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노동보다 | 2019.06.19

같은 방법으로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임금격차와 임금투쟁에 관한 노동자연대, 변혁당 비판에 답함

한지원(노동자운동연구소)
 
노동자연대와 사회변혁노동자당(이하 변혁당)이 사회진보연대 보고서 <저임금·임금격차에 대한 노동자운동의 접근방향>(이하 보고서)을 비판하는 글을 자신들의 기관지에 실었다. 필자는 노동자연대 강동훈씨와 변혁당 이주영, 백종성씨(이하 존칭 생략)의 비판을 반박하며 임금투쟁과 임금격차에 관한 좌파진영의 오래된 쟁점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시장 안에서 작동하는 최저임금은 임금인상의 급진적 도구가 아니다
 
 
쟁점은 최저임금인상을 결정하면 실제 시장이 목표한 대로 그렇게 움직이는지 여부다. 정부는 이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었던 것 같다. 정부가 채택한 소득주도성장론은 임금상승만큼 사업체의 노동생산성과 매출이 증가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정부는 최저임금을 30% 올리면서도, 인상에 앞서 노동시장 상태를 면밀히 조사하거나 인상 이후 노동시장 변화를 추적 조사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소득주도성장론은 보고서에서 지적하고 있듯 마르크스 경제이론으로 보나, 주류경제학 이론으로 보나 문제가 많다. 현재 정부는 사후약방문식 최저임금보조금(일자리안정자금)을 3년째 이어가고 있는데, 이는 시장 내에서 임금분배율을 높여 성장을 달성한다는 소득주도성장론과도 어긋나는 것이다.
 
두 단체는 “소득주도성장론이 틀렸다고 최저임금 인상을 포기한다는 것은 목욕물 버리려다 애까지 버리는 격”이라며 소득주도성장론과 관계없이 최저임금인상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근거는 여전히 최저임금이 노동자 생계비에 미달한다는 것이다. 사실 필자도 마음 같아서는 최저임금을 노동자 평균임금 수준인 월 300만 원으로 올리자고 주장하고 싶다. 따지자면 최저임금 산정의 기준이 되는 생계비는 자의적으로 측정한 생필품 구매비가 아니라 당대 국민경제에서 노동자 평균소득이어야 옳다. 임금은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비용이고, 노동력 재생산비는 물리적 생존에 필요한 비용이 아니라 평등한 시민으로서 당대 풍요를 충분하게 누릴 수 있는 소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법정 최저임금을 그렇게 올리면 실제 임금이 그만큼 오르느냐이다. 필자는 보고서에서 최저임금노동자가 밀집해 있는 도소매음식숙박업의 임금총액 증가율을 예로 들어 시장에서 최저임금인상이 실제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고 분석했다. 상용직 증가율 둔화, 임시직 증가, 임시직 노동시간의 감소, 최저임금미만율의 상승 등이 원인이었다. 사용자가 인건비 절감에 나섰고, 노동자도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법으로 임금 하한선을 정하는 최저임금제도는 노동시장의 공급과 수요의 법칙을 규제하지 못한다. 그래서 세계적으로도 최저임금제도는 ‘급진적’ 임금인상 도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최소한의 임금 수준을 정하는 데 소극적으로 이용될 뿐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최저임금이 한 나라의 경제정책을 대표한 사례가 없다. 보고서는 OECD 국가들의 2001~17년 최저임금인상률과 1인당 GDP로 측정한 생산성 증가율 사이에 큰 격차가 없다는 점을 보여줬다. 최저임금은 시장의 반작용 앞에 본질적으로 무기력하다. 최저임금제도로 급격한 임금상승을 달성하겠다는 것은 “닭 잡는 칼로 소 잡겠다.”는 격이다.
 
그렇다면 노동자연대나 변혁당은 어떻게 최저임금이 시장을 이겨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백종성은 수요독점 노동시장에서는 최저임금이 올라도 고용이 감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미시경제학 이론을 인용한다. 진보개혁 진영 일부 연구자들도 이 이론을 가끔 인용하는데, 이는 잘못된 이해다. 수요독점 노동시장은 기업이 추가 고용 시 임금을 올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실업자가 존재하지 않는 완전고용 상황, 고립된 탄광촌 같은 노동력 공급이 제한된 상황, 노동자가 직장을 이동하지 않는 경직된 노동시장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이론이다. 2018년 한국 노동시장, 그것도 최저임금 시장에서 적용할 이론이 아니다. 강동훈은 결과와 관계없이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을 내걸고 투쟁하는 과정이 노동자 단결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계급의 단결은 과학적으로 틀려도 도덕적으로만 옳으면 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당연히 아니다. 노동자운동은 요구가 실현될 경우 그것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수진영이 최저임금을 “을끼리의 싸움”으로 왜곡하는 것처럼 반격을 당하고 만다. 마르크스가 왜 ‘과학적’ 사회주의를 강조했는지, “어리석음은 노동자계급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고 말했는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이주용은 고용문제가 발생하면 공공에서 일자리를 만들면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정부 책임론은 좌파진영의 오랜 관성이다.
 
