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국제동향 | 2019.05.27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의 황혼

예란 테르보른
출처;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 113호, 2018년 9-10월호
 
[편집자] 유럽의회 선거 결과 발표가 임박해있다. 2019년 5월 23일부터 4일간 총 28개 유럽연합 회원국에서 실시된다. 약 4억 명의 유권자가 투표권을 행사해 751명의 의원을 선출한다. 브렉시트를 실행하지 못한 영국도 투표에 참여한다. 이번 선거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극우정당이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얼마나 선전할지 여부다. 현재 출구조사 결과 역시 예상대로 나오고 있다.
 
2007-9년 금융위기 이후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경기침체와 유럽 난민사태를 거치며 유럽연합 각국에서 극우정당의 바람이 강해졌다. 북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사민주의적 전통을 지닌 스웨덴조차 지난 해 2018년 총선에서 극우정당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지난 스웨덴 선거를 되돌아보는 글을 번역, 요약하여 소개한다. 이번 나올 유럽의회 선거 결과의 의미를 더 분명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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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9일 스웨덴 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1911년 거의 보편적인 남성 선거권이 도입된 이후로 가장 취약한 결과를 얻었다. 그 당시 사회민주당은 28.5%의 득표를 했는데, 이번에는 28.3%였다. 그렇지만 당 지도부는 그 결과를 절반의 승리라고 환영했다. 현재 스웨덴 사민당의 야망은 매우 겸손해졌다. 역사적으로 스웨덴 사민당은 세계의 노동당, 사민당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정당이었다. 1932년부터 1988년까지 반세기 이상 동안 모든 선거에서 40% 이상 득표했다. 스웨덴 선거시스템의 특징은 비례대표제, 중선거구제였다. 1차세계대전 이후로, 어떤 다른 정당도 1차 세계대전 이후로 30%의 장벽을 넘지못했다. 1994년에도 사민당은 45% 이상을 득표했다.
 
스웨덴의 사민주의는 독일과 덴마크를 통해 도입되었고, 덴마크가 스웨덴 개혁가의 첫 번째 세대를 위한 롤 모델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부터 스웨덴 사민당은 그들 계급의 주인이라고 보편적으로 인식되었다. 1932-76년 사민당 행정부는 사회개혁 정부로서 탁월하게 성공적이었다. 그들은 완전고용, 번영하는 개방경제를 제시할 수 있었고, 스웨덴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었고, 관대한 복지국가이자 평등주의적 사회였다. 1976년 사민당이 주도하는 노동조합이 “임금소득자 기금”(wage-earner fund)을 제안했는데, 이는 주류 사민주의가 제시한 것 중에서 사회주의 경제를 위한 가장 원대한 구체적 조치였을 것이다. 스웨덴의 사민주의화는 매우 철저했기 때문에, 1976-82년 중도우파 '부르주아 정당연합'(온건당, 기독민중당, 중앙당, 자유당)도 완전고용과 사회적 권리라는 경주로를 벗어날 수 없었다.
 
 
반개혁
 
 
1980년대 사회경제적 반개혁(Counter Reformation)을 개시한 것은 사민당 지도부 그 자신이었다. 일종의 위기관리책으로서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시작되었다. 수출산업의 비용 경쟁력이 저하되었고, 잔존하던 섬유·의류 생산자가 휩쓸려 나갔고, 한국과 일본의 조선업 기업이 스웨덴을 끝내 능가하게 되었고, 철강과 임업 부문이 다운사이징될 수밖에 없었다. 수익성이 하락했고, 투자도 하락했다.
 
1978-81년 국제수지가 적자로 돌아섰고, 부가가치 중에서 이윤 몫[이윤분배율]이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 30%였으나, 1978년 24%로 하락했다. 비록 고용수준은 유지되었으나, 이윤분배율 하락은 고용에 대한 위협으로 묘사되었다. 사민당뿐만 아니라 스웨덴 노총(LO)의 경제학자들은 임금억제에 동의했고, 이윤을 끌어올렸다. 이를 달성하는 주요한 수단은 스웨덴 통화의 16% 가치절하였고, 1982년 행정부로 귀환한 사민당이 이를 실시했다. 당 지도부는 마이드너의 임금소득자 기금에 담겼던 변혁적 잠재력을 거세했다.
 
