 공격수단’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2022년 9월 제정한 핵무력법령을 보면, 북한 정권의 핵 결의가 ‘억지’ 측면을 강조하는 쪽에서 전쟁에서 선제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공격’ 측면, 핵무기의 실제 사용 가능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백 번 양보하더라도 이를 도저히 ‘자위용’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현재 개발 중인 전술핵무기의 사용대상이 미국이 아니라 남한이라는 점도 명확합니다.
 
1) 핵무기는 북한의 국체?
 
2022년 9월 8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절대로 (미국보다) 먼저 핵 포기란, 비핵화란 없다”고 발언하고, 급기야는 “핵은 우리의 국위이고 국체이며 공화국의 절대적 힘”이라고 발언했습니다. 미국의 비핵화가 선행해야 한다는 주장보다도, 북한의 핵보유를 영구적으로 굳히는 데에 방점을 찍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실제로 김 위원장은 이날 핵무력정책 관련 법령을 공개하며, “우리의 핵을 놓고 더는 흥정할 수 없게 불퇴의 선을 그어놓은 여기에 핵무력정책의 법화가 가지는 중대한 의의가 있다”, “핵보유국으로서의 우리 국가의 지위가 불가역적인 것으로 됐다”고 주장했습니다.
 
2) 초유의 선제 핵공격 법제화
 
이날 공표된 새로운 핵무력정책 법령이란 북한의 핵 교리를 공식적으로 ‘억제수단’에서 ‘선제 공격수단’으로 바꾼 법입니다. 이 법 서문은 “핵 무력은 영토 완정을 수호한다”며, 핵 무력을 남북통일의 수단으로 내세웁니다. 이 법이 규정하는 ‘핵무기의 사용 조건’은 ▲핵이나 기타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공격 ▲지도부에 대한 적대세력의 핵 또는 비핵 공격 ▲주요 전략 대상에 대한 치명적 군사적 공격 등이 감행됐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 ▲전쟁 장기화를 막고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불가피한 경우 등입니다. 즉, 핵이 아닌 재래식 무기 공격으로라도 김 위원장 등 지도부가 위험에 처한다면 핵으로 반격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임박했다고 판단하는 경우’라는 말도, 외부로부터 실제 공격이 이뤄지지 않았더라도 북한 당국의 판단만 있으면 선제 핵공격을 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 법은 핵무기라는 ‘절대병기’의 사용 문턱을 대폭 낮추고, 핵무기 사용 결정 권한을 김정은 위원장 한 사람에게 일임했습니다.
 
이렇게까지 호전적인 핵 태세, 그리고 그것을 법으로까지 만드는 모습은 다른 핵무기 보유국들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북한의 이전 핵 교리인 2013년 ‘자위적 핵보유법’에서 핵무기를 ▲핵전쟁 억제 수단 ▲선제핵타격에 대한 보복 수단 ▲핵공격 방어 수단으로 규정하고, 북한이 먼저 핵무기를 쓸 가능성이나 남한에 대한 핵공격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2022년 핵무력법령은 북한 정책 내에서도 큰 변화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핵정책법령’은 서문에서 핵무기 사용을 법적으로 규제하고 그것을 공개하는 이유에 대해 “핵무기 보유국들 사이의 오판과 핵무기의 남용을 막”고 “핵전쟁 위험을 최대한 줄이는 데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자신의 핵무기 정책을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현재의 북미대치 상태가 핵전쟁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관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중략) 북한은 미국이 “임의의 시각에 조선을 공격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으며 그런 사태가 현실화될 가능성에 대비해 ‘핵정책법령’을 마련하고 공개한 것으로 보인다. - 2022년 민주노총×겨레하나 노동자 통일교과서3 『패권의 종말과 대전환, 우리 노동자는』 
 
