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민중건강과 사회 | 2015.04.10

경제위기에 따른 유럽의 보건의료정책과 의료민영화 반대 투쟁

보건의료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유럽 여러 국가들은 재정위기를 겪고 있다. 재정위기를 겪은 여러 국가들에 대해 국제통화기금, 유럽중앙은행, 유럽연합의원회의 트로이카는 긴축재정을 강요했고, 이는 각국의 공공의료가 축소되고 의료민영화 정책이 추진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유럽 민중은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에 맞서 건강권을 쟁취하기 위해 보건의료직 종사자들, 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하는 연대를 바탕으로 의료체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민중의 의료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공동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공공의료는 축소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체 병상 중에서 공공부문이 소유한 병상 수는 2008년 11.1%에서 2013년 말 9.5% 까지 지속적으로 감소했으며, 2013년에는 지역공공병원의 근간을 이루는 지방의료원 중 하나인 진주의료원이 폐업하기도 했다. 또한 진료비 중 건강보험이 부담하는 보장률은 2009년 65%에서 2012년 62.5%로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정부는 의료법인의 영리자회사 설립을 허용하고 영리기관 내 부대사업을 확대하는 내용의 투자활성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제주도에 영리병원 설립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원격의료 허용을 전제로 한 시범사업을 확대하는 등 의료민영화 정책을 강하게 추진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을 극심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 국가들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으며, 보건의료에 대한 민중의 사회문화적인 인식이 다르다는 점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역시 장기 침체 국면에서 재정 문제에 노출되어 있으며 정부는 이를 빌미로 공공부문을 민영화하고 연금과 같은 사회보장제도를 축소하려고 한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만성적 경제위기 상황에서 공공의료와 건강권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유럽의 상황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중건강과 사회에서는 민중건강운동 등이 2014년 11월 펴낸 보고서 『Global Health Watch 4 - Alternative World Health Report』를 발췌 번역하여 ‘경제위기 후 유럽의 보건의료정책 및 이에 대응하여 벌어진 의료민영화 반대 투쟁’에 대해 소개한다. 아래 글은 그리스에서 시작해서 남부유럽의 여러 국가들(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까지 연쇄적으로 겪고 있는 재정위기 상황에서 공공의료가 겪고 있는 위기 및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벌어진 유럽 각국의 사회운동에 대한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한다.



경제위기에 따른 유럽의 국가 재정 정책: 보건의료에 미친 영향

유로화 출범이후 유럽연합 소속 각국의 화폐는 통일이 되었지만, 각국의 재정정책은 통일되지 않았다. 독일, 프랑스 등 유럽연합의 중심국에 비해서 기술력과 생산성이 낮은 주변국들은 유럽중앙은행이 긴축적인 통화정책을 고수함에 따라서 재정적자가 축적되기 시작했으며, 주변국들의 제조업은 붕괴되어갔다. 대표적인 주변국인 그리스는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제통화기금, 유럽중앙은행, 유럽연합위원회의 트로이카에 대출을 요청했고, 트로이카는 대출조건으로 그리스정부에게 강도 높은 긴축재정을 요구했다. 그 결과 그리스 노동자들의 임금을 큰 폭으로 줄어들었고 세금은 인상되었으며, 그리스 민중의 삶은 전반적으로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긴축재정 정책은 공공의료부문에도 영향을 미쳤고 이로 인해 그리스의 공공의료체계에는 수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그리스 보건청의 예산은 총 18억 유로가 삭감되었다. 그 결과 수많은 공공병원들이 문을 닫았고, 보건의료부문의 전문가들 역시 해고당했다. 긴축정책이 실시되기 이전에는 무료였던 공공병원의 외래진료에 도입된 본인부담금으로 인한 그리스 민중의 지출은 2011년 한 해에만 2,570만 유로에 이르렀다. 이렇게 공공병원이 문을 닫고, 민중에게 부담되는 비용이 증가함에 따라 그리스 민중은 의료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2009년부터 2011년 사이 그리스에서 환자가 원할 때 진료를 받지 못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수는 긴축정책 실시 이전에 비해서 거의 50% 증가했다. 그리스의 건강보험은 연간 50일 이상 일하는 노동자들만 이용할 수 있게 개악되었으며, 제조업 붕괴에 따라 실업률이 크게 높아진 상황에서 250만 명이 넘는 그리스의 실업자,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들은 건강보험을 이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스에서 시작한 경제위기는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으로 이어졌고, 이들 나라에서도 정부가 긴축재정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보건의료체계에서 그리스와 유사한 변화들이 나타났다. 포르투갈에서는 2009년부터 2011년 사이 공공지출이 8% 감소했으며, 이에 따라 공공의료의 주요 부문이 민영화되었고 많은 보건의료부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또한 보건의료 이용에 있어서 본인부담금이 크게 오름에 따라 2012년 1월부터 10월 사이에, 예전에 비해 90만 번의 일차진료와 50만 번의 응급진료가 감소했다. 스페인에서는 2009년 이후 공공보건예산의 18.2%가 삭감되었고, 공공의료부문에 근무하던 보건의료인들 중 5만 3천여 명이 2009년부터 2011년 사이의 시기에 해고되었으며, 550개의 공공병원 중 236개의 병원이 민영화되었다. 실업자 및 이주노동자들은 스페인의 공공의료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거나 아주 제한적으로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공공보건예산 역시 2011년부터 2012년까지 8%가 삭감되었으며 이탈리아 민중이 보건의료서비스를 받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은 같은 시기에 12.3%가 증가했다.

