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지상중계 | 2026.06.26

질서 해체의 시대, 사상적 좌표의 재정립을 위해

백승욱 교수의 『자본주의 역사강의』 20주년 신개정판 출간 기념 강연 지상중계

사회진보연대

 

들어가며

 

지난 6월 18일 금속노조 4층 회의실에서 <새로 읽는 『자본주의 역사 강의』> 공개강좌가 열렸다. 강의를 맡은 백승욱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하 ‘백승욱 교수’)는 2000년대 초반부터 마르크스주의 공백과 한계의 전환을 위해 세계체계 분석의 관점에서 활발한 연구활동을 진행해왔다.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월러스틴의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아리기의 『장기 20세기』 등을 소개하고 자본주의 역사와 위기를 분석해왔다.

 

백승욱 교수는 2006년, 세계체계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의 역사적 기원과 전망을 다룬 『자본주의 역사 강의』를 출간했다. 대중강연과 대학강의의 성과를 묶어 낸 이 책은, 역사적 자본주의의 궤적과 미국 헤게모니가 겪고 있는 부침에 대한 저자의 고민과 분석을 전지구적 시각에서 종합적으로 담아냈다.

 

공교롭게 출판 이듬해인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미국에서 발생한 미증유의 금융위기가 전세계를 강타했다. 이후 트럼프의 등장, 유럽연합의 균열과 브렉시트 그리고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등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격동이 이어졌다. 백승욱 교수는 2023년 출간한 저서 『연결된 위기』를 통해 이러한 사건들의 연쇄를 전후 질서의 구도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얄타체제 해체’의 징후로 분석한 바 있다. 그리고 초판 발간 20년이 지난 2026년, 2007년 시작된 금융위기의 동학과 그 함의를 보완할 필요성으로 이번 『자본주의 역사 강의(신개정판)』(이하 신개정판)을 발간했다.

 

 

이번 공개강좌에서 백승욱 교수는 2007년 금융위기 이후 급속도로 해체되고 있는 미국 헤게모니와 현 정세의 위험을 분석했다. 19세기 영국 헤게모니의 몰락 과정을 반추하며 헤게모니 역사와 미국 중심 세계 질서 위기를 ‘금융적 통합과 우익 포퓰리즘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양상으로 진단한다. 특히 트럼프주의의 역사적 뿌리와 그가 궁극적으로 해체하려는 것이 2차 세계대전 후 전지구적 갈등을 봉합해 온 ‘얄타체제’라는 점에 주목했다. 백승욱 교수는 얄타체제의 해체가 단순한 ‘신냉전’이 아니라, 대안적 질서가 부재한 상태에서 국제질서를 제2차 세계대전 이전으로 퇴행시키려는 심각한 위기임을 경고한다. 시야를 돌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북한의 변화를 진단한다. 특히 북한 시스템의 관료적 변모와 북핵위기의 변화에 주목하는 한편, 여전히 ‘87년 체제’에 머무른 채 국제 정세에 무감각한 한국 사회를 ‘분석의 부재, 의지의 과잉’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한다.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와 2기 트럼프 행정부

 

백승욱 교수는 500년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헤게모니가 네덜란드, 영국, 미국으로 이행해 온 과정을 짚으며, 헤게모니의 부상과 쇠퇴기마다 예외 없이 대격동이 수반되었음을 상기시켰다. 과거 영국 헤게모니의 몰락 원인을 복기하면서 현재 미국 위기의 특징을 설명했다.

 

영국 몰락의 네 가지 요인

 

영국 헤게모니는 제국주의와 식민지를 발판으로 부상했고,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승리 이후부터 1914년 1차 대전까지 지배력을 행사했다. 칼 폴라니가 압도적 군사력으로 전쟁을 억제했다고 평가한 ‘100년 평화’의 시기다. 그러나 후발 도전국들의 추격 속에서 1차 대전을 기점으로 영국 헤게모니는 종지부를 찍었다. 백승욱 교수는 영국의 시기가 끝난 원인을 크게 네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강대국 간 전쟁의 본격화이다. 독일, 미국 등 도전국들의 전쟁 역량 급성장으로 영국의 압도적 군사력 우위가 무력화되었다. 둘째, 자기조정적 시장 경제의 붕괴이다. 기축 통화인 파운드 안정화를 위해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던 금본위체제가 붕괴되었다. 그 결과 세계경제는 보호무역 블록으로 쪼개졌고, 각 블록이 생존 공간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충돌이 불가피했다. 셋째, ‘노동력 재생산 비용 외부화’ 한계에 직면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노동자들이 대규모 '병력'과 '군수 인력'으로 동원됨에 따라 계급적 지위가 급상승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정당을 통해 세력화하며 정치·경제적 권리 확대를 요구했다. 영국 지배계급은 식민지 수탈 잉여를 통해 노동자 일부를 포섭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넷째, 식민지 관리 비용의 폭등이다. 피식민지 민중들의 저항이 거세지면서 체제 유지 비용이 수탈 편익을 초과하게 되었다.

