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0 봄. 1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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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사 산책』

헌법에 비친 주권의 풍경

김성균 |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국장

 

발전과 쇠퇴, 갈림길에 선 한국의 민주주의

 
독재정권의 통치를 끝내고 만들어진 1987년 헌법(이하 87년 헌법)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국가의 통치 질서를 정하기 위한 기본법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 평가가 곧 87년 헌법이 완벽한 헌법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90년대 내각제 개헌 약속부터 시작해서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의 ‘원 포인트 개헌’ 논의, 2012년 대선에서의 개헌논의 쟁점화 등 꾸준하게 개헌에 대한 제기가 있어왔다. 그리고 2016년~2017년,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을 계기로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개헌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전 사회적으로 제기되었는데, 박근혜 대통령 탄핵 후 당선된 문재인 정부는 이런 제기에 대한 답으로 2018년 3월 26일, 대통령 개헌안을 발의한다. 그러나 국회에 상정된 개헌안은 2018년 5월 24일, 자유한국당의 보이콧으로 인한 의결 정족수 미달로 폐기되었다. 이렇듯 87년 헌법은 그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로 인해 지속적인 개헌을 주장하는 제기가 있어왔다.
개헌 논의 중에서도 특히 가장 최근의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87년 헌법의 한계를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라는 형태로 생생하게 경험한 것으로 인해 그 전까지 개헌논의와 비교하여 훨씬 진지하게 개헌논의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발의된 대통령 개헌안은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해소하기 위한 통치구조 변화를 제안했는데, 주요 내용은 ① 지방 분권의 강화 ② 대통령의 임기를 4년 연임제로 변화 ③ 대통령의 국가원수지위 삭제 ④ 예산법률주의 도입 등이었다. 그런데 개헌안이 발의된 당시, 개헌안이 대통령으로 집중된 권한을 실질적으로 분산시킨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해소할 수 없다고 평가하는 의견이 상당했다. 만약 이런 의견이 타당하다면, 개헌안의 부결에 대해 정치적 이익에 눈먼 자유한국당의 보이콧 때문에 정치개혁에 제동이 걸렸다는 평가는 설득력을 잃게 되고, 오히려 대통령 개헌안 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김명주 전 국회의원이 집필한 『헌법사 산책: 헌법에 비친 주권의 풍경』(산수야, 2010)을 검토하려 한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대표 국가인 영국(의원내각제), 미국(대통령제), 프랑스(이원정부제)에서 헌법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고 개정되었는지를 검토한다. 그리고 후발주자로서 독일과 일본,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헌법에 대해서도 살핀다. 이렇게 세계 각국의 헌법을 검토한 다음 책의 뒷부분에서 한국의 헌법을 비추어 본다.
헌법의 내용은 그 나라의 역사에 따라서 각양각색이지만,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핵심은 정부형태(통치구조)와 기본권에 대한 내용이다. 이 글에서는 책에서 다루는 헌법사에 보충하여 현존하는 대표적인 정부형태(통치구조)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 살펴본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 추진되고 있는 정치개혁에 대한 평가와 시사점을 도출하려 한다.
 

의원내각제, 약하고 불안정할까?