그런데 민주노총과 NL그룹 겨레하나가 공동 발간한 2022년 노동자 통일교과서3 『패권의 종말과 대전환, 우리 노동자는』은 이 법이 미국의 선제핵공격을 막고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하기 위해 마련되었다며 이런 변화를 옹호합니다. 여기에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 근거를 대는데, “바이든 정부는 이미 2022년 3월 핵선제공격 교리가 포함된 ‘핵태세검토보고서’(NPR)를 공개한 바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이든 정부는 NPR에 ‘핵선제불사용’(핵 공격을 당하지 않는 한 먼저 핵을 쓰지 않음)이나 ‘단일 목적’(핵 공격을 억지하거나 반격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핵무기를 사용) 원칙을 추가하려다 철회했을 뿐, 이전 정부들보다 더 호전적인 내용을 추가하지 않았습니다. 2018년 2월 발표된 트럼프 정부의 NPR이 오히려 더 호전적인 내용이었으나, 네 달 뒤 김정은 위원장은 싱가포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북미정상회담을 진행했습니다.
 
3) 남한을 겨냥한 전술핵무기를 개발하는 북한
 
김 위원장이 2021년 1월 조선노동당 8차 당대회에서 최초로 “전술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라고 주문하면서 대남용, 실전용 전술핵 개발이라는 전략이 가시화되었습니다. 전술핵무기란 통상 단거리 핵무기를 의미하므로, 미국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을 염두에 둔 무기입니다. 북한은 2019년부터 중·단거리 미사일 실험을 수십 차례 진행했는데, 전술핵무기 개발이란 바로 이러한 중·단거리 미사일에 핵탄두를 탑재하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7차 핵실험 또한 실전에서 사용이 가능한 전술핵무기를 만들기 위해 핵탄두의 소형화·경량화 기술을 검증하는 식으로 이뤄지리라 전망합니다. 7차 핵실험 준비 정황은 이미 작년 5월 시점에서 “핵실험을 위한 마지막 준비 단계가 임박한 시점”(대통령실)으로 평가되었으므로, 언제 핵실험이 이뤄져도 놀랍지 않을 상황입니다.
 
최근 북한은 무력시위를 통해 남한에 핵무기 실전 사용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북한 관영매체는 2022년 9월 25일부터 2주간의 잇따른 미사일 발사는 ‘전술핵부대 운용훈련’으로, 모두 핵 탑재를 가정한 모의 훈련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 훈련을 직접 지도하며 “전술핵 운용부대들에 전쟁 억제와 전쟁 주도권 쟁취의 막중한 군사적 임무를 부과할 수 있다는 확신을 더욱 확고하게 가지게 됐다”고 발언했습니다.
 
[출처: 중앙일보]
 
2023년 8월 《중앙일보》가 국방 전문가 6명에게 의뢰해 진행한 평가에 따르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1년 1월 당대회에서 직접 개발을 지시한 9가지 무기 체계, 즉 ▲전술핵무기 ▲고체연료 사용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초대형핵탄두 ▲무인기 ▲수중발사 핵전략무기 ▲극초음속미사일 ▲군사정찰위성 ▲핵잠수함의 개발 수준은 평균 5.5점으로(4~7점은 고도화 단계, 8~9점은 양산 단계, 10점은 완성), 이미 고도화 단계의 중반을 지났습니다. 특히 전술핵(7.2점), 초대형핵탄두(6.3점), 고체연료 ICBM(6.5점), SLBM(6.5점) 등 실제 핵탄두를 실어 날릴 수 있는 능력과 직결된 4개 분야는 이미 실전 배치를 바로 코앞에 둔 단계(평균 6.6점)까지 도달한 것으로 평가되었습니다.
 
