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19 여름.1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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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열풍, 어떻게 볼 것인가

김유미 | 사회진보연대 페미니즘팀장

1. 들어가며


2016년 즈음부터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20~30대 여성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유행처럼 번졌다. ‘메갈리아’의 탄생,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 행동, 소라넷 폐지,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인기를 경유하는 그 과정은 매우 갑작스러웠고 이전과는 단절적으로 느껴졌다. 가히 ‘페미니즘 열풍’이라 할 만한 분위기였다. 

여성으로 살면서 마주했던 부당한 경험들을 재해석하며 페미니즘 열풍에 동참한 수많은 여성을 단일한 조직이나 경향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온·오프라인 담론 및 행동 양태를 통해 일정한 경향이 만들어져 온 건 사실이다. 그것의 가장 가시적이고 강력한 형태는 남성 및 기존 사회운동과의 연계를 원칙적으로 거부하는 분리주의인데, ‘워마드’
(메갈리아가 분열되며 만들어진 사이트로, 여성의 인권만을 위한 커뮤니티를 표방), ‘불법 촬영 편파 수사 규탄시위’(이른바 혜화역 시위)가 대표적이다. 지금 한국에서 페미니즘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경향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를 우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들의 입장을 잠정적으로 ‘전투적 여성주의’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전투적’이라는 표현은 문제 해결의 방식으로 매우 공격적·폭력적인 언행을 장려하고 어떤 도덕적 평가도 거부한다는 점을 반영한다. 여성들이 겪는 부당한 상황을 성별을 뒤바꾸어 보여주는 ‘미러링’이 남성 대상 몰래카메라 촬영이나 주변 남성 살인을 모의하는 온라인 게시물로까지 이어지면서 사회적 논란이 일기도 했다. 물론 이는 대부분 조작된 게시물로 밝혀졌다. 하지만 논란이 일 때마다 ‘그동안 남성들이 행한 폭력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주장, 남성보다 여성에게 높은 수준으로 요구되는 도덕성을 버리는 것도 여성을 옥죄는 코르셋을 벗는 과정이라는 주장은 실천 방식에 대한 쟁점을 논의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페미니즘’ 대신 ‘여성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이들이 ▲여성 문제가 다른 사회적 모순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피기보다 ‘여성(문제) 우선주의’ 입장을 강하게 취하는 점, ▲운동의 주체 역시 ‘생물학적 여성’으로 한정하는 점(기본적으로 남성의 참여를 거부, 입장에 따라 트랜스 여성의 참여도 거부)을 반영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가 보장되도록 사회를 바꾸려는 이념이자 운동이었으며 사회운동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다. 그러나 전투적 여성주의적 입장은 피해자로서 여성 집단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체성의 정치’의 성격이 특히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페미니즘 열풍을 분석하며 다음과 같은 관점을 견지하고자 한다. 첫째, 페미니즘 역사와 조류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한다. (전투적 여성주의 경향의 여성들 다수가 스스로 ‘래디컬 페미니스트’ 라고 명명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둘째, 페미니즘이 대중문화 속에서 긍정적인 표상으로 유행하는 현상이나 낙태권·성폭력 등을 이슈로 한 광장 시위는 2008년 이후 여러 국가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이런 세계적 흐름과 한국의 상황을 비교하여 이해한다. 셋째, 경제위기로 인해 빈곤과 불평등이 심해지지만, 불만이 사회변혁운동보다는 포퓰리즘 정치로 수렴하는 현 정세의 특징 속에서 성격과 효과를 살펴본다. 
 


2. 페미니즘의 역사와 쟁점들


1) 페미니즘 역사의 재구성


페미니즘의 역사에 대한 통상적인 설명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여성 참정권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경향의 ‘1세대 페미니즘’과, 1960년대 후반부터 사적 영역에서의 여성 억압, 특히 여성 성욕의 문제를 제기한 급진주의 경향의 ‘2세대 페미니즘’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페미니즘 운동이 변혁운동과는 독자적으로 탄생하고 발전했다는 관념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변혁운동이 고양되던 시기에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논쟁과 실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영국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쉴라 로보쌈은 페미니즘의 기원을 프랑스 혁명과 유토피아 사회주의 페미니즘까지 소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에 참여한 여성들은 혁명 이후의 사회가 시민권을 남성에게만 부여하고 여성의 역할을 가족 내로 한정한 것에 반발했다. 여성에게도 새로운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구성에 참여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19세기 초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은 정치개혁으로 한정되지 않는 생산의 사회화, 남녀관계를 포함한 모든 개인적 관계의 변혁을 사회변혁의 과제로 인식했다. 특히 성욕과 재생산을 둘러싼 ‘성적 차이’라는 문제에 주목하고, 그것을 여성해방 및 사회변혁을 위한 토대로 삼았다.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이 주목했던 ‘성적 차이’와 ‘여성권’이라는 문제의식은 20세기 초 러시아혁명기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시도로 이어진다. 여성 억압의 원인이 ‘가족’에 있다고 인식한 콜론타이는 가사·양육 노동의 사회화를 통해 가족을 변혁하려 했으며, 여성과 남성의 자유결합을 주장했다. 자유결합이란 여성의 경제적 독립, 가사·양육의 사회화, 독신의 자유, 성적으로 해방된 여성 등을 조건으로 하는 여성과 남성의 새로운 관계를 말한다. 콜론타이는 혁명이 그 자체로 여성과 남성의 평등한 관계를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기에 노동자들이 소유욕과 질투심을 지양하는 새로운 관계맺음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2) 급진주의 페미니즘 평가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자기해방과 사회변혁의 결합(“개인적인 것의 정치화”)이 중요하다는 1960년대 미국 신좌파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여 사적 영역으로 치부되었던 가족관계, 성적 억압의 정치적인 성격을 문제시 했다. 이것은 공적 영역에서의 평등을 중심으로 운동했던 1세대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초기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운동이 신좌파 운동과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었다. 여성들만의 독자적 조직은 필요한가, 여성 독자 조직이 원칙의 문제인가 전술적 문제인가, 모든 남성은 적인가 등의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입장과 조직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여성 억압이 ‘가부장제’라는 초역사적인 지배 구조에서 기인하며 다른 어떤 모순과 억압보다 우선한다는 논리가 발전하면서 분리주의적 경향이 강해졌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계급 적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분석을 유비하여 남녀관계를 ‘성간 적대’로 파악했다. 신좌파 운동 조직 남성들의 여성해방에 대한 적대적 태도와 도구주의적인 접근은 페미니즘 운동의 분리를 더욱 촉진했다.

