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현장스케치 | 2025.09.01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들여다보기

2025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가기⑧

이형호 조직국장
2025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여덟 번째 참가기에는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과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의 방문기를 담았다. 각 자료관은 1945년 원자폭탄 투하로 초래된 참상뿐 아니라, 당대 국제사회의 맥락부터 피폭지의 상황, 피폭자와 그 주변인들의 삶까지 풍성하게 다루고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비극을 단순히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사건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핵무기 없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두 도시의 자료관 전시를 소개하며 감상을 공유하고자 한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이 위치한 평화기념공원 입구.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입구.
 
8월 6일 오후, 참가단은 원수폭금지세계대회 본대회 격 행사인 ‘히로시마 원폭 투하 80주년 집회’를 마친 뒤 평화기념공원 내에 위치한 평화기념자료관에 다녀왔다. 이날은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지 정확히 80년이 지난 날로, 아침부터 각종 관련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자료관 역시 세계 각국의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자료관 건물 1층에서는 원폭의 실상을 알리거나 피폭자의 증언을 담은 도서를 전시·판매하고 있다.
 
원폭 투하 10년 후인 1955년에 개관한 평화기념자료관은 ‘피폭 전 히로시마’, ‘원폭 피해의 실상’, ‘피폭 후 히로시마(피폭 후 극복)’ 등 시간순으로 전시 공간이 구성되어 있다. 자료관 내부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이 깔려 많은 인파에도 숙연한 분위기였다.
 
히로시마 물산장려관(현 원폭 돔)의 피폭 이전 모습.
 
자료관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피폭 이전 히로시마 시내를 촬영한 파노라마 사진이 벽 한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1945년 8월 6일 아침,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풍경을 한 히로시마는 시곗바늘이 8시 15분을 가리키자 손쓸 틈도 없이 잿더미로 변했다.
 
사진 “불탄 흔적에 선 소녀”.
 
자료관 본관 입구로 들어가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불탄 흔적에 선 소녀”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이었다. 세계 최초로 원폭이 투하된 지 사흘 후 마이니치신문 기자 쿠니히라 유키오 씨가 히로시마역에서 폭심지로 향하던 도중에 후지이 사치코 씨를 촬영한 것이다. 당시 10살이었던 후지이 씨는 폭심지에서 약 1.2㎞ 떨어진 집에서 피폭됐다. 원폭이 터질 때 생긴 거센 바람에 유리 파편과 모래가 날아와 얼굴을 다치고, 강렬한 열기에 노출돼 직접적인 화상을 입었다.
 
원폭 투하 당일 피폭자들이 입었던 옷은 그날의 참상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히로시마가 피폭되던 그날, 솟아오르는 버섯구름 아래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졌을까. 본관에는 피폭의 참상을 말해주는 사진과 그림, 피폭자들이 남긴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진 “화상과 부상에 신음하는 피폭자”. 피폭 당일 오전 11시경 폭심지에서 2,270m 떨어진 곳에서 촬영한 사람들의 모습. 대기는 급속도로 뜨거워졌고 여기저기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피폭자들은 인간의 몸으로는 견딜 수 없는 열기에 물을 찾아 헤맸다.
 
원폭이 터진 후 거센 불길이 도시와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그 불은 하루 종일 타올랐고 쓰러진 건물 아래 깔려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은 산 채로 불탔다. 생존자들도 화상으로 부어오른 얼굴, 늘어진 피부, 피투성이의 몸으로 불길 속에서 울부짖었다. 그들은 당시를 “지옥”이라고 회상한다.
 
전시물 가운데는 큰 화상을 입은 사람이나 유해의 사진, 생존자들이 피폭 당시 잔혹한 상황을 그린 그림도 다수 있었다.
히로시마에 내린 검은 비를 그린 작품.
 
원폭이 폭발한 후 히로시마에는 ‘검은 비’가 내렸다. 폭풍처럼 번지는 불길과 함께 연기, 재, 방사성 물질이 대기 상층까지 치솟았다. 수증기와 방사성 낙진, 연기와 먼지가 뒤섞여 거대한 구름이 만들어졌고 이내 땅으로 잿빛의 끈적한 비가 쏟아졌다. 검은 비는 폭심지에서 수 ㎞ 떨어진 곳까지 광범위하게 내렸다. 목이 타는 이들은 검은 빗방울을 삼켰다.
 