 

미국의 위기 해결과 새로운 헤게모니로의 부상

 

미국은 영국의 네 가지 한계를 해결하며 헤게모니를 형성해나갔다. 첫째, 다자주의 도입을 통한 강대국 전쟁의 억제다. 2007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미국은 압도적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2위-9위까지 합친 것보다 많은 군사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둘째, 브레턴우즈 체제와 금융의 통합고도화다. 미국은 1944년 금-달러본위제를 도입하고, 각국 중앙은행이 자국 내 독자적인 경제정책을 통제할 수 있는 민족국가 경제체제를 만들면서 다자주의적 세계화의 틀을 짰다. 1970년대 신자유주의 전환과 2007년 세계금융위기로 이 축이 강하게 흔들렸지만, 오히려 금융적 통합성은 강고해졌다. 위기 국면에 배타적 블록화로 치닫던 과거와 달리, 2009년 그리스의 유로존 잔류, 영국의 EU 재가입 고심 등은 현 위기 국면의 특수성을 보여준다.

 

셋째, 뉴딜체제의 등장, 즉 법인격의 등장과 노동자들의 집단적 권리 제도화이다. 미국의 뉴딜 체제는 소유의 주체를 이성을 가진 '개인'에서 독립된 권리 주체인 '법인(법적 인격)'으로 전환시켰다. 이로 인해 주주들의 사적 자본이 결합한 주식회사는 일차적으로 사적 소유가 지양된 '사회적 자본'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국가가 공공성을 명분으로 표준회계 등 법인을 규제·감독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은 이러한 제도적 변화 속에서 1935년 와그너법 등을 통해 노동생산성 향상분만큼 기업의 이익을 배분받을 수 있는 단체협상권을 보장했다. 즉, 노동조합을 법인화된 기업 및 거시경제 관리의 이해당사자로 참여시켰다는 점에서 영국의 시대와 근본적인 차별점을 발견할 수 있다.

 

넷째, 탈식민화이다. 미국과 소련이 전략적 동조 하에 전후 처리 핵심으로 내세운 것이 제국주의 식민지 체계의 해체였다. 주권 국가로 신생독립국들이 등장했고 이들은 제3세계, 비동맹, 신국제경제질서 등으로 세계경제 속에서 안착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후 도래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파고 속에서 이러한 시도는 좌절되었다. 현재 이 지역들은 ‘글로벌 사우스’로 불리는데 심각한 경제위기와 전쟁에 노출되어 있다.

 

2007년 금융위기와 문제 해결의 불가능성

 

미국 헤게모니 역시 1960~70년대의 호황을 뒤로하고 쇠퇴 국면에 접어들었다. 1980년대 이윤율 저하의 반작용으로 전면화된 신자유주의는 금융 세계화를 가속화했으나, 도리어 시스템의 취약성을 심화시켰고 그 모순은 2007년 금융위기로 폭발했다. 백승욱 교수가 자본주의 역사 속 수많은 위기 중 유독 2007년의 파국에 주목하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근본적 해결 불가능한 미국 헤게모니의 모순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전 세계 자본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무역·재정적자와 과잉소비체제를 유지했다. 1990년대의 금융화의 무대였던 ‘신경제(닷컴버블)’가 붕괴하자, 2000년대 자본은 주식시장을 대체하는 부동산과 연계된 ‘파생상품’, 즉 ‘금융의 증권화’로 옮겨간다. 미국은 리스크를 해소하고 금융적 유동성을 키우기 위해 실체는 없고 돈 받을 권리만 남은 마르크스적 의미의 '가공자본'(MBS, ABS, CDO, CDS 등)을 무한히 파생·증권화한다. 감당할 수 없는 리스크가 터지자 결국 미국 정부와 연방준비제도는 ‘양적 완화’라는 사상 초유의 금융자본 구제를 실시한다. 이는 오직 세계기축통화 달러를 발행하는 미국만의 특권이었다. 정부가 모든 국가 재정을 부실 금융기관 구제에 쏟아부은 것이다. 이러한 금융화의 모순은 "1% 대 99%" 혹은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와 같은 구호가 분출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둘째, 금융위기의 파급효과로 발생한 정치적 격변과 강력한 금융적 통합 때문이다. 미국 수준의 ‘양적 완화’가 불가능한 지역에서는 다시 잔혹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강제되었고 정치적 격변이 일어난다. 우크라이나 유로마이단, 홍콩 우산시위, 대만 해바라기시위, 영국의 브렉시트, 유럽 극우 득세 등 전 세계 약한 고리를 타격하며 정치적 대변화를 만들었다.