이는 사회변혁에 대한 기각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 중반이 되자 보수주의의 성장 속에서 급진주의는 전반적으로 퇴조했다. 페미니즘에서도 개인적인 의식과 문화의 변화를 강조하는 문화주의 경향이 중심이 되었다. 문화주의 페미니즘은 여성 억압의 원인이 남성의 생물학·심리학적 본성(남성 성욕의 공격성)이라는 본질주의적 견해를 받아들였다. 그 사례로 ‘성폭력’에 주목하며 강간뿐 아니라 성희롱, 포르노그래피까지를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형법을 통한 처벌을 주장했다. 한편 페미니즘 진영 내부에서 계급·인종·성적 지향 등의 차이가 부각되었고, 이성애로부터의 철수(‘정치적 레즈비어니즘’)가 남성 지배와 성욕을 거부하는 정치적 실천과 등치되며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성애자 여성들이 페미니즘 운동과 멀어지거나 자유주의 페미니즘 또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그룹으로 옮겨갔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에는 사회 변혁에 대한 지향이 있었는데 문화주의·분리주의로 변질된 것이 문제일까? 이는 절반만 진실이다. 문화주의·분리주의로의 귀결은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출발부터 지니고 있던 근본적 한계에서 비롯된다. 미국에서 신좌파는 노동자 대중운동과의 관계가 미약했으며, 이론적 기반이 취약한 경험주의적 특징을 지녔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이러한 미국 신좌파 운동의 한계를 고스란히 계승했다.

결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억압적 현실에 대한 ‘저항의 정치’로서 의미가 있었지만, 자기해방의 조건을 사고하고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한 ‘변혁의 정치’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여성억압의 원인을 초역사적인 가부장제 또는 남성의 본질에서 찾으면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현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혁해야 하는지 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실천은 대항문화운동(라이프스타일의 변화)이자 대항폭력운동(성폭력 범위의 확대와 처벌 강화)에 머물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며 보수주의의 반격이 본격화 된다. 신우익은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백래시)’과 함께 가족의 가치를 역설했다. 한편 학계의 페미니스트들은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1990년대부터 여성 내부의 차이를 강조하는 포스트페미니즘이라는 사조를 발전시켰다. 포스트페미니즘은 “단일한 여성(집단)은 없다. 여성 개인만 있을 뿐”, “여성 개개인의 실력과 주체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식의 ‘페미니즘의 종언’ 담론이 되어 대중적으로도 받아들여진다.
 

3) 이탈리아 노조페미니즘 사례


1970~80년대 ‘여성권’과 ‘노동권’을 결합하고자 했던 이탈리아의 페미니즘 운동은 미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즘과는 다른 흐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탈리아는 전통적으로 보수주의의 영향력이 크고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전통이 취약한 나라이지만 1968년을 전후로 상황이 변한다.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1968년 간통죄 폐지, 1970년 이혼 합법화, 1974~75년 낙태 합법화 같은 제도 변화가 이어진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도 1970년대 초반까지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페미니스트 그룹 ‘밀라노여성서점’이 프랑스의 페미니즘 이론을 수입하면서 페미니즘 조류가 급변한다. 당시 프랑스 페미니즘은 미국의 페미니즘과 구분되는 이론적 조류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뤼스 이리가레의 ‘성차의 페미니즘’이 대표적이다. 이리가레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한 반대는 성적 차이를 인식할 수 있는 성별화된 시민권 요구 없이 달성할 수 없다고 보았다. 법조문 속의 중성적 개인은 이미 남성을 기준으로 하는데, 이 기준에 여성을 편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양성을 각각 존중하는 문화를 구축(차이 속의 평등, 평등 속의 차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1970년대 이탈리아 노동자운동에서는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토론 및 제도적 실험이 진행된다. 이탈리아의 3대 노동조합 총연맹은 150시간의 유급·무상 교육을 통해 여성노동자들이 페미니즘 교육을 받을 기회를 마련했고, 이를 통해 ‘여성조정위원회’라는 여성노동자의 초정파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성차의 페미니즘은 이탈리아 공산당에도 영향을 끼쳐, 1979~80년 성폭력 반대법의 입법을 둘러싼 페미니스트들 간의 논쟁에서 이탈리아 공산당의 여성 활동가들은 성폭력이 형법상의 처벌이 아니라 새로운 윤리의 형성으로만 해결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의 확산은 공산당 내 변화를 이끌어냈고, 1986년 이탈리아 공산당은 성적 차이에 대한 이론적 개념 위에서 ‘여성헌장’을 채택했다. 
이탈리아 노조페미니즘의 의의는 단순히 ‘노동조합’이 페미니즘적 시도를 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 운동이 변혁적 노동자운동과의 분리주의를 지양하고 여성노동자들에게 대중적인 교육 및 토론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에 있다. 나아가 형법을 통한 성폭력 문제의 해결을 꾀하기보다 성적 차이의 이론을 기반으로 인간의 권리, 윤리를 새로 쓰려고 했다는 점에도 주목할 수 있다. 
 
 

3. ‘글로벌 페미니즘’과 각국의 사례


1) 글로벌 페미니즘의 구축


수잔 왓킨스는 2018년 초 《뉴레프트 리뷰》에 ‘어떤 페미니즘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글은 2008년 이후 미국, 아르헨티나, 브라질, 중국,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세계 각지에서 분출하고 있는 전투적 페미니즘에 주목한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페미니즘 담론의 확산과 거리 시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까지 모호하다. 

