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0 여름 1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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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틀을 넘어 새로운 관계와 사회를 열자

김유미 | 사회진보연대 조직국장, 페미니즘팀장

여성 해방과 가족

오늘날 여성 문제를 제기하는 익숙한 틀은 ‘차별’과 ‘폭력’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여성혐오’라는 다소 모호한 범주가 추가되어, 여성을 주체적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는 다양한 상황을 포괄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설정은 일반적으로 차별, 폭력,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구체적인 언행을 지적하고 그 행위자를 단죄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에 비하면 ‘가족’이라는 주제는 조금은 따분하고 오래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우리가 가족의 의미가 크게 변화하는 시점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과 출산을 의무로 여기거나 가정 안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의견은 곧바로 구식의 사고로 비판받는다. 동시대 한국의 청년들은 결혼을 통한 가족 구성을 가치관에 따른 선택의 문제, 혹은 낭만적 사랑보다 사회적·경제적 부담과 직결되는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가족이라는 여성해방 운동의 고전적인 주제는 지금까지도 우리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딸에 대한 부모의 걱정과 통제, 통속적인 이성애 연애 각본 속의 성역할, 여성이 결혼과 출산을 고려할 때 느끼는 부담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따지고 보면 여성들이 일터에서 겪는 성적 대상화와 차별, “집에 가서 애나 보라”는 폭언 역시도 가족 안에서 여성에게 기대되는 역할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성차별, 성폭력, 여성혐오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현상의 근원에 있는 인식지반이자 제도로서 가족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글은 가족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읽어볼 만한 페미니즘 고전으로 스테파니 쿤츠의 『진화하는 결혼』(이하 『결혼』), 미셸 바렛과 메리 맥킨토시가 공동 집필한 『반사회적 가족』(이하 『가족』)을 소개한다. 두 저작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가족의 모습, 즉 ‘사랑으로 맺어진 이성 커플과 자녀로 구성된 가족’이 19~20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확립된 특정한 모델이라고 보는 공통의 입장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가족을 해부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서로 다르다. 『결혼』은 역사와 가족학에 대한 저자의 오랜 연구를 집대성한 책으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결혼의 역사를 방대한 자료와 함께 제시한다. 반면 『가족』의 관심사는 근대 가족 모델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분석하는 것이다. 본격적인 학술서의 형태를 띠고 있지는 않지만, 가족이라는 가치가 여성 또는 사회 전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구체적으로 짚고 있다. 따라서 『결혼』과 『가족』을 상호보완적인 텍스트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가족의 역사와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는 일은 무엇보다 가족의 특정한 형태가 ‘자연적’이라는 잘못된 가정을 바로잡는 의미를 지닌다. 『결혼』의 지적처럼, 결혼을 동물의 짝짓기나 번식 같은 생물학적 과정의 연장선으로 보는 시각은 적절하지 않다. 어떤 동물도 암수 한 쌍의 관계에 친척이나 이웃의 입김을 반영시키지 않으며, 결혼 상대를 선정하는 정교한 규칙을 만들지 않는다. 결혼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사회적 발명품이다. 
다른 어떤 영역을 다룰 때보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와 성적인 관계를 인식할 때 자연적 측면과 사회적·도덕적 측면은 혼란스럽게 뒤섞인다. 페미니즘 이론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이 생물학적으로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오래도록 애써 왔다. 가족은 성적 차이라는 생물학적 현실(자연)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조직되어 왔는지(문명)를 살피기에 적합한 주제다. 『가족』의 다음 문장은 이러한 생각을 반영한다. “우리는 임신과 출산, 수유와 자녀 양육이 여성에게 특정한 신체적·정신적 요구를 부과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이것들이 불가피하게 여성의 의존을 초래한다는 전제에는 정당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만일 가족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지향할 것인지는 열린 문제가 된다. 이처럼 미시적인 고발과 처벌의 방식이 아니라 ‘어떤 새로운 관계 또는 사회를 구성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여성해방 운동에서 가족이라는 주제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결혼의 기원


