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한소 수교와 남북기본합의서, NL·PD 논쟁의 격돌

남북한 통일정책과 통일운동, 역사와 평가③

임필수 | 계간 사회진보연대 편집장

1990년 한반도에서 가장 놀라운 변화는 6월 한소정상회담이 개최된 데 이어 9월 한국과 소련이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한 사건과, 남북고위급회담 개최를 위한 예비회담이 급속도로 마무리되어 1990년 9월, 서울에서 남북고위급회담 1차 회담이 개최된 사건이다.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의 급진전이었다.

 

남한은 북방정책의 최종 단계가 북한과의 협상과 관계개선이었기 때문에 정부 간 대화에 적극적이었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태도를 바꾸어 남북고위급회담 개최에 합의하게 되었나? 이 시기 동안 국제질서가 급변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1990년 6월 한소정상회담과 9월 한소 수교는 북한의 태도 변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1. 1990년 남북고위급회담과 한소정상회담

 

1) 한소 수교

 

한소 수교는 노태우 정부의 적극적인 북방정책이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소련의 외교정책 변화라는 측면에서도 검토해야 한다. 1985년 3월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소련의 외교정책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그는 1988년 9월 소비에트 최고회의 간부회의 주석에 취임하여 정부 차원의 국가원수가 된다.)

 

그는 1986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을 발표했는데,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긴장완화를 위해서 유럽안보회의와 유사한 전아시아안보회의(All Asian Forum)를 일본 히로시마에서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다만 한반도 문제와 관해서는 북한이 제안한 한반도 비핵지대 창설을 지지했을 뿐, 대(對)남한 정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 선언으로부터 3개월 후, 1986년 10월 북한 김일성 주석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이때 김일성 주석은 겉으로 보기에는 소련으로부터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프라우다》는 김 주석의 약력을 1면에 소개했고, 김 주석의 연설문 전문을 게재했다. 하지만 양 정상 간에는 분명한 시각 차이가 존재했는데, 훗날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회상했다.

 

김일성은 한반도의 교차승인의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도록 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나는 ‘그것[교차승인]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물으면서 그러한 생각을 옹호했다. 그리고 두 개의 한국이 국제연합의 승인을 받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관해서 잘 검토하도록 김일성에게 충고하자 그는 매우 놀라워했다. 김일성은 그것이 서방 제국주의자들의 또 다른 음모라면서 한반도의 분단을 항구화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나는 김일성이 치유할 수 없는 도그마티즘과 시대에 뒤떨어진 패러다임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당과 국가를 개혁하도록 충고했다. 김일성은 나에게 실망했고, 또 나는 김일성에게 실망했다.

김 주석의 모스크바 방문 시기에 북한이 한국과 소련의 접근을 막고, 소련의 서울 올림픽 개최 반대 입장을 이끌어 내려 했지만, 소련이 이를 거절했다는 주장도 있다. (소련은 1988년 1월에 서울올림픽에 참가한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소련은 점점 더 ‘극동 개발’과 아시아-태평양 지역 경제협력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987년 5월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 구엔 반 린이 방소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 소련 극동부의 개발계획이 완성되려고 하는데, 그 목적은 극동 지역에서 고능률의 국민경제 종합단지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제분업 시스템도 포함된다.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는 물론,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인도네시아, 태국, 그 밖의 아시아-태평양 국가와도 무역, 경제교류를 확대하고자 한다.

 

그리고 소련은 1988년 3월에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위원회를 창설했다. 이어서 같은 달에 소련 과학아카데미 동양학연구소, 극동연구소 소속 학자들이 서울에 있는 한양대학교 중소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방한했다.

 

이는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가? 소련이 1986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을 발표할 때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평화공존과 포괄적 안보체제 구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소련은 ‘경제협력에 근거한 점진적 평화의 구현’으로 강조점을 이동했다. 즉, 포괄적 안보체제 구성이나 군비축소 문제는 점진적, 장기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간주하면서, 외국 자본의 유인을 통한 경제개발을 중심 목표로 삼게 되었다.

 

한국 측도 북방정책의 주요 목표로 소련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이었다. 1988년 7·7선언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소련과의 수교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이러한 임무를 맡은 ‘박철언팀’이 서울올림픽 개최 직전인 1988년 8월 28일 소련에 입국했다. 소련과 접촉선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그리고 9월 8일 한국인 최초로 소련 외무성을 방문해 루킨 차관보와 면담했다. (이때 박철언팀으로 소련에 방문했던 염돈재 씨는 소련 측 인사들과 접촉한 결과, “고위급으로 갈수록 군축과 아시아의 평화에 대해 얘기하고 비중이 낮은 사람들은 주로 경제에 대해 얘기했다”고 증언했다.) 이 방문을 계기로 한국은 사상 최초로 대통령의 친서를 소련 서기장에게 전달했고, 그 답변 격으로 올림픽 개회식 하루 전날인 9월 16일 크라스노야르크스 연설에서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반도 정세의 전반적인 개선을 배경으로 한국과 소련의 경제관계를 제 궤도에 올릴 가능성도 싹트고 있다고 생각한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선언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핵무기 동결과 해·공군력의 감축을 포함한 7개 항의 평화제안 외에도 극동 경제특구(합작기업 특별지구) 창설 구상을 제기했다. 즉 소련의 아시아-태평양 전략, 한반도 전략 역시 경제적 목적을 중심으로 삼아 다분히 실용주의적 자세로 전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 시점까지도 소련의 대한정책은 신중한 편이었다. 외무성은 북한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중시하여 남한과의 공식 외교관계 수립에 신중한 반면, 공산당 국제부와 중앙위원회 산하 국제정책위원회는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 소련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 경제관계의 확대를 도모하되 외교관계의 수립은 상당 기간 연기해야 한다고 보았다. (셰바르드나제 당시 외상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1988년 12월 북한을 방문해 한국과의 관계는 비공식적인 관계에 머물 것이라고 “공산당원의 이름을 걸고” 약속했다.)

 

정주영 회장이 방소 중인 1989년 1월 8일, 현대그룹에서는 ‘1·8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현대중공업 사용자 측과 결탁한 노조 파괴 전문가 제임스 리가 깡패, 어용 노동자 수십 명을 몰고 <현대그룹해고자협의회> 사무실과 현대중전기 노조 간부 수련회장을 급습하여 방망이로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사진은 <현대그룹 노조탄압 경인지역대책위원회>가 주최한 ‘현대그룹 테러 규탄대회’다.

 

정주영 회장은 소련에서 귀국한 후, 1989년 1월 23일 북한 노동당 서열 제4위의 허담 씨의 초청으로 민간인 신분으로는 최초로 북한을 공식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정 회장은 특히 금강산 개발 사업에 열의를 보였다. 사진은 정주영 회장이 북한 정부와 금강산 개발 의향서에 조인하고 있는 모습이다. 1989년에 1월에 벌어진 현대그룹 ‘테러사건’과 정주영 회장의 방북은 극렬한 대비를 이루었다. 현대 정 회장은 '눈에 흙이 들어와도' 노동조합은 인정할 수 없는 악덕 ‘독점자본가’인가, 아니면 ‘돈 있는 자 돈으로’ 통일에 기여하는 ‘민족자본가’인가?

 

반면 한국은 더 적극적이었다. 서울올림픽 기간 소련은 임시영사관을 운영했고 그 후 1988년 10월에는 무역사무소 상호개설과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사항을 골자로 하는 「통상협력의정서」를 교환했다. 이어 1989년 1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전경련 명예회장 자격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는 소련 상공회의소 회장과 면담하여 양국 기업 간 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한소 경제협력 위원회> 설치 합의서를 가지고 한국에 돌아왔다. 또한 그는 한국기업이 시베리아, 극동 지역에서 소련의 화력, 수력발전소와 제철소를 설립하고, 알루미늄 광산과 임산자원을 개발하는 데 적극 참여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그 후 양국은 1989년 4월(서울)과 7월(모스크바)에 무역사무소를 각각 설치하고, 1989년 12월 영사관계를 수립했다. 이 시기에 한국과 소련의 교역량은 연평균 수출 42.7%, 수입 77.8%의 증가율을 보였고, 한국 기업은 소련에 지사를 설치했으며, 100여 건의 합작투자 협상이 진행되었다. 양국의 정치적 교류도 점차 물꼬를 텄다. 1989년 6월 김영삼 씨는, 통일민주당 즉 야당 총재의 자격으로 <세계경제 및 국제관계 연구소>(IMEMO)의 초청을 받아 소련을 방문했다.

 

1990년 2월 시점에 이르면 소련 공산당의 주요 인사들은 북한에 대해 더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국제부 제1차장 부르텐츠와 국제정책위원회 체르냐예프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북한 현 체제가 막다른 길에 봉착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평양의 정치적 인질이 될 필요는 없다. 김일성은 한반도에서 냉전을 종식시킬 수 있는 호기를 살리려고 하지 않는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약소국의 입장에서 긴장완화는 위험하다면서 분명하게 민중에게 ‘노태우 일당 타도’를 외치고 있다.

 

또한 북한의 핵 개발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우리의 원조로 북한이 비밀리에 추진해 온 핵 프로그램은 경계심을 환기시킨다. 평양은 거듭해서 군사적 도발행위를 하고 있으며 한반도를 전쟁의 벼랑으로 몰고 감으로써 동맹국인 소련을 전쟁에 끌어들일 수도 있는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의 핵무기 입수는 2차대전 후 아시아 태평양에서 형성된 안전보장 시스템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소련의 권위를 상실케 할 것이다. 이러한 사태로 발전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우리나라로부터 확고한 일보를 취하는 것이 필요불가결하다.

 

이 시기에는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글라스노스트(공개) 정책을 추구하면서 스탈린주의 비판이 강화되었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북한 체제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 매스 미디어에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련 공산당의 개혁파가 북한의 정치체제, 외교정책, 핵개발 프로그램 전반에 대해 매우 비판적 시각을 지니게 되었다는 뜻이다.

 

한국 측의 수교 요구는 더욱 강해졌다. 1990년 3월, 고르바초프의 대통령 취임에 즈음하여 김영삼 씨는 이번에는 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의 자격으로, 박철언 제1정무장관과 함께 소련에 방문했다. 이때 민자당과 <세계경제 및 국제관계 연구소>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소 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주화와 이에 따르는 외교정책과 국가이익의 재검토 과정에서 한소 공식관계 정립의 필요성을 공동 인식하게 되었고 가까운 시일 내에 국교가 개설될 전망이 매우 좋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한소 당국이 국교정상화가 앞당겨질 수 있도록 협의와 교섭을 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 한소관계는 제3국의 이익을 해쳐서는 안 된다.

 

1990년 3월 시점에 양국 간에 수교가 원칙적으로 합의된 셈이다. 성명은 한소관계가 제3국의 이익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함으로써 북한을 여전히 배려했다. 그러나 북한의 반발을 막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 시기는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1990년 4월, 미 국무장관 슐츠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다가오는 1990년 6월 초에 고르바초프가 샌프란시스코에 방문할 것이라고 언질을 주면서, 양국 정상회담을 중재했다. 한국은 양국 정상회담의 성사 가능성을 5% 정도라 예측하며 ‘5% 계획’이라는 암호명을 붙였다. 결국 6월 4일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수교 일정을 명시하지 않았다.

 

1990년 6월 4일 성사된 한소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과일은 익지 않았을 때 먹으면 맛도 좋지 않고 배앓이를 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반면 노태우 대통령은 “내가 익었다고 하면 참지 말고 같이 먹읍시다”라고 응답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회담 후 사진 촬영에도 난색을 표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사진 한 장 내놓지 못하면 회담이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설득하여 사진촬영이 이루어졌다.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 후, 1990년 9월 초, 셰바르드나제 외무상은 한소 수교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방북했다. 그러나 북한은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김일성 주석과의 회견은 이뤄지지 않았고, 김영남 외교부장과의 회담만 있었다. 이때 북한은 한소 수교가 불가한 여섯 가지 이유를 담은 비망록을 전달했다. ① 한소 수교는 두 개의 한국을 합법화하고, ② 소련은 미국과 함께 남북분단에 책임이 있으며, ③ 한소 수교는 한국정부의 북방외교를 도울 뿐이며, ④ 소련은 사회주의 제도를 전복하려는 미국과 한국의 공동음모에 가담하여 3자 결탁관계를 형성하며, ⑤ 북소 동맹조약이 자동으로 유명무실해지고, ⑥ 남한 인민의 통일의지를 꺾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소련은 앞으로 북소 무역관계도 바터(물물거래) 결제가 아니라 외화결제로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래서 결국 1990년 11월부터 새로운 경제거래협정이 체결되면서, 우호가격제도가 폐지되고, 소련으로부터 수입하는 석유의 가격이 대폭 인상되어 북한으로서는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거래방식은 무기와 군사기술 수입에도 적용되었다.)

 

한소 수교에 대한 북한의 반발은 매우 격렬했다. 김영남 외교부장은 한소 수교가 이뤄질 경우, 북한은 발트 3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북일 수교교섭을 개시할 뿐만 아니라, 북방영토 문제에서 일본의 입장을 지지할 것이며,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제조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북한은 외교적 관례를 깨고, 1990년 9월 19일 《민주조선》에 이 비망록을 공개했다.

 

 1990년 12월 13일부터 16일까지 노태우 대통령은 소련을 방문한다. 이때 세종로에 한국과 소련의 국기가 동시에 걸린 사진. (광화문 건너 지금은 철거된 중앙청 건물도 볼 수 있다.)

 

 ”영구분단 가져올 고르비 방한 결사 반대한다!” “고르비 그대는 두 개의 한국을 원하는가!” 1991년 4월 1일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출범식의 한 장면. 고르바초프는 4월 19일 방한했는데 소련 최고 지도자가 한반도 땅을 밟은 것은 남북한을 통틀어 이때가 처음이었다. NL 운동은 1991년 상반기까지도 한반도 분단을 영구화한다면서 교차승인에 반대했고,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방한도 반대했다.

 

혹자는 이러한 북한의 격렬한 반발에 직면해 소련 외무성 쪽이 한소 수교에 더 적극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고 보기도 한다. 당시 셰바르드나제 외무상은 이렇게 말했다. “소련이 남한과 외교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자주 국가인 소련 자신이 결정할 문제이므로 승인받을 필요가 없다.”

 

결국 9월 20일 한소 외무장관 회담에서 한소 수교가 합의되자 북한은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노동신문》 10월 5일자는 사설 ‘달러로 팔고 사는 외교관계’에서 장문의 논설로 소련을 비난했다. 즉 소련이 주장하는 ‘새로운 정치적 사고’의 본질은 “미국 아저씨와 벗이 되어 그가 요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고분고분 받아들이고 그의 선심을 사서 평화를 보장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1991년 8월 소련에서 보수쿠데타가 발생하자 이를 묵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북소 관계가 완전히 파탄 나고,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북한으로서는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되는 사태를 피하기를 원했고, 무기와 석유 조달이라는 측면에서 대소련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결국 1991년 1월 한소는 경제협력에 대한 조약을 체결했다. 향후 3년에 걸쳐 한국은 소련에 총 30억 달러 상당의 차관을 제공하며, 그 중 10억 달러는 현금차관이고, 15억 달러는 한국물품(소비재) 구입을 위한 전대차관, 5억 달러는 플랜트 차관이었다. (현금차관은 국제금리가 적용되는 은행차관으로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을 조건으로 했다.) 그러나 한러 경제관계의 발전은 더디었다. 한국 기업의 관점에서는 소련 해체 이후 정치경제적 불안이 지속되는 러시아보다 중국이 더 적합한 투자대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2) 북한의 대응: 북일수교를 향하여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 직면한 북한은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지니고 있는 중국이 북한의 정책을 지지하길 강력히 원했다. 그래서 1990년 9월 11일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해 한중 수교 불가 입장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 자리에서 덩샤오핑은 “북조선이 능동적으로 북남관계를 평화정착의 단계로까지 끌고 간다면, 미국은 조선반도에서 역할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결국 대북관계 개선 대화에 나오게 된다”며 김일성 주석을 설득했다. 평양으로 돌아온 김 주석은 9월 14일 당 정치국회의를 소집하고 남북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실제로 1990년 9월 4일부터 7일까지 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진행되었으나, 1차 회담은 남북의 이견을 확인하는 수준으로 진행되었다. (중국 역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거치며 한국과 경제교류를 확대할 의사를 지니게 되었다. 1987년 7월 중국은 덩샤오핑의 지시로 ‘중한경제협조소조’를 설치했다. 1989년 1월 6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도쿄 무역관을 통해 민간 차원에서 무역대표소를 설치하자고 정식으로 제안했다. 한중수교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한편 1990년 9월 24일 일본의 ‘자유민주당 일본사민당 방북단’이 평양을 방문했다. 방북단은 의원과 수행원을 합쳐서 자민당 29인, 사회당 15인, 정부 관계자 9인, 보도진 36인으로 총 89인에 이르는 대규모였다. 단장은 자민당 가네마루 신 전 부총리와 다나베 마코토 부위원장이었다. ‘가네마루 방북단’의 방북 성사에는 일본 사회당 다나베 부위원장의 공이 매우 컸다.