수잔 왓킨스는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의 움직임이 오래된 페미니즘 운동이 부딪혔던 한계에 도전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지금의 ‘글로벌 페미니즘’에 관한 비판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세계적인 페미니즘 정치학의 헤게모니적 형태는 ‘글로벌 페미니즘’이라는 이름하에 일련의 실천, 캠페인, 정책결정, 연구의 집합체로 남아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글로벌 페미니즘의 형성 과정은 1960~70년대 분출했던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에너지를 신자유주의 체제 내부로 통합시키는 과정이었다. 그 작동을 몇 가지로 분류하여 살펴보자. 
 
(1) 차별반대 접근법의 제도화
1920년대 투표권 획득 이후 여성권 운동가가 정치적으로 주변화 되었던 것과 달리 1970년대의 법률적·사회적 성과 이후 미국에서 페미니스트의 요구는 점점 더 제도화되고 문화적으로 통합되었다. 이를 뒷받침한 것은 자유주의적 지배층의 강력한 지원이었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인종이나 성별에 따른)차별은 그 희생자뿐 아니라 경제에도 해를 끼치며, 가장 효율적인 시장은 차별적이지 않은 시장’이라는 논리를 발전시켰으며, 이는 여성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고 동등기회를 요구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입장과 만날 수 있었다. 이러한 입장을 대표하는 것은 전미여성기구(NOW)로 “여성이 미국의 사회 주류에서 완전한 지분을 확보하고 남성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는 것”을 기치로 1966년 창립한 단체다. 

차별 반대라는 페미니스트 전략은 애초에 여성 문제가 아닌 인종 문제의 제도적 해결을 위해 고안되었다. 1970년 닉슨은 ‘적극적 차별시정 조치’를 통해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고용의 기회를 할당하는 동시에, 범죄나 마약은 강력히 단속하는 정책을 시작했다. 차별반대 접근법은 곧 인종을 넘어 여성에 대한 것으로 확대되었고, 신용과 모기지 대출, 고용과 임신출산 휴가, 군대 등 여성을 위한 동등기회 조치는 1970년대 내내 각 부문에서 제도화되었다. 

페미니즘의 후원자 중 최고봉은 포드 재단이다. 포드 재단은 연간 2억 달러의 자선기금을 사회 개혁에 투자했는데, 포드 사에게 주어지는 천문학적 규모의 조세 면제 혜택을 얻기 위해서였다. 재단은 1960년대에 흑인, 라틴계 운동 조직에 수백만 달러를 후원했으며 1970년대 초반 이후로는 페미니스트들의 차별반대 조직과 캠페인에게 기금을 제공했다. “자본주의를 위해 세계를 안전하게 만들자”는 포드 재단 의장 맥조지 번디의 말대로, 이러한 과정은 급진적 변화의 에너지를 차별반대의 틀 내에 있는 법률적 프로젝트와 정치적 로비로 돌리는 것이었다. 전미여성기구와 그 지부들은 엄청난 규모의 현금과 정치적 관계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2) 대학의 ‘교차성 이론’
급진적인 여성 해방의 정신은 한편으로는 학계의 일부에 자리를 잡았다. 포드는 1972년부터 1992년까지 젠더 연구에 자선기금 2200만 달러를 지원하여 대학의 자체 재원을 보충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미국 여성학계의 생산물은 다른 국가와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를 자랑한다. 포드 재단은 1990년대 초반 등장한 ‘교차성 이론’에 적극적인 지원을 보냈다. 교차성 이론은 1989년 미국의 흑인여성 법학자인 킴벌리 크렌셔가 처음으로 고안하고 체계화한 것이다. 한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에는 젠더, 인종, 성적 지향, 계급, 장애, 연령, 종교 등 다양한 억압이 상호교차적으로 작용하기에 이를 복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1990년 버클리대의 여성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트러블』을 통해 ‘남성’, ‘여성’이라는 이항의 범주를 비판하며 동일성의 해체를 주장했다. 
 
(3) 성폭력에 대한 소송 행동주의
페미니즘 정치학이 의회에 의해 길들여지고 학계에서 변형되었다면,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본질주의, 행동주의는 법률의 영역에서 지속되었다. 성차별·성폭력의 범위를 성희롱, 여성에게 적대적인 환경, 임신·출산을 둘러싼 문제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하기 위한 법률 소송이 끊임없이 이어진 것이다. 수잔 왓킨스는 이것을 ‘게릴라 법률주의’ 또는 ‘영구적인 소요의 상태’라고 표현했다. 

이 경향은 페미니스트 법학자 캐서린 맥키넌의 이론에 의해 공식화 되었다. 맥키넌은 젠더 불평등의 근본적인 범주로 ‘섹슈얼리티’를 상정하며, 여성의 인격을 사물로 환원할 때 흥분을 느끼는 남성 성욕을 그 원인으로 보았다. 강간, 구타, 성희롱, 성매매, 포르노그라피 등이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성폭력 소송 과정은 여성에게 우호적으로(여성에게 증명 책임을 지우지 않는 식으로)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새로운 법학은 ‘중립적이지 않다’는 공격을 받겠지만, 이에 대한 맥키넌의 대답은 현존 법률이야말로 남성의 관점을 대변하므로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여성을 성적 피해자로만 규정하는 맥키넌의 입장은 학계에서는 강한 비판을 받았으나, 성희롱을 둘러싼 소송 행동주의와 대학 캠퍼스의 반성폭력 캠페인 속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러한 법률 프로젝트는 정치적·경제적인 변화 요구와는 결합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주류적인 패러다임을 위협하지 않았다. 오히려 법조인들에게 굉장히 매력적인 하나의 ‘돈벌이 시장’을 만들어주었다.
 
(4) 세계적 프로그램의 구축
냉전이 끝난 뒤,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UN 여성대회는 차별반대 접근법에 기반을 둔 ‘성주류화 정책’을 글로벌 페미니즘의 핵심 의제로 선언했다. 이 대회는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 여성을 통합시키는 것을 목표로 경제, 정치, 사회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한 행동 강령을 제시했다. 행동 강령은 정부, 언론, 사법부 등 각 분야에서 여성을 일정 수준(30%) 이상 할당하는 ‘적극적 차별시정 조치’, 소녀들을 위한 리더십과 자존감 향상 훈련, 여성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형사법적 조치 등을 포함했다. 세계 각국의 여성운동은 이러한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한 파트너(NGO화)가 되었다.