『결혼』에서 쿤츠는 결혼이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생겨났다는 견해와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생겨났다는 견해가 모두 설득력이 없다고 비판한다. 전자의 이론은 20세기 중반 사회생물학자들에 의해, 후자의 이론은 1970년대 이래 여성학자들에 의해 주로 발전되었다. 
E. O. 윌슨과 같은 사회생물학자들은 인류 역사의 여명기에 남성이 사냥을 통해 생계를 담당하고, 여성은 그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독점적인 섹스를 제공하는 형태의 가족이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1950년대의 가족 모델을 과거에 투사한 것으로 이후 여러 연구를 통해 반박되었다. 구석기 시대에 일정 정도의 성별분업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들 역시 사냥이나 채집 활동에 참여해야 했다. 무엇보다 원시 사회에서는 여자와 남자의 일대일 관계보다 수렵·채집을 통해 얻은 자원을 무리 전체가 공평하게 나누는 공동생활의 원리가 더 중요했다. 
여성학자들은 사회생물학자들의 이론을 뒤집어 결혼이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서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결혼은 남자들이 여자들의 뛰어난 농업 생산 능력과 출산 능력을 자기들에게 이롭게 통제하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이다. 결혼을 통해 남성이 거처를 옮기는 사회보다 남성 혈통을 중심으로 여성을 교환하는 사회가 훨씬 더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결혼 제도에 동반되는 남자의 지배권에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사유재산권이 크게 발달하지 않은 대부분의 사회에서 결혼의 구속은 강하지 않아서, 결혼한 여자들이 남편의 곁을 떠나거나 애인과 도망치더라도 보복당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요컨대, 수렵·채집 사회의 결혼이 반드시 여성을 남성에게 예속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쿤츠는 결혼의 의미를 결정적으로 바꾼 계기를 정착 생활과 잉여 생산물의 발달에서 찾는다. 땅과 자원에 대한 친족 집단의 소유와 상속이 중요해지면서, ‘부정한’ 혈통의 아이를 낳지 않도록 여성의 성에 관한 통제 역시 강해졌다. 쟁기의 발명, 전쟁의 빈발 등은 고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떨어뜨리는 또 다른 요인이 되었다. 
 

전통적인 결혼에서 중요한 것


우리는 자주 ‘이성 커플이 사랑으로 결합하여, 남성은 생계를, 여성은 가사와 자녀 양육을 책임지는 결혼’을 전통적인 가족의 모습으로 간주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가족 모델은 18세기 말에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해 19~20세기를 거치며 확립된 것이다. 인류 역사에 비추어 보면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유지된 예외적 모델인 셈이다. 
 
이란의 전통 결혼식 모습이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결혼의 주요한 기능은 경제적, 정치적인 동맹을 확장하는 것이거나 자녀를 출산하고 상속자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결혼과 달리 결혼에서 부부 사이의 사랑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부모님과 친척들의 입김이 중요했다.

약 5000년 동안 이어진 ‘진짜 전통적인 결혼’에서 사랑은 중요한 조건이 아니었다. 『결혼』에 따르면, “사랑이라는 비이성적인 감정이 좌우하기에 결혼은 너무나 중요한 정치적·경제적 거래”였기 때문이다. 이방인을 나의 친척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결혼의 핵심 기능 중 하나였다. 상층 계급의 결혼에서 권력을 확립하고 동맹을 확장하는 정치적 기능이 결정적이었다면 하층 계급의 결혼에서는 ‘노동의 동반자’를 찾는 경제적 기능이 더욱 중요했다. 
결혼의 또 다른 기능은 합법적인 자녀를 출산하고 상속자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규범은 매우 다양했다. 오늘날이라면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상황이 장려되기도 했다. 고대 히브리인을 비롯한 농경사회의 많은 집단이 남편이 죽고 나면 그 아내가 남편 가문의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관습을 갖고 있었다. 티베트와 인도의 일부인 카슈미르, 그리고 네팔에서는 한 여자가 두 명 이상의 형제들과 결혼할 수 있었다. 베네수엘라 바리 족의 여성들은 임신 중에 남편 이외의 남성들과 성관계를 하는 것이 용인된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 남성들은 아이의 보조 아버지로 여겨져 양육에 물질적으로 기여해야 한다. 
현대의 결혼 지침서들은 남편과 아내에게 서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현대 이전의 사회에서 부부간의 친밀한 관계를 높게 평가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유교에서는 부부 관계보다는 부자 관계, 형제 관계에서의 유대감이 훨씬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자들, 그리고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은 부부가 서로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이 잘못된 행위라고 비판했다. 그밖에도 많은 문화권에서 부부가 공개적으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은 불순한 일이었다. 
 

