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 2026.08.31
“핵무기 없는 세계, 한반도에서부터! 피폭2세의 권리를 보장하라!”
2026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가기
8월 초, 사회진보연대는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열린 ‘피폭81년! 제15회 26’ 합천비핵·평화대회’에 참가단을 조직해 참가하는 한편,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 매년 열리는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도 지난해에 이어 참가했다. 원수폭은 핵무기의 종류인 원자폭탄·수소폭탄을 일컫는 말로, 원수폭금지세계대회는 일본 반핵평화운동이 1955년부터 매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개최해 온, 핵무기 철폐를 촉구하는 일본 시민과 세계 활동가들의 대회다.
한국 참가자들의 목소리가 두드러졌던 올해 세계대회
한국 참가자가 일본 외 국가의 전체 참가자 9개국 26개 단체 60명 가운데 43명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고, 대회 기간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이 올해 세계대회의 특징이다. 이에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원수협), 일본전국노동조합총연합(젠로렌) 등 주최단체들도 올해 세계대회 일정의 본대회라 할 수 있는 ‘히로시마 데이(원폭투하일) 대회’에서 한일연대를 강조하는 ‘일본의 결의’를 발표했다.
사회진보연대, 전환, 평등의길 참가자들은 함께 사전 준비와 학습을 하고, “세계대회에서 한국 원폭피해자 문제를 알리며 핵 없는 세계의 실현을 호소하자”는 의식적인 목표를 공유하며 참가했다. 이는 원폭 투하 80주년이었던 지난해부터 만들어 온 흐름의 결과다. 지난해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한국 사회운동단체들이 대거 참가한 일이 “9월에 서울에서 한일 반핵평화운동 교류회를 열어보자”는 구상으로 이어졌다. 교류회에 모인 단체들과 한국 원폭피해자 유관 단체들이 후속 사업으로 피폭2세 고 김형률 열사의 기일이 있는 2026년 5월에 반핵평화 행사를 하자고 평가했고, 이것이 올해 5월 <“핵 없는 세상을 일구기 위해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한국 원폭피해자 연대 방안 모색, 반핵평화운동 확산을 위한 증언대회 및 토론회>로 현실화했다. 이러한 흐름에 함께 한 단체들이 이번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도 함께 참가한 것이다.
세 단체 참가단은 김형률 열사의 구호인 “핵 없는 세상을 일구기 위해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가 한국어와 영어로 쓰인 티셔츠와 배지를 착용하고 대회 참가자들에게 배포했다. (합천비핵·평화대회 참가단도 이렇게 활동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1945년 당시 조선인 10만 명이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 피폭되었으며, 지금도 한국에서 피폭2세를 법적으로 원폭피해자로 인정하고 지원하기 위한 투쟁(‘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 개정 투쟁. 이하 ‘특별법’)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이번 세계대회에 참가한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이러한 역사와 투쟁의 산증인이다. 어린 시절 히로시마에서 원폭 투하를 겪은 이기열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전 부회장과 심진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 합천 출신 히로시마 피폭자의 자녀로서 여러 질환으로 고생한 한정순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 그리고 원폭피해자의 인권과 평화를 위해 활동하는 <한국원폭2세환우 쉼터 ‘합천평화의집’>의 이남재 원장이 참가했다. (이기열 선생은 세계대회 일정의 첫날부터, 뒤의 세 분은 합천비핵·평화대회를 마치고 바로 일본으로 건너와 나가사키 일정부터 참여했다.)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이 고령과 원폭증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발언하는 모습과, 원폭 피해뿐만 아니라 식민지배,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을 경험한 당사자로서의 무게가 느껴지는 증언은 대회장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많은 일본 참가자가 필자에게 “합천에 꼭 가서 배우겠다”고 이야기했고, 실제로 방문했거나 방문 일정을 잡았다는 연락들을 받고 있다. 프랑스 평화운동단체 ‘평화운동’ 참가자는 프랑스에 한국 피폭자들을 초청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또한 한정순 환우회장의 참가를 계기로, 세계대회 부대행사로는 처음으로 ‘피폭2세’ 문제를 부각한 ‘한일 피폭자·피폭2세 교류회’가 열렸다.
원수폭금지세계대회의 전체적인 구성은 지난해 ‘2025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가기’ 연재로 자세히 전한 바 있으므로, 아래부터는 올해 세계대회에서 인상 깊었던 논의 위주로 소개한다.
8월 3~4일 히로시마 국제회의
매년 세계대회의 첫 이틀은 ‘히로시마 국제회의’로 진행된다. 일반 시민 참가자보다는 세계와 일본의 반핵평화 활동가 위주로 모여, 현 정세에 토론하고 서로의 운동을 공유하며, 공동 결의문인 ‘국제회의 선언’을 도출하는 자리다.
올해 4~5월 NPT 평가회의 참가, 현재 진행 중인 ‘비핵일본캠페인’을 소개하는 여러 발표에서 나타난 일본 반핵평화운동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 이란에 대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공격,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의 대규모 학살 등, 핵보유국들이 앞장서서 UN헌장과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다. 더욱이 이들은 핵전력의 현대화와 증강을 추진하며, NPT(핵무기비확산조약) 6조에 명시된 핵무기 폐기 의무를 위반하고 있다.
② 동시에 UN 핵무기금지조약(TPNW)에 2026년 8월 현재 전체 UN 가입국의 절반이 넘는 100개국(75개국이 비준 완료, 25개국이 비준 전 서명 단계)이 동참하는 것과 같이, 평화와 핵무기 폐기를 요구하는 여론도 거세다. 올해는 4~5월 11차 NPT 평가회의에 이어 11월에 제1차 핵무기금지조약 평가회의가 열리므로, 핵무기 폐기를 향한 국제연대와 협력이 중요하다.
