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0 봄. 1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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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한반도 정세와 통일운동 개괄

누가 탈냉전을 거부했는가? 

임필수 | 계간 사회진보연대 편집장
이번 호와 다음 호는 1990년대 한반도 정세와 통일운동을 다룬다. 먼저 이번 호는 1990년대 한반도 정세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던 두 가지 이슈, 즉 1차 한반도 핵위기와 북한의 기근을 다룬다. 
필자는 한반도 핵 위기와 북한의 기근이라는 문제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고 본다. 한마디로 말해, 필자는 이러한 사태가 1990년대 탈냉전이라는 세계사적 전환 과정에 북한이 참여, 적응하기를 거부하면서 나타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1980년대에서 이어진 ‘전통적인’ 통일운동은 그와 정반대로 사태를 인식한다. 즉, 미국과 남한(특히 김영삼 정부)이 냉전적인 봉쇄·고립 전략을 고수함으로써 핵 위기나 북한 식량난이 발생했다고 이해한다. 어쩌면 이러한 시각이 여전히 한국 사회운동의 지배적 관점일지도 모른다. 과연 누가 탈냉전을 거부했는가? 이 글은 필자의 답을 제시하기 위한 시도다. 
다음 호에서는 1993-2002년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 시기, 통일운동의 흐름을 더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이 시기에 핵 위기나 북한 대기근 외에도 무궁무진한 쟁점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1993년 새로운 통일운동체 논쟁, 1994년 ‘주사파 파동’, 북한인권논쟁, 1996년 ‘연대사태’, 강릉 북한 잠수함 사태, 1997년 한대사태 등등. 각각의 쟁점을 둘러싼 논쟁을 살펴보면서 현재 운동의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1. 북한 핵 문제 개요: 1993-2002년  

 
필자의 지난 호 글, 「한소 수교와 남북기본합의서, NL-PD 논쟁의 격돌」의 7절 ‘1992년의 먹구름: 한반도 핵문제’에서 1993년 북한의 핵무기비확산조약(NPT) 탈퇴 직전까지의 상황을 다뤘다. 독자가 그 글을 읽었다고 가정하고, 그다음 시점부터 시작하겠다. (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글을 보는 데 무리가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다소 전문적인 쟁점이라 생소하다고 느끼는 독자도 있겠으나, 오히려 뚜렷한 근거 없이 북한을 두둔했던 입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려면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 생략할 수 없다.  
 

1) 한반도 1차 핵위기의 전개 

북한은 1992년 1월 30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 협정에 서명했고, 5월에 최초보고서를 IAEA에 제출했다. (국제원자력기구는 한마디로 말하면, NPT에 기초하여 각국의 핵무기 개발을 감시하는 국제기구다.) 북한의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1990년에 단 한 차례, 파손된 핵연료봉에서 90g의 플루토늄을 추출했을 뿐이다. IAEA는 1992년 5월 북한에 최초 방문했고 1993년 1월까지 여섯 차례 사찰을 실시했다. 하지만 사찰이 진행되는 동안 다양한 각도에서 북한의 최초보고서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었다. 
먼저, 북한의 5메가와트 원자로 냉각탑에서 방출되는 증기를 관찰한 위성사진을 통해 1989년에 70일간 가동중단이 발생했다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북한의 흑연로는 연료 일부를 꺼내기 위해 가동을 중단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렇게 오랫동안 가동이 중단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의문을 제기한 쪽에서는 70일이라면 연료재장전 장치가 한 개면 모든 연료봉의 절반, 두 개면 연료봉 전체를 제거할 수 있고, 최대 50톤의 연료를 재처리하면 최대 8.5kg의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다는 대략적인 계산을 내놓았다. 북한은 그러한 가동중단을 인정했지만, 약 100개의 손상된 연료봉을 교체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중 86개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IAEA는 북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5메가와트 원자로의 연료봉을 검사하면 간단하게 북한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둘째, 1992년 7월 사찰이 시행되는 동안 방사화학실험실에서 채취한 스와이프 시료와 여타 시료를 검사한 결과, 최소 3회에 걸쳐 플루토늄을 추출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상당한 신뢰성이 있는 검사였고, 단지 한 차례 실험적으로 추출했을 뿐이라는 최초보고서의 진실성에 큰 의문을 남겼다. 따라서 IAEA는 방사화학실험실에 대한 전면적인 사찰과 샘플 채취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 (5메가와트 원자로 외에 북한이 보유한) 실험용 원자로(IRT)가 (핵폐기물 저장소 또는 소규모 재처리시설로 의심받는) 미신고시설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실험용원자로를 이용해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것도 기술적으로 가능하며,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이 시설을 이용해 최대 4kg의 플루토늄을 생산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었다. 따라서 IAEA는 미신고시설에 대한 사찰이 실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약하면, IAEA는 북한이 수 kg 단위의 플루토늄을 확보하려고 시도했거나, 이미 확보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 셈이었다. 보통 한 개의 핵무기를 제조하는 데 7-8kg의 플루토늄이 필요하므로, 북한이 제출한 최초보고서와의 차이는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핵물질을 확보했냐, 아니냐가 걸린 매우 심각한 쟁점이었다. 따라서 IAEA는 이러한 불일치 문제를 검증하기 위해 ① IAEA가 임의로 선정한 5메가와트 원자로의 연료봉을 검사해야 하며, ② 신고서에 포함되지 않은 두 곳의 의심시설을 사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북한이 이를 거부하고 1993년 3월 12일, 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이른바 1차 ‘한반도 핵위기’가 전개된다. (이를 1차 핵위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2002년에 2차 핵위기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북한은 IAEA 특별사찰 요구가 “미국의 거짓 정보제공과 압력에 의한 것”이라거나, “자주권에 대한 난폭한 침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IAEA와 북한이 체결한 안전조치 협정에 따르면 특별사찰은 “일반사찰만으로써는 불충분하다고 간주하는 경우에 IAEA 자신의 결정에 의해 실시할 수 있다”고 했으므로, IAEA가 NPT 체약국인 북한에 특별사찰을 촉구하는 것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적법한 조치였다. 따라서 북한은 특별사찰을 계속 거부할 수 없었고, 결국 NPT로부터 탈퇴를 결정했다.
그런데 특정국이 안전조치 의무를 준수하지 않을 때, IAEA가 취할 수 있는 궁극적인 수단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위반사실을 보고하는 것이다. (IAEA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유일한 유엔 기관이다.) 그러면 유엔 안보리는 보고를 받고, 그에 따라 유엔 체제 내에서 가능한 다양한 수준의 제재를 순차적으로 가하는 길을 걷게 된다.
 실제로 1993년 4월 8일 유엔 안보리는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첫 번째 성명을 채택했다. NPT 조약 준수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고, 남북한의 비핵화 공동선언을 지지하며,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IAEA의 지속적인 노력을 촉구한다는 ‘온건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5월 1일 유엔 안보리 결의안은 북한의 NPT 복귀와 IAEA 안전협정 이행을 촉구했다. 그후에도 안보리 결의안이 이어졌다. 1993년 5월 11일 유엔 안보리는 북한에 대해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제고하고 조약의무를 재확인하도록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는데, 이때 찬성 13, 기권 2로, 기권국은 중국과 파키스탄이었다. 

 