사랑에 의한 결혼의 발명


‘정치적·경제적 이득을 위한 결혼’이라는 주류적인 흐름은 18세기에 들어 혁명적이라 할 만큼 큰 변화를 겪는다. 변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 측면은 계몽주의의 등장이다. 모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계몽주의 사상으로 인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 여성의 권리에 관한 다양한 논쟁이 벌어졌다. 여성도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의 주체라는 주장과 여성은 이성적인 개인이 아니기에 권리에 제한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맞붙은 것이다. 이 논쟁의 결과로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관한 독특한 타협점이 만들어졌다. 남자와 여자의 본성은 완전히 달라 어느 것이 열등하다고 할 수 없으며, 여성들이 지닌 도덕적 가치가 오염되지 않도록 세속적인 경제와 정치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었다. 
두 번째 측면은 임금노동의 확산이다. 자본주의 이전의 가정은 생산의 중심이었다. 성별 분업이 존재하긴 했지만, 아내는 아이를 기르고 식사를 준비하는 동시에 농업이나 가내수공업 등 생산 활동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임금노동과 상업이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면서 가정 안에서 여성의 무임금노동은 경제 활동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화폐경제의 영역으로부터 차단된 주부들은 경제적으로 남편에게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19세기는 여성성과 가정에 대한 찬양이 울려퍼지는 시대였다. 그와 함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행사로서 결혼식의 의미도 강조되었다. 1840년 빅토리아 여왕이 결혼식에서 선보인 순백색 드레스와 바그너의 연주곡을 배경으로 한 입장은 결혼식의 새로운 전통이 되었다.

성별 차이에 관한 새로운 이론과 경제체제의 변화는 남편에게 가정의 경제적 동력, 아내에게 감정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아내와 남편이 노동의 동반자라는 과거의 인식은 부부가 ‘영혼의 짝’이라는 인식으로 대체되었다. 
사랑을 기반으로 결혼해서 아내는 살림을 맡고 남편은 가족을 부양하는 가족은 19세기 중반 서유럽과 북아메리카 전역에서 이상적인 모델로 자리 잡았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내내 여성의 가정적인 성향, 성적인 순수성, 정직성이라는 달콤한 찬사가 울려 퍼졌다. 가정에는 ‘바깥세상의 폭풍’과 대비되는 신성한 피난처로서의 의미가 부여되었으며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가정적 의무가 강조됐다. 
여성, 결혼, 가정에 대한 이상화와 동시에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행사’로서 결혼식의 공적인 의미도 강화되었다. 1840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결혼식에서 순백색의 드레스를 입고 음악에 맞춰 식장에 입장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러한 결혼식은 당시 중산층 여성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유행했을 뿐 아니라 결혼식의 새로운 전통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 빅토리아 시대의 이상적인 가족생활을 누릴 수 있는 건 부르주아 계급에 한정됐다. 도시 노동계급은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주거 생활을 했으며, 여성과 아이들이 가정에 머물기보다 저임금의 임시직 노동에 닥치는 대로 참여하여 생계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부르주아들은 노동계급의 비참한 현실이 ‘성적 문란함’에서 비롯된다며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성을 뽐냈다. 
 