이외에도, 의약품과 구호 물품이 부족한 구호소의 열악한 상황을 보여주는 전시물이 있었다. 구호소는 대개 다리 밑이나 학교에 임시로 설치되었다. 수많은 부상자가 멍석 위에서 차례로 생을 마감했다.
사진 “머리를 잃은 누나와 남동생”. 사진 속 아이들은 폭심지에서 1.1㎞ 떨어진 칸자키초등학교에서 피폭된 후 검은 비를 맞았다(당시 7세, 9세). 이들은 탈모와 식욕부진, 잇몸 출혈, 발열 등의 증세를 보였고 회복하는 듯했으나 남동생은 11세, 누나는 29세에 사망했다.
 
전시는 방사선 피해를 다루는 공간으로 이어졌다. 육안으로는 아무런 부상이 없는 듯 보이는 사람들도 방사능의 영향으로 원폭 투하 직후 고열, 설사, 구토를 일으켰고, 머리카락이 빠졌다. 모세혈관이 손상되어 피하 출혈이 일어나면서 붉은색 또는 보라색 반점이 생기기도 했다. 강한 방사선은 골수 기능을 손상시켜 혈소판 수치를 급감시키고 출혈이 생기는 등 급성 방사선 증후군을 남긴다. 또한 세포를 파괴·변형시켜 수십 년 후에도, 그리고 세대를 거쳐 각종 질병과 후유증을 남긴다. 핵무기의 비인도성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림 “건물 소개(疎開)의 모습”.
 
전시 “영혼의 부르짖음”에서는 핵무기로 죽음을 맞이한 자들의 유언과 유품을 볼 수 있었다. 히로시마 피폭 사망자 가운데는 특히 아이들이 다수였는데, 당시 히로시마시 중심부에서는 화재나 공습에 대비해 건물을 철거하고 방화선을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성인뿐 아니라 학생들도 학교에 가는 대신 아침 일찍부터 건물 철거 현장에 동원되었고, 따라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죽거나 다쳤다.
 
다리 부상을 입은 조선인 여성(위)과 구호 버스를 탄 동남아시아 유학생(아래)을 그린 그림.
한국인 피폭자 곽귀훈 씨에 관한 전시.
 
자료관은 일본 외에도 조선 등 다른 국가 출신의 피폭자들도 소개하고 있었다. 자료관에는 “원폭은 국가나 민족과 관련 없이 생명을 파괴했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수만 명의 조선인, 중국인, 대만인, 그리고 일본계 미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 지역에서 징집되거나 모집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동남아시아와 중국에서 온 학생들, 독일 사제들, 러시아 가족들, 그리고 미국 포로들과 같은 비일본인들도 희생자가 되었다.”라고 설명이 쓰여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인 피폭자인 곽귀훈 씨에 대한 전시가 있었다. 일제의 징집으로 히로시마 서부 제2부대로 배치된 곽귀훈 씨는 피폭을 당했다. 그해 귀국해 교육계에 투신하다가 1967년부터 피폭자 운동에 앞장섰다. 한국인 피폭자의 현실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고, 1998년 10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피폭자 자격 확인 소송, 이른바 ‘곽귀훈 수첩 재판’에서 승소해 한국인 피폭자 등 일본 밖 피폭자들이 원호법을 적용받는 길을 열었다. 이후에도 원폭 피해의 산증인으로서 활동하다가 2022년 마지막 날 향년 98세로 별세했다.
그런데 히로시마 자료관은 이와 같이 조선인 피폭에 대해 다루기는 했으나, 조선인 피폭자들이 일본인 피폭자 다음으로 가장 많다는 사실과 그 이유, 즉 일본 정부의 강제동원에 의해 조선인들이 타의로 일본에 오게 된 역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한국인은 일본 식민지배의 역사를 알고 있기에 자세한 설명 없이도 맥락을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나라 출신 관람객이라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전시는 일본이 조선인을 징집했다는 점은 밝히고 있으나, 조선이 여러 피해국 중 하나라는 느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김에 짚자면,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다른 추축국들이 항복한 뒤인 1945년 8월까지 전쟁을 지속한 책임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이러한 점들에 대해서는 일본 활동가들의 문제의식이 이미 깊어 보였다. 일본이 원폭 피해는 알리면서 정작 전쟁을 일으켰던 과거는 은폐하고 있으므로, 일본의 잘못 또한 제대로 알고 널리 알리는 것이 활동가의 역할이라는 발언을 세계대회 기간에 여러 차례 들을 수 있었다.
 