 
영국 헌법의 시작은 1215년 존 왕이 귀족들의 요구를 담은 문서인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에 서명한 것으로 본다. 마그나 카르타는 국왕의 권리를 제한하는 한편 귀족 자신들의 권리를 명시한 문서였는데, 후대에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12조와 39조였다. 12조는 의회의 동의없는 과세를 금지하는 것으로 발전했고, 39조는 적법한 절차에 따르지 않는다면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지 않는다는 원리로 발전했다. 이는 오늘날 헌법의 ‘씨앗’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영국 의회는 국왕이 자문을 구했던 귀족들의 모임으로 시작했다. 이 때문에 처음부터 국민의 대표라는 개념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1264년, 자금이 필요했던 헨리 3세가 의회에 자금지원을 요청했고 귀족은 그 반대급부로 추밀원을 설치하여 행정 전반을 감독하는 개혁안을 제출한다. 당장 돈이 필요했던 헨리 3세는 개혁안을 수용하지만 곧 이를 파기했고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 영국을 짧은 기간 실질적으로 지배한다. 지배기간이었던 1265년, 의회를 소집했는데, 이 때 귀족뿐만 아니라 자치시의 대표자까지 포함시켜 처음으로 선출된 대표가 의회에 참가했다. 이것을 국민을 대표하는 성격을 가진 의회의 시초로 본다. 결국 반란은 진압되지만 이후 1295년 에드워드 1세는 대귀족, 고위 성직자, 각 자치시와 소도시 대표자, 기사들을 모아 모범의회를 소집한다. 이 때 대표를 소집한 이유는 폭넓은 신민의 대표를 소집함으로써 광범위하게 과세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렇듯 왕의 필요에 의해서 소집하고 해산하는 기구이기는 했지만 이때부터 의회가 마그나 카르타의 원칙, 즉 왕은 납세자나 그의 대표가 동의해야 과세할 수 있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과세를 비준하는 기관이 되었다. 이후 프랑스와 백년전쟁을 치르면서 전비 마련을 위해 의회가 더욱 자주 소집되고, 의회의 영향력이 커지는데, 평민 대표들의 위상도 함께 높아져 의회 밖에 따로 모여 공동의 청원을 제출하고 과세 찬반투표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관행이 귀족으로 구성된 귀족원(상원)과 주·도시에서 선출된 대표로 구성된 서민원(하원)으로 이어져 오늘날의 양원제도로 발전한다.
이후 1642년 영국혁명(청교도 혁명)으로 왕권이 결정적으로 제약되었고 1688년 명예혁명의 결과로 권리장전이 승인됨으로써 과세, 신체의 자유를 다시 확인할 뿐만 아니라, 의회의 안정적 개원을 보장하고 왕의 법 집행 정지 특권을 박탈하여, 국가의 최고의사결정기관이 국왕이 아니라 의회임을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수상이 국왕에게 집행권(행정권)을 가져옴으로써 수상제도가 성립한다. 1832년 선거법 개정 이후 내각 장관은 의회에서 나오는 헌법적 관습이 만들어지고, 20세기 초 수상이 장관을 해임할 권한과 의회 해산을 국왕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확립되면서 의원내각제로 발전한다. 즉, 의원내각제란 수상을 중심으로 한 내각이 행정권을 가지면서 국왕이 아니라 의회에서 존속 여부가 결정되는 정부 형태를 의미한다.
의원내각제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의원내각제는 국왕의 권한을 의회로 가져오면서 입법권과 행정권까지 장악하는 체제로 발전했다. 이런 점에서 의원내각제는 일원적 정통성, 권력의 융합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일원적 정통성은 민의를 대표하는 정치기구는 의회가 유일하다는 의미이다. 직선으로 선출되는 권력은 의회의 의원뿐이다. 권력의 융합은 내각(행정부)과 의회(입법부)가 분리되지 않고 융합되어있다는 의미이다. 내각은 정치적 책임을 의회에 지고 의회는 신임/불신임을 통해서 내각을 유지/사퇴시킨다. 또한 내각의 각료 대부분은 의원 중에서 선출한다.
이처럼 의회가 유일한 정통성을 갖고 입법과 행정이 융합되어있기 때문에 내각제에서는 국민의 대표인 의회가 내각에 책임을 묻는다는 의미에서 국정운영에 대한 민주적 책임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각은 더 적극적으로 민의를 반영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물론 무분별한 불신임을 막기 위해서 총리에게는 의회 해산권을 부여하고 있다. 내각이 불신임된다면 총리는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다시 실시하여 의회구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
종합하면 견제수단이 있지만 결국 의회가 최고의 권력기관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정당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의원내각제에서는 정당이 집단적으로 집권하는 형태이기에 정당이 통치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집단적으로 집권하기 때문에 정치적 책임도 집단적이다. 그렇기에 정당 내부의 합의가 매우 중요하며 합의에 대한 규율이 엄격하다. 이와 같이 합의를 중시하는 전통은 정당 내에서 정치인의 성장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개별 정치인에게 당에 대한 충성심이 필수적이며 당 내에서 역량을 인정받아야만 정치적 지위가 상승할 수 있다. 정당 내부에서 상당기간 역량검증과정을 거치게 되는 구조인 것이다. 이런 측면 때문에 혹자는 내각제를 “잠재적 지도자를 키워내는 학교”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혜성같은’ 정치 신인이 등장하는 일은 적다.) 
이렇게 성장한 정당과 정치 엘리트들은 입장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다른 정당과 차이를 부각해 집권을 도모한다. 당선 후에는 정당 공동의 노력으로 정책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형성하고 집행한다. 일반 유권자들은 정당 간 노선차이를 인식하고 이를 토대로 평시에는 정당과의 일체감을 유지하면서 선거 기간에는 그 정당을 지지한다. 이는 내각제가 제대로 작동하는 조건이 된다. 다시 말해 건강한 정당정치가 내각제가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조건이다.
그런데 통념처럼 의원내각제는 약하고 불안정한 체제일까? 의원내각제에서 내각은 의회 내에서 과반수를 차지한 정당에서 구성하거나 과반수를 차지한 정당이 없을 경우에는 몇 개의 정당이 연립하여 구성하게 된다. 영국의 경우는 거대정당에 유리하게 선거제도가 제정되어있어서 과반수를 획득하는 것이 비교적 쉽다. 영국을 제외한 대다수의 국가들은 대개 연립정부를 구성하는데, 구성하는 데 있어 혼란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 물론 정당이 난립하는 경우에는 연립정부구성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으므로 정국이 불안정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조각에 시간이 좀 더 걸릴 뿐, 대부분의 경우 무리 없이 내각이 구성된다. 권력의 공백이 길어지는 것은 정파적 이해를 떠나서 국가적 손해가 막심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내각제는 정치인에게 힘 싸움이 아닌 타협과 합의의 정치를 강제하는 측면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원정부제 ≠ 분권형 대통령제