새로운 결혼 모델의 황금기


근대에 탄생한 결혼 모델은 20세기 들어 일정한 변형을 거치면서 노동계급의 가족으로까지 확대된다. 19세기 결혼이 여성을 무성적 존재로 찬양하고 낭만적인 사랑을 강조했다면 20세기의 결혼은 성적인 만족과 동반자적 관계를 특징으로 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성역할과 성적 억압은 겉으로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면에서 많은 문제를 낳았다. 여성의 성적 순수성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은 죄책감, 수치심, 심지어 혐오감으로 이어졌다. 당연히 여성들도 성적인 충동을 느꼈지만, 그것을 억압해야 했으므로 흔히 ‘히스테리’라고 일컬은 유행병이 번졌다. 남녀의 본성이 다르다는 확신은 이성보다 동성에게 친밀감을 느끼도록 해서 여성과 남성 모두 동성 친구와의 신체 접촉이나 강렬한 우정을 나누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이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동성애가 '잘못된 성애'이기 때문이 아니라, 결혼한 이성애 커플 다수가 서로에게 친밀감이나 성적인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측면 때문이다.) 성매매와 포르노 서적의 유통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세기 말이 되자 노동계층과 중산층을 막론하고 도시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들이 늘면서 빅토리아 시대의 결혼 관념은 도전에 직면한다. 상업의 발달로 피임 용품이나 낙태 시술에 접근하기도 쉬워졌다. 1890년대에 유럽 전역에서 인기리에 공연되었던 희곡 『인형의 집』과 같이 억압적인 결혼 생활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등장했으며 여성 참정권 운동은 남자와 여자에게 별도의 영역이 있다는 관념을 위협했다. 
20세기 초에는 세계 각지에서 ‘플래퍼’, ‘모던걸’ 등으로 불린 신세대 여성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여성에게도 성적인 열정이 있음을 긍정했다. 새로운 청년문화는 배우자를 결정하기 전에 여러 상대를 시험해보는 데이트 문화를 만들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흔히 나오는 것처럼, 19세기의 구애 절차는 젊은 남성이 초대를 받아 여성의 집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의 데이트는 부모의 감시를 벗어나 집이 아닌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데이트를 신청하고 돈을 내는 사람이 남자가 되면서 관계의 주도권은 여성의 가족에서 남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성역할 및 성과 관련한 급격한 변화는 삶에서 결혼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기보다 더욱 강화했다. 남녀 간의 전통적 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하지도 않았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의무가 ‘복종’ 대신 ‘성적인 매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대다수 신여성은 독립적인 삶을 꿈꾸기보다 어느 정도 데이트를 즐기다가 성공적인 결혼에 골인하기를 욕망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가족』은 20세기의 성해방이 여성해방이 되지 못했던 현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여자들은 더 이상 정절을 기대받지 않지만, 섹스는 여전히 남자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허용치는 높아졌지만, 게임의 규칙은 기본적으로 같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잠자리를 허락하도록 몰고 간 다음 그녀를 비하한다. 여자들의 주된 관심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남자를 매혹하거나 거절할지 균형을 맞추는 데 있다. (…) 그녀의 성적 성취는 승리가 아닌 패배다.”
18세기에 형성된 새로운 결혼 모델은 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자본주의의 황금기인 1950~60년대에 절정을 맞이했다. 대공황과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유례없는 경제적 호황은 대중에게 행복한 가정생활이라는 낭만적인 꿈을 안겨주었다. 혼인 연령은 낮아지고 혼인율이 급증했다. 1959년에 미국 여성의 절반이 19살 이전에 결혼했으며, 24살까지 70%가 결혼했다. 모든 계층에서 실질임금이 급격히 상승했으며 어느 때보다 많은 가정이 남자 한 사람의 수입으로 그럭저럭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에는 미국 가정의 3분의 2 정도가 자기 집과 자가용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사랑을 기반으로 남자가 생계를 책임지는 핵가족 모델이 완전히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전문가들은 이런 결혼 형태야말로 산업사회의 요구와 맞아떨어진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했으며 그것의 우월성과 영속성에 관한 낙관적 전망을 쏟아냈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새로운 결혼 모델의 황금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을 거치며 가족은 보수주의자들이 ‘가족의 위기’라 명명한 혼란과 격변에 직면했다. 
 