③ 한편 다카이치 정권하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 번도 없었던 규모의 “전쟁국가화” 위기에 직면해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취임 전부터 비핵 3원칙(“핵무기를 가지지도, 만들지도, 들여오지도 않는다”는 일본 의회 결의) 중 ‘반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밝혀왔고, “전수방위” 원칙(무력 공격을 받았을 때에만, 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방위력만 행사해야 한다는 일본자위대의 방침)의 대폭적인 후퇴, 전례 없는 군사비 증액, “적기지 공격 능력” 보유, 미일 공동 핵사용 체제 강화가 추진되고 있다.
국제회의 세션1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공정한 세계를 만들자>에서 류미경 민주노총 국제국장은 지난해 민주노총과 젠로렌이 함께 한 세계대회 포럼 ‘United As One’(하나로 단결하자)과 한일 피폭자 증언대회 등을 소개하며, 앞으로도 민주노총은 한국과 일본의 핵무기금지조약 가입을 요구하고 비핵3원칙을 지키는 일본 노조의 투쟁에 함께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세션2 <시민사회의 연대와 공동행동>에서 미국 ‘위기 직전에 벗어나기’ 캠페인(Back from the Brink Campaign)의 아이라 헬펀드 씨는 온라인 발언으로 미국 반핵평화운동의 현재 활동을 소개했다. 미국 정부가 일방적 군축 기조를 택하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여, 미국의 핵무기금지조약 가입을 당장 핵심 요구로 삼기보다 조약 가입으로 나아가기 위한 조치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신 이들은 미국 정부가 핵무기를 보유한 8개국과 핵군축 협상을 시작할 것, 핵무기 선제 사용 정책을 버리고 ‘노 퍼스트 유즈’(no first use) 정책을 채택할 것, 핵미사일을 즉시 발사할 수 있도록 상시 준비하는 태세를 폐기할 것, 미국 대통령이라는 한 개인이 핵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현 상황을 바꿀 것, ‘핵무기 현대화’ 계획을 중지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이 캘리포니아 등 5개 주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하원의원 59명과 상원의원 9명도 지지를 표하고 있으며, 미국 반핵평화운동은 이를 2028년 대선에서 전국적 이슈로 만들고자 한다고 밝혔다.
스페인 ‘핵군축연합’(Alianza por el Desarme Nuclear)의 카를로스 우마냐 씨는 스페인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 중 최초로 핵무기금지조약에 가입시키기 위한 노력을 소개했다.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사회노동당)는 현재 NATO 국가 지도자 중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핵 억지’를 비판하는데, 올해 2월 뮌헨안보회의(MSC)에서 강대국들의 핵 군비 확장에 강력히 반대했고, 3월 미국의 대이란 전쟁에도 “전쟁 반대”라는 단호한 입장을 표명했다. 또한 스페인 의회는 올해 11월 핵무기금지조약 관련한 비입법 결의안을 두고 표결할 예정이다. 우마냐 씨는 이러한 움직임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핵군축연합의 활동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이 연대체는 그린피스, 국제여성평화자유연맹(WILPF), 평화수장회의(Mayors for Peace) 등 유명 단체 65개가 구성한 것으로, 2020년 히로시마 피폭자 세츠코 서로우의 스페인 방문을 계기로 결성되어, 원폭 80주년인 지난해 스페인 각지에서 피단협 증언대회를 조직하며 활동이 활발해졌다. 산체스 정부가 실제로 핵무기금지조약에 가입하려는 노력은 하고 있지 않으며, 연립정권의 향방에 따라 스페인 정부의 입장이 바뀔 수도 있고, 의회 표결을 앞둔 결의안은 정치적 의미가 있지만 법적 구속력은 없는 등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2020년대 NATO 가입국 내에서 핵군축 운동을 진전시킨 사례를 만들었다는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토구치 오사무 오키나와현의회 의원(일본공산당)은 1972년 시정권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반환되기 이전에 오키나와현에는 미군 핵무기가 3,000여 개 배치되어 있었으므로, 다카이치 정권이 ‘비핵3원칙’을 흔든다면 오키나와에 다시 핵무기가 들어올 수도 있다고 비판했다. 대만 유사시 미국이 개입한다면 일본 내 미군기지가 중국의 공격대상이 될 것이라는 점은 미국 의회조사국(CRS)이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도 인정한 바이기에, 태평양전쟁 당시 ‘버린 돌’로 취급받아 일본 본토 방어 준비 시간을 벌기 위한 지구전 전장으로 소모되었던 오키나와가 다시 한 번 전장이 될 수 있다는 현민들의 우려는 기우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키나와의 상황과 관련한 질의응답도 있었는데, 올해 3월 평화 학습의 일환으로 헤노코 주일미군 기지 공사현장 앞바다를 찾은 선박이 전복되어 선장과 고등학생 한 명이 숨진 사건의 후과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이에 SNS에서는 ‘시위 중 사고’라며 평화운동을 공격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답변과, 이 사고를 두고 문부과학성이 ‘교육법 위반’이라며 전국 초중고를 대상으로 ‘정치적 중립성’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조사하겠다는 것은 평화교육을 축소하기 위한 압박이므로 단호히 맞서야 한다는 발언들이 있었다.
