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정세초점 | 2021.01.08

여성단체의 박원순 피소 사실 유출, 무엇을 반성해야 하나

한국여성단체연합, 진상 조사와 함께 운동 전략 근본적으로 쇄신해야

사회진보연대
 
 
2020년 12월 30일, 서울북부지방검찰청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피소 사실 유출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지난해 7월 박 전 시장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시점부터 그가 어떻게 피소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검찰 발표에 의하면 이 사실이 다른 경로가 아니라 사건을 접수한 여성단체로부터 외부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유출 경로는 다음과 같다. 피해자의 변호인(김재련 변호사)이 고소를 앞두고 여성단체 대표(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 대표는 위력 성폭력 사건 대응 경험이 있는 다른 여성단체(한국여성단체연합) 활동가에게 공동 지원이 가능한지 타진했다. 이후 한국여성단체연합 김영순 상임대표가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에게, 남인순 의원이 임순영 당시 서울시 젠더특보에게 관련 정보를 전달하여 박 전 시장이 사건 공론화 계획을 미리 알게 되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사실관계에 따르면 경찰·검찰·청와대 등의 경로를 통해서도 피소 사실이 박 시장에게 유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된다. 하지만 이는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므로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한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무거운 책임 느껴야

 
한국여성단체연합은 12월 30일 성명을 통해 피해자와 공동행동단체에 사과하고, “사건의 존재를 외부에 알린 상임대표를 직무에서 배제했으며, 반성폭력 운동의 원칙과 책무에 대해 고민하고 책임을 다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김 상임대표는 맡고 있던 정부 주요 위원회와 공공기관 위탁직을 모두 내려놓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검찰에 의하면 김 대표와 남 의원 사이의 성폭력 사건 정보 공유는 ‘사적인 친분 관계’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가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법적인 문제를 떠나서 사회적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가해자가 여당 핵심 인물인 ‘권력형 성폭력 사건’ 관련 정보가 여성단체를 통해 여당의 국회의원에게 신속하게 전달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단체 활동가가 여성의 권리에 입각한 사건 해결을 꾀하기보다 해당 사안이 정부 여당에 끼칠 영향을 걱정하고 수습하기 바빴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는 문제다. 따라서 이번 일은 상임대표 개인의 직무 배제나 각종 직위에서의 사임 수준의 조치로 무마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7개 지부뿐 아니라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노동자회 등 총 28개의 여성단체를 회원단체로 두고 있는 단위로서, 한국 사회의 여성운동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크다. 따라서 한국 여성운동의 모순적 지위를 드러낸 이번 사태에 더욱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한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김영순 상임대표가 왜, 어떤 내용으로 남인순 의원과 소통했는지 사실관계를 조사하여 공개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 여당과 여성운동단체의 관계 설정을 성찰하고, 책임 있는 쇄신 방안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정부 여당의 원칙 없는 행보

 
문재인 정부는 임기 내내 ‘내로남불’ 식의 진영 논리에 따른 무원칙한 정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는 페미니즘 사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성 문제에 입장이나 원칙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 여론을 관리하는 수준의 기만적인 대응을 해 왔다. 후보 시절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공언하던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 후에도 종종 이러한 이미지를 활용해 왔지만, 막상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할 수 있는 갈등적인 사안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박원순 전 서울시장 등 여권 주요 광역단체장의 성폭력 폭로 사건이 대표적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건의 경우, 사건이 공론화되기 전에 박 시장 스스로 죽음을 택하면서 여권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피해자에 대한 의심, 신상 털기, 인신공격이 심각한 수준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정부에서는 어떠한 책임 있는 발언도 나오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은 연이은 광역단체장의 성폭력 사건에도 불구하고 ‘선출직 공직자가 부정부패 등 중대한 잘못으로 직위를 상실해 재보궐 선거를 하는 경우 후보자를 추천하지 않는다’는 당헌을 개정하면서까지 보궐 선거 출마를 공식화하는 뻔뻔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이번 피소 사실 유출에 대한 남인순 의원의 해명은 더욱 부끄러운 수준이다. 검찰 수사 결과가 발표된 뒤 5일 간의 침묵을 깨고 남 의원이 밝힌 입장은 “피소사실 유출은 안 했다”는 것이었다. 본인은 당시에 피소 여부를 알지 못했으며, 사건 관련 정보를 서울시 젠더특보에게 공유한 것이 아니라 불미스러운 일이 존재하는지 물어봤을 뿐이라는 것이다. 남 의원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이러한 연락을 통해 박 전 시장에게 성폭력 사건 공론화의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면, 피해자 및 여성운동 활동가들에게 사죄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중요치 않은 정보를 들먹이며 변명을 늘어놓는 모습은 남 의원이 여성운동단체 대표 출신 국회의원이라는 사실을 무색하게 했다.
 