가족 신화의 모순


20세기 중반에 정점에 이른 새로운 가족 모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 가족의 가치, 가족 구성원의 역할에 관한 긍정적 의미부여와 함께 발전해 왔다. 많은 페미니스트가 가족을 ‘여성억압의 일차적 장소’라 비판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사실 대다수 여성은 가족이라는 덫에 무력하게 갇혀 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을 자신의 행복과 기꺼이 동일시했다. 가족은 간단히 해소될 수 없는 강력한 현실의 이데올로기로 존재하는 것이다. 
『가족』은 현대 사회에서 가족에 대한 의미부여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을 다룬다. 모순의 핵심은 책 제목이 던지는 메시지와 같다. 현대 사회는 기본 단위를 가족으로 두고, 가족의 유지와 보호를 정책의 주요 방향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렇게 가족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반사회적’인 결과를 낳는다. 몇 가지 개념을 통해 『가족』의 주장을 살펴보자. 
첫 번째 문제는 가족의 신화화, 특권화다. 19세기 부르주아 가족 모델의 이상에 의해, 가족은 경쟁적인 바깥 사회와 대비되는 평온하고 이타적이며 신성한 장소로 여겨진다. 결혼과 가족생활에 대한 특별한 의미부여는 그것을 너무 자주 실망으로 끝나도록 만든다. 더욱 핵심적인 문제는 애정, 돌봄, 친밀성, 상호의존성과 같은 욕구와 실천이 가족으로 집중된다는 것이다. 가족의 신화화는 이성애적 남녀 결합 외 관계맺음의 가치를 격하하며, 사회 전반을 더욱 삭막하고 배타적인 곳으로 만든다. 또한 사회 구성원들이 내밀한 감정이나 사소한 경험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은 당연한 욕구의 충족을 위해 결혼에 매달리도록 장려한다. 
두 번째 문제는 『가족』이 가장 강조하고 있는 문제로, 사회의 가족화다. 사회의 기본 단위가 생계 담당자 남성과 주 양육자 여성으로 구성된 가족이라는 ‘가정’은 그것이 현실에 얼마나 부합하든지 간에 여성과 남성의 고용 조건, 임금 수준, 조세와 복지 급여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된다. 가족생활의 이미지들은 다양하게 얽힌 사회적 삶의 구조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이를테면 가족 내의 분업과 임금노동에서의 분업이 유사한 형태를 띠는 것을 생각해 보자. 여성들은 집에서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에서도 음식을 만들고, 청소하고, 환자나 어린이들을 돌보고, 남성 고객에게 매력적인 모습을 보이도록 요구받는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은 ‘가정 내에서 무급으로 행해지던’ 것으로 취급되어 낮은 임금이 책정된다. 물론 낮은 임금은 여성이 가족의 생계부양자가 아니라는 가정과도 연동된다. 
그밖에도 다양한 문제가 지적된다. 가족 내 사생활권의 강조는 아내와 자녀 구타 등 가족 안에서의 폭력에 개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가정 안에 유폐되어 고독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는 전업주부의 많은 숫자가 신경성 질환을 호소한다. 또한 가족은 상속 제도를 통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특권과 불이익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요컨대 가족은 계급과 성별의 벽을 뛰어넘는 유대를 만들기보다 그 분할을 재생산하는 제도로서 작동하고 있다. 
 