 

1970년대 이래 일본사회당은 북한과 우당 관계를 유지했다. (반면 일본 공산당과 북한 노동당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있었다.) 사회당은 북일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하려면 ‘야당외교’만으로는 부족하고 여당인 자민당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다나베 부위원장은 사회당 국회대책위 활동을 하면서 가네마루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과 국회운영을 공동으로 책임진 바 있었다. 가네마루는 다나베의 권유를 계기로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후지산마루 선원 석방을 위해 방북을 결단했다. 다나베 부위원장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방북을 성사시키려면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 측의 사과 표명이 필요하다고 보고, 아베 신타로 자민당 간사장과 의견을 나눈 결과, 국회에서 질의에 답하는 방식으로 이를 표명하기로 합의했다. 1989년 3월 31일 다케시다 총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기회에 새롭게 동 지역의 전체 사람들에 대해 그러한 과거의 관계에 관해서 깊은 반성과 유감의 뜻을 표명하고 싶다. 북일 관계에 관해서 말씀드리면 그러한 과거의 불행한 시기 이후 오늘날까지 소원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국화국과 사이에도 관계개선을 진척시키고 싶다.

 

그 후 북한의 대일 태도가 변화했으며, 1990년 4월 이래 《노동신문》은 일본정부에 대한 공격과 비판을 멈추었다. 그리하여 1990년 9월 24일 방북단의 평양 방문이 성사되었다. 다나베 부위원장의 증언에 따르면, 국교수립을 먼저 제안한 것은 북한이었고, 북한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관계개선을 추진하려는 데 방북단이나 외무성이 크게 놀랐다.

 

9월 28일 ‘북일 관계에 관한 일본의 자유민주당, 일본사회당, 조선노동당의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① 일본이 36년간 조선인민에게 가한 커다란 불행과 재난, 전후 45년간 조선인민이 받은 손실에 관해서 사과와 보상을 표명하고, ② 조기에 국교를 수립하고, ③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서 교류를 발전시키며, ④ 재일조선인의 인권과 민족적 권리, 법적 지위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한편, 1990년 10월, 즉 가네마루의 방북 후, 북일수교 예비회담 개최 전 시점에 한국정부는 자신의 입장을 일본정부에 전달했다. ① 한일 양국 간 긴밀한 사전협의가 필요하며, ② 국교수립 이전에 일본의 대북 경제협력 제공에 반대하며, ③ 남북관계의 의미 있는 진전이 전제되어야 하며, ④ 북한의 핵안전협정(NPT) 서명을 촉구해야 하며, 경제협력 자금이 북한의 군비로 전용되는 상황을 방지해야 한다.

 

1990년 10월 5일 요미우리 신문 보도에 따르면 미국 역시 일본에 입장을 전달했다. ① 전후 45년을 배상에서 제외해야 하며, ② 경제원조나 배상이 북한의 군사력 강화에 사용되지 않는다는 보증을 확보해야 하며, ③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북한이 허용해야 하며, ④ 남북대화를 후퇴시키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한국과 미국이 전달한 의견을 종합하면, 남북관계 개선과 북한의 핵 개발 프로그램 중단이 북일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북관계 개선은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으로 얼마간 실현되었으나,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은 현재까지도 북일수교가 실현되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동하게 된다.

 

2. 1990년 범민족대회

 

남과 북, 해외가 함께 참여하는 범민족대회 개최 구상은 1988년에 처음으로 제기되었으나, 1989년까지도 실행되지 못했다. 1990년 6월 2~3일 1차 예비 실무회담이 서베를린에서 열렸으나, 남측 대표는 당국의 출국허가가 나오지 않아 회담에 참여하지 못했다. (반면 6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상 최초로 한소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남측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1차 실무회담에서는 범민족대회를 8월 15일 판문점에서 개최하되, 여러 학술, 문화행사는 서울과 평양에서 분산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대회참가자격은 7·4 남북공동성명의 기본정신을 지지하고 조국통일을 진심으로 원하는 정당, 단체, 개인으로 하고, 남북당국도 참가할 수 있다고 하였다.

 

1) 노태우 정부의 민족대교류 선언 (1990년 7월 20일)

 

그렇다면 1990년 범민족대회에 관한 노태우 정부의 입장은 어떠했는가. 7월 20일 노태우 대통령은 ‘8·15 민족대교류 선언’을 발표했다.

 

나는 해방 45주년을 맞은 올해 8월 15일을 전후한 5일간을 민족대교류의 기간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8월 13일부터 닷새 동안 판문점을 통로로 열어놓고 북한 동포들을 제한없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이 원하는 남쪽의 어느 지역도 자유로이 방문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원하는 사람 누구라도 만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 이 기간 중 우리 국민 누구라도 제한없이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할 수 있도록 조처할 것입니다. (…) 나는 북한이 판문점 북측 지역뿐 아니라 북한의 어느 곳이라도 자유로이 가볼 수 있도록 전 지역을 개방하고 북한 방문을 원하는 남쪽 동포들을 우리와 마찬가지로 제한없이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 남북 동포들 간의 왕래와 교류는 통일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도 지난 1월 1일 남북한 사회의 완전개방과 자유왕래를 제의한 바 있습니다. (…) 북한 측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상호교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북한동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전면개방을 일방적으로 실천할 것입니다.

 

선언은 8월 13일부터 17일까지 5일간을 민족대교류 기간으로 선포하고 이 기간에 판문점을 통해 남북한 주민이 왕래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강영훈 국무총리는 8·15 민족대교류 실현을 위한 실무접촉을 7월 30일에 열자고 북한에 제의했다.

 

그에 앞서 7월 5일 북한 조평통은 8월 15일부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북측지역을 일방적으로 개방하겠다고 선언했었다. 또한 조평통은 ▲북남 사이의 접촉과 내왕은 통일문제와 밀접히 결부돼 진행되어야 하며, ▲사상, 이념, 정견과 관계없이 정당, 단체, 각계각층 인민이 차별 없이 참가해야 하며, ▲법률적 사회적 제한을 철폐하고, 상대방을 비방하는 일체의 사회정치적 행사를 중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즉 노태우 대통령의 민족대교류 선언은 북측 제안에 대한 응답의 성격을 띠었다. 민족대교류 선언에 대해 국내 언론 《중앙일보》는 이렇게 분석했다.

 

이번 제의에서 가장 주목할 내용은 북한 측의 조평통이 지난 [1990년 7월] 5일 성명으로 발표한 판문점 북측지역의 개방 및 남한의 상응하는 조치에 대한 회담이며 북한측이 8월 13∼17일간 판문점의 북측지역에서 열기로 한 8·15 범민족대회를 전격 수용한 부분이다. 노대통령은 「민족대교류」란 큰 원칙을 통해 해외의 친북계열 동포들과 남한의 전민련ㆍ전대협 등 재야 학생단체를 초청해 대대적인 선전공세를 벌이려는 북한의 계획을 전폭 수용했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북한이 개방을 내세우면서도 우리 쪽 특정세력만을 불러들여 대남 정치공세를 취하려 하는 것은 남북 관계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허용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취했었다.

 

노대통령의 이번 제의를 북한도 자신들이 자유내왕 및 판문점 개방 등을 주장한 상황이어서 명분상 거부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북한은 지난 5일 조평통 성명에서 통일문제와 함께 해당분야의 관심사를 논의하기 위해 한국과 해외의 정당, 단체, 각 계층이 북한을 방문하는 것을 언제든지 환영할 것이며 한국의 정당, 단체, 각 계층이 북한의 정당, 단체, 각 계층을 초청할 경우 장소나 시일에 관계없이 언제든지 응할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의 기대처럼 북한은 명분상 이를 거부하기 어려웠을까? 북한은 같은 날, 7월 20일 조평통 명의의 성명을 발표해, 남측이 8월 15일 이전에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방북 이후 구속된 인사를 모두 석방하고, ▲남북 간 설치된 콘크리트 장벽을 철거하면 8월 15일 이후에 기한을 정하지 않고 남북한 주민의 교류를 허용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러면서 ‘우선 콘크리트 장벽과 군사분계선의 철조망을 모두 철거하기 위한 남북한 공동추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의했다. 또한, 남측이 ‘범민족대회를 허용하려 한다면 7월 26일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범민족대회 2차 예비접촉에 북한인사의 참가를 보장해야 할 것이며, 8월 15일 이전에 전민련 대표가 평양을 방문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북한의 입장은 남한 정부가 일단 8·15 범민족대회를 보장해야 하며, 그 외에도 국가보안법 철폐, 방북 인사 석방, 콘크리트 장벽 철거와 같은 조건이 충족되면 8·15 범민족대회가 끝난 후에 남북 주민교류를 허용하겠다는 입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국내 언론은 북한이 노 정부의 민족대교류 제안을 사실상 거부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노태우 정부는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7월 21일 노태우 대통령은 교류협력법의 시행령을 조속히 마련하라고 지시했고, 7월 23일 법무부, 국방부, 통일원 3부장관 각각은 조평통이 제시한 ‘전제조건’에 대해 상당히 전향적이고, 적극적인 입장을 발표했다.

 

첫째, 홍성철 통일원 장관은 범민족대회를 허용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즉, 7월 26일 예비회담의 방남을 허용하며, 8·15 이전 남측 인사의 방북을 허용하며, 판문점에서 개최될 8·15 범민족대회의 남측 참가도 허용한다. 북측이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행진하는 것이나 남측이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행진하는 것도 허용한다. 다만 이 대회에 ‘특정 단체나 특정 인사가 아닌 각계각층의 민족성원들이 광범위하게 참가해야 한다’, ‘남북 상호 간에 비방하거나 자극하지 말고 상호신뢰와 이해를 증진해야 한다’는 점을 단서로 달았다.

 

둘째, 이종남 법무부 장관은 법적·제도적 개선 문제를 전향적으로, 제한 없이 논의할 수 있는 법무당국자회담(장관급회담) 개최를 제안했다. 법무부장관의 주장은 이러했다. 남한은 (북측의 요구가 아니라)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의 하나로 국가보안법 개정 문제를 국회에서 논의하고 있고, 최근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으로써 남북교류에 법적 장애는 없다. 또한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북한의 법, 제도나 사상범의 강제수용 등 인권상황을 문제삼은 적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 법무당국자가 만나 모든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다. 남한은 국가보안법과 구속자 문제와 아울러 북한의 안전관계 형사법과 사상범 문제를 협의하면서, 남북교류를 촉진하기 위한 법, 제도의 개선 문제를 전향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셋째, 이상훈 국방부 장관은 북한 측이 주장한 콘크리트 장벽 공동조사를 흔쾌히 받아들인다고 발표했다. 콘크리트 장벽은 북측의 주장과 달리 대전차 장애물일 뿐 인원차단 장벽이 아니다. 북측은 남한의 두 배가 넘는 대전차 장애물을 설치했다. 남한은 2중의 철조망을 설치했으나, 북한은 5~6중의 철조망을 설치하여 주민과 장병의 귀순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쌍방이 자유로이 조사활동을 하는 조사위원회 구성을 수용한다.

 

정부는 왜 이런 태도를 보였는가? 노태우 정부는 이미 1988년 7·7선언에서 첫 번째 정책으로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 종교인, 문화·예술인, 체육인, 학자 및 학생 등 남북동포 간의 상호교류를 적극 추진한다”고 밝혔다. 따라서 정부는 남한 통일운동의 범민족대회 개최 요구를 계속해서 완전히 묵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각계각층의 참여를 조건으로, 즉 재야 통일운동을 견제 또는 통제하면서 남북교류를 허용하는 방침을 모색했던 듯하다.

 

2) 8·15 범민족대회의 무산까지

 

정부가 각계각층의 참여 보장을 조건으로 내걸자 통일원에 등록된 58개 단체가 <범민족대회 참가단체 협의회>(협의회)를 구성했다. 7월 23일 3부장관 기자회견 후, 통일원의 요청으로 회의가 열려 통일부 차관으로부터 ‘통일원 산하 단체가 개별적 또는 집단적으로 범민족대회에 참가해도 좋다’는 입장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사실 통일원이 통일원에 등록된 단체의 범민족대회 참가를 종용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 협의회의 면면을 보면, 한국자유총연맹, 이북5도민중앙연합회, 상이군경회, 전몰군경유족회, 한국노총 등 반공보수주의를 표방하는 단체가 다수를 구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7월 25일 범민족대회 남측 추진본부(남측본부)는 우익단체라도 7·4 남북공동성명 정신을 준수하고 통일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하면 참가시키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다만 7월 26일 실무회담에 이 단체가 참여하는 것은 대표단 구성이 이미 완료되고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고, 추후 계속 거론하기로 했다. 또한 남측본부 김희택 대변인은 “범민족대회의 성격상 참가단체 결정은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북한 쪽의 반대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범민족대회 준비과정은 꼬여만 갔다. 정부가 7월 26일 2차 예비회담을 허용한다는 방침에 따라 남측본부는 크리스찬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회담을 개최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7월 26일 안기부에서 열린 관계기관 대책회의 결과, 통일원은 경호의 어려움을 근거로 회담장소를 강남 인터콘티넨탈 호텔로 바꾸라고 통보했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박찬수 기자의 기사를 참조할 수 있다.

 

당연히 집행부 안에선 ‘행사 주체가 누군데 정부가 간섭하느냐’며 난리가 났다. 30여 명의 집행위원 가운데 정부 제안을 받아들여 회의 장소를 바꾸자고 주장한 사람은 조성우 처장이 거의 유일했다.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회의를 열면 틀림없이 안기부가 도청할 것이라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당시 남쪽 준비위에서 실무를 맡았던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원장은 “조성우 사무처장이 정부 제안을 받아들이자며 ‘가랑이론’을 폈던 게 기억난다. (…) ‘지금은 우리가 정부 가랑이 밑을 기어서 가지만 우리 뒤엔 수많은 국민이 있다. 결국 정부 가랑이는 찢어지고 말 것’이란 논리였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에 대한 불신이 워낙 컸다”고 말했다. 예비회담 당일인 26일 판문점에 전금철 부위원장을 비롯한 북한 대표단 5명이 도착했다. 회담 장소와 숙소 문제로 전민련과 우리 정부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북한 대표단은 판문점에서 대기하다 오후 늦게 평양으로 돌아가 버렸다. 나중에 독일 베를린에서 남쪽 인사들을 만난 전금철 부위원장은 “전민련이 인터콘티넨탈 호텔을 받았으면 우리도 수용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7월 26일 남북고위급회담 8차 예비회담은 「남북고위급회담 개최에 관한 합의서」를 서명, 교환했다. (그에 따라 1990년 9월 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게 된다.) 그렇지만 같은 날 범민족대회 예비회담은 실제 성사되지 못했다.