1980년대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국제적 돌파구를 목격했다. 사민당 경제학자의 한 그룹은 시카고 학파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학습하기 위한 세미나를 조직했다. 시장화와 인플레이션 통제가 사민당 정책에서 우선성을 획득했다. 1985년 이들 파벌은 신용과 자본시장의 탈규제를 강행했다. 재무부 장관 펠트가 올로프 팔메 총리에게 이를 제안했을 때, 총리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나는 어쨌든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요”라고 답했다. 이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스톡홀름 주식시장의 재조직화와 함께, 국외·국내의 투기적 금융자본을 위한 수문을 열었다. 주식거래는 1980년대 GNP의 12%였으나, 1989년 68%, 2012년 128%로 상승했다. (2012년 시점에 미국은 115%, 영국은 123%였다.) 이는 1991년 금융위기를 산출했고, 완전고용의 종말을 야기했으며, GDP를 4% 감소시켰으며, 납세자는 은행에 대한 구제금융을 위해 GDP의 4%에 달하는 비용을 지불해야만 했다.
 
‘부르주아’ 연합이 1991-1994년 집권해서 이러한 버블 붕괴를 다뤄야 했기 때문에 사민당은 운이 좋았다. 부르주아 연합이 문제를 잘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민당이 1994년에 45%의 득표로 귀환했다. 사민당은 경제의 재안정화를 겨우 달성할 수 있었고, 뉴욕 은행가들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스웨덴 경제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성과는 단기적이었고, 가혹한 긴축수단을 야기했다. 민유화(privatization), 시장화, 또는 ‘새로운 공공관리’(공공서비스에 기업 비즈니스적 실천을 주입)에 대한 재검토는 없었다. 1991년 이후로 부르주아 연합과 사민당 주도 연합은 불평등과 이윤추구를 장려하는 데 릴레이 주자처럼 작동했다. 그들은 상속세, 부유세, 주거용 재산에 대한 세금을 제로로 낮추었고, 노동소득에 비해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를 줄였으며, 사회수당의 규모를 축소했다.
 
그에 따라 경제적 불평등이 치솟았다. 가처분소득의 비율은 1980년대 이후로 60%로 상승했고, 지니계수는 1980년 0.20에서 2013년 0.32로 상승했다. 이러한 증가의 2/3는 과세와 사회적 [소득]이전에 관한 정치적 결정에 따른 것이며, 1/3만이 시장소득의 더 불평등한 분배에 따른 것이다. 현재의 스웨덴 소득분배는 1688년의 영국과 닮았다. 부의 재분배는 훨씬 더 악화되었는데, 서유럽에서 가장 불균등한 패턴을 야기했으며, 브라질, 남아공, 미국과 유사하다. 2002년에 최상위 1%가 모든 가계 부의 18%를 소유했는데, 2017년에 42%로 치솟았다.
 

요인들
 
 
어떻게 이러한 전환이 발생했나? 포스트-산업적 자본주의, 세계화되고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경제적 불평등을 강화하는 내재적 경향을 지녔다. 하지만 혹자는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가 이러한 경향을 억제하고 봉쇄하리라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반대로 스웨덴은 서유럽 국가 중에서 더 크게 증가했다. 세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민당 지도부의 방향 전환이었다. 가장 분명한 사례는 연금 협상으로, 1990년대에 사민당 정부와 부르주아 정당 간의 비밀협상이 있었고, 1998년 의회에서 협상안이 통과되었다. 그 중심 아이디어는 연금을 GDP와 인구의 변화에 연동시키는 것이었다. 그 의도는 경제적 압력, 인구 압력 하에서 연금시스템을 지속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새로운 연금구조가 분배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았다. 15년이 지난 후, 유럽연합 평균에 비해 상대적 빈곤의 수준이 더 높아졌다. (유럽연합은 14%인데, 스웨덴은 17%다.) 또 다른 협상은 1991년 세금에 관한 것이었는데, 사민당 정부는 노동소득에 비해 자본소득에 대한 세율을 낮추었다. 2004년 사민당은 상속세, 증여세를 폐지했다. 위기 관리와 성장에 대한 장려가 다른 모든 경제적 관심사를 꺾어버렸다.
 