2) 1994년 제네바합의 

1차 핵위기는 그 유명한 1994년 3월의 북한 남북특사교환 실무접촉 대표의 ‘서울 불바다’ 발언, 6월 미국의 영변 핵시설 정밀타격 방안 검토, 7월의 김일성 주석 사망 등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합의를 통해 일단락된다. 
제네바합의의 기본 골자는 사실 단순하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능력을 동결하고 점진적으로 해체하며, 북한에 대체에너지를 제공한다, 북한의 과거 핵무기 개발 의혹 해소는 대체에너지 제공 이후로 미룬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 북한은 평북 영변에서 운영 중인 5메가와트 원자로(흑연로) 외에 전력생산용이라는 명분으로 50메가와트(평북 영변), 200메가와트(평북 태천) 원자로(흑연로)를 건설 중이었다. 제네바합의에 따라 운영 중인 원자로는 동결하며, 건설 중인 원자로도 건설 중단, 동결한다. 또한 핵연료봉 제조시설과, 방사화학실험실(재처리시설)도 동결한다. 핵무기 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 북한의 흑연로를 대체하여, 2003년까지 ‘핵확산 억제용’ 원자로인 경수로 건설을 지원한다. 1000메가와트 경수로 2기를 제공하는 것이므로(총 2000메가와트), 완공된다면 북한이 건설 중인 원자로의 발전능력을 훨씬 능가하게 될 것이다. 1994년 시점의 북한의 발전용량 7240메가와트 수준이었다. 그러나 경수로가 무료로 제공되는 것은 아니었고, ‘파격적인’ 조건이기는 하지만 북한으로부터 대금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경수로가 ‘핵확산 억제용’이라는 의미는 더 자세히 뜯어봐야 하므로 뒤에서 다시 다룬다.)
둘째, 경수로 완공 전까지 북한에 대체에너지로서 중유를 제공한다. 초기 연 5만 톤에서 시작하여, 매년 최대 50만 톤을 제공한다. 중유 제공 비용은 미국이 부담한다. 1994년 시점에 북한의 원유 수입량이 90.1만 톤이므로, 이는 그 절반을 넘는 양에 해당했다.   
셋째, 북한이 제출했던 최초보고서를 검증하는 조치는 경수로 건설이 상당히 진행되고, 주요 부품이 납입되기 전에 실시한다. 즉 1993년 시점에 IAEA가 요구했던 핵의 검증 문제는 경수로 완공과 동시에 실행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대외비 각서’가 따로 합의되어, 아주 구체적인 합의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럴 경우 IAEA의 특별사찰은 경수로 건설 일정에 따라, 최소한 5년 후로 미뤄진다.  
넷째, 경수로 건설 기간에 5메가와트 원자로에서 나온 폐연료봉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북한이 재처리를 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최종 처분하기 위한 방안을 북한과 미국이 협상한다. 위와 마찬가지로, 이럴 경우, 북한이 보유한 8,010개의 폐연료봉이 어쨌든 최소한 5년간 북한 내에 남아있게 된다. (그래서 제네바합의에 대한 비판론자는 북한이 마음을 바꾸면 언제라도 폐연료봉을 재처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핵무기로 위협을 가하지 않고 사용하지도 않는다고 공식적으로 보장한다. 또한 미국과 북한은 상호 연락사무소를 개설하고, 앞으로 양국의 관심사가 해결되어 나가는 상황에 따라 양국 관계를 대사급으로 격상시킨다, 즉 ‘관계 정상화’로 나아간다.  
제네바합의가 발표되자 미국 내에서도 찬반양론이 갈렸다. 비판적인 입장을 먼저 살펴보면, 대표적으로 《뉴욕타임스》는 합의 결과, 최대의 승리자는 북한이며 최대의 패배자는 군축론자와 IAEA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40억 달러의 경수로와 4억 달러 상당의 대체에너지 지원이라는 경제적 실리와 대미관계 개선이라는 일거양득의 소득을 얻었다. 그렇다면, 왜 IAEA와 군축론자에게는 패배라는 것인가? NPT 탈퇴 위협을 통해 정치경제적 보상을 받았다는 나쁜 선례를 국제사회에 남겼고 (즉 잘못된 행동을 하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을 받는다는 교훈을 남겼다는 말이다), 특별사찰의 유예라는 특례조치 역시 선례로 남아 앞으로 IAEA에 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국가가 핵을 개발할 때, IAEA가 특별사찰을 요구하면 북한의 예를 들어 거부하거나,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 
반면 미국 로버트 갈루치 핵대사는 제네바합의가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먼저 북한이 만약 건설 중인 50메가와트, 200메가와트 흑연로를 완성하면 수백 개의 핵폭탄을 제조하기에 충분한 수천 kg의 플루토늄이 양산되는 가공할 위험이 초래될 것이므로, 이를 동결·해체하여 얻는 효과는 경수로, 중유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주장했다. 둘째, 과거 핵을 규명하기 위한 특별사찰 시기가 늦어지기는 했으나, 북한이 절대 불가 입장에서 수용으로 돌아선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봤다. 
마지막으로, 《워싱턴 포스트》는 제네바합의가 제대로만 이행되면 중대한 정치적 타결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하면서도, 양국이 합의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상호불신을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제네바합의 이행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문제가 발생했다. 대표적으로 경수로 공급 협상의 타결이 상당히 지연되었다. 논란 끝에, 1997년에 초기 현장공사가 시작되고, 2001년 경수로 건설 공사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렇지만 2002년 미국이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의혹을 제기하면서 중대 고비를 맞게 되었다. 2003년 8월에 개최된 6자회담에서 이 문제에 관한 진전이 없자,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2003년 12월부터 1년간 경수로 사업을 일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그 후 KEDO는 중단 상태를 연장하다가, 2006년 5월, 사업의 종료를 결정했다. 경수로 사업은 1997년 착공 이후 2003년까지 종합공정률 약 34.5%의 진척도를 보였다. 

 

3) 경수로는 과연 ‘핵확산 억제용’인가? 

그런데 제네바합의에는 또 하나의 잠복한 쟁점이 있었다. 북한의 흑연로를 대체해 제공하기로 한 경수로를 통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가? 
북한에 건설하기로 한 경수로는 1,000메가와트급이고, 12개월의 단주기로 운전할 경우 200-220kg의 플루토늄을 확보할 수 있고, 18개월 장주기로 운전할 경우 300-330kg을 확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때 사용후 연료봉에는 핵분열물질 플루토늄 239(Pu239)의 함량이 65%밖에 되지 않는데, 그 함량이 93% 이상이 되어야 무기급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경수로는 ‘핵확산 억제용’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특정국이 IAEA의 감시를 무시하고 핵연료 장전 후 90일간 운전하고 핵연료를 모두 인출하면 무기급 플루토늄을 100kg 정도 얻을 수 있다. 이는 핵무기 16개를 제조할 수 있는 분량이다. 
물론 특정국이 이런 조치를 취한다면 IAEA가 금방 사실을 포착할 수 있고, 핵연료 제공을 중단한다면 플루토늄 확보도 일회성으로 끝날 것이다. 예를 들어, 남한은 한미원자력협정에 따라 우라늄 농축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핵연료를 자급하지 못한다. 그런데, 특정국이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고 있다면, 경수로는 곧 막대한 양의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핵 공장으로 변신할 수 있다. 또한 우라늄 농축시설을 연료용 저농축이 아니라 무기급 고농축으로 활용하면, 이로써도 핵무기 생산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북한의 경우, 매장된 우라늄 3,600만 톤 중에 가채량이 400만 톤에 이르고 우라늄 정련 시설도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만약 북한이 우라늄 농축시설까지 보유한다면 핵연료주기를 완성하고, 경수로를 핵공장으로 전환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2001년 공화당의 부시 대통령이 취임하자 미국 내에서는 경수로를 화력발전소로 대체하자는 주장이 대두했다. 울포위츠 국방부 차관은 부시 대통령의 취임 이전부터 화력발전소로 대체를 주장했다. 헨리 하이드 하원 국제위원장(공화당), 제시 헬름즈 상원 외교위원장(공화당), 제임스 릴리 주한 미국대사도 제네바합의의 수정을 요구했다. 

 

4) 제네바합의 붕괴와 2차 핵위기의 개시  

이처럼 미국 내에서 경수로 사업에 회의적인 의견이 퍼져 나가는 와중에 특별사찰 문제는 여전히 양국 간 쟁점으로 남아 있었다. 부시 정부는 남아공의 사례를 들면서 특별사찰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데 2-3년이 걸리므로 2005년 말로 예상되는 핵심부품의 공급 이전에 특별사찰이 이뤄지려면 2002-3년경 본격적인 협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북한은 특별사찰 실시에 3개월이면 족하므로 2005년 하반기에 시행하면 되며, 애초 제네바합의와 달리 경수로 공급이 5년 이상 지연된 데 따른 별도의 보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북미 양국은 2002년 7월에야 공식대화 재개에 합의했고, 10월 4일 켈리 국무성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방북해 강석주 북한 외무성 1부상과 회담을 열었다. 미국의 특사 방북은 양국 간 교착상태를 타개할 계기가 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그런데 10월 17일, 국무부 대변인은 충격적인 내용을 발표했다. 켈리 방북단이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보유를 시사하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북한에 전했으며, 북한이 놀랍게도 이를 시인했다는 발표였다. 이에 대해 북한은 10월 25일 외무성 담화를 통해서 북한은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말해주었다”고 밝혔다. 
미 국무부와 북 외무성의 발표 이후에도 북한의 HEU 프로그램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2003년 11월 KEDO가 경수로 건설 잠정 중단을 결정하자, 북한 외무성은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고 말해주었을 뿐이지 “그 어떤 농축우라늄계획을 인정한 적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일부 전문가도 북한이 HEU 프로그램을 가동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기술적 장벽이 너무 많고, 특수 자재와 부품을 모두 구비하기가 어렵다면서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북한은 2009년 4월 경수로 건설과 가동을 위한 핵연료 개발을 공식 선언하기 전까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존재를 줄기차게 부인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바마 행정부 시기인 2010년 11월에 북한을 방문한 미국 핵전문가 지그프리드 해커 박사는 귀국 후 영변 핵시설 단지 내에 설치된 현대식 우라늄 농축시설을 둘러봤다고 발표했다. 북한이 핵연료 개발을 공식선언한 2009년 4월부터 2010년 11월까지, 그렇게 단시간 내에 대규모 현대적 농축시설을 확보하는 게 가능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2002년 켈리 특사와 미 국무부가 내린 판단이 사실이었던가? 
회고해 보면, 2002년 시점에 미국이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확정적으로 입증할 물증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미 정보당국은 2002년 7월 북한이 대규모 HEU 프로그램을 추진하며, 2002년 6월 러시아로부터 150톤의 고강도 알루미늄을 수입했다는 정보를 확보했다. (알루미늄 강관 150톤이면 약 2,600기의 원심분리기를 제조할 수 있다.) 그렇지만 2007년 2월 미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국가정보국은 북한의 HEU 프로그램의 존재에 대해 “중간 정도 수준의 확신”을 지닌다고 말한 것처럼, 그 시점까지도 완전한 증거를 확보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우라늄 농축시설을 둘러본 해커 박사는 그러한 시설을 구축하는 데 십 수 년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을 지휘한 칸 박사는 2000년에 파키스탄이 북한에 원심분리기를 제공했다고 2004년에 증언했다. 무샤라프 파키스탄 전 대통령도 2006년에 낸 회고록에서 1999년부터 북한 핵 기술자들이 파키스탄을 방문해 원심분리기 기술을 지원받았고, 칸 박사가 북한에 20여 기의 원심분리기를 제공했다고 증언했다. 2002년 10월 이전과 그 이후 밝혀진 북한의 움직임을 추론할 때, 북한은 1990년대 후반, 또는 최소한 2002년 이전에 HEU 프로그램을 실행 중이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때는 김대중 정부(1998-2002) 시기와 겹친다.) 