 
우리나라에서는 이원정부제를 분권형 대통령제로 지칭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원정부제는 보통 프랑스의 5공화국을 원형으로 보기 때문에, 이렇게 본다면 우리나라에서 지칭하는 분권형 대통령제와 이원정부제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원정부제가 우리나라의 인식과 어떻게 다른지는 프랑스 헌법의 역사를 통해서 살필 수 있다. 이원정부제는 혼란했던 프랑스 민주주의 확립과정의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1789년 프랑스의 제3신분은 앙시앵 레짐에 반대하며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채택한다. 그 유명한 프랑스 혁명이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에 대해 전 유럽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1793년 국민공회에 의해 루이 16세가 처형당하자 왕정을 유지하던 유럽의 제국들은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대립하기 시작한다.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를 필두로 공포정치를 행하지만 결국 로베스피에르 자신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며 공포정치는 막을 내린다. 이후 국민공회에서는 5명의 집정관을 선출하여 정부를 구성하지만 집정관들 사이에서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혼란이 벌어진다. 이 때 외세와의 전쟁으로 인기를 얻은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헌법을 정지시킨 뒤 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1802년 헌법을 개정하여 종신 통령에 오르고 1804년에 다시 국민투표를 통해서 왕정체제로 복고한 뒤 황제에 즉위한다.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된 제1공화국이 10여 년 만에 종료된 것이다.
나폴레옹의 실각 이후 왕정이 이어지다가 1848년 2월 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성립되고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그의 임기는 1852년까지였으나 1851년에 쿠데타를 감행해 의회해산과 10년 임기의 대통령제를 도입했고, 1852년에는 다시 국민투표를 통해서 왕정체제로 복귀하는 헌법 개정을 단행한다. 그 자신은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한다. 나폴레옹 3세는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히고 국민의회는 즉시 제3공화국을 선포한다. 그러나 전쟁에 패배한 여파로 혼란이 계속되어 1875년에 이르러서야 공화국 헌법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원은 4년 임기의 직선의원, 상원은 9년 임기의 간선의원으로 구성되었고, 대통령은 국민의회의 상원, 하원에 의하여 다수로 선출되었다. 대통령은 상원의 동의를 얻어 하원 해산권을 가진다. 3공화국은 의회의 정부불신임권이 하원해산권보다 강력했고 대통령의 권한에 대해서 국민투표를 통해 거부할 수 있었다. 즉 강한 의회, 약한 정부를 골자로 하는 고전적인 내각제로 운영되었다. 강한 의회와 약한 정부는 통령 중심의 공화정이 제정으로 돌아갔던 역사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3공화국은 70여 년간 유지되어 가장 오래 존속되었으나 국가기구가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내각의 평균 존속 기간이 9개월로 매우 짧았기 때문이다. 강한 의회와 약한 정부를 추구했던 3공화국에서 행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는 곧 반동으로 규정했던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내각이 조금만 실정을 저질러도 바로 불신임되는 경향이 있었다. 결국 3공화국은 나치의 침공으로 붕괴하고 비시정부가 수립된다.
괴뢰정권이었던 비시정부는 1944년 독일이 프랑스에서 패퇴하면서 붕괴하고 4공화국이 세워졌다. 4공화국은 비시정부 붕괴 이후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던 드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상원의 권한을 제한하고 하원을 중심으로 하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한다. 4공화국 역시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는데, 냉전으로 인해 공산당과 과격 우파세력인 프랑스 국민연합(드골당)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극단적인 정치구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정치 대립 국면이 지속되면서 중도적인 제3세력이 다른 정당을 설득하여 연립과반을 구성하기가 쉽지 않았다. 1946년부터 1958년까지 25개의 내각이 수립되었다가 물러났고 평균 재임기간은 7개월이었다. 
5공화국 출범의 결정적 계기는 알제리 독립문제였다. 당시 알제리 독립문제로 프랑스는 양분되어있었고 이런 정치혼란을 틈타 군부 쿠데타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이었다. 결국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드골에게 6개월간의 전권을 위임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5공화국이 출범한다.
5공화국에서 주목할 부분은 대통령 권한강화와 의회의 약화이다. 우선 대통령이 의회의 동의 없이 총리를 임명할 수 있다.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 동의안은 의원 1/10의 서명이 필요하다. 또한 한번 불신임안에 서명하면 남은 회기 동안에는 다른 불신임안에는 서명할 수 없게 하여 불신임 동의안이 남발되는 상황을 방지했다. 불신임안은 절대다수의 동의로 통과되게 했는데, 기권도 불신임안에 대한 반대로 간주했다. 의회의 불신임과 대등하게 대통령은 의회해산권을 가졌고, 국민투표를 의회 동의 없이 부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비상대권도 가져 여러 면에서 의회에 대한 행정부의 우위를 규정하였다. 한편 선거제도도 소선거구 결선투표제로 개정하는데, 이 개정으로 인해 극단주의 정당의 대립이 어느 정도 해소되어 정국의 불안정성을 개선했다.
제5공화국은 외형상 강한 대통령제에 대통령 불신임 동의안이라는 민주주의적 요소가 조금 더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서두에 밝혔듯이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적인 요소를 가미한 분권형 대통령제로 지칭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원정부제는 정말 통념처럼 분권형 대통령제일까?
이원정부제를 분권형 대통령제로 보기는 무리가 있다. 총리를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통령의 권한도 막강하기 때문에 권력이 분점된 상태처럼 보이지만 의회 내에서 여소야대가 발생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여소야대 국면이 펼쳐지면 현실적으로 대통령의 총리임명권이 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의회의 동의 없이 임명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하원이 총리와 정부에 대한 불신임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임명권이 제한된다. 따라서 의회 주도의 내각을 구성하게 되어 야당이 총리와 내각을 맡는 형태가 된다. 이런 상태를 분점정부 또는 동거정부라고 칭하는데, 분점정부 상황은 거의 온전한 내각제에 가깝게 운영된다. 즉 프랑스의 정치제도는 혼합된 형태라기보다는 정치 국면에 따라서 교체해가는 것에 가깝다.
이렇게 교체되어 운영되는 것은 이원적 정통성을 정치적으로 해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과 의회는 둘 다 국민에 의해 선출되므로 정통성을 가진다. 따라서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우위에 두기 어렵다. 이 때문에 정통성을 가진 정치기구 간에 대립이 발생하면 이를 제도적으로 조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동거정부가 성립했을 때, 비교적 무난한 국정운영이 이뤄졌다. 이는 우연찮게 갈등이 없어서가 아니라 국정운영에 있어서 양자가 타협하고 관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분점정부가 성립되었을 때, 대통령이 대승적인 차원에서 내치에 대한 권한행사를 자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원정부제는 이런 기반에서만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미국 대통령제의 핵심은 권력분립이다