4)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은 북한 당국의 전략에 따른 것
 
통상 진보당을 비롯한 여러 NL그룹들은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무력시위는 한미당국의 군사훈련 등에 따른 대응 차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2018년 4월 이래로 ‘북미 모라토리엄’, 즉 대규모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중단과 북한의 핵·장거리 미사일 실험 중단이라는 암묵적 합의는 남북미대화가 이뤄지지 않는 기간에도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합의는 한미당국이 먼저 깬 것이 아니라, 2022년 3월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실험을 하여 파기되었습니다. 이런 사실관계 때문에 진보당조차도 “이번 발사는 모라토리엄을 파기한 것으로 유감을 표한다”고 했습니다. 한미당국이 먼저 모라토리엄을 깨거나 그에 상응하는 심각한 군사행위를 한 것이 아닌 상황에서, 진보당은 모호하게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 배경”이라고만 썼습니다. (그런데 북한 당국과 진보당, 한국진보연대를 비롯한 NL 주류는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란 표현을 대북경제제재, 주한미군의 존재 자체를 포함하여 매우 포괄적인 의미로 쓰고 있으므로, 사실상 이들의 논리에서 북한의 군사행위를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국면은 없습니다.)
 
북한이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7형’을 발사했다. 이번 발사는 2017년 11월 ‘화성-15형’ 발사 이후 4년 4개월만의 일로 2018년 4월 대미 ‘신뢰구축’을 위한 선제적 조치로서 취했던 ‘핵실험·대륙간탄도미사일(ICBM)발사 유예(모라토리엄)’ 선언을 파기한 것으로 유감을 표한다. (중략) 이번 발사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북한은 지난 1월 진행된 정치국회의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미국의 적대정책에 대한 규탄과 함께 2018년 이후 취해졌던 ‘신뢰구축’ 조치를 전면재고하고 잠정 중지했던 모든 활동을 재가동하는 문제를 신속히 검토하라고 지시한 바가 있었다. 결국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배경인 것이다. - 진보당 논평, “북미대화를 강력히 촉구한다!”, 2022.03.25. 
 
이때 북한의 7차 핵실험 준비 정황도 포착되었습니다. 이후 IC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극초음속미사일 및 탄도미사일 실험이 이어졌습니다. 8월 22일 한미연합군사훈련(‘을지 자유의 방패’)을 시작하기 이전에도 이미 총 18차례의 미사일 발사(8월 17일 기준)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과 앞서 평가한 동향을 보면,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7차 핵실험 준비는 한미 당국의 활동에 대한 직접적 대응이라기보다는 남한을 타격할 전술핵무기의 실전 배치라는 자체 전략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5) “남조선과의 전쟁에 핵전투 무력이 동원될 것”
 
북한 당국은 선제핵공격 법제화, 전술핵 개발뿐만 아니라, 작년 초부터 남한에 대한 핵공격, 선제 핵공격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혀왔습니다. 2022년 4월 5일,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부부장은 “남조선이 우리와 군사적 대결을 선택하는 상황이 온다면 부득이 우리의 핵전투 무력은 자기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게 될 것”, “전쟁 초기에 주도권을 장악하고 타방의 전쟁 의지를 소각하며 장기전을 막고 군사력을 보존하기 위해서 핵전투 무력이 동원되게 된다”고 발언했습니다. 북한 당국이 ‘대미용 핵’이라는 그간의 주장과 달리 남한에 대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밝혔다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같은 4월 김 위원장은 “우리의 핵이 전쟁 방지라는 하나의 사명에만 속박되어 있을 수는 없다. 우리 국가의 근본 이익을 침탈하려 든다면 우리 핵 무력은 자기의 둘째가는 사명을 결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모든 위험한 시도와 위협을 선제적으로 철저히 분쇄하고 제압하기 위해 무력의 절대적 우세를 확고히 유지하고 더욱 강화”하겠다고 발언했습니다. 이 역시 ‘전쟁 억지용’ 핵이라는 그간의 명분을 넘어 북한 정권에 대한 위협에도 선제적인 핵 공격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밝힌 것입니다.
 
2023년 북한 당국은 ‘대남전쟁’ 시나리오를 검토한다는 점까지 드러냅니다. 북한 국영통신사인 《조선중앙통신》은 3월 18~19일 김정은 전술핵 운용부대가 실시한 ‘핵반격 가상 종합전술훈련’ 내용을 공개했는데, 평안북도 철산군 발사장에서 발사한 전술핵 시험용 탄두 장착 탄도미사일이 800㎞를 날아가 동해 상공 800m 고도에서 폭발했다고 합니다. 북한이 특정 고도에서 폭발 가능한 핵·미사일 탑재용 탄두부를 시험한 것은 처음입니다. 800m 상공에서 폭발시킨 것은 살상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시험으로, 사거리 800㎞는 남한 전역을 사정권에 둔다는 점을 상기시킨 것으로 추정됩니다.
 