 

백승욱 교수는 과거에는 세계경제위기가 제국주의 국가들이 블록화되고 강대국 간 전쟁으로 치닫게 하는 요인이었다면, 현재는 어떤 국가도 이 금융적 세계체계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점 자체가 가장 큰 리스크라고 진단한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금융위기는 임시방편(양적 완화)만 남긴 채 세계경제 위기를 본질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통치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가고 있다.

 

 


* 제이슨 무어의 세계생태론과 미 헤게모니의 프론티어(개척지) 부재

 

백승욱 교수는 세계생태론을 제시한 제이슨 무어를 따라, ‘개척지 고갈’에 처한 미국의 고유한 위기 양상을 설명한다. 무어에 따르면, 미국 헤게모니의 본질적 위기 중 하나는 지구상에 더 이상 새로 개척할 저렴한 개척지(노동력, 식량, 원료,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노동력, 식량, 에너지, 원료라는 4가지 저렴한 것을 자연에서 무상 혹은 저가로 전유하고 잉여가치 착취 체계를 작동시켜왔다.

 

이윤율을 높이는 방법
(근사치로서) 이윤율↑ = 잉여가치(S)↑ / (고정자본(C)↓ + 가변자본(V)↓)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자본가들이 고정자본 투자를 늘리고 노동력을 덜 쓰게 되면서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한다고 분석한다. 월러스틴과 아리기에 따르면 하나의 헤게모니 내에서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를 되돌릴 수 없고, 새로운 체계적 축적순환에 기반한 헤게모니 교체가 새로운 ‘개척지’를 개척함으로써 이윤율 상승 경향을 만들 수 있다. 쇠퇴하고 있는 미국 헤게모니는 영국의 한계를 극복했던 네 가지 개척지에서 또 다시 한계에 부딪혔다. 첫째 추가적인 저임금 노동력 발굴의 어려움, 둘째 유전자 조작을 동원해도 해결되지 않는 식량위기 심화, 마지막으로 석유를 대체할 원료와 에너지원의 공급을 어렵게 하는 기후위기를 들 수 있다.

 
 

 
 

2기 트럼프 행정부 분석

 

백승욱 교수는 2007년 금융위기가 낳은 정치적 파장으로 트럼프 행정부 등장을 파악한다. 미국 정치사의 중요한 네 가지 전환점으로 ①1861년 공화당 링컨(유럽의 핵심국가로서 National Economy의 질문 본격화), ②1933년 민주당 루즈벨트(글로벌 대전략의 중심자로서 민주당의 국제전략 부상), ③1980년 공화당 레이건(미국 경제와 국제전략의 어긋남에 대한 대응으로서 긴 네오콘 부상과 신자유주의의 시기), ④2024년 공화당의 2기 트럼프 행정부(미국 우선주의)를 제시하는데, ①②③은 얄타체제를 준비·수립한 ‘글로벌 미국’을 만들어갔다면, 2기 트럼프는 막대한 비용을 초래하는 글로벌 국가가 될 필요가 없다고 주장, 즉 얄타체제의 해체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질적인 단절이 있다.

 

백승욱 교수는 2기 트럼프가 갑자기 나타난 돌연변이가 아니라, 미국 정치사 심층에 흐르던 다섯 가지 뿌리의 결합이라고 강조한다. 첫 번째는 '먼로주의'다. 1820년대 미국이 내세운 미국-유럽 쌍방 불간섭주의다. 트럼프는 네오콘의 구호였던 '아메리카 넘버원(전 세계 개입)' 대신 '아메리카 퍼스트'를 천명한다. 불필요한 해외 개입을 줄이고 국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때 트럼프가 말하는 '아메리카'는 그린란드부터 남미 최남단까지 아우르는 제국적 개념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두 번째는 '제퍼슨주의'다. 존 로크의 노동가치설을 바탕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자연에 노동을 투여해 가치를 일구려는 '농민(Farmer)' 중심의 세계관이다. 가부장 중심의 각자도생을 위해 총기 소유를 중시하며, 연방정부의 간섭에 극도로 반대하는 미국 우익 이념의 원형이다.