 

설사 회담 장소 문제에 관한 정부 입장을 남측본부 측에서 먼저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또 하나의 장애요인이 있었다. 북한은 7월 26일 북측 대표의 판문점 도착을 앞두고, ‘범민족대회에 남한의 58개 단체가 참여하는 것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위에서 언급한 남측본부 대변인의 낙관과는 달리, 북한이 남측 참가단체 범위를 문제 삼고 나온 것이다.

 

남한의 홍성철 통일원장관은 기존 방침의 연장선에서 ‘범민족대회가 평양에서 열릴 경우 민족대교류의 정신에 따라 전민련 등 특정단체가 방북신청을 해도 허용하겠으나, 8월 6일 열릴 3차 예비회담과 15일의 판문점 본대회에는 각계각층의 대표가 참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역시 계속해서 ‘보수단체의 참여는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보였다. 남측본부도 58개 단체와의 만남에서 북한과의 관계가 있으니 자신이 주관하여 추진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남측본부가 3차 평양 예비회담에 참석하고자 했으나, 정부는 ‘특정 단체만의 방북’이라는 이유로 거부하여 3차 예비회담도 무산되었다.

 

다만 정부는 한층 더 전향적으로 보이는 입장을 내놓긴 했다. 8월 2일 홍성철 통일원 장관은 무제한적인 방북을 허용한다면서 민족대교류 기간 중 방북희망자 신청을 받겠다고 밝힌 데 이어, 8월 12일 북한이 선별적으로 초청하더라도, ‘북한이 신변보장만 약속하면 민족대교류 기간 중 전민련 등 특정단체의 방북을 허용하겠다’면서 북측에 당국 간 연락관 접촉을 제의했다. 그러나 북한 안병수 조평통 서기국장은 ‘남한 당국은 민간단체들의 접촉과 왕래 문제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결국 범민족대회에 관한 협의는 최종적으로 문이 닫히게 되었다.

 

결국 (1차) 범민족대회는 남과 북에서 각각 개최되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8월 15일 판문점 대회는 북측지역에서 북과 해외 대표들만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남측 대표단은 연세대에서 출발하여 판문점 대회에 참석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었다.

 

1990월 8월 15일, 연세대학교에서 판문점 범민족대회로 출발하려는 버스를 경찰이 막아선 장면.

 

같은 날 판문점행이 좌절되자 전대협 소속 대학생 등 1만여 명은 오전 11시 45분쯤부터 교문앞에서 경찰에 돌과 화염병 5천여 개를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1990년 1차 범민족대회 이후, 정부는 범민족대회를 원천 봉쇄하고자 했고, 매년 대회가 열릴 때면 유사한 패턴의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3) 범민족대회의 무산을 어떻게 볼 것인가?

 

1990년 판문점 대회의 무산을 어떻게 볼 것인가?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첫째, 북한은 노태우 정부의 ‘민족대교류’ 정책을 수용할 의사가 없었고, 범민족대회가 ‘민족대교류’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데 강한 거부의사를 갖고 있었던 것인가? 1990년에 쓴 평가 글에 정해구는 남한 정부의 ‘민족대교류’와 북한의 ‘민족대단결’이 충돌한 결과라고 해석했다.

 

남한 정부가 근거하고 있는 민족대교류의 원칙은 (…) 남한 정부가 유리한 입장에 서서 남북의 자유왕래와 전면개방에서 적극적으로 북한에 개방의 돌파구를 내려는 시도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북한과 남한 민족민주운동의 결합에 바탕하는 북한에 유리한 교류의 도래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남한 민족민주운동의 자주적 민간교류운동에 대해 기존의 창구단일화하는 어찌 보면 소극적일 수도 있는 대응을 해왔던 남한 정부당국은 이제 (…) 보다 적극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 북한방문 신청 명단의 수령 조건으로 임수경 위문단의 직접 면회를 제시하거나 평양에서의 범민족대회 개최를 거부하는 것 등은 여전히 외부에 대한 북한의 개방을 우려하는 북한의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해구의 주장을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북한은 자신의 통일정책이나 대남정책에 친화적인 남한 내 통일운동 세력과의 교류를 통해 남한 정부를 압박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으며, 덧붙여 전면적인 개방과 왕래를 실시할 의사는 약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따라서 북한에 입장에서 보면 ‘58개 단체의 참여 문제’는 결코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남한 정부 역시 이를 간파하고 범민족대회를 불발로 이끌기 위한 사전포석을 한 것일까? 남한 당국이 8월 12일 전민련 등 ‘특정단체’의 방북만이라도 허용하겠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제시한 것을 볼 때, 처음부터 완전히 무산시키겠다는 고도의 숨은 의도가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만큼 노태우 정부에 이르러 (일정한 조건 내에서) 범민족대회 허용도 가능할 정도로 대북정책에서 강한 자신감을 품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나아가 전면개방과 자유왕래에 대해 북한이 소극적이고 남한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이를 계기로 통일운동이 제시했던 어떤 통념, 즉 북한은 적극적인 통일세력이고 남한은 소극적인 반(反)통일세력이라는 이미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다.

 

둘째, 남한 통일운동이 범민족대회 추진과정에서 보인 태도는 너무 유연한 것이었나, 아니면 너무 경직된 것이었나? 우리는 정반대의 평가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에는 남측본부의 입장이 너무 유연한 것이 아니었냐는 평가가 강하게 제기된 듯하다. 앞서 인용한 정해구의 글을 보면 이렇다. “추진본부가 범민족대회 자체의 성사에만 지나치게 치중한 것이 아닌가, 또는 정부에 대한 지나친 유연성으로 인해 자주적 민간교류운동의 독자적 원칙이 약화되고 정부 당국의 민족대교류 입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소지는 없었는가 등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PD 운동 역시 전민련을 주축으로 하는 추진본부가 대회 성사에 급급하여, 교류사업을 북한에 개방압력을 가하는 도구로 활용하려는 노태우 정부의 구도에 포섭되었다고 평가했다.)

 

반면 통일운동의 입장이 너무 경직되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사후적 평가도 있다. 2017년 시점의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원장의 평가를 보자.

 

1989년도에 탈냉전의 흐름 속에서 노태우 정권이 범민족대회를 승인했다. 북한과 해외동포가 서울에 와서 실무회담을 하는 것을 승인해준 것이다. 정부는 안전 등 여러 문제 때문에 큰 호텔에서 하라고 했고, 민간에서는 정부의 통제와 감시 속에 들어갈 수 없다고 대립하다가 의견이 모아지지 않아 무산됐다. 지금 생각하면 장소는 큰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행사만 잘 성사됐다면 우리가 30년 넘게 노력해도 안 됐던 큰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위험한 발언일지도 모르겠지만 독재정권이라고 비판받았던 정부가 전향적인 움직임을 보였던 것에 반해서, 진보적이라는 민간에서는 그만큼 생각이 열려있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러한 시각 차이는 단순한 ‘전술적 유연성’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더 파고 들어가면 이는 통일론과 그와 짝을 이루는 변혁론에서의 ‘전략적’ 입장 차이를 반영할 것이다. 통일운동이라는 큰 울타리 내에 북한의 혁명론과 통일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른바 ‘주체사상파’ NL)과 그에 비판적이거나 거리를 두면서도 민족통일운동을 전개하는 입장(이른바 ‘비〔非〕주체사상파’ NL)이 잠재적 갈등요소를 품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모든 통일운동 집단을 이러한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통일운동은 실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1993년 김영삼 정부의 등장과 ‘새로운 통일운동체’(새통체) 건설 논의를 통해 곧 폭발하게 된다.

 

4) 범민련의 결성과 1990년대 범민족대회

 

범민족대회 마지막 날인 1990년 8월 15일 평양에서 ‘남, 북, 해외동포 3자 대표로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결성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당시 북한에 체류 중이던 황석영 작가가 남측 대표자격으로 범민족대회를 위한 상설기구의 설치를 제안했고, 이때 해외대표인 재일 한통련 곽동연 의장이 그 명칭을 <조국통일 범민족연합>(범민련)으로 제의했고, 북측 윤기복 대표가 이를 지지해 범민련이 결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날 일본을 거쳐 남측에 전달된 팩스에는 남측본부 인선까지 마친 조직표도 그려져 있었다.

 

이에 남측본부는 집행위원회를 열어 “연합구조는 현실적으로 너무 강경하고 실효성이 없고, 통일운동은 자주적인 방식으로 행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내부 검토 없이 북측에서 통보해온 범민련 조직을 결성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결정했다. 또한 황석영 작가가 남측을 대표한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근거로 북측의 범민련 결성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11월까지 20여 차례 회의가 반복되었으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고, 참여하는 단체가 줄어들면서 결국 전대협 등 일부 단체가 주도권을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1990년 11월 19~20일 베를린에서 열린 3자회담은 범민련을 둘러싼 이견 조정을 위한 자리라는 성격이 강했다. 이때 남측 대표는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① 남과 북, 해외 대표가 동일한 의사결정과 책임을 가지며 만장일치제를 채택한다, ② 범민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되 1년 후 범민련을 회의체로 전환한다, ③ 이산가족 사업이나 태평양전쟁 피해 조사를 위한 공동위원회 구성, 남북 문화패 운영 등 민족적 공감대 형성이 가능한 실질적 사업을 벌여 나간다. (반면 북한은 미군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장기수 석방과 송환을 중심사업으로 제시했다.)

 

박찬수 기자의 기사에 따르면 이때 북한 전금철 조평통 부위원장은 범민련 결성 발표가 ‘적절치 못했다’고 인정하고, 기구운영은 연합체가 아니라 남한의 주장대로 협의체 형식으로 하는 데 동의했다. 다만 범민련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가자고 주장했다. 남측 인사는 북측의 이러한 양보를 수용하여 <조국통일 범민족연합>이 발족하게 된다. 범민련 남측본부 준비위원회는 1991년 1월 23일 발족하는데, 준비위원장은 문익환, 집행위원장은 이창복을 각각 선출했다.

 

그렇지만 범민련의 발족에는 북측의 의사가 강하게 반영되었고, 이는 1990년의 범민족대회에서 나타난 고난이 앞으로 있을 범민족대회에서 계속 반복되리라 예상케 하는 것이었다. 즉 “각계각층의 참여가 허용될 때 범민족대회를 보장하겠다”는 남한 정부의 입장과 북측이 주도하여 구성한 범민련은 계속 충돌을 낳을 소지를 강하게 안고 있었다. 훗날 문익환 목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범민련 남측준비위 위원장으로 들어설 때 범민련은 적어도 투쟁조직이 아니라 통일을 성사시키는 운동체여야 한다는 데 모두 합의했던 거야. 그래서 범민련은 대결에서 대화로, 투쟁에서 상호보완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위상을 분명히 설정했거든. (…) 그런데 말이야 해외 쪽이나 국내 쪽이나 몸에 배인 투쟁의식을 그렇게 못 버리고 있어. 범민련은 중립을 지켜야 하는데, 어느 한쪽을 공격하면 다른 한쪽으로 기우는 것이 돼버리고 말지 않아. (…) 북경대회 직후에 순간적으로 범민련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발전적 해체를 이야기 한 적이 있지. (…) [남북해외] 3자회담에 집착하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못하는 문제가 있지. 남한은 남한의 특성에 맞게, 해외는 해외의 특성에 맞게, 크게 뭉쳐서 다시 새로운 연대운동을 시작해야지.

 

그렇지만 문익환 목사의 구상에 따라 범민련이 완전히 해소된 것도 아니었고, 범민족대회가 중단된 것도 아니었다. 이는 1990년대 중반까지도 통일운동의 중요한 한 축으로 계속 남아 있게 된다. (이는 다음 편에서 다룬다.)

 

3. 통일운동과 PD운동의 비판

 

1989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씨의 방북을 계기로 NL, PD 간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앞의 연재 글에서 다루었다. 1988년 시점에서는 전대협의 통일운동이 ‘감상적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소시민적’, 즉 ‘소부르주아적’ 통일관에 입각해 있다는 것이 핵심적 논점이었다. 1989년 시점에서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운동을 필두로 계급대중운동이 고양되고 노태우 정부를 상대로 한 고강도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때 가해진 비판은 전대협의 활동이 평양축전 참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한편으로는 정부와 협력을 추구하거나, 또는 정부의 불허방침을 깨고 방북을 강행함으로써 계급대중운동의 투쟁을 방기할 뿐만 아니라 공안탄압에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즉 남한의 통일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통일관이나 ‘투쟁’ 방침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북한의 혁명노선과 통일노선, 남한 정부가 추진하는 북방정책에 대한 더 엄밀한 분석을 전제로 해야 했다. 또한 이러한 분석은 ‘NL론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종합되어야 했다.

 

1) 북한의 남조선혁명론과 조국통일론 비판

 

이 연재에서는 북한의 남조선혁명론과 조국통일론에 대한 비판의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 이회성의 『금단의 땅』을 인용하기도 했다. ‘자생적 사회주의’ 그룹과 통일혁명당의 가상논쟁을 통해 어떤 쟁점들이 맹아적으로 존재했는가를 살펴보았다. 이제 1980년대 말이라는 시점에서 남한의 PD 운동은 북한의 노선을 어떻게 평가했는가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1988년에 작성된 「북한의 ‘남조선혁명론’과 ‘조국통일론’에 대하여」을 검토해야 한다. 이 글은 북한의 노선에 대한 PD의 인식을 정초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표 1] 『주체사상에 기초한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 리론』(1975).
두 개의 전도와 여섯 가지 방도.

 

이 시론은 주체의 사상(철학적 원리, 사회역사 원리, 지도원칙)과 방법(영도체계, 영도예술), 혁명전통의 정당성과 생활력이 조선노동당 정책사에서 검증되어야 하며(즉 조선노동당의 정책사가 얼마나 역사적, 정세적 조건에 적합했는가), 그러려면 정책의 기초가 되는 남조선혁명론과 조국통일론을 분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 분석의 요지는 이렇다.

 

첫째, 북한에서 1975년에 발표된 『주체사상에 기초한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 리론』은 혁명과 통일을 위한 두 개의 전도와 여섯 가지 방도를 제시한다. 즉 혁명과 통일을 향하는 길은 평화적 전도와 비평화적 전도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평화적 전도도 세 가지 방도가 있을 수 있는데 ① 남북합작에 의한 연방제 통일국가 창설, ② 남한에서 반제자주정권 수립과 중립화, ③ 남조선혁명(즉 남한 전위당이 지도하는 남한혁명)이다. 비(非)평화적 전도 역시 세 가지 방도가 있을 수 있는데, ④ 반침략전쟁(즉 대북 침략전쟁이 발발할 경우 사태를 역전시켜 통일을 완수하는 방안), ⑤ 미제축출을 위한 정의의 전쟁(즉 미제축출을 위한 북한의 선제적 전쟁), ⑥ 남조선의 혁명적 정세 하에서 지원(즉 남한에서 봉기가 발생할 경우, 이에 호응하기 위한 북한의 군사행동)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북한이 이미 1960년대에 연방제 통일방안을 제시했으며, 박정희 정부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남조선혁명론(그리고 그 담지자로서 통일혁명당 건설)을 추진했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북한의 입장이 비평화적 전도를 원리적으로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적으로는 1960년대 이후로 평화적 전도에 방점을 맞추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북한 지역에서 사회주의 건설 완수를 최우선시하면서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의 과제는 일차적으로 평화적 전도를 통해 추구한다는 노선이었다. (그렇지만 ‘비평화적 전도’를 강조하는 흐름이 북한 내에 존재했고 무장게릴라 남파와 같이 현실로 표출된 적이 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따라서 평화적 전도를 중심으로 북한의 노선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1방도인 연방제와 합작론, 2방도인 반제자주정권 수립과 중립화라는 쌍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째, 그런데 평화적 전도로서 북한의 연방제 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의미가 계속 변화했다. 1980년에 이르러 제시된 ‘고려민주연방국 창설안’은 완전연방제를 의미하게 된다. 불완전 연방제란 연방제가 완전한 통일까지 과도적으로 실시된다는 의미지만, 완전 연방제란 연방제가 통일국가의 정치체계가 된다는 뜻이다. 이는 고려민주연방국이 곧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라는 북한의 주장이 정확히 말하는 바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불안전연방제는 ‘2제도, 2정부’가 완전한 통일정부로 가는 이행기라고 설정했다면, 완전연방제는 ‘2제도, 2정부’가 최종적 목표라고 간주한다. 이는 북한의 조국통일론이 수세적 성격으로 전환되었다는 의미라는 점은 이미 지적했다.