베이징 대회로부터 25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젠더 영역에서 수많은 데이터와 연구가 축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데이터는 같은 시기에 진행된 다른 사회경제적 변화는 고려하지 않았다. 이 시기 젠더 평등에서의 진전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치솟는 현실과 함께 진행되었다. 경제적 평등화는 대체로 남성들의 하강 과정이었다.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은 대다수 여성들의 삶에도 파괴적인 영향을 끼쳤다. 제3세계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여성에게 편향적으로 작동했으며, 기업과 정부는 여성 고용을 확대한다는 명분으로 여성 노동력을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에 몰아넣어 활용했다. 사회보장이 축소되면서 재생산 노동에 대한 여성의 부담은 더욱 커졌다. 성주류화 전략은 이런 현실을 은폐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개선되었다는 관념을 유포하는 역할을 했다. 
 

2) 2008년 이후 페미니즘의 흐름: 미국의 사례


(1) 캠퍼스 성폭력 반대 캠페인
2010년대 미국의 대학가에서는 ‘연방민권법 제9조’(미국의 교육 내에서는 누구도 성별에 따른 어떤 배제나 불이익, 차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에 기반을 둔 캠퍼스 내 반성폭력 캠페인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캠페인의 추진력은 위로부터, 정확히 미국 정부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캠퍼스 내 성폭력은 2011년 재선을 앞둔 오바마 캠프가 지지층 결집을 위해 선정한 세 가지 이슈 중 하나였다. (다른 두 이슈는 동성 결혼과 이민자 아동에 대한 것이었다.)

2012년 재선 출마를 공식화 한 오바마 정부는 대학 당국들에게 공개적인 편지를 보내 ‘제9조’의 규제에 새로운 내용을 포함할 것을 요청했다. 캠퍼스 내 성폭력에 관한 조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정부는 ‘성폭력’의 범위를 외모에 대한 언급으로 확대하고 피해자의 ‘원치 않았다’는 증언을 유일한 판단 기준으로 하라고 제안했다. 연간 600만 달러에 달하는 기업의 후원과 정부 보조금을 바탕으로 ‘당신의 제9조를 알라’는 청년 단체가 워싱턴 D.C.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캠페인은 여성 억압에 대한 구조적 원인 분석이 아니라 개인적인 트라우마 개념에 근거를 두었다. 대학 당국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 강력한 규제를 선호했고, 2015년 캘리포니아 주와 뉴욕 주의 입법부는 대학이 ‘명백한 언어적 동의를 받지 않은 성적 행위’를 성범죄로 처리하도록 하는 ‘적극적 동의 법’을 통과시켰다. 
 
(2) 워싱턴 여성행진
2016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는 대다수 언론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트럼프의 승리와 힐러리의 패배라는 결과로 끝났다. 그리고 대통령 취임식 다음 날인 2017년 1월 21일, 트럼프가 보여 온 여성과 이민자에 대한 거침없는 혐오 발언에 항의하고 그 효과를 우려하는 ‘워싱턴 여성행진’이 열렸다. 이 시위는 ‘여성’이 여전히 유의미한 집단적 저항의 상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의 페미니즘 정치학이 놓인 복잡한 지형을 드러냈다. 

민주당의 주요 인사들은 워싱턴 여성행진에서 힐러리의 패배를 페미니즘의 패배와 등치시키며 “모든 페미니스트들은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선에서 힐러리가 저소득층의 박탈감을 헤아리지 못하는 기득권의 상징이기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힐러리의 패배는 신자유주의 시대 글로벌 페미니즘이 취해 온 ‘성주류화 전략’의 실패이자, 사회경제적 불안정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소수자에 대한 인정과 관용을 중심으로 하는 ‘정체성의 정치’의 취약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이 운동은 연예인의 참여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소통을 통한 개인들의 느슨한 연대를 중심으로 표상되며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포스트페미니즘적 성격을 보여주기도 했다. 
 
(3) 미투 운동
2017년 10월 헐리웃의 스타들로부터 시작된 성폭력 폭로 운동인 미투는 정치인과 기업인을 포함하며 각계각층으로 퍼져 나갔다. 이 운동은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고 발화하게 만들었으며, 남성들이 여성들의 경험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도록 이끌었다. 하지만 그러한 여성들의 경험에 정치적 형태를 부여하는 주류적 패러다임은 급진주의 페미니즘, 차별 반대 정책, 형법 정의로 제한되었다. 미투 운동의 결과 유명 인사들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성폭력 피해자 법률지원 재단인 ‘타임스 업’(Time’s up) 역시 여성의 주체성과 결정을 위한 예방 전략이 아니라 사후적인 남성 처벌에 초점을 맞추었다. SNS를 통해 성폭력 경험을 폭로하는 운동의 방식은 캠퍼스 반성폭력 캠페인에서처럼 ‘고발되면 모두 유죄’라는 여론 재판의 효과를 낳았고 이는 종종 개별 남성을 상대로 한 보복성 캠페인이 되었다. 또한 미투 운동은 성폭력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 즉 불안정 노동, 인종화된 성별 고정관념, 이민자의 범죄자화, 주로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친밀한 관계 내 폭력 같은 의제들은 거의 제기하지 않았다. 수잔 왓킨스에 따르면, 미투 운동은 2008년 이후 성폭력에 대항하는 세계 각국의 페미니즘 운동들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흐름이었지만, 국제적 영향력은 훨씬 컸다.
 

3) 2008년 이후 페미니즘의 흐름: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의 사례


(1) 라틴아메리카
아르헨티나에서는 ‘전국 여성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1년에 한 번 학생, 노동자, 활동가들의 대규모 회합이 열린다. 이 모임은 2004년부터 공식 연대체가 되어 성장을 거듭했고, 2014년부터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4만여 명이 모이는 정기적이고 급진적인 집회의 장이 되었다. 2015년 충격적인 여성 살해 사건이 계기가 되어, 25만 명이 모인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포함해 전국의 도시에서 ‘#NiUnaMenos’(한 명도 더 잃을 수 없다)는 슬로건 하에 강력한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는 2016년에도 이어졌으며 그해의 전국 여성 모임에는 10만 명이 참여했다. 이 운동은 또 다른 사건을 계기로 2017년부터 임신중지 합법화로 의제를 확장했으며, 2018년 6월 100만 명이 모인 시위 속에서 합법화 법안이 하원 의회를 통과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 법안은 8월 8일에 상원에서 찬성 31표, 반대 38표, 기권 2표로 부결되었다.)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의 운동은 마크리 정부의 긴축 정책에 반대하는 파업 시위와도 결합되었다. 