 
미국은 대통령제의 원조다. 미국 헌법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통령제가 어떤 맥락에서 성립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대통령제와 어떤 점에서 다른지도 비교해볼 수 있다.
독립혁명 전의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제국의 거대한 식민지였다. 1607년 버지니아 주에 있는 제임스타운에서 시작하여 1732년까지 13개 주가 성립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들은 대중 정부의 형태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이 시기의 식민지 정부는 일반적으로 총독과 양원제 의회로 구성되었다. 상원은 총독이 임명한 의원으로, 하원은 자유 시민들이 선출한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렇듯 미국의 영국 식민지는 다른 식민지와는 다르게 군주의 영향력이 비교적 적은 상황에서 나름의 독자적인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은 1763년까지 프랑스와 벌인 전쟁으로 인해 전쟁부채가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식민지에 각종 세금을 부과했다. 이에 반발하여 1773년 보스턴 항구에서 차를 내다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고 영국은 즉시 보스턴 항을 봉쇄하는 법률을 제정한다. 이에 미국의 각 식민지들은 1774년 대륙회의를 개최하여 식민지에 대한 악법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며 팽팽히 맞섰고, 이 대립은 1775년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전쟁이 발발하자 대륙회의는 독립을 정당화하기 위해 13개 주에 각각의 국가를 결성하고 헌법을 제정할 것을 권고했다. 1776년 버지니아가 최초로 주 헌법을 제정하고 이것이 이후 여러 주와 연방헌법의 모범이 되었다. 이 헌법은 ① 인간의 천부적인 자유와 권리를 명확히 밝힌 권리장전, ② 통치기구, ③ 헌법 비준과 관련된 일정에 관한 세 부분으로 나뉜다. 이후 1776년 식민지 전체 차원의 독립을 결의하고 독립선언문을 공포했다. 독립전쟁은 1781년 미국의 승리로 끝났고, 1783년 양국의 공식 협정이 맺어졌다. 
한편 1777년 독립선언 이후, 대륙회의는 13개 식민지를 통합하는 연방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연맹규약을 만들었다. 연맹규약은 연방의회를 구성하여 연방법을 만들었지만, 이를 집행하기 위한 행정부, 사법부, 세금 수취의 권한을 규정하지는 않고 있었다. 독립전쟁 승리 이후 1787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각 주 대표 55인이 모여 연맹규약의 개정을 논의했고 이렇게 개정되어 만들어진 법이 연방헌법이다.
연방헌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연방정부를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3부로 나누어 상하원 양원제를 채택했다. 입법권은 상하원으로 구성된 미국 연방의회에 속한다. 입법부의 구성에서 하원은 인구수에 비례하도록 하고, 상원은 각 주마다 2명을 뽑는 균등제를 하기로 합의했다. 또 하원은 주민의 직접투표, 상원은 주 의회의 간접투표로 선출된다(1912년 수정 헌법 제17조에 따라 상원도 주민 직접투표로 바뀌었다). 행정부와 입법부를 엄격하게 분리하여, 공직에 있는 자는 재직 중에는 양원의 의원이 될 수 없다. 행정권은 미국 대통령에 속한다. 대통령은 국군통수권, 사면권, 조약체결권, 공무원 임면권, 긴급 의회 소집권, 외교사절 접수권 등의 권한이 있고, 법률안 거부권을 가진다. 국회발언권이나 법률안제출권은 없지만, 연방의 상황을 의회에 보고하고, 법안 심의를 권고할 수 있다. 대통령 및 부통령의 임기는 4년이고 선출 방식은 각 주에서 상원의원과 하원의원의 숫자만큼 선거인단을 구성하여 간선제로 선출한다. 사법권은 입법부와 행정부에서 분리된 1개의 대법원과 하급법원에 속한다. 이렇게 성립된 연방헌법은 1790년 로드아일랜드의 비준을 마지막으로 13개 주 모두에서 비준되었다. 
미국 헌법은 유럽에서 산발적으로 논의되던 민주적 통치질서를 하나의 헌법으로 체계화해 실현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인권선언의 내용을 충족할 수 있는 나라를 설계해냈다는 데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제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미국의 대통령제가 성립된 역사를 보면 이미 성립되어 있었던 주 정부를 연방이라는 형태로 통합하여 연방정부를 구성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권한이 주 정부에 있었다. 이는 연방정부와 주 정부의 권한이 헌법상 구분되어 있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연방정부의 권한은 연방헌법이 위임한 사항으로 제한되고, 주 정부는 연방헌법이 연방정부에게 위임하지 않은 권한과 금지되지 않은 일체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주 정부의 권한이 큰 만큼 연방정부의 권한이 그리 크지 않았고 대통령의 권한 또한 크지 않았다. 연방정부가 전국적인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1913년 연방소득세법이 통과되어 전국적 과세권을 가진 이후다. 이후에는 대공황, 세계대전 등 주정부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이 발생하면서 연방정부의 역할이 점차 커지게 되고 대통령의 권한도 그에 맞춰서 커지게 된 과정이 있었다.