 

5) 제네바합의 붕괴의 책임은? 

남는 질문은 누가 제네바합의 붕괴에 책임이 있느냐는 것이다. 우선 미국의 책임을 강조하는 입장이 있다. 예를 들어 이삼성 교수는 HEU 의혹을 제기하고 제네바합의를 파기한 미국의 결정이 “오히려 북한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실험실 수준에서 가지고 있었을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을 평화적 목적과 군사적 목적 모두를 포함한 본격적인 핵 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이것이 2002년 10월을 전후한 시기 미국 대북정책의 비극이었다”라고 주장했다. 미국, 특히 부시 정부의 대북강경책이 북한을 핵무기 개발 쪽으로 몰아붙였다는 말이다. 
이처럼 미국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입장에 비해, 북미 간 상호불신이 일종의 ‘죄수의 게임’을 작동시켰다는 견해도 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은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한 후 북미 충돌이 재연되면 북한이 미국을 배신하고 경수로를 핵공장으로 전용할 최악의 위험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북한이 우라늄농축 능력까지 확보한다면 그러한 기술적 가능성이 완성될 것이었다. 반면 북한의 입장에서는 경수로가 완성되더라도, 북미 충돌이 재연되어 외부에서 저농축우라늄 연료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경수로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미국과 북한 양자는 상대방에 협조했다가 얻을 수 있는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해 각각 경수로 건설 중단(화력발전소로 교체)과 우라늄농축 능력 확보라는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제네바합의는 최종적으로 붕괴를 향하게 되었다. 이는 북한과 미국 모두 상대방이 배신할 가능성이 높다는 불신이 작용한 결과라는 말이다. 
이러한 시각과 달리, 북한의 HEU 프로그램은 북한의 ‘핵 카드 게임’ 논리에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분석도 있다. 예를 들어 란코프 교수는 북한의 핵 개발이 군사적 목적과 외교적 목적, 두 가지 목적을 지닌다고 본다. 군사적 목적이란 핵무기를 궁극의 억지력으로 본다는 뜻이다. 북한 지도부는 미국과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있을 때, 중국이 대규모 전투를 감수하며 전쟁에 참여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또한 리비아의 카다피는 핵을 포기했지만, 리비아 국내의 반대 세력이 정권에 도전했을 때 서방의 군사적 개입을 막지 못했다. 즉 핵무기가 있었다면 서방의 군사개입이 그렇게 쉽게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라 본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 외교적 목적이란, 핵무기가 외교적 위협수단으로 최상의 유용성을 지닌다는 뜻이다. 란코프는 북한과 아프리카 가나를 비교하는데, 2010년 시점에 북한은 인구 2,440만 명에 1인당 GDP 1,800달러, 가나는 2,470만 명에 1,700달러다. 그렇지만, 국제적으로 관심을 받는 정도나, 외부 국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능력, 원조를 받는 규모, 이 모든 측면에서 북한은 가나에 비해 월등한 능력을 보여준다. 이는 모두 북한이 핵 카드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한 지도부는 통상적인 원조 절차를 따를 의지가 없다. 즉 원조에 뒤따르는 원조기구 모니터링과 같은 감시나 경제관리 개혁 요구를 수용할 뜻이 없다. 다른 나라라면 결코 허용되지 않을 조건으로 원조를 얻어내려면 핵 카드와 같이 특별한 수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란코프에 따르면, 이런 맥락에서 북한의 HEU 프로그램도 해석할 수 있다. 북한의 전략가는 외부세계에서 더 많은 원조와 양보를 얻기 원할 때라면, 먼저 위기상황을 조성하고 긴장을 최대한 고조시킨다. (미사일을 발사한다거나, 핵실험을 단행하거나, 남북 간 무력충돌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긴장이 충분히 고조되면 협상을 제안하고, 상대측 외교관은 안도와 한숨으로 협상을 받아들인다. 그 결과 위기 이전의 현상유지로 되돌아가면서도 최대한의 원조와 양보를 쥐어짜낼 수 있다. (요약하면 위기 조성 → 외교협상 → 현상 회복을 대가로 원조와 양보.) 따라서 북한은 1994년 플루토늄 프로그램을 팔아넘겼듯이, HEU 프로그램도 비싸게 팔아넘기기 위한 의도로 시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란코프는 북한이 군사적, 외교적 이중 목적을 끊임없이 추구하므로, 핵 개발을 완전히 중단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듯, 미국의 불성실한 협상 태도 때문에 북한이 핵개발로 치달았다는 평가는 지나치게 일면적인 시각이다.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중국과 러시아도 참여했던 6자회담 9·19 공동성명 프로세스가 중도반단되는 과정까지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북한이 핵 개발 카드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정권 안보’라는 측면에서 고찰해야 한다. 군사적인 맥락뿐 아니라 경제적 맥락에서도 그러하다. 다음 절에서 언급할 것처럼, 1990년대 경제위기가 대기근으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에서, 북한은 다른 국가라면 선택할 수 있는 대외 교역·투자 확대, 원조 요청, 경제관리 개혁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지 않았다. 또는 극도로 소극적이었다. 예를 들어 북한은 나진·선봉을 경제특구로 조성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나진·선봉은 북한 동부의 매우 외진 곳으로 투자를 이끌어내기 매우 어려운 환경이었다. 게다가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제도적, 법률적 개혁도 미비했다. 그런 상황에서 핵 카드는 다른 국가라면 허용되지 않을 원조나 투자를 얻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수단이 된 것이다. 
제네바합의의 붕괴 과정만 보더라도, 북한의 HEU 프로그램은 한반도비핵화선언의 3조, 즉 “남과 북은 핵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 시설을 보유하지 아니한다”는 남북 간 합의를 정면으로 무시하며, 1994년 제네바합의의 정신과 위배된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부시 정부가 9·11 테러를 계기로 2002년에 들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핵태세보고서(NPR)에서 ‘핵무기 사용 비상사태 계획’ 수립의 대상국가로 지정한 것이 과연 외교적으로 적절한 조치였는가도 분명히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경수로 건설이 본격화된 시점에 HEU 프로그램을 실행했다는 점에서, 제네바합의의 붕괴에서 북한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핵 카드’라는 발상 자체가 냉전적인 접근법이다. 핵무기는 인류의 절멸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정의의 무기가 될 수 없고, 핵 개발 과정 그 자체가 전쟁위험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이런 점에서 탈냉전으로의 시대 전환 과정에서 핵 개발 카드를 다시 집어 들겠다는 발상 자체가 주변국과, 또는 세계 전체와 냉전을 지속하겠다는 전략의 표명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북한이 남아공의 사례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2. 1990년대 북한경제: 대기근과 고난의 행군 

 

1) 북한 대기근의 규모 

1990년대 한반도 정세에 충격을 준 또 하나의 계기는 북한의 기근 사태다. 1997년 미국의 기독교계 구호단체가 북한 식량난민 33명과의 인터뷰 결과를 공개하면서 “식량위기 동안 약 300만 명의 북한인구가 아사했다”는 대기근설이 1990년대에 널리 알려졌다. 그 후 나온 연구에 따르면, 그 사망자의 수치는 300만 명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대기근’이었거나, ‘재앙적 기근’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확실해 보인다. (아래 표를 보라.) 예를 들어 이석의 2004년 연구에 따르면, 북한의 기근은 1994-2000년 기간에 발생했고, 좁게는 25-69만, 넓게는 25만-117만 명의 기근사망자가 나타났고, 함경남도를 위시한 동부지역에서 영향이 가장 컸다.  
북한 대기근의 특징은 급격하게 사망률이 올라가지는 않는 대신, 오랜 기간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심각한 영양결핍이 장기간 고통스럽게 지속되었고, 주민의 건강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리라 추정하게 한다. 기근 시기에 출생한 세대는 장기간 기근에 노출되어 다른 세대에 비해 키와 건강상태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기근이 교육과정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며, 어린 시절에 영양결핍을 경험한 경우 성인이 된 후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도 있다. 따라서 기근의 부정적 영향은 단지 사망률이나 사망자 규모로만 측정될 수는 없다.
 