아르헨티나만큼 폭발적인 규모는 아니지만 브라질에서도 2015년 ‘페미니스트의 봄’이라 불리는 새로운 페미니즘이 등장했는데, 브라질노동자당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이 탄핵당하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였다. 운동의 정치적 성격은 복합적이었지만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에 대한 성차별주의적 공격에 대한 반대, 의회 내 우파들이 추진하는 반여성적 법안(강간 피해자의 임신중지 불법화, 가족제도의 헌법 내 신성화 등)에 대한 반대 등이 주요 이슈였다. 2016년 6월에는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발생한 10대 소녀에 대한 집단 강간 사건이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NiUnaMenos’ 행진과 연결된 대중시위를 촉발했다. 
 
(2) 유럽
이탈리아의 젊은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아르헨티나의 운동에서 자극을 받아 2016년 11월 ‘#NonUnaDiMeno’(NiUnaMenos와 같은 뜻) 행진을 소집했다. 시위에 참여한 25만 명은 성폭력 문제에 맞서는 동시에 공공의료와 노동자의 생활수준에 대한 렌치 정부의 공격에 항의했다. 2017년에는 100개 이상의 도시에서 #NonUnaDiMeno 위원회가 소집되어 1년여에 걸친 토론을 통해 투쟁의 핵심 내용과 전술을 합의했다. 이들은 성폭력에 대한 형사법적 처벌 대신에 사회적 맥락에 주목했으며, 피해자 정체성에 기반을 둔 전략을 거부하고 여성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스페인에서도 2018년 세계 여성의 날에 500만 명이 모였는데, 이는 ‘분노한 사람들’ 운동, 의료민영화저지 ‘하얀 물결’ 투쟁, 반-퇴거 운동, 페미니즘 운동 등의 성과와 연결되어 있다. 
 
 

4. 한국에서 ‘전투적 여성주의’의 부상


한국의 여성운동과 여성학계는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페미니즘’의 자장 속에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와 민주화의 교차 속에서 여성운동의 주류는 성주류화 전략을 적극 수용하여 정치적·경제적 질서 속에 여성을 편입시키기 위한 제도화에 역량을 쏟았으며, 여성학계의 이론적 자원은 교차성 페미니즘으로 구성되었다. 2018년 한국에서 미투 운동이 벌어졌을 때 많은 페미니스트 전문가들이 ‘적극적 동의 법’ 입법을 포함해서 성폭력에 관한 법적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출했던 것 역시 미국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은 어떨까? 대중문화 속에서 페미니즘의 긍정적 재현, SNS 등 온라인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 소통과 개인들의 시위 참여, 여성혐오·여성살해·성폭력·낙태권 이슈에 대한 주목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의 페미니즘 열풍은 최근 세계 각국에서의 움직임과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한국에서 새로운 페미니스트 행동이 기존의 정치사회운동, 심지어 여성운동과도 거리를 두고 별도의 세력화를 했다는 것, 또한 다른 소수자 정치학과의 연대를 강하게 거부하고 혐오 발언까지도 페미니스트 실천의 일부로 용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글의 서두에 밝혔듯이 이러한 경향을 ‘전투적 여성주의’라 명명하고, 주요한 특징과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특징


(1)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계승과 배타적 ‘여성’ 범주 강조
전투적 여성주의는 급진주의(래디컬) 페미니즘의 입장을 따른다고 자처하고 있으며 그와 유사한 활동 양태를 보인다. 여성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차별과 폭력의 경험을 가시화하여 여성 동일성에 호소하고, 여성 개인의 행동 변화(탈코르셋), 남성에 대한 단죄(미러링) 등 대항문화·대항폭력으로서의 실천에 집중하는 것이다. 여성 억압의 원인에 대해서도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제’를 지적하는데, 여기에 특별히 ‘한남’(한국 남성의 줄임말)의 열등하고 위선적인 행태에 관한 비난이 더해진다. 

사실 1990년대 반성폭력 운동을 포함해 한국의 여성 운동계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상당 부분 받아들여 왔다. 가부장제라는 분석틀, 문화주의적 실천, 성폭력 사건의 폭로와 가해자 처벌 강조 등이 단적인 예다. 그런데도 ‘전투적 여성주의’ 경향이 굳이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소환하는 것은 현재 여성학계의 주류가 여성 범주의 해체와 다양한 소수자성의 인정이라는 입장(이른바 ‘교차성 페미니즘’)을 채택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과 연결된다. 이들은 이러한 경향이 페미니즘을 모든 소수자 정치학과 동일시하면서 여성 인권을 위한 운동이라는 본연의 목적을 변질시켰으며,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계가 여성운동의 단일성과 집중력을 흐린다고 비판한다. 즉, 여성 내부의 차이가 주목받기 이전의 초기 급진주의 페미니즘 운동처럼 ‘여성’이라는 공통의 범주와 그에 따른 문제들을 기반으로 활동하겠다는 의미다.

2018년 이들이 가장 집중했던 사회적 이슈는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과 임신중단 합법화다. 각각 불편한용기와 비웨이브라는 커뮤니티의 주최로 도심에서 수차례의 시위가 열렸으며 현재진행형이다. 시위의 주최 측은 본인들이 어떤 단체와도 무관한 익명의 여성 개인들이라고 주장하며, 남성 및 정치 조직과의 연계 거부를 기치로 내세웠다. 예를 들면 비웨이브의 시위는 ‘남성 참여 금지’, ‘운동권 및 단체 연대 금지’, ‘친목 금지’ 등을 규율로 삼고 있다. 시위의 내용에서는 경찰이나 산부인과 의사, 국회의원의 다수가 남성이라는 점을 문제시하는 등 여성-남성의 대립을 주된 갈등의 축이자 문제의 원인으로 사고하는 모습을 보였다. 
 