8월 10일 《조선중앙통신》은 군사회의에서 지도 위 서울 부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김 위원장의 사진과 “전쟁 준비를 공세적으로 더욱 다그치라”는 발언을 공개했고, 31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노동신문》도 한국 육해공군 본부가 있는 계룡대 부근을 가리키는 김 위원장의 사진과 함께 한미군사훈련 ‘을지 자유의 방패’(UFS)에 대응하여 “남반부(남한) 전 영토 점령”과 “해외무력개입 파탄”을 목표로 하는 ‘전군지휘훈련’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전날인 30일 심야에 발사한 단거리 탄도미사일 두 발은 “대한민국 군사깡패의 중요 지휘 거점과 작전비행장을 초토화해 버리는 것을 가상한 전술핵타격훈련”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와 같이 ‘실전용 핵’을 추구하는 최근 북한의 핵 전략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국의 대만 침공 위협이라는 국제정세와 맞물려 실제로 한반도 핵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북한의 대남공격 가능성을 낮게 보는 입장은 대개 남북한 간 재래식 화력 차이와 한미군사동맹의 존재를 고려하면 북한이 개전을 감행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을 근거로 듭니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핵 고도화는 미국 본토에 핵 위협을 가하여 미국의 개입을 차단한 상태에서, 남한에 전술핵을 투하하거나 투하 위협을 하여 남한의 재래식 화력을 제압하는 시나리오를 가능하게 합니다. 마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푸틴 정권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부르는 명칭) 최초 시나리오가 핵 위협을 통해 서방의 직접적 개입을 차단하고 우크라이나의 정권 교체와 비무장화를 신속하게 달성하는 목표였던 것과 유사합니다.
 
2022년 8월 29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훈련지휘소를 방문하여 남한 지도를 짚어보이는 김정은 위원장. «노동신문»은 이날 김 위원장이 대남군사작전 초기에 "군사지휘거점과 군항, 작전비행장 등 중요 군사대상물에 동시다발적 초강도 타격을 가해 전략적 주도권을 확고히 할 것"을 주문했다고 보도했다. [출처: 조선중앙통신]
 
북한 당국이 밝히고 있는 전쟁 시나리오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핵탄두를 탑재한 단거리 탄도미사일(전술핵무기)을 계룡대와 같은 남한의 군사적 “중요 지휘 거점”에 투하하여 대응 역량을 무력화하고 ‘핵 공포’를 불러일으켜 “전쟁 초기에 주도권을 장악하고 타방의 전쟁 의지를 소각하며 장기전을 막고”, 미국 본토에 ICBM을 발사하겠다는 위협을 통해서 미국의 핵우산을 무력화하여 “해외무력개입”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도권에 대한 추가 핵공격을 위협하며 남한의 항복 또는 배상을 요구할 것인데, 이는 심지어 남한의 외교권과 국방권을 회수하는 ‘일국양제 연방제 통일’이라는 북한의 요구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백승욱, 『연결된 위기-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한반도 핵위기까지, 얄타체제의 해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의힘, 2023).
 