2) 북한 대기근의 원인 

일반적으로 기근의 원인은 단순하지 않다. 먼저 특정국의 식량생산 능력을 먼저 고려해야 하지만, 설사 식량생산이 부족하더라도 식량을 수입하거나 원조를 받음으로써 가용식량을 늘려 기근을 피할 수 있다. (전 세계적인 수준에서 보면 현재 식량공급이 부족하지 않다. 세계 기본 곡물 시장은 선진화, 통합화되어 있다. 또한 최근에는 위성기술과 일기예보의 발전으로 식량부족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을 조기에 효과적으로 경고하는 체계가 마련되어 있다.) 역으로, 가용식량이 부족하지 않더라도 식량분배의 문제로 특정 계층, 특정 지역에서 기근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떤 경우에 속하는가? 

  (1) 북한의 농업위기

북한의 식량배급은 이미 1980년대 초부터 비정기적이었고, 1980년대 중반부터 식량난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1987년부터 배급량에서 애국미라는 명목으로 10%를 공제하기 시작했고, 1992년 6월부터 ‘하루 두 끼 먹기’ 운동을 전개하면서 10월까지 10%를 추가 공제했다. 그만큼 북한의 농업은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고, 대기근 전에도 위기 징후가 뚜렷했다는 뜻이다. 해거드와 놀란드에 따르면, 북한의 농업 전략은 (전체적인 경제 전략과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자급자족을 추구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적 충격에 강한 경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충격에 더 취약한 경제를 낳았다. 왜 그랬나? 
북한 농업의 문제점은 여러 수준에 파악할 수 있다. ① 농업생산 환경의 불안정(지형, 기후조건의 불리함), ② 낙후한 농업생산 기술, ③ 집단주의적 영농체제, ④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같은 여건은 북한이 원천적으로 농업생산성 수준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여기에다가 1980년대 후반 이후로는 ⑤ 경지면적의 부족과 토지비옥도의 하락, ⑥ 자연생태계의 파괴와 같은 ‘농업생산 조건의 악화’에다가 ⑦ 농자재의 공급부족, ⑧ 농업기계와 수리시설의 노후화와 같은 ‘농업투입물 공급 부족의 심화’가 더해졌다. ⑤, ⑥과 같은 현상은 장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나타난 현상일 테지만, 토지개간이나 산림남벌에 의해 홍수와 가뭄 피해가 가중되는 효과를 낳았을 것이다. 특히 ⑦, ⑧과 같은 요인, 특히 핵심적인 농업투입물인 화학비료 투입량 감소는 훨씬 급격히 나타났다. 결국 북한 공업경제의 위기가 농업투입물 감소를 야기해 농업경제에 큰 타격을 가했고, 여기에 자연재해가 겹치며 대기근의 계기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농업투입물의 급격한 감소가 왜 그렇게 파괴적 효과를 낳았나? 북한은 1960년대부터 농업에서 기계화, 전기화, 수리화, 화학화라는 4대 현대화를 추구했다. 그 결과 화학비료나 살충제를 과다하게 사용하는 영농자재 집약적 농업체계를 구축했다. 농업생산량이 증가했지만, 화학비료와 같은 영농자재를 투입할 수 있는 능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또한 1970-73년에 발생한 식량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농업계획의 중앙집중화가 강화되었다. 중앙당국은 투입-산출의 표준화를 추구하며, 국영농장과 협동조합에 개별 농가의 비료사용량까지 지시했다. 1973년부터 전개된 3대혁명 소조운동에 따라 청년이 농촌에 파견되어 이념·문화·기술교육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농법에 관한 관심과 지식이 줄고, 개인의 자발성이 약화되었다. 그런데 북한은 소련의 도움을 받아 자체적인 비료 생산능력을 갖췄지만 이러한 설비 역시 직접 수입하는 석유화학 원료나 수입석유로 생산하는 석유화학 연료에 의존했다. 결국 북한은 자급자족적 농업을 추구했으나, 외부적 충격에 취약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북한의 외부환경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소련은 내부 경제상황이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북한이 누적된 채무를 갚으려는 의지가 없자, 1987년부터 원조를 줄이고 지원을 삭감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남한과 국교를 맺으며, 북한에 세계시장 가격대로 수입품 대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소련은 군사분야에서 기술지원을 중단했는데, 소련의 설계를 바탕으로 한 무기수출이 북한의 주요 외화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이 역시 큰 영향을 끼쳤다. 소련과의 관계 변화는 북한의 수입과 수출, 양자에 영향을 끼쳤다. 1991년 러시아로부터 수입량 감소분은 전체 수입량의 40%에 달했고, 1993년 수입량은 1987-90년 평균값의 10%에 불과하게 되었다. 또한 1990년대 이후 북한의 무기수출이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세계 수요가 감소하고, 동유럽과 경쟁이 강화되었으며, 특히 소련으로부터 신기술 전수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소련이 붕괴한 후, 중국은 북한에 있어 석유와 식량의 최대공급자가 되었다. 1993년 중국은 연료수입의 77%, 식량수입의 68%를 공급했다. 그런데 1993년부터 중국정부는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기업에 철저한 상품인수와 대금회수(경화 결제)를 촉구하는 ‘대북한 교역사항’을 발표했다. 또한 중국 내에서 수해가 발생하고 곡물수요가 증가하자 북한에 대한 곡물(옥수수) 수출도 전격 중단했다.  1993-1994년 북중교역 급감은 한중수교와 그에 따른 북중 정치관계의 악화라는 요인에 기인한 바가 크지만, 북한의 기근 발생 초기에 하나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2) 북한 정부의 식량위기 대응  

1993년 북한 정부는 1987-93년 3차 7개년 계획이 목표 달성에 실패했음을 인정했고, 과거의 정책에서 벗어난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농업에서는 개인이 관리하는 ‘사유지’ 허용규모를 다소 늘리며, 농민시장에서 곡물거래도 임시로 허용했다. 그러나 정부의 접근방식은 농업생산자의 동기 유발보다는 여전히 과거의 정책을 고집했다. 경작지를 늘리고, 수확량이 많은 쌀과 옥수수를 주로 생산하고, 공업에서 생산된 농자재 투입을 최대화하고, 이모작과 밀실재배를 확대한다는 식이었다. 그렇지만 연작으로 토양이 감소하고 화학비료 과다사용으로 토양산성화가 발생해 오히려 식량생산이 감소했다. 또한 경작지를 늘리기 위해 산의 나무를 모두 베어버렸는데, 토사가 하천으로 침전하면서 홍수 위험이 커졌다. 1995년 파멸적인 홍수가 발생하자, 북한은 드디어 식량위기를 자연재해 탓으로 돌리면서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식량원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때는 이미 1994년, 대기근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시기였다. 