4일 이어진 국제회의 특별세션 <히로시마-나가사키, 핵실험 피폭의 실상>은 피폭자들의 현실과 운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기열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전 부회장은 생후 5개월에 경험한 피폭 탓에 생긴 질환들로 지금도 잠을 편안히 자기 어려운 현실과, 유년 시절 경험한 한국전쟁과 청년 시절 참전한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전하며 전쟁과 핵무기 사용은 절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마셜제도 핵실험 피폭4세 베네틱 카부아 매디슨 씨는 온라인 발언으로 미국이 마셜제도에서 67차례나 진행한 핵실험으로 환경이 무참히 파괴되어, 많은 이들이 고향을 영원히 떠나게 되었고, 눈이 내린다고 생각하며 방사능 낙진을 맞은 어린이들이 죽어갔다고 고발했다. 이후로도 뼈가 없고 피부가 투명한 ‘해파리 아기’들이 태어나고, 암, 백혈병, 선천적 기형이 평균보다 매우 높은 확률로 생기고 있다며 “우리 몸이 바로 증거”라고 목소리 높였다. 이러한 현실에 맞선 마셜제도 청년들의 운동도 활발해지고 있다며, 핵무기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과 핵무기를 만들고 시험한 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분리될 수 없으므로, 8천만 쪽에 달하는 미국의 마셜제도 핵실험 관련 비공개 문서를 공개하도록 요구하여 진실을 근거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자신들의 목표라고 소개했다. 지난해 합천비핵·평화대회에도 참가한 그는 일본과 한국, 비키니제도와 마셜제도 등 세계 각지의 피폭자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필자는 조선인이 전체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의 10% 이상을 차지했고, 지금 합천에서 열리는 비핵·평화대회에 모인 한국 피폭자들이 핵무기 없는 세계의 실현을 절실히 바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재명 정부는 핵추진잠수함 도입을 추진하고 북한 정권은 핵무력을 연일 확대·강화하고 있음을 비판했다. 고 김형률 열사의 삶과 투쟁을 소개하며, 한국 사회운동은 열사의 의지를 이어가 특별법을 개정하여 피폭2세의 권리를 되찾으려 한다고 소개했다.
올해 11월 13~15일 서울에서 열리는 ‘원폭국제민중법정’ 국제조직위원회 일원인 조셉 에서티어 ‘월드 비욘드 워’ 일본지부장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사용한 국가 미국에 책임을 묻는 ‘원폭국제민중법정’의 의의에 대해 소개했다.
올해는 최초로 국제회의 선언 검토과정에서 선언에 ‘한반도 출신 피폭자들’의 존재를 명기하자는 제안이 나왔고, 이는 최종 선언 문안에 다음과 같이 반영되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자 가운데에는) 강제동원된 사람들을 비롯해 한반도 출신자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2026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 국제회의 선언
세계는 지금 전쟁인가 평화인가 핵, 참사인가 핵무기 폐기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UN헌장을 위반하는 무력행사는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미국의 이란 공격,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서의 집단학살과 요르단강 서안 등지에 대한 침공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을 비롯한 핵보유국, 핵무장국들 및 NATO, 일본 등의 동맹국들은 핵무기에 대한 의존을 더욱 강화하고 핵군비경쟁을 격화시키고 있다. 핵무장국들인 인도·파키스탄 분쟁, 북한의 핵무장 역시 심각한 우려사항이다. 핵보유국 및 핵무장국들 그리고 그 동맹국들의 무력행사는 핵전쟁의 현실적 위험을 높이고 있다.
핵무기가 사용될 경우 파멸적인 비인도적 결과가 초래된다는 사실은 피폭자와 핵실험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명백하다. 미군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은 두 도시를 순식간에 초토화했으며 그해에만 21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 압도적인 다수는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강제동원된 사람들을 비롯해 한반도 출신자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살아남은 피폭자들 역시 심각한 후유증과 차별에 시달렸다. 핵무기의 사용은 도덕적으로도, 국제인도법상 으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
현재 세계에는 1만 2천 발이 넘는 핵탄두가 존재하며, 그 90% 이상을 미국과 러시아가 보유하고 있다. 그 일부만 사용되더라도 지구적 규모의 기후변화를 초래하고 인류 전체를 멸망의 위기에 빠뜨릴 것이다. 인류는 말 그대로 핵 참사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이다. 핵무기 철폐는 인류의 생존이 걸린 절박하고 긴급한 과제이다.
“핵무기와 인류는 공존할 수 없다.” 피폭자들의 호소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고 인류를 핵 참사로부터 구하기 위해 긴급히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공정한 세계”의 실현을 위해 힘을 모을 것을 다시 한번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호소한다.
비핵평화에 대한 역류는 심각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것은 가능하다. 군사력이나 핵무기의 위협으로 ‘평화’를 실현할 수는 없다. 이란, 우크라이나, 가자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인도적 현실은 이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한편 전쟁에 반대하고 UN헌장의 수호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전쟁 피해자들과의 연대는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우리는 바로 이 길에 미래가 있다고 확신한다.
핵무기금지조약(TPNW)의 당사국은 75개국, 서명국까지 포함하면 100개국에 이르며 세계적인 대세로서 착실하게 전진하고 있다. 이 조약을 탄생시킨 원동력은 각국 정부와 시민사회의 공동 노력이었다. 핵무기금지조약을 힘으로 삼아 이러한 협력을 더욱 발전시킨다면 ‘핵무기 없는 세계’를 향한 전망을 열어갈 수 있다.
최종문서 채택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핵확산금지조약(NPT) 재검토회의에서도 그러한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가맹국의 70%가 핵군축과 핵무기 폐기를 위한 협상을 의무화한 조약 제6조의 이행을 촉구했다. 피폭자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헌신적인 활동이 이러한 세계적 흐름을 뒷받침했다. 핵무기 폐기를 위한 ‘명확한 약속’을 비롯해 지금까지 NPT재검토회의에서 이루어진 합의는 조속히 이행되어야 한다.
