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 2025.08.07
최초의 피폭지 히로시마에서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말하다
2025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가기④
8월 5일, 원수폭금지세계대회의 일정들은 같은 시간대에 여러 장소에서 진행되었다. 사회진보연대 참가단(이하 ‘참가단’)은 팀을 나누어 이른 아침부터 바삐 움직였다. 이날 참가단은 ▲니노시마 섬 현장학습 ▲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공정한 세계를 위한 국제 노동조합 포럼 ‘United As One’(하나로 단결하자) ▲ 포럼Ⅱ: 전쟁과 핵무기 없는 세상을 향하여 ▲ 원폭 기념관 도보 투어 등에 참가했다. 네 번째 참가기는 각각의 현장을 스케치했다. 포럼Ⅱ의 내용은 추후 《계간 사회진보연대》에 싣고자 한다.
니노시마 섬 현장학습
오전 8시 30분 히로시마 항구에서 배를 타고 약 3㎞, 히로시마만(灣) 최남단에 푸른 하늘과 바다를 가진 섬 니노시마(似島)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이 작은 섬은 현재 조용한 휴양지로 알려져 있지만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직후 14만 명이 사망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1만 명이 수용된 숨겨진 역사가 있다. 우리는 <니노시마소년소녀모임(似島少年少女のつどい)>을 다녀왔다. 우리 팀에는 히로시마 출신의 세심한 소학교 교사 해설사분들이 배정되었고 캘리포니아에서 온 열정적인 필리핀인 참가자들과 함께 견학했다.
히로시마시는 청일전쟁‧러일전쟁을 거치며 일본군의 군수 보급 기지로 기능했다. 1890년대 도쿄에서 히로시마시까지 철도가 깔리며 핵심 군항인 우지나항(현 히로시마 항구)에서는 병사와 물자가 중국 등으로 오갔다. 우지나항을 중심으로 군복과 군량 생산공장이 발전해 노동자의 규모가 30만 명에 육박했다. 이런 역사는 히로시마시 지명 변천사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당시 히로시마는 ‘廣島(구자체)’로 표기되었고, 군사도시로서의 히로시마를 의미했다. 피폭 이후 ‘ヒロシマ(가타카나 표기)’는 피폭 도시임을 나타내며, 지금 일본에서 사용되는 ‘広島(신자체)’는 평화와 문화의 도시로서 전후(戰後) 재건된 히로시마를 뜻한다.
해설에 따르면 니노시마 역시 탄약고를 비롯한 대규모 군사시설과 해군 병원, 제1‧2‧3 검역소가 있었다. 현재는 모두 파괴되었지만 검역소마다 본토와 이어지는 다리들이 존재했다. 이 검역소는 일본군이 해외에 나가고 들어올 때 집결하여 소독하는 곳으로, 의료시설로 기능했기 때문에 피폭 이후에는 해군 병원과 함께 임시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시가 궤멸하고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은 폭심지에서 9km 떨어져 피해를 받지 않은 니노시마로 도망쳤다. 의약품과 의료시설도 사실상 니노시마에만 남아 있었다. 당시 상황을 수습하던 히로시마 군도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있다 싶으면 생존자들을 트럭에 실어 니노시마로 보냈다. 니노시마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사상자가 너무 많아 약과 물품, 수습 인력이 모두 모자랐고 제대로 된 치료는커녕 시체의 신원도 확인하지 못하고 묻을 곳이 보이면 매장했다. 섬에는 죽은 말을 소각하는 소각장이 있는데, 여기서도 피폭 사망자가 소각되었다. 아비규환의 섬에 들어온 1만 명 중 살아나간 사람은 약 500명에 불과했다. 1945년 9월 태풍으로 유해가 바다에 떠밀려 발견된 이래 니노시마 섬에서는 2004년까지도 대량의 유해가 나왔다.