 


그렇다면 북한 당국의 대응은 왜 이렇게 늦었는가? 북한 대기근의 발단은 1993-4년 1차 한반도 핵위기와도 시기상 중첩되기 때문에 그 해석이 매우 까다롭다. 셀리그 해리슨은 당시 북한 내 세력구도가 군사력을 중시하는 강경파와 경제개혁을 중시하는 온건파로 나뉘었다고 설명했다. 강경파는 미국, 한국, 일본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비웃었고 핵무기 개발도 불사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온건파는 핵무기가 대외관계 정상화와 경제개혁의 장애물이라고 인식했다. 그렇지만 군사적 긴장이 심화됨에 따라 식량문제를 은폐해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게 되었다. 즉 위기상황에서 약점을 인정하면 불리한 구도가 형성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994년 제네바 1차회의를 마칠 무렵에야 북한은 250만 톤의 식량원조를 요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의 최소 생존수준의 필요량이 당시 500만 톤 정도였으므로 요구량은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였고, 이는 북한의 식량난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암시했다. 그렇지만, 당시 북한이 식량위기 정황을 분명히 밝힌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협상단은 북한의 원조요청이 지닌 함의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했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해석을 따른다면, 북한 당국이 북미 핵 협상에서 약점을 드러내길 꺼렸기 때문에 식량위기를 대외적으로 은폐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데, 북한 최고 지도부가 식량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1995년에 망명한 북한 농업전문가 이민복에 따르면, 지방 공무원은 평양에서 온 시찰단에게 곡물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은폐했다. 지방 공무원은 보고서를 위조하거나, 목표달성량 부족을 숨기기 위해 서로 곡물을 빌려주기도 했다. 살실 지방 공무원이 왜 목표 달성에 실패했나 답하려면 중앙당국의 농업정책 그 자체에 모순이나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야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상층지도부에 대한 불충으로 보일 수 있었다. 따라서 지방 공무원으로서는 서로서로 현실을 은폐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함경북도 책임비서 강성산이 식량부족 사태를 직소하면서 1993년 12월에야 정책방향을 재검토했으나, 이미 북미간 핵 대결이 고조되는 상황이라 외부적 지원을 요청하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북한 최고지도부가 식량위기의 심각성을 제때 인지하지 못했든, 아니면 강경파에 밀려 의도적으로 외부에 은폐했든 간에 정부 당국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정부의 결정적 과오이며, 이는 정부 시스템 자체에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는 증거가 된다. 또한 식량의 총공급(총가용식량)은 국내 식량생산뿐만 아니라, 수출로 외화를 벌어 식량을 수입하거나, 차관을 얻어 식량을 수입하거나, 공적인 국제원조를 요청하는 방식으로 늘릴 수도 있고, 여기에는 정부의 정책 의지와 능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해거드와 놀랜드는 국제사회의 인도주의적 식량원조가 개시된 이후에도 북한 당국이 국내생산과 교역을 통한 공급원에 원조식량을 추가하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즉 식량원조가 유입되자, 그로 인해 절약된 외화를 식량의 추가 수입에 사용하지 않고 군수용품이나 상류층을 위한 사치품 수입에 할당했다는 것이다. (1999년 시점을 보면, 제네바합의가 타결되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한의 안보여건이 크게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99년 시점에 북한 정부는 외화를 미그-21 전투기 40대와 헬리콥터 8대를 구매하는 데 사용했다.) 현실과 반대로, 만약 북한이 이러한 외화를 식량구매에 사용했다면 2000년까지 대기근이 이어지는 상황을 피하고, 최소 생존수준을 넘어서 정상적인 수준의 수요마저 충족시킬 수 있었으리라 평가했다. 만약 해거드와 놀랜드의 분석이 타당하다면, 북한 정부의 대응에 너무나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평가 기준이 된다. (또한 이는 김정일 시대의 ‘선군정치’가 실제 함의했던 바를 보여준다.) 

 

3) 1990년대 북한 경제의 전반적 상황  

그렇다면 시야를 넓혀 1990년대 북한 경제 전반의 상황은 어떠했나? 북한은 1990년대 10년 가까이 지속적인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자료부족으로 인해 연구마다 추정치 값에 차이가 있으나, 1993년에는 1990년에 대비해 GNP의 10% 정도가 감소하고, 1998년에는 40% 내외의 손실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제난은 1990-3년보다 1994-97년에 훨씬 더 심각한 상태로 진전되어 1994-5년경에는 시스템 붕괴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북한 경제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쟁점은 외부적 충격과 내부적 요인 중 어떤 것이 더 근본적인 요인인가라는 점이다. 외부적 충격이라면 1990년대 사회주의권의 붕괴에 따른 무역충격이나, 1995-6년의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로 인한 농업생산의 위기를 들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홍수나 가뭄이 경제위기에 따른 자연파괴 효과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은 논의로 한다면.) 내부적 요인으로는 내부자원의 고갈, 자본스톡의 감소, 공식시스템의 퇴화라는 현상에 주목할 수 있다. 보통 1990년대 북한경제의 위기를 논할 때, 외부적 충격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러한 통념이 얼마나 사실과 부합하는가? 
무역충격에 가하는 직접적 효과는 먼저 △교역조건 악화로 인해 동일한 수출물량으로 구매할 수 있는 수입물량이 감소하여 실질소득이 감소하는 교역조건 효과와 △ (교역조건이 변화하지 않더라도) 수출물량의 감소로 인한 시장상실효과로 측정할 수 있다. 또한 무역충격이 가하는 파급효과로는 △ 투입재나 중간재 수입이 감소했을 때, 국내생산으로 이를 대체할 수 없다면 병목현상을 일으켜 투입재 수입감소보다 더 큰 규모의 산출감소를 낳는 병목효과를 고려할 수 있다. 북한의 경우, 병목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핵심품목은 광물성 연료(즉 원유와 석유제품, 코크스 원료탄과 코크스)였다. 김석진의 연구는 북한이 받은 무역충격의 총효과가 GNP 대비 10%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농업생산의 감소로 인한 GNP 손실은 GNP의 5-7%로 추정할 수 있으므로, 무역충격과 농업손실에 따른 GNP 손실은 15-20%로 추정해볼 수 있다.  1990년대 북한에서 40% 정도의 GNP 손실이 발생했다고 본다면, 무역충격과 농업손실은 1990년대 북한의 경제난에서 단지 부분적인 역할을 했다. 
다음으로 북한의 내부적 요인을 살펴보면, △에너지 자원(석탄, 수력)의 고갈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1990년에 비해 1990년대 후반 에너지 공급량이 2/3 수준에 머물렀다. 북한은 에너지 다소비형 경제구조를 지니고 있으므로 에너지 공급 부족은 공업생산에 직접적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철광석이나 비철금속 생산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내부자원이 점차 고갈되어 가더라도 신규투자가 있거나, 기존 시설의 유지·보수가 원활했다면 사태가 그처럼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 자본스톡의 가동률이 하락하거나 자본스톡이 감소함으로써 국민소득의 감소를 야기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대기념비적 건조물’ 건설이 대대적으로 증가했고, 특히 1989년 (임수경 씨가 방북했던) 세계청년학생축전 준비에 들어간 돈이 약 47억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이처럼 비생산적인 건설로 인한 투자의 낭비에 이어, 1990년대 초반에는 무역충격과 자본재 수입 감소가 부정적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또한 1987-93년, 최종적으로 실패했다고 자인한 3차 7개년 개발계획 중 무리한 증산 시도는 설비의 급격한 고장, 마모를 야기했을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재정위기로 투자가 급감하고, 식량난이 가중되는 가운데 생존을 위한 국유자산 절취 현상마저 나타나 자본스톡이 급격히 파괴되었을 것이다. 국유자산 절취에 관한 다음과 같은 증언을 보라. 
“그동안 노동자들은 전동기 안의 코일을 뜯어 쌀을 사 먹었다. 노동자들도 기계가 돌지 않으면 자기들의 살길이 더 힘들다는 것을 알지만 별도리가 없다. (…) 또 나라에서도 자재가 없으니까 인민들에게 폐철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백성들에게 그 많은 폐철이 있겠는가? 하는 수 없이 공장 안의 기계를 뜯어 폐철로 바치는 것이다.”
그런데 김석진의 연구는 에너지 공급의 감소나 자본스톡의 감소는 △경제시스템의 효율성 급락, 기능장애가 낳은 결과이며, 즉 공식시스템의 퇴화에 따른 귀결이라고 보았다. 북한뿐만 아니라 현존하던 ‘후기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관료 간 ‘담합’ 또는 비공식네트워크가 발전하는데, 그 결과 계획화 시스템이 왜곡된다. 한편으로는 계획화 시스템에 필요한 정보의 획득, 전달, 처리가 어려워지고 다른 한편으로 관료가 계획화 시스템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게 하는 인센티브가 약화된다. 그 결과 계획화 시스템의 비효율성이 증가하고, 다시금 비공식적 경제활동이 증가하게 된다. 북한에 대한 수많은 증언, 보고에 따르면, 1980년대 초중반 이래로 당적 지도체계가 와해되고 간부의 특수이익이 득세하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1990년대에는 더욱 확산되었다. 요약하자면, 1990년대 초반 외부적 충격에 의해 촉발된 북한의 경제위기는 시스템의 급격한 퇴화현상으로 인해 1994년 이후 크게 악화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한 탈북자의 증언은 이렇다. 
“북한의 경제질서가 온통 모순투성이다. 예를 들어 설비를 좀 바꾸려면 외국에서 사들여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의 승인을 얻어야 하고 중앙당까지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러자니 결과가 나오려면 1년 이상이 걸린다. 특히 절차를 밟는 과정 자체가 괴로운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단 몇 초면 되는 공정도 한 달, 두 달을 끌게 된다. 이것이 북한 경제현장의 현실이다.”
 