어느 일가족의 삶을 재구성한 사진 전시 “붕괴한 가족”.
 
다음 전시인 “살아가다”에서는 참화 속에서 살아남은 이후에도 큰 고통과 고뇌에 직면한 이들의 삶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평범한 일상을 잃었고 몸과 마음에 사라지지 않을 상처와 병을 안고 살아갔다. 또, 언제 심각한 질병에 걸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생존자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 아이들을 잃은 부모, 가족과 친구를 잃은 이들의 피폭 이후 삶 이야기가 전시에서 이어졌다.
 
사사키 사다코 씨가 접은 종이학.
 
전시장 한편에는 반핵평화의 상징이 된 소녀 사사키 사다코가 접은 종이학도 전시되어 있었다. 사사키 사다코 씨는 핵무기로부터 살아남았으나 10년 뒤 백혈병에 걸려 입원했는데, 종이학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옛말을 듣고 종이학을 접다가 세상을 떠났다. 사사키 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기리던 친구들은 원폭으로 사망한 모든 어린이를 위로하는 어린이 평화 기념비(‘원폭의 아이 상’) 건립 캠페인을 벌였고 기념비를 1958년 5월 5일 세웠다. 이 사건은 핵무기가 백혈병과 기타 치명적인 질병을 일으켜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몬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후지이 사치코 씨가 성인이 된 후(오른쪽) 그녀의 직장 앞에서 촬영한 사진.
 
본관의 전시는 입구에서 가장 처음 보았던 후지이 사치코 씨가 성인이 된 사진으로 끝이 난다. 후지이 씨는 전쟁이 끝나고 붙어버린 손가락을 수술해 떼어낼 수 있었고, 결혼하며 두 아이도 키워냈다. 사진 속에서도 행복한 모습이지만 그 행복은 짧았다. 후지이 씨는 결국 30대에 암에 걸려 투병 생활을 하다가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와 같이 핵무기는 한순간의 폭발로 끝나지 않고 시간을 넘나든다. 방사능은 몸속에 남아 평생을 따라다닌다. 원폭 투하로부터 생존하는 것은 결코 끝이 아니다.
 
본관에서 긴 통로를 따라 걷다 보면 동관이 나온다. 동관은 도입 전시와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리는 전시, 그리고 원폭 투하 전후의 히로시마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로 구역이 나뉘어 있었다.
 
히로시마시 나카지마 지구의 원폭 투하 전(위)과 후(아래).
 
먼저, 도입 전시에서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전후를 비교한 자료들이 있었다. 히로시마시 중심부 상공의 약 600m에서 원폭이 폭발했고, 이 지역은 말 그대로 지도에서 “삭제”되었다.
 
그다음 전시는 핵무기 개발과 투하 과정을 소개한다. 2차대전 발발 전인 1938년 과학자들이 원자의 핵분열을 발견했고, 우라늄의 핵분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연쇄반응을 통해 방대한 에너지가 방출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러자 미국은 원자폭탄 제조의 이론적 가능성을 연구하고, 1942년부터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극비로 진행하여, 1945년 7월 16일 실험에 성공한다. 이로써 세계는 핵무기를 향한 움직임이 본격화된다. 한편, 1941년 12월 일본군이 말레이반도에 상륙함과 동시에 하와이 진주만의 미군기지를 기습공격해 태평양전쟁이 시작된다. 그러다 1943년 미국 군사정책위원회가 어디에 원폭을 사용할지 논의했고, 1944년 미국과 영국의 지도자들이 만나 일본에 사용할 것을 검토하기로 합의한다. 이후 1945년 8월 6일 새벽, 티니안섬에서 기상관측기가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로 이륙했다. 원폭 리틀보이를 실은 에놀라 게이, 과학 관측기, 사진 촬영기 총 3대의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기는 날씨가 맑은 히로시마로 향했다.
 