2026년 11월에는 핵무기금지조약 제1차 재검토회의가 열린다. 이를 핵무기 철폐를 향한 흐름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회의에 초청받는 우리 시민사회 역시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핵무기 없는 세계’를 실현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핵보유국, 핵무장국, 핵의존국들의 ‘핵억지력’에 대한 집착이라는 사실은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핵억지’란 다른 나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을 재현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무차별적이고 잔혹한 무력행사를 부정하는 국제인도법과 양립할 수 없는 입장이다. 더욱이 ‘억지’가 실패하여 핵무기가 사용된다면 그 결과는 모든 국가에 파멸적일 것이다. ‘핵억지력’에 의존하는 것은 인류를 영구적인 파멸의 위험에 빠뜨릴 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각국 정부와도 협력하면서 ‘핵억지력’론을 넘어서는 국제적 여론을 만들어가자.
국제적인 포위와 압박과 동시에 핵보유국과 그 ‘핵우산’에 의존하는 국가들에서의 운동이 중요하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일본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일본피단협)를 비롯한 피폭자와 핵실험 피해자들의 증언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키며 운동을 새롭게 발전시키는 힘이 되고 있다. 각국의 여론과 운동이 핵무기에 집착하는 정책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힘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군사블록 등에 의한 대결과 분열이 아니라, 모든 국가를 포함하는 평화의 틀을 기반으로 한 안보와 평화 구축이다. NATO의 확대와 대규모 군비증강 및 핵전력 강화를 반대한다. 동아시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군사동맹 강화 움직임에 반대하며, 대화와 외교를 통해 남중국해를 포함한 동아시아에서의 평화 구축을 요구한다.
일본 정부는 유일한 전쟁 피폭국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핵우산’에 대한 의존을 심화시키고 핵무기금지조약 가입을 거부하고 있다. 나아가 ‘비핵 3원칙’의 재검토까지 꾀하고 있다. 일본이 핵무기 사용에 가담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현 다카이치 정권이 대규모 군비증강과 전쟁 준비를 추진하는 가운데, 반전·평화, 개헌 저지, 평화헌법 제9조를 지키고 실천하기 위한 운동,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호, 민생 보호 등을 위한 국민적 운동이 발전하고 있다. 미군기지가 집중되어 전쟁의 거점으로 이용되고 있는 오키나와의 투쟁은 그 중심적인 하나이다. 우리는 일본의 운동에 연대를 표명한다.
UN헌장을 토대로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공정한 세계’를 지향하는 세계적인 운동의 연대와 각국 정부 및 UN기구와의 협력을 호소한다.
– 히로시마·나가사키와 핵실험 피해 등 모든 핵무기 사용이 초래하는 비인도적 결과를 알리는 것을 중심으로 운동을 발전시키자. 피폭자 국제증언 활동의 초청, 원폭사진전 개최 등 피폭의 실상을 알리는 활동을 추진하자. 자국 정부가 핵무기금지조약에 가입하도록 하는 운동을 중심에 두고, 핵무기 폐기를 공동의 과제로 삼는 다양한 행동에 나서자. 피폭의 실상과 피폭 체험을 다음 세대에 계승하는 활동을 추진하자.
– 피해자 지원과 환경 복원을 추진하기 위해 해당 국가의 책임에 기초한 정책을 실현하고 국제적 지원체계를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자.
– 핵무기금지조약 제1차 재검토회의와 UN총회를 계기로 여론형성과 공동행동을 더욱 발전시키고 각국 정부 및 UN과의 협력을 확대하자.
– 핵무기의 비핵국가에 대한 사용 및 사용 위협 금지, 핵무기 선제불사용, 중동 비핵무기지대를 비롯한 비핵지대의 창설·확대·강화,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의 일제적 추진,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의 발효, 핵전력을 비롯한 AI의 군사적 이용 금지 등을 요구하자.
– 반전·평화, 군사비 삭감과 생활 및 생존을 위한 지출 확대, 외국 군사기지 철수, 군사동맹 강화 반대, 고엽제 등 전쟁 피해자에 대한 지원, 민주주의, 인권, 젠더평등, 탈원전, 기후위기를 비롯한 환경보호 등의 운동과 연대를 확대하자.
이상과 같은 활동의 모든 측면에서 젠더 관점을 관철하자. 젊은 세대와 함께, 피폭자들과 함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슴에 새기고 그 실현을 위해 힘을 모으자.
2026년 8월 4일
2026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 국제회의
(※ 이 문서는 주최 측의 비공식 한국어 번역본이다. 국제회의에서는 영문판을 검토하고 통과했다.)
8월 4일 히로시마 세계대회 개회총회
4일 오후에는 히로시마 세계대회 개회총회가 열렸다. 예년처럼 주최 측의 인사와 히로시마시장의 메시지, 핵무기금지조약 가입국 정부 대표(올해는 오스트리아)의 발언을 듣고, 해외 활동가들의 발언과 일본 각지에서 온 활동가들의 활동 보고 발언이 이어졌다.
올해는 ‘일본을 핵무기금지조약에 가입시키기 위한 의원과 시민의 대화’라는 특별 프로그램이 인상적이었다. 특별 프로그램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인근에서 소셜 북 카페 ‘하치도리샤’를 운영하는 아비코 에리카 씨와, 히로시마 피폭자인 카모토 히로시 씨, 일본공산당 위원장이기도 한 타무라 토모코 중의원의 대담으로 진행되었다. 정치 이야기를 꺼리는 일본 사회에서 ‘소셜 북 카페’라는 공간을 통해 다양한 토론과 사회 참여를 기획하는 풀뿌리 활동과, 의회에서 일본의 안보 정책 전환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의원의 활동 등에 대해 일반적인 발언 형식에 비해 좀 더 진솔하게 들을 수 있었다.