4) 대기근의 사회적 영향 

그렇다면 식량난과 경제난은 북한사회에 어떤 영향을 남겼는가? ‘고난의 행군’ 시기에 나타난 공식담론을 조사한 한 연구는 국가위기 시기에 외부의 ‘적’에 대한 강조가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미 제국주의는 정치, 경제, 군사,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체제존립을 위협하는 존재로서 ‘고난의 행군’을 촉발시킨 원인이자 절멸의 대상으로 묘사된다. 그러면서 일심단결, 붉은기, 강성대국, 인민의 전투애, 사상무장화와 같이 주로 정신적 각성을 요구하는 구호가 남발되면서 체제 결속을 다지려는 의도가 나타났다. 
그렇다면 북한사회의 현실은 이에 부합했을까? 기근이 벌어질 때 나타나는 사회적 반응을 폭넓게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심리상태와 행동패턴은 경계(alarm)에서 저항(resistance)으로, 다시 탈진(exhaustion)으로 이어진다. 초기 경계단계에서는 인간관계와 상호작용이 강화되기도 하며 과잉행동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기근 초기 단계에서는 공동식당이 만들어지고 공동체적 이타성이 높게 나타나기도 하며 (결핍이 지속되면 모두 사라진다), 역으로 쉽게 화를 내고 다투는 상황도 곧잘 연출된다. 폭동이나 반란이 나타날 가능성은 오히려 이처럼 초기 단계에 더 높게 나타난다. (시간이 갈수록 폭동이나 반란의 역량도 소진된다.) 저항단계에 이르면, 인간관계가 축소되어 가족 단위 수준에서 결속하여 식량을 구하는 일에만 몰두한다. 즉 저항단계란 개별적으로 기근 압력에 저항한다는 뜻이다. 도둑질이 늘고 모두 논밭과 창고를 지켜야 하며 이때 개별적인 싸움이 증가한다. 혼란과 무질서가 증폭된다. 그러다 탈진단계에 이르면 가족단위 인간관계마저 붕괴할 수 있다. 모든 식량이 사라지면 싸울 대상도 없으므로 기괴한 고요가 사회를 지배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북한에서 기근이 심화될수록 체제가 불안정해지고 폭동이 일어나 정권붕괴가 나타날 수 있다는 기대는 비상식적인 것이었다. 기근이 저항이나 탈진단계로 가면 각자 너무나 자신의 생존에 매달리기 때문에 조직적인 폭동이나 반란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권이 식량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다면, 정권에 더욱 복종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런 근 10년에 걸친 기근은 개인과 사회집단 단위의 가치관, 규범, 행동패턴에 본질적인 문화적 변화를 야기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정병호의 연구는 그러한 변화가 매우 다면적이고 중층적이라고 진단했다. 한편으로는 가족의 붕괴나 가족구조의 변화가 낳은 문제나, 아동과 노년층이 큰 희생을 겪은 데 따른 인구학적 문제라든가, 기근과 교육붕괴를 경험한 세대의 문제가 남아 있을 것이다. 또한 공식경제와 비공식경제의 역전, 남녀 성 역할의 변화(여성이 경제활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사회적 이상의 몰락과 가치관의 혼란, 물질주의적 가치관의 부상과 공동체성의 침식과 같은 경제적, 문화적 변화도 있을 것이다. 
다른 연구는 이러한 변화가 정치적 측면에서는 △조직적 통제가 이완되고 대중의 탈정치화가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일탈이나 반항이 일상화되고, △국가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체제에 대한 자긍심이 약화되는 현상을 낳았다고 진단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화폐물신주의가 팽배해지고, △시장관계가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는 △이타적인 공적 연대감이 약화되고, △공적 가족주의도 약화되는 현상(즉 결혼과 가족관계를 경시하는 풍토)를 낳았다. 이러한 모든 변화가 현재의 북한사회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필자가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바는, 그렇지만 북한사회의 공식담론이 당대 남한 통일운동의 교조적 흐름에는 강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미 제국주의와 그 ‘주구’(즉 김영삼 정부)에 대한 적개심을 강조하고, 사상 무장과 함께 호전적 행동을 촉구하는 북한식 프로파간다가 남한 내 일부 흐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1990년대에도 북한의 방송녹취록이 운동 집단 내에서 유통되었고, 심지어 공식문건에 글자 하나 바뀌지 않은 채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문건을 통해 북한의 호전적 프로파간다가 전혀 걸러지지 않은 채 남한 운동의 투쟁방침이 되었다. 이는 1990년대 남한 통일운동이나 학생운동에 결정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 호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3. 1990년대의 통일운동: 거꾸로 선 인식 


지금까지 한반도 핵 위기와 북한의 경제난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지금부터는 이러한 이슈에 대한 남한 사회운동의 지배적 인식이 어떠했나, 어떤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나 검토해 보겠다. 
 