북한의 핵 전략 자체가 이러한 시나리오를 예비하는 방향으로 기술 개발, 훈련을 지속하는 상황에서, 국제정세의 변화 또한 위기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의 도움으로 경제 개혁과 대화의 문을 완전히 닫을 가능성도, 남한에 대한 군사적 모험의 성공 가능성을 더욱 높게 평가할 가능성도 더 커집니다. 올해 북러정상회담이 보여준 가능성처럼, 북한이 러시아에 무기를 지원하는 대신 부족한 첨단군사기술을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아 미사일 개발 시간표를 앞당길 수도 있습니다. 한편, 대만 ‘통일’이 중국 지도부의 핵심 과제가 되면서, 기존에는 자국의 안정을 위해 한반도 전쟁 발발을 막는 데에 이해관계가 있었던 중국의 판단이 바뀔 수 있습니다. 즉, 중국이 북핵 문제를 대만 문제에 유리하게 활용하기 위해 북한의 핵무장과 남한에 대한 핵 위협을 사실상 용인할 수 있습니다. 대만에 대한 중국의 군사작전이 전개될 때 동시에 한반도에서 북한의 대남 공격이 일어나면, 미국의 대만 위기 개입을 차단하거나 약화시킬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와 중국은 이미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로 북한의 ICBM 발사 실험에 대한 UN 안보리 제재 결의안 채택을 거부해왔습니다.
 
6) ‘조국통일’만 된다면 북한의 대남전쟁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NL 주류는 이러한 북한의 행보를 “조국통일의 방도가 바뀐 것” 정도로 이해하고 일체의 문제제기 없이 긍정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2021년 2월 20일 한국진보연대, 전국농민회총연맹, 민주노점상전국연합이 참가한 ‘2021년 진보진영 계획과 과제’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주제준 한국진보연대 정책위원장은 2021년 정세전망의 첫 번째 순서로 조선노동당 8차 당대회 결과를 분석했습니다. (한국진보연대는 NL 주류의 최대 연대조직으로, 4.27시대연구원, 국민주권연대, 민주노동자전국회의[전국회의],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국여성연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범민련], 진보당,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 한국청년연대 등이 가입되어 있습니다.)
 
발제에 따르면, 8차 당대회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노동당 규약을 개정하여 “강위력한 국방력에 의거하여 조국통일의 역사적 위업을 앞당기는” 것을 명시하여,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조국 통일”을 명시한 7차 당대회 당시 규약과는 명확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북한에서 당 규약이란 헌법보다 위상이 높으므로 이는 정말 중요한 변화이며, 당 규약은 반드시 ‘결사관철’되어 왔기 때문에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NL 주류의 최대 정당이자 민주노총이 지지하는 정당 중 하나인 진보당도 「조선노동당 제8차 당대회 분석」(2021년 1월 21일)에서 같은 변화를 지적하며 “핵무력 완성을 통한 강한 국방력에 의거하여 영원한 평화적 안정을 보장하고 조국통일의 역사적 위업을 앞당기려는 입장을 명백히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대미 전략무기와는 별도로 다양하게 개발된 초정밀 전술핵무기, 극초음속활공비행전투부, 군사정찰위성, 최근 열병식에서 보여준 현대화된 재래식무기는 북의 국지전, 조국통일대전의 준비정도와 수준이 빈말이 아님을 여실이 보여주고 있다. (중략) 군사적 대립이 격화되면 교전쌍방이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 불가피한 수순으로 된다. 따라서 기존 통일원칙에 반하는 ‘비평화적 방도’에 의한 통일개념도 이해할 필요성이 생겼다. (중략) 비평화적 방도는 다양한 무력, 군사력에 기초한 통일방식을 의미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핵 군사력 무력시위와 대결에 의한 강제된 평화협상 타결도 포함된다고 본다. - “새로운 격변기를 준비하는 조선노동당 8차 당대회”, 《민플러스》, 2021.02.01.
 
민주노총의 통일 관련 교육, 사업을 도맡고 있는 ≪민플러스≫는 이러한 북한의 행보를 대남 ‘조국통일대전(大戰, 큰 전쟁) 준비’로 명명하고 심지어 이를 받아들이자고 주장합니다. 당연히 남한이 대상이 될 “북의 국지전, 조국통일대전” 준비 정도와 수준이 빈말이 아니라며, ‘비평화적 방도’(군사력)에 의한 통일 가능성이 올라가고 있으니 이제는 이러한 “기존 통일원칙에 반하는 ‘비평화적 방도’에 의한 통일” 개념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016년 김정은 위원장의 “정의의 통일대전으로 반통일세력을 무자비하게 쓸어버려 겨레의 숙원인 조국통일의 력사(역사)적 위업을 성취할 것”이라는 발언을 인용합니다.
 