공공의 고용책임론은 재정위기와 공공/민간의 임금격차라는 한국사회 중요한 쟁점을 무시한다. 공공부문 평균 월급을 보자. 2018년 중앙공공기관 560만 원(알리오), 기능직공무원 420만 원(납세자연맹), 지방공기업 380만 원(클린아이)이다. 최저임금은 175만 원, 비정규직 평균임금은 160만 원, 전체노동자 평균임금은 300만 원(고용형태별 임금 및 근로시간)이다. 공공부문 임금이 나라 전체 임금 수준에 비해 이렇게 높다. 혹자는 공공부문은 초임은 낮아 직접 비교하는 것이 적당치 않다고 항변하기도 하는데, 이는 기만이다. 종신고용이 유지되며, 가파르고 긴 호봉상승이 이어지는 공공부문은 진입 이후 평균 이상으로 임금이 상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최저임금 탓에 망한 사업장을 위와 같은 공공부문의 “제대로”된(차별 없는) 일자리로 흡수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300~500만 명(최임위추정)에 달하는 최저임금 영향권 노동자의 숫자를 감안할 때 공공부문 노동자 숫자가 현재보다 두 배 넘게 증가해야 할 것이다. 현재 공공부문 피용자보수가 150조 원에 달하니, 예산도 적어도 연 100조 원 이상 더 필요할 것이다. 조세혁명 수준의 세입 확대가 필요하다. 증세 없이 이런 확장을 했다가는 재정위기로 나라가 파탄나지 않을 수 없다. 공정성도 문제가 될 것이다. 최저임금으로 망하지 않은 사업장 노동자는 오히려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아지니 말이다. 납세자 역차별이란 말이 나올 것이다. 공무원 취업 경쟁과 최근 공공기관 정규직화 과정에서 발생한 노노 갈등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하지만 변혁당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다.
 
필자는 보고서에서 현 최저임금제도는 급격한 임금인상에 부적합하다고 분석했다. 우리가 진정으로 저임금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른 수단을 찾아야 한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은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이론적 전제에서만 작동 가능하다. 일자리 경쟁을 완화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전제 하에, 상대적으로 좋은 일자리를 공급하기 위해 대기업과 공공부문에서 고용을 대폭 증가시켜야 한다. 이는 당연히 이 부분의 고임금을 조정해야만 실현 가능하다. 연대고용을 전제로만 연대임금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경제 상황이다.
 
요약해보자. 두 단체 주장처럼 최저임금은 죄가 없다. 하지만 이 제도를 급격한 임금인상에 사용한 문재인 정부에게는 죄가 있다. 또한 정부 정책에 함께한 노동운동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진정으로 저임금 개선을 원한다면, 그 원인을 직시하면서 조직된 노동이 필요한 곳에 투쟁을 집중해야 한다.
 
 
정규직 양보론?
부분의 손익계산에 주목 말고, 계급적 대차대조표에 주목해야 한다.
 
 
두 단체는 연대고용을 통한 연대임금 정책이 ‘정규직 양보론’이라며 비판한다. 대기업도 조건을 따지지 말고 임금인상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는 그것이 계급적 이해다.
 
그런데 한 번 따져보자. 우리나라에서 임금투쟁을 할 수 있는 노동자가 솔직히 얼마나 되는가? 많지 않다. 자본의 격차를 따라 노조의 격차로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강한 자본 밑에 강한 노조가, 약한 자본 밑에 약한 (무)노조가 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임금교섭은 기업별로 이뤄진다. 그래서 상위소득 노동자의 기업별 임금인상 투쟁은 특별한 정세나 매개가 없는 한 계급 전반을 아우르지 못한다.
 
