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현장스케치 | 2025.08.05

피폭자의 경험을 미래로 계승하자

2025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가기③

정성진 정책교육국장
8월 4일, 참가단은 전날부터 이어진 히로시마 국제회의의 마지막 세션 토론과 폐막식 참석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토론에서 스웨덴 평화중재협의회 회장 케르스틴 베르게오 씨는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우리는 오늘 이곳에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왔습니다. 기억하고, 듣고, 배우기 위해 왔습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오늘과 미래를 안내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피폭자와 그 2세들로부터 배우며, 우리 모두가 이로부터 영감을 얻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평화를 위해 함께 행동합시다.”
 
그녀의 발언은 이날 오후 열릴 특별 행사의 주제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못 유쾌하면서도 날카로운 발언도 있었다. 일본종교자평화협의회의 정토종 승려 모리 슈간 씨는 아시아불교평화회의에서 있었던 일화를 웃으며 소개했다. 그는 러시아 대표에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몽골 대표가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우타고에 운동가(한국의 민중가수에 해당) 쿠마 씨는 피폭 80주년을 맞아 자신이 작곡한 노래 「Future」를 불렀다. 그동안 진지하게 토론에 임하던 참가자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사진 1] 쿠마 씨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참가자들
 
한편 교토회 회장 하세가와는,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포퓰리즘이 제3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평화운동이 이에 맞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세계적으로 빈곤과 격차가 확산되면서, 미래에 희망을 품지 못하는 시민들이 기존 정치에 불만을 품고 그 분출구를 배외주의로 향하게 하는 포퓰리즘이 퍼지고 있습니다. 포퓰리스트들은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온 이성과 과학의 성과를 파괴하고, 눈앞의 이익을 제시하며 지지를 얻습니다. ‘아메리카 퍼스트’, ‘일본인 퍼스트’ 같은 구호는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도 각국 국민을 선동한 슬로건이었습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의 참화 끝에 유엔이 창설되었고, 이는 인류가 이성과 과학에 기초해 도출해낸 결과였습니다. 또 전쟁의 참혹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 시민운동은 집단적 광기의 재현을 막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다시 제3차 세계대전이 언제 발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SNS는 포퓰리스트 운동의 도구가 되어 집단 광기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광기와의 싸움이 이어지고 있으며, 일본 피단협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그 싸움의 정점을 상징합니다. 이는 일본 평화운동의 막중한 책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진 2] 교토회 회장 하세가와 씨
 
히로시마 국제회의의 폐막식에서는 세계 반핵 평화운동의 과제를 담은 「히로시마 국제회의 선언문」 초안이 발표됐고, 참가자들의 의견이 수렴되었다. (이 초안은 최종 수정을 거쳐 8월 9일 나가사키 세계대회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의견 수렴 과정에서는 특히 서구 평화운동 단체들로부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한 이견이 제기되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해서는,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는 것만큼이나 미국과 나토의 러시아 포위 역시 지적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초안 원안을 유지하기로 결정되었다. 반면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이란 공습이 유엔 헌장 및 국제법 위반이라는 표현을 넘어, 1967년 유엔 안보리 결의 이래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을 확인해 온 여러 결의들을 위반했다는 문구를 추가하자는 제안이 있었고, 이는 반영하기로 했다. 평화운동 내부에서도 여전히 쟁점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사진 3] 「히로시마 국제회의 선언문」 초안 발표
 
[사진 4] 의견 수렴 후 초안 통과시키는 모습
 
[사진 5] 히로시마 국제회의를 마친 사회진보연대 참가단 
 
 

특별 행사: 피폭체험의 계승과 미래

 

8월 4일의 핵심 일정은 히로시마 현립체육관에서 열린 ‘특별 행사: 피폭체험의 계승과 미래’였다.
 
[사진 6] 행사장 객석 사진
 
행사는 먼저 피폭자 세 명, 야노 미야코(94세), 모토타니 료지(97세), 박정순(92세) 씨의 증언을 듣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의 증언은 원고가 제공되지 않았고, 통역 수신기의 기술적 문제 탓에 필자가 들은 범위에서 작성했기에 약간의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양해 바란다.)
 
