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정세초점 | 2020.03.13

2020년 세계 여성의 날을 돌아보며

사회진보연대

광장에 선 여성들

 
세계 여성의 날인 지난 3월 8일, 세계 곳곳에서 불평등과 폭력에 맞서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프랑스, 스페인, 독일,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홍콩, 캐나다, 페루, 브라질, 콜롬비아, 카메룬, 수단, 파키스탄, 터키 등 각국의 여성들이 집회와 행진에 참여했다. 참가자들은 성차별적인 법 개정을 요구하거나 정치인의 여성 비하 발언을 비판하는 등 다양한 구호를 외치며 광장에 나섰다.
 
최근 몇 년 동안 여성들의 운동이 광범위하게 조직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특히 활발한 저항의 움직임이 존재했다. 2015년 아르헨티나에서 임신한 10대 여성이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니우나메노스’(#NiUnaMenos, ‘한 명도 잃을 수 없다’) 운동은 아르헨티나를 넘어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여성폭력 문제뿐 아니라 각국의 긴축 정책, 임신중지에 대한 규제와 처벌에 반대하는 움직임으로 발전했다. 올해 여성의 날에도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수십만~수백만 명 규모의 집회가 열리며 뜨거운 열기가 이어졌다.
 
 
가장 폭발적인 운동의 성장이 확인된 곳은 칠레와 멕시코다. 칠레의 여성의 날 집회는 작년 10월 지하철 요금 인상에 반대하며 시작된 투쟁의 연장 선상에서 진행됐다. 수도 산티아고의 여성의 날 집회에는 2백만 명의 여성이 모였다. 이는 주최 측이 예상했던 규모의 두 배에 해당한다. 3월 9일에는 여성 총파업과 행진도 이어졌다. 칠레 여성들의 주요한 구호는 ‘삶의 불안정성에 맞서자’는 것이다. 삶의 불안정성이란 불안정한 일자리, 성별임금격차, 여성살해, 임신중지 금지, 성소수자 권리 침해 등 여성들이 겪는 수많은 문제들을 포괄하는 것이다.
 
멕시코에서는 전국적인 여성 파업이 조직되었다. 지난해 멕시코에서는 3825명의 여성이 살해됐다. 이는 전년도보다 7% 늘어난 숫자다. 또한 몇몇 끔찍한 여성 살해 사건들이 계기가 되어, 여성들은 ‘우리, 여성이 없는 날’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현실에 저항하는 파업에 나섰다. 멕시코 언론에 따르면 3월 8일 당일 3640만 명의 여성이 파업에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은행, 대형마트, 영화관, 식당 등이 평소보다 훨씬 적은 인원으로 운영되거나 아예 문을 닫았다.
 

재생산 권리를 둘러싼 싸움

 
‘임신중지 합법화’ 또는 ‘낙태죄 폐지’ 요구도 올해 여성의 날의 핵심 요구 중 하나였다. 아르헨티나와 콜롬비아가 대표적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초록색 스카프를 상징으로 하는 임신중지 합법화 운동이 수년째 이어지고 있다. 2018년에는 운동의 성과로 임신중지 합법화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지만, 상원에서 부결되며 좌절되었다. 그런데 올해 3월 1일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조만간 임신중지 합법화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밝히며 다시금 변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콜롬비아에서는 3월 3일 헌법재판소가 임신중지를 엄격히 금지하는 현행 규제를 유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 결정을 전후로 콜롬비아에서도 임신중지 합법화 운동이 활발히 조직되었다. 여성의 날에도 수도 보고타에서 초록색 스카프를 매거나 든 여성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미 임신중지를 허용하고 있는 나라에서도 보수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이를 되돌리려는 공격이 벌어지기도 한다. 미국에서 최초로 임신중지를 합법화했던 1973년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재검토하는 안이 현재 미 연방대법원에서 심의 중이다. 지난 1월 24일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낙태 반대 집회에 참석해 연설하기도 했다.
 
‘여성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임신과 출산을 여성 스스로 통제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단순한 명제는 여성 운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진전이었다. 여성의 성욕과 재생산의 능력이 국가 또는 남성의 것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의 것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둘러싼 싸움은 현재진행형이다.
 