미군의 원폭 투하에 사용된 히로시마 항공사진. 조준 지점은 히로시마시 중심부에 있는 아이오이 다리로, 이 다리는 T자형이라 공중에서도 찾기 쉬웠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리틀 보이(오른쪽)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 맨(왼쪽)을 비교하는 모형.
원폭 피해를 보여주는 히로시마(오른쪽)와 나가사키(왼쪽)의 지도. 나가사키보다 산등성이가 적은 히로시마는 원폭 투하 당시 투하 지점에서 2㎞ 이내의 모든 것이 완전히 연소했다. 도시에 있는 약 76,000채의 건물 가운데 약 92%가 파괴되었고 1945년 말까지 약 14만 명이 사망했다.
 
자료관은 핵 시대 속 핵무기 철폐를 향한 노력도 함께 보여준다. 핵무기 개발 경쟁으로 지구상에는 핵무기가 다량 만들어지고 핵보유국도 늘었다. 또한 실전에서 사용이 없더라도 연이은 핵실험으로 많은 이들이 피폭됐다. 냉전이 종결된 이후에는 핵무기 감축과 확산 방지를 위한 노력도 있었으나, 여전히 핵무기 수는 줄지 않았고 핵무기를 가진 나라는 늘어났으며 핵무기의 개발 수준도 높아졌다. 이렇게 핵 위기는 고조하고 있다.
 
북한의 영변 핵 시설 위성 사진. 북한은 1990년대부터 핵무기 개발을 의심 받았고, 2002년 우라늄 농축 및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보유한 사실을 시인했다. 북한은 2005년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고 2006년 핵실험을 실시했다.
 
자료관은 핵 테러리즘, 핵무기 밀수와 개발 기술 유출 등 핵 안보에 관한 내용도 간략히 다루고 있었다. 비키니섬, 마셜제도, 네바다주, 세미팔라틴스크 등 세계 도처에서 벌어진 핵실험을 사례로 핵실험이 인간과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도 설명한다. 또한 핵확산금지조약(NPT), 핵무기금지조약(TPNW),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신전략무기감축조약(New START) 등 핵무기 관련 국제협약과 비핵무기지대를 소개하며 이러한 조약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핵무기금지조약은 핵무기의 개발, 시험, 생산, 제조, 획득, 보유, 비축, 사용 및 위협을 금지한다.
 
자료관에 따르면, 2021년 핵무기금지조약이 발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핵보유국은 핵무기를 현대화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장기화하면서 핵 억지력 강화를 긍정하는 여론이 커지고 있다. 자료관은 2023년 러시아가 미러 간 신전략무기감축조약 참여를 중단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핵 군축 및 비확산 체제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핵무기의 완전한 제거를 향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는데, 2023년 제2차 핵무기금지조약 당사국 회의는 “핵 억지력을 안보 교리로 정당화하려는 새로운 옹호, 주장, 시도가 핵 확산 위험을 증가시킨다”는 이유에서 모든 국가가 핵무기금지조약에 가입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동관 2층으로 내려가면 전쟁과 히로시마를 주제로 한 또 다른 전시 공간이 나온다. 19세기 말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히로시마는 군사도시로 변모했는데, 특히 우지나항은 군인과 물자를 수송하는 핵심 거점으로, 한때 일본제국 사령부와 임시 제국 의회가 들어서기도 했다. 히로시마는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해외파병을 위한 기지가 되었고, 시민의 일상생활은 엄격히 통제당했다. 자료관은 전후 히로시마의 재건 과정과 정치·사회적 상황도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원폭 피해의 실태는 1945년 9월 언론 강령이 내려져 당시 일본 내에서도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히로시마평화기념도시건설법」 소개문.
 
그러다 히로시마에 대한 추모와 애도, 해외 원조가 이어졌고 히로시마는 1947년 평화선언을 발표해 핵무기 반대와 항구적인 세계평화를 호소해 왔다. 1949년 「히로시마평화기념도시건설법」을 통과시키며 히로시마는 평화의 도시로 거듭나고자 했다.
 
히로시마에서 전개된 반핵평화 활동들.
 