(2) 탈정치적 ‘생존 자원’으로서 페미니즘
1980년대 이래 한국 여성운동이 대체로 진보적인 사회운동과 가치관을 공유해온 것과 달리 전투적 여성주의는 여성 문제를 제외한 정치적 입장을 모호하게 남겨두고 있다. 이들은 정치적인 것과의 연계나 세력화를 극도로 거부한다. 나아가 구호나 행동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하는 것에 대해서도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다. 

여성 문제 외에 모든 정치성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한편으로 여성 내부의 정치적 견해 차이를 부각하지 않고 여성 문제 해결에 힘을 집중하기 위한 전술일 것이고, 한편으로는 사회변혁 운동이 대안으로 여겨지지 않는 현 정세의 반영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정치성을 배제하고 여성 대 남성의 대립 구도만 강조하는 것은 사회 변화의 핵심 문제를 건드리지 못하고 운동이 좌충우돌하도록 만든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한 여성 후보 중에서 ‘쓰까(여성 문제를 다른 소수자 문제와 함께 해결하려 하는 입장을 낮추어 일컫는 속어) 페미’라는 이유로 녹색당 신지예 후보를 제외하고 대한애국당 인지연 후보에게 투표한 것이 단적인 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 반대, 게이·트랜스젠더 혐오, 난민 수용 반대 등의 이슈에서 극우 정치세력과 공명하기도 했다.

김보명은 「페미니즘의 재부상, 그 경로와 특징들」(《경제와사회》, 2018.6)이라는 글에서 2015년을 전후해 새롭게 등장한 페미니스트 주체들이 ‘가해자’들에게 폭력의 부당함을 항의하고 설득하기보다 ‘피해자’ 여성들이 가진 문화적 역량을 조직하고 표출하고 행동하는 식의 정치적 방향성을 보이는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성은 구조 변혁이나 대안적 공동체 규범의 마련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이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청년들의 삶의 감각을 반영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지금의 청년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은 저항이나 변혁의 담론이기 이전에 차별, 폭력, 배제, 소외의 시대에 개개인의 생존을 위한 대응, 즉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언어, 자원, 전략”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2) 배경


(1) ‘재생산의 위기’와 청년 세대의 성역할 갈등
‘전투적 여성주의’가 보이는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는 일종의 의도된 대항폭력이다. 따라서 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년 여성들의 취약한 삶의 조건을 살펴야 하며, 동시에 청년 남성들이 너르게 공유하고 있는 여성혐오에 관해서도 다루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IMF 외환위기가 ‘안정된 일자리에 대한 구조조정’을 촉진했다면, 2000년대에는 ‘안정된 일자리로의 진입 불가능성’이 주목받았다. 대중미디어에서 1990년대 후반의 위기가 ‘가장의 위기’로, 2000년대 후반의 위기가 ‘청년의 위기’로 표상되었던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안정된 일자리의 문제는 가족을 둘러싼 갈등으로 이어졌다. 외환위기로 가장이 안정된 일자리에서 해고되자 이혼, 별거 등으로 기존 가족의 해체가 급격히 늘며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반면 안정된 일자리에 진입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 청년 세대는 가족 형성(결혼 또는 출산)을 유보하거나 포기했다.

장경섭은 『내일의 종언? 가족자유주의와 사회재생산 위기』를 통해 한국에서 경제위기가 특히 비혼·만혼, 저출산, 가족 해체, 노인 빈곤 등 가족 구성을 둘러싼 갈등 상황으로 드러나는 것은 사회가 오랜 기간 재생산의 의무와 기능을 가족에게 부여해 왔기 때문이라 분석한다. 이는 사회 재생산의 기본 단위를 개인으로 두고 국가가 그에 필요한 자원(공공 보육 및 돌봄 등의 시스템)을 제공하는 서구의 복지국가와는 명백히 다른 방식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은 공적 영역에서는 전일제 장시간 노동을 당연시하고, 사적 영역에서는 아이나 노인에 대한 돌봄을 개별 가족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떠넘긴 채로 이루어졌다. 가족화된 재생산 노동은 대부분 가족 내 여성의 일이 되었다.

청년 세대에게 ‘재생산의 위기’는 성별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각자의 박탈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청년 남성들은 재생산의 위기를 ‘남성성의 위기’로 체감한다. 남성이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전통적 성역할(데이트 비용 부담, 주거 비용 부담, 가족의 생계 부양 등)을 할 수 없는 자신의 현실에 자조적인 태도를 취하는 동시에, 남성들에게 그런 역할을 요구하는(또는 요구한다고 ‘여겨지는’) 여성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청년 남성들이 느끼는 경제적 박탈감과 절망감은 또래 여성들에 대한 혐오가 되었다. 이러한 혐오는 ‘된장녀’, ‘김치녀’ 등 여성 일반에 대한 유형화와 비난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적 대상화와 극단적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실 2000년대 대부분의 청년세대 담론은 요구되는 성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남성 청년의 입장에서 구성되었다. 반면 최근 『82년생 김지영』, 『며느라기』 등 여성 서사들은 청년세대 담론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 청년들의 삶을 드러내며 너른 공감을 받았다. 