 

셋째, 그러면서 2방도였던 ‘반제자주정권 수립과 중립화’는 민족자주정부를 의미하게 되고, 민족자주정부는 완전연방제의 전제조건이 된다. 그리고 3방도, 즉 남한 전위당이 지도하는 남조선혁명론도 민족자주정부로 수렴되게 된다. 더 강하게 평가하면 남조선혁명론이 소멸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1970년대에는 남조선혁명론이 ‘가장 현실적이고 확실성 있는 방도’로 규정했으나,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완전연방제가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성 있는’, ‘유일하게 가능하고 정당한’ 방도가 된다. 따라서 남조선혁명론이 없는 평화적 전도란 곧 ‘평화공존론’이 아닌가 의구심을 품게 된다.

 

2) 민족자주정부론 비판

 

민족자주정부론은 1950~1960년대 소련이 제시한 ‘민족민주주의론’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1960년 1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81개국 공산당·노동당 대표자회의에서 채택된 「모스크바 성명」은 민족민주주의론을 규정했다. 이는 NL론을 이해하는 데 긴요하므로 자세히 살펴보자.

 

(1) 민족민주주의론이란 무엇인가

 

1956년 소련공산당 20차 대회에서 흐루쇼프 서기장이 ‘스탈린 비판’을 한 후, 사회주의 진영은 세계정세를 새롭게 파악하고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기 위해 국제대회를 개최했다. 1957년 11월 사회주의국 공산당·노동당 회합이, 1960년 11월 81개국 공산당·노동자당 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양 회의는 세계상황을 ‘사회주의 대이행기’라고 규정했다. 체제 경쟁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우위를 확보했고, 식민지 체제가 결정적으로 붕괴했기 때문이다. 1960년 회의는 ‘자본주의 전반적 위기의 제3단계’라는 테제를 채택하면서 스탈린 시대의 진영 테제를 기각하며 평화공존 테제와 사회주의로 평화적 이행전략을 수립한다. 이러한 평화적 이행전략을 서유럽에 적용할 때 ‘의회주의적 길’로 표현되며, 신흥독립국에 적용할 때 진보적 민족민주국가를 통한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 즉 민족민주혁명으로 표현된다.

 

신흥독립국의 경우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성명은 식민지체계의 붕괴 결과 나타난 국가의 유형을 ‘인민민주주의 국가’와 ‘불완전한 독립국가’로 구분했다. 인민민주주의 국가란 노동자계급(즉 공산당과 노동당)의 주도하에서 정치경제적 독립을 한꺼번에 쟁취한 국가를 말한다. 반면 불완전한 독립국가는 민족부르주아(즉 비(非)공산당)의 지도하에 정치적 독립만을 이룬 국가를 뜻한다. 그런데, 불완전한 독립국가의 경우 이들이 중립외교정책을 취한다면 반제국주의 진영의 일원이 될 수 있으리라 보았고, 따라서 이들 국가의 당면 과제를 ‘민족민주주의’로 설정하였다.

 

그렇다면 ‘민족민주주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였는가. 성명에서는 기준을 이렇게 제시했다. ① 제국주의와 그 군사블록, 외국주둔 군사기지에 반대하고 정치경제적 독립을 일관되게 추구하는 국가, ② 제국주의적 자본침투와 새로운 식민주의 형식에 반대하는 국가, ③ 독재와 전제적 통치방법을 포기하는 국가, ④ 인민에게 광범한 민주적 권리와 자유, 농업개혁과 기타 개혁의 법제화, 정부정책 형성에 대한 참여를 보증하는 국가다.

 

결국 1960년 시점에서 소련의 평화공존, 중립화 노선은 민족부르주아, 또는 진보적 쁘띠부르주아의 지도성과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국가체제를 승인하고,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를 고수하지 않는 민족민주전선을 구성,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의미했다.

 

그런데 이러한 전환은 소련의 외교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 내에서 스탈린의 강경 외교노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강경노선으로 인해 오히려 신흥독립국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미국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는 비판이다. 따라서 신흥독립국에 소련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실제로도 1953년 중남미 과테말라로의 무기수출, 1955년 흐루쇼프 서기장과 불가닌 수상의 동남아, 인도 순방을 계기로 소련은 신흥독립국에 대해 적극적인 외교 지원과 경제원조를 수행하게 되었다.

 

요약하면, 사실 불완전한 독립국가의 민족민주주의론이란 1950년대에 소련과 신생 중국, 동유럽 사회주의가 위세를 보이고 여타 신생 독립국에서 민족해방운동이 고양된 결과로 나타난 노선이었다. 그런 조건에서 미소 양국 간에 넓게 펼쳐진 여러 국가가 중립외교정책을 취한다면 사회주의 진영에 유리한 국제정세가 전개될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2) 국제공산주의운동과 민족민주주의론 비판

 

사실 민족민주주의론과 짝을 이루는 경제 이론이 ‘국가자본주의론’이며, 그 모델은 바로 인도다. 신흥독립국에서는 국유부문이 확대되는 경향이 있고, 이러한 경향은 신흥독립국의 독립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도의 경우, 국가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의 국가자본주의(1917년 10월혁명 이후의 러시아)와도 다르고, 선진자본주의의 국가독점자본주의와도 다르다. 즉 국가자본주의는 공업화와 경제발전을 촉진하고, 제국주의의 지위를 약화하고 인도의 독립을 강화하므로,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적 단계, 곧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개척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국가자본주의론, 민족민주주의론에 대해서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발본적인 비판이 제기되었다.

 

첫째, 1956년 시점에 인도공산당 서기장은 국유부문의 발전이 자립경제를 촉진하는 데 유용하지만, 그것이 곧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비판했다. 인도 정권은 의연히 부르주아와 지주에게 봉사할 뿐이므로, 노동자와 인민 대중의 헤게모니가 있어야만 국가자본주의가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에 봉사할 수 있다.

 

둘째, 1962년 시점에 이르면, 민족부르주아가 애초에는 진보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1950년대를 거치며 제국주의와 공공연히 협력했고, 독점체는 역으로 국가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결국 국가자본주의는 반동적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전화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셋째, 1960년대 말에 이르면 민족부르주아가 애초에는 진보적이었다는 관점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신흥독립국에서 민족부르주아는 경제적으로 취약했기 때문에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를 이용했고, 그래서 국유부문이 설립, 확대되었다. 제국주의는 신흥독립국 민족부르주아에게 원조,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경제적 종속을 유지, 강화하고자 했는데, 국가자본주의론은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종합해보면, 민족민주주의론과 국가자본주의론은 (미소 경쟁이라는 배경에서) ‘중립’정권에 대해 우호정책을 펼치고자 했던 소련의 외교정책을 정당화하는 게 주목적이었다. 민족민주주의 반제성, 국가자본주의의 진보성은 곧 ‘친소’ 노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표 2] 식민지반 봉건사회론에서 종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론까지 논쟁 과정

 

그렇지만 소련의 외교정책은 시련을 겪게 된다. 소련이 민족민주국가로 분류한 여러 나라에서 1960년 중반 우익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정권이 전복되었다. 예를 들어, 알제리 벤 벨라 정권(1965년), 인도네시아 수카르노(1965년),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 정권(1966년), 말리의 모디보 케이타(1968년). 이런 과정을 겪으며, 1960년대 후반, 소련에서는 “제3세계에서 사회주의 이행에 관해 급진적인 민족주의 지도자가 지도하는 비교적 간략한 과정으로 바라본 초기의 희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즉 민족민주주의와 국가자본주의가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 나아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손쉽게 담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사후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국가자본주의론을 극복하기 위해 1960년대 말 ‘종속적 자본주의론’이 부상하고, 1970년대 말 ‘종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 등장한다. 이는 1980년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배경이 되었다.)

 

(3) 한국에 민족민주주의론을 적용할 수 있나

 

만약 NL론의 민족자주정부가 이와 같은 민족민주주의를 의미한다면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 첫째, 민족자주정부론은 남한의 변혁노선으로서 적절한가? 둘째, 민족자주정부론은 남한의 변혁노선으로서 실현가능한가?

 

첫 번째 질문에 관해 PD 운동은 단연코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남한과 북한은 분단을 계기로 사회구성체가 상대적으로 자율적으로 발전했고, 따라서 남한사회의 변혁경로가 개별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즉 한반도에서 전국적 범위의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NLPDR)이 실현되려면 남한에서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이 반드시 개시되어야 한다. 또한 북한 역시 사회주의 건설에서 나타난 내적 모순(개인숭배, 주의주의)을 변혁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남북한 사회구성체 각각에서 동시적으로 혁명적 전화가 전제되어야 남북한의 통일적 발전이 가능하다.

 

두 번째 질문에 관해서는 과연 남한에서 반제, 중립화를 추구하는 민족부르주아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따져 보아야 한다. 1987년의 야권세력, 즉 김영삼 씨와 김대중 씨가 이끄는 야권 집단이 반제, 중립화를 추구하는 세력으로 볼 수 있는가. 누군가는 1980년대까지의 김대중 씨가 그에 근접한 정치세력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실제로 NL 진영은 1987년과 1992년 ‘민주정부론’을 내세우며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반복했다.

 

하지만 김대중 씨가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기자회견에서 제시한 ‘남북교류와 공존에 기반한 평화통일론’과 ‘4대국 평화보장론’은 엄밀한 의미의 반제, 중립화 노선으로 볼 수 없었다. 4대국이 평화를 보장하고 남북이 교류와 공존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미국 닉슨 정부의 데탕트 정책, 즉 동아시아 각국의 교차승인과 평화공존에 가까운 것이었다. 김대중 씨가 1989년 6월 3일 광주교육대학에서 열린 시국 강연에서 “한반도는 통일 후 오스트리아식 영세중립국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특정할 수 없는 기간에 걸친 ‘국가연합’ 단계 이후의 일로 설정된다. 즉 ‘영세중립화’는 당면 과제가 아니다. 1997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김대중 씨의 행보도 마찬가지다. 김대중 대통령은 반제, 중립화를 추구한 바 없으며,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으로 평화공존론을 추구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민족민주주의론이나 국가자본주의론은 1950년대 소련에 우호적인 대외환경을 조성한다는 외교정책의 맥락에서 정식화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를 정당화하는 모델이 되었던 신흥독립국에서 1960년대에 이르러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변질되거나 우익 쿠데타에 의해 무력화됨으로써 그 실효성에 강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와 유비해 본다면, NL론의 민족자주정부론이나 완전연방제론도 1980년대라는 조건에서 북한에 우호적인 대외환경을 조성하려는 북한의 대남한 정책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고, 그렇다면 이는 ‘조국통일론’이라는 외피를 취하지만 사실상 지극히 수세적인 의미에서의 평화공존론을 의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인 문제는 ‘민족 부르주아의 진보성’이 남한의 객관적 현실을 준거로 성립된 관점이 아니라, 북한의 대남한 정책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진 일종의 ‘허구’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런 모든 점에서 NL론은 남한의 현실에 기반을 둔 변혁노선과 괴리된다.

 

요약하면 국가자본주의론과 민족민주주의론이란 1950년대에 처음으로 제기된 노선으로 그 유효성의 조건이 파괴됨에 따라, 1960~1970년대를 거치며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980년대에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반제반독점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이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유비하면, 남한에서는 시대적 맥락과 괴리된 NL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남한 자본주의의 (종속적) 발전 과정에 조응하여 PD론이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3) PD 학생운동의 1990년 범민족대회 비판: 노태우 정부는 반통일세력인가?

 

1990년의 출발은 여러모로 극적이었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청와대에서 3당 통합을 선언하면서 민주자유당(민자당)이 탄생했다. 또한 같은 날, 1월 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성균관대에서 창립대의원대회를 열고 단병호 초대 위원장을 선출하였다. 4월에는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골리앗 투쟁이 전개되었고, 한국방송공사(KBS)에서도 방송 민주화를 요구하며 파업이 전개되었다. 한편으로는 반민자당 투쟁, 다른 한편으로는 파업 지원 투쟁이 시급한 투쟁과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투쟁이 얼마간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6월의 한소 정상회담이 개최된 후, 범민족대회 개최 문제는 정세의 초점으로 부상했다.

 

이때 PD 학생운동이 제기한 바는 남한 정부, 즉 노태우 정부를 과연 ‘반통일세력’이라고 일면적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노태우 정부가 7월 20일 민족대교류 기간을 선포하고, 8월 2일에는 방북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무제한적으로 모두에게 방북을 허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음 날인 8월 3일에는 서울대에 PD 학생운동 그룹(반제반독점 PD 그룹)이 작성한 대자보가 붙었다. 여기에는 “현 정권은 더 이상 반통일세력이 아니라 흡수통합을 지향하는 파쇼적 통일세력”이며, 북한의 약한 고리인 개혁·개방을 유도하여 남한의 대북 우위성에 근거한 흡수통합이 가능하리라 보기 때문에 이처럼 ‘흡수통일전략’으로 전환하였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미국과 노태우 집단의 북방정책은 단순히 교차승인과 분단고착화를 통한 두 개의 한국 조작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서독식 흡수통합을 노리는 것이다.

 

② 현 정권에는 남북교류 적극 추진파와 시기상조론을 펴는 주장이 있으나, 시기의 완급이 문제일 뿐 ‘북한개방유도-흡수통합’의 구상을 추진하는 교류 적극파가 대세가 될 것이다.

 

③ 북한은 서방의 자본, 기술과 경쟁할 만한 대응력이 없다. 현 정권은 전면적인 개혁·개방을 유도하기 위해 대폭적인 교류를 제의하고 [북한의 초청에 따른] 선별적 방북도 허용하고, 국가보안법 개정까지도 불사할 것이다. [실제로 당시 국회에서는 국가보안법 개정 문제가 논의되고 있었고, 노태우 정부는 국가보안법 문제를 협의할 수 있는 북한과 법무당국자(장관)회담 개최를 제안하기도 했다.]

 

④ 따라서 현 정권은 분단고착화 세력이 아니라 파쇼적 통일 세력이다.

 

⑤ 이런 상황에서 ‘자유왕래, 전면개방’을 요구하는 투쟁을 북한을 고립시키고 미국과 노태우 집단의 흡수통합론에 동참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또한 미국과 노태우 집단이 분단고착화에 연연해 하지 않는 한 유엔 단독가입 반대 투쟁이라는 방향성조차 문제가 있다. [즉 미국과 노태우 집단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유도하는 것이 목표이므로, 남한의 단독 가입이 아니라 남북 동시 가입을 더 선호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파쇼 하의 통일 반대’, ‘반동적 북방정책 분쇄’와 같은 구호로 집약되었다. PD 학생운동은 NL 학생운동과 정치논쟁을 전개하고, 범민족대회와 별도로 독자집회를 개최하면서 자신의 주장과 활동을 펼쳐나간다. 이러한 흐름은 범민족대회 추진본부나 전대협의 인식과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추진본부와 전대협은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반통일적’인 ‘새로운 분단고착화 음모’이며, 자유왕래·전면개방 투쟁이 미국과 노태우 집단의 급소를 공격하는 계기가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1990년 PD 학생운동이 개최한 집회. 1990년 9월 27일 서울대에서 열린 ‘반민중적 통일정책분쇄와 민주압살 파쇼민자당 타도를 위한 백만학도 결의대회’의 한 장면. ‘가라 자본가 세상’, ‘독점재벌 몰수’, ‘타도 민자당’, ‘사수 전노협’, ‘민중권력 쟁취’와 같은 플래카드를 볼 수 있다. 