 

세 번째는 '해밀턴주의'다. 이는 강력한 연방 권력을 우선시하는 성향으로, 트럼프가 이민세관집행국(ICE) 등을 동원해 개별 주의 자치권에 난입하는 강한 연방 이상주의적 모습에서 드러난다.

 

네 번째는 '잭슨주의와 백인 포퓰리즘'이다. 과거 개척할 땅이 사라지면서 농민이 되지 못하고 흑인 노예 노동과 경쟁하게 된 백인 노동자층의 분노를 대변하는 흐름이며, 트럼프의 핵심 지지 기반인 '러스트 벨트'로 이어진다.

 

다섯 번째는 '반(反)뉴딜주의'다. 1930년대 루스벨트 대통령의 전시 통치체제로서 뉴딜정책에 반대했던 백인 지배층의 역사적 흐름이다. 2기 트럼프가 공언한 ‘딥스테이트’의 파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는 미국 헤게모니의 근간이었던 ‘법인기업과 집단적 노동자 권리의 인정’을 골자로 하는 뉴딜 연합의 해체를 시도하고 있고, 이는 곧 미국이 그 토대 위에 세워 올린 전후 국제 질서인 '얄타체제'마저 붕괴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백승욱 교수는 다섯 가지 정치적 뿌리가 정교하게 조화된 이념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라고 덧붙였다. 먼로주의(고립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돌연 중동이나 이란에 군사적 타격을 감행하는 모순적 행보처럼, 이 유산들은 정세에 따라 서로 충돌하고 급변한다. 구조적 불안정성과 예측 불가능성 자체가 2기 트럼프 체제를 규정하는 가장 본질적인 속성이다.

 

 

 

얄타체제 해체와 동아시아 안보 지형의 가변성

 

백승욱 교수는 분석의 시야를 한반도가 속한 동아시아로 돌렸다. 현재 국제 질서는 강대국들의 합의였던 ‘얄타체제’가 급속히 해체되고 2차 대전 이전의 강대국 ‘세력 균형 외교’와 ‘영토주의(세력권 논리)’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 과거 일본 군부가 만주·한반도·대만을 ‘주권선’을 넘어선 '이익선'으로 보아 침략했던 논리처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내정의 연장(특별군사작전)'이라 부르고 힘을 가진 자들이 주변 인접 지역을 세력권으로 흡수하는 100년 전의 관행이 재현되고 있다.

 

아래 표의 구분처럼 얄타체제 해체 가속화 국면에서 전쟁과 위기는 주로 강대국 세력균형지대와 글로벌 사우스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속한 동아시아는 세력균형지대의 위협이 작용하면서도 서방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별도의 분석을 필요로 한다.

 

 

중국의 수세적 예외주의

 

백승욱 교수는 도전자 중국을 향한 미국의 태도는 ‘제압’에서 ‘세력 균형’으로 선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2기 트럼프 행정부가 국제질서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상황에서, 중국은 새로운 세계 질서의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기보다 수세적으로 국익을 챙기며 내부 시스템을 공고히 하는 데 집중하는 ‘수세적 예외주의’ 행보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미 1기 트럼프를 거치며 공급망 디커플링 압박에 내성을 키운 중국은, 미국 국채 보유량을 2010년 세계 1위에서 2025년 3위까지 대폭 낮추는 등 2기 트럼프의 타격도 성공적으로 방어해 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향후 시진핑 4연임이 가시화되는 시점에서, 중국이 국제 무대에서 어떤 외교적 행보를 보일지, 대만 문제를 어떻게 관리해 나갈지, 그리고 북·러 관계를 동북아 역학 구도 속에서 어떻게 활용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일성 시대로 회귀하는 북한의 전환과 한국의 맹목

 