둘째, 기업의 공세가 강도 높았고, 충분한 재원을 갖추었다. 그들은 먼저 1970년대 노동 측의 성과에 대해 저항했다. 1976년, 고용주 연맹은 역사상 처음으로 기업경영자를 그들의 지도자로 내세웠다. (그 전임자는 공무원이거나, 상공회의소의 준공무원이었다.) 2년 후, 고용주 연맹은 선전기관으로서, 현재 스웨덴의 가장 중요한 싱크탱크인 팀브로(Timbro)를 세웠다. 1983년, 기업조직은 스웨덴 역사상 가장 큰 시위를 벌였는데, 이는 임금소득자 기금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집회 주최자들은 시위 조직을 위해 1968년의 학생 지도자들의 자문을 받았다.) 그러한 공세는 명시적으로 반(反)노조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을 정도로 영리했다. 그 대신 그들은 교묘한 수단으로 노동조합을 약화시켰다. 노동조합에 가입하거나, 노동조합의 실업기금을 받기 위한 비용을 높였다. 기업 엘리트는 개인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선전했고, 과세에 대한 로비를 강하게 진행했다.
 
1991-1994년, 2006-2014년 부르주아 연합은 불평등의 증대에 대해 아무런 꺼리낌도 느끼지 않았으며, 기업의 세금을 더 인하했고, 재산세를 폐지했으며, 실업수당과 질병수당에 대한 접근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불평등(특히 부의 분배에서의 불평등)을 추동한 세 번째 요인은 하이테크 수출 부문의 새로운 동학이었다. 하이테크 수출은 텔레코뮤니케이션 기업 에릭손에 오랫동안 집중되었는데, 최근 성공적인 IT 개발자가 탄생했다. 스카이프(Skype), 스포티파이(Sportify), 컴퓨터게임(캔디 크러시, 마인크래프트) 등. 가장 공격적인 금융자본 형태인 비공개 투자기업(private equity firm)이 스웨덴에서 예외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GDP에 대비한 그들의 규모는 유럽에서 2위다.
 
[그림] 비공개 투자 기업 (private equity firm) (출처:위키피디아)
 
민족적 서사
 
 
스톡홀름, 예테보리, 말뫼 지방정부는 경제적 불평등뿐만 아니라 주택의 차별, 보건의료와 교육의 상태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노동조합 LO도 2019년에 의회에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해 <평등 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워킹그룹>을 구성했다. 지난 해 노동조합 싱크탱크인 <촉매>(Katalys)와 함께 나는 ‘스웨덴에서 계급’이라는 분석적, 정치적 프로젝트를 지도했는데, 20개의 보고서와 책을 생산했다.
 
스웨덴의 다수가 치솟는 불평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데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정치적으로, 사민당이나 그 지도부가 비판적인 계급적 담론을 취하기 어려운데, 사민당이 반개혁에서 공모했기 때문이다. 계급 이슈는 예외적으로 노동조합 교육에서만 주제가 될 수 있다. 사회적으로 새로운 계급적 격차와 부정의는 평균적인 임금소득자에게 직접적으로 감지하기 어려운데, 그들은 지난 금융위기 이후 실질임금의 상승을 향유하고 있다. 노동시장의 불안정성이 점증하고 있으나, 그 목소리를 내기에는 너무 취약하고 분할되어 있다. 기대수명에 걸친 [소득]격차가 분명해질 때는, 이미 그에 대응하기에 늦을 것이다. 교육의 불평등, 부의 상속이 누적됨에 따라 나타나는 기회의 축소는 다음 세대에나 가시적이게 될 것이다.
 
그 대신에 스웨덴을 사로잡고 있는 서사는 이민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본에서는 이민이 스웨덴의 가장 큰 문제이며, 이는 전간기 독일의 자기 인식을 떠올리게 한다. (“유태인이 우리의 불행이다.”) 2018년 스웨덴 부르주아의 언어는 1920-30년대 독일보다는 얼마간 세련되었다. 스웨덴 온건당의 지도자에 따르면 ‘통합’(integration)은 스웨덴이 안고 있는 너무 많은 문제와 연결되는 요인이다. 세금인하나 민유화와 같은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은 부르주아 연합의 의제이지만, 더 이상 대중적으로 호소하는 의제는 아니다.
 