또 다른 NL계열 언론 《자주시보》도 올해 4월 한미정상회담의 ‘워싱턴 선언’이 “‘남반부 해방전쟁’, ‘조국통일대전’을 앞당김으로써 윤석열 정권과 한미연합군을 파멸로 이끌어” 간다고 주장합니다(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누가 누구의 파멸을 재촉하는가”, 2023.05.08.). 올해 3월 북한의 ‘화산-31’ 전술핵탄두 공개는 “핵탄두가 실전에서 사용될 것이라는 점을 미리 알려주기 위함”이며, ‘남반부 해방전쟁’의 목적은 “윤석열 정권과 한미연합군을 제거하고 영토완정을 실현하여 조국통일의 결정적 국면을 열어놓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와 같이 북한의 대남 전술핵무기 실전사용, 대남전쟁, 무력통일 시나리오를 조금의 비판도 없이 분석하고 유포하는 NL 주류의 태도는, 이들이 김정은 정권 주도의 “비평화적 방도”로 “겨레의 숙원인 조국통일”을 성취하자는 생각을 은밀히 퍼뜨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한국 시민들이 받아들일 리가 만무합니다. 북한의 대남 핵공격이나 대남전쟁 개시가 현실이 된다면, 셀 수 없이 많은 한반도 민중의 삶과 일상이 파괴될 것이며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여파를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핵 패권에 핵무장으로 맞불을 놓는 것이 대안입니까?
 
북한은 미국의 핵 패권에 반대하는 방식조차 잘못되었습니다. 물론 NPT로 상징되는 세계의 핵 비확산·통제 체제가 근본적으로 불공평한 것은 맞습니다. 5개의 강대국(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만 핵무기를 합법적으로 보유하니까요. 이에 대해 2023년 민주노총 노동자 통일교과서4 『위기의 한국사회, 노동자의 활로찾기』는 핵무기를 보유한 5개 강대국이 다른 나라들이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하도록 NPT를 통해 강대국의 핵독점 체제를 만들어 다른 국가를 통제하고 압박해 왔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도 핵무기를 보유했지만 핵독점 체제를 무너뜨리는 정치적 의미를 갖지 못한 반면,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여 2000년대 초반에 핵독점 체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북한이 2017년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에 성공하자 이 체제는 붕괴되었다고 씁니다. NPT 체제는 강대국들에만 이로운 ‘악’이므로 이에 도전하고 균열을 낸 북한의 핵무장에 긍정적 의의가 있다는 뉘앙스입니다.
 
그러나 강대국의 핵독점 체제가 불공평하다고 해서, 이러한 현실을 반핵평화운동을 통해 강대국이 핵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약소국의 핵무장으로 바꾸겠다는 시도가 과연 ‘선’일 수 있을까요? 이러한 시도는 세계를 더욱 위험하게 만듭니다. 미국에 대항한다며 너도나도 북한처럼 NPT를 탈퇴하고 핵무장에 나서면 세계가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NPT가 발효한 1970년 당시, 이미 수십 개의 국가가 핵무기 개발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계에도 불구하고 NPT가 성립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많은 나라가 핵무기를 갖게 되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과학기술이 그때보다 발전했고 전후 세계질서가 위기를 겪는 지금, NPT 체제가 붕괴한다면 그때보다 훨씬 더 큰 혼돈이 올 것입니다. 따라서 대부분 국가가 NPT의 틀 안에서 5년마다 열리는 NPT 평가회의를 활용하여 핵보유국의 핵군축 상황을 검증하고 압박하며, 지역별로 비핵무기지대를 확립하여 상호 간의 잠재적 핵 위협과 핵무기 보유국의 위협을 최대한 배제하고, NPT를 뛰어넘는 핵무기금지조약(TPNW)을 추진하는 식으로 핵무기 보유국에 핵군축을 압박해 왔습니다.
 