백승욱 교수는 한국 민주진보진영에 고착된 ‘분단체제론’ 비판으로 북한 정세 분석을 시작했다. 북한을 통일의 대상이나 고정된 상수로 보는 시각이 비사회과학적일 뿐 아니라, 현재 빠르게 진행 중인 구조적 전환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은 김정일 시대를 지우고 있다. ‘선군정치’를 해체하고 ‘우리 민족끼리’ 노선을 폐기했다. 25년 간 당대회가 열리지 않던 군사전시체제를 끝내고, 6~9차 당대회를 개최하는 등 관료조직을 정상화했다. 군사 엘리트들은 '전략군'으로서 한미연합사령부의 첨단무기에 맞설 핵 개발에 집중하게 하는 등 시스템이 관료적으로 바뀌었다. 백승욱 교수는 이러한 변화의 흐름의 종착지가 ‘김일성 시대’라고 설명했다. 해방 이후 소련·중국의 압박 속에서 기묘한 줄타기 외교로 버텨 온 역사적 생존본능을 활용해 ‘북방대륙외교’, ‘다자세력균형외교’로 회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2019년 하노이노딜로 미국과의 타협노선을 폐기하고, 남한과 공식적 단절했으며, 무기수출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한 채 가변적인 국제 질서의 틈새를 과감하게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핵의 성격 역시 변화하고 있다. 하노이노딜 이후 북핵은 ‘협상용 카드’에서 ‘실전 배치/사용’으로 전환하고 남한과 미군기지를 겨냥한 전술핵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핵교리 역시 기존 ‘응징억제 및 선사용배제’에서 ‘거부억제 및 선사용가능’으로 바뀌었다. 최근 헌법 개정에서는 전술핵 운용부대가 독자적·자동적으로 현장에서 전술핵을 사용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면서 한반도 핵위협은 더욱 커져가고 있는 상황이다.

 

 

‘분석의 부재, 의지의 과잉’을 넘어 새로운 사회운동의 좌표를 향해

 

 

백승욱 교수는 결론으로 한국 상황을 분석하고 사회운동의 과제를 제시한다. 먼저 한국 사회는 과거의 프레임에 갇힌 ‘87년 체제론의 과잉’에 빠져있다. 87년에 미루어진 싸움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는 관성에 파묻혀, 정치를 제도와 정책의 혁신으로 연결하지 못한 채 "적폐 청산"이라는 적대적 공세만 무한 반복하는 양상이다.

 

이러한 진영 간의 맹목적 적대 정치는 곧 8·90년대를 이끌었던 두 학생운동 세대의 '사상적 파산'과 직결된다. 거시적인 세계체계의 변동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를 분석하는 대신, 마치 중국 문화대혁명처럼 사람만을 무대에 세워 단죄하고 파벌 숙청으로 점철되는 퇴행적 정치를 운동권 세대 스스로가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의 사회운동은 국제정세와 지배체제의 변동에 무지한 채 ‘87년 승리의 서사’에 안주해 온 매너리즘을 깨고, ‘분석의 부재, 의지의 과잉’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백승욱 교수는 사상과 분석이 고갈된 정세 속에서 한국 자본주의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것은 결코 이 나라 통치계급의 뛰어난 역량 때문이 아니라고 진단했다. 역사적으로 외부에서 이식된 ‘제도적 복원력’ 덕분이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축적된 법률 자유주의와 전후 미국이 이식한 경제 자유주의 제도가 망가지는 체제를 어떻게든 수선하고 있을 뿐, 통치계급에게서 국가의 장기적 재생산을 위한 고민이나 책임감은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라고 비판한다.

 

백승욱 교수는 조직도, 연대도, 이념도 모두 흔들리는 지금의 전 지구적 해체기 속에서 사회운동은 고전적이고 기초적인 세 가지 질문으로 되돌아가 사상적 좌표를 다시 새길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첫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 전체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추적하는 '경제학 비판'이며, 둘째는 이러한 비판적 관점을 고립된 담론에 가두지 않고 어떻게 대중의 살아있는 사상과 정치로 구현해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마지막 셋째는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끈질기게 쥐고, 이 거대한 위기 속에서 개인이 사상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이정표를 세우는 '윤리 비판'이다.

 

과거에는 모순이 극에 달한 '혁명적 정세'가 도래하면 당연히 진보적인 혁명이 뒤따라올 것이라고 믿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세계는 다르다. 준비된 사상적 대안과 제도적 구상이 없다면, 정세가 뒤흔들어 놓은 공백은 언제나 강력한 반혁명 세력과 극단적인 포퓰리스트, 그리고 극우 세력들이 차지한다는 사실이 일반화되고 있다. 엄중한 시점에서 어떻게 긴 호흡으로 사상적 좌표를 잡아가야 할지 어느 때 보다 진지한 고민과 실천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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