이런 역사적 맥락은 미국 헌법의 삼권분립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미국 헌법은 삼권을 명확하게 분리하여 상호 견제 및 의존으로 제도적 균형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여기서 권력 분립은 대통령이 아니라 오히려 의회, 특히 주 대표가 있는 하원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상하원을 분리하고 대통령이 법률안 거부권을 가지는 것도 그런 고민의 산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대통령제=강한 정부라는 등식이 정작 대통령제의 원조인 미국에서는 맞지 않는 것이다.
대통령제가 원리적으로 균형과 견제를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의회와 대통령이 이원적 정통성을 갖는다. 이원적 정통성은 대통령과 의회 양자 간의 세력균형을 추구할 수 있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정치적 교착상태가 발생할 수 있다. 교착상태를 해소할 제도적 장치가 없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경우에 대통령은 의회를 우회하여 국민들을 직접 상대하면서 지지를 호소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국민의 지지를 통해서 의회를 압박하려는 시도인데, 이는 포퓰리즘이라는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포퓰리즘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보자면, 대통령제는 대통령 1인에 대한 신뢰를 묻는 제도이기 때문에 정치적 ‘아웃사이더’의 등장 가능성이 높다. (미국 트럼프 역시 아웃사이더를 자처한 바 있다.) 정당정치의 제도화 수준이 높으면 어느 정도 자질과 능력을 검증할 수 있으나 정당정치의 유동성이 크고 신뢰도가 떨어진다면 혜성같이 등장한 인물이 국민들 사이에서 신선하고 참신하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지는 쟁점적이지만 어쨌든 이런 흐름이 반(反)정당적인 흐름임은 명확하다. 이러한 반(反)정당적 흐름이 강해지면 정당에서 담보하던 정치인으로서 성장과정이 사라지기 때문에 정치적 아마추어가 대중의 인기를 얻어서 집권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인물이 집권하게 된다면 능력의 부족으로 국정운영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그런데 능력이 부족하여 국정운영에 차질을 빚더라도 임기가 고정된다는 대통령제의 특징으로 인해 문제해결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물론 임기가 고정되어 있다는 점은 정치가로 하여금 소신있는 활동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만큼 상황변화에 대한 대응성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각제의 경우에는 불신임 압박을 통해서 내각에 개입하거나 실제 불신임을 통해서 정국의 변화를 도모할 수 있지만 대통령제는 그런 수단이 탄핵 외에는 없다. 최근 한국에서 개헌 논의가 제기될 당시에 이를 고려하여 4년 중임제가 제안되기도 했지만 중임제도 역시 연임에 제한이 있는 경우에는 재선 뒤에는 책임을 묻기가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책임을 묻는 제도는 결국 선거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하나같이 임기 말 레임덕 현상이 벌어지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대통령제가 단점이 명확해 보임에도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연방헌법이 성립된 이래로 통치기구의 골자가 거의 변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다는 데서 증명된다. 이는 강력한 의회가 담보하는 민주주의의 발전, 그리고 다수의 전횡을 막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로 인해서 가능했다. 미국의 성공에 따라서 대통령제는 가장 많은 국가가 채택하는 통치체제다. 그러나 독재나 쿠데타 등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한 사례가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미국 대통령제의 외양은 수입하지만, 그 핵심인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어떻게 구현해낼 것인가에 대해서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강한 정부라는 통념은 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한국 헌법의 역사를 통해서 더 자세히 검토한다.
 