2018년 겨울부터 봄까지 사민당과 부르주아 정당은 이민자와 그들의 ‘통합’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슈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서로 수렴했으며, 누가 이를 더 잘 저지할 수 있는지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 이는 외국인혐오, 반이민 정당인 스웨덴 민주당의 홈 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르게 된다는 의미였다. 스웨덴 민주당은 여론 조사 결과, 인기가 치솟았다. 사민당은 이러한 판단이 오류라는 점을 깨닫고, 2018년 총선이 근본적으로 사회정책, 또는 복지에 대한 선거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선거캠페인이 진행되면서, 사민당은 좌파에게 힘을 실었는데, 공공서비스의 이윤추구에 제한을 가하고, 세금인하에 관한 부르주아 동맹의 제안을 공격하고, 자본에 대한 더 높은 과세, 다양한 종류의 더 관대한 사회수당을 약속했다. 이는 얼마간 성공을 거두어서, 여론조사는 23-25% 수준이었으나, 선거결과 28%를 득표했다.
 
 
이민과 외국인혐오
 
 
다른 유럽과 마찬가지로, 스웨덴은 역사적으로 이주자를 내보내는 국가였다. 스웨덴인은 가난을 피해서, 또한 종교적, 정치적 박해를 피해서 대규모로 스웨덴을 떠났다. 종족적 소수자(핀(Finn), 사미(Sami))는 소수였고, 강제적으로 동화되었다. 1930년대 후반, 주류 학생과 부르주아는 나치 독일로부터 도피한 여러 명의 유태인 의사의 수용을 반대했으며, 전쟁 기간 동안 스웨덴의 ‘중립’은 사민당 정부의 나치 독일과의 화기애애한 관계를 동반했다. 하지만 1943년 스웨덴 당국과 시민이 덴마크의 유태인의 탈출을 도왔다.
 
전후, 특히 1960년대 이후로 스웨덴은 상당수의 노동력 이주를 개방했고, 그 대다수는 핀란드에서 왔지만, 일부는 남부 유럽에서 왔다. 1970년대에는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망명자를 받아들였다.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의 분해 이후에 새로운 이주 물결이 있었고, 이는 심각한 경기침체와 1991년의 금융위기와 시기적으로 일치했다. 그 후로 상황이 바뀌어서, 인종주의적이며 외국인혐오적인 운동이 시작되었고, 특히 최남단의 스카니아에서 활발했다. BSS(‘스웨덴을 스웨덴인의 것으로 남겨두자’)라고 불리는 소규모 활동가 그룹이 1979년에 활동을 개시했다. 스카니아 지방정부는 1988년 난민에 반대하는 주민투표를 실시했으며, 2/3의 다수로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같은 해, BSS 지지자와 다른 사람들이 강경 우파로서 신나치주의적 요소가 있는 정당, 즉 스웨덴 민주당을 창립했다. 1991-1994년 ‘신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외국인혐오적, 신자유주의적 정당이 의회에 입성했다.
 
전후 스웨덴의 자기인식은 사회민주주의뿐만 아니라 국제주의였다. 유엔과 개발원조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사민당 지도자는 올로프 팔메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며 집권했다. 1973년 스웨덴의 칠레 대사는 군사독재의 암살단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사람들을 도왔다. 2000년대 초반, 스웨덴은 이라크 전쟁, 아프라카 북동부의 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부터 피하고자 한 난민을 다수 수용했다. 스톡홀름의 위성도시 쇠데르탤리에의 시장은 자기 도시가 미국 전체보다 더 많은 이라크 전쟁 난민을 수용했다고 증언했다. 스웨덴과 독일이 2015년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의 난민 물결을 자발적으로 수용한 유일한 국가라는 점은 놀랍지 않다. 이때 스웨덴은 16만 명을 수용했는데, 인구에 대비해보면 영국의 100만 명에 해당한다. [스웨덴 인구는 천만 명 정도다.] 2017년 스웨덴 거주자의 거의 19%가 외국에서 태어났고, 11%가 아시아나 아프리카 태생이다.
 