두 저작의 결론


『가족』은 책의 결론 격인 「4장 변화를 위한 전략」을 통해 사회주의자 또는 페미니스트에게 매우 구체적인 실천 목록을 제안하고 있다. 목록은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새로운 생활방식의 실험과 사회를 변혁하는 정치운동이 그것이다. 
새로운 생활방식을 실험하는 것은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제안했던 ‘생활양식의 정치학’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미셸 바렛과 메리 맥킨토시는 생활양식의 정치학이 종종 자기들의 방식을 유일한 해법이라 강요하거나, 개인의 실천을 통한 변화가 필요한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러한 오류를 피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족의 변화가 나 혼자 힘으로 어렵다면서 기존의 가족 도덕과 결탁하는 ‘패배주의적 입장’ 역시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가족 제도가 맞이한 변화는 역사적으로 유례 없는 것이다. 영화 <매기스플랜>의 매기는 결혼하지 않고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를 낳을 계획을 세운다. 이러한 매기의 선택은 제도적 지원이 결혼 여부와 상관 없이 제공되며, 한부모 가정에 대한 부정적 편견도 거의 사라진 사회에서 결혼, 가족, 출산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이들이 제안하는 일상적 정치투쟁의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안적 가족을 구성하려는 다양한 실험을 장려하는 것이다. 둘째, 결혼과 같은 억압적 관계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가정중심주의를 경계하고 공적 생활을 재활성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은 “완전히 사적인 결정” 같은 것은 없으며, 자신의 결정이 어떤 사회적 영향을 끼치는지 고민하고 토론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다른 한편 가족에 특권을 부여하는 국가정책을 변혁하는 정치운동의 필요성도 강조된다. 저자들은 ‘쟁취할 사항들’이라는 제목 아래 임금, 사회보장, 돌봄, 주거, 가족법, 부모의 권리 등 각 분야에서 필요한 변화를 제안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여성과 청년이 한 가구의 피부양자로 살지 않아도 될 만큼의 임금을 벌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사회보장 급여는 가족성원들이 서로를 부양한다는 전제에 기반해서는 안 된다는 것, 가사·돌봄 노동의 집단적 성격과 공적 보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제안은 전통적으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주장하고 실험해 왔던 내용의 연장선에 놓여 있으며, 지금의 한국 사회를 떠올려보더라도 긴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족』과 달리 『결혼』은 결론 부분에서 결혼의 미래에 관해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한다. 물론 그것은 결혼이 애정과 보살핌을 보장하는 최고의 제도라는 과거의 지위를 되찾을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쿤츠는 그러한 회귀는 절대로 불가능하며, 지금의 현실에 맞게 개인적 기대와 사회적 지원 시스템을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혼이라는 관계가 그 의미를 긍정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진화하는” 제도이자 문화로서 유지될 수는 있다고 전망하는 것이다. 
『결혼』은 사랑과 자기실현에 대한 근대 사회의 새로운 가치관이 결혼을 강조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를 네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남녀 사이에 선천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확신이다. 여성에게 성욕이 없다는 인식이 대표적이다. 둘째, 친척, 이웃, 고용주, 정부 등이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고 규범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에게 벌을 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셋째, 불확실한 피임 방법과 사생아에게 가해지는 차별이다. 넷째, 법적·경제적으로 여성이 남성에게 의존하고, 가정생활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의존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런 장벽들은 페미니즘 운동, 법 제도의 변화, 기술의 발달, 도시화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20세기 후반에 점차 힘을 잃었다. 이와 함께 결혼에 대한 압력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쿤츠의 입장이 갖는 특별한 점은 결혼에 대한 압력이 줄어들수록 결혼 생활의 만족도가 올라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다시금 결혼과 가족의 가치를 강조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입장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그는 결혼 관계가 보다 평등하고 자유로워지는 일과, 결혼 외 관계의 가능성과 행복이 보장되는 일이 동시에 달성 가능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부부에게 가장 효과적인 지원 시스템들(유급 육아휴직, 질 높은 탁아시설, 노동시간 단축 등)은 결혼의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반대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의 자유나 그들을 위한 사회적 지원을 크게 제한하는 조치들은 결혼한 사람들의 삶의 질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독신 가구로서의 삶이 두려워서 결혼을 선택하거나, 이혼 후에 살아갈 길이 막막해서 불행한 결혼을 유지한다면 그 결혼이 만족스럽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결혼』에 따르면 오늘날의 결혼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때에 과거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장점이 있다. 결혼 제도에서 여성과 남성에 대한 불평등한 기준들은 상당 부분 사라졌다. 이제 결혼은 “두 사람의 성인이 누가 누구를 지배한다는 의식 없이 함께 사는 일”이 되었다. 따라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랑, 우정, 존중, 협상, 나아가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1950년대에 심리학자들이 아내들만을 대상으로 같은 충고를 했을 때와 달리, 이제는 남편과 아내 모두가 그렇게 해야 한다.