1) 북한 핵 문제에 대한 거꾸로 선 인식 

북한의 NPT 탈퇴 직후, 《월간 말》에 실린 이선태 당시 한국기독교사회연구원(기사연) 상임연구원의 글을 보자.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국제원자력기구와 북한의 대립은 구체적인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 제3자들에게는 아무런 판단근거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 이러한 정황을 종합한다면 북한이 현재 핵무기를 갖고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으며, 상당한 양의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기에 언제든지 핵무기 제조가 가능하다는 주장 역시 설득력이 약하다. (…) 결국 현재 북한핵사찰공방을 좀 더 큰 맥락에서 본다면 그 본질은미국의 북한에 대한 고립정책에 다름 아니다. 이는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북한에 대한 미국의 일관된 정책이기도 하다. 설사 핵문제가 원만히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미사일협정, 화학무기 문제를 쟁점화할 것이며 마지막에는 인권문제를 들고 나올 것이라는 예상은 이미 일반화되어 있다.”
현재 시점에서 이 글을 평가한다면, 몇 가지 강한 ‘선입견’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IAEA 사찰단이 제기하는 문제를 ‘합리적 의심’으로 전혀 인정하지 않고, 북한의 주장을 두둔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이 글에서 IAEA의 주장, 즉 “북한에서 가져온 핵폐기물 샘플과 북한이 추출한 플루토늄의 핵적 구성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핵폐기물 저장시설로 추측되는 영변의 두 곳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소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IAEA의 샘플 분석의 과학적 신뢰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마치 IAEA가 제기하는 문제는 ‘합리적 의심’에 속하고, IAEA와 안전조치 협정을 체결한 국가는 이러한 합리적 의심을 해소할 의무가 있다는 주장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IAEA가 공정한 심판이 아니라 게임의 한 당사자일 뿐이고, IAEA 주장은 합리성이 없는 억견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특별사찰 요구가 부당하다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둘째, 미국의 대북정책은 북한 ‘고립정책’이라고 단정한다. 미국은 핵무기 외에도 화학무기, 미사일과 같이 대량살상무기(WMD) 문제나 인권문제를 거론하며 북한을 계속 고립시키는 정책을 추구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을 보면 미국이 ‘탈냉전’을 거부하며 냉전적인 봉쇄·고립 정책을 추구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렇지만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나, 인권 개선이라는 미국의 새로운 외교정책 목표를 ‘냉전의 연속’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합한가? 아니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 확산하고 인권개선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을 거부하는 것이 ‘냉전의 연속’인가? 누가 탈냉전을 거부하는 것인가? 현재 시점에서 본다면, 미국의 외교정책을 냉전정책의 연장이라고 규정하며, 이를 봉쇄·고립 정책으로 단정하고, 그를 핑계로 삼아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고집하고 인권개선 노력을 무시하는 것이 오히려 탈냉전의 거부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북한을 두둔하는 태도가 오히려 북한의 시대착오적인 핵 개발 노선을 지지하는 효과를 발휘하지 않았겠는가?
또한 김영삼 정부의 한승주 외무부장관은 1994년 3월 20일, 북한이 NPT에 복귀할 경우 다섯 가지 반대급부를 제시했다. ① 팀스피리트 훈련 규모를 축소하겠다, ②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 국가시설(미군기지 포함)에 대한 핵사찰을 받아들이겠다. ③ 북한에 핵공격을 가하지 않겠다고 보장하겠다, ④ 남북 간 교역을 확대하겠다, ⑤ 한국, 미국, 일본이 대북관계를 진전시키겠다. 김영삼 정부의 발표는 미국과 조율을 거쳤을 것이 분명한데, 이러한 한국 정부 입장을 냉전적인 봉쇄·고립 전략으로 단정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북한이 취한 입장도 함께 살펴보자. 북한 외교부는 핵 문제가 유엔 안보리에 회부되자 1993년 4월 3일,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이 남아공의 핵무기 개발을 적극 지원하고 원자력기구도 이 나라에 대한 115차례의 핵사찰을 실시하면서 핵무기 개발을 묵인해 핵확산금지조약을 위반했으면서도 우리에 대해서는 단지 여섯 차례 사찰로 특별사찰을 강요하고 조약 불이행국으로 규정하여 유엔에 넘기는 것은 부당하다”는 게 요지였다. 이러한 주장은 전형적으로 ‘나도 나쁘지만 다른 사람은 더 나쁘다’는 논리다. 설사 IAEA가 과거에 남아공에 대해 취한 정책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실제로는 1977년에 남아공의 지하 핵실험 시설이 소련과 미국의 인공위성에 의해 포착되어 유엔안보리가 제재를 단행했다.) 
나아가, 정작 남아공은 ‘국제관계의 정상화’를 목표로 삼으며, 1991년 NPT에 복귀했다. 그리고 1993년 3월 남아공 드 클레르크 대통령은 그동안 자력으로 개발, 은닉했던 핵무기의 자진 폐기를 공표했다. 즉 “남아공은 핵억지력을 보유했지만 아프리카 국가들과 국제사회와의 새로운 관계인식에 근거하여 이를 포기한다”고 밝혔다. 곧, 오히려 남아공은 탈냉전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경로를 선택했다는 말이다. 
셋째, 이선태 연구원의 글은 북한 NPT 탈퇴를 유엔 안보리가 다루게 되면 북한 핵 문제가 ‘국제문제’로 비화되므로, 한반도비핵화선언에 담겨 있는 남북 상호사찰을 통해 ‘민족 내부의 문제’로 전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는 바로 한국 김영삼 정부가 추진했던 바다. 김영삼 정부의 구체적 제안은 시간에 따라 다소 변화했으나, 핵심적인 메시지, 즉 남한과 북한의 상호사찰을 수용하겠다는 메시지는 일관적이었다. 예를 들어, 1993년 4월 2일, 한승주 외무부장관은 북한이 IAEA 사찰을 받을 경우 남한 내에 있는 군사기지와 미군기지의 IAEA 사찰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4월 20일 통일관계장관회의도 북한의 NPT 복귀, IAEA 특별사찰과 함께 남북상호사찰을 실현하자고 제안했다. 8월 3일에는 황인성 남북고위급회담 남측 대표가 남북 상호핵사찰을 위해, 한반도비핵화선언이 명시한 ‘핵통제공동위원회’ 개최를 제의했다. 그렇지만, 북한은 이러한 제안을 모두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플루토늄 추출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받은 원자로와 재처리시설, 그 외 미확인시설에 대한 사찰의 경우, 북한은 IAEA의 사찰이든, 남북 상호사찰이든 모두 거부했다. 그 후 제네바합의를 거쳐 결국 또 경수로 건설 이후로 미뤘다. (2000년대 진행된 6자회담에서도 결국 북한이 샘플 채취를 거부함으로써, 6자회담 프로세스 자체가 중도반단되었고, 결국 현재까지도 실현되지 못했다.) 즉, 북한 핵 문제를 ‘민족 내부 문제화’하자는 입장은 당시 김영삼 정부나 사회운동이 공유했던 바였으나, 오히려 북한의 거부로 실현되지 못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1993년 범민족대회에서 남, 북, 해외가 채택한 결의문과 공동결의문을 검토해보도록 하자. 
표를 자세히 보면,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남한의 결의문은 ‘한반도 비핵평화지대’라는 언급이 있고, 해외 결의문은 ‘비핵화공동선언의 성실한 이행’이 담겨 있다. 양자의 구체적 표현은 다르지만 어쨌든 한반도 비핵화라는 지향이 분명히 담겨 있었다. 반면 북측의 결의문은 미국의 핵무기, 한미 전쟁연습,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을 규탄한다는 내용만 있을 뿐, 한반도 비핵화라는 지향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둘째, 공동결의문을 보면, 남과 해외가 각각 언급한 비핵평화지대와 비핵화공동선언은 빠져 있고, 문장 자체가 북측의 결의문과 동일하다.
이러한 사실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가? 북한은 어떤 식으로든 비핵평화지대나 비핵화공동선언을 언급할 경우, 북한에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미국 핵정책의 부당성을 강조하고 자국 핵정책의 불가피성이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게 최우선의 목표이며, 따라서 비핵지대화, 비핵화공동선언 이행은 상황에 따라 폐기할 수 있다고 본 셈이다. 따라서 남한의 통일운동이 북한의 핵 정책을 두둔하는 편에 선다면, 비핵지대화나 비핵화공동선언 이행과 같은 요구를 내려야 하는 처지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둘째, 공동 결의문이 북한의 결의문을 복사한 것처럼 나왔다는 사실은 남-북-해외 삼자연대가 사실은 북한의 의사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낳는다. 북한 핵개발 프로그램과 같이 심지어 한반도에서 무력충돌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심대한 쟁점에 대해, 삼자연대 방식의 통일운동이 북한 정부의 입장만을 대변한다면, 과연 삼자연대 운동이 최소한 남한 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북한 핵 프로그램에 대한 남한 민중의 우려는 무시해도 좋은 것인가? 북한 핵 프로그램은 북한 정부의 입장에 따라 좌우되는 삼자연대 방식의 통일운동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계기도 된 셈이었다. 
요약해보자. 1980년대까지 한반도 핵문제에서 미국과 한국은 전술핵무기를 배치하고 대규모 핵공격훈련을 실시하는 ‘가해자’이며, 북한은 그로부터 고통을 받는 ‘피해자’라는 인식이 주류적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이러한 인식이 한국 사회운동을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1990년대 탈냉전이라는 세계적 전환 속에서 한반도비핵화선언을 바탕으로 동북아 비핵지대를 건설하고, 교류와 협력으로 나아가기 위한 기회를 스스로 박찬 자가 누구냐라는 문제는 현재 시점에서 다시 집어 볼 필요가 크다. 1994년 제네바합의로 한반도 1차 핵위기가 가까스로 봉합되고,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 늦었지만 드디어 한반도에 탈냉전이 도래하느냐는 기대가 커졌지만, 북한의 장거리탄도미사일 실험과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은 관계정상화로 나아가려는 동북아 각국의 모든 노력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동북아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과 탈냉전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는 게 분명하다.    

2) 북한 경제난과 기근에 대한 몰인식 

1980년대 통일운동이라는 맥락에서 ‘북한 바로알기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당시 운동을 기획했던 담당자는 풍부한 강사진과 강의 프로그램을 짜기가 쉽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먼저, 북한에 대한 접근은 남측에 의해서나 역시 북측에 의해서나 정보와 지식의 거대한 제약에 직면해야 했다. 북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싶어도 그 경로나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말이다. 또한 북한 바로알기 운동은 통일을 지향하려는 열의를 바탕으로, 민족적 이해와 우호의 견지에서 냉전적인 대북관을 넘어서고자 했다. 그렇지만, 현재 시점에서 보면, 그러한 정보와 지식의 제약과 통일을 지향하는 의지가 상호작용하여 북한에 대한 과도한 ‘환상’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아닌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북한의 경제난과 기근에 대한 몰인식이다. 북한 핵 개발은 워낙 은밀한 프로그램이었다고 하더라도, 북한 경제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문제는 현재 시점에서 보면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인식이 없었다. 1993년 11월 시점에 민족통일연구원의 전현준 연구위원이 발표한 글을 보자. 
 

