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현장스케치 | 2025.08.14

“우리가 있어서 80년 간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았다” : 나가사키 반핵평화운동가들의 이야기

2025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가기⑦

2025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사회진보연대 참가단
이번 참가기는 지난 참가기에 이어 8월 8일의 현장을 담았다. ‘비핵평화의 일본과 아시아’ 워크숍 이후 사회진보연대 참가단(이하 ‘참가단’)은 <Ring! Link! Zero 청년 심포지움>에 패널로 참석했고, 나가사키 피폭 명소 현장학습을 다녀왔다. 저녁에는 나가사키에서의 3박 4일간 참가단에 집을 흔쾌히 내어주신 미조우라 씨 부부, 사토 씨 부부와 간담회를 진행했다.
 
 

Ring! Link! Zero 청년 심포지움

8월 8일 오후 4시부터 5시 30분까지는 나가사키 시민회관 체육관에서 Ring! Link! Zero 청년의 광장이 열렸다. 일본 및 세계 각지에서 모인 청년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패널로는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이하 ‘일본 원수협’) 국제국 시마다 유히 씨, 미국 피스 액션 뉴욕주 지부 니노 부르자나제 학생 활동가, 한국 사회진보연대 김진영 정책교육국장과 서단비 광주전남지부 정책국장이 참여했다.
 
각 패널은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자국이 직면한 과제와 그와 관련된 활동 계획을 공유했다. 사회진보연대는 한국 사회에 핵무기금지조약(TPNW)의 존재 자체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현실에서, 세계에 이러한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다양한 교육 사업과 소책자 발간 등을 진행하고 있다고 공유했다. 또한 한국에서는 북한의 핵무장 문제로 여론과 사회운동이 분열된 상황이므로, 모든 핵무장에 반대한다는 원칙을 명확히 하며 반핵평화의 여론을 확산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청년 심포지움 패널들.
 
미국 피스 액션 뉴욕주 지부의 니노 부르자나제 씨도 교육의 중요성에 공감한다며 발언을 이어갔다. 미국의 군사행동에 별 관심 없던 사람들도, 실제로 미국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규모로 군비를 지출하는지를, 그리고 그 돈으로 얼마나 많은 복지를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면 깜짝 놀란다며, 최근에는 이러한 내용을 시작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이 지출하는 군비 규모 그래프를 넣은 볼펜을 소개하는 니노 부르자나제 씨(왼쪽).
 
일본 원수협 국제국 시마다 유히 씨는 평화운동이 고령화되는 상황에서 청년들이 “함께 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자리가 많아졌으면 한다는 소망을 밝혔다. 이 심포지움도 그런 의미로 준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원수협이 월 1회 온라인 청년모임을 열고 있으므로 많은 참여를 바란다고 홍보했다.
 
패널 발언 중인 시마다 씨.
 
질의응답 시간에는 플로어 참가자들이 전쟁과 평화에 대해 친구들과 대화하기 어렵다는 고민과 동북아시아의 핵전쟁 위기에 따른 무력감 등을 나눴다. 김진영 정책교육국장은 “비슷한 고민 때문에 국제정치를 주제로 한 책읽기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말씀하신 것처럼 갑자기 함께 평화운동을 하자고 제안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지금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비교적 많고, 그런 공부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현재 정세에서 한국, 그리고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토론하게 된다”고 답했다.
 
서단비 광전지부 정책국장은 한반도에서의 전쟁 가능성에 우울과 무력감을 느낀 경험을 공유하며,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어렵더라도 지금 여기에 우리가 모인 것처럼, 핵무기 폐기와 평화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조직하고 그러한 조직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청년 심포지움은 참석자들이 지속가능한 반핵평화운동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청년세대를 조직하고 국제연대로 연결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임을 확인하며 끝마쳤다.
 
청년 심포지움에 참가한 청년들과 촬영한 단체 사진.
 