직간접적으로 미국의 공격을 당한 나라는 베트남, 쿠바, 멕시코, 파나마, 팔레스타인 등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전부 핵무장에 나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과거 전쟁과 학살, 식민 지배를 경험한 ‘약소국’들의 대부분은 UN 핵무기금지조약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강대국의 핵 패권에 맞서는 다른 길, 평화의 길이 충분히 존재하므로 북한의 핵보유 고수는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중남미, 남태평양,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몽골 등 세계의 상당 부분이 비핵무기지대다. 남극, 우주공간, 해저공간도 국제조약으로 핵실험, 핵무기 반입 등이 금지되어 있다. [출처: UN / 번역: 사회진보연대]
 
미국이 먼저 비핵화를 해야 북한도 비핵화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은 결국 세계 190개국이 가입해 있는 NPT 체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국제사회의 현존 제도 안에서 해법을 모색할 생각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북한 정권이 내세우는 ‘세계 비핵화’도 마찬가지입니다. 2016년 조선노동당 7차 대회에서 김 위원장은 “핵·경제 병진 노선은 항구적으로 틀어쥐고 나가야 할 전략적 노선”이라고 말하는 동시에, “국제사회 앞에 지닌 핵 전파 방지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세계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일견 모순적인 이러한 발언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해준다면 2003년 탈퇴한 NPT로의 복귀를 포함하여 국제사회의 핵확산 통제 논의에 참여할 의사가 있고, 핵보유국 지위에서 기존 핵보유국과 함께 ‘북한의 비핵화’가 아닌 ‘전 세계의 비핵화’를 논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NPT를 탈퇴하여 핵무기를 개발한 다음에 제 6의 공식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는 사례가 발생한다면 NPT 체제 자체가 신뢰성을 상실하므로, 국제사회가 이를 수용할 리가 만무합니다. 규칙을 위반하는 자에게 보상을 주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2017년 7월 7일 UN총회에서 122개국의 찬성으로 통과된 핵무기금지조약(TPNW)은 핵무기와 관련된 모든 활동을 금지한다. 2023년 9월 19일 현재 69개국이 핵무기금지조약을 비준했다. [출처: Nuclear Weapons Ban Monitor / 번역: 사회진보연대]
 

◎ 용어 소개

NPT(핵무기비확산조약)란?
1970년 발효된 NPT는 세계에 핵무기 보유국이 우후죽순 늘어나 핵전쟁 위험이 고조되는 것을 막고자 한 국제조약입니다. 당시 이미 핵실험에 성공한 5개 국가, 즉, 미국, 소련(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을 제외한 국가는 추가로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획득하지 않기로 약속하였습니다. 대신 이 5개국은 핵군축 교섭에 노력을 다할 것과 핵발전 기술을 핵 비보유국에 이전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이러한 NPT에 따른 국제 핵 통제 체제를 흔히 ‘NPT 체제’라고 부릅니다. 현재 NPT에 가입하지 않은 국가는 북한,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남수단밖에 없습니다. 이 중에서도 북한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NPT를 가입했다 탈퇴(2003년)하여 핵무장에 나선 사례입니다.

비핵지대란?
비핵(무기)지대(NWFZ)는 국제조약으로 비핵화를 합의한 지역을 가리킵니다. 지역마다 조약의 세부 내용에는 차이가 있으나, 지역 내 국가들의 핵무기 보유, 실험, 제조, 저장, 배치 등 핵 활동을 금지하며 핵무기 보유국들이 이 지역에 핵무기를 반입하거나 이 지역을 핵무기로 공격하지 않을 것을 요구합니다. 중남미, 남태평양,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등이 비핵지대를 건설하여 핵무기 없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 권리를 추구했습니다. 반면 동북아시아, 중동 등 전쟁 가능성이 높은 지역은 지역 내 핵무기의 존재 때문에 비핵지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핵무기금지조약(TPNW)이란?
2017년 7월 유엔총회에서 122국의 찬성으로 통과된 핵무기금지조약은 전 세계 핵무기의 완전한 제거를 목표로 핵무기의 개발, 시험, 생산, 비축, 사용, 사용 위협을 포괄적으로 금지하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사상 최초의 국제적 합의입니다. 2020년 10월 24일 세계 50개국 이상의 비준이라는 발효 요건을 달성하여 90일 후인 2021년 1월 22일 공식적으로 국제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식, 비공식 핵보유국(북한 포함)들과 한국, 일본은 핵무기금지조약에 참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과연 누구를, 무엇을 위한 핵무기입니까?
 
