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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8호 | 2018.05.30

[건강보험④] 비민주적인 건강보험 정책 결정

보건의료팀
지난 글을 통해 건강보험 재정 문제는 수입과 지출을 조절하는 기술적 문제로만 바라볼 수 없으며, 한국의 경제사회구조 전반의 전망을 둘러싼 문제인 동시에 자본과 노동자 사이에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한국 의료체계의 문제라는 점을 살펴봤다. 또한, 건강보험 재정 위기를 ‘건강보험료 인상’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공급부문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의료체계를 혁신하고 재정에 대한 국가와 기업의 부담을 확대해야 한다는 점도 확인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문재인 케어’는 국가와 기업의 책임을 강화하기는커녕 제약·의료기기·민간의료보험 자본과 대형병원에 수혜를 주는 정책에 불과하다. 근본적인 정책 전환이 없다면 건강보험 재정은 악화되고 민중의 의료비 부담은 늘어날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건강보험 정책 결정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살펴보고, 국민의 목소리를 어떻게 반영할지, 건강보험 보장성은 어떻게 강화할지, 그 개혁의 방향을 검토한다.

건강보험 재정위기를 빌미로 만들어진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건강보험 정책을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구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이하 건정심)다.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르면 건정심은 국민건강보험종합계획을 심의하고 국민이 내는 건강보험료를 결정하며 건강보험이 보장하는 급여의 범위 및 의료기관에 지급하는 건강보험 수가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다. 다른 말로 하면 건정심은 국민건강보험의 수입(보험료)과 지출(급여 범위 및 수가) 전반을 모두 결정한다. 이런 막강한 권한을 가지는 건정심이 민주적으로 국민의 뜻을 반영하면서 운영되고 있을까. 이를 보려면 건정심의 역사와 운영을 살펴봐야 한다.



건정심이 처음부터 건강보험 정책을 모두 결정했던 것은 아니다. 직종별, 사업장별, 지역별로 만들어졌던 건강보험조합들이 통합된 단일보험으로 국민건강보험이 출범하면서 <국민건강보험법>이 제정된 것이 1999년이다. 당시 보험료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산하의 ‘재정운영위원회’가, 급여 범위 및 수가는 ‘건강보험심의조정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보건사회부 장관이 결정했다.

그런데 1999~2000년 의약분업 시행 과정에서 정부는 의료계의 반발을 무마하고자 수가를 대폭 인상했고, 그 결과 2001년 건강보험 재정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다. 위기를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2002년 <국민건강보험재정건전화특별법>이 시행되면서 건정심이 만들어졌다. 건정심 신설의 명분은 통합적인 건강보험 정책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진짜 목적은 재정 위기를 보험료 인상으로 무마하는 데 있었다. 건강보험료는 2001~2004년 23.6퍼센트 인상되었지만(국민건강보험공단, <국민건강보험 40년사>, 2017) 같은 기간 건강보험 보장률은 2.9퍼센트 하락했다. (정형선, <비급여 진료비의 문제점과 바람직한 관리방안>, 2012)

건정심은 출발부터 그 근거가 불명확했기 때문에 한시적으로 운영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국민건강보험재정건전화특별법>이 종료된 2006년 이후에도 뚜렷한 이유 없이 <국민건강보험법>에 해당 내용이 반영되면서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국민을 배제하는 그들만의 리그

건정심이 모든 정책을 결정하게 되면서 건강보험공단의 권한은 사실상 사라졌다. 건강보험 재정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건강보험공단은 보험료를 얼마나 징수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건강보험 재정을 어떤 의료행위에 얼마나 사용할 것인지 판단하면서 의료공급자(병원, 제약회사, 의료기기회사 등)와 독자적으로 협상할 수 있어야 한다. 건강보험공단의 의사결정 과정에 실제 보험료를 내는 국민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보험료를 결정하는 건정심 25명 위원 중 건강보험공단은 1명에 불과하다. 급여 범위와 의료수가 역시 건강보험공단이 의료공급자와 일차적으로 협상하기는 하지만, 협상이 결렬될 경우 건정심이 결정한다. 공급자 입장에서는 건강보험공단과의 의료수가 협상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결렬시키고 건정심으로 논의를 가져가게 된다. 실제 2008년 이후 대한의사협회(의협)는 다섯 차례나 의료수가 협상을 결렬시켰다.