청년 심포지움이 끝난 직후 이야기를 나눈 해외 청년 활동가들도 기억에 남는다. 우리에게 명함을 건넨 일본 농민운동전국연합회(농민련) 사무국의 아시노 다이치 씨에게 한국은 평화운동에도 청년이 많지 않지만 농민운동에서는 더더욱 그러한데 일본은 상황이 다르냐고 물으니, 일본의 상황도 마찬가지라고 답했다. 하지만 기후위기와 전쟁으로 인해 세계의 식량 가격이 폭등하고 이것이 식량 위기와 기근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식량을 지키는 농민의 힘이 중요하겠다고 생각하여 농민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청년 심포지움 참가자는 대부분 일본 시민이었지만, 프랑스 ‘평화운동’에서 온 바스티앙 사카즈 씨도 심포지움에 참가한 뒤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프랑스 평화운동도 고령화되어 있는데 이곳에 와서 청년 활동가들을 많이 만나서 기쁘고, 세계의 청년 활동가들이 이렇게 교류해나가면 분명 함께 뭔가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대회에 참가하는 동안 “노란 티셔츠의 한국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며, 자신은 한반도의 상황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없지만 한반도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전했다.
 
바스티앙과 사회진보연대 참가단 패널들.
본 심포지엄의 개최 소식이 일본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적기, 赤旗)》 2025년 8월 9일자에 실렸다.
 
 

나가사키 피폭 명소 현장학습

 
청년 심포지엄과 같은 시간, 다른 참가단원들은 피폭과 관련한 주요 장소를 둘러보았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입구에서 출발하여 나가사키 의과대학 교정과 우라카미 천주당, 폭심지를 차례로 방문했다. 해설은 나가사키고등학교 사회 교사이자 교직원노동조합에서 활동 중인 히데오 씨가 맡았다.
 
미래를 사는 아이들의 상.
 
현장학습에서 가장 먼저 본 것은 원폭자료관 옥상정원에 있는 ‘미래를 사는 아이들의 상’이다. 이 조형물은 원폭으로 희생된 어린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중고등학생들의 후원금을 모아 세운 동상이다. 이는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나가사키에서 세계의 푸른 하늘로 아이들이 날아오르는 형상을 통해 세계인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자 창작한 것이다.
 
원폭 순난 학생과 교사의 상,
 
나가사키 평화공원으로 나오면 ‘원폭 순난 학생과 교사의 상’을 만날 수 있다. 이 조형물은 2002년 교직원노동조합에서 세운 것으로, 원폭에서 희생된 교사와 학생들을 형상화했다.
 
현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정문. 피폭 당시의 정문은 현재 위치보다 교정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나가사키 의과대학이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될 당시, 학교는 본래 방학 기간이었지만 전시 상황에서 군의관을 양성하기 위해 교과 과정을 앞당겨 수업 중이었다. 이곳은 폭심지에서 불과 500m 떨어진 곳으로, 원폭이 떨어지자 500여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인근 병원의 사망자까지 포함하면 800여 명에 달한다. 당시 지하에 있던 12명은 기적처럼 생존했지만, 곧 강력한 방사능에 의해 모두 사망했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 당시 학장이었던 츠누오 스스무(1892~1945)의 흉상.
 
교정 안으로 들어가면 정문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츠누오 스스무 학장의 흉상이 설치되어 있다. 그는 히로시마 피폭 소식을 들은 후, 수업을 취소하고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려 하였지만 막지 못했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됐을 때 그는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가 피폭되어 며칠 후 사망했다. 학교에서는 그의 정신과 공헌을 기려 1979년 흉상을 세웠다.
 
원폭 투하 당시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정문 기둥.
 
원폭 투하 당시 대학의 정문은 두 기둥만이 남았다. 돌기둥은 순간적인 폭발로 발생한 강한 충격파로 밀려나 기울어지고 밑부분에 틈이 생겼다.
 
우라카미 천주당 본관.
 
다음으로 방문한 우라카미 천주당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일본 정부로부터 박해받던 천주교인들이 메이지 시대에 종교의 자유를 얻은 후 후원금을 모아 건립되었다. 그러나 천주당 완공 31년 만에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고, 폭심지에서 불과 500m 떨어져 있는 이 성당도 전면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파괴되었다. 또한 행사 준비를 위해 천주당 안에 있던 수십 명의 신자와 두 명의 신부가 모두 즉사했다.
 
피폭으로 검게 타버린 성상들.
원폭으로 파손된 천주당의 작은 종.
 
천주당의 쌍탑에 있던 작은 종은 심하게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큰 종은 보존되어 그해 성탄절 미사에서 울려 퍼졌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을 작사한 ‘새 아침의 빛으로 황야에 퍼지는 나가사키의 종’이라는 곡은 나가사키 시민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노래다.
 