[사진 7] 야노 미야코 씨
 
1945년 8월 6일, 14세였던 야노 미야코 씨는 히로시마에서 피폭되었다. 이날 오전 히로시마에서는 공습에 대비해 화재 확산을 막고자 건물 철거 작업을 진행했는데, 이를 12~14세 학생들이 맡았다고 한다. (필자가 히로시마에 도착한 첫날, NHK 방송에서도 13명의 중학생이 원폭으로 사망한 이야기를 이들의 수기를 토대로 다뤘는데, 이들도 동일한 작업을 하다가 변을 당했다. 폭심지 근처에서 학생들이 작업이 이뤄졌기에, 특히 그들의 피해가 컸던 셈이다.)
 
오전 8시 15분,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미야코 씨는 폭발 직후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 보니 모든 것이 다 타버린 광경과 패닉에 빠져 도망치는 사람의 행렬이 보였다. 그녀도 그 대열에 섞여 도망쳤고, 15일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도시로 돌아와 일본의 패전을 알게 되었다. 학교가 다시 열렸지만, 돌아온 같은 학년 학생은 자신을 포함해 단 세 명뿐이었다고 한다. 건물 철거 작업에 동원된 학생이 많이 사망했고, 도시의 잔해 속에서 유품이나 유해 일부가 발견되면 미야코 씨와 같이 살아남은 학생들에게 그것을 보여주며 신원 확인을 했다고 한다.
 
당시 방사선이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미야코 씨는 17살 무렵부터 종종 실신하곤 했는데, 의사들은 빈혈이라며 설명했다. 미군이 설치한 ABCC(방사선영향연구소)는 피폭자들을 대상으로 검사를 진행했지만, 정작 피폭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검사를 받는지, 어떤 이유로 검사받는지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 연구소는 피폭 아동의 지능과 체력이 일반 아동보다 열등하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이는 오늘날 인권 기준으로는 상상조차 어려운 발언이었다고 그녀는 평했다.
 
미야코 씨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자신이 피폭자라는 사실과 병의 원인이 원폭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결국 피폭 60년이 지나 집단소송이 제기되었고, 일본 정부로부터 피해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싸움의 성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애초에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경험을 다시는 하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간절히 호소했다.
 
[사진 8] 모토타니 료지 씨
 
모토타니 료지 씨는 당시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다. 작업 도중 번쩍이는 빛을 보고 고개를 들자마자 시력을 잃고, 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니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다고 한다. “도와줘!”를 외치며 집 방향으로 걸어가던 중, 지인이 “왜 그렇게 다쳤느냐”며 병원으로 가라고 해 병원으로 향했지만,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부상자는 연병장으로 이동하라는 소리를 듣고 이동했다.
 
연병장은 부상자들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물을 줘”라고 신음하고 있었다. 의사는 료지 씨에게 “파편이 1cm만 더 비껴갔어도 눈을 관통했을 것”이라며, 살아남은 것이 천운이라고 말했다.
 
가장 문제는 가족이었다. 도시 전체가 불타면서 가족은 흩어졌고, 모토타니 씨는 낮에는 도시로 내려와 가족을 찾고, 밤에는 도시 밖 산으로 피신하는 생활을 반복했다고 한다. 다행히 며칠 만에 어머니와 동생을 찾을 수 있었지만, 원폭 후유증은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말도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한 채 한 달이 안 되어 사망했고, 동생도 같은 달에 숨졌다. 친척들은 불가사의한 병이 “전염될 수 있다”며 어머니의 장례를 반대했다고 한다. 모토타니 씨 본인도 머리카락이 빠지고 온몸에 검은 반점이 생기는 증상을 겪었다.
 
힙겹게 발언을 이어가던 모토타니 씨는 증언의 말미, “의사가 했던 ‘살아남은 게 천운’이라는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97세가 된 지금, 주위 사람들은 ‘살아남은 것이 다행’이라 말하지만, 자신은 “나만 살아남았다”는 큰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건강이 악화되는 중에도 결근 한번 없이 성실히 일하며 무언가를 증명하려 했고, 이제 폐결핵과 시한부 암 진단을 받고 인생을 돌아보니 눈물밖에 남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부디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젊은 세대가 노력해달라”고 당부하며 증언을 마쳤다.
 
[사진 9] 박정순 선생님
 
한국인 원폭 피해자 박정순 선생님의 증언은 전날 히로시마 국제회의에서 발표된 내용과 동일하므로 생략한다. (자세한 내용은 어제의 <사회운동포커스> 「2025년, 세계 반핵평화운동의 토론과 모색」을 참조.)
 