당시 더 많은 사람을 구하지 못해 후회한 의료인, 살아남은 피폭자, 그 외 관련인들이 1974년 ‘니노시마 교류회’를 만들었다. 그 후손들은 이를 계승해 피폭의 참상을 알리고 희생자를 기리며 과오를 반성하고 있다. 또한 니노시마 주민들의 노력으로 최근에는 작은 평화자료관이 문을 열었다. 우리는 니노시마의 사망자 위령비에 묵념하고 헌화 뒤, 각국에서 온 참가자들과 서로 소감을 나눴다. 이 기억을 미래 세대에 전하고, 원수폭 금지로 이어 나가 미래를 여는 계기를 만들자고 다짐하며 추모곡 <니노시마>를 합창했다. 아름다운 경관에 대조되는 참담함과 애도의 마음이 담긴 노래 가사를 소개한다.
(중략) 니노시마는 기도의 섬 / 눈물의 섬 / 푸른 바다가 있고 / 푸른 하늘이 있고 / 파도는 조용히 밀려와 / 마음을 달래네 / 누가 말할 수 있을까 / 수많은 사람의 / 마음속의 슬픔을 / 니노시마는 용서의 섬 / 결코 잊지 않을 섬 / 파도는 조용히 밀려와 / 기억을 안겨주네 / 누가 들을 수 있을까 /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리를 / 오늘도 다시 하늘로 / 하얀 구름이 퍼져가네
반핵평화를 위한 세계노동자의 교류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히로시마현 정보센터 다목적홀에서는 국제 노동조합 포럼 ‘United As One’이 열렸다. 히로시마현 젠로렌(히로시마현노동조합연합), 민주노총, 미국 전기기계라디오노조(UE) 및 LA교사노조, 스페인노총, 포르투갈노총, 프랑스노총은 평화와 핵무기 폐기를 위한 노동조합 운동의 역할을 공유하며 각국의 실천과 국제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서 전쟁으로 노동자 민중이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연대는 더욱 소중하다”며, 민주노총이 지난 30년간 창립 정신(“국경을 넘어서서 전세계 노동자의 단결과 연대를 강화하고 침략전쟁과 핵무기 종식을 통한 세계평화 실현을 위해 노력”)과 강령(“전쟁과 핵무기의 위협에 맞서 항구적인 세계평화를 실현”)에 따라 꾸준히 평화와 반핵을 위한 투쟁을 이어왔음을 언급했다. 이어 그는 “북한은 핵보유국임을 선언했고, 한국의 극우 보수세력은 핵무장을 주장하고 있다”며, “이곳 히로시마에서 우리가 함께 느끼듯 핵무기의 사용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전쟁을 막고 핵 없는 세상을 위해 더욱 절박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파비엔 루시 프랑스노총(CGT) 환경문제 연방위원회 위원은 프랑스의 군비 지출 확대를 비판하고, 사회복지 예산 축소에 맞선 투쟁 및 핵무기금지조약(TPNW) 서명을 요구하는 운동을 소개했다. 크리스티나 파시아벤 스페인노총(CCOO) 국제·이주·대외협력 담당 임원은 유럽노동조합연맹(ETUC)에 소속된 노동조합들이 주도하는 ‘유럽평화센터’ 창설 계획을 공유하며, 노동조합의 경험을 평화협정 설계와 실행 과정에 반영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주앙 바레이로 포르투갈노총(CGTP-IN) 국제국장은 “포르투갈 노동자들은 핵무기 폐지를 포함한 포괄적이고 통제된 군축에 전념하고 있다”며, 국제적 연대와 평화를 위한 실천을 호소했다.

존 마일스 미국 전기기계라디오노조(UE) 로컬 506 사업담당은 트럼프 행정부가 펼친 반노동 정책과 군비 확장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며, 미국 내 민주주의 증진과 세계 노동조합과의 연대를 통해 평화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아를린 이노우에 미국 LA 교사노조(UTLA) 재단 및 미래 프로그램 협력 조정관은 뉴 스타트(New START, 신전략무기감축협정) 조약 와해와 중국의 핵무기 고도화 등 핵 위협 고조 상황을 지적하며, “대중적이고 조직화된 평화운동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칸베 야스시 히로시마현 젠로렌 의장은 “피폭지의 노동조합으로서 ‘전쟁을 하지 말라, 핵무기를 없애라’는 메시지를 세계에 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미국의 이란 핵시설 공격 움직임 등으로 핵무기 사용 위험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을 경고하며, 트럼프가 이란 핵 공격을 히로시마·나가사키와 비교하며 정당화한 데 대해 피폭 생존자들이 느끼는 깊은 분노를 전달했다. 노동조합 포럼 참여자들은 “전 세계에서 피폭 생존자들의 목소리와 염원을 확산시킵시다.”라는 칸베 야스시 의장의 마지막 발언에 큰 박수로 화답했다.