우라카미 천주당의 신도회관에는 피폭된 성상의 잔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피폭 당시의 우라카미 천주당을 재현한 모형.
피폭 전후 우라카미 천주당의 상황을 설명 중인 히데오 씨.
우라카미 천주당 북쪽의 종탑이 무너져 있다. 당시 나가사키 시장은 원폭 당시의 천주당을 보존하지 않고 새로 건립했다.
원폭의 충격파로 변형된 돌담.
 
우라카미 천주당을 내려와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반듯했던 돌담이 어느새 불룩 튀어나온 것을 볼 수 있다. 원폭의 충격파로 거대한 돌담이 변형된 것이다. 이외에도 나가사키 시내의 주택가를 걷다 보면 곳곳에서 피폭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가사키 원폭 피해자 위령비.
폭심지 공원으로 옮겨진 우라카미 천주당 건물의 일부.
 
현장학습의 마지막 장소는 폭심지 공원이었다. 공원에는 위령제 준비로 많은 인파가 모여있었다. 공원 중앙에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원폭으로 붕괴된 우라카미 천주당의 일부가 이곳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나가사키 활동가 간담회

 
참가단은 나가사키 대회 일정 동안 피폭자이자 나가사키원폭피재자협의회 이사 미조우라 마사루 씨와 피폭 2세이자 나가사키현원수협 사무국장인 사토 스미토 씨의 자택에 머물렀다. 저녁마다 부인인 미조우라 리츠코 씨와 사토 유미코 씨까지 네 분이 참가단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이들로부터 여러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리츠코 씨, 유미코 씨 두 분도 세계대회의 여러 일정을 준비했을 뿐만 아니라 나가사키건강친구회, 신일본부인회 등 지역 사회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계신다.)
7일 저녁 식사에서는 4세에 원폭 투하를 겪은 뒤 나가사키 피폭자 운동에 오랫동안 참여한 미조우라 마사루 이사의 피폭 당시 경험담을 들었고, 8일 저녁에는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나가사키 지도를 보여주며 원폭 투하 당시를 설명하는 미조우라 이사.
미조우라 이사의 명함 뒷면에 적힌 소개 글. “1941년생. 4세 6개월에 피폭. 근처의 친구들과 4살 위의 형과 밖에서 놀던 때, 이제껏 본 적 없는 엄청난 빛에 놀라 집으로 도망치던 순간, 폭풍에 날려갔습니다. 그날 밤 시내는 화재로 인해 하늘이 새빨갰던 것을 기억합니다. 저를 포함한 가족에게 큰 상처는 없었지만, 후에 어머니와 두 형은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은 피폭 체험을 이야기하고 핵무기 철폐와 평화의 중요성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토 스미토 사무국장은 1945년 이후 태어나 본인이 직접 피폭을 겪지는 않았으나, 원폭 투하 당시 어머니와 형제들이 폭심지에서 700m 떨어진 곳에 거주했기 때문에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형제들 모두 원폭 투하 후 외상은 없었지만 10~11일 후 원인을 알 수 없는 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 역시 서서히 병세가 악화해 사망했다. 사토 사무국장은 “나는 죽어가는 혈육들의 몸에 붙는 파리를 쫓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옥이 무엇인지 볼 수 있었다. 벌써 68년이 지났다”라고 회상했다.
 
간담회 당시 사토 씨의 모습이 TV에 송출되고 있다.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 80주년 당일, 큐슈 지역 NHK 뉴스에 출연한 사토 사무국장은 피폭 2세로서, “피폭자의 목소리를 배우고 핵무기 없는 세계를 향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간담회에서는 여러 질문이 오갔는데 간략히 몇 가지를 소개하겠다.
 