해외 활동가 발언 시간에는 함재규 민주노총 부위원장의 발언이 있었다. 함 부위원장은 “핵억제론은 오히려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전제로 한 위험한 발상”이라며 “핵무기는 억제의 대상이 아니라 없어져야 할 ‘절대 악’”이라고 발언했다.
일본 활동가들이 ‘평화행진’, NPT 평가회의, 요코스카 미군 기지 등에 관한 활동을 보고하는 가운데, 환경운동가 타케모토 마사히로 씨가 글로벌 수무드 함대(Global Sumud Flotilla)에 참여한 경험을 미니 강연처럼 발표한 것이 올해의 특징이었다. 글로벌 수무드 함대는 가자지구의 해상 봉쇄를 뚫고 인도적 지원을 전달하려 했으나 이스라엘군에 의해 저지된 국제 캠페인으로, 타케모토 씨는 수무드 함대의 준비 과정과 이동 경로, 이스라엘군이 활동가들에게 가한 폭행 등을 상세히 소개했다.
8월 5일 ‘비핵평화의 일본과 아시아’ 워크숍
5일은 히로시마 각지에서 포럼과 워크숍, 현장 견학이 열렸다. 필자는 100여 명이 참가한 ‘비핵평화의 일본과 아시아’ 워크숍에서 패널로 발표했다. 동아시아의 상황은 올해 초 뉴스타트의 만료로 미러간 핵통제 조약이 사라지고 중국과 북한이 빠르게 핵탄두 수를 늘려가는 한편, 한국과 일본에서 핵추진잠수함 도입을 포함한 여러 핵 옵션이 논의되고 있어 긴장이 고조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는 연구에서 인간과 달리 핵무기 사용을 거리끼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 인공지능(AI)의 군사적 이용이 확대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정세에서 이웃 국가 시민사회 간 공동 대응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고 강조하며, 올해 3월 한일 진보정당·시민사회가 공동으로 발표한 호르무즈 군사작전 참여 반대 성명을 예시로 들었다. 국제회의에서와 마찬가지로 합천비핵평화대회와 고 김형률 열사의 활동도 소개했다.
미국 평화군축공동안보캠페인의 조셉 거슨 의장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 개시 단계에서부터 핵 사용을 위협하며 타국의 개입을 막았다고 지적하며, 핵보유국들은 이와 같이 행동하기 마련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있어 핵무기는 그가 미국 내 이민자와 유색인종에게 벌이는 싸움처럼 자기 권력을 투사하는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동티가 베트남평화위원회 사무국차장은 전후 80년 간 지속해온 규칙 기반 질서가 지금 흔들리고 있다고 해서 버릴 것이 아니라 지켜내야 한다고 발언했다. “베트남혁명은 베트남 인민의 단결력과 국제연대 덕분에 성공했다”는 호치민의 말을 인용하며, 인류의 미래를 중심에 두고 운동을 조직한다면 어두운 현 정세에서도 희망이 있다며 11월 핵무기금지조약 평가회의를 그러한 계기로 꼽았다. 그런데 베트남평화위원회는 공산당이 유일한 합법정당이자 집권세력인 베트남에서 국회 산하 기관 격의 단체다. 베트남 정부는 매년 세계대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있고, 전 세계에서 10번째로 핵무기금지조약을 비준했다. 이날의 발표도 베트남 정부의 입장과 일치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카와타 타다아키 일본원수협 상임이사는 동북아시아 비핵지대는 북한, 중국, 러시아의 비핵화를 전제로 하므로 단기에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지금 만들 수 있는 움직임은 한국과 일본이 미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으로, 한국과 일본의 핵무기금지조약 가입이 동북아시아 비핵화의 결절점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으로, 카와타 상임이사는 다카이치 정권의 문제점을 비핵3원칙, 안전보장, 핵 억지론의 측면에서 비판했다. 먼저 비핵3원칙이 일본의 ‘국시’(國是)로 여겨지는 것은 일본 의회에서 여러 차례 관련 결의가 있었기 때문인데, 헌법상 국권의 최고기관인 의회의 결의를 내각이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본래 가능하지 않은 일이며, 다카이치 정권이 비핵3원칙의 수정을 강행한다면 이는 민주주의, 입헌주의 질서에 반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어서, 올해 미국-이란 전쟁에서 드러났듯 미국이 연루된 전쟁이 일어나면 재외미군기지가 공격 대상이 될 것이 뻔한데, 비핵3원칙을 고쳐 미국의 핵무기 탑재 항공모함, 전투기 등이 재일 미군기지에 들어오면 일본이 가장 먼저 공격받을 가능성이 더더욱 커지는 것이기에 안전보장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고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다카이치 정권은 핵 억지론을 비판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핵 억지론이 사실이라면 세계 모든 나라가 핵을 갖고 있어야 가장 안전한 세계가 될 텐데, 세계 지도자 중 아무도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 것은 핵 억지가 실패할 가능성, 즉 핵무기가 실제로 사용될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외교는 실패해도 다음 기회가 있지만, 핵 억지에 실패하면 다음 기회가 없다며 마무리했다.