외환위기 이후 기혼 여성들의 노동시장 참여가 증가했다. 남편의 실직 또는 가계 소득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경력단절 기혼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일자리는 대부분 불안정한 저임금 노동이었다. 동시에 그녀들은 한국 사회가 가족의 몫으로 남겨둔 각종 가사·돌봄 노동의 일차적 책임자 역할도 수행해야 했다. 앞 세대 여성들의 삶을 목격한 젊은 비혼 여성들은 여성에게 주어지는 ‘불안정(이차적) 노동’과 ‘가족화된 의무’를 둘 다 수행할 수는 없다는 현실적 판단을 하고 있다. 아예 취직보다 빨리 결혼을 하거나, 반대로 직장 생활을 하는 경우에는 결혼을 연기 또는 기피하는 비율이 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여성들이 맞닥뜨리는 현실은 녹록치 않다. 입직 과정에서부터 시작되는 차별, 직장 내 성희롱, 출산과 육아에 관한 압박 등 넘어야 할 문제가 끝없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한 청년 여성과 남성의 인식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게다가 국가와 청년 남성들은 여성의 이중부담이라는 조건에 눈감은 채 재생산의 위기의 일차적 책임을 청년 여성들의 이기주의에 돌려 왔다. 최근의 페미니즘 열풍과 ‘전투적 여성주의’ 경향은 이러한 왜곡된 인식에 분노한 여성들의 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 
 
(2) 여성운동 전략과 여성의 현실 사이 괴리
한국 여성운동은 유례없이 빠른 제도화를 이루었다고 평가받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여성운동은 제도적으로 열린 공간 안에서의 ‘시민운동’으로 재편되었으며, 각종 법제도 개정과 성평등 정책을 입안하는 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한국 여성운동의 제도화 과정은 ‘글로벌 페미니즘’의 세계적 프로그램의 일부이기도 했다. 1995년 베이징 대회에서 성주류화 전략이 선언된 이래 한국 여성운동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남녀고용평등법(1987), 성폭력특별법(1994), 여성발전기본법(1995), 가정폭력특별법(1998), 남녀차별금지법(1999)의 제정,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설립(1998), 여성정책 전담 기구로서 여성부 설립(2001) 등 일련의 제도 개혁이 굉장히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위로부터의’ 페미니즘 전략은 적지 않은 딜레마와 위기에 직면했다. 페미니즘 정치의 의제는 제도화 과정에서 타협과 후퇴를 반복했고, 상층 제도권으로 흡수된 여성운동은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데에 곤란을 겪었다. 여성운동의 제도화와 동시에 진행된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여성 다수의 삶을 궁핍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는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여성의 권리 수준과 실제 여성들이 겪는 현실과의 괴리가 큰 상태가 되었다. 여성의 교육 수준이 매우 높고 상징적·제도적 수준에서의 성 평등이 달성된 듯 보이지만, 노동시장에서의 성별 분리와 여성 노동의 저임금 부문 집중, 가족 내 돌봄 노동의 여성 책임은 강고하게 남아 있다. 현실 관계에서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폭력, 전통적 역할과 태도를 요구하는 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현실은 여성들의 딜레마와 고통을 한층 가중시킨다. 

반면 청년 남성들은 남성으로서의 제한된 경험으로 인해 여성들의 현실을 알지 못하고, 성주류화 전략이 유포하는 여성의 인권과 지위가 향상되었다는 관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청년 남성들이 생각하는 한국 사회는 더 이상 여성에 대한 가시적 차별은 없고, 개인적인 경쟁과 생존만이 문제인 세상이다. “나는 남자라서 특혜 받아본 적도 없고, 주변에서 여자라서 불리한 경험을 당하는 것을 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으로서 피해 받았다고 말하며 어떤 보상을 바라는 것은 불공정한 요구로 여겨진다.

2000년대 들어 왜 이렇게 급격하게 여성혐오 담론이 확산되었는가? 왜 한국의 전투적 여성주의는 기존 여성운동과는 전혀 다른 의제와 방식으로 조직되었나?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기존에 여성운동이 취했던 전략을 반성적으로 돌아봐야 한다. “제도 밖 대중적 페미니즘 담론의 확대, 안티 페미니즘과 여성혐오 정서의 확산은 제도의 틀에 머물러 있던 성평등 의제의 한계와 왜소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었다”는 지적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경제적 빈곤과 불안이 확산되는 가운데 성주류화 전략은 ‘성공한 여성’을 상징으로 해서 여성에게 각종 사회·경제적 자원을 할당하는 데에 주력했다. 이러한 전략은 아래로부터의 여성 운동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성들의 구체적인 요구나 현실 변화와는 일정 괴리되었다. 한편으로 청년 남성들은 페미니즘이 여성의 특수한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며, 그것이 때로 남성의 권익을 침해한다는 경쟁적 구도를 내면화하며 ‘안티 페미니즘’이라는 형태의 여성혐오를 발전시켰다. 
 
(3) 2008년 이후 주요 대중시위를 통한 주체화
페미니즘 운동은 언제나 더 광범위한 운동들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고조되었다. ‘전투적 여성주의’ 경향의 특징 역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한국에서 벌어졌던 여러 대중 투쟁들 속에서 만들어진 측면이 있다. 

첫째, 참여 주체의 교집합이 있다. 한국에서 사회운동의 새로운 주체로서 ‘여성’에 대한 담론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집회에는 ‘촛불소녀’로 상징되는 10대 여성들, ‘유모차 부대’로 상징되는 20~30대 여성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이후 2013년 철도민영화 저지 투쟁, 2014년 세월호 투쟁, 2016년 박근혜 퇴진 촛불 등 중요한 정치적 계기마다 온라인 여초 커뮤니티의 지원이나 여성 개인의 참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러한 주요 대중시위 참여 경험,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 활동은 여성들의 정치적 주체화, 집단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조직 운동에 대한 거부감과 개별적인 집회 참여 방식이다. 위에 언급한 주요 대중 시위들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조직적이거나 사회 변혁적인 운동에 대한 지향이 약했다. 때에 따라 참가자들이 자신의 집회 참여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문제시 되는 사안에 구조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단일 이슈로의 집중을 꾀했다. 

셋째, 운동의 의제로 불안·공포·피해 등의 프레임이 강력하게 호출된다는 점이다. ‘(내부 공동체를 위협하는)불안요소에 대한 배제’라는 2008년 이후 대중시위의 주요 논리는 사회 안정을 위한 보수적 담론과 공명하기 쉬운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러한 프레임의 집단행동이 반복되어 온 흐름은 최근 페미니즘 열풍이 보이는 배타성, 보수성과도 긴밀히 조응한다.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사람의 운동 참여가 여성들만의 운동에 위협이 된다며 트랜스여성에 대한 배제와 혐오의 논리가 힘을 얻었던 사례나, 예멘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움직임에서 ‘여성들의 안전’, ‘우리 아이들의 안전’을 이유로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즉, 전투적 여성주의는 사회적 불만이 변혁적·조직적 운동보다는 휘발성이 높은 대중시위, 나아가 포퓰리즘 정치로 수렴되는 현 정세의 특징과 깊은 관련이 있다. 
 