두 단체는 이런 조건에서도 대기업 정규직 임금투쟁에 일종의 낙수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현실과 다르다. 예로 금속노조 임금인상은 현대차의 수익성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데, 현대차 수익성은 한국 내수경제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으며, 수많은 연구에서 밝히고 있는바, 수출대기업의 내수경제에 대한 낙수효과 역시 크지 않다. 유례없는 최장기간 무역흑자와 내수경제의 부진이나, 제조업 노조 임금투쟁과 관계없이 나날이 커져가는 수출제조업과 도소매음식숙박업 사이 임금격차가 그 방증이다. 공공부문의 임금인상 투쟁도 마찬가지다. 모범사용자로서 정부, 모범적 임금표준으로 공공부문 임금은 이미 현실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모범의 낙수효과가 있었다면, 공공과 민간에 그만큼 차이가 날 수도 없고, 청년들이 공공에 취직하려고 그 난리를 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강동훈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임금 추이 시계열 그래프를 그려놓고, 둘 다 상승하니 낙수효과가 있는 것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생산성 발전에 따라 임금이 상승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대부분의 산업과 기업에서 (실질)임금이 하락할 때는 공황 시기뿐이다. 역설적이지만, 노동자연대가 그려놓은 그래프의 기울기를 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오히려 확인할 수 있다.
 
노동자연대가 인용한 자료는 자료출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대중소업체 임금비교가 가능한 노동부 사업체노동력 조사 자료로 비슷한 그래프를 그려보면, 실제 상황은 위와 같다. 노동자연대 그래프와 직접 비교를 위해 명목임금을 그대로 사용하면, 대,중소업체 임금격차는 위와 같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필자는 보고서에서 1986~2016년 임금 격차 추이를 분석하면서, 임금 격차의 핵심 원인을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본집약도 격차라고 지적했다. 1987년 이후 수출제조업과 대기업 자본가들은 노동조합 임금인상투쟁에 대응해 노동을 절약하는(노동생산성을 올리는) 자본투자를 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노동조합 조직률과 투쟁이 약했던 내수서비스와 중소기업에서는 자본투자 대신 저임금을 이용해 사업을 지속해갔다. 이렇게 형성된 자본투자 격차는 지금까지 이어져 제조업/내수서비스 간, 대기업/중소기업 간 엄청난 노동생산성 격차로 고착화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으로 해고된 노동자가 내수서비스업에 영세자영업자로 진입하고, 또 노동시장유연화로 아웃소싱이 이전보다 자유로워지면서, 자본집약도 격차와 노동생산성 격차는 더 크게 벌어졌다. 오늘날 임금격차는 사업주의 악랄함의 차이가 아니다. 노동생산성으로 표현되는 사업주 능력의 차이다.
 
제조업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자본격차와 임금격차 추이
(출처: 한지원, 저임금·임금격차에 대한 노동자운동의 접근방향)
 
변혁당이 주장하는 대기업 사내유보금을 이용하자는 주장은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이 못 된다. 변혁당은 사내유보금을 노동자 모두가 꺼내 쓸 수 있다고 가정하거나, 또는 아예 사내유보금을 모두 환수하자고 주장하는데, 사내유보금 상당부분은 기업의 유형자산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기업 밖으로 이전이 불가능하고, 사내유보금 환수 즉, 국유화는 현실가능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정부의 실패’ 또는 노동자운동의 경영 역량 문제를 간과하는 것이다. 사내유보금을 이용하자는 주장은 현실성도 없고, 현실화되어도 문제가 된다.
 
요컨대, 두 단체의 주장은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적 과오를 반복하자는 것에 불과하다. 사실 투쟁의 강도로 따지면 1990년대가 현재보다 덜 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0년대에도 이미 임금 격차는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방법으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임금투쟁의 강도가 격차를 좁히지 않는다. 현재 구조에서 대기업, 공공부문의 기업별 임금인상 투쟁은 결코 자본의 격차를 좁히지 못한다. 필자가 보고서에서 주장한 연대고용을 전제한 연대임금은 변화된 조건에서 저임금-임금격차 조건을 고려해 계급적 단결의 방법을 찾자는 제안이었다.
 
사회변혁을 위한 노동자의 연대,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을 고려해야
 
강동훈은 필자가 인용한 마르크스의 글을 반박한다. 그는 마르크스의 <임금, 가격, 이윤>의 마지막 문장 “임금 제도의 궁극적 철폐를 위한 지렛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실패한다.”가 임금 인상 투쟁을 평가절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임금 인상 투쟁을 무시하는 존 웨스턴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려고”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이런 해석은 <임금, 가격, 이윤>에 대한 피상적 이해일 뿐만 아니라 <자본>을 무시하는 주장이다.
 