질의응답에서는 한국과 관련한 여러 질문과 소감 발표가 있었는데, 교토에서 온 한 참가자가 “저도 피폭2세입니다. 그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는데, 김진영 씨가 소개한 한국 피폭2세들의 활동을 듣고 많은 용기를 얻었습니다.”라고 발언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한국의 히로시마’라 불리는 합천에 대해 더 자세히 듣고 싶다는 질문에는 히로시마 피폭자이자 합천 출신인 이기열 선생이 직접 답하기도 했고, “‘응원봉 시위’ 등 한국 청년들의 사회 참여에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도 최근 ‘펜라이트 시위’, ‘데모 달력’과 같은 청년들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 청년들이 시위에 활발히 나서는 배경과 현 상황이 궁금하다”는 질문에는 전환의 김원 국제연대팀장이 답하기도 했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국가들이 비동맹운동의 원칙으로 꼽는 ‘내정불간섭’은 냉전 시기에는 유효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다르다. 예를 들어,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에 내정불간섭 원칙으로 일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질문에, 필리핀 참가자가 “동남아 정부들이 각자 나라에서 인권 탄압을 하거나 해도 서로 간섭하지 말자는 식으로 ‘내정불간섭’을 악용하는 것도 사실”이라고 답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플로어 발언으로, 오키나와현원수협 사지 야스오 사무국장이 오키나와의 상황을 공유했다. 헤노코 신기지 완공 후에도 후텐마 기지를 반환하지 않고 계속 사용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의향이 올해 초 일본 언론에 보도되어 큰 논란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 기지 이전에 필요한 여러 과정에 대한 승인 권한을 갖고 있는 오키나와현 지사 자리가 자민당으로 넘어가면 큰일이므로, 9월 선거에서 타마키 데니 현 지사의 승리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같은 날 같은 시간 열린 ‘청년의 광장’ 워크숍에도 정성진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국장이 해외 참가자 대표로 참가하여, 일본 및 해외 청년 400여 명에게 한국 원폭피해자 문제를 알리며 원폭 피해가 국경을 넘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최근 동북아시아의 정세 변화에 따라 한국 내에서 핵무장 지지 여론이 더욱 강해진 현실을 소개하며, 청년들이 국제연대를 통해 다른 대안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8월 5일 반핵평화 펜라이트 행동
이날 밤에는 ‘원폭 돔’ 앞 아이오이 다리에서 ‘반핵평화 펜라이트 행동’이 열렸다. 일본에서는 한국의 응원봉이나 형광봉을 ‘펜라이트’라고 부른다. 이 행사는 히로시마 원폭투하일 전날인 5일 밤에 핵무기 철폐와 일본의 핵무기금지조약 가입을 촉구하는 목표로 열린 스탠딩 시위로, 피단협, 원수협, 원수금(원수폭금지일본국민회의)이 함께 주최했다. 세계대회 첫날부터 이 행사를 기대한다는 일본 참가자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 이유는 첫째, 한국의 응원봉 시위에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도 시도한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피단협의 제안 덕분에 현재 원수폭금지세계대회를 같은 시기 따로 개최하고 있는 원수협과 원수금의 공동 행사로 열린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이 행사에서는 원수협 계열 활동가들과 원수금 계열 활동가들이 서로 밝게 인사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국에서와 같은 ‘떼창’은 없었지만, 펜라이트를 흔들며 열심히 사진과 동영상을 찍던 일본 참가자들의 들뜬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8월 6일 히로시마 데이 집회
올해 세계대회 일정의 본대회라 할 수 있는 ‘히로시마 데이 집회’에는 일본 시민 4,000명 이상이 참가했다. 첫 순서로, 이번 9월 3선에 도전하는 타마키 데니 오키나와현 지사가 영상 메시지로, 후텐마 미군기지의 헤노코 이전을 막기 위해 지지를 모아줄 것을 호소했다.
특별 프로그램으로 히로시마 피폭자 이토 마사오 씨가 30분 간 피폭 당시부터 자신이 피폭 증언 활동에 나서게 되기까지의 인생사를 소개했다. 한일 피폭자의 평균 나이가 85세를 넘긴 현재, 피폭 당시의 기억이 자세한 동시에 거동이 불편하지 않은 피폭자는 일본에도 많다고 할 수 없다. 그렇기에 가능한 기회마다 실제로 핵무기의 무서움을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려고 기획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어서 한국 원폭피해자인 이기열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전 부회장과 한국 사회단체 활동가인 필자가 국제회의 때와 같은 내용으로 발언한 뒤, 츠치다 야요이 원수협 사무국차장이 답사로 한국 피폭자, 사회운동과 함께 동아시아 비핵평화를 실현하겠다는 내용의 ‘일본의 결의’를 낭독했다. (후세 케이스케 젠로렌 국제국장이 함께 낭독할 예정이었으나 특별 프로그램이 길어져 생략되었다.)
집회 프로그램이 이렇게 구성된 것은, 작년에 이어 올해 세계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국 피폭자들과 사회운동에 화답해야 한다고 주최 측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계대회 기간 중에는 한일연대는 역사적으로,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라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는 일본 활동가들의 인식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일본으로부터의 메시지: ‘일본의 결의’
2026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의 날’ 본대회에서
올해 원수폭금지세계대회(이하, ‘세계대회’)에 한국에서 매우 많은 대표 여러분께서 참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난해 피폭 80년 세계대회에 민주노총 대표와 평화단체, NGO 여러분이 많이 참가하신 것을 계기로, 핵무기 철폐, 전쟁 반대, 평화라는 과제에서 공동의 활동이 진전되고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한국 피폭자인 이기열 선생님께서는 올해 세계대회에 참석해 주셨고, 서울에서도 한일 교류회 등에 빠짐없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가사키 대회에는 한국의 피폭자 1세, 2세 분들도 오십니다.