시작부터 꼬여버린 한국의 헌법

이 책에서는 한국의 헌법이 임시정부를 계승하고 있고 국가와 헌법을 제정하려는 노력이 1948년 정부수립 이전부터 이어져왔다는 맥락에서 한국 헌법의 역사를 1919년 임시정부의 헌법부터 검토하고 있다. 
1919년 4월 13일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됐다. 간단한 헌법 격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총 10개 조문으로 이루어졌다. 민주공화국임을 선포했고, 같은 해 9월 상하이 임시정부는 한성정부와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와 통합하면서 제1차 헌법 개정을 했다. 이 헌법은 8장 58조로 오늘날 헌법과 비슷하게 구성됐다. 
첫 헌법에서는 대통령제를 도입했지만 임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1925년 탄핵된 이후 그 해 4월 개헌을 통해 의원내각제로 체제를 바꾸었다. 1940년 10월 4차 개헌 때는 수상과 비슷한 주석제를 도입했다. 1944년 5차 개헌 때는 주석·부주석, 국무위원회 체제를 도입했다.
 

왜곡된 제헌 과정

광복 이후 1948년 헌법이 제정됐다. 그런데 제헌과정부터 한국의 헌법은 큰 곡절을 겪었다. 한국의 헌법은 애초에 의원내각제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서구 대부분의 나라에서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상식에서 민주주의는 곧 의원내각제였다. 또 2차 세계대전의 전범인 독일의 나치, 일본 군국주의가 1인 독재로 인해 가능했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대통령제는 독재를 초래하기 쉬운 정부형태라는 게 당시의 상식이었다. 이런 이유로 임시정부 초기를 제외하고는 대통령제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논의된 바가 없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주장이 먹히지 않자 최후에는 정부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남한의 단독 정부는 좌파와 중도파가 모두 참여하지 않았고 친일 지주세력으로 표상되는 한민당이 주축이었기 때문에 정통성이 매우 약했다. 그런 가운데 이승만마저 빠져버리면 정통성이 아예 사라져버리는 상황이었다. 결국 최종안은 몇몇 구절을 대통령제로 바꿔 30분 만에 수정된다. 국가의 기본인 헌법을 한 개인이 좌지우지하는 시작점이 된 것이다.
이승만이 대통령제를 내세운 또 다른 근거는 한국의 헌법을 결정적으로 왜곡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현재 한반도가 해방 후 엄중한 정세, 위기상황이라는 논리였다. 여기서 위기상황은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인한 남한정부의 침탈 가능성이었다. 이런 주장 아래 반공주의가 어떤 이념적 가치보다 우위에 있게 됐다. 위기상황이라는 근거는 만능열쇠로 기능했다. 위기상황이기 때문에 헌법 조문의 의미를 깊이 논의하기보다는 일단 통과시켜서 정부를 구성한 이후에 수정하거나 제정하면 된다는 주장이 빈번하게 제기되었다. 또 위기상황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권한이 비정상적으로 강화되기도 했다. 대통령은 비상조치권, 조약의 체결 및 비준, 전쟁선포 및 강화권, 법률안 거부권, 국군통수권, 계엄선포권 등을 가졌다. 비상조치권은 명시적으로 제한규정이 존재했지만 계엄령에 대해서 어떤 제한규정도 두지 않았다. 행정을 총괄하는 것은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신임에 의존하도록 함으로써,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3부를 총괄하는 듯한 위치가 되었다. 이런 구조는 국무총리가 대통령 실정에 대한 방패막이 역할을 하게 하여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또 국회의 가장 본질적 권한인 법률제출권과 예산편성권이 정부에 부여됨으로써 국회는 무력해졌다. 
 

제2공화국의 헌법

1960년 4·19혁명 이후 국회는 <의원내각제 개헌안 기초특별위원회>를 구성했고, 헌법 개정안을 마련해 6월 15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행정부의 수반’이라는 규정은 삭제하고, ‘국가의 원수’라는 상징적인 권한만 행사하도록 했다. 기존 헌법이 인정하던 비상조치권, 조약 체결과 비준/전쟁선포와 강화권, 사면권, 계엄선포권, 훈장수여권은 ‘국무회의의 의결에 의하여’ 행하게 하도록 했다. 즉 대통령은 형식적인 발표 주체로 한정했다. 국군통수권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하도록 했고, 대통령령의 제정권과 법률안 거부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행정권은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으로 조직되는 국무원에 속하게 했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여 민의원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대통령이 민의원의 동의를 얻지 못한 날로부터 5일 이내에 다시 지명하지 아니하거나, 2차에 걸쳐 민의원이 동의하지 못한 경우, 국무총리는 민의원이 선거하도록 했다. 온전한 내각제를 갖춘 것이다. 
국무원은 민의원에서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불신임 의결을 할 수 있었고, 이럴 경우 국무원은 10일 이내 총사직하거나 민의원 해산을 결의해야 한다.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 양원제를 채택했다. 양원 중에서는 하원 격인 민의원이 우위에 있었다. 
그 밖에 위헌법률심사를 위한 헌법재판소를 규정하기도 하고 정당 조항을 신설하여 정당이 국가의 보호를 받는 한편 헌정을 헤친다면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2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무소불위한 권한을 대폭 축소해 상징적인 국가원수의 권한만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동시에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을 통해 민주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헌법제정 당시처럼 의원내각제가 민주주의적이라는 것은 여전히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당 내의 계파 갈등으로 정국은 혼란을 거듭했고, 그들이 추진했던 경제정책도 실패했다. 민주당은 사회적 혼란을 전혀 추스르지 못했고 국민들의 지지도 상실했다. 결국 사회적 혼란 수습을 명분으로 한 5·16쿠데타로 인해 제2공화국 헌법은 정지된다.
 