스웨덴의 난민 개방 정책은 인종주의적, 외국인 혐오적 비주류가 반대했으나, 광범위한 공중의 지지를 받았다. 당시의 우세한 분위기는 총리의 발언으로 표현되었다. 2014년 온건당의 지도자 라인펠트는 “난민에게 당신의 마음을 열어라”라고 말했고, 2015년 사민당의 뢰벤은 “우리는 장벽이 아니라 다리를 건설하고 있다”고선언했다. 유럽사회조사에 따르면, 노르딕 국가, 특히 스웨덴은 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 이민에 가장 긍정적인 입장을 표했다. 하지만, 스웨덴 민주당은 2010년 총선에서 5.7%의 득표를 해서 4%의 문턱을 넘어 의회에 입성했고, 2014년 12.9%로 상승했다. 여론조사를 보면, 2015년에 (주로) 시리아 난민이 도착하면서, 스웨덴 민주당의 지지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2018년 9월, 그들은 전국적으로 17.5%를 득표했고, 스웨덴의 중선거구 중에서 두 곳에서 최대 득표를 했다. (각각 29%, 26%.) 두 지역은 스카니아에 위치해 있다.
 
스카니아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가장 큰 요인은 덴마크와 근접해 있다는 점인데, 최근 들어 소란스러운 쁘띠부르주아 파퓰리즘과 외국인혐오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스카니아는 양자의 현상을 1980년대에 이미 목격했다. 덴마크 인민당이 그들에게 전술적 모델을 제공했는데, 스웨덴 민주당은 덴마크 인민당보다 더 보수적이며, 덴마크 정당과 달리 직접적으로 신나치주의적 뿌리를 보유하고 있다. 스카니아는 발트해를 통해서 대륙과 접한 국경지역인데, 다수의 이주자의 관문이다. 또한 스카니아는 매우 불평등한 지역인데, 산업이 쇠락한 다수의 지자체가 매우 부유한 지자체와 접해 있다. 더 북부에 있는 비슷한 마을이나 도시에서 스웨덴 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낮다는 것은 확산과정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인데, 이는 19세기 말 사민당의 확산과 비교할 수 있다. 하지만, 스카니아에서도 스웨덴 민주당은 시골지역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 두 개의 대도시, 말뫼와 헬싱보리 지역이나, 룬드의 대학 도시, 부유하고 보수적인 교외지역에서는 스웨덴 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적다.
 
스웨덴 민주당 투표자의 다수는 전통적인 우파에서 온 것이다. 2018년에 투표자의 42%가 과거에 온건당 지지자였고, 16%가 다른 부르주아 정당 지지자였다. 또한 23%는 사민당 투표자였고, 5%는 다른 좌파정당이나 환경당 지지자였다. 1/8은 과거에 투표한 적이 없었다.
 
현재 스웨덴 민주당 지도부는 2005년에 등장했고, 공공연한 신나치주의를 지워버렸으나, 그러한 성향은 지역 정치인들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흉악한 판타지를 소셜 미디어에 표현하는데, 예를 들어 [덴마크 코펜하겐과 스웨덴 말뫼를 연결하는] 외레순 다리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사민당 정치인을 학살하고, 난민을 실은 배가 침몰하고 등등. 스웨덴 민주당이 성장하는 데 두 단계가 있었다. 2014년 선거까지 사회경제적 ‘패배자’의 원한이 주요한 동력이었다. 특히 스카니아는 1990년 초반의 위기로 강한 타격을 받았고, 수당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2008년 금융위위와 경기침체로 다시금 고통을 받았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인구 중 하위 1/3의 소득이 감소했다. 이 시기에 스웨덴 민주당은 실업자, 조기 은퇴자, 자가고용 노동자 중에서 불균등하게 동조자와 활동가, 지역 정치인을 모았다.
2014년 이후로, 두 번째 단계에서 이민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우려에 다가갔고, 노동자계급에 상당히 침투하여, 노동자의 1/4이 2018년에 그들에게 투표했다. 여론조사 결과, 그들에 대한 지지는 2015년 11월, 난민의 유입 직후에 20%로 최고조에 올랐다가, 그 후 15%로 하락했고, 2018년에 다시 상승했다. 최근 변화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한 듯하다. 온건당과 다른 부르주아 정당이 이민자의 ‘통합’이라는 문제를 중요한 정치적 이슈로 부각시킨 것이다. 두 번째는 미디어가 소규모 갱들의 전쟁을 자극적으로 보도하면서 나타난 도덕적 패닉이다. 노동자는 세 번째 이유가 있다. 운송, 건설과 같은 산업에서 외국, 유럽연합 기업이 점점 더 해외에서 저임금 노동자를 도입하여 노동시장을 악화시켰다. (예를 들어 태국 건설노동자.)
 