한국의 피폭자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원폭 투하로 인해 이중, 삼중의 고통을 강요받아 왔습니다. 한국의 운동에 함께하는 여러분께서 역사에 묻힌 채 방치되어 온 한국 피폭자들을 지원하고, 피폭 증언을 널리 알리며, 피폭자에 대한 정의와 보상을 요구하는 한편, 핵무기로는 평화와 안전을 지킬 수 없다는 여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계신 것에 경의를 표합니다.
일본의 운동도 한국의 피폭자들을 전면적으로 지원하고, 피폭자들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힘차게 투쟁하며, 한일 양국에서 핵무기와 인류는 공존할 수 없다는 여론을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또한 일본의 운동은 일본 정부가 핵무기금지조약에 참여하도록 하고, 다카이치 정권이 추진하는 대대적인 군비증강과 ‘전쟁할 수 있는 국가 만들기’를 저지할 결의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중국 봉쇄 정책을 위한 ‘전초기지’로 되어 있는 일본과 한국에서의 공동 대응이 불가결합니다. 동아시아에서 전쟁과 핵폭발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한국 여러분의 힘을 빌려주십시오.
젠로렌은 민주노총을 비롯한 산별노조 동지 여러분과 노동조합 운동의 공동과제뿐만 아니라, 비핵·평화라는 과제에서도 교류와 공동의 활동이 진전되고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한일 노동자들의 요구를 실현하고, 비핵·평화의 동아시아를 실현하기 위해 젠로렌도 전력을 다해 투쟁할 결의를 표명합니다.
(※ 이 문서는 주최 측의 비공식 한국어 번역본이다.)
이어진 일본 참가자들의 발언 중에서는, 일본 각지에서 ‘평화 세미나’를 진행하는 고등학생들이 “우리가 피폭자의 증언을 직접 들을 수 있는 마지막 세대”라며 “그 기억을 더 많은 친구들에게 전하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지난해 나가사키에서 만나서 교류했던 일본 생협노련의 야나기 에미코 씨와 같은 반가운 얼굴의 발언도 있었다.
8월 7일 한일 피폭자·피폭2세 교류회
7일은 히로시마에서 나가사키로 이동한 날로, 세계대회의 공식 일정은 없었지만 원수협이 주최한 한일 피폭자·피폭2세 교류회가 저녁 나가사키피재협 회의실에서 열렸다. 한국 피폭자로는 이기열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전 부회장과 심진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 한정순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이, 일본 피폭자로는 나가사키 피폭자이자 다나카 시게미츠 피단협 공동대표위원, 오오무라 요시노리 피단협 2세위원회 위원장 겸 아이치현원수폭재해자회 사무국장 등이 참석했다. 한국 참가단에 홈스테이를 제공한 사토 스미토 나가사키현원수협 사무국장, 모리카와 에미코 나가사키우타고에협의회 의장 등 나가사키 지역 활동가들도 피폭2세로서 참석했다.
이날 오오무라 위원장을 비롯하여 일본 피폭2세들의 발언에서는 ‘이런 자리가 진작에 필요했다’는 소회가 느껴졌다. 김형률 열사의 활동 덕분에 한국에서는 이미 2002년에 한국원폭2세환우회가 조직되고 2004년 국가인권위원회의『원폭피해자 2세의 기초현황 및 건강실태조사』보고서가 발표된 반면, 일본에서는 많은 피폭2세가 오래전부터 반핵평화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해왔음에도 피단협 2세위원회가 2012년에야 발족했고, 이들에 대한 국가 지원도 연 1회의 기본 건강검진밖에 없다.
그렇다보니 보건복지부가 2029년까지로 기간을 연장한 ‘원폭피해자 코호트 구축 및 유전체 분석 심층연구’(피폭 1세, 2세, 3세 대상)의 문제점을 한국 피폭자들이 지적해도, 정부 차원의 2, 3세 조사가 한국에서는 진행 중이라는 사실 자체에 놀라는 반응이었다. “얼마 전에 저를 포함해서 2세들이 모였는데, 한 사람이 ‘우리 아들이 암에 걸렸습니다’라고 하니 다들 ‘우리 아들도요’, ‘우리 딸도요’하고 말을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피폭의 대물림은 실존하는 문제입니다.”라며 울컥해 하는 발언도 있었다.
《나가사키신문》 보도에 따르면, 올해 6월 피단협 정기총회는 피단협 조직을 피폭2, 3세가 계승하여 이어나갈지, 아니면 히로시마·나가사키 지역을 제외하고는 피폭1세 임원이 사라지는 시점에 지역조직을 해산할지에 대해 내년 총회에서 다수결로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이때 오오무라 위원장은 “피폭자와 2세들이 지금부터 협동하면 피폭자가 없어져도 조직과 운동을 계승할 수 있다”며 피단협 존속을 지지했다고 한다.
8월 8일 ‘일본 시민과 해외 대표의 교류’
8일에는 오후 나가사키대학 의과대학 강당에서 ‘일본 시민과 해외 대표의 교류’ 행사가 열렸다. 해외 대표들과 일본 참가자들이 서로에게 궁금한 것을 묻거나 소감을 발언하는 자리였다. 7월 28일 나가사키와 가까운 구마모토현에서 강진이 발생했고 이에 규슈 지역 신칸센 운행도 끊긴 상황이라 당초 주최 측은 참가 저조를 걱정하기도 했지만, 당일에는 150명 이상이 참가하여 빈자리가 많지 않았다.