[사진 10] 타카토 세이지 씨, 뒤의 화면에는 '검은 비'가 내린 범위가 표시되어 있다
 
이후에는 원폭의 ‘간접적’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타카토 세이지(84세) 씨는 ‘검은 비’의 피해자였다. 4살 때 원폭이 투하되었지만, 집이 히로시마와 떨어져 있어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비가 내리면 주위가 검게 변했다. 그는 어릴 적 기억을 잊고 지냈지만, 나이가 들며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검은 비’는 DNA에 영향을 주어 자식과 손자 세대에까지 병세를 남겼고, 이에 그는 피해자들을 모아 내부 피폭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시작해, 피폭자 인정 기준을 확대하는 성과를 이뤘다고 말했다. 그는 간접 피해라 해도 광범위한 영향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서 ‘태내 피폭자’의 증언이 있었다. 피폭된 산모의 뱃속 태아도 피해를 입을 수 있기에, 이 문제는 2세대, 3세대까지 이어진다.
 
행사의 후반은 기억을 계승하기 위한 후속 세대의 활동 소개였다. 신일본부인회 히로시마 지부는 자신들이 엮은 피폭자 수기집 『나뭇잎처럼 불에 타(木の葉のように焼かれて)』를 소개했다. 히로시마 고등학생 평화 세미나는 피폭자의 증언과 원폭의 위험을 공부하고 ‘바디 맵핑’이라는 방식으로 피해자의 신체와 증언을 기록·공유하며 치유를 함께 도모하는 활동을 한다고 설명했다.
 
[사진 11] 신일본부인회의 책 소개
 
스페인의 핵군축동맹(Alliance for Nuclear Disarmament) 소속 마리벨 에르난데스 산체스는 스페인과 스웨덴 등 유럽 국가들에서 연달아 피폭자 증언회를 열었던 경험을 소개하며, 피폭자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었는지 알려줬다. 그녀는 “피폭자의 증언은 살아 있는 기억이며, 그것만으로도 전쟁의 참혹함과 허망함을 충분히 전할 수 있다”며, “피폭자의 유산을 미래 세대에 함께 계승하자”고 호소했다.
 
[사진 12] 스페인 핵군축동맹의 마리벨 산체스
 
이날 행사를 통해, 1세대 피폭자들의 고령화로 기억이 점차 사라지는 현실과 더불어, 그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계승하는 것이 일본 평화운동의 출발점이자, 전 세계 평화운동이 원점으로 삼아야 할 지점임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핵무기는 무차별적인 무기이며, 그 제1의 피해자는 평범한 시민이다. 오전에 하세가와 씨가 지적했듯, 인류가 양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망각하고 포퓰리즘에 휩쓸리며, 핵전쟁의 위험은 어느 때보다 커졌다. 그런 시대일수록, 기억을 계승하는 평화운동의 역할은 막중할 것이다. 한국에서 이 과제를 어떻게 안고 갈 것인지, 독자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다.
 
행사 도중 있었던 노래 공연을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우조 마리코(초등학교 5학년)는 2년전 학교 수업에서 피폭자의 증언을 듣고 감명을 받아, 학교 음악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자작곡 「나의 바람(私の願い)」을 만들었다. 가사는 아래와 같다.
 
[사진 13] 노래 「나의 바람」을 부르는 우조 마리코
 
이 노래를 들어주길 바라.
전쟁을 멈추길 바라.
물건도 나누고, 음식도 함께 먹으며
가능하니까.
나라들이 함께 하길 바라
이 세계는 넓으니까.
 
이 노래를 들어주길 바라.
전쟁을 멈추길 바라.
아이와 연인, 가족과 동료들
소중하니까.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 줘
그것이 나의 바람.
 
이 노래를 들어주길 바라.
전쟁을 멈추길 바라.
세계의 미소와 모두의 미소가
행복하니까.
웃음을 빼앗지 말아 줘
그것이 모두의 바람.
 
 
[사진 14] 히로시마 특별 행사를 마치고 나온 사회진보연대 참가단
 
 
특별 행사를 마치고, 참가단 일부는 5시 30분부터 히로시마 지역 활동가들이 매년 세계대회 한국인 참가자들을 초대하여 여는 '한일교류회'에 갔다.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대표하여 세계대회에 참가하신 박정순 선생과 따님, 평등의길 참가단도 함께 했다. 일본코리아협회, 일본공산당, 신일본부인회 등 여러 단체의 활동가들과 한일 양국의 정세, 사회운동, 문화교류 등을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진 15, 16, 17] 한일교류회의 모습
 
 
주제어
평화 국제
태그
평화 반핵 피폭자 원폭 80주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