스웨덴 민주당 투표자의 40-50%(즉 스웨덴 인구의 약 8%)가 직설적인 인종주의, 외국인혐오를 표시하고 있다. (그들은 이주자 이웃을 원하지 않고, 그들의 가족과 결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파 포퓰리즘’라는 전통적인 라벨은 스웨덴 민주당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스웨덴 민주당은 선동정치적인 웅변술이나, 기득권에 대한 맹렬한 공격, 인민에 대한 거친 약속과 같은 [포퓰리즘적] 물결을 탄 게 아니다. 그 지도부는 대중선동가가 아니라, 능수능란한 수완가로 쿨하고 전략적으로 영리하다. 스웨덴 민주당은 ‘민족주의적 토대’ 위의 ‘사회적 보수주의’라고 자신을 제시한다. 그들의 노동자계급의 항의 투표를 모으고 있지만[사민당에 항의한다는 의미에서 민주당에 투표한다는 의미], 동조자의 다수는 자신이 우파라고 간주한다.
 
전통적인 부르주아 정당들은 전후 스웨덴의 보편주의적 문화를 고수했고, 외국인혐오를 지지하는 우익 정부의 구성을 주저한다. 2014년 이후로 스웨덴 의회는 세 개의 정치블록으로 구성되었다. 레드-그린 블록은 사민당, 환경당과 포스트-공산주의적 좌파당으로 구성되었다. 사민당과 환경당은 2014년, 2018년 연정을 구성했고, 좌파당은 다수 형성을 위해 연정 외부에서 지지했다. 두 번째 블록은 4개의 정당으로 구성된 부르주아 연합이며, 세 번째는 스웨덴 민주당이다. 스웨덴 민주당은 부르주아 연합의 환심을 사고자 하지만(특히 온건당과 기독민주당의 우파), 아직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부르주아 연합은 이 문제로 분열될 수 있는데, 중앙당과 자유당은 스웨덴 민주당과의 연정을 거부한다. [실제로 2019년 1월 18일에야 연정이 구성되었는데, 스웨덴 사민당이 부유층에 대한 감세 등 정책을 수용하고, 중앙당과 자유당이 사민당 대표를 총리로 선출하는 투표에서 반대표 대신에 기권을 선택했다. 스웨덴에서는 총리에 대한 반대표가 과반수를 넘지 못하는 한 현직 총리가 계속 지위를 유지한다.]
 
스웨덴 신생 극우정당, 스웨덴 민주당의 스티커
'스웨덴을 스웨덴인의 것으로' [출처: 위키백과]
 
중도좌파의 쇠퇴
 
 
스웨덴 선거는 전통적인 유럽 사민주의를 괴롭히는 심각한 위기의 또 다른 사례를 제공한다. 하지만 포괄적인 일반화를 시도하기 전에, 이러한 위기가 보편적이지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위기는 이탈리아 공산당이나 프랑스 공산당과 같은 대중적 공산당의 종말도 포함한다.) 즉 포르투갈 사회주의자들이 좌익 동맹과 함께 성공을 거두었고, 코빈이나 샌더스 캠페인이 깜짝 놀랄 호소력을 지니기도 했는데,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위기가 산출한 광범위한 경향이 존재하지만, 이러한 경향이 상이한 경로와 조우할 수 있다는 것도 증명되었다.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적 위기를 산출한 가장 중요한 네 가지 요인은 (1)탈산업화, (2)산업사회에 뿌리를 둔 제도적·조직적 구조의 사멸, (3)이민의 물결, (4)경제성장과 복지국가의 현존 형태가 사회개혁과 사회정의를 과잉화했다는 엘리트의 합의인 것으로 보인다.
 
탈산업화는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핵심부를 축소시켰다. (대기업에 고용된 운송부문, 제조업부문 노동자.) 1982년 산업노동자는 유권자의 20%를 구성했는데, 2014년에는 9%에 불과했다. 반면, ‘다른 부문 노동자’은 24%에서 20%로 하락했다. 스웨덴 북부의 산업지대, 즉 노동조합이 조직된 지역에서 사민당은 지배정당으로 남아 있다. (물론 스웨덴 민주당이 상당히 잠식했지만.)
 