여러 유럽국가에서 나타난 범국가적인 저항운동의 모습들

아테네에서 의료에 대한 권리 축소에 항의하여 벌어진 시위 [출처: Global Health Watch]


유럽 곳곳에서 정부의 의료민영화 정책에 대항하는 민중 운동이 나타났다. 그리스에서는 여러 저명한 사회단체들이 연대하여 ‘사회연대진료소’를 설립했다. 최초의 사회연대진료소는 건강보험을 이용하지 못하는 지역주민들 및 이주노동자들에게 일차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테살로니키(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도시) 지역에 설립되었다. 현재 사회연대진료소는 그리스의 다른 지역에도 계속 설립되고 있고, 보건의료노동자들과 사회단체 활동가들, 진료소를 이용하는 환자들이 총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사회연대진료소는 보건의료노동자 조직 및 약사회, 환자단체, 노동조합 등과 연계하여 환자들에게 무상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보건의료서비스를 그리스의 모든 민중에게 제공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는 활동 역시 전개해 나가고 있다.
보건의료를 민영화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에 저항하여 공공의료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들과 여러 사회단체들이 활발한 운동을 벌이고 있다. 스페인 정부는 2012년 6개의 공공병원 경영을 민영화하고 의료서비스를 외주화하는 방안이 담긴 의료민영화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대항하여 보건의료직 종사자들 및 사회단체, 환자, 지역주민들이 연대하여 마드리드에서 투쟁을 벌였는데, 이것이 ‘하얀 물결’ 이라고 불리는 십 수개월 동안의 장기파업 및 가두시위였다. 결국 스페인 정부는 이들의 뜻에 따라 의료민영화 계획을 전면 철회했다. 이러한 성과를 거둔 뒤에도 하얀 물결을 잇는 대규모의 민중운동이 계속되었고 2014년 3월에는 보건의료부문에 국한되지 않고 노동 및 가사노동, 사회서비스 전반에 걸친 민중의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에 100만 명 이상이 동참했다.
포르투갈에서는 보건의료 민영화정책에 대항하여 4번의 국민총파업이 일어났으며, 2012년 7월의 파업에는 보건의료직 종사자들의 80% 이상이 동참하였다. 2012년 9월에는 포르투갈의 모든 주요 도시에서 수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보건의료부문을 포함한 정부의 전반적인 긴축정책을 반대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탈리아에서는 2012년 10월에 보건의료직 종사자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이 이탈리아의 NHS(국민보건서비스)를 지키는 것을 구호로 가두행진을 했다. 운동은 계속되어 2013년 5월에는 NHS의 투명성과 보장성을 높이고 국민들이 NHS의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넓힐 것을 요구하는 캠페인이 보건의료노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보건의료직 종사자들의 운동은 이탈리아 국민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많은 사회단체들도 연대하여 보건의료부문을 넘어서서 민중의 기본권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나아갔다. 2013년 10월 로마에서는 노동조합이 주도한 대규모 시위가 열렸고 이 시위에서 노동조합은 가사노동의 권리를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게 진행되는 정부의 거대 프로젝트들을 중단할 것 또한 요구했다(No Tav movement - 북이탈리아의 고속철도 건설).

위기 한가운데서의 연대

경제위기 이후 유럽 각국에서는 공공의료가 위축됨에 따라 민중의 의료이용과 건강수준이 악화되었다. 보건의료부문에서 일어난 이러한 변화들을 볼 때, 공공 서비스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경제 위기가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현재 시점에서 교육, 의료,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공공 투자는 반드시 늘어나야 한다. 더불어 사회보장을 강화하기 위해 필요한 재정을 누가 감당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어야 한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공 부채는 극도로 높고 또한 증가하고 있다. 동시에 유럽에는 극단적인 부의 편중이 존재하는데, 320만 가구가 7조 8,000억 유로를 소유하고 있다. 가장 부유한 2%가 가지고 있는 금융자산에 대한 세금을 매김으로써 매년 1,000억 유로를 조달할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하고, 불평등을 줄이고,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연대가 절실하다.
사회적 논리가 다른 고려 사항보다 우선되어야만 하는 역사적 순간이 있다. 19세기 후반, 영국 의회는 어린이들이야말로 광산에서 작업하기 가장 적합한 크기라는 이유로 아동 노동의 금지에 반대했다. 노동운동으로 인해 새로운 사회적 논리가 형성되었고, 아동 노동은 폐지되었다. 지금이야말로 집단적인 연대와 실천이 공동체의 번영과 평등한 생활조건의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기본적인 논리를 따라야 할 때다. 우리에게는 소수 이익만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경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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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보건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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