히로시마 사람들은 이후에도 원폭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연구, 한국 등 해외 피폭자를 포함한 피폭자 의료 지원 및 생활 조사, 핵실험 반대운동, 반핵평화에 대한 출판물 발간, 예술 활동, 피폭 증언, 국제 심포지엄 등 다각적인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기념관을 나오면서 마음이 오래도록 무거웠다. 우리는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류 전체가 답해야 할 질문이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은 히로시마가 경험한 핵무기의 위험성을 오늘날 세계와 끊임없이 연결 지으려 했다. 핵무기의 위협이 더욱 커지고 있는 지금,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세계대회의 전체 일정이 끝난 다음 날인 10일 오전에는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을 찾았다. 이곳은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았지만, 대부분의 전시자료에 한국어 설명이 있어 관람이 용이했고, 핵무기가 인체에 입히는 과학적 영향이나 세계 반핵평화운동의 역사 등의 주제에 대해서는 히로시마 자료관보다 설명이 풍부했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전시실 입구.
 
전시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왼쪽 벽에는 “나가사키가 마지막 피폭지가 되길 바라며”라는 문장이 10개 언어로 적혀 있었다. 핵무기로부터의 자유와 평화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11시 2분을 가리키고 있는 벽시계.
 
히로시마 자료관과 비슷하게 이곳에도 시계가 전시되어 있다. 폭심지에서 약 800m 떨어진 사카모토 지역의 민가에 있던 벽시계로, 11시 2분을 가리킨 채 80년째 멈춰 있다. 그 옆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솟아오르는 거대한 버섯구름. 이 구름 아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전해주십시오.”
 
1571년 포르투갈선이 내항하며 개항장으로서 나가사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나라의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그던 에도 막부 시대에도 나가사키는 해외에 열려 있었다. 나가사키는 거류지무역으로 활기를 띠었고,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무역도시에서 조선산업의 도시로 탈바꿈했다. 태평양전쟁 당시에도 나가사키에 위치한 미쓰비시 중공업의 조선소와 공장에서 일본군 전함과 병기가 생산되었고, 여기에 조선인들이 동원되었다. 그러다 나가사키는 1945년 8월 9일 운명의 날을 맞는다.
 
자료관 내부.
 
전시실 입구를 지나오면 우라카미 천주당의 외벽, 미쓰비시 제강소의 철골 앵글, 다리가 휘어진 학교 급수탱크 등 나가사키 곳곳에서 피폭된 각종 구조물이 늘어서 있었다.
 
기념관 방문자들이 나가사키 입체지도를 유심히 보고 있다.
원폭 투하지점을 표시한 나가사키 지도.
 
나가사키 입체지도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는 과정과 투하 직후의 초토화를 재현하고 있었다. 원폭 투하 당시 나가사키시의 인구는 약 24만 명이었는데, 그해 말까지만 해도 사망자와 부상자는 각각 7만여 명에 달한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팻 맨의 모형. 팻 맨 관련 영상이나 관계자의 증언 등을 토대로 추측하건대,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 맨은 전체적으로 노란색이었고 접합부는 기밀성을 높이기 위해 검게 칠해져 있었다.
 
길이 3.25m, 지름 1.52m, 무게 4.5t에 달하는 팻 맨은 바깥쪽에 둥글게 배치된 폭약을 동시다발적으로 터뜨려 폭발적인 압력을 발생시키고 그 압력으로 플루토늄 덩어리를 안쪽으로 압축시켜 핵분열을 일으키는 방식의 폭탄이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 보이의 폭발력은 약 15kt인데 비해 팻 맨은 21kt 가량이다.
 
피폭 후 완전히 무너져 버린 나가사키의 모습.
피폭자들이 피폭 당시 입고 있던 의복과 유품이 끔찍한 참상을 드러낸다.
불타버린 유골들.
 
히로시마 자료관과 비교했을 때 나가사키는 원폭 투하 후 발생한 열선이나 방사선에 대해 더 상세히 다루고 있었다. 자료관 설명에 따르면, 불과 몇 초 사이에 인간의 피부에 닿은 열선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뜨거웠고, 일반적인 화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파괴력을 지녔다. 중상을 입게 되면 피부가 문드러져 벗겨지고 피하조직이나 뼈까지 드러났다. 폭심지 부근에서는 인체가 한순간에 탄화되고 내장의 수분마저 증발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방사선이 인체에 미치는 악영향.
 