 

결의대회 후 행진. ‘반동적 북방정책 투쟁으로 분쇄하고 민중탄압 민중압살 노태우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전대협이 1990년 범민족대회 사업을 평가하고 하반기 사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교류론’과 ‘군축론’이 대립했다는 사실은 전대협 역시 객관적 현실을 얼마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전대협 내 한 쪽에서는 ‘1천 개 학과의 방북 추진’을 중심으로 전면개방과 교류를 사업의 중심에 두자고 주장했고, 다른 쪽에서는 평화통일의 장애를 해소하는 평화군축(특히 군복무기간 단축과 군비축소)을 중심사업으로 제시했다. 그 중 군축론자는 전면개방, 자유왕래를 주장할 경우 북한의 고립을 유도하게 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는 북한이 전면 교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제한적’ 교류를 통한 합작 사업을 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었다.

 

4) 교차승인과 평화공존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편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은 1990년 8월 15일 시점에 남북정부의 합의에 의한 교차승인과 유엔동시가입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발표한다. 인민노련의 주장을 살펴보자.

 

우리는 북한 정부가 정확하지 않은 정세판단에 기초하여, 그리고 ‘두 개의 조선 정책 반대’라는 낡은 명분과 고려민주연방공화국 방안에 얽매여 새로운 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비판한다. 특히 우리는 교차승인과 유엔동시가입 문제에 대해 북한이 취하고 있는 정책의 잘못을 분명히 지적하고자 한다. (…) 교차승인과 유엔동시가입이 남북한 분단을 고착화하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데 대해서는 우리는 납득할 수 없다. 이미 전후만 계산하더라도 40년 가까이 분단 상태는 계속되어 왔으며 그런 의미에서 분단은 이미 고착되었으며, 따라서 새삼 더 고착화될 것도 없고 새삼 ‘두 개의 조선’이 생길 수도 없다. (…) ‘신사고적’ 새로운 세계정세 속에서 우리의 희망이나 의지와는 관계 없이 교차승인은 이미 대세가 되고 있다.

 

이미 문익환 목사는 1989년 3~4월 방북 시기에 김일성 주석을 만나 ‘통일을 지향하는 과도적 교차승인’을 제시했다. 즉 교차승인이 반드시 영구분단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고, 군비축소와 긴장완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또한 1990년 7월 시점에 발간된 《현실과 과학》은 ‘2+4’, 즉 ‘남북한 더하기 미국과 일본, 중국과 소련’ 간 교차승인 구도가 현실화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나아가 교차승인은 “남북한 관계의 현실화를 의미하여 북한 또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대안을 뜻한다.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의 통합논리에 반대해야지 합리적인 국가관계론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반드시 주목해야 할 문제가 있다.

 

첫째, 과거 남한 정부는 명분과 선전 수준에서 통일 슬로건을 제시했을 뿐이고 현상고착화 정책을 취해왔다면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나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은 통일의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즉 교차승인과 유엔동시가입에는 제국주의와 남한 독점자본의 장기적 의도성이 담겨 있다. (즉 장기적인 흡수통합 지향을 담고 있으므로 이를 반드시 유의해야 한다.)

 

둘째, 교차승인은 독점자본의 대표(즉 노태우 정부)를 (북한, 소련, 중국이) 국가 전체의 대표로 승인하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따라서 독점자본과 국가권력의 국제적인 지위를 강화한다. 그러므로 국제관계의 현실화가 지닌 합리적, 긍정적인 변화가 남한 내 계급적 세력관계에서 독점자본과 국가권력의 힘을 강화할 수도 있다. 교차승인의 결과를 유리한 운동조건으로 변화시키는 데 결정적 요인은 주체적 역량이다.

 

셋째, 북한이 교차승인을 선택하더라도 남한의 변혁운동이 남한 자본주의의 발전에 부합하는 변혁노선을 수정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남한 변혁운동 노선을 ‘민족민주주의론’, 또는 ‘민족자주정부론’으로 변질시켜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남한 변혁운동의 독자성을 무시하는 편의주의, 북한 중심적 실용주의가 강화될 우려가 있는데, 이는 남한운동을 새로운 ‘일반민주주의론’, ‘합법주의’로 변질시킬 것이다.

 

종합해보면 ▲북한이 공식적으로는 교차승인, 유엔동시가입을 반대하고 있으나 사실상 ‘평화공존’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정책선회가 이뤄지고 있으므로 2+4 안이 수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는 그런 전환 과정에서 ‘NL론’을 매개로 남한 내 변혁노선을 형해화하는 것이다, ▲남한이 흡수통합(‘파쇼적 통일’)을 추구하고 있는 마당에, 평화공존은 나름 합리적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럴수록 더욱더) 남한 변혁의 독자성을 승인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4. 1991년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1) 1991년 초반, 남북고위급회담에 대한 비관적 견해

 

1990년 9월부터 남북고위급회담이 개시되었으나, 1991년 초반까지도 회담 타결의 전망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관측도 많았다. 왜 그랬나?

 

첫째, 북한은 군사문제 해결이라는 기존 원칙을 고수하면서 남한 당국을 계속 강도 높게 비난했다. 1991년 신년사에서 김일성 주석은 “남조선 당국자들이 말하는 신뢰조성 우선이라는 것은 불가침선언 채택을 회피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한 남한 내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임기 내에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한의 불가침선언 요구를 수용할 것이라는 일부 관측도 있으나, 노태우 대통령의 1월 연두회견 역시 북한에 대한 유화 제스처가 거의 없었다.

 

둘째, 북한은 1990년 9월 1차 회담에서 순조로운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팀스피리트 훈련의 잠정 중단, ▲방북인사 석방, ▲유엔 단독가입 노력 포기를 내걸었다. 그러나 한미 양국은 1991년 1월 25일, 한국군과 주한미군, 미국본토 증원군이 참가한 가운데 예정대로 팀스피리트 훈련을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남한 정부는 1991년 1월 24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 추진본부 준비위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이창복 씨, 김희택 씨 등 핵심간부를 구속, 수배조치 했다. 북한은 특히 팀스피리트 훈련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애초 1991년 2월, 평양에서 열기로 한 4차 고위급회담이 연기되었다.

 

2)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의 배경

 

하지만 고위급회담이 중단된 상태에서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한국과 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사건이다. 왜 북한이 ‘분단고착화’라며 유엔 동시 가입을 반대하던 기존 입장을 바꾸게 되었는가. 여기에는 1991년 5월 3일 중국 리펑 총리의 방북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총리회담에서 리펑 총리는 만일 한국이 다시 유엔 가입안을 제출한다면 이미 한국과 수교한 소련이 반대하지 않는 상황에서 중국만 반대를 고수하기 어렵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북한 연형묵 총리는 이러한 제안에 당황하여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고, 다음 날 김 주석이 리펑 총리와의 회담에서 중국과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만약 중국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남한의 유엔 단독 가입이 성사될 것이므로, 북한으로서는 동시 가입이라는 절충안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따라 《노동신문》은 유엔 동시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논평을 발표했다. 그 결과, 1991년 9월 17일 유엔총회에서 남북한 동시 가입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직면하여 7월 시점에 북한은 4차 고위급회담을 8월에 개최하자며, 회담 재개를 수용했다. 그런데 고위급회담을 며칠 앞둔 8월 20일, 북한은 남한에서 콜레라 발생을 근거로 회담 장소 변경을 요구했다. 8월 19일 소련에서 보수파의 쿠데타가 발생했기 때문에, 북한의 요청이 소련 쿠데타의 결과를 지켜보려는 의도를 담고 있지 않냐는 관측도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은 소련 보수파의 쿠데타를 암묵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소련 쿠데타는 8월 22일 조기에 끝나게 되고, 8월 23일 북한은 4차 고위급회담을 10월에 개최하자고 수정 제안했다. (8월 24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소련 공산당의 해체를 선언했다. 12월 8일에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합이 해체되고 러시아를 중심으로 ‘독립국가공동체’〔CIS〕가 창설된다. 즉 소련이 소멸하게 된다.)

 

여기에 두 계기가 더 추가되었다. 첫째, 미국은 1991년 9월 28일 ‘전세계 배치 전술핵무기 철수 및 폐기 선언’을 발표했다. 미국의 이 조치는 특별히 남한 배치 핵무기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고 소련의 해체 움직임에 따라 핵무기 확산 방지를 위한 선제적 대응이었는데, 이러한 조치가 한반도 정세와 맞아떨어지면서 남북기본합의서나 비핵화공동선언 채택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둘째, 김일성 주석이 10월 초 10일간 중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김 주석은 중국 경제특구를 시찰했다. 당시 중국 지도자들은 북한도 중국처럼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개방, 개혁정책을 추진하라고 권고했다. 특히 외국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려면 평화적 환경조성이 필수적이므로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미국 전술핵무기 철수라는 호기를 맞아 북한 핵문제도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전했다. 중국 방문 후 김 주석은 10월 16일 정치국 회의를 소집해서 남북협상의 타결, 핵 문제 해결 방향,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 설치에 관한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상황이 급변하면서 남북고위급회담도 급진전된다. 1991년 12월 서울에서 개최된 5차 회담에서 북한은 적극적인 타결 의사를 표명했다. 북측 단장 연형묵 총리는 남측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에게 “이번에는 꼭 합의하자, 합의서가 채택되면 정상회담도 가능하다, 경제협력도 되도록 빨리 추진하자”고 말했다. 5차 회담에서는 남측 주장이 거의 관철되었는데, 이는 김일성 주석의 “합의하고 오라”는 지시 덕분이었다. 김정일 당비서 역시 “북한 입장이 관철되지 않을 때는 양보를 하고라도 이번 회담에서 타결하라”고 훈령을 내렸다. 그 결과 12월 13일 양측 총리는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했다. 1991년 초반까지도 남한 내에서 남북 유엔 동시가입이 성사되거나, 남북고위급 회담이 어떤 합의를 이루리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만큼, 이러한 진전은 매우 놀라웠다.

 

3) 남북기본합의서의 전문

 

남북기본합의서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남북기본합의서는 명칭처럼 전문과 1장 남북화해, 2장 남북불가침, 3장 남북교류·협력, 4장 수정 및 발효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전문을 살펴보자.

 

남과 북은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뜻에 따라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하고 정치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여 민족적 화해를 이룩하고 무력에 의한 침략과 충돌을 막고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며 다각적인 교류·협력을 실현하여 민족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도모하며 쌍방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전문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양측의 관계 규정이다. 즉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규정인데, 그렇다면 이는 양측이 국가 간 관계가 아니라는 함의인가. 보통 남북기본합의서는 1982년 전두환 정부 당시 제안된 ‘남북기본관계 잠정협정’의 연장선 위에 있고, 이 잠정협정안은 통일 독일 이전인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 간의 관계의 기본원칙에 관한 협정)을 모델로 한다고 한다. 동서독 기본조약의 전문과 비교해보자.

 

조약체결 쌍방은 평화유지에 대한 그들의 책임에 유의하며, 유럽의 긴장완화와 안전보장에 기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현존하는 국경선을 기준으로 한 모든 유럽국가의 국경불가침 및 그들의 영토보전과 주권존중이 평화를 위한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양 독일은 상호관계에 있어서 무력에 의한 위협이나 무력사용을 마땅히 포기하여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민족문제를 포함한 여러 가지 기본문제들에 대하여 이해의 차이에 대한 적대감정 없이 역사적 현실에 입각하여 양 독일 주민의 복지향상을 목적으로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 간의 협조를 위한 전제조건을 충족시키려는 의도로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동서독 기본조약은 명시적으로 양측 관계가 국가 간 관계라는 점을 인정한 가운데, 무력의 사용과 위협을 중단하고, 적대감정 없이 양측 주민의 복지향상을 추구한다고 밝혔다. 즉 분단현실을 객관적 사실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논자들은 동서독기본조약을 모델로 한 전두환 정부의 남북기본관계 잠정협정이 ‘분단 고착화’ 정책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반면 남북기본합의서는 국가 간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의식적으로 강조했다. 하지만 남과 북은 이미 유엔에 각각 국가로서 가입했다. 또한 합의서에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 총리 연형묵의 이름으로, 남한은 대한민국 국무총리 정원식의 이름으로 서명했다. 나아가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제 내용은 동서독 기본조약과 대동소이하다. 종합하면 기본합의서의 전문은 양측이 통일을 지향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기본합의서 채택을 위해 북한에 명분을 제공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양측은 (대외적으로는) 국가 간 관계이지만,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4) 남북기본합의서의 주요 내용

 

각 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남북화해 장은 다음의 내용을 담고 있다. ①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② 상대방의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아니한다. ③ 상대방을 파괴·전복하려는 일체 행위를 하지 아니한다. ④ 현 정전상태를 남북사이의 평화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며, 이러한 평화상태가 이룩될 때까지 현 군사정전협정을 준수한다. 이 중에서 핵심 포인트는 첫째, 상대방을 파괴, 전복하는 행위를 중단한다는 합의다. 북한은 남한이 북한의 개혁개방을 유도하면서 흡수통일을 추구할 수 있다는 의구심을 지닌 데 반해, 남한은 북한이 과거의 대남 혁명노선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고 의심했다. 따라서 남한은 이러한 구절을 반드시 삽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만약 통일혁명당과 같은 조직이 구성된다면 기본합의서 위반이라는 남측의 주장이 제기될 수 있었다.) 둘째, 평화상태로 전환, 즉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을 추구하되, 그 이전까지는 정전협정을 준수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두 가지 포인트가 있는데 하나는 ‘남북 사이의 평화상태’로 전환한다고 하여, 북한이 직전까지 주장하던 북미 평화협정 체결 요구 대신 남측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또 하나는 평화협정으로의 전환을 위한 로드맵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향후에 기본합의서의 구체적 이행 문제가 논의되면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될 사안이었다.

 

[표 3] 남북기본합의서 ‘8대 쟁점’과 타결안
※ 이 표는 임동원, 위의 글에서 재구성했다. 5차 고위급회담을 앞두고 11월 판문점에서 네 차례의 실무대표 접촉이 있었고, 상당 부분 의견을 모았는데, 그중에서 합의하기 어려운 8개 조항이 남았다. 8개 조항은 고위급회담에서 다루어졌다.

 

[표 4] 고위급회담 추가 3대 쟁점과 합의안

 

다음으로 남북불가침 장을 보면, ① 상대방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무력으로 침략하지 아니한다, ②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정전협정에서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 ③ 발효 후 3개월 내에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군사적 신뢰조성과 군축을 위한 문제를 협의한다. (대규모 부대이동과 군사연습의 통보,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 군 인사 교류와 정보교환, 대량살상무기와 공격능력 제거.) 여기서 포인트는 첫째, 신뢰구축에서 군비축소로 나아간다는 남측의 접근법이 수용되었다는 점이다. 다만 분쟁이 발생했을 때 유엔헌장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방안은 북측의 반대에 따라 수용되지 않았고, ‘남북 간에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둘째, 양국 경계선이 정전협정에서 명시한 군사분계선 외에 양측이 합의하지 못했던 해상분계선의 경우 지금까지 관할한 지역을 인정한다는 대목이다. (이를 근거로 남측은 북방한계선〔NLL〕이 서해상 군사분계선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남북교류·협력 장에서는 ① 자원의 공동개발, 민족 내부교류로서 물자교류, 합작투자 등 경제교류와 협력을 실시한다, ② 여러 분야에서 교류와 협력을 실현한다, ③ 민족구성원의 자유로운 왕래와 접촉을 실현한다, ④ 이산가족의 자유로운 서신거래와 왕래, 상봉, 방문을 실시한다, ⑤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고 해로와 항로를 개설하며, 우편과 전기통신 교류 시설을 설치한다 등. 여기서 포인트는 첫째, 한국 정부는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출판물의 전면 개방을 실시하고 모든 주민의 자유왕래, 접촉을 실시하자고 주장한 반면, 북한은 여러 근거를 들며 이를 거부했다는 점이다. 결국 문안은 북한의 의견을 존중하여 ‘교류협력한다’, ‘실현한다’는 식으로 절충적으로 정리했다. 이는 북한이 이러한 수단에 대해 공식적인 주장과 달리, 부담감을 느끼며, 개혁개방을 유도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인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는 통일운동이 전개한 자주교류 운동에 대해 함의하는 바가 있을 터인데, 뒤에서 다시 다룬다.) 둘째, 남북 무역은 ‘민족 내부의 거래’로 간주한다는 언급인데, 즉 국가 간 관세가 적용되지 않는 ‘남북 자유무역지대’ 창설의 근거가 될 수 있는 대목이다.