‘낙태죄’ 폐지 이후를 상상하라

 
한국에서는 2월 중순경부터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민주노총, 여성단체연합, 3시스탑 등에서 준비했던 여성의 날 오프라인 행사는 모두 진행되지 못했으며 온라인 실천이나 입장 발표로 대체되었다. 그렇지만 한국의 여성들 역시 세계 각국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불평등, 빈곤, 폭력에 처해 있기에, 현실에 맞서는 싸움을 조직해 나갈 것이다.
 
그중에서도 올해 집중해야 할 과제는 바로 ‘낙태죄’ 폐지 이후, 여성의 성과 재생산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작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여성의 임신중지를 금지하고 처벌하는 형법 조항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 결정에 따르면 입법부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기존의 법을 대체할 법안을 마련해야 하지만, 헌법재판소 결정으로부터 1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부와 국회는 관련한 논의를 방기하고 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은 운동의 중요한 성과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형법상의 낙태 금지 조항이 사라지는 것으로 여성의 성과 재생산의 권리가 저절로 보장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은 여성의 날 성명을 통해 ▲국회와 정부는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방향성을 분명히 하고, 법 개정에 관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할 것, ▲보건복지부와 식약처는 유산유도제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것,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보건의료 체계 마련과 의료인 교육훈련을 시행할 것, ▲피임에 대한 정보 제공 및 보험 적용을 확대하고, 상호 존중하는 관계, 성에 대한 가치관과 권리, 성 건강에 관한 구체적인 이해를 제공하는 포괄적 성교육을 시행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페미니즘 운동,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오늘날 페미니즘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그중에서도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중동의 움직임은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정치위기 속에서 주변부 국가의 여성들이 심각한 빈곤과 폭력에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여성에 대한 오래된 편견·차별과 맞물려 더욱 극단적으로 표현된다.
 
게다가 코로나19로 인해 세계 경제가 침체와 구조조정 국면으로 빨려 들어가리라 예상되는 상황이다. 불안정한 노동과 저임금, 가족에 대한 돌봄 부담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은 가중될 것이다. 구로 콜센터 집단감염 사태처럼 감염이 걱정되는데도 열악한 조건의 노동을 멈출 수 없는 이들, 개학 연기나 휴업으로 인해 당장 생계비와 고용이 불안한 이들의 많은 숫자가 여성노동자다.
 
또한 경제위기와 인구 감소는 전세계 노동자 민중이 직면한 공통의 문제이다. 여성들은 한편으로는 유연한 노동력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의 유지를 위한 가사노동과 출산·양육의 압박이라는 곤란에 처해 있다. 사회운동은 경제위기에 맞선 여성들의 저항에 연대하고, 2020년 '낙태죄' 전면 비범죄화 및 재생산 권리 쟁취를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낙태죄' 폐지 이후의 세계는 저항하는 여성들과 사회운동의 만남 속에서 비로소 현실이 될 것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움직임은 앞으로도 다양한 형태로 분출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그 해법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여성이 겪는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 시대가 마주하고 있는 다른 문제들-고용불안과 저임금 노동의 확대, 약자에 대한 혐오와 폭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여성들의 운동은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간의 이권 다툼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끔찍한 폭력의 가해자들을 찾아 강하게 처벌하는 것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여성의 권리가 무엇인지 밝히고 연대를 통해 공동의 해법을 모색하는 운동, 흔들리고 무너지는 지금의 체제에 맞서는 변혁적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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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은 올해 3월 8일 여성의날부터 헌법불합치 결정 1주년인 4월 11일까지를 캠페인 주간으로 설정했다. 아래의 링크를 통해 관련한 퀴즈, 성명, 카드뉴스, 영상교육 자료 등을 확인할 수 있다.
 
1) 임신중지 비범죄화 퀴즈: “나의 임신중지 상식은 몇 점?”
 
2) 성명: “‘낙태죄’ 헌법불합치를 넘어 전면비범죄화로! 여성의 임신중지 권리가 보장되는 2020년을 만들어 나가자!”
 
2) 카드뉴스: “낙태죄 헌법불합치 1년, 응답하라0411”
 
4) 민주노총&모낙폐 공동제작 영상교육 자료: ‘성과 재생산의 권리로 새로 쓰는 낙태죄 폐지 이후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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