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노동보다 | 2020.11.04

(전태일50) ③ 재벌체제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사회진보연대
(전태일 이후의 노동‧경제 50년 -우리가 풀지 못한 역사적 난제와 노동자운동의 현재적 과제) 소책자의 글들을 네 차례에 걸쳐 온라인 버전으로 공개합니다.
 
재벌 총수들을 모아놓으면 조폭 뺨치는 '별들의 잔치'가 된다. 재벌 총수 중 감옥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소수일 정도다. 정경유착과 노동탄압의 역사는 1970년대부터 본격화됐다.
 
전태일 열사가 일했던 봉제공장은 가장 열악한 일터였지만 동시에 1970년대 한국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 초 스웨터, 면직물 같은 섬유제품의 수출 비중은 40~50% 정도로 높았고,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30~40%로 컸습니다. 화학, 금속, 기계류의 경우 수출 비중은 10~20%,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20%도 되지 않았습니다. 노동집약적 경공업에서 여성 노동자를 쥐어짜 중화학공업 육성에 쏟아붓고 있었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하지만 이런 희생을 배경으로 성장한 수출 기업은 과실을 노동자들과 나누지 않았습니다. 특히 중화학공업 계열사를 거느리고 성장한 수출 재벌은 부의 독점, 부패, 무능으로 50년간 한국경제에 여러 문제를 일으킵니다.
 
재벌 1세대는 해방 이후 정경유착으로 적산을 헐값에 불하받아 부를 키웠습니다. 그리고 공짜에 가까운 원조물자를 가공해 큰돈을 번 후, 그 돈으로 다른 기업들을 인수해 계열사를 늘렸습니다. 특히 재벌이 오늘날의 형태를 갖춘 것은 1970년대 박정희의 중화학공업화 정책이 큰 영향을 미쳤는데요. 군수 중화학공업을 육성한 정부는 중화학공업 기업에는 저리로 특혜 대출을 제공했고, 재벌들은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 묻지마 투자로 중화학공업 계열사를 늘렸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당연히 대출받은 일부를 정치자금으로 제공하는 정경유착도 심해졌는데요.
 
1980년대 중반까지 재벌그룹의 중화학공업 기업들은 선진국 기술 모방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기업이 잘 굴러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계 경제의 침체와 일본기업과의 경쟁력 격차로 좀처럼 정상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중화학공업 계열사들이 정상적으로 가동된 것은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 이후였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보는 재벌의 규모가 이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3저 호황으로 위기를 극복한 후 재벌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문어발식 확장을 재개했습니다. 재벌들이 이때 특히 집중한 업종은 금융업이었습니다. 그리고 재벌들은 금융계열사를 통해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했는데요. 재벌들은 이 돈으로 더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그 결과 1996년 30대 재벌의 계열사는 총 767개 이를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재벌들의 사업 확장은 수익성 하락을 오히려 가속했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부실 투자였을 뿐이었는데요. 재벌의 막무가내 확장이 정점에 달한 1994년부터는 단기외채도 급증했습니다. 1993년 110억 달러에 불과했던 단기외채가 1994년 1년 만에 200억 달러로 증가하더니 1996년에는 400억 달러까지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졌습니다.
 
외환위기는 위기의 책임자인 재벌들에게 재도약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 덕분이었습니다. 정부는 부실 재벌을 해체해 우량 계열사들을 다른 재벌과 초국적기업에게 넘겼고, 재벌 간 빅딜로 소수 재벌의 산업 지배력을 심화시켰으며, 부실채권 정리로 재벌의 부채를 떠안았고, 재벌들이 쉽게 임금과 고용을 줄일 수 있도록 노동시장규제도 완화했으며, 심지어 족벌경영체제를 안정시켜 줬습니다.
 