제3공화국~제5공화국의 헌법

1961년 5월 18일, 군사혁명위원회는 장면 총리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았다. 6월 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 공포했는데,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최고통치기관이 되어서, 내각 수반을 임명하고, 사법행정의 대강을 지시, 통제할 수 있으며, 대법원장과 대법원 판사의 임명 제청권, 그 외 법관에 대한 임명승인권을 보유한다는 내용이었다. 기존 국회는 해산했고, 정부 각료는 총사퇴했으며, 헌법재판소는 기능이 정지되었다. 다만 대통령제는 유지하여 윤보선이 1962년 3월까지 직을 유지했다. (윤보선 사임 후 박정희가 권한대행.) 결국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행정, 입법, 사법을 모두 장악했다. 1962년에 헌법심의위원회가 구성되어 12월 17일 국민투표로 개헌안이 확정되었다. 대통령제로 통치구조를 변경하면서 국무총리 제도를 존속시켜 대통령이 국회 동의 없이 총리를 임명했다. 별도로 국무총리를 두어서, 대통령이 입법, 행정, 사법을 총괄하는 듯한 체제를 만들었다. 단원제로 복귀했으며 국회의원이 당적을 이탈하거나 변경할 경우 자격을 상실하도록 했다. 헌법재판소를 폐지하고 대법원에 위헌법률심사권을 부여했다.
1969년 9월 14일에는 이른바 ‘3선 개헌’을 단행했고, 1972년 10월 17일, 헌법을 정지시키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정당과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국무회의가 국회를 대신하는 친위쿠데타를 감행했다. 그리고 12월 27일 유신헌법이 제정된다. 유신헌법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신설하였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2,000-5,000명 규모의 대의원으로 구성되며, 대통령이 의장을 맡는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대통령을 선출하고 대통령이 일괄 추천하는 국회의원 1/3에 대해 찬반투표를 한다. 즉 대통령 간접선거를 통해서 종신대통령을 가능하게 했고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지명하여 국회도 장악했다. 또한 53조는 대통령에게 내정, 외교, 국방, 경제, 재정, 사법 등 국정전반에 걸쳐 긴급조치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 권한은 국회의 동의나 승인이 필요하지 않으며, 사법심사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대통령은 언제든지, 아무 조건 없이 국회를 해산할 수 있었고 국정감사제도 폐지했다. 정기회, 임시회를 합쳐 150일을 넘을 수 없게 하여 국회활동을 제한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유신체제는 붕괴한다. 유신 붕괴 직후 12·12사태로 전두환이 군부를 장악하고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전두환을 11대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1980년 10월 22일 국민투표에서 새 헌법을 통과시킨다. 새 헌법에 따라 구성된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하여 1981년 2월 25일 전두환이 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개정된 헌법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폐지되고 대통령 7년 단임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국회해산권, 비상조치권, 헌법 개정 제안권, 법률안 제출권 등을 지니고 있어 국회보다 절대적 우위에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1948년 제헌에서부터 1987년 87년 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한국의 헌법은 국가의 통치구조를 규정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한다는 헌법의 기능을 수행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독재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됐다. 미국의 헌법학자 칼 뢰벤슈타인은 국가의 기본법인 헌법의 규범과 현실이 일치하는 ‘규범헌법’과 그렇지 않은 ‘명목헌법’을 구별했다. 명목헌법 중에서도 교육적 가치를 가지지 않고 규범헌법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없으면서 독재를 정당화할 뿐인 장식헌법이 존재한다. 이런 규정에 따르면 한국의 헌법은 장식헌법일 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최근 여권의 정치개혁에 부쳐