주한미군 철수조차도 대화 재개 조건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북한
 
올해 북한 정권은 대화의 문턱을 더욱 높이며, 핵 보유의 궁극적 목표가 북한 정권의 안위 보장임을 드러냈습니다. 김여정 부부장은 7월 17일 담화에서 “우리는 밑지는 일은 하지 않는다”며 그간 대화 조건으로 내세우던 대북적대시정책·이중기준(북한의 군사행위에 대해서만 제재를 가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북한의 주장) 철폐를 “가변적이고 가역적인 것뿐”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북한이 “대북적대시정책 철회”에 포함하던 요구들에 대해 미국 전략자산 전개 중단은 “마음만 먹으면 10여 시간이면 전개가 완료되고”,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은 “병력을 재투입하여 재개하는데 20일이면 충분할 것”이고, 주한미군 철수도 “미군 무력이 다시 들어오는 데는 보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나 “가역적인 제재 완화 따위”와는 “우리 국가의 영원한 안전”을 맞바꾸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현재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할 수 있는 가장 적실한 방도는 강도적인 미국 사람들과 마주 앉아 오손도손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힘의 지위에서, 충분한 실력행사로 그들의 강권과 전횡을 억제하는 것”이라며 앞으로 더 많은 군사적 공세를 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전형적인 ‘힘에 의한 평화’ 논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비핵화 대화를 재개하기 위해 필요한 ‘비가역적’ 조건이 무엇인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북한 정권의 안위를 비가역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하라는 말로밖에는 해석할 수 없습니다.
 
북한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의 영향으로 보이는, “북한은 지도자와 인민이 일체화되어 있는 하나의 생명체로 돌아가는 사회”(《민플러스》 데스크칼럼, “대북전단 살포를 영구적으로 중단시켜야 할 이유”, 2020.06.13.) 류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면, “우리 국가의 영원한 안전”이란 사실상 북한 정권, 특히 3대 세습이라는 기형적 체제의 안전을 뜻하며, 이것이 북한 핵무장의 근본적 배경입니다. “핵은 우리의 국체”란 발언은 정권의 생존을 핵무기라는 반인도적 대량살상무기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북한 정권의 선택으로 인하여 북한 민중이 치룬 희생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대기근과 경제난을 비롯하여 어마어마했으며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남한과 일본 민중의 평화로운 삶을 누릴 권리 또한 희생되고 있습니다.
 
북한의 비핵화 없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는 없습니다
 
그동안 NL 주류는 북한의 핵 개발과 군사행위는 한미 당국의 대북적대 정책에 대한 ‘강대강’ 대응이라며, 북한에 대해서는 조금도 비판을 하지 않는 대신 미국 전략자산 전개 중단, 한미군사훈련 중단, 주한미군 철수를 통해 ‘대화와 평화의 길’로 나서는 것이 해법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이 한미군사훈련 중단이나 대북제재 완화가, 심지어 주한미군 철수조차도 ‘대화와 평화의 길’에 나설 유인이 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운동에 어떤 의미가 남을까요?
 
결국 ‘북한의 비핵화’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한반도 핵전쟁 위기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회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운동이 이 지점을 외면한다면 사실상 북한의 핵무장을 용인하는 셈이며, 한반도 핵위기는 영구화할 것입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행위와 군비증강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뿐만 아니라, 북한의 핵무장이 한반도 민중을 위협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북한의 비핵화를 요구하는 사회운동이 필요합니다.●
 
주제어
평화 국제
태그
북한 북핵 우크라이나 전쟁 다극체제 반핵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