마르크스는 오언주의자 웨스턴의 임금투쟁 무효론과 영국 노동조합의 임금투쟁 몰입을 동시에 비판하기 위해 팸플릿을 썼다. 마르크스가 글을 썼던 1860년대는 이른바 엥겔스의 휴지기(Engels’ Pause) 막바지였다. 산업혁명으로 엄청나게 생산성이 발전하는 상태에서도 노동자 임금은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었다. 즉, 임금인상을 통해 생산성을 추격해야만 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웨스턴 등이 주장하던 임금기금론은 멜서스나 리카도 식의 곡물경제를 전제했기 때문에 생산성 발전이 분배에 미치는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는 팸플릿 후반부에서 경제투쟁은 임금제도라는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한 투쟁이라고 썼다. 임금투쟁의 한계를 명확히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팸플릿을 “자신의 조직된 힘을 노동자 계급의 종국적 해방을 위한, 말하자면 임금 제도의 궁극적 철폐를 위한 지렛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실패한다.”고 끝맺은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결론이었다.
 
마르크스의 주장을 좀 더 잘 이해하려면 <자본>에서 임금을 어떻게 다뤘는지 보면 된다. 그는 임금인상(또는 임금분배율 상승)이 장기적으로 이윤율 동역학에 제한된다고 분석했다. 노동생산성이 불변인 상황에서 임금이 상승하면, “이윤율 하락→투자 감소→산업예비군증가→일자리 경쟁→임금 하락→이윤율 회복”이라는 동역학이 작동한다.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것이 구조이고, 자본주의 구조는 이윤율 동역학이다. 노동자연대와 변혁당의 주장은 실은 임금 수준이 오로지 투쟁의 강도에 따라 결정된다고 전제하는 것에서부터 파생된다. 하지만 자본주의 이윤율 동역학 안에서 임금이 ‘장기적’으로 상승하려면, 노동생산성 상승이 동반되어야만 한다. 노동생산성에 비례해 임금이 상승할 경우 이윤율은 변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이윤율의 장기적 변화는 임금인상-이윤압박이 아니라 노동을 절약하고 자본을 소모하는 편향적 기술진보의 결과다.
 
임금인상으로 이윤율이 하락하는 것은 ‘단기적’ 경기변동에서만 유효하다. 케인스는 이를 명목임금의 하방경직성이라고 표현했다. 경기하강 시기 임금이 적절하게 하락하지 않으면서 노동력 가격이 완전고용을 달성할 수 없는 수준에 머무르면, 실업과 유효수요의 부족으로 경기하강이 오랫동안 이어진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자본은 이윤율이 하락할 때 노동강도를 높이거나, 임금을 노동생산성 이하로 억제하는 식으로 임금분배율을 하락시키기도 한다. 자본에 의한 계급투쟁이다. 세계적으로 보면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대표적 사례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가 그랬다. 노동자의 저항이 약한 나라일수록 임금분배율 하락은 더 크고 빠르게 이뤄졌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임금분배율의 변화가 장기 이윤율 변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보고서에도 나와 있지만, 노동 절약을 위한 자본소모의 정도, 또는 자본집약도 대비 노동생산성인 자본생산성이 이윤율 변화에 결정적 변수다.
 
이러한 이윤율 동역학 속에서 임금투쟁이 계급적 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은 임금투쟁이 노동자 간 경쟁을 완화할 수 있을 때다. 마르크스는 시장이 노동자를 지배하는 핵심 메커니즘을 임금수준이 아니라 노동자 간의 경쟁으로 봤다. 취업자와 실업자가 일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노동시장의 ‘수요-공급 법칙’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런 경쟁은 비정규직이라는 반실업자-반취업자의 확대로 더욱 치열해졌다. 마르크스 ‘자본’1권의 결론은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인데, 이 축적법칙의 두 절은 “상대적 과잉인구 또는 산업예비군의 누진적 생산”과 “상대적 과잉인구의 여러 존재형태,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이다. 임금만 보면서 ‘정규직 양보론’이란 비판을 반복하는 노동자연대와 변혁당은 마르크스가 ‘자본’의 결론에서 왜 과잉인구(또는 산업예비군)를 강조했는지 숙고해봐야 할 것이다.
 
사회진보연대 보고서는 실업이 증가하고, 임금격차가 커지며, 노동자끼리의 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정세에 주목했다. 실업자가 증가하면서 생존권 위협과 일자리 경쟁이 심화되고, 사회관계 전반에 스트레스가 급증한다. 이 고통은 일자리를 먼저 잃는 노동자에게, 경쟁에 취약한 노동자에게, 사회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에게 더욱 끔찍하다. 마르크스는 이런 노동자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의 증가를 궁핍화(misery) 경향이라고 표현했다. 필자는 이런 정세를 직시하면서, 오늘날 노동자운동에 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경쟁을 완화하며 단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라 제안했다. 바로 연대고용-연대임금 전략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사회변혁을 위한 노동자의 연대를 만드는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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