 

종합해보면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직전까지 쟁점이 된 8개 항은 거의 모두 남한 측이 제시한 것으로, 이는 남북기본합의서가 남한 측이 공세적으로 제의한 의제를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북측 인사는 문안의 90%가 남한 측 주장에 따른 것으로 “이것은 당신네 협정이지 우리 협정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 함의는 무엇일까. 향후 남북고위급회담이 남측의 강력한 드라이브를 통해 전개되었지만, 그만큼 북한 역시 강력한 타결과 이행 의사를 품게 되었다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오히려 북한이 남북기본합의서 그 자체를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기본합의서 타결이라는 그 상징적 의미에만 주목했다는 의미였을까. 이는 남북기본합의서가 주변화, 형해화되는 과정을 자세히 검토해야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5. 1991~1992년의 통일운동

 

이종석은 북한 대외정책 변화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결국 북한은 탈냉전 초기에 사회주의 몰락과 경제위기, 외교적 고립 심화라는 현실적 도전 요인들 앞에 굴복하면서 개혁개방을 기조로 한 중국노선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근접해 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외교는 탈냉전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도전 앞에서 자기수정을 꾀하면서도 여전히 교조적이며 반(反)서방적인 요소를 강하게 띠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북한의 대외정책은 적극적이라기보다는 수동적이었고, 선제적이라기보다는 사후 반응적이었다. 그렇기에 적극적인 변화 의지보다는 교조적이고 보수적 분위기가 강하게 작동했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그런 교조적, 보수적 분위기가 여전히 매우 강하게 작동한 영역 중 하나가 대남사업, 그중에서도 통일운동 관련 사업이었다.나아가 북한 통일단체, 즉 사실상 북한의 관(정부)과 합작방식으로 진행되는 남북해외 연합 통일운동은 기존 노선을 가능한 한 최후까지 고수하려는 북측의 경향에 강하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남한의 통일운동이 북한의 노선변화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활용될 수 있는 여지까지 안고 있었다.

 

1) 1991년 범민족대회

 

1991년 1월 1일 김일성 주석은 신년사에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에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 결성된 것은 북과 남, 그리고 해외의 통일애호역량이 간고한 투쟁을 통하여 이룩한 귀중한 성과이며, 조국통일의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고 통일운동을 확대 발전시키는 데서 획기적 의의를 지닌 사변이었습니다.”

 

실제로 범민련 해외본부는 1990년 12월 16일에, 북측본부는 1991년 1월 25일에 창립했으며, 남측본부 준비위원회는 1월 23일에 결성되었다. 6월과 8월에 서울에서 ‘아시아 한반도 평화와 비핵지대화를 위한 국제회의’, ‘범민족대회’를 개최하겠다는 사업계획도 발표했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1995년 2월 25일 공식적으로 결성된다. 초대 의장은 강희남 목사였다.)

 

준비위원장 문익환 목사는 2월 1일 청와대에 공개서한을 보내 범민련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대통령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통일을 위한 관의 몫까지 민이 하겠다는 것은 아니며, 통일을 위해서 민이 담당해야 할 몫이 있고, 관이 해야 할 몫이 있다. 범민련에 대한 모든 오해를 풀고 통일운동의 동반자적 관계로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정부는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계속해서 탄압을 가했다. (문익환 목사는 범민련 남측본부 준비위원장을 맡았으나, 1991년 ‘분신 정국’과 ‘5월 투쟁’ 기간 동안 여러 열사의 장례위원장을 맡은 게 계기가 되어 형 집행정지가 취소되고 6월 6일 재수감되었다. 그는 1993년 3월 6일, 21개월 만에 출옥하게 된다. 문익환 목사는 수감으로 인해 결국 1990~1992년 세 차례의 범민족대회에 직접 참석하지 못했다.)

 

다른 한편 남북고위급회담 역시 교착상태에 있었다. 1990년 12월 서울에서 3차 고위급회담이 열린 후 1991년 10월 평양에서 4차 회담이 열리기 전까지 회담이 개최되지 않았다. 1991년 4월 10일 북한 고위급회담 대표단의 안병수 대변인은 4차 회담 재개의 전제조건으로 ▲불가침선언 채택 문제와 유엔가입 문제의 계속 협의, ▲구속인사 석방, ▲국가보안법 철폐와 함께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 허용을 내걸었다.

 

이런 상황에서 1991년의 범민족대회는 1990년과 여러모로 비슷한 길을 걸었다. 7월 15일 최호중 통일원 장관은 8월 15일부터 31일까지 ‘통일대행진’을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남북의 각계각층과 해외동포를 망라하여 남북 각각 1천 명씩 총 2천 명 규모가 참가하고, 민간행사로 추진하되 쌍방 당국이 주선하고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행사로는 광복절 경축기념행사(판문점), 국토종단대행진, 통일기원제(백두산, 한라산), 통일문제 대토론회(평양, 서울), 통일문화축전(판문점)가 제시되었다. 이는 북한이 제의한 남북국토순례행사와 통일문제학술대토론회를 수용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7월 16일, 북한의 윤기복 조평통 부위원장은 남측의 제의를 거부했다. ▲범민련이 추진 중인 범민족대회 범위 내에서 수용할 것이며, 이 행사에 남한의 범민련 관계단체 이외에 통일을 지향하는 단체와 인사를 광범위하게 참가시키고, ▲7월 25일 서울에서 남, 북, 해외측 준비회의를 진행하고, ▲준비회의 전까지 범민련과 전대협 관계자를 모두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7월 28일, ‘북한은 8·15 범민족대회가 열리지 못할 경우 남북고위급회담 재개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며 한국 정부를 압박하기도 했다.

 

한편 1991년 8월 3일 전민련, 전교조, 전대협 등 36개 단체가 <’91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출범식을 열었다. 또한 같은 날, 8월 3일 박성희(경희대 작곡과), 성용승(건국대 행정학과) 두 학생이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평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판문점에서 열기로 한 남북학생통일대축전 실무회담을 정부가 허가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보고 이미 베를린에서 실무회담을 열기 위해 6월에 베를린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들은 통일대축전 전대협 대표로 방북을 결행했다. (박성희, 성용승 씨는 베를린에서 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 1992년 8월 15일 결성〕 공동사무국을 운영하다가 1998년 8월 귀국했다.)

 

8월 6일 신창균 남측본부 집행위원장은 통일원을 방문해 정부가 제안한 통일대행진과 범민족대회를 하나로 묶는 방안을 정부와 협의하자며 최호중 통일원 장관, 김창식 통일대행진 행사준비위원장과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통일원 측은 통일대행진이 순수한 민간행사이므로 민간단체 상호 협의해서 결정할 문제라며 면담에 거부 의사를 밝혔다. 또한 통일원은 범민족대회 불허 방침을 거듭 밝히면서 남측본부가 통일대행진에 참여하고자 한다면, 행사준비위와 직접 협의하라고 말했다.

 

결국 범민족대회는 남측(경희대), 해외(동경), 북측(판문점)에서 분산 개최되었다. 북한에서는 ▲8월 7일 백두산에서 열린 백두-한라대행진 출정식을 시작으로 ▲이 행진대를 환영하는 평양시 군중대회(8월 10일), ▲조국의 평화와 통일에 관한 정치대토론회(8월 12일)가 개최되었다. 또한 8월 13일 박성희, 성용승, 전대협 대표 2명과 북측 대학생 600여 명은 판문점에서 군사 붕괴선 통과를 시도하다가 다시 북으로 되돌아갔다. 또 이들을 환영하기 위한 전대협 대표단의 판문점행도 결국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었다. 남한에서는 애초 8월 12일부터 18일까지 경희대에서 2차 범민족대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정부가 대회장인 경희대를 봉쇄했다. 그에 따라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고, 봉쇄를 뚫고 경희대에서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8월 15일에 판문점 북측 지역에서 범민족대회가 개최되었다.

 

1992년 범민족대회의 경우 노태우 정부는 더욱 강경한 대응을 보였다. 3차 범민족대회는 범민련과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전국연합), 전대협, 전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전청대협)가 참여하여 범민족대회 추진본부를 구성하며 사업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이미 남북기본합의서까지 체결한 노태우 정부는 범민족대회를 북한의 ‘교란공작’으로 간주하고,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범민족대회 중지를 북한에 요구하기도 했다. 나아가 정부는 8월 10일 대회 예정지인 중앙대에 전투경찰 3천여 명이 진입하여 태재준 전대협 의장(서울대) 등 75명을 연행하고 학교를 원천봉쇄했다. 그에 따라 대회장이 서울대로 변경되어 범민족대회와 범청학련 결성식이 치러졌다. 하지만 범민족대회를 둘러싼 물리적 충돌이 점점 더 격렬해졌다. 이에 대해 2000-2002년 범민련 사무처장을 맡았던 민경우 씨는 이렇게 평가했다.

 

3차 범민족대회와 범청학련 결성식을 지켜냈지만 공권력과의 대치는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공권력과의 과도한 대치는 조국통일운동의 본성적 요소의 하나인 대중적 지반을 심각히 위축시켰다. (…) 이러한 조건에서 운동의 대중적 지반을 넓히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합법적 공간이 긴요했다.

 

한국이 1973년 6·23 선언으로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의사를 밝히자, 북한은 동시가입은 한반도의 영구분단을 초래한다고 반대하면서 '고려연방공화국'의 국호로 남북한이 단일의석을 갖는 가입안을 주장하였다. 1991년 북한은 단일의석 가입을 고수하는 듯 보였으나, 9월 17일 결국 남북이 동시가입을 하게 되었다. 1991년 8월 14일, 2차 범민족대회 원천 봉쇄에 항의하며 연세대에서 벌어진 시위. “유엔 분리가입? 우리의 입장은 오직 통일 단일국호, 단일의석 가입”이라는 벽보가 붙어 있다.

 

 1991년 9월 17일 유엔 뉴욕 본부에서 남한과 북한의 국기 게양식.

 

범민련이 주관하는 범민족대회에 남한 내 다른 집단도 참여하게 하라는 북한의 입장은 범민련 남측본부를 사실상 남한에서 유일한 통일운동 파트너로 승인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는 곧 범민련이 남북해외에서 유일무이한 통일운동 단체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냐는 문제가 통일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는 뜻이다. 반면 정부는 범민련의 유일무이성을 완강하게 승인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하여 범민련 사수 그 자체가 남한 내 통일운동의 중차대한 과제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이에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면, ‘범민련이라는 조직 자체를 고수하는 것이 통일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1993년 김영삼 정부의 등장을 계기로 새로운 통일운동체를 건설하자는 주장이 제기되는 배경이었다.

 

2) 유엔 동시가입, 남북기본합의서가 통일운동에 가한 충격

 

한편 1991년 유엔 동시가입은 통일운동에 큰 충격을 주었다. 심지어 유엔 동시가입 찬반 논쟁 그 자체가 불모의 소모전이었음을 크게 반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유엔 가입을 결정해 놓은 지금의 현실은 한층 자명하게 유엔 가입 자체가 통일이냐 반통일이냐 하는 장래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유엔 가입을 놓고 벌였던 외교전이 체제경쟁의 불모로서 냉전 하의 소모적 대립이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확연히 드러난 것은 치열한 공방이 분단의 모순에 모순을 더하는 소모전이었다는 사실을 통회하면서 이 허상을 벗어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통일운동이나 범 NL 내에서도 통일운동 노선에 관해 시각을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이종석은 《말》 1991년 10월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문제는 통일, 반통일이 아니라 ‘자주적이고 평화로운 민족공동체의 복원이냐’ 아니면 ‘흡수통합이냐’로 전환되고 있다. 자주적 교류의 문제도 그 취지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북한사회에 오히려 상당한 부담을 안겨주는 자충수로 작용하는 측면이 커지고 있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북한 모두를 정도와 질의 차이는 있으나 통일의 길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한 대상으로 객관화시키는 것이다. (…) 현 단계 통일운동 과업의 재검토 문제는 매우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실제적인 공존의 추구와 남북한의 평화적 번영과 통일을 위한 운동에 주력하는 방향으로 전환함으로써 가능해질 것이다. 즉 현실적으로 남북한 긴장완화와 북한경제의 활성화에 긴요한 군비축소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거나 반핵평화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중요한 운동방향이 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주장의 합리적 핵심은 이미 PD 운동이 선취한 바다. 즉 PD 운동이, ▲노태우 정부도 현상유지가 아니라 (흡수)통일을 지향하는 세력으로 간주해야 한다, ▲현단계에서 교차승인이란 국가 간 관계로의 전환인데, 반드시 통일에 더 불리하다고 간주할 수 없다, ▲이러한 관계 전환에서 긴장완화, 평화정착, 군비축소라는 과정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통일이 달성되려면 궁극적으로 남한사회의 변혁뿐만 아니라 북한사회의 동시적 변혁도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와 다른 각도에서 통일운동의 역할 변화를 전망하는 입장도 있었다.

 

재야나 민족민주운동의 통일 몫도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통일을 끌어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당국에 있고, 당국 사이에서 운동권의 주장들이, 비록 다른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씩 실현될 것이다. 운동권의 위축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오히려 이제 남북 사이에 채택된 합의서나 결정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수행되는지를 감시하면서 당국자 사이에서 조형되는 그릇에 내용을 충실히 채우도록 더 많은 운동권의 역할이 요구된다는 적극적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통일운동이 기존에 내걸었던 요구가 남북 정부에 의해 단계적으로 실현된다면 통일운동이 위축될 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통일운동이 이를 성과로 보고 정부를 감시, 견제하는 활동으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이 글은 당시 노태우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는 움직임에 대해 야당인 민주당이나 통일운동이 소극적으로 대응하거나, 일각에서 1992년 ‘총선 전 정상회담 불가’를 주장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노태우 정부가 총선 전에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고 한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것보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어떠어떠한 내용을 다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 역시, 통일운동이 처한 어떤 딜레마를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종합하면 이러한 입장을 밀고 나가면 ‘민-관 역할분담론’이 떠오를 것이다. 향후에 다소 굴곡이 있더라도 남북관계가 점진적으로 개선되어 나갈 것이라는 ‘낙관론적’ 전망에 근거하여, 기존에 관-민 간 대립으로 일관했던 관계를 청산하고 비판과 협력을 두루 갖춘 운동을 준비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지속적 개선이 기대처럼 이뤄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1990년대 북핵 이슈의 부상은 이러한 희망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3)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이후 통일운동의 과제

 

한편 1991년 범민족대회 공동결의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① 1995년을 ‘통일의 원년’으로. ② 전쟁위험 제거. 남북 불가침선언, 북미 평화협정 체결, 미군 철수. ③ 한반도 비핵화. 남쪽에서 미국 핵무기 철수. ④ 통일방도에 관한 민족적 합의. 연방제 방식의 통일. ⑤ 자주적인 민간 대화. 노태우 정부의 ‘대화창구 일원화’ 반대. ⑥ 국가보안법 철폐, 통일인사 석방. ⑦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확대·강화. 조속히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 ⑧ ‘두 개의 한국’ 조작 책동 파탄.