평화기념공원 도보 투어
오후에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집결해 그룹별로 여러 원폭 기념관들을 둘러보았다. 투어는 공원 안에 있는 레스트하우스의 지하실을 거쳐 원폭공양탑, 조선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까지 이어졌다. 히로시마평화문화센터에서 나온 가이드 선생님의 흡입력 있는 설명으로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의 상황을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먼저 참가단의 발길이 닿은 곳은 레스트하우스였다. 레스트하우스는 현재 관광안내소와 휴게소, 기념품 가게를 겸하고 있다. 원폭 투하 당시에는 기모노를 팔던 포목점이었는데, 원폭 피해의 중심인 나카지마 지구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은 건축물이다. 또한 원폭 투하 당시부터 지금까지 사용되는 건축물 중에서는 폭심지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
피폭 당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리틀보이가 투하되었을 때 노무라 에이조(당시 47세) 씨는 문서를 찾기 위해 지하실로 들어왔다가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있던 지하실은 폭심지(ground zero)에서 불과 160여 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그는 폭심지 반경 500m 이내 생존자 78명 중 가장 가까이에서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그는 이곳 지하공간에서 방사능과 열선, 충격파를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었다.



37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도 땀 한 번 닦지 않고 설명해 주신 가이드의 눈은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가이드의 열정적인 안내로 참가단은 가이드에 더욱 잘 몰입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원폭 공양탑에 들렀다. 이곳에는 능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신원이 불분명한 유골들이 안치되어 있고, 그 꼭대기에는 공양탑이 세워져 있다. 매년 8월 6일 공양제가 이곳에서 치러진다.
2025 히로시마 핵무기반대여성포럼
오후 6시부터는 2시간가량 히로시마현립 종합체육관 소경기장에서 핵무기반대여성포럼이 열렸다. 행사는 피폭자 증언으로 시작되었다. 94세의 히로시마 원폭 생존자 코노 키요미 씨는 “8월 6일, 세상이 끝나는 듯한 굉음이 들렸습니다. 사방에 불에 탄 시신이 널려 있었고, 너무나도 무서웠습니다”라고 회고하며, “우리는 원폭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몸소 겪은 사람들입니다. 핵무기를 이 세상에서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라고 호소했다.
이어진 메인 발언에서는 니노 부르자나제 미국 피스액션 뉴욕주 지부 학생 활동가와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가 무대에 섰다. 부르자나제 활동가는 다섯 살이던 2008년, 러시아가 조국 조지아를 침공하고 영토의 20%를 점령했던 전쟁의 충격을 언급하며, 그러한 상처는 어린 시절에 겪었어도 평생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두려움을 넘어 평화를 향한 연대와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민문정 대표는 “평등, 평화, 연대의 정치 없이는 우리의 삶도 유지될 수 없다”고 말하며, 앞으로의 과제를 환기시켰다.
이후 젠로렌 여성부, 신일본부인회 등 일본 각지에서 활동 중인 여성 평화운동 조직들의 실천 사례가 소개됐다. 참가자들은 평화헌법 수호, 미군기지 반대 운동, 핵무기금지조약 지지 활동 등 다양한 현장에서의 노력을 공유하며, 시민들과 함께하는 지역에서의 풀뿌리 실천의 중요성을 나눴다.

행사의 마지막에는 참가자 전원이 4개 국어로 “전쟁 반대! 핵무기 반대!”를 외치고, 《We Shall Overcome》을 함께 부르며 평화와 연대를 향한 의지를 다시금 확인했다.
No Nukes! No War!
Non aux armes nucléaires! Non à la guerre!
No a las armas nucleares! No a la guerra!
戦争反対!核兵器反対!
전쟁 반대! 핵무기 반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