사회경제적 혼란, 새로운 통신기술, 새로운 형태의 이동성은 대중적 공동체와 그들의 조직(정당과 노동조합)과 문화를 조금씩 갉아 먹었다. 산업 도시는 공동화(空洞化)를 경험했다. 하지만 육체노동자의 61%, 화이트칼라의 73%가 여전히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있다. 노동자교육연맹(ABF)가 전역에 존재한다. (현재는 주로 취미 과정이나 외국어 교육을 제공하지만.) 1982년 스웨덴 유권자의 60%가 자신이 정당의 식별자(identifier)라고 인식했지만, 이제는 27%로 감소했다. 최근 선거에서 정당선호를 바꾼 사람이 1956년에 11%였으나, 2018년에 40%로 증가했다.
 
사민당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지지가 침식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의 우파적 전환 이후다. 1982년에서 1991년 사이에 노동자계급의 투표가 70%에서 57%로 하락했다. 당시의 수혜자는 신자유주의적 포퓰리즘 정당, ‘신민주당’이었다. 사민당에 대한 지지는 1994년에 잠시 회복되었으나, 2006년에 다시금 하락했다. (이때 온건당은 고용문제에 초점을 맞추었고, 취업자와 실업자의 격차를 확대하고자 했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온건당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지지가 두 배로 증가했다.)
 
2018년, 사민당은 노동자계급 중에서 1/3 미만의 지지를 받았다. 이 선거는 스웨덴 역사에서 처음으로 노동자계급 투표자의 다수가 우파 정당에 투표한 선거가 되었다.
 
 
이주의 정치
 
 
국제이주는 유럽에서 특정한 이슈 집합을 형성했다. 유럽이 [유럽 외부로 이주자를 내보내는] 이주의 물결을 지배할 때는 ‘이주자 통합’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다. 유럽의 남쪽 후배지[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미국이 주도한 일련의 전쟁이 새로운 이주의 물결을 가속화했다. 유럽 유권자에게 사회적 권리, 사회적 정의는 항상 민족적 범위에서만 통용되는 것이었다.
 
과거, 거의 어디에나 존재하는 인종주의 속에서, 유럽인이 정착한 국가의 노동자운동은 “전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백인의 남아공을 위하여”(1922년 남아공의 전투적 광부들의 파업), “오스트레일리아를 백인의 것으로”(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강령)와 같은 슬로건을 자랑스럽게 제시했다. 공식적으로는 ‘포스트-인종주의’적인 시대에, 유럽의 운동은 국경 문을 두드리는 가난한 이주자 대중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현재 스웨덴 노동조합은 노동이주를 오직 예외적으로만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웨덴 노동조합은 2015년에 채택한 난민에 대한 더 제한적인 정책을 지지한다. (여전히 망명의 권리를 지지하기는 한다.) 그들의 가장 큰 우려는 유럽연합의 기업이 저임금 노동력을 도입하는 것이다. 지도부는 스웨덴 민주당에 반대하는 캠페인에 적극적이며 (하지만 대규모 산업현장 외부에서 그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일부 노동조합은 조합원이 어떤 지위에 있건 간에 스웨덴 민주당에 입당하는 것을 금지했다.
 
선거일에 유권자에게 가장 중요한 네 가지 이슈는 보건의료, 교육, 젠더평등, 사회복지였다. 법과 질서, 노인 보살핌, 경제는 하위를 차지했고, 난민과 이주는 목록의 아주 아래에 있었다. (스웨덴 텔레비전 출구조사 결과.)
 