 

1991년 남북 유엔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된 후, 1992년 범민족대회의 핵심 주장과 비교해보자. 먼저 북, 해외 공동결의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① 남북이 불가침을 확약한 현실에 유의하면서 남한으로부터 미군 철거를 위해 투쟁한다. ② 남북이 화해에 합의한 현실에 주목하면서 이에 저촉되는 모든 정치적, 법률적 조건을 철폐하기 위해 투쟁한다. ③ 남북이 교류와 협력에 합의한 사실에 주목하면서 민간인의 자유왕래를 위해 투쟁한다. ④ 조국통일 방도를 확정하기 위해 투쟁한다. ⑤ 종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쟁한다. ⑥ 범민련의 깃발 아래 단합한다.

 

북과 해외 결의문을 보면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이라는 분야를 다루고 있는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미완의 과제로 특히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를 강조하며, 또한 ‘전민족적’ 통일방안 합의를 중요 과제로 제시했다.

 

또한 남측 결의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남북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의 조속한 이행, ② 1민족, 1국가, 2체제, 2정부의 연방제 방식에 대한 국민적 합의, ③ 당국자 독점이 아닌 다방면 대화협력, ④ 주한미군 철수, ⑤ 일본 군국주의 재부활 저지, ⑥ 사회의 민주화, ⑦ 범민련 남측본부의 조속한 결성.

 

남측 결의문도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다만 (북미)평화협정 체결 문제가 언급되지 않았는데, 이는 남북기본합의서에서 ‘현 정전상태를 평화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한다는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일단 합의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1992년 결의문을 종합하면, 1990년대에 보통 통일운동의 4대 과제라고 일컬어졌던 ① 주한미군 철수, ② (북미)평화협정 체결, ③ 국가보안법 철폐, ④ 연방제 통일방안 합의 확산이라는 과제를 추출할 수 있다.

 

여기서 민중운동 내에서 논쟁이 된 바는 첫째, 평화협정 체결의 주체가 북한이 주장하는 것처럼 반드시 북한과 미국이 되어야 하느냐는 문제였다. 곧 남한을 배제하고 평화협정이 체결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남한이 없이 평화협정의 실질적 이행이 보장될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쟁점을 두고 아주 심각한 논쟁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는데, 평화협정에 담겨야 할 내용에 따라 그 체결의 주체가 결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남과 북의 군비축소가 담긴다면, 당연히 한국이 협정 체결의 주체로 참여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장은 어떤 외교적 ‘공세수단’이지, 실제로 실행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판단이 있었다. (이미 남북기본합의서에서도 남과 북이 ‘평화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하여 남한이 그 주체임을 북한이 인정한 바 있지 않은가.)

 

두 번째 문제가 통일운동에 있어 사실은 더 중요한 쟁점인데, 과연 남과 북이 통일방안이 달라서 통일이 성취되지 않은 것인가. 나아가 북한이 제시하는 고려민주연방제안은 과연 통일방안으로 볼 수 있는가? 북한이 말하는 2제도 2정부 하에서 1국가는 남한에서 말하는 국가연합과 본질적으로 다른가? 그런데 이런 수준의 국가연합, 또는 2제도 2정부를 통일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바로 이런 이유로 2000년 김대중-김정일 남북정상회담 당시 발표된 6·15 공동선언에서 남의 국가연합과 북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말할 때, 필자는 그것이 실상 통일방안에 대한 의견 접근이 아니라 곧 평화공존의 제도화를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그렇지만 어쨌든 이러한 쟁점은 1990년대에 부각될 수 없었다. 북한의 핵 개발 프로그램이 최대 쟁점으로 부상하면서 동시에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 비핵화선언이 주변화, 형해화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4) PD가 제시한 통일요구강령

 

한편 PD 진영 역시 급변하는 정세에 발맞추어 통일(요구)강령을 제시하고자 했다. 1991년 3월 시점에 발간된 《현실과 과학》 9호에 실린 「통일(요구)강령의 구체화를 위하여」를 살펴보자. 이 글은 ‘대중의 민주주의적 지향의 일환인 통일에 대한 요구는 반제반독점 이행강령이라는 관점에서 체계화, 정식화할 때 올바른 전망이 잡힐 수 있다’, ‘통일(요구)강령은 시시때때로 제기되는 사안마다 대중적인 통일운동에 대해서는 변혁진전의 경로와 필요성을 선전하며, 지배계급의 통일공세에 대해서는 민중적 통일과 현실적 경로를 선전하기 위한 근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제국주의와 남한 독점자본의 1단계 전략은 교차승인을 통해 남북한 간 평화정착, 평화공존 구도를 확립하고, 2단계는 북한과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북한에 대한 자본진출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을 통일방안으로 구현한 것이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1989년 9월)이다.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남북연합’이라는 단계를 설정한다. 이는 ‘국가 간의 관계는 아니지만 민족 내부의 특수한 관계’라고 설명함으로써 남북기본합의서와 일맥상통하다.) 동시에 정부는 통일 요구 중에서 ‘통일지향세력’으로서 자신의 이미지 조성에 유효한 것만 선별 승인함으로써 통일운동노선을 무력화할 것이다. 정부는 통일요구·통일운동을 적절히 통제, 이용함으로써 민중운동을 교란하고 자신의 반민중성·반민주성을 은폐한다.

 

이런 조건에서 통일(요구)강령은 일반적, 진보적 요구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축적구조에 대한 공세로 인도하는 계기로 삼는다는 원칙을 따라야 한다. 이런 원칙을 기초로 ‘교류 문제’와 ‘평화군축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첫째, 교류 문제에 있어서 특히 경제교류가 주목해야 할 대상이다. 정부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의 남북 노동자 연석회의 제안이나,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남북 종자교류 제안은 무산시켰으나, 정주영 현대 회장의 방북은 정부의 지원으로 성사되었다. 경제교류 부문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민중진영의 역량이 취약할 수밖에 없지만, 또한 ‘북한과의 경제교류 반대’라는 슬로건이 민중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거나 북한의 입지를 강화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경제교류의 실제적 성과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즉 독점자본의 이익에 봉사한다)라는 문제를 선전해야 한다.

 

둘째, 군축 문제를 살펴보면, 미일 제국주의는 동북아에서 유럽식 군축과 같이 제한적이나마 실제적인 군축을 실행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사회주의권에 대한 포섭전략을 현실화시킬 수 있도록 정치군사적 헤게모니가 강화되는, 즉 군사력 증강을 동반하는 평화공존 체제를 추구한다. 군축의 내용은 ▲현재의 군사력을 통제하며, ▲실질적 군비확장을 금지하며, ▲군비축소 몫의 민중적 활용으로 체계화될 수 있다. 즉 ▲국방비 감축, ▲핵무기와 공격형 무기의 폐기, ▲한미 간 불평등조약, 협정의 파기, ▲군사작전권의 이양, 공동방위·방위비분담의 무효화, ▲주한미군의 철수, 합동군사훈련의 즉각 중지, ▲차세대 전투기 사업(FX) 계획으로 대표되는 전략증강 계획 철회, ▲군수산업체에 대한 특혜 중단, ▲군축의 결과, 민중생활복지 비용으로 이전이 그것이다.

 

이 글은 최대강령-이행강령-요구강령 각각을 통일적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따라 정세적 ‘요구’강령을 추출해보고자 한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축적구조에 공세를 가할 수 있도록 정세적 계기에 부합하는 요구를 내걸고 민중투쟁을 이끌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1992~1993년 북한의 핵 프로그램 문제가 최고의 이슈로 부상하며 다른 이슈를 압도하게 되면서 이러한 (요구)강령을 선전할 수 있는 공간이 지극히 축소되게 된다. (예를 들어, 경제교류는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서야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현실화된다. 재벌의 대북 비즈니스를 어떻게 볼 것이냐 문제는 김대중 정부에서야 진정한 논점으로 부상하게 된다.)

 

5) 1991~1992년 NL의 지하당 건설 시도

 

1990~1992년 시기를 검토하면서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보통 통일운동을 논할 때 전혀 언급되지 않는 대상인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과 ‘중부지역당’이다. 김영환과 하영옥, 그 둘에 박 모 씨로 구성된 민족혁명당 중앙위원회가 구성된 시점이 1992년 3월 16일이다. 당 중앙위원회가 구성되었다는 말은 곧 창당을 의미한다. 즉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된 이후에 창당했다는 뜻이다. 중부지역당이 창당한 시점은 1991년 7월로 민혁당보다 빠르다.

 

중부지역당이 민혁당보다 더 먼저 설립되었고, ‘조직사건’도 먼저 발생했으므로 중부지역당부터 살펴보자. 삼척탄좌와 동원탄좌 파업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황인오는 1990년 7월, 그 유명한 북한 공작원 이선실을 매개로 남파된 권중현과 접촉했다. 그의 요구는 ‘조선노동당 강원도당을 조직해달라’는 것이었다. 황인오는 이를 수락하고 1990년 10월 이선실을 따라 강화도를 통해 북한에 입북했다. 돌아온 그는 1991년 5월 시점에 <1995년 위원회>란 조직을 접수하게 된다. <1995년 위원회>란 민중당 성남을 지구당 노동위원장을 하던 최 모 씨가 1990년 12월경 활동가 241명을 묶어 구성한 조직으로, 북한과 연계를 모색하기 위해 1991년 4월에 조직원을 스위스 제네바 주재 북한대사관을 통해 밀입북시켰다. 최 모 씨는 황인오를 북에서 보낸 사람으로 ‘오인’하고 그의 지도를 받아들였다. 어쨌든 1991년 6월 <1995년 위원회>가 <애국동맹>으로 개편되고 1991년 7월 중부지역당이 결성된다. 강원, 충북, 충남 3개 지역에 도급 조직을 두었다. 중부지역당은 매우 단명했는데, 안기부는 1991년 10월 6일, 남로당 이후 최대 규모의 간첩조직이라며 중부지역당 사건을 발표했다.

 

민혁당의 결성과정도 여러모로 유사하다.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은 1989년 7월 초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북한에서 직파한 윤택림(대외연락부 5과장)과 접촉하게 된다. 그 결과 김영환은 ‘현지 입당’이라는 형식으로 조선노동당에 입당한다. 그에 앞서 하영옥은 <반제청년동맹>이라는 조직을 구성했는데, 그는 1988년 말 김영환과 접촉하여 준비위원회 단계인 이 조직에 가입해달라고 요청했다. 김영환은 1990년 4월, 북한과 연계 성공을 계기로 <반제청년동맹> 총책으로 취임했다. 1991년 5월 16일 김영환은 조유식을 대동하고 강화도에서 잠수정을 타고 입북하고 17일간 북한에서 머물다가 서귀포를 통해 귀환했다. (이때 김영환은 김 주석도 만났다.) 그 후 1992년 3월 16일 민혁당이 창당했다. 김영환이 중앙위원장을 맡고, 하영옥, 박 모 씨를 더해 3인으로 중앙위원회를 구성했다. 반제청년동맹 중앙위원 3명이 민혁당으로 전환한 셈이었다. 산하에 경기남부위원회(하영옥 담당), 영남위원회(하영옥 담당), 전북위원회(김영환 담당) 등 지역별 위원회를 구성했다. 각 위원회 하에 성남, 울산, 부산, 마산·창원, 전주에 지부를 결성했다. 정식 당원은 100여 명이었고, 17개의 혁명소조(RO) 조직원을 준당원으로 보면 전체 규모가 400여 명에 이르렀다. 사실 민혁당이나 중부지역당의 구성원 모두가 당 지도부와 북한이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북한의 노선과 매우 강한 친화성이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민혁당의 존재 자체는 중부지역당 사건보다 훨씬 더 나중에 드러나는데, 민혁당 사건이 1999년에 발표된다. (1990년대에 민혁당이 겪은 우여곡절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룰 것이다.)

 

그렇다면 중부지역당과 민혁당은 서로 실체를 몰랐을까. 김영환의 증언에 따르면 1992년 초반부에 ‘다른 지하조직이 우리 조직원을 포섭하려고 시도한다’는 보고가 올라와 북에 전문을 보내니 북에서 ‘조직 간 혼선이 있었다’는 답변이 내려왔다. 그 결과 민혁당이 서울경기, 영남, 전북을 맡고, 중부지역당이 충청, 강원을 맡는 식으로 구역 정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1992년 10월 중부지역당 사건이 발표되면서, 혼선을 빚은 조직이 중부지역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조직 보안의 방법상 수평적 교류는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상호 실체를 몰랐다는 그의 증언이 사실일 개연성이 높다. 그런데 이런 원리에 따르면 조직의 정점은 사실상 북한 내에 지하조직 담당 사업부서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하조직이 어쨌든 1960년대 남조선 혁명론이 가정했던 남한 내 독자 혁명참모부라는 위상과 거리가 멀다는 결론도 얻게 된다. (실제로 두 조직의 지도급 인사는 조선노동당에 직접 입당했다.)

 

필자가 이번 글의 마지막으로 중부지역당, 민혁당 문제를 언급한 것은 하나의 질문을 해보기 위해서다. 북한은 왜 공작원을 남한에 직파하여 지하조직 건설을 시도했는가? 1960년대 통일혁명당의 경우, 북한이 공식적으로도 ‘남조선 혁명론’을 주창했기 때문에 그 귀결로서 남한 지하조직 건설이 추진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만, 1991~1992년 시점에는 그에 상응하여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된 바가 없기 때문에, 그 의도를 파악하기 매우 어렵다. 보통 남한 운동의 시각에서 그와 같은 지하당 조직이 적절했냐는 문제가 논의되는 경우는 있어도, 북한이 그러한 조직 건설을 시도한 함의를 자세히 다룬 글은 없다.

 

이에 대해 박찬수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남한에 자생적인 NL 주사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북한의 각 부서가 경쟁적으로 지하당 사업에 몰두하게 했다. 때로는 북한과 선이 닿은 남한의 서로 다른 NL 조직이 세력확장을 위해 상대방 조직원을 포섭하려다가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북한은 남한에서 ‘자생적인’ 주체사상 그룹이 형성되는 시점에, 기존의 대남사업 관성대로, 가능한 수준에서 지하조직 건설이라는 구체적 성과를 내고자 했던 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즉 진지한 운동 노선이라기보다는 대남사업의 관성이었다면 그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박찬수 기자의 책은 황인오가 입북했을 당시 이창선 북한 노동당 사회문화부장이 내린 특별지시에 관한 에피소드를 자세히 설명한다. 이창선 부장은 ‘김정일 위원장이 축지법을 써서 남한 전역을 돌며 남한 민중을 위로, 격려했고 이에 남한 민중은 경탄과 감사를 올렸다’는 소문을 퍼뜨리라고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남한 지하조직을 바라보는 북한의 시각이 드러나는 ‘희화적’ 사례일 것이다. 즉 남한 지하조직이 북한 대남사업 부서가 필요에 따라 활용하는 ‘도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7. 1992년의 먹구름: 한반도 핵문제

 

남북기본합의서 탄생 이후, 1992년 5월 서울에서 열린 7차 고위급회담에서는 기본합의서 이행을 위한 실천기구의 구성에 관한 합의가 있었다. 9월 평양에서 열린 8차 고위급회담에서는 각 분과위원회가 마련한 부속합의서가 채택되었다. 그 결과 정치, 군사, 교류협력의 3개 분과위원회, 화해, 불가침, 경제협력, 사회문화의 4개 공동위원회, 남북연락사무소 구성과 운영에 관한 합의가 이뤄졌다.