“과연 북한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회생불가능한가? 북한 붕괴론자들은 북한경제가 70년대 중반부터 점차 침체되기 시작하여 (…) 92년에 공장가동률도 30-40%에 불과하였으며, 곡물생산량이 481.2만 톤에 불과하여 총수요량 640만 톤에 160만 톤이나 부족하였고, 92년에는 200만 톤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최근 식량폭동이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경제통계수치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는 상태에서 ‘신국민계정’ 산출방식으로 추출된 추계에 의거하여 북한경제가 최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게 ‘우리식 자본주의 논리’가 아닐까?”
이 글은 북한경제에 관해 어두운 전망을 점치는 입장을 ‘북한붕괴론’이라고 규정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규정은 북한경제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정치적 입장을 의도적으로 혼동함으로써, 북한경제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가로막는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었다. 이 글은 북한이 나진, 선봉, 남포 경제특구를 추진하며 경제난 타개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므로 핵 문제가 원만히 해결된다면 대외관계 개선으로 북한경제가 호전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나는 앞 부분에서 나진·선봉 특구가 여러 한계로 인해 발전될 가능성이 원래부터 높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또한, 1994년 2월 시점에 삼경경제연구소의 동용승 주임연구원이 발표한 글도 대체로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일반적인 분석에 따르면 (…) 이러한 경제난이 지속되면 북한은 어쩔 수 없이 개방의 형식을 취할 것이며, 결국 경제원조를 취할 수 있는 곳은 남한밖에 없을 것이라는 논리로 연결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분석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는 남한의 입장에서 유리한 측면만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현재 북한은 경제난을 겪고 있지만, 그들의 시각에서는 원래부터 내핍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상황에서 좀더 낮은 수준으로 경제적 균형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오히려 북한내부의 결속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은 북한이 경제적 내핍을 감내하면서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더 결속력을 높일 것이라고 결론을 맺고 있는데, 이 역시 ‘북한붕괴론’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강해 보인다. 북한의 경제시스템 자체가 퇴화를 겪었고, 자본스톡과 자원의 부족이라는 악순환에 빠져 있고, 그리하여 자연재해를 비롯해 외부적 충격에 매우 취약한 상태라는 인식을 읽을 수는 없다. (나아가 북한의 경제난으로 자연파괴가 심각해져서 재해의 위험이 더 커졌다는 분석도 당시에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실제로 1993년 8월 19일 미 국무부 대변인은 북한 내 식량난이 심각하고 민간소요 사태가 벌어졌다고 확인했다. 그렇지만 당시에 남한 내 사회운동은 이러한 사실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북한의 식량난 문제에 대해 얼마간 더 주목하게 된 계기는 그로부터 훨씬 더 시간이 지난 1995년 중반이었다. 북한은 1995년 5월 일본 자민당 인사에게 긴급 식량지원을 요청했고, 김영삼 정부는 일본보다 먼저 쌀을 지원하겠다고 입장을 밝히며 북한과 비공식협상을 벌였다. 1995년 김영삼 정부의 대북 쌀 지원은, 남측 쌀 수송 선박에 북측이 인공기 게양을 강요했다는 이른바 ‘인공기 사건’을 비롯해 숱한 논란을 낳았다. 하지만 어쨌든 김영삼 정부는 6월부터 10월까지 총 15만 톤의 쌀을 북한에 무상으로 지원했다. (대북 쌀 지원 논란은 다음 호에서 자세히 다룬다.) 일본은 한국의 지원이 이뤄진 후, 7월에 쌀 수송선을 출항시켰다. 
나아가 1995년 8월 23일 북한은 유엔에 수재긴급구호를 요청했고, 8월 29일 유엔 인도지원국 대표단이 방북했다. 9월 2일에는 세계식량계획(WFP), 식량농업기구(FAO), 유엔아동기금(UNICEF)이 방북했다. 그후 9월 12일 유엔조사단이 북한 수해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그에 따라 국제기구와 한국, 일본, 미국, 중국 등 주변국의 대북 지원이 본격화되었다. 
1995년 시점에 김영삼 정부는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접촉을 통한 북한 변화 유도’를 대북정책 기조로 내세웠고, 그에 따라 민간에서 각양각색의 교류협렵사업을 위해 대북접촉을 신청하는 사례가 크게 늘었는데, 이 중에는 대북 식량지원이나 병원설립, 어린이 분유 무상 지원과 같은 대북 지원사업을 위한 방북 신청도 상당수 포함되었다. (그렇지만 김영삼 정부는 ‘시기부적절’, ‘북한의 정치적 이용 가능성’, ‘대표성 문제’를 내세우며 방북신청을 불허 또는 보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1996년부터는 좁은 의미의 ‘통일운동’ 단체 중 일부도 대북지원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전국연합은 새로운 통일운동체, 즉 ‘자주평화통일 민족회의’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민주주의민족통일 성남연합은 1996년 1월부터 ‘한 집 한 되박 쌀 보내기 운동’에 뛰어들어 220명의 회원이 가가호호 방문을 실행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도 1월 29일 ‘북녘 수해동포 지원을 위한 모금운동’을 개시했는데, 3월 중순까지 적십자 창구를 통해 북녘 동포에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렇지만, 통일운동 내에서 ‘북한동포돕기운동’에 대한 논란은 지속되었다. 《유 에스 아시안 뉴스》의 문명자 주필은 1995년 12월 12-16일 북한을 방문해 수해 피해상황을 취재하고 이를 국내 언론 《월간 말》에 기고했다. 문명자 주필은 “이제 북한 수해 피해가 심각한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그만 마감했으면 한다”며, 이렇게 썼다. “캄보디아 난민을 돕기 위해 뛰던 미국언론인 버나드 크리셔는 이제 북한 수재민을 돕자고 강연하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다. 이 폴란드계 유태인은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들은 동족인데 왜 못 돕나?”
통일운동 내 논란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 북한동포돕기운동에 대해 보인 태도다. 한총련은 북한의 식량난을 다루는 언론의 보도가 왜곡, 과장되어 있으며, 《한겨레》의 기획물 ‘아! 굶주리는 북한’도 마찬가지라고 규정했다. 북한을 ‘비인간적인 상황’인 것처럼 선정적으로 묘사하는 마치 ‘가상소설’이라는 말이다. 한총련 이강민 연대사업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북한동포돕기운동의 한 근거인 ‘북한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거나 ‘북한의 남침을 막아야 한다’ 등은 극우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정권의 이데올로기 공작에 말려든 것이다. 한보사태, 김현철 비리,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악 등 정권의 위기 상황이 묻히고 있다. 이런 때에 김영삼 정부는 북한동포돕기운동을 속으로 좋아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필요한 건 대중적인 북한동포돕기운동이 아니라 ‘정권타도투쟁’이다.” 
기사에 따르면, 한총련은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의 베를린 사무국의 북한 정보를 가장 신뢰하는데, 베를린 사무국은 북한의 식량사정이 외부에 손 벌릴 만큼 심각하지 않으며 더구나 북한동포돕기 같은 대중적 운동을 요구한 적도 없다고 전했다.
이 기사가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가? 한총련이 범청학련 베를린 사무국을 가장 신뢰한다는 말은 베를린을 통해 전달되는 북한 당국의 입장을 가장 신뢰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당시 한총련의 사고구조를 따르면, 범청학련을 관할하는 북한 당국이 북한 식량난 문제나 동포돕기 사업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면, 식량난은 언론이 제시하는 허구일 따름이고, 동포돕기 사업은 전혀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 보수세력을 돕는 효과를 발휘할 뿐이라는 결론이 즉각 도출된다.  
한총련 사례처럼 극단적으로 북한의 식량난과 경제난의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은 아니더라도 그러한 사태가 발생한 원인이 결단코 북한 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변하는 주장도 많다. 예를 들어 신준영 《월간 말》 기자가 1996년 4월호에 쓴 기사, 「96년 북한, 붕괴는 없다」를 보자.    
“설비노후화를 노동력의 투입으로 메우는 전략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던 80년대 후반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시작됐다. 이것이 북한 경제에 미친 충격은 북한의 규모가 반으로 줄었다는 데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 미일과의 무역관계가 갑자기 전면 단절됐을 때 우리사회가 대체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를 상상해보면 현재 북한의 경제난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전형적으로 외부적 충격은 과장하고, 북한이 교역과 원조를 확대하려는 정책이 전체적으로 부적절하고 실패했다는 사실은 누락하는 논리다. 만약 한국이 미일과의 무역관계가 단절될 전망이라면, 이러한 단절을 예방하기 위한 외교적 조치를 취하거나, 얼마간 불가피하다면 무역·투자 관계를 다변화하거나, 어느 것도 아니라서 기근이 발생할 정도라면 국제기구나 주변국에 차관을 요청하거나 원조를 요청할 수도 있다. 
앞에서 인용한 연구에서는 북한의 GNP 감소에서 외부적 충격이 가한 요소는 일부에 불과했고 경제난 전체를 외부적 충격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러한 충격이 발생하는 시점에 북한 정부가 취한 ‘개방화’ 조치, 예를 들어 나진·선봉 특구는 경제적 논리에서 봤을 때 매우 부적절했고, 차관이나 원조 요청의 경우도 그에 부속하는 개혁조치나 모니터링을 못마땅하게 여겨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식량난은 외적 충격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종합하면, 북한의 식량난, 경제난 역시 북한이 탈냉전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를 거부하면서 나타난 극단적 사태로 볼 수 있다. 그에 반해, 기존 통일운동은 이러한 현실을 적절히 인식하지 못한 채, 기존 관성대로 북한의 정치체제, 경제체제를 두둔하면서 한반도 핵 위기와 북한의 경제난을 동시적으로 발생시키는 북한식 악순환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이러한 몰인식과 침묵은 1996년 범민족대회 사태(‘연대사태’)와 같은 통일운동의 대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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