오늘날 가족의 변화와 미래


결혼을 통한 가족구성과 결혼 바깥의 다양한 생활양식의 양립 가능성에 대해 두 저작은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다. 『가족』이 “가족생활이 주는 이득은 가족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달려 있다”며 결혼을 통한 기존 가족 제도로의 편입을 단호히 거부하라고 주장한다면, 『결혼』은 결혼 관계의 긍정적인 변화와 결혼 제도 바깥에 놓인 다양한 가구의 행복을 보장하는 일이 함께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결혼』의 입장은 결혼 제도를 선택한 사람들도 사회의 변화를 위해 함께 투쟁할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결혼 제도 안에서도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관계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강조 역시 귀기울일 만하다. 
그렇지만 가족과 사회의 미래에 대한 쿤츠의 낙관적 전망에 마냥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무엇보다 근대 가족 모델의 위기는 그 물질적 토대의 위기로 인한 것이라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자본주의 세계 경제는 호황에서 불황으로 전환을 겪었다. 가족임금의 해체, 복지정책의 후퇴는 여성의 경제 활동 참가율을 높였으며, 이혼과 독신 가구가 증가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러한 경향은 지속 및 심화되고 있다. 
북아메리카나 유럽과 비교해 복지제도가 취약한 한국의 경우 위기는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현실에서 가족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메우는 것은 개인의 고통, 특히 여성의 출혈이다. IMF위기 이후 한국의 기혼 여성들은 생계를 위해 저임금·불안정 일자리에 취업하는 동시에 가족 내 가사·돌봄 노동을 전담하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가족을 지탱하던 물질적 조건의 소멸에 따른 연애와 결혼에서의 성역할 요구 변화는 청년세대 내에서 여성과 남성 사이의 갈등 요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결혼이 개인의 선택으로 여겨지고, 결혼과 출산이 분리되는 등 오늘날 가족 제도가 맞이한 변화는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이다. 쿤츠는 이러한 변화가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혼’이라는 이상이 탄생 시점부터 내포하고 있던 불안정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결혼이 더는 자녀 출산과 상속에 관한 공식적인 규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한 것이라고 하면, 그래서 사랑 없는 결혼이 죄악이 된다면 이혼의 권리, 사생아의 권리, 독신의 권리, 동성 결혼의 권리의 제기는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가구 구성에 관한 통계는 급변하는 추세를 바로 보여준다. 대다수 국가에서 만혼, 비혼, 이혼의 증가와 고령화로 인해 1인 가구는 계속 늘고 있다. 한국의 전체 가구 중에서 1인 가구의 비중은 2000년 15.5%에서 2019년 29.8%로 증가했다. 통계청의 예측에 따르면 2047년에는 1인 가구 37.3%, 부부가구 21.5%, 부부+자녀가구 16.3% 등으로 가구 비중의 순서 자체가 급변할 것이다. 『가족』에서 미셸 바렛과 메리 맥킨토시가 말하기를 “가족 폐지는 정통 사회주의가 제시한 것 중 가장 인기 없는 주장”이었다는데, 어느새 우리는 가족 폐지의 목전에 와 있는 것만 같다. 다만 우리 시대 가족이 맞이한 변화는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는 공적 제도가 마련되어 가족이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남성들에게 보장되었던 경제적 이득마저 빼앗겨 가족을 구성하기 어려워지는 ‘하향 평준화’라는 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질서가 위기에 처한 지금 세계를 구성하는 다른 원리를 모색해야 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생산양식 속에서 정립된 가족 모델의 위기를 맞아 새로운 관계에 대해 사고하는 일은 필연적이다. 이런 점에서, 몇 가지 차이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결혼』의 주요한 메시지는 일치하는 부분이 훨씬 많다. 그 핵심은 특정한 가족 모델 구성원에게만 주어지는 경제적·사회적 보상, 정서적 만족감(애정, 안정감, 친밀성, 성애, 부모 되기 등)이 가족 형태와 상관없는 보편적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저작의 논의를 다음 두 가지 과제로 요약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여성의 성과 재생산의 권리가 보장되는 새로운 관계 맺음의 발명이다. 전통적인 결혼에서 성과 재생산은 여성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였다. 여성의 성은 통제의 대상이었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은 가치가 없었다. 근대에 등장한 사랑에 의한 결혼 역시 여성의 역할을 가사 및 돌봄 노동의 전담자로 전제함으로써 남성에 대한 의존을 공고히 했다. 오늘날 가족의 틀을 넘어 여성과 남성의 새로운 사랑과 유대를 사고한다면, 그 핵심은 성과 재생산에 관한 여성의 결정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둘째, 사회와 대립하는 애정과 보호의 배타적 공동체로서 가족에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이타성과 돌봄, 사랑 등의 가치를 사회적 제도로 만드는 일이다. 미셸 바렛과 메리 맥킨토시의 표현을 빌리면 이는 “가족이 조금은 덜 필수적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른바 ‘가족의 위기’를 맞아 가족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기능을 약화하고 사회적 유대와 책임을 높여야 한다는 이야기는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페미니스트가 해온 주장의 연장선에 있다. 더 큰 공동체에 대한 신뢰 속에서 개인의 삶, 개인 간의 관계는 더 풍요롭고 건강하게 발전해 나갈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 몇 가지 개혁 조치로 충분하지 않으며 전체 사회의 변혁 속에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이 오늘날 페미니즘 운동뿐 아니라 변혁운동에 주어진,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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