이기열 선생은 2023년 핵무기금지조약 2차 당사국회의에 참가했을 때 미국 청년들에게 세계의 핵무기를 폐기하려면 미국 사회운동의 역할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당부를 울부짖으며 했다며, 이 자리에 와 있는 미국 ‘평화행동’(Peace Action), 민주적사회주의자(DSA)의 청년 활동가들도 반드시 핵무기 폐기 운동에 앞장서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심진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은 1945년 당시 미국은 이미 트리니티 핵실험으로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을 알고 있었음에도 원폭 투하를 감행했고, 그 장소로 히로시마를 택한 것이나 오전 8시 15분에 투하한 것을 보았을 때 민간인 살해를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규탄했다. 핵무기 폐기를 위해서라도, 원자폭탄을 개발하여 국제인도법에서 엄격히 금지하는 민간인 공격을 자행한 미국에 그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며 11월 원폭국제민중법정 참가를 호소했다. 2015년 NPT 평가회의 참가를 시작으로 국제무대를 다니며 한국과 일본 외에도 세계 각지에 핵실험 피해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며 핵무기 철폐는 지구촌의 문제라고 강조했고, 핵무기금지조약이 이미 성립했음에도 원폭을 투하한 미국,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 일본 다음으로 많은 피폭자가 사는 한국이 여기에 참여하지 않는 현실이 부끄럽다고 비판했다.
이어진 자유토론에서는 반핵평화 운동에서 종교계의 역할이 궁금하다는 질문에 일본 종교계의 반핵평화 활동을 공유하는 발언도 있었고, “진정한 평화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는 아닐 것이다. 진정한 평화란 무엇일까.”라는 일본 청년의 물음에, 여러 참가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평화에 대해 발언하기도 했다.
8월 9일 나가사키 데이 집회
나가사키 원폭투하일인 9일 나가사키 데이 집회는 올해 세계대회의 마지막 공식행사로, 일본 시민 1,600여 명이 참석했다. 나가사키시장의 인사와 다나카 시게미츠 피단협 공동대표위원의 발언 뒤에는 나가사키 상공에서 원폭이 폭발했던 오전 11시 2분을 맞아 다함께 묵념했다.
다시 한 번 타마키 데니 오키나와현 지사의 영상 메시지와 나가사키 피폭자 모리우치 미노루 씨의 증언을 듣는 특별 프로그램이 이어진 뒤에,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헌법 9조(평화헌법)를 지키겠다”는 내용의 합창공연이 있었다.
그 다음으로 세계대회에서 한국 피폭2세의 발언으로는 최초로, 한정순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이 발언했다. 히로시마 피폭자인 부모님 밑에 태어난 6남매 모두가 여러 질환으로 고생했으며, 한 회장은 고관절이 괴사하는 ‘대퇴부무혈성괴사증’으로 어릴 적부터 잘 걷지 못해 여러 차례 대수술을 받았고 그 외 질환까지 총 12차례의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고통보다도, 첫째 아들이 뇌성마비를 갖고 태어난 것이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그러다 KBS ‘추적 60분’에 김형률 씨가 나오는 것을 우연히 보고 환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된 이야기를 풀어냈다. 필자가 올해까지 3번 세계대회에 참가하는 동안 이렇게 자세하고 직접적인 피폭2세 관련 발언을 들은 적 없기 때문에, 일본 참가자들에게도 한 회장의 발언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거라고 짐작한다.
이어서 이정아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는 DMZ 여성평화걷기, 동북아 여성평화회의와 같은 한국 여성들의 평화활동을 소개하며,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 이어져 온 반핵평화 운동과 한국 여성들의 평화운동은 핵 없는 평화와 성평등한 사회라는 비전에서 일치한다고 발언했다. 여전히 복잡하고 미완인 한일관계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현실을 넘어서는 상상과 연대를 포기하지 말자고 제안했다.
일본 참가자들의 발언 중에는, 직전에 겪은 강진의 여파 속에서도 참석하여 “방위비보다 재건비를” 현수막을 든 구마모토현 참가자들의 발언에 특히 많은 박수가 쏟아졌다. 피폭2세들의 주도로 원수폭재해자회를 재건한 아이치현에서는 이 과정에 참여한 피폭2세 오오타 치에코 씨가 발언했다.
우타고에 활동가 오오쿠마 아키라 씨가 작곡한 노래 “FUTURE”를 다 같이 부르며 2026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는 막을 내렸다.
연대의 의미가 깊어진 올해 세계대회
이 글은 세계대회의 여러 논의를 국내에 소개하고자 발표와 발언, 토론 내용 위주로 썼지만, 세계대회의 의미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원폭 투하 당시 학생이 거의 전원 사망한 원폭 돔 인근 초등학교를 보존하여 만든 자료관과 같이 단 한 발의 폭탄이 남긴 상처들을 직접 눈으로 볼 때의 충격,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에 참배할 때의 마음, 한국 참가단끼리 밤늦게까지 소감을 나누던 시간과 같이, 히로시마·나가사키에 갔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이 참 많다.
특히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히로시마·나가사키의 베테랑 활동가들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여러 행사와 교류 자리에서 작년에 만났던 사람들을 또 만나 반갑게 인사하며 ‘연대’의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연대’라 하면 공통의 과제를 찾아내는 것이 기본이지만, 인연이 이어지며 인간 대 인간으로서 연결되고 서로 믿음을 쌓아나가는 이 과정이야말로 우리의 연대를 튼튼히 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아는 얼굴이 늘어난 만큼, 합창, 서명운동 등 세계대회의 이모저모를 준비하는 일본 활동가들의 노력도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한국 참가단이 인천공항에서 탄 비행기는 마치 국내선 비행처럼 한 시간 10분 만에 히로시마공항에 도착했다. 직선거리를 비교하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도쿄보다 서울과 가깝다. “우리 정말 가까이 사네요”란 이야기를 일본 활동가들과 나누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그때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