 

낙관적인 기대와 달리 교차승인은 진행되지 못하고 한반도 핵 문제가 오히려 이를 압도하게 된다. 그 결과 교차승인도 미완으로, 한반도 비핵화도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된다. 북한 핵 개발 이슈는 다른 많은 글에서도 다루었기 때문에 간략히만 살펴보자.

 

1) 한반도 비핵화선언까지

 

미국은 1980년 첩보위성을 통해서 북한 영변에서 5메가와트급 원자로를 건설하기 위한 기초공사로 보이는 커다란 구덩이를 포착하면서 북한 핵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원자로는 1980년대 중반부터 가동을 시작했고, 동시에 북한은 50메가와트급 원자로 건설에 착수했다. 이때 미국은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도록 소련이 압력을 가해주길 요청했고, 북한은 1985년 NPT에 가입했다. 미국은 NPT를 통해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89년 1월 5메가와트급 원자로 남쪽에서 축구장 두 개 길이에 6층 높이를 지닌 직사각형 건물이 발견되면서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혹이 본격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1989년 5월에야 한국정부에 북한 핵무기 관련 건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노태우 정부는 남북대화의 틀 내에서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병행전략’을 채택했다. 즉 북한 핵 문제의 해결을 남북대화의 ‘선결조건’으로 제시하지 않고, 함께 토의하고 해결해 나간다는 전략이었다. 또한 노태우 정부는 남북관계든 북핵 문제든 북미 간 직접 협상이 아니라 ‘남한을 통한’ 북미 간 대화를 원칙으로 삼고자 했다. 미국 부시 행정부 역시 한국 정부의 북방정책을 고려하여 북한과 교역, 접촉에 대한 제한을 완화하고 경제협력과 인도적 지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적 변화를 시도했다. 또한 미국도 북한과의 모든 협상이 한국의 주도하에 ‘한미 간 협의를 거쳐’ 진행된다는 데 동의했다.

 

미국은 1991년 2월 국가안보보고서 28호를 통해서,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고 핵통제에 관해 국제적 감시에 협조한다면 북한과 관계정상화를 이룬다는 정책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6월 19일에도 미 국무부는 북한이 네 가지의 조건, 즉 ▲핵사찰 수락, ▲남북대화 촉진에 의한 한반도 긴장 완화, ▲미군 유해 송환, ▲테러 포기라는 조건이 충족되면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겠다고 발표했다.

 

결국 1991년 12월 31일 실무대표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합의되었다. 한국 정부는 기본합의서 타결과 핵 문제는 연계하지 않고 병행한다, 다만 기본합의서의 비준과 발효는 북측이 핵안전협정에 서명하고 핵사찰을 수용할 때 시행한다,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하면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지한다는 협상전략을 세웠다. 북한 역시 남한에 배치된 핵무기 철수를 확인하고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한다면 기본합의서를 채택하고 핵사찰을 수용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런 양측의 입장이 맞물려,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선언이 순차적으로 타결되었다. (기본합의서 서명일은 1991년 12월 13일이고, 한반도 비핵화 선언 서명일은 1992년 1월 20일이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①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아니한다, ② 핵 에너지를 오직 평화적 목적에만 이용한다, ③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아니한다, ④ 비핵화를 검증하기 위해 상대측이 선정하고 쌍방이 합의하는 대상에 대하여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가 규정하는 절차와 방법으로 사찰을 실시한다.

 

비핵화선언의 포인트는 핵무기를 금지할 뿐만 아니라 핵무기 제조의 원천이 되는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도 보유하지 않는다고 합의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핵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핵발전소)은 인정했다. 4조에 관해서는 쟁점이 있었는데, 남한은 남북 쌍방이 각각 사찰을 원하는 곳을 선정하여 강제로 이를 실행할 수 있기를 원했으나, 북한이 강력히 반대하면서 ‘상대방이 선정하고 쌍방이 합의하는 대상’으로 절충되었다. 이는 쌍방 합의가 없다면 사실상 사찰을 통한 검증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머지않아 드러났다.

 

2) 발표문도 없이 끝난 최초의 북미고위급회담

 

1992년 1월 22일 뉴욕에서 북한과 미국 간 고위급회담이 개최되었다. 이는 정전협정 체결 이후 최초의 고위급회담이었다. 북한에서는 김용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가, 미국에서는 정치담당차관 아놀드 캔터가 참석했다.

 

북한은 이 회담에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이미 1991년 12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핵 프로그램을 지렛대로 삼아 대미관계 정상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입장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특히 놀라운 바는 고위급회담에서 김용순 비서가 ‘북미수교를 하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겠다’, ‘통일 후에도 미군은 남한 또는 한반도에서 주둔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다. 정전협정 후 최초의 고위급회담에서 북한 대표가 지극히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은 셈이었다.

 

반면 미국의 대응은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미국은 남북 상호사찰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마친 후, 관계 정상화 문제를 검토하자고 제의했다. 북한은 회담에서 특별한 성과가 없었음에도 발표문을 내자고 하였고, 후속협의 일정도 합의하자고 했다. 그렇지만 미국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회동은 일회성으로 끝나버렸다. (다음 고위급회담은 1993년 6월에야 열리게 된다. 이때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 로버트 칼루치 국무부 차관보가 참석했고, 최초의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 중간에 북한의 NPT 탈퇴를 계기로 ‘1차 한반도 핵위기’가 전개되었다.)

 

많은 논자가 1992년 1월의 북미 고위급회담에 대해 아쉬움을 표한다. 북미관계에서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 그 후 일련의 불행한 사태가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이나 미국이 대화 무드를 이어나가지 못하고, 너무 경직적으로 대응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

 

첫째, 노태우 정부는 북미 간 직접적인 접촉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북미 간 회동이 이뤄지더라도 1회에 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한국 측의 주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노태우 정부의 이와 같은 입장은 나름대로 논리적 근거가 있고, 일관성 있게 추구된 바였다. 예를 들어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이 소련과 일본의 지지를 받아 한반도 문제를 다룰 6자회담을 제의한 적이 있었으나 노태우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남북 문제 해결은 어디까지나 남북한이 당사자로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다자회담이 열리면 예컨대 주한미군 문제를 남북회담에서 다뤄야 할지, 북핵 문제를 어디에서 다뤄야 할지 혼란이 생기고, 또한 다자회담의 경우 어떤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그만큼 복잡하고 어려우며, 강대국이 참여하는 회의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행사하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노태우 정부는 북미대화가 정례화되면 남북대화의 추동력이 약해진다고 보았던 듯하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통미봉남’.)

 

1992년 2월 21일 자 《경향신문》 ‘김일성 핵개발 않는다’, ‘정총리 면담 오찬, 주변국과 대결 원치 안해’, ‘외국군 철수 결단 내릴 때’, ‘회담 잘 되면 함께 관광사업’. 1992년 2월 20일,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 남측대표 정원식 국무총리가 김일성 주석을 만나는 장면. 이때 김 주석은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 공동선언의 발효는 평화와 통일을 지향해 나가는데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는 획기적 사변”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한반도의 핵문제도 해결 되야 한다”면서 “남한에 아직 핵무기가 있는지 아니면 다 막았는지 알 수 없지만, 북한에는 핵무기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만들지도 안고 만들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이 시점까지도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우세했다.

 

둘째, 미국 역시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지속하면서 이를 은폐하려는 것이 아닌가 계속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의심은 북미고위급회담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그 이후에도 계속 증폭되었다. 예를 들어 북한은 1992년 1월에 핵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고도, 4월 9일 최고인민회의가 핵안전조치협정의 체결을 승인한 후에야 국제핵사찰의 수용이 가능해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남한과 미국은 북한의 헌법상 협상체결 비준 권한은 주석의 특권에 속하므로 최고인민회의 비준 사항이 아니고, 따라서 이를 근거로 사찰을 지연시켰던 북한의 행동은 핵사찰 이전에 핵프로그램을 완성하려는 일종의 ‘지연전술’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었다.

 

3) 북한의 NPT 탈퇴까지

 

5월 4일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핵물질과 핵시설에 대한 150쪽 분량의 ‘최초보고서’를 전달했고, 1992년 5월부터 네 달간 사찰이 진행되었다. 초기 사찰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북한이 기대 이상으로 IAEA 사찰단에 협조적이었다고 전해졌다. IAEA는 8월 3차 임시핵사찰에서 북한의 불법적 핵활동에 관한 특별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고 이러한 평가를 공식 발표하려고 했으나, 9월 미국은 북한이 신고하지 않은 영변 내 핵폐기물저장소 추정시설 두 곳을 담은 첩보위성 자료를 공개했다. 미국은 이 시설을 검증해야만 북한의 과거 핵활동을 정확히 규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후 상황은 급반전하여, IAEA는 12월 22일 추가 사찰을 요구했고, 이후 특별사찰 협의도 요청했으나 북한은 모두 거부했다. 1993년 3월 12일, 김영삼 대통령 취임 직후 시점에 북한은 NPT를 탈퇴했다.

 

회고해 보면, 1992년 시점에 쟁점이 된 미신고시설의 사찰은 지금까지도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1994년 북미 제네바합의 이후 영변 핵시설은 동결되었으나, 제네바합의에 따른 경수로 건설 완공을 2~3년 앞둔 2002년 시점에 미국은 북한에 경수로 조기 완공과 조기 사찰을 제안했으나 북한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그러면서 제네바합의 체제도 붕괴했다. 그 후 새롭게 시작된 6자회담 진행 결과, 2005년 9·19 공동성명에 따라 북한이 핵물질과 핵시설, 핵활동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하기로 했으나, 북한은 여전히 이 시설을 신고하지 않았고, 2008년 핵협상 파기를 선언했다. 그로부터 10년을 거치며 북한은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앞으로 만약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취할 의사가 있다면, 대략 27년 전 쟁점이 되었던 영변 미신고 핵폐기물저장소 추정 시설과, 그에 덧붙여 그 존재가 전혀 공개되지 않은 우라늄 농축시설을 신고할 것이냐 문제가 쟁점이 될 것이다.

 

한편, 1992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이 진행되는 동안 한미 양국은 한반도 비핵화선언에서 명기한 남북 상호사찰에 대해서 기대를 품고 있었으나 북한은 이를 실행할 의사가 없었다. 9월 30일 김영남 북한 외교부장은 동시사찰이란 북한이 IAEA 사찰을 수용하고, 남한은 주한미군 기지에 대한 전면사찰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북한 군사시설은 핵사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반도 비핵화선언에서 절충적으로 합의한 ‘상대방이 지정하고 쌍방이 합의한 대상에 대한 사찰’이 실제로 효과적인 수단으로 작동하기에 무력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4) 북한 핵 프로그램을 둘러싼 쟁점

 

1992~1993년을 거치며 북한 핵 문제가 다른 모든 이슈를 압도하면서,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선언이 점차 주변화, 형해화되는 과정을 어떻게 볼 것인가. 통일운동의 요구가 남북 정부 간 대화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실현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 심지어 1995년을 ‘통일원년’으로 삼겠다는 통일운동의 강한 희망이 극적으로 반전되어 1993년 북한의 NPT 탈퇴를 계기로 1차 한반도 핵위기가 전개되는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미국 정부가 1993년 공개한 첩보위성 자료. 북한이 신고한 재처리시설(왼쪽 하단)과 폐기물처리 시설(오른쪽 가운데) 사이로 미신고 폐기물저장소 추정지가 표시되어 있다. [출처: 《한국일보》]

 

여기에는 현재까지도 해석을 달리하는 한 가지 쟁점이 존재한다. 즉 사태의 궁극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한 쪽에서는 북한이 세계적인 정세변화에 조응하여 비핵화 의지를 품게 되었으나 남한과 미국이 북한을 포용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강경하게 대응함으로써 오히려 북한을 핵 개발 쪽으로 몰아붙였다고 주장한다. 다른 쪽에서는 북한이 비핵화를 천명함으로써 2+4의 교차승인을 수용하는 듯했으나, 핵무기 프로그램에 관한 한 북한이 언제나 의혹을 말끔히 해소하려는 노력을 회피하고 항상 ‘회색지대’를 남겨둠으로써 교차승인 프로세스가 실제로 완결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는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완성시킬 여지를 항상 남겨두고자 했던 것이라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필자도 이 문제에 관해서 어떤 확정적인 대답을 내놓기 어렵다. 1992년 최초의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한국과 미국이 보인 태도가 너무 뻣뻣했고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평가가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그 후 훨씬 더 ‘유연한’ 태도를 보였던 1994년 북미 제네바합의나, 심지어 중국과 러시아도 참여했던 2005년 6자회담 9·19 공동성명 프로세스가 중도반단되는 과정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비핵화 프로세스의 실패를 단순히 남한과 미국의 ‘협상태도’ 문제로 환원시킬 수는 없을 듯하다. 즉 순전히 남한과 미국의 불성실한 협상 태도 때문에 북한이 핵무력 완성으로 치달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핵 프로그램을 추동했던 요인은 무엇인가. 여기서 북한 내부 권력승계와의 함수관계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1991~1992년 이후 두 차례의 권력승계, 즉 김일성 주석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다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 권력승계가 이뤄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가일층 발전했다. 권력승계란 대체로 대내외적인 취약성을 드러낼 수도 있는 계기이므로, 핵무기 프로그램이 이를 보완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첫 번째 시기만 살펴본다면, 1992년 시점에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으로 권력이양을 위한 최종단계가 진행되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1991년 12월 24일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핵 프로그램을 지렛대로 한 북미관계 정상화를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김정일 ‘당중앙’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북한이 핵보고서를 제출한 1992년 5월 4일,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헌법을 개정하는데, 중앙인민위원회 산하 부문별위원회이자 국가주석이 당연직으로 맡고 있던 국방위원회가 중앙인민위원회에서 분리되어 ‘국가주권의 최고군사지도기관’이라는 지위를 부여받았다. 이는 김정일 위원장의 권력승계를 위한 조처의 일환으로 1993년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국방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1994년 7월 6일 사망한다.)

 

어찌 보면 북한이 교차승인이나 경제개방 조치를 예비하면서도 권력을 안정적으로 이양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성을 추구하는 길을 택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새롭게 등장한 ‘2세대 지도자’가 대내외적으로 정권의 안전을 궁극적으로 보장할 수단으로 핵무기 프로그램을 점차 더 새롭게 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아직 ‘가설’에 불과할 것이며, 얼마간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사실은 북한 핵 개발 문제는 통일운동이 제기하고자 했던 모든 과제를 압도함으로써 1990~2000년대 한반도 정세를 지배하는 이슈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종합해보자. 현재 시점에 반추하면 PD 운동과 문익환 목사의 견해에 일치점이 존재했다. 첫째, 유엔 동시가입이나 교차승인을 통해 남북관계가 국가 간 관계로 공식화되는 것이 반드시 반통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주체 역량에 따라 통일에 우호적인 조건을 창출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즉 북한이 고수했던 낡은 명분론을 벗어나서 정세에 부응하는 사회운동을 새롭게 조직해야 한다.

 

둘째, 이는 더 중요한 점인데, 통일을 위한 전제조건은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의 변화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문 목사는 김 주석과 회담에서 주체사상이 남북 간의 이질성을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통일의 장애요소가 될 수 있다고 ‘대담’하게 말했다. PD 운동은 북한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개인숭배나 주의주의가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 장애가 되므로, 통일을 전 한반도 차원에서 민중민주적 변혁의 완수라고 규정한다면, 북한의 그러한 문제는 통일에 난관으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셋째,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남한의 사회운동은 북한에 대해 항상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PD 운동은 이런 관점을 전제로 하여, 당면 정세에서 독점자본의 ‘대북 비즈니스’에 대항하는 민중적 교류운동이나 적극적 평화군축 운동을 과제로 제시했다. 그렇지만 북한 핵무기 프로그램이라는 먹구름은 사회운동의 이런 모든 시도를 침몰시킬 만한 거대한 잠재력을 지녔다.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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