서두에 언급했듯이 1987년 6월 항쟁으로 87년 헌법이 제정되었지만 이후에도 헌법 개정에 대한 논의는 계속해서 제기되었다. 특히 2017년 탄핵국면을 계기로 지나치게 강한 대통령의 권한에 대한 전 사회적인 문제제기가 이어지면서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개헌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런 여론 속에서 대통령 개헌안이 제출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정치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선거제도 개편이 이뤄졌다. 『헌법사 산책』의 결론은 현재 한국 사회의 정치개혁 논의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책의 결론이 말하는 핵심은 다음과 같다. 현재 대통령의 권한은 제왕적이라고 말하기에 지나침이 없기 때문에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한편 국회의 권한을 강화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통치 구조를 의원내각제 혹은 분권형 대통령제(프랑스식 이원정부제)로 바꿀 것을 고려해야 한다. 만약 변화가 아니라 대통령제를 고수한다면 최소한 미국의 대통령제가 권력의 분점이 핵심임을 상기하면서 중임제 실시, 국회의원 선거를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의 위상으로 대통령 임기 중간에 실시, 대통령의 방패막이 역할일 뿐인 국무총리제의 폐지가 필요하다.
먼저 책의 결론에서 언급하는 의원내각제 혹은 분권형 대통령제(프랑스식 이원정부제)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제기가 있어왔다. 특히 개헌을 논하는 학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원정부제로의 개헌을 제시한다. 이들의 주장은 대체로 이원정부제 자체가 좋다기보다는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이 최선의 방안이라고 사고하고 있으나 한국은 의원내각제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급작스런 변화가 불러올 혼란을 줄이는 차원에서 이원정부제를 중간과정으로 설정하자는 의미다. 내각제 ‘맛’을 좀 보고난 후에 내각제로 이행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의 경우 현재는 거의 대통령제에 가깝게 운영되지만 분점정부가 구성될 경우 사실상 내각제가 된다. 앞서 언급했듯 두 형태의 절충이라기보다는 교환에 가깝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제도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준비와 높은 수준의 사회적합의도 필요하다. 따라서 그 형태의 유사함만으로 이원정부제로의 개헌을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될 문제는 이원정부제가 대통령제보다 더 큰 갈등상황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에서의 정치적 안정은 앞서 말했듯이 정치적 갈등을 타협으로꺼 해결한 결과다. 그런데 타협으로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어떨까. 당연히 힘과 힘의 대결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상황이 더 자주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 갈등이 원만한 합의로 해결되기보다는 힘으로 상대방을 찍어내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왔던 한국 정치의 역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런 한국 정치지형에서 이원정부제로 개헌한다면 대통령과 총리(의회)의 이원적 정통성이 정면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이럴 경우 둘 간의 권한을 제도적으로 명확히 규정하여 해결하기도 쉽지 않고, 어느 한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기도 곤란하다. 즉 대통령제보다도 더 위험한 갈등상황에 놓일 수 있다. 이런 갈등상황이 국가적 위기로까지 번진 대표적인 사례로 바이마르 공화국을 들 수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벌어진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충돌은 국정운영을 거의 마비시켰고, 전후 심각했던 사회경제적 배경과 맞물려  결국 합헌적 독재자인 히틀러를 배출했다. 사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한국의 2공화국을 비슷하게 분석할 수도 있다. 실제로 민주당 구파였던 윤보선 대통령과 신파였던 장면 총리 간의 권한다툼으로 국정운영의 혼란이 해결되지 못하면서 쿠데타의 빌미를 줬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최근 야당을 적으로 간주하면서 찍어내려는 정부와 여당의 행보를 볼 때, 정치의 파행에 대한 우려가 과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이런 정치상황을 불변의 전제로 두고 개헌을 해봤자 큰 의미를 가지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힘과 힘의 대결에서 제대로 된 정치질서를 창출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는 합의와 타협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역량과 민의를 제대로 대표할 수 있는 대의정치 자체가 성숙될 수 있어야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제도적 개헌에 대해 논한다면 차라리 정치인의 정치적 성장을 정당이라는 제도로써 담보할 수 있는 의원내각제를 고려할 수 있겠다. 내각제가 무리라면 최소한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국회의 권한을 늘리는 미국식 대통령제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민의를 대표하는 국회를 강화하는 방향이 그나마 민주주의를 타락시키는 방향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정치개혁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일단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패스트트랙을 통해서 제1야당을 완전히 무시하고 법안을 통과시킨다든가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국회법보다 하위법을 근거로 국회가 요청한 공소장 제출을 일방적으로 거부하는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국민이 선출한 대의기관을 무시하고 우회하는 정부를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정부라고 평가할 수 없다.
이렇게 국회를 무시하면서 문재인 정부와 집권 여당은 권력 독점, 집권 연장에 몰두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부터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해소해야 한다고 했지만 정작 집권한 이후 정부는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해 개혁할 의지가 크지 않았다. 이는 대통령 개헌안에서도 드러난다.
먼저 대통령 개헌안은 중앙정부의 권한을 분산시키는 지방분권을 대통령 권한분산의 핵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미국의 연방제적 전통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연방제는 주 정부가 모여서 연방을 구성한 것이다. 미국의 경우 불가피한 선택지였다고 할 수 있다. 독립주가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특권을 일정정도 보장해주면서 민족국가로 통합하기 위해 연방이라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개헌안의 논의는 정반대의 방향을 상정한다. 하나의 민족국가가 연방으로 다시 쪼개지는 것이다. 이렇게 쪼개지는 것은 굉장히 큰 문제가 있는데, 미국과 다르게 오히려 우리나라는 중앙정부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격차가 더 커져왔기 때문이다. 기반을 갖추지 못한 지방은 독립성을 키울수록 격차가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러므로 이렇다 할 산업이 없는 도시가 자생적으로 살 수 있는 방안이 없는 가운데 이뤄지는 지방분권 강화는 사실상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책임 방기다. 이를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하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편 국가기관 간 권한분산과 관련해 대통령 개헌안의 내용 중에는 예산법률주의 정도가 눈에 띈다. 이 부분은 국회의 권한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부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외에 권력분산을 목적으로 제시된 항목은 사실상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예를 들어 대통령의 법안제출권을 견제한다는 목적으로 대통령이 법안을 제출할 시 국회의원 10명의 동의 조항을 추가한 것은 법안을 제출하는 데 있어서 그리 어려운 장애물이라 할 수 없다. 사실상 대통령의 법안 제출권을 그대로 두는 것이다. 또 행정부를 감사하는 감사원을 독립시킨다면서 감사위원을 대통령이 추천한다는 것도 모순적이다. 이와 같이 권력분산이 모호한 상황에서 제시된 4년 연임제는 5년의 대통령 임기를 8년으로 늘리는 것 이상의 효과를 바라기 어렵다. 종합적으로 볼 때, 대통령 개헌안은 권력 분산을 최소화하거나 오히려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하겠다는 의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역행하는 개헌안이었지만 그나마 폐기된 후에는 대통령 권력 분산에 실패한 책임을 야당으로 돌리며 대통령제 개헌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는 동시에 선거제 개편에 대해서는 제1야당을 철저히 무시하면서 통과시켰다. 이 역시 우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미국의 헌법학자 뢰벤슈타인은 대통령제와 비례대표제의 만남을 ‘민주주의에 대한 죽음의 키스’라고 평가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수용할 수 있다는 선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강력한 권한의 대통령제와 만났을 때, 정당 난립으로 인해 의회의 대통령 견제기능이 약화하면서 오히려 제왕적 대통령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민주당의 행보를 종합해보면 그들의 지향이 ‘선출된 군주제’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러한 민주당의 ‘비민주성’은 사회운동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회운동이 이런 민주당에 민주주의의 발전, 한국사회의 개혁을 의탁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이런 민주당과 하루빨리 결별하고 한국사회에 대한 사회운동의 독자적인 전망과 대안수립에 대한 발본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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