이런 식으로 외환위기에 살아남은 재벌들은 2000년대 비약적으로 성장합니다. 2001~17년 기간 30대 기업집단의 자산규모는 440조 원에서 1,740조 원으로 4배 가까이 커졌습니다. 다만, 자본 규모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고용은 많이 늘지 않았는데요.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고, 국내 생산도 대대적으로 외주화한 결과였습니다. 1995년 30대 기업집단의 전체 취업자 대비 종사자 수는 4.8%였는데 2017년에는 경제적 비중이 엄청나게 커졌음에도 고용 비중은 4.4%로 하락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성장한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경영권 세습은 한국경제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되었습니다. 재벌은 피라미드식 대기업집단을 특정 가문이 경영권 세습을 통해 지배합니다. 능력이 검증되지도 않은 총수 가문의 승계자가 나라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대기업을 경영하는데, 이는 국민 모두를 큰 경제적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더구나 경영권 세습을 위해 기업의 자원을 멋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나라 경제의 효율성에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재벌이 1960~80년대 추격성장 과정에서 긍정적 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양적 성장을 목표로 한 과감한 투자와 총수의 의지로 움직이는 빠른 결정이 선진국을 모방하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재벌은 경영권 세습과 부패로 인해 나라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는 폭탄이기도 했습니다. 1979년 위기, 1997년 국가부도가 대표적이었죠. 더불어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하는 2천 년대의 한국경제에는 위험을 관리하면서 혁신에 도전하고,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지속 가능한 투자를 이어가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세습적 족벌 경영체제로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입니다. 각국의 제도를 비교하는 경제학 연구들은 추격성장 시기의 제도를 혁파하지 못하면 중진국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합니다. 한국의 경우 재벌 지배구조가 그런 혁파되지 못한 추격성장기의 대표적 제도입니다.
 
재벌의 문제점은 기업 내부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정치와 노동시장에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먼저, 재벌이 정치에 미친 폐해는 금권정치입니다. 재벌은 독재정권 하에서는 군부의 폭력에 눌려 정권의 하위파트너로 존재했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선거 정치의 약점을 이용해 역으로 정부와 의회를 금권으로 지배하려 들었습니다. 재선을 위해 돈이 필요한 정치인들에게 비자금을 제공했고, 심지어 재벌 장학생이라 불리는 정치인들을 육성해 개혁, 보수 가리지 않고 대리인으로 심었습니다. 소수 지분으로 거대 기업집단을 지배하는 총수 일가에게 시장 제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유지하는 것은 기업경영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재용과 박근혜가 2015년에 벌인 경영권 승계를 위한 정경유착은 이런 금권정치의 가장 생생한 사례라 하겠습니다.
 
재벌은 모든 방법을 이용해 제도를 포획해야만 하고, 정치권은 재선을 위해 정치자금을 모집할 필요가 있는 한, 금권정치가 사라지기는 어렵습니다. 양자 모두가 금권정치에 유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도가 특권을 위해 이용되면, 공정한 경쟁을 통해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금권정치는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 실패한 개발도상국들의 전형적 특성입니다.
 
금권정치가 재벌과 정치의 의도적 결합이라면,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재벌과 노조의 결합이 만든 의도치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기업별 노조체계로 수렴하면서, 지불능력이 상당한 재벌계열사에서는 임금인상에 성공한 노조가 뿌리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민간 영역에서는 그렇지 못했는데, 재벌에 포획된 정치권이 초기업노조를 억압하며 재벌이 기업별 노조 밖에서 마음껏 착취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벌은 1990년대부터 노조를 회피하기 위해 아웃소싱을 대대적으로 늘리며 무노조 저임금 상태의 노동자를 착취해왔습니다. 1987년 이후의 민주노조 운동은 아쉽게도 이를 뛰어넘을 만큼 유능하게 대처하지는 못했습니다. 재벌 대기업을 경계로 지불능력 격차도 큰데, 여기에 더해 노조 조직률 격차까지 더해졌으니 임금 격차가 벌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족벌경영과 지속해서 커지는 임금‧고용 격차는 2020년대 한국 사회가 반드시 풀어야만 하는 난제입니다. 다만, 문제는 누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느냐인데, 1970년 전태일은 이 문제의 한복판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2020년의 전태일 정신 계승은 바로 재벌과 임금 격차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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