원폭에서 방출되는 방사선은 인체 내부로 침투해 여러 세포를 파괴한다. 폭심지에서 1㎞ 이내에서 피폭된 이들 중, 외상이 관찰되지 않는데도 사망한 이들이 굉장히 많았다. 또한 방사선에서 살아남더라도 몸속 깊숙이 상처를 남겨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한 증상을 일으킨다. 지금도 나가사키의 과학자, 의사들은 방사선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연구 중이다.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나가이 다카시 방사선학 교수가 쓴 수기집, ‘나가사키의 종’. 피폭자 미조우라 씨가 참가단에 불러준 노래 ‘나가사키의 종’(참가기⑦ 참고)은 원폭으로 부인을 잃고 본인도 피폭으로 백혈병에 걸려 1951년 사망한 나가이 교수의 사연을 담은 노래다.
 
나가사키 자료관에도 원폭 투하 후 여러 구호 활동이 전개되었다. 피폭 직후 현장에서 나온 최초의 의학 보고서 '원자폭탄 구호보고서'가 인상에 남았다. 이 보고서는 1945년 8월 12일부터 10월 8일까지 환자 125명의 모든 치료 경과와 전망, 방사선 장애로 향후 나타날 문제와 대책까지 매우 정밀하게 담고 있었다. 이후 이 보고서가 중심이 되어 '나가사키의 종'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폭심지에서 약 100m 떨어진 곳에서 도자기 가게를 운영하던 마쓰오 가네마쓰 씨와 마사 씨 부부의 폭사증명서. 증명서가 이면지에 손글씨로 작성된 점은 당시 혼란했던 상황을 보여준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에는 핵무기의 현재성을 보여주는 전시도 있었다.
 
세계 각국의 핵무기 비축량.
핵 실험장의 위치를 보여주는 지구 모형.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 핵무기는 실전에서 사용되지 않았으나, 그 피해는 개발, 제조, 실험, 배치 등의 과정에서도 발생한다. 특히 실험 과정에서 그러하다. 1945년 이래 세계 각지에서 진행된 핵실험은 2천 회를 넘었는데, 실험장 주변의 환경은 파괴되었고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과 인근 주민들은 방사선에 노출되었다.
 
핵무기의 역사를 다룬 자료.
 
모든 무기는 실제 사용을 가정해 배치된다. 핵무기도 예외는 아니다. 자료관은 이 절멸의 무기를 지구에서 없애기 위해 활동한 이들도 다루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이나 러셀 같은 핵무기에 반대하는 학자들, 국제정치에서 핵무기의 역할을 줄이고 핵무기를 뿌리 뽑으려는 ‘퍼그워시 회의’ 등이 소개되어 있다.
 
한국과 중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다룬 연표.
 
히로시마 자료관와 달리 나가사키 자료관은 일본이 식민지배하고 전쟁을 일으킨 역사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일본어로만 소개되어 있어 아쉬움이 있지만, 평화의 관점에서 이러한 과오도 함께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일일 테다.
 
두 피폭지의 자료관은 피폭자의 유품과 증언록, 생존자의 기록, 반핵평화운동에 관한 자료 등 여러 형태의 전시물로 핵무기의 공포와 비인도성을 전달하며 핵무기 없는 사회를 실현하자고 호소하고 있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역사나 핵무기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는 숱하게 공부하거나 들어본 적이 많다. 핵무기가 위험하다는 사실 역시 대략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핵무기가 실제 개개인들의 삶과 공동체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핵전쟁을 막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고 우리는 무얼 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지 못한 경우가 많다. 필자도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참여해 피폭자의 증언을 듣고 자료관에 오기 전까지는 피폭이 인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단 한 발의 핵폭탄이 수많은 생명을 무차별하게 빼앗고, 살아남은 자들의 삶과 사회를 모조리 바꾼다는 상식을 이해하는 일은 평화를 향한 첫걸음이자 지금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피폭자의 외침을 단순히 구호로 받아들일 게 아니라, 실제 그들의 경험에서 우러난 진심 어린 경고로 들어야 한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어느 전시물의 구절을 빌려 여덟 번째 참가기를 마무리한다.
 
핵무기는 인류와 영원히 공존할 수 없다. 자신과 같은 고통과 슬픔을 경험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피폭자의 염원을 계승해 나갈 의지와 행동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절실하다. 우리는 그들의 열망을 이어받아 미래 세대에 전달해야 한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과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에 대한 추가 정보는 홈페이지
https://hpmmuseum.jp/, https://nabmuseum.jp/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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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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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핵 원수폭금지세계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