정부 여당이 반복적으로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는 것은 결국 서울시장·부산시장 보궐선거 때문일 것이다. 올해 4월로 예정된 보궐선거는 ‘대선 전초전’으로까지 불리는 중대한 정치 이벤트다. 더불어민주당으로서는 박 전 시장의 성폭력 사건이 주목받거나, 사건에 대한 당 차원의 책임이 부각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데 사활적인 셈이다.
 

여성운동, 문재인 정권과 함께 몰락할 것인가

 
문재인 정권 하에서 여성단체 출신 인물의 정부 부처·위원회 및 여당 국회의원으로의 진출은 활발히 이루어졌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 이러한 정치권 진입이 ‘성주류화 전략’을 통해 옹호되었다면, 그것이 하나의 관행처럼 굳어진 오늘날에는 일말의 운동적 정당성도 사라진 사익 추구 행위로 전락한 것으로 보인다. 단적으로, 남인순 의원의 피소 사실 유출 해명에는 여성운동가로서의 원칙도 자존심도 찾아볼 수 없다.
 
윤미향 국회의원도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과거에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비판했지만, 집권 후에는 합의의 인정도 파기도 재협상도 아닌 모호한 태도로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윤미향 의원은 정의기억연대 전 대표 이력을 내세워 21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객관적 조건을 놓고 보면 위안부 당사자가 ‘윤미향이 운동을 자기 출세에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표출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부와 한배를 타기보다 비판의 각을 세워야 하는 시점은 아닌지, 여당 국회의원 활동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 방안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한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성운동 이력을 활용한 정치인의 사익 추구보다 더 큰 문제는 여성운동이 정부 여당의 진영 논리에 잠식당하는 것이다. 여성단체와 정부 여당이 인적·물적 관계로 깊숙이 얽혀 있는 상황에서 운동이 정권에 비판적 거리를 두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박 전 시장 피소 사실 유출은 여성운동과 권력의 결탁에 관한 우려가 언제든지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태의 발생은 특정 단체에만 영향을 끼치는 문제가 아니라 여성운동, 시민사회운동 전체의 정당성과 존립 기반을 위협하는 일이기에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정부 여당의 위선과 정치적 무책임이 명백히 드러난 지 오래다. 페미니스트라면 박 전 시장 성폭력 사건에 관한 정부 여당과 남인순 의원의 행태를 철저히 비판해야 한다. 또한 그동안의 여성운동 전략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여성운동 이력을 발판 삼아 정치권에 진출하는 관행, 여성운동이 정권의 하위파트너화 되는 경향과 단절해야 한다. 주류 정치에서 페미니즘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불명확한 상태에서 여성운동 출신 인사 몇몇이 주류에 진입하는 것을 환영하고 그들을 옹호하는 것으로 여성운동의 역할이 제한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뼈아프게 돌아봐야 한다. 여성운동이 문재인 정권의 실패와 함께 몰락할 것이 아니라면, 이번 피소 사실 유출을 꼬리 자르기 식으로 정리하지 말고 근본적인 반성과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운동의 원칙과 독립성·자율성을 다시 세우기 위해 치열한 토론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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