한때 피폭이 전염병으로 인식되어, 피폭 사실을 드러내는 것을 터부시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들었다. 언제부터 피폭의 경험을 밝히고 반핵평화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미조우라 마사루: 피폭 이후 10년간은 일본과 미국이 피폭 사실을 세계에 알리지 않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국내외 모두에 관련 내용이 공개가 금지되었다. 침묵을 깬 계기는 1954년 비키니 섬 수소폭탄 실험 사건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을 또다시 벌이려 하느냐”며 분노했고, 전국적으로 피폭자 증언 운동이 일었다. 그 무렵부터 일본 피폭자 조직이 생겨났으며, 미군의 조사로 피폭의 실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증언 운동이 확산하면서 당시 일본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서명 운동에 함께 참여했다. 그 결과 1955년 히로시마에서 제1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가 열렸고, 다음 해에는 나가사키에서 제2회 대회가 개최되었다. 나가사키 대회가 끝난 다음 날인 8월 10일에 피단협이 결성되었다. 이는 세계를 향해 보내는 반핵평화의 메시지였고, 같은 비극을 다시는 겪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의 시작이었다.
 
80년의 세월 동안 반핵평화운동을 하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과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는다면 언제인가?
 
미조우라 마사루: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원수협에서 원수금(원수폭금지일본국민회의)이 갈라져 나왔을 때다. 가장 기뻤던 순간은 작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을 때다. 반핵평화운동이 분열되기는 했지만 핵무기를 없애자는 마음으로 그동안 국민과 함께했고, 지금까지 우리가 있었기에 지난 80년간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기쁘다. 물론 단순히 기쁜 순간이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통해 핵무기를 없애자는 운동이 세계에서 힘을 받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토 스미토: 가장 기뻤던 때는 2017년 핵무기금지조약이 UN총회에서 채택되던 순간이다. 핵무기금지조약은 피폭자들이 시작한 운동과 각국 평화운동의 힘을 모아 아래에서부터 만들어낸 결과였다. 우리가 평화를 추구한다면 이런 것까지도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게 아닐까? 피폭자들이 낸 ‘핵무기 폐지’의 외침은 UN에서 ‘핵무기 사용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흐름을 만들어낸 첫 사례가 되었다. 한명 한명이 낸 목소리들이 모이면 어떻게든 세상이 바뀌는구나 싶었다. 우리의 목소리가 작아 보일지라도 결코 작지 않다. 결국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래서 평화운동과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 피폭자들과의 연대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한국에도 여러 번 방문했다.
 
이번에는 부인 분들께 질문 드린다. 어제(8월 7일) 나가사키 80주년 기념 특별프로그램 <피폭자의 경험을 미래로 계승하다>에서 합창단으로 활약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참가단원이 손수 만든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유미코 씨.
 
사토 유미코: 신일본부인회에 소속되어 있다. 합창 ‘평화의 여행으로’는 신일본부인회뿐 아니라 여러 시민합창단원을 80명 가까이 조직하여 공연한 것이다. 나는 합창단 조직과 관련한 사무 역할을 했다. 이걸 기회로 한국에서도 공연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또 영화를 상영하는 일도 맡고 있다. 현재 나가사키현 내에는 영화관이 두 곳뿐이다. 이 주위로 섬이 많은데 전부 영화관이 없다. 그런 곳에서 상영 요청이 오면 영화를 상영해주고, 중요하고 의미 있는 영화가 있다면 먼저 찾아가서 상영해주고 있다. 주로 저작권에 저촉되지 않는 한에서 상업 영화를 상영하거나 사회적 문제의식이 담긴 영화들을 상영한다. 다가오는 8월 17일에는 아나운서의 노동문제를 다룬 <아나운서들의 전쟁>이라는 영화를 상영할 예정이다. 이런 활동을 하게 된 것은 남편 사토 씨의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는 리츠코 씨(왼쪽).
 
미조우라 리츠코: 정년까지 미쓰비시에서 일하면서 조직운동을 했다. 또한 여성과 젠더 문제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지역 사람들과 자치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이전에 일본에서는 여성들이 결혼하면 일을 그만둬야 했다. 하지만 일을 그만두지 않는 선배들이 있었고, 나도 여성이 결혼 후에도 경력단절을 겪지 않고 일을 계속하는 선례가 되자는 마음으로 일을 그만두지 않고 활동했다.
 
이 외에도 참가단은 한반도 통일, 남북한 관계, 한국의 징병제도 등 폭넓은 주제로 이야기들을 나누며 밤이 깊어갔다. ●
 
간담회 후 저녁식사 시간, 미조우라 씨는 참가단에 ‘나가사키의 종’을 불러주었고, 참가단은 그에 답가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주제어
평화 국제
태그
반핵 청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