 

5. 결론


페미니즘 열풍이 시작되었을 때, 일시적으로는 운동 세력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발화하고 운동을 기획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열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평가해 보면 우리가 놓인 상황이 과거에 비해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데에 유리한 조건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페미니즘의 대중적 상징이 빠르게 ‘전투적 여성주의’로 수렴되면서, 사회적 논의의 지형이 왜곡되고 극단적인 입장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에 어떤 페미니즘 운동이 필요한가에 대한 입장 토론과 운동 기획이 중요한 시점이다. 대안적인 페미니즘 운동의 형성은 페미니스트의 상징을 ‘모든 윤리를 거부하고 여성 문제에만 집중하는 세력’이 아니라 ‘사회 변화를 주도하는 대안 세력’으로 바꾸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를 돌아보면, 여성들의 분노·저항의 정당성이 운동의 방식과 결과를 모두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여성 문제의 원인과 해법이 무엇인가에 관해 페미니스트 안에서도 다양한 입장이 존재해 왔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기획은 여성 억압의 원인을 초역사적인 가부장제나 남성의 본성에서 찾으며 사회 구조를 바꾸는 데 실패했으며,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여성운동이 기존 질서에 여성을 편입시키는 것을 목표로 체제 보완적 역할을 하는 것이 주류적인 경향이 되어 왔다. 그러나 현 체제를 그대로 두고 여성들을 주류에 편입하려는 시도, 남성 일반에 대한 대항폭력으로서 페미니즘적 실천은 ‘백래시’라는 실패의 역사를 반복할 수 있다. 

기존 운동이 부딪혔던 한계와 곤란을 넘어서기 위해서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에는 다음의 관점이 요구된다. 
 

1) 남성(성) 자체를 여성 문제의 원인으로 보는 방식을 넘어서야 한다


‘전투적 여성주의’ 경향은 입장이 다른 남성들을 설득하는 데에 힘을 빼지도 않고,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남성들이라 할지라도 함께 연대해서 운동할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국) 남성과의 대화 불가능성, 관계 개선의 불가능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과 남성을 적대관계로 인식하고, 여성 억압의 원인을 ‘남성(남성성 또는 남성의 생물학적·심리학적 본질)’과 그에서 비롯된 가부장제라는 초역사적 제도에서 찾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관점과 일치한다. 

이러한 관점은 매우 쉽고 명쾌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원인을 남성 자체로 볼 경우에 사회의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이냐는 문제는 길을 잃는다. 해법은 남성을 응징하거나(대항폭력), 남성을 여성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의 구호 중 “여성 경찰청장·검찰총장 임명하라”, “경찰 성비를 여성과 남성 9대 1로 해야 한다” 등은 이러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성별이 여성이라고 해서 페미니즘적인 관점과 태도를 체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다른 한편으로 여성들의 의식 변화와 생활양식 변화를 강조한다. 여성들이 여성이 놓인 사회적 조건에 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게 되면서 자신의 생활양식을 바꾸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필요한 과정이다. 그렇지만 생활양식의 변화가 매개 없이 저절로 사회 전체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개인이 사회 변화에 동참하기 위한 절대적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최근 ‘탈코르셋’ 운동이 그러하듯 문화주의적 실천은 남성중심적인 문화에 익숙한 대다수 여성들에 대한 비난이 되기 쉽다. 실제로 미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남성들, 사회운동과 괴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 여성들과의 간극도 계속해서 넓히는 방식으로 운동을 진행하면서 분열을 거듭하고 소수의 자족적인 활동으로 축소되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남성(성)을 여성 문제의 원인으로 보는 관점을 넘어서야 한다. 페미니즘은 ‘남성과의 싸움’이 아니라, 여성의 권리라는 관점에서 사회를 바꾸고 여성과 남성의 관계맺음을 재구성하는 대중적 운동을 지향해야 한다. 
 

2) 사회변혁 운동으로서 페미니즘 운동을 복원해야 한다


페미니즘 열풍 속에서 회자되는 경험과 논리에 비추어 봤을 때, 청년 여성들은 여성의 인권과 지위라는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조건이 ‘특별히 더 후진적이고 열악하다’는 공감대를 갖고 있다. 그러한 판단의 기준이 되는 북미·유럽 등 중심부 국가들에 비해 한국 사회의 여성의 권리가 문화적·사회경제적으로 뒤처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유럽에서 극우 정당의 득세 등 중심부 국가에서도 그러한 사회적 기준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 현 정세의 특징임을 고려한다면, 한국의 후진성이라는 논리는 보다 정확한 시대 인식과 글로벌 페미니즘에 대한 평가 속에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1970년대 이래 구축된 글로벌 페미니즘은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문제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자임해 왔다. 특히 세계적으로 동시에 진행된 성주류화 정책은 상층 제도권으로의 여성 진입, 각종 법제도 개선을 통해 여성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강력한 관념을 유포했다. 그렇지만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빈곤의 확대 속에서 이러한 전략은 한편으로 대다수 여성들의 현실을 은폐하고, 한편으로 남성들의 박탈감을 강화했다. 

여성들이 겪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 심지어 여성혐오까지도 지금 시대의 정치적·경제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이 처한 현실을 바꾸고자 한다면 노동자운동 및 사회변혁 운동과 적극적으로 만나야 한다. 실업과 저임금·불안정 일자리의 확대, 저출산으로 대표되는 사회재생산의 위기 등은 몇 가지 제도적 보완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페미니즘 운동은 개별적 성폭력 사건에 대한 대응, 제도 개선에 관한 분절적인 대응 등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어 왔다. 가족과 사회를 변혁하는 근본적인 운동으로서 페미니즘 운동의 의미와 실천을 복원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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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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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여성주의, 급진주의, 미투운동, 전투적 여성주의 노조페미니즘, 글로벌페미니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