사민당은 간신히 유권자의 우선사항을 이주에 대한 초점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복지는 사민당에서 유리한 쟁점이 아니었다. 스웨덴은 영국의 토리당 정부에 비견할 만큼 긴축체제에 종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인구고령화에 따른 수요의 증가에 부합할 만큼 [보건의료에 대한] 자원이 부족했다. 스웨덴 최북단은 전통적으로 사민당과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높았는데, 이 지역에서 지역수준의 보건의료 정당이 최대세력으로 성장했다. 스웨덴 민주당은 이 이슈를 활용하여, 난민 지원을 위해 예산을 지출해서 보건의료를 위한 자원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사민주의의 위기에 대한 검토는 이러한 도전에 대한 사민당의 적응력이나, 새로운 좌파의 부상을 위한 공간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적응력은 경제적, 사회문화적, 정치적 차원에서 검토해야 한다. 경제적 측면은 세계 경제체계에서 스웨덴의 위치와 관련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스웨덴은 다른 북서부 유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위치에 서있다. 비록 과거에는 날카로운 장점이 있었으나 (즉 평등주의, 고율의 세금, 강력한 노동조합,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는 개방경제 등등) 현재에는 무디어졌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최근에 반달리즘[문명파괴]이 존재하나, 스웨덴은 여전히 개혁의 유산을 지니고 있다. 대규모 이주가 스웨덴의 노동시장에 압력을 가하고 있지만, 스웨덴은 국제기준에 따라 잘 대처하고 있다. 외국 태생 남성의 고용율은 78.4%로, 유럽연합의 (국내 태생, 외국 태생) 남성의 평균고용률 67.4%보다 높다. 외국 태생 여성의 고용률은 67.4%로, 유럽연합의 남녀 고용률과 같다.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보편주의와 국제연대에 대한 전후의 지향이 여전히 존재하고, 따라서 외국인혐오적 우파 연정의 구성을 더 어렵게 한다. (반면 다른 세 개의 노르딕 국가는 그와 같은 연정이 구성된 경험이 있다.)
 
스웨덴 사민당이 정당체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다른 유럽의 사민당에 비해 훨씬 더 우호적이다. 스웨덴의 부르주아 정당은 소규모 우파 정당들로 분할되어 있다. 사민당은 강력한 노동조합 운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좌파의 재편?
 
 
스웨덴 사민주의가 깊은 어려움에 빠져있지만, 사민당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며, 선거 후 다시금 지지율이 30% 수준으로 회복했다. (즉 사민당의 최종적 위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주류 사민주의의 재생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민당에 대한] 좌파적 대안이 부상할 공간이 존재하는가?
 
몇몇 국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민주의의 위기는 새로운 좌파세력의 부상으로 보충될 수도 있다. 스웨덴 좌파당은 2018년에 완만하게 성장했는데, 2.3%에서 8%로 증가했다. 이제 좌파당은 스웨덴의 세 개 대도시에서 12-14%의 득표를 해, 그 도시에서 중간규모 정당이 되었다. 좌파당은 괜찮은 좌파 사민주의 세력이며, 성실한 지방의원과 대중적 지도자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지만, 정치적 혁신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재능이나 잠재력은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그 뿌리는 선구적인 유로코뮤니즘 정당에 있다. (1964년 20차 당대회에서 유로코뮤니즘을 도입했다.) 이 당은 과거에 매우 프롤레타리아적이었지만, 현재는 화이트컬러 노동자가 지배하고 있다. 이는 스웨덴에서 1968년 운동의 정치적 유산을 담고 있지만, 최근에 상당 수의 새로운 당원이 유입되었다. 현재 좌파당은 최대 규모의 메이 데이 행진을 조직하고 있다.
 
현재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 의해, 가두에서 동원되는, 느슨하게 구조화된 운동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에너지는 현존 정당의 변형에 투입될 수도 있다. 영국 코빈의 캠페인과 모멘텀[노동당 외곽조직]의 사례처럼. 또한 새로운 종류의 운동 스타일의 정당으로 나갈 수도 있다. 스페인의 포데모스,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a France insoumise)[멜랑숑이 이끄는 정당]의 사례처럼. 독일의 경우, 사라 바겐크네크트가 이끄는 새로운 ‘일어서라’(Aufstehen) 운동의 미래도 아직 열려있다. 이는 좌파 사민주의, 녹색당, 좌파당 지지자들을 포용하며, 초정파적인 통합력을 지향하며 출발했다. 스웨덴의 운동은 독일식의 초정파적 유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스웨덴에는 또 다른 중도좌파 정당을 위한 공간이 없으며, 현존 정당은 엄격하게 제도화되어 있으며,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와 같은 것이 출현할 수 있는 진정한 기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노동당과는 달리, 스웨덴에서 좌파 활동가가 조직의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는 개방된 문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스페인처럼 포데모스가 부상할 수 있는 풀뿌리 운동이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사민당, 좌파당, 환경당을 흔들 수 있는 광범위하고 비정파적인 운동으로, 새로운 에너지, 아이디어, 급진주의를 그들의 피 속에 주입하고, 진보적인 정신을 지닌 인민들에게 희망과 영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의 발전이 우리 시야 내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의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스웨덴의 사회경제적 반개혁이 지속될 것이다. (2018년 10월 11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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