건정심의 위원 구성도 공급자에 유리하게 되어 있다. 건정심의 위원 구성을 보면 건강보험공단 1명, 가입자 대표 8명, 의약계 대표 8명, 공익대표 8명으로 표면적으로는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실제 가입자 대표 중 근로자단체가 추천하는 위원은 2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사용자단체 2명(경총, 중소기업중앙회)과 시민단체·소비자단체·농어업인단체·자영업자 단체가 추천하는 위원 4명으로 구성된다.

문제는 이 건정심 위원 결정 권한을 정부가 과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자체로도 문제이기는 하지만, 정부가 권한을 남용하여 전문성이 떨어지거나 타당성과 명분이 낮은 위원 구성을 유도해왔다. 실제 정부는 2010년 가입자 대표에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과 전국농민단체협의회를 배제하고 바른사회시민회의와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로 교체했다. 2016년에는 민주노총, 한국노총, 소비자단체협의회를 배제하고 보건의료노동조합, 의료산업노동조합연맹, 환자단체연합회로 교체했다. 국민을 대표해야 할 가입자 위원을 관변단체로 교체하거나 대표성이 떨어지는 단체로 교체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건강보험료 납부자인 국민의 권익이 반영되기는 매우 어렵다.

[출처: 의학신문]


건강보험 정책 결정 과정에서 국민들은 배제되고 건정심은 최소한의 민주성과 투명성마저 갖추지 못하고 있다. 건정심과 의료수가를 평가하여 건정심 의사결정에 깊숙이 관여하는 전문평가위원회는 회의 자체가 모두 비공개로 열리고 있으며 회의록조차 공개되지 않는다. 특히 전문평가위원회는 의료공급자가 위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가입자단체의 비중은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결국 의료공급자가 받게 될 의료수가를 공급자 스스로 결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다.

건강보험 정책을 바로잡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

정책을 결정하는 제도가 바람직한 정책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필요조건으로 건강보험 정책 결정구조의 개혁 방향을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비대한 건정심의 권한을 축소해야 한다. 재정위기를 핑계로 왜곡되었던 제도를 원래대로 되돌린다는 의미와 더불어 제도 운영의 원리를 바로잡는다는 의미다. 건강보험 재정을 활용해서 이익을 얻는 의료공급자들이 의료수가를 결정함과 동시에 건강보험 재정의 규모, 즉 보험료까지 결정하는 현재의 구조는 바뀌어야 한다. 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재정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의료공급자가 보험료 결정에 관여하는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구체적인 방향은 보험료 결정 권한을 원래대로 건강보험재정운영위원회에 부여하고, 건강보험공단의 수가 협상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

다음으로 정책 결정 과정에 국민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가입자의 참여를 더 폭넓게 보장하는 방향으로 건정심 및 건강보험재정운영위원회를 개편하는 방안과 건정심 위원 선정 과정에 국회가 개입할 수 있도록 하거나, 건강보험에 대한 국회의 재정통제권을 부여하는 방안 등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건정심 및 산하위원회의 민주성과 투명성을 강화하는 제도적 보완장치 역시 중요하다. 건정심, 건강보험재정운영위원회, 전문평가위원회 등 건강보험 정책 관련 기구들의 위원 구성 과정과 근거, 회의 공개 등이 최소한의 조치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점이 있다. 정책 결정 구조를 개혁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서두에 밝혔다시피 건강보험 정책은 자본과 노동자 사이에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격론의 장이다. 형식적인 민주성이 갖춰져도 이해당사자들 사이의 분명한 입장 차이는 해소되지 않는다. 때문에 한국 보건의료시스템의 핵심적인 문제와 해결 전략, 그리고 수반되는 첨예한 이해관계를 어떤 방향으로 조정할지에 따라 문제 해결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이는 정부 정책의 문제이기도 하며 사회운동의 과제이기도 하다.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건강보험 정책 전망과 사회운동의 대응 원칙을 점검하고자 한다.



(